*본 도서에는 등장인물들의 트라우마를 드러내기 위한 강압적인 행위와 동성애와 관련된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가 박혀 들어올 때마다 그녀의 세상은 몇 번이나 뒤집히길 반복했다. 질척한 소릴 내며 살이 부딪친다.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았으나, 할 수만 있다면 그를 완전히 삼켜 버리고 싶었다.
생경한 둔통과 눈앞을 하얗게 만드는 절정이 밀려든다.
씨근덕거리는 숨소리에 뒤섞인 욕설. 지금, 이 순간만은 그가 누구든 상관없었다.
그저 이 순간을 방해하는 이가 없기를. 짧은 짝사랑의 끝이 부디 허무하지 않기를. 남자가 건넨 동정심을 주워 먹은 몸뚱이가 제발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Prologue
죽을 것 같지만, 죽진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아무 때고 죽을 것 같다고 말하지만, 다들 안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모두 인간의 권역 밖이라는 것을.
미친 듯이 뛰어 몸 안의 산소를 고갈시키면 찾아오는 고양감. 이 느낌은 숨이 차도록 뛰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고르게 공급되던 산소가 점점 줄어들고, 들이켜는 것보다 내뱉는 숨이 많을 때. 시야가 좁아지며 눈앞이 하얗게 질리는 경험을 한다.
그렇게 포기와 지속의 팽팽한 줄다리기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다 보면 어느덧 목적지에 다다르곤 한다. 그럼 미친듯한 희열과 함께 괜한 고민을 했다는 허망함이 찾아오곤 했다.
결국, 다다랐다는 묘한 만족감.
다시는 이렇게 뛰지 않겠다는 다짐도 잠시. 다음번엔 몇 걸음 더 뛰어보길 소망하는 게 바로 마라톤이었다.
전신을 적신 땀, 폭발하는 아드레날린, 탈진 직전의 탈력감까지. 완벽하다.
“하아…, 하아.”
이른 아침, 정제된 볕에 정수리가 뜨거웠다. 다행인 건 바람이 시원하다는 것. 아마도 식어가는 땀 덕분일 터.
채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짚은 채 돌멩이 하나를 직시했다. 그러자 엄지손톱만 한 돌멩이가 두어 개로 마구 흔들린다.
‘이봐, 정 변호사! 나랑 장난해? 이딴 식으로 해놓고 뭐? 합의? 야! 너 남의 돈 갖고 장난질하는 게 취미야? 내가 왜 그딴 새끼랑 합의를 해!’
뺨을 때린 여자의 손길은 매웠다.
평범한 이혼 소송이었다. 남편은 바람을 피웠고 여자는 재산을 빼돌렸다. 피차 서로에게 신뢰는 없었다. 하지만 법원은 남편의 손을 들어주었다.
도덕적 윤리보단 사문서 조작을 더 큰 범죄로 여겼고, 여자는 민·형사상 책임까지 져야 할 상황이 되었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은 도중, 사건을 맡게 된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일은 합의를 도출해 모든 걸 zero로 만드는 일. 법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뭐가 됐든 상관없다던 여자는 합의 권고 판결에 다른 말을 했다.
‘어휴, 변호사한테 돈 쓰는 것만큼 아까운 일은 없다더니! 비용 못 줘! 그러니 너 알아서 해!’
하지만 그건 여자의 어깃장일 뿐이다. 법무법인 해랑은 결국 비용청구에 성공할 테니까.
“제까짓 게 발악해봤자지.”
채우는 앞머릴 시원하게 쓸어넘기며 상체를 들었다.
억울한 사람, 겁먹은 사람, 화가 난 사람, 불리한 사람들이 변호사를 찾는다. 변호사는 마치 슈퍼맨이라도 된 것처럼 그들 앞에 나서줘야 했다. 웃으며 침 뱉는 건 기본, 어떤 독설에도 눈 하나 깜짝 않는 뻔뻔함은 필수다.
땀을 닦으며 얼얼한 뺨을 문지르자 며칠 전 맞은 곳에 다시금 불이 붙는 것만 같다. 그리고 더러워진 기분도 함께 따라붙었다.
등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 몇백 미터를 전력 질주했음에도 금이 간 자존심은 좀처럼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 몰라. 잊어.’
양재천에서 붙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그녀는 고개를 틀었다. 허리에 손을 짚은 그녀의 시선 끝, 멀리 타워팰리스가 보이는 곳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남자가 있었다.
채우는 밝은 빛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남자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곤 그녀를 응시한다. 전화기를 귀에 댄 채, 누군가와 통화하며 내려다보는 남자의 윤곽이 서서히 선명해진다.
그를 떠올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최이겸?”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헛웃음이 터졌다. 제게는 마라톤 같은 존재였던 남자.
마치 전속력으로 달렸을 때처럼 제 목을 서서히 죄어오며 숨을 앗아가고, 머릿속을 희게 만들었던 남자였다.
그라는 걸 확신한 채우는 피가 발끝을 타고 쭉 빠져나가는 서늘함을 느꼈다. 자잘하게 끓어오르는 짜증은 일 년여 만에 나타난 남자를 향한 가벼운 분노일 것이다.
‘최악이네.’
뺨을 맞은 것도 모자라 최이겸을 보게 되다니. 어쩌면 더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안정되던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여전히 그린 듯 아름다운 외모와 검은 머리카락. 빠져들 것처럼 깊은 눈동자와 별개로 재미없을 만큼 표정이 없는 최이겸.
채우는 이겸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생수 한 병을 말끔히 비웠다. 가벼워진 페트병을 구긴 그녀를 감정 없는 눈길로 내려다보던 그가 돌아선다. 이어 기사로 보이는 남자가 그를 에스코트해 차 안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정체되어있던 공기가 다시금 움직이는 기분이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시간이 멈췄던 것 같기도 했다.
남자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눈에 들어온 녹음. 채우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재수 옴 붙은 날인가…?”
***
[나 출근하다가 너 봤어. 미친년처럼 뛰더라? 또 무슨 일이야?]
막 법무법인으로 출근한 채우는 직원들에게 눈인사한 뒤, 유리 벽으로 마감된 자신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출근을 걸어서 했어? 날 어떻게 봐?”
[우연히 멈췄는데, 딱 네가 있었던 거야. 바로 그 앞에서 사고가 났거든. 근데 네가 산책로에서 페트병 구기면서 서 있더라?]
“와, 디테일해. 이복길. 근데 그거 말하려고 전화한 거야?”
복길은 이름 불리는 게 죽기보다 싫다며 투덜거렸다.
수화기 너머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건반을 하나씩 누르는 복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채우는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었다.
“복길아, 나 바빠. 막 출근했어.”
[알았어. 빨리 물어볼게. 있잖아, 나 이번에 학원 리모델링 다시 했잖아.]
“그런데?”
수화기를 귓바퀴와 어깨 사이에 끼운 그녀는 커피머신의 물통을 채우기 위해 직접 탕비실을 찾았다.
[그런데 건물주가 세를 올린대. 나 리모델링 한 거 뻔히 알면서! 그것도 30만 원이나! 가뜩이나 애들 수도 줄었는데, 말이 되니? 계약 4개월 남은 거 알고 거절 못 하게 일부러 이러는 거 같아. 어떻게 해?]
“뭘 어떻게 해. 합의해야지. 합의하세요, 합의.”
[야아, 이게 합의로 될 일이야? 세를 깎아달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그럼 어쩔 건데. 네가 건물주 해야지. 안 그래? 주인은 기간 만료 시점부터 올린다고 했고, 넌 4개월 남은 시점에 리모델링을 했어. 답이 딱 보이지 않아? 괜히 요란 떨지 마. 이건 법대로 해봤자 소송비 버리는 일이야.”
빈 통에 커피 물을 채운 채우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오늘 아침, 평소보다 오래 달린 탓에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다. 아픈 다릴 두드리며 소파에 앉은 그녀는 커피머신을 가동했다.
[너 나랑 친하다고 너무 막 뱉는 거 아니야? 이럴 때 변호사 친구 덕 보지, 언제 보냐? 진짜 답 없어?]
“…대책이나 차선책은 분명 있지. 주인의 월세 인상이 부당하다는 걸 증명하면 돼. 주변 시세라든지, 네 월수입이 줄었다든지 그런 서류로. 근데 그건 한시적이야. 어차피 또 올릴 텐데, 소송하고 나서 얼굴 보고 지낼 수 있겠어? 그러니까 이 언니가 조언하자면… 우리처럼 뒤끝 있는 사회에 사는 이상, 더럽고 치사해도 법을 따라야 한다는 거지. 안 그래?”
[아악! 미치겠네…. 도움도 안 되는 친구년 같으니.]
“어쩌겠니. 변호사는 신이 아니란다.”
[하아, 알겠어. 근데 넌 무슨 일인데 그렇게 뛰었어? 말 안 해줄 거야?]
“뭐 항상 있는 일이야. 의뢰인이랑 끝이 안 좋았거든. 자세한 건 만나서.”
[오케이. 언제 올래?]
“시간 될 때.”
[에라이!]
“끊어. 업무 시작해야 해.”
채우는 키득키득 웃으며 복길이와의 전화통화를 마쳤다.
요즘은 유난히 자영업자들에게 잔인한 시기였다. 그래서인지 부동산 관련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 조언을 얻으려고만 할 뿐, 의뢰를 해오진 않았다.
채우는 키폰을 들었다.
“오늘 스케줄 보내드릴 테니, 문제 되는 거 확인 좀 해주세요.”
채우는 비서에게 자신의 스케줄을 넘겼다.
나이 서른하나. 아직 새파란 새끼 변호사이지만, 경력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거기다 대기업 법무실 출신 변호사.
대기업인 창하에 당당히 사표를 제출한 뒤, 테헤란로에 입성한 그녀는 신기하게도 운이 따르는 케이스였다. 처음부터 쟁쟁한 사건 변호를 맡아 승리로 이끌더니, 지금은 미래가 기대되는 변호사라는 소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잘났다 한들, 날고 기는 법무법인 해랑 안에선 평범한 변호사일 뿐.
[고양지원 들렀다가 서초로 넘어갈 수 있으시겠어요? 제가 운전할까요?]
“음…. 아뇨. 혼자 갈게요. 서초에서 바로 퇴근하는 거로 하고요.”
[네, 그럼 그렇게 적어놓겠습니다.]
채우는 키폰을 내려놓았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아침에 본 최이겸의 환영(?) 같은 건 빨리 잊을수록 하루가 편안할 터였다.
누군들 자신을 사직서의 길로 인도한 남자와 마주치고 싶겠는가. 과거, 고작해야 하룻밤의 실수로 제 손에 닿지 않을 존재처럼 눈으로만 쫓던 그와 살을 비볐고 입술을 맞대었으며 더한 짓거리를 했다.
딱 한 번이었다. 열등감과 치기, 기막힌 반항심에 무너져 어둠인 걸 알면서도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그저 섹스를 했을 뿐, 사랑을 하진 않았다.
제가 자초한 일이지만, 당시엔 최이겸이 원망스러웠다.
법원 사이트를 죽일 듯 노려보던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온 존재도 의식하지 못한 채였다.
비장한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하는 채우의 눈앞으로 커다란 손이 훅 나타났다.
“이봐, 정채우.”
흠칫 놀란 그녀가 의자를 뒤로 물리며 고개를 들자,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경일이 실소했다.
“사무장님.”
“뭐 하는데 노크를 해도 몰라?”
“죄송해요. 생각할 게 있어서…. 근데 무슨 일이세요?”
경일이 희끗한 머릴 긁적이며 유리문 밖을 가리킨다. 그러곤 꽤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손님. 정 변이 좀 맡아줬으면 하는데.”
“사무장님 지인이세요?”
채우는 황급히 매무새를 바로 한 후 펜과 다이어리를 챙겼다.
“내 지인이 아니라, 오히려 정 변 지인 아닌가? 어쨌든 가봐.”
“누군데 그러세요?”
“창하 그룹 총괄전무.”
경일을 따라나선 그녀의 걸음이 멎는다. 채우는 제 귀를 의심했다.
“누구요?”
“알면서 묻는다. 창하 그룹 총괄전무 최이겸.”
그녀는 무언가가 가슴안에서 쑥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타르가 엉긴 것처럼 차마 발이 떼어지지 않는다.
동그란 안경을 고쳐 쓴 경일이 문을 열더니 빨리 나오라며 재촉했다.
이럴 줄 알았지. 아침에 나타난 게 그저 그런 환영이 아닐 줄 알았다.
채우는 이마를 짚었다. 언젠가는 닥칠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방향으로든 한 번쯤은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하지만 의뢰인과 변호인으론 아니었는데.
“창하 법무팀이 얼마나 빵빵한데, 왜 여길….”
“개인적인 일인 거지. 숨기고 싶거나. 어쨌든 미팅룸으로 가봐.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
“…네.”
잘해보라는 듯 눈을 찡긋한 경일이 들뜬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지른다. 채우는 경일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익숙해진 긴 복도가 이렇게 짧다고 느껴진 적은 입사 이후 처음이었다.
채우는 미팅룸에 작게 난 창문 너머로 최이겸을 보았다. 오전에 본 차림 그대로 라운지 체어에 앉아있는 모습이 여전히 흠잡을 곳 없이 근사하다.
흠잡을 곳이 없어?
아니.
채우는 굳어가는 얼굴에 억지웃음을 지었다. 흠잡을 곳이 없는 게 아니라, 흠잡는 사람이 없었던 것뿐.
저를 찾아와놓고도 태연한 남자의 앞에서 긴장한 티를 낼 필요는 없었다. 때마침 차 두 잔을 가져온 비서에게 쟁반을 건네받은 채우는 숨을 고른 뒤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마치 모르는 사이인 양 인사한 그녀가 차가운 녹차를 그의 앞에 놓아주곤 마주 앉았다. 협회에서 보내오는 정기간행물을 덮은 이겸의 고개가 들린다.
“예. 안녕하십니까.”
까만 눈동자에 동요는 없었다. 저를 보고 조금도 놀라지 않은 눈치. 역시 알고 찾아왔구나.
최이겸은 여상한 표정으로 녹차를 한 모금 마시며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알은체를 해야 할까? 모른 체하는 게 더 우스울지도 모른다. 그와는 연애하지도, 애타게 사랑한 적도 없었고 인생 최고의 밤을 보낸 것도 아니었다. 단순한 섹스.
섹스에 사치스러운 수식어는 필요 없다. 사랑이든, 사랑이 아니든. 섹스는 그저 섹스일 뿐이니까.
태도를 결정한 그녀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미소지었다.
“건강해 보이시네요.”
“그쪽도.”
“승진하셨다던데. 전무님으로. 축하드립니다.”
고개를 주억인 이겸이 찻잔을 내려놓고는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부드러움 속 특유의 고압적인 어투는 숨겨지지 않았다.
채우는 자연스럽게 이겸의 시선을 피하며 가져온 다이어리를 폈다.
“그럼, 무슨 일로 오셨어요? 사무장님께 대충 들었습니다. 사적인 일이신 것 같다고.”
“오늘 아침….”
능숙하게 말끝을 흐린 그가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린다. 그에 채우의 고개가 들렸다.
“사고가 있었습니다. 저속에서 일어난 가벼운 교통사고인데, 진입하던 저희 잘못이었죠.”
“네.”
“문제는 하필 내 기사가 음주 상태였다는 겁니다. 물론, 술을 마셨다기보단…. 새벽까지 술을 마신 상태였고, 한숨 자고 나면 괜찮을 줄 알았다고 하네요. 상대가 그걸 알고 협박을 하더군요. 물론, 저를.”
채우는 헛웃음이 나올뻔해 참았다. 충분히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었던 일이다. 변호사를 찾는 수고조차 과한.
펜을 내려놓은 그녀는 테이블 위에 양손을 가지런히 올린 채 이겸과 시선을 맞췄다.
“경찰에 신고는 하셨어요?”
“아뇨.”
“교통사고는 조사계와 보험사에서 움직이는 게 가장 깔끔할 텐데요.”
“그럴 거면 내가… 변호사를 찾아오진 않았겠죠.”
테이블을 두드리던 그의 손끝이 멎는다. 불쾌함이 고스란히 드러난 최이겸의 눈빛에 채우는 괜히 발끝을 오므렸다.
“죄송합니다. 그럼 원하는 방향을 말씀해주세요. 상대를 협박죄로 고소하셔도 되고, 기사에게 책임을 물어도 됩니다. 물론, 판결은 합의 권고가 나올 테지만. 선택은 고소인께서 하시는 거니까요.”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답이 나오는 상황. 채우는 이해할 수 없었다. 최이겸처럼 똑똑한 남자가 고작 이런 일로 변호사를 찾을 리 만무하다. 그 자리에서 수표 몇 장을 쥐여준 뒤, 깨끗하게 끝내고도 남을 사람이었으니까.
둘만 있는 미팅룸은 꽤 큰 규모였다. 답답함을 없애기 위해 한쪽 면 전체를 창으로 활용하였고, 스무 명이 앉아도 될 만큼 긴 테이블이 있었다.
사무장 경일은 마음의 답답함을 털어내기 위해 변호사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밀폐된 공간을 제공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 경일의 말대로 채우는 단 한 번도 이곳이 작거나, 좁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오늘, 지금을 제외하고는.
길어지는 침묵. 생각에 잠긴 채우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던 그가 말문을 연다.
“상대가 깔끔하게 물러나길 바랍니다. 음주운전 한 기사는 법대로 처벌할 예정이고요. 변호사님은 합의, 받아오세요.”
어렵지 않은 제안이다. 그녀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서류를 꾸려 다시 연락드리죠. 그땐 비서분을 통해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단순 사고에 굳이 움직이실 필요는 없으시니까.”
다이어리를 닫은 채우는 펜을 꽂은 뒤, 먼저 일어났다. 그러자 따라 일어난 그가 벌어져 있던 재킷 단추를 채운다. 커다란 손이 움직이는 모습에 그녀는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으나 움직임 하나하나가 신경 쓰였다. 모든 화의 근원이자 제 인생을 망쳐버린 장본인. 물론 그는 잘못한 게 없었지만, 정말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지만…. 원망하는 마음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평생의 앙금으로 남을지도 모르지.
“정 변호사님.”
그가 먼저 나갈 수 있게 길을 내려던 채우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틀었다.
“네.”
“잊은 거 없습니까?”
“네?”
인상을 찌푸린 이겸이 그녀에게 닿을 듯 다가왔다. 그러곤 긴장으로 꼿꼿하게 서 있는 그녀의 다이어리에 손을 댔다. 위로 빼꼼히 나와 있는 명함을 툭 뽑아 들고 앞뒤로 훑는 최이겸.
그의 체향에 누군가 입과 코를 틀어막은 것처럼 숨이 꽉 막혔다.
채우의 시선은 흐트러짐 없는 그의 넥타이 매듭에 닿아있었다. 움직이고 싶지만 움직여지지 않아서 뻔한 침묵을 택했다.
“연락처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네.”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최이겸은 담담히 문을 열고 나갔다.
빌어먹을.
채우는 문이 닫힐 때까지 자리에 서 있었다. 이젠 완전히 지워버렸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전신을 휘감았다.
서서히 벽에 기대어 이마를 짚은 그녀의 손이 떨린다. 단순한 섹스를 했다고 말했지만, 아니다. 정정한다.
사랑을 하긴 했다. 저 혼자, 요란하고 질척하게.
Chapter 01. 그해 여름
1년 전.
사람들은 최이겸에 대해 떠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떠들기를 즐겼다. 어찌나 전문가 수준으로 지껄여대던지, 얼굴을 보지 않아도. 함께 일해보지 않아도 최이겸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열일곱, 버클리 음대에 입학해 스물에 졸업한 천재. 박사학위를 준비하며 각종 콩쿠르에 나가 상을 휩쓴 건 기본이고, 저명한 학회마저 그를 초대하려 애썼다고 한다. 그의 얼굴이 박힌 신보는 당시 파격적인 판매고를 기록했고, 피아니스트 최이겸을 모르면 음악인이 아니란 소리를 들었다고.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제 전문 분야가 아닌지라 딱히 신경 쓰인다거나 알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잘난 남자가 제가 몸담은 창하 그룹 회장의 둘째 아들이며, 군대에서의 사고로 인해 피아노를 그만두고 회사에 입사했다는 정도까지가 그녀가 귀에 담은 전부였다.
그러니까… 갑작스럽게 꾸려진 상장 관련 TF에 그녀가 차출되지 않았다면. 예견치 못한 사고로 팀장 대신 상무에게 인사를 가지 않았다면. 그날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정 대리, 실수하지 말고 잘해. 인사만 드리는 거야. 아마 질문은 안 하시겠지. 임원이 직접 나서는 거 봤어? 이번에도 명목만 갖춘 TF일 테니까 얼굴도장 찍고 나머지는 기전실 박 부장한테 맡겨. 알았니?]
“네. 근데 괜찮으신 거예요?”
[다리가 부러진 거 같은데…. 일단 119 불렀어. 못 갈 거 같아서 전화한 거야. 내 걱정은 하지 마. 죽기야 하겠어?]
출근하기 위해 지하 주차장을 나오던 도중 SUV와 정면으로 부딪쳤다고 했다. 차에 깔려 다리가 부러진 와중에도 제게 전화해서 신신당부하던 팀장을 떠올리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채우는 팀장의 자리로 가 서류 몇 장을 챙겼다.
그렇게 사고로 인해 출근하지 못한 팀장을 대신해 임원실이 밀집된 27층에 올랐다. 같은 건물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구조. 어렵게 찾은 상무실 앞에서, 채우는 박 부장을 기다렸다.
그녀를 맞은 최이겸의 비서는 팀장의 사고 소식에 쓴웃음 지었다. 그러곤 사무적으로 ‘여름인데…. 고생하시겠어요.’라고 말했다.
말마따나 불볕더위가 이어지던 나날이었다. 지독하게 더워서 좋아하는 마라톤에도 참가하지 못하는.
약간의 스트레스가 쌓인 상황, 의도치 않은 긴장감이 속을 불편하게 했다.
“정 대리가 왔네? 잘해봅시다. 정 대리는 상무님 처음인가?”
이어 도착한 박 부장이 땀을 닦으며 싱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부장님. 네, 처음이에요.”
“그래?”
박 부장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비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문을 연 비서가 두 사람의 방문을 알렸다.
그들은 문을 열자마자 훅 끼친 향기에 잠시 멈칫했다. 진하게 풍기는 건 백합 향. 그리고 예상한 대로 거대한 꽃바구니 앞에 서 있던 최이겸이 두 사람을 맞았다.
처음엔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누가 죽었나?’
채우는 장례식장에 보낼 근조화 바구니라는 걸 눈치채곤 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겼다.
“안녕하십니까.”
부장을 따라 인사한 그녀는 볕이 잘 드는 자리에 섰다. 에어컨이 뱉어내는 차가운 바람과 뜨거운 볕이라니. 이상했다.
“서 팀장님이 사고가 나셨다고요.”
멍하니 딴생각에 잠겨있던 채우는 저를 향한 질문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던 최이겸을 처음 본 순간이었다.
그에게 제가 어떤 모습으로 보였을지 몰라도, 채우는 첫눈에 반한다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아름다운 남자.
성격이 어떻든, 어떤 직위를 가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불편하리만치 심장이 뛰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것. 그래서 혹여라도 멍청해 보일까, 실수는 하지 않을까. 지나치게 걱정했다는 점이었다.
“다리가 부러지신 것 같다고 합니다. 119를 불렀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군요.”
그는 끝까지 그녀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그리고 채우는 처음으로 타인의 얼굴을 오래도록 관찰했다. 검은 머리카락,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동자와 근사한 외형을 가진 그를.
피아니스트 시절, 신보 커버에 열광했던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브리핑 시작하죠.”
아주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처음 본 순간부터 그와 맞닿고 싶었고, 말을 섞고 싶었으며, 가까워지길 바랐다.
프로젝트 내내 열병을 앓듯 그를 앓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 최이겸과는 업무적인 어떠한 상황에서도 마주치지 못했다. 아쉽지만, 그것은 예견된 현실이었고 현재였다. 그와의 거리는 마라톤 42.195km와도 맞먹는다.
그녀로선 엄두도 내지 못할 현실적 거리였다.
그렇게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의 끝. 어느덧 장마가 시작되었고 하늘은 종종 어두워졌으며 예고 없이 비가 내렸다.
이제 더는 최이겸의 생각을 하지 않았고, 이름을 들어도 가슴이 떨리지 않을 즈음이었다.
“오!”
최이겸이 갖게 될 계열사들의 지분확보에 성공한 법무팀은 위에서 내려온 회식제안에 열광했다.
“소고기랍니다!”
“그럼 무조건이지.”
“비가 너무 오는데….”
“그래도 소고기잖아요.”
비는 무서우리만큼 쏟아졌지만, 특등급 한우에 도취한 배고픈 사회인들의 기세를 꺾지 못했다. 하지만 채우는 흥이 오르지 않았다. 생리가 시작된 데다가 비까지 내리기 시작해 사실 좀 귀찮았다.
“저는 빠질래요.”
“안 돼. 정 대리 데려오라고 하셨어.”
퇴원한 지 나흘.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다가온 서 팀장의 말에 채우는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누가요?”
“상무님이.”
“…네?”
“상무님이 정 대리도 참석하냐고 물으셨다고. 그게 무슨 뜻이겠어. 데려오란 거지. 빠꾸는 없다. 알지? 자기가 제일 열심히 일한 거, 상무님이 알고 계시는 거야. 그러니까 보답은 확실하게 받아.”
소 한 마리에선 과연 몇 종류의 고기가 나오는 걸까.
채우는 나무 도마 위에 오른 갖은 부위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대체 입에 들어가면 다 같은 고기에 왜 이렇게 다양한 이름을 붙여놓는 건지.
회식 장소는 회사 근처에 있는 고급 구이집.
점심 특선을 먹기 위해 몇 번 들르긴 했지만, 엄청난 가격이라 저녁 시간엔 발길을 돌려야 했던. 큰맘 먹고 들어오지 않고는 본전 생각에 잠 못 이루는 그런 곳이었다.
굽는 족족 사라지는 고기들을 보며 식욕을 잃은 채우는 소주잔만 기울였다.
“근데 상무님은?”
고기를 다섯 점이나 입안에 밀어 넣은 김영훈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모르지. 무슨 일이라도 생기셨나? 그래도 비서가 와서 주문한 거 보면 금방 오시지 않겠어?”
“와, 난 비서실 직원들이 제일 불쌍하더라. 임원 책가방 소리 듣는 거 보통 아닐 텐데.”
“우린 쉽나? 위에서 싸지르고 처리하는 건 다 우리가 하잖아. 그나마 지금은 나은 거지. 예전에 최이서 전무 있을 때. 기억 안 나? 도박에 횡령, 술집 종업원 폭행에 마약까지. 비서들이 뒤치다꺼리하다가 죄다 사표 내고 딱 한 명 남았었는데, 그게 김 실장님이야.”
채우는 강 과장이 턱짓하는 곳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곳에 있는 건 지난번 상무실 앞에서 보았던 비서였다.
꼿꼿한 자세로 앉아 피곤한 표정으로 고기를 집어 먹는 모습이 이런 상황에 익숙해 보인다. 김 실장은 식사 중에도 휴대 전화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정 대리, 좀 먹어. 왜 이렇게 안 먹어? 다이어트 해?”
강 과장이 채우의 접시에 고기 한 점을 올려주며 물었다.
“그냥 컨디션이 별로라서요.”
“일찍 들어가 봐. 창백해.”
“상무님 오시는 것만 보고요.”
“사회생활 참 힘들다. 그렇지?”
“네, 맞아요.”
채우는 생긋 웃으며 접시에 놓인 고기를 집었다. 그때였다. 벌떡 일어난 김 실장이 출구 방향으로 향한다. 그에 다들 고개를 돌렸다.
이어 식당 안으로 들어온 최이겸. 재킷을 팔에 걸친 그가 흠뻑 젖은 머릴 턴다. 김 실장은 기다렸다는 듯 주인에게 받은 타월을 건넸다.
그사이 직원들이 일어나 최이겸을 맞이했다. 채우도 그중 하나였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다들 식사 마저 하시죠.”
이겸은 머리만 젖은 게 아니었다. 마치 빗속을 뛴 사람처럼 질 좋은 슈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모두 궁금한 눈치였으나 물어볼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살짝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이어진 식사.
그는 예상대로 팀장급 사람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 식사했다. 채우는 별생각 없이 그를 관찰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술을 받는 남자의 옆얼굴과 목선, 젖은 셔츠 등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응시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그의 손에 시선이 갔다. 피아노를 쳤다더니…. 그의 손은 남들보다 크지만, 마디가 부드럽고 잘 뻗은 모양이다.
관상용 인간. 혼자만 아는 별명을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났다. 싱거운 표정으로 다시 남자의 얼굴을 볼 때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최이겸과 눈이 마주쳤다.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그녀와 같은 속도로 술잔을 기울이는 그. 채우는 마치 속을 들킨 사람처럼 얼굴을 붉혔다.
“저 그만 일어날게요.”
“카운터에 가서 택시 불러 달라고 해.”
“제가 부르면 돼요.”
최이겸의 시선을 피해 가방을 챙겨 일어난 그녀는 화장실에 들어가 택시를 불렀다. 어두컴컴한 화장실 불빛 아래 서서 제 얼굴을 보자 한숨이 새어 나왔다.
“꼴 하고는….”
고작해야 눈이 마주친 것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동요하는 건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럴싸한 답을 얻진 못했다.
그저 잘생겨서?
시선이 가는 외모이기 때문에?
천재 소릴 들으며 피아노를 치던 남자가 어떤 이유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나 싶어서?
차가운 물로 손을 닦은 그녀는 립스틱을 고쳐 바른 뒤 화장실에서 나왔다. 멀찍이 시끌벅적한 회식 자리가 보인다. 술과 흥이 오른 그곳에 제 자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눅눅한 연기에 몸담고 싶지 않아 가게 밖 처마 아래 서자, 탁 트인 바람에 제대로 된 숨이 쉬어졌다.
이런 날은 달려야 하는데.
비를 맞으며 달리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대로 걸어서 집에 가버릴까?
술기운 때문인지 괜한 오기가 생겼다. 하지만 검은 비가 쏟아지는 듯한 하늘을 올려다보자, 이내 현실감이 밀려들었다.
손을 뻗어 떨어지는 빗물을 받아내던 그녀의 코에 짙은 백합 향이 끼쳤다.
“가는 겁니까.”
누구도 저를 보지 못했을 거라 믿었던 채우는 너무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담배를 문 채 나타난 사람은 최이겸.
불을 붙인 그가 토끼처럼 커다래진 그녀의 눈을 보다 피식 웃는다.
“재밌네.”
“네?”
“항상 그렇게 사람을 관찰합니까?”
누군가에게 훅 떠밀린 것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역시 눈치채고 있던 걸까? 하긴, 그렇게 집요하게 쳐다보았으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항상은 아니고, 상무님이 워낙 멋지셔서 좀 쳐다본 겁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알코올은 사람을 뻔뻔하게 만든다. 채우는 저를 보는 그의 눈빛에서 술기운을 읽었다. 급하게 마시더니….
그도 꽤 취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택시 기사의 연락을 기다릴 때였다.
“정채우 씨.”
툭 떨어트린 담뱃불이 물에 젖어 꺼진다.
“네?”
“나랑 섹스할래요?”
마치 차를 한잔 권하듯 가볍고 산뜻한 어투. 말을 마친 그가 주머니에 손을 끼워 넣은 채 그녀와 마주 선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예리한 무언가가 피부를 긁어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동요로 굳어버린 그녀와 달리 그는 태연했다.
“…시험하시는 겁니까? 제가 얼마나 발랑 까졌는지.”
“발랑 까진 건 나겠죠.”
그제야 최이겸의 눈에 이채가 돈다. 이어 두 대의 차량이 그들의 앞에 멈춰 섰다. 이겸은 그녀를 응시하던 시선을 거둔 채 차 문을 열었다.
수행 기사로 보이는 사람이 내려 다소 당황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본다.
“그럴 생각 있으면 타요.”
본인의 매력을 아는 남자는 위험하다. 지나치게 여유로운 태도에 기분이 나빠질 지경.
채우는 애써 미소 지으며 택시 앞으로 걸어갔다. 거절의 의미를 읽은 최이겸이 고개를 몇 번 주억이며 차에 올랐다.
와중에도 침착한 그의 표정.
“상무님.”
채우는 막 문을 닫으려는 그를 불렀다. 시트에 몸을 묻은 채 올려다보는 시선엔 조금의 불쾌함도 묻어있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섹스보다 더한 짓도 하고 싶지만, 오늘은 컨디션이 최악이라서요. 다음엔 타이밍 잘 잡아서 제안해주세요. 그럼 그땐 좀 더 신중하게 고려해볼 테니.”
섹스보다 더한 짓은 과연 뭘까.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기에 제가 무슨 소릴 지껄이는지도 몰랐다. 그저 자존심을 챙기고 싶었던 것 같다. 그가 황당해하기를. 견고한 자존심이 상처 입기를 바랐을지도. 아니면 알량한 친절, 혹은 진심을 바랐던가? 고작 얼굴 두 번 본 사이에?
우습기도 우스웠지만, 꼴 같지 않아 창피했다. 그리고 최이겸은 이번에도 그녀의 예상에서 벗어난 대답을 했다.
“그래요. 회사에서 봅시다.”
그렇게 말하곤 미련 없이 문을 닫는 그. 곧장 출발한 차는 이내 8차선 도로로 사라졌다.
채우는 되레 어처구니없는 마음에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불쾌한데 심장은 왜 이렇게 뛰는 것이며, 대체 왜 확실히 거절하지 못한 건지.
“어이, 아가씨. 안타요?”
택시 기사의 재촉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죄송하다고 말하며 차에 올랐다.
목적지를 말하고 시트에 몸을 묻는데, 순간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정채우 씨.’
그가 제 이름을 불렀다. 제게는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던 이름을.
사소한 것 하나에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가슴이 술렁인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마라톤을 시작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얼굴을 감쌌다.
***
그날 이후, 상무와는 일주일을 마주치지 못했다. 조금은 기대했던 것도 같다. 같은 건물에 몸담고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하는 처지이니 우연히라도 마주치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
하지만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최이겸과의 접점은 쉽게 생기는 게 아니었다. 폭우가 내리던 그날의 일은 마치 혼자만의 환상처럼 느껴졌다.
똑 부러지는 정채우가 최이겸만 떠올리면 미련한 바보가 된다. 그에 대해 아는 것 하나도 없으면서, 정말 얼굴에 반해버리기라도 한 건지.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 채 직원용 승강기에 오른 채우는 아는 몇몇과 눈인사를 나눈 뒤, 구석으로 들어가 벽에 기댔다.
콩나물시루 같은 승강기. 서서히 문이 닫히는가 싶더니, 누군가에 의해 다시 열렸다. 문을 연 사람을 발견한 몇몇이 헛바람을 들이켜며 꽤나 당황한 듯 한 걸음씩 물러났다.
“타도되겠습니까?”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상무였다. 사람들은 멋쩍은 표정으로 최이겸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한 그가 승강기에 오른다. 기사도, 비서도 없이 혼자 출근한 최이겸. 부탁도 하지 않았건만 누군가가 27층을 대신 눌렀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승강기 안에 팽배해진 긴장감. 채우는 이겸의 뒤에 서서 슬쩍 입가를 가렸다. 여전히 근사한 슈트와 변치 않은 향. 그에게서 나는 향기가 모 브랜드의 향수라는 걸 알게 된 후, 같은 향을 살까 고민했던 제 모습이 떠올랐다.
결국, 고가의 향수를 집어 들긴 했지만, 뿌릴 용기는 없었다. 역시 짝사랑 같은 건 체질에 맞지 않는 걸까? 최이겸을 향한 감정이 저 자신을 불편하게 만든다고 생각할 즈음,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반쯤 틀어 저를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차고 시리다.
채우는 그제야 꾸벅 인사했다. 그러자 눈만 깜빡인 그가 다시 정면을 보았다. 빠르게 올라가는 승강기. 최이겸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날 수 있음에 감사하던 때였다.
“정채우 씨.”
숨 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승강기 안. 사람들의 시선이 최이겸에게 향하더니, 이어 그녀를 향해 쏠린다.
당황한 채우는 헛기침 하며 대답했다.
“네.”
“16층에서 내리세요.”
그녀가 되묻는 일은 없었다. 눈동자만 굴려 상황 파악 중인 사람들 틈으로 우연히 서로의 손등이 닿았다. 움직일 때마다 떼어졌다 닿기를 이어나가다 16층에 다다를 때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이윽고 다다른 16층. 사람들이 길을 내고, 그가 돌아본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서 있었지만, 실은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내려요.”
건너편 모 의류회사의 건물 외벽을 응시하며 서 있는 그녀에게 이겸이 담배를 권하였다. 불어온 바람에 머리카락을 쓸어넘긴 채우는 담담히 거절했다.
“비흡연자입니다.”
그 말에 잠시나마 이겸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번진다. 제가 담배를 피울 거라 확신했던 눈치였다.
“미안합니다. 흡연자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여기로 온 거고.”
“괜찮습니다.”
“더우면 들어갈까요?”
“아뇨, 여기서 얘기하세요. 바람 좋은데요? 에어컨 바람엔 좀 질려서.”
“…그때도 느낀 거지만, 할 말을 다하는 성격인가?”
“뭐, 아니라곤 못 하겠습니다.”
16층, 외부 테라스가 마련된 이곳은 직원들의 흡연구역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도 흡연구역이라 정해준 적 없지만, 건물이 세워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직원들은 식사 후 이곳을 찾았고 가슴이 답답할 땐 난간 끝에 섰다.
유일하게 허락된 그들의 실외쉼터. 상무와 나란히 선 채우는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내심 그가 며칠 전 일을 사과한다든지, 그 일에 관해 질문할 거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최이겸은 그녀가 비흡연자란 말에 담뱃불을 붙이지 않았다. 섹스하자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땐 언제고, 이제야 매너 좋은 신사의 가면을 쓰다니. 너무 안 어울리는 태도전환 아닌가?
“저 신경 쓰지 마시고 담배 태우세요.”
“아뇨. 제가 착각한 겁니다. 정채우 씨가 흡연자인 줄 알았거든요.”
채우는 피식 웃었다.
“제가 많은 걸 오해하게 했나 봐요.”
이런저런 것 여러 가지를.
가시가 잔뜩 돋친 말에 그녀의 얼굴을 빤히 보던 최이겸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정채우 씨를 비서실로 부르려 하는데. 혹, 생각 있습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기에 채우는 놀란 표정으로 최이겸을 돌아보았다.
“저를 비서실로요?”
“예.”
“왜….”
말끝을 흐린 그녀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비서실로 들어간다는 건 승진의 탄탄대로가 펼쳐진단 의미겠지만, 그녀가 바라던 미래는 아니었다. 더구나 이토록 갑작스러운 인사이동이라니.
어울리지 않게 표정을 살핀 그가 입을 열었다.
“왜냐하면… 정채우 씨의 일 처리가 마음에 듭니다. 강요는 안 하겠습니다. 특별팀 해체 즈음부터 고민하다가 지금에서야 묻는 거니까. 신중하게 고민한 결과라고 해두죠.”
거절도, 승낙도 쉬이 할 수 없는 제안. 채우는 확답 대신 생각해 보겠다는 말을 전했다.
더 이상의 질의는 없을 거라 판단한 그녀는 꾸벅 인사한 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상무가 어떤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딱 하나 알 수 있던 건 승강기 문이 열림과 동시에 손끝이 떨렸다는 것.
최이겸이 없음에도 마치 손등이 닿아있는 양 가슴속 어딘가가 무겁게 죄어드는 기분을 느꼈다.
인사발령이고 뭐고, 한 번 더 권했다면 분명 그 담배를 입에 댔을 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담배를.
빌어먹게도.
***
그녀는 최이겸의 말을 곱씹으며 법무실로 돌아왔다.
[음…. 그 남자 위험해.]
상표권 분쟁 중인 계열사에서 보내온 협조공문을 살피던 채우가 진지한 복길의 말투에 피식 웃으며 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뭐가.”
[이번에 주인이 바뀌었거든. 건물주. 인사한답시고 찾아왔더라?]
“그래?”
[근데 있지. 나… 기절하는 줄 알았어.]
“왜?”
[잘생겼거든.]
“…뭐?”
[잘생겼다고. 내가 지금까지 본 생명체를 통틀어 제일 잘생겼어!]
복길은 흥분한 목소리로 건물 주인에 대해 떠들었다. 자신도 피아노를 배웠다며 흥미롭게 내부를 둘러보는데, 숨이 멎는 줄 알았단다. 게다가 다음날은 롤 케이크를 들고 찾아왔다며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래서. 밥이라도 먹자고 하게?”
[야, 너 썸 몰라? 이러면서 썸 타는 거지. 연애까진 기대도 안 해. 그렇게 잘생기고 완벽한 남자는 절대 나 혼자만의 것이 될 수 없거든. 관상용이야.]
내 주위에도 그런 남자 한 명 있는데…. 관상용.
하지만 채우는 말을 아꼈다. 그와 나눈 은밀한 대화나 접촉, 눈빛 같은 것들을 공유하고 싶지 않아서.
그녀는 조용히 최이겸의 목소릴 떠올렸다.
“알았어. 조만간 갈 테니까 얼굴 보여줘.”
[주인이 오란다고 와? 타이밍 잘 맞춰서 오든지. 롤 케이크는 단순히 인사의 의미로 사 온 걸지도 몰라.]
“알았어. 기대 안 할게. 혹시 필요한 거 있어? 사갈까?”
[아니, 그냥 와. 배달음식 시켜 먹자. 네가 쏴라. 알았지?]
“그래, 주말에 봐.”
수다가 필요한지 아쉬워하는 복길과의 전화통화를 마치자, 이곳저곳에서 문의가 밀려들었다. 대부분이 업무 차원의 자문을 구하는 일이었지만, 종종 개인적인 질문을 건네올 때도 있었다. 무궁무진하며 다양한 질문과 서류, 계약 등등.
하지만 기업 법무실에서 소송을 직접적으로 담당하는 일은 적었다. 소송이 일어날 경우 외부 대형 로펌 변호사를 기용하고, 기업변호사는 그의 서포트 역할을 하며 업무를 수행했다.
현장경험 부족을 감수하면서도 기업에 취직한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언제 들어올지 모를 거액의 수임료보단 고액연봉이 더욱 매력적이기에.
그런 그녀에게 갑작스러운 인사이동 제안이 그리 좋은 기회일 리 없었다.
평소의 정채우였다면 고민 없이 거절했을 일을 붙들고 있다는 것에 자조감이 밀려든다.
“정 대리.”
계약서 사본을 프린트 중인 그녀를 부른 서 팀장이 손짓했다. 채우는 인쇄물을 챙겨 팀장의 자리로 갔다.
“네, 팀장님.”
“오전에 상무님이랑 따로 만났다며.”
팀장이 그녀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말했다. 그제야 채우는 법무실 전반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를 읽었다.
“네. 흡연실에서 뵈었습니다.”
그 말에 고개를 홱 치켜드는 서 팀장.
“흡연실? 자기 회사에선 담배 안 피우잖아.”
“네. 그런데 어떻게 아셨는지 불을 빌려달라고 하시더라고요.”
“뭐? 하, 웃기네? 그래도 그렇지. 왜 여자한테 불을 빌려달래?”
“뭐, 요즘은 여자들도 많이 피우니까요. 근데 왜 그러세요?”
태연하게 되돌려준 물음에 서 팀장은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내가 오해했어. 미안해. 일 봐.”
“팀장님도 참.”
서 팀장의 질문으로 회사 내의 소문이 얼마나 빠르게. 그리고 저급하게 퍼져나가는지를 실감했다.
돌아선 채우는 저를 향한 시선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티 나지 않게 눈을 피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생긋 웃으며 불편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이번 주 금요일 저녁에 약속 없으면, 나랑 외근 좀 하자.”
막 외부업무에서 돌아온 강 과장이 의자를 빼 앉으며 채우에게 말했다. 16층 흡연장에서부터 뛰어 올라온 건지, 옅은 담배 냄새와 땀 냄새가 뒤섞여 풍긴다.
“어디랑 만나시는데요?”
“법무법인 명재. 이번에 윗선에서 협조요청 내려왔거든. 내 예상인데, 최이서 전무 일인 거 같다. 아, 골치야.”
최이겸 상무의 형, 최이서. 창하 그룹 최고의 골칫거리이자 최 회장의 내놓은 자식.
“또 어떤 자료를 내놓으라고 할지… 무섭네요.”
“그러게 말이다. 법무실이 증거보관소인가? 어쨌든. 콜?”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강 과장은 티 나게 기뻐하며 자리로 돌아갔고 채우는 최이겸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마음먹었다. 제가 흡연자인 걸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짝사랑은 한걸음 떨어져서 관조해야 가장 아름답게 끝맺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
흐르는 시간은 막을 수 없다.
법무실 내에 팽배했던 불편한 기운은 어느 순간 사라졌고, 동료들과 평소와 다름없는 나날을 보냈다.
각종 계약 서류를 검토하고 자문하며, 간혹 개인적인 법률상담을 해주는 평범한 하루의 연속.
“마감 전에 찾아갈 테니 보관해주시겠어요?”
“네, 고객님.”
오후 6시.
약속장소는 서울의 무영 호텔 3층에 입점한 한식당이었다. 채우는 1층 베이커리에 들러 복길의 피아노 학원에 가져갈 케이크를 주문해놓은 뒤 약속장소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던 강서준 과장이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맞는다.
“안쪽에 계셔. 가자.”
오늘따라 근사하게 멋을 낸 서준은 긴장한 듯 목덜미를 주물렀다. 그러곤 차림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의 셔츠를 털고 살짝 삐뚤어진 매듭까지 바로 해주자, 고맙다는 속삭임이 가까이에서 들렸다.
“누구누구 있어요?”
“허명재 대표. 그리고 변호사겠지? 잘하면 최이서도 있을 테고.”
“녹취할까요?”
“해.”
고개를 끄덕인 채우는 주머니에 챙겨온 녹음기를 꺼냈다.
음식점 안으로 들어서자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이 둘을 안내한다. 처음 와보는 고급스러운 식당 내부. 한정식집이라고 하지만, 인테리어는 모던한 프렌치 레스토랑을 닮은 곳이었다.
둘은 넓은 홀을 지나 한쪽 면이 통유리로 된 통로를 걸었다. 아직 저물지 않은 햇살에 빛바랜 사진 같은 도심을 왼편으로 두고 제일 구석에 있는 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강 과장과 함께 허릴 꾸벅 숙인 채우는 낯설지 않은 시선을 느끼며 눈을 치켜떴다.
서준이 말한 법무법인 명재의 대표를 비롯하여, 담당 변호사로 보이는 여자와 최이서. 그리고 뭔가 마뜩잖은 표정으로 앉아있는 최이겸이 손에 든 술잔을 내려놓는 게 보였다.
채우는 당황했다. 마치 네가 뭔데 이곳에 끼냐는 듯한 그의 눈빛. 하지만 불편해하는 건 최이겸 혼자였다. 그녀가 잠시 정신 팔린 사이, 세련된 인상의 허명재가 두 사람을 반긴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허명재와 차례로 악수한 둘은 자리를 찾아 앉았다. 원형의 테이블, 어차피 비어있는 자리는 허명재와 최이겸 사이뿐이었다.
선택의 여지 없이 최이겸의 옆자리에 앉은 채우는 꼿꼿하게 허릴 세운 채 정면을 노려보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너, 법무팀에서 나왔다고?”
그때, 의식하지 않았던 최이서가 정확하게 그녀를 가리키며 물었다. 초면부터 예의와 매너 없이. 싸움박질이라도 한 것인지 입가에 난 상처를 어루만지는 남자의 입매가 비틀린다.
“이거 재밌네.”
대한민국 기업인, 혹은 법조인 중 최이서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얼굴과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희대의 개망나니 재벌 3세란 수식어는 들어봤을 것이다.
채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석에서 만난 적은 없지만, 소문을 들어 모르진 않았다.
그런데 최이서는 어떻게 나를…?
“너….”
“거기까지. 예의 없게 굴지 마. 형이 싸지른 거 치워주러 온 조력자들이니까.”
최이겸은 경고하듯 말하며 술병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채우의 잔을 채워주더니, 이어 강 과장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대신 사과하죠. 전무님이 많이 취하셨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말과 달리 최이서는 조금도 취한 것 같지 않았다.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녀와 이겸을 번갈아 본 최이서가 불쑥 제 술잔을 내민다.
“잔이 비어서.”
순간 차갑게 가라앉은 최이겸의 눈빛. 입술에 대었던 잔을 내려놓는 손길이 거칠다.
채우는 옆에 놓인 술병을 들었다. 그러곤 대수롭지 않은 듯 생긋 웃으며 최이서의 잔을 채워주었다. 접대부로 자리한 것도 아니고. 부하직원으로서 술 한잔 따르는 것에 자존심 세울 필요는 없었다.
성희롱을 했다면 모를까. 오만방자한 망나니가 만만한 부하직원인 제게 술을 받고 싶었을 뿐이겠지.
“좋네.”
술을 받은 최이서가 두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는다. 마치 샅샅이 헤집는듯한 웃음에 묘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최이서가 저를 알고 있는 이유…. 뭘까.
채우가 술병을 내려놓자 서늘하게 가라앉은 최이겸의 말이 이어졌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법무실 직원들을 부른 이유부터 설명하세요.”
“아, 예.”
끼어들 타이밍만 재던 허명재가 강 과장에게 서류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전무님께서 폭행 사건에 휘말리셨습니다. 전무님이 몸담은 사교회는 대한민국의 저명한 기업인과 예술인. 그리고 의료인, 법조인 등이 속한 곳입니다. 들어보셨을 텐데….”
“알고 있습니다. 사주 일가의 기본정보쯤은.”
언제부터 개인적인 모임까지 기본정보 축에 속한 것인지. 일절 말이 없는 강 과장의 태도 또한 묘하게 느껴졌다.
채우는 어쩐지 염세주의자가 된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럼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상대는 성안 병원 신경과 전문의 노희성입니다. 신경안정제와 수면제 처방 건을 놓고 다소 과격한 언쟁 끝에 주먹이 오갔고요.”
“단순 폭행 사건에 왜 우리 법무실을….”
“서류가 필요합니다. 전무님의 기여도가 높은 작품으로. 최근 TF를 꾸려 계열사 엘릭을 상장하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 책임자가 바로 최 전무님이시라던데. 그 서류가 필요합니다. 정당방위, 혹은 과실치사와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한 심신미약까지. 뭐, 여러 가지를 넣으려면 최 전무님의 평소 업무평가가 높아야 유리하니까요.”
채우와 강 과장은 한동안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지난번 엘릭을 상장시킨 최대공로자는 최이겸이었다. 그가 진두지휘한 덕에 크게 성공한 프로젝트. 그에 최 회장이 직접 팀원들을 격려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책임자가 최 전무라고? 지금 그렇게 말한 거야?’
눈치 빠른 두 사람은 최이서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허명재의 말이 무얼 뜻하는지 금세 알아챘다.
“저희에게 문서조작을 지시하시는 겁니까?”
피라미드 제일 아래 짓눌려있는 주제에 채우는 우회하여 묻지 않았다. 질문을 받은 허명재가 가볍게 실소하며 관자놀이를 긁적인다.
“창하 그룹에 누를 끼칠수는 없으니까요.”
변호사의 기본소양인 뻔뻔함. 하나 채우는 제아무리 뻔뻔함을 장착한 변호사의 부탁이라 해도 승낙할 수는 없었다.
제가 직접 참여한 프로젝트다. 최이겸이 어떤 일을 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그의 자리에 최이서를 넣을 수는 없다.
게다가 문서조작은 엄연한 범죄였다. 법을 수호하고 집행하며 보호해야 할 변호사에게 범죄를 의뢰하다니.
“거절하겠습니다.”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채우와 강서준의 상반된 대답.
범죄에 가담하겠다고?
확 열이 올라 서준을 째려보는 채우의 허벅지에 커다란 손이 닿았다. 서준은 제가 알아서 하겠다는 듯 힘주어 움켜쥐더니 티 나지 않게 눈동자를 떨었다.
“과장님.”
나직하게 부르자 어색하게 웃으며 허명재의 술을 받는 그. 채우는 실소하며 앞에 놓인 술잔을 뒤집었다. 누구의 술도 받지 않겠다는 뜻. 위에서 내려온 정식 지시사항이었다면 이렇게 사적인 자리로 부르진 않았을 것이다.
사내 네트워크를 통해 팀장의 사인이 내려왔을 터. 강서준은 디딤돌, 혹은 동아줄을 발견한 듯한 눈빛이었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여기서 일이 틀어지면 이들은 조금도 타격받지 않을 것이다. 모든 책임은 내부문서를 조작한 먹이사슬 최하층의 자신에게 향하겠지. 그런 미래를 알면서도 썩은 동아줄을 잡을 필요는 없었다.
“이 사안은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그럼, 죄송합니다.”
넌 사회생활 더럽게 못 할 거라던 엄마의 악담이 머릿속에 울린다. 그 성격으로 어떻게 남의 돈을 벌어먹을 거냐고 했던가.
저를 잡는 강 과장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나는데, 따라 일어나는 최이겸이 보였다.
“너, 신사동에 있는 새틴이라고 몰라?”
핸드백을 집어 든 채우의 몸이 경직되었다. 최이서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그녀의 목을 움켜쥐는 것 같았다.
“저한테 하신 말씀이신가요?”
“너 말고 여기 누가 있어.”
최이서는 히죽 웃으며 육전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최이서의 눈빛을 보자, 채우는 그제야 왜 그가 낯설지 않았는지 알게 되었다.
새틴이었구나? 그쪽이 잡은 내 약점.
“내가 여자 얼굴은 기가 막히게 기억하거든. 너… 네 엄마랑은 다르네?”
차마 주위를 둘러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최이서가 유명한 것처럼 새틴 역시 모르는 이 없는 극소수를 위한 살롱이었다. 지금껏 술 팔고 몸 팔고 웃음을 파는 일 말고는 해본 적 없다던 엄마가 있는 곳. 정확히는 주인으로 앉아 사교계의 여왕이라도 된 양 거들먹거리는 곳이 바로 새틴이다.
입술에 아교가 들러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시치미를 떼지도, 웃어넘기지도 못했다.
“정채우 씨, 따라 나와요.”
그녀를 구렁텅이에서 구출한 건 최이겸이었다. 이죽거리며 웃는 최이서를 죽일 듯 노려보던 이겸은 재킷을 팔에 걸고 룸을 나섰다.
“저도…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개인정보 유출은 범법행위라는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꾸벅 인사하는 그녀에게로 쏟아지는 최이서의 조소.
문을 열고 나왔지만, 최이겸은 없었다. 먼저 식당에서 나갔을지도 모른다. 채우는 굳이 그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뒤따라 나올 줄 알았던 강 과장의 호방한 웃음소리가 문밖까지 새어 나온다.
더러운 기분에 절로 주먹이 말아 쥐어졌다.
채우는 이겸을 찾지 않았다.
찾을 필요도, 이유도 없었으니까.
***
“오늘 다 못 드시면 꼭 냉장 보관해주세요.”
“네.”
1층 베이커리에 들른 채우는 리본에 휘감기는 케이크 상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직원의 능숙한 손길에 하얀 박스가 금세 화려하게 변했다.
매일 소량만 만든다는 케이크는 거의 동난 상황. 느지막이 찾아와 허탕 친 이들이 발길을 돌린다.
“단 거, 좋아합니까?”
케이크 상자를 받아들던 채우는 익숙한 목소리에 정면을 보며 대꾸했다.
“아뇨. 친구가 좋아해요.”
“아까는 미안했습니다. 대신 사과하죠.”
그가 사과할 일은 아니었다. 최이서의 말은 사실이었고 평범한 질문에 가까웠으니까. 물론 의도는 나빴겠지만, 크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살롱 마담의 딸인 게 뭐, 어때서.
“아뇨, 괜찮습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정채우 씨.”
돌아선 채우는 입구에 대기 중인 김 실장과 운전기사를 발견했다. 그들은 기다림에 익숙해 보였다. 최이겸이 뭘 하든 자신의 업무만 수행하면 되는 것처럼 굴었다.
대체 얼마나 더러운 일을 많이 접해야 저렇게 태연해질까.
순간, 채우를 돌려세운 그가 케이크 상자를 내민다.
“나도 단건 별로라. 정채우 씨가 더 효과적으로 처리해줄 것 같네요.”
그는 재차 받으라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단 걸 싫어하면서 케이크는 왜 주문한 걸까. 하지만 지금 그녀가 묻고 싶은 건 케이크의 종류나 주문한 이유 따위가 아니었다.
상자를 받아들다 손끝이 스치자 심장이 급작스럽게 튀어 오른다. 결국, 채우는 리본을 움켜쥔 채 최이겸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날…. 왜 그런 소리를 하셨어요?”
“어떤.”
“섹스하자고 하셨잖아요.”
어쩌면 누군가 들었을지도 모르는 일.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불특정 다수의 시선이 이쪽을 향해있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는 어떠한 동요의 기색도 없이 입술 끝을 조금 당겼다.
“이제야 궁금해진 겁니까?”
“네.”
한 걸음 다가온 그가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상체를 기울여 속삭였다.
“그냥,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제 어디를 보고요.”
“글쎄요. 입사 7년 차, 가끔 담배를 피우고 비 오는 날엔 러닝을 함. 길짐승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데다, 술이 센 편임에도 숙취가 오래가고… 사는 곳은 연희동.”
그렇게 말한 그가 자연스럽게 그녀를 스쳐 지나가더니, 피식 자조하듯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적어도 서류상에 있는 이력보단 정채우 씨를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데. 틀렸습니까?”
유난히 넓은 그의 어깨가 보였다. 최이겸은 매력적인 남자다. 그가 천재로 불렸다든지, 낙하산으로 입사해 반년 만에 직원들의 인식을 바꿔놓았다든지 하는 건 상관없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겸은 저를 알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알려주지 않았던 개인적인 것들을. 최이서가 사람들 앞에서 모친의 정체를 까발렸을 때보다 더욱 심장이 아래로 내려앉았다.
채우는 밖으로 나가버린 그를 향해 이끌리듯 걸었다. 걸음이 급박하여 손에 든 케이크 박스가 덜렁덜렁 흔들린다.
“상무님.”
다급한 목소리로 부르자 차를 기다리던 그가 고개를 틀었다. 새카만 여름밤과 남자라니. 이토록 낯선 광경은 처음이었다.
최이겸은 카드키 하나를 손안에서 돌리다 주머니로 쑤셔 박았다.
“오래 생각하고 고민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그때는 정채우 씨랑 붙어먹고 싶었으니 그런 소릴 한 거고요. 그 외의 다른 것들은 우연이라고 해둡시다. 세상엔 가끔 이유가 필요 없는 일들이 종종 생겨나는 법이니까.”
당신이 이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우연이라고 여겨.
“저는… 상무님이랑 못 붙어먹어요.”
“왜.”
“잃는 게 너무 많아서요.”
“그럼 말아요. 실언이었다고 생각하면 편할 겁니다.”
때맞춰 상무의 차가 앞에 멈춰섰다. 뒷문 손잡이를 움켜쥔 채 잠시간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단호히 뒷좌석에 오른다.
채우는 멀어지는 최이겸에게서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장마철임에도 불구하고 밀려드는 더위의 기세에 숨을 쉴 수 없었다.
“케이크를 두 개나 사 왔어? 너 월급날 아니잖아.”
전보다 더 짧아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복길이 채우를 맞았다.
복길의 피아노 학원은 그녀가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 덕에 집에 들러 옷까지 갈아입고 복길을 찾아온 채우는 정면에 보이는 소파 위에 풀썩 엎어졌다.
진종일 먹은 거라곤 바나나 한 개와 최이겸이 따라준 술 한잔뿐이었다. 그에 채우는 허우적거리며 복길을 재촉했다.
“배고파. 빨리 꺼내줘. 단 걸 먹어야 해.”
“하여튼, 정채우. 단 거라면 사족을 못 쓰지? 근데 난 아메리카노 스타일이야. 너처럼 바닐라라테 스타일이 아니고.”
“알아. 그래서 최대한 덜 단 거로 달라고 했어.”
“이게?”
경악하는 복길의 반응에 채우는 고개만 슬쩍 들어 케이크가 올려진 테이블을 보았다. 복길이 꺼낸 건 최이겸이 준 케이크였다. 그것도 제가 가장 사랑하고 눈 돌아가게 좋아하는 끈적한 초콜릿 무스 케이크.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상무는 저를 알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우연일지도 모른다. 우연히 지나다가 보았다든지, 달리는 모습을 목격했다든지. 아니면….
“복길아, 우리 에어컨 틀자. 안 돼?”
확 열이 오르는 것 같아 애원하듯 말했다. 그러자 질린다는 표정으로 케이크들을 꺼내 예쁘게 담던 복길이 활짝 열린 창문을 가리킨다.
“바람도 엄청나게 잘 부는데 무슨 에어컨이야. 이제 좀 있으면 가을이래. 선풍기까지 틀어 줬잖아. 참아.”
“야아, 나 땀나는 거 안 보여?”
“땀은 티슈로 닦든지.”
징글맞은 구두쇠.
채우는 구시렁거리며 선풍기 바람이 자신에게 향하도록 했다. 1층 상가를 개조해 가정집 겸 학원으로 운영하는 복길의 피아노 학원은 낡았지만 편안한. 그런 곳이었다.
복길이 이곳에서 학원 운영을 하는 동안 건물 주인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 모른다. 그만큼 오래된 곳이었으나 복길은 상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채우는 소파 밖으로 고개를 내민 채 거꾸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시야는 뒤집혔지만, 머릿속 상념은 여전히 정방향으로 흐른다.
“차가운 커피로 줄까?”
“우유 없어?”
“있어. 초 꽂을까?”
“무슨 초를 꽂아. 그냥 먹자.”
세상을 거꾸로 바라보고 있던 채우는 쟁반을 내려놓는 복길의 등장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제가 산 케이크보다 최이겸이 준 케이크가 더 취향이었다. 그녀는 고민 없이 초콜릿 무스 케이크를 선택했다.
당연히 복길은 진한 아이스아메리카노. 샷을 얼마나 추가한 건지 사약처럼 시커먼 것을 잘도 들이켜는 복길을 보며 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복길아, 쓴 걸 잘 먹어야 피아노를 잘 쳐?”
“뭐래.”
“피아노 치는 거… 어렵나?”
“배워보게?”
복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채우는 포크에 묻은 초콜릿을 쪽 빨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궁금해서. 나도, 이런 손으로 칠 수 있나 해서.”
그녀는 손바닥을 쫙 펴서 노란 간접 등에 비춰보았다. 누가 피아노 선생 아니랄까 봐 틀어놓은 음악도 제목을 알 수 없는 클래식이었다.
“네 손이 좀 많이 작긴 하지.”
“힘들까…?”
“응, 포기해. 대신 넌 똑똑하잖아. 법전을 다 외우는 게 쉽냐? ‘사’자 들어가는 직업이 장난도 아니고.”
“그럼 공부도 잘하고 피아노도 잘 치면… 사긴가?”
“천재지.”
아…, 다들 그렇게 부르긴 하더라. 하나같이 천재라고.
결국, 그날 건물주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그녀는 다디단 무스 케이크를 말끔하게 먹어치우곤 복길이가 키우는 고양이의 털을 쓰다듬어 준 뒤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 보러 안 올 거야?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눕자마자 도착한 메시지가 가시처럼 손끝을 찌른다. 화면을 터치하지 못한 채 징글맞은 혈육의 이름을 응시했다.
10평이 조금 넘는 원룸. 대기업 법무실에서 일하기에 벌이가 시원찮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로스쿨을 졸업한 선배들이 로펌에 들어가 크고 작은 소송에 투입되어 돈을 긁어모을 때, 자신은 정시 출퇴근을 하며 안정적인 월급에 의존했다.
서로의 다름과 선택을 인정하고 남들과 비교하지 않은 채 살았다. 왜냐면 자신은 아주 작은 것에도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으니까.
‘그때는 정채우 씨랑 붙어먹고 싶었으니 그런 소릴 한 거고요.’
물어볼 말은 그게 아니었는데.
최이서 전무의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정말 상무도 그렇게 하길 바라고 그 자리에 나온 것인지 묻고 싶었다.
그런데 고작 튀어나온 질문은….
“그날 왜 섹스하자고 하셨냐고?”
미쳤나 봐.
눈을 감은 채우는 베개를 끌어안은 채 미친 듯이 뒹굴었다. 침대 위를 좌우로 구르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정채우우우우우우. 채우야, 엄마가 너 주려고 선물 사 왔어. 그러니까 엄마 좀 보러와. 알았지?
명품백 따위 줘봤자 박스째 구석에 처박힐 텐데.
채우는 ‘조만간’이라는 세 글자를 전송한 뒤, 불을 껐다.
열대야. 주말 밤이 깊어간다. 이토록 길게 느껴지는 금요일 밤은 처음이었다.
***
-우리 얘기 좀 해.
강 과장의 다섯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 채우는 서준의 연락을 가볍게 무시한 뒤, 오픈 준비 중인 새틴에 들어섰다.
신사동에서 유명한 호텔의 지하. 주말 밤이면 줄이 길게 늘어서는 클럽과 나란히 위치한 새틴은 100% 회원제 살롱이었다.
술을 팔고 웃음을 팔다 보니 남자가 꼬였고, 그중 가진 건 돈밖에 없는 졸부가 한 명 끼어있었다. 그녀의 모친은 사기에 능했다. 명백하겐 남자를 등쳐먹은 거였지만, 채우는 그 행위를 사기라고 불렀다.
하지만 졸부였던 남자는 곧 지병인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엄마는 돈줄을 잃었다. 그 후 눈에 불을 켜고 찾아 낚은 사람이 바로 현재의 애인이었다.
돈 많고 능력 좋은 건달이자 잘나가는 중소기업의 대표. 그렇게 정영수가 세운 호텔에 엄마는 살롱을 차렸고 지금의 위치에 이르렀다.
“어? 채우네.”
청소 중인 직원이 채우를 알아보곤 반갑게 인사한다.
“엄마는요?”
하품을 크게 한 남자는 0호실을 가리켰다.
“세팅 보고 계셔. 오늘 예약이 좀 일러서.”
“그래요? 주말이라 그런가?”
“뭐, 그런 것도 있고. 우리야 회원제니까.”
주위를 둘러본 채우는 여진이 있다는 0호실 문을 열었다. 오늘 그녀는 편해 보이는 청바지에 셔츠만 대충 걸친 차림이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을 모자로 가리고 긴 머리는 하나로 질끈 올려묶은.
“어머, 왔니?”
채우의 등장에 격한 반가움을 표하며 여진이 뛰어왔다. 테이블을 빙 둘러온 여진이 그녀를 와락 끌어안는다.
40이 훌쩍 넘은 나이임에도 여전히 젊음이 느껴지는 외모와 체형. 여진은 트레이드 마크 같은 짙은 향수 냄새를 풀풀 풍겼다. 채우는 인상을 쓰며 여진의 품에서 벗어났다.
“줄 거 있다며. 빨리 줘요, 가게.”
“뭐야. 선물만 받고 가려고? 그러지 말고, 딸. 엄마랑 점심 먹자.”
“나 먹고 왔는데.”
“그럼… 커피?”
“단 거로.”
“그래. 조금만 기다려. 앉아, 앉아.”
채우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여진을 관찰했다. 이곳에 마지막으로 찾아온 것도 벌써 4개월 전. 이른 봄에 찾아왔었는데, 벌써 장마철이다.
사람을 시켜 다디단 음료를 가져오라고 말한 여진은 구석에 놓여있던 쇼핑백들을 들었다.
고급 브랜드 로고가 박힌 상자들이 하나둘 쌓이더니 테이블 위를 금세 채운다. 뭔가 굉장히 과했다. 술이 세팅되어 있어야 할 테이블엔 케이크와 분식, 중국 음식을 비롯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이. 엄마의 얼굴엔 싱글벙글한 미소가 그득했다.
채우는 그제야 오늘이 무슨 날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설마, 오늘 내 생일이야?”
“몰랐어?”
“…어. 몰랐어.”
딱히 챙겨본 적이 있어야지.
열심히 준비한 엄마에겐 미안하지만, 채우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미역국 한 그릇으로 충분하다. 생일은 중요하고 축복받을 만한 날이지만, 그렇다 하여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눈앞에 놓인 상자 중 가장 작은 걸 집어 들었다.
“차도 없는 뚜벅인데, 이렇게 들고 가면 아마 미친 줄 알 거야. 마음만 받을게.”
“차를 사줄까?”
“면허도 없어.”
“휴가 내고 면허를 따. 그럼 엄마가….”
“나도 돈 있어. 잘 벌어. 회사생활 열심히 하면서 모은 돈 많아.”
“그래 봤자 월급쟁이지.”
원하는 건 뭐든지 얻을 수 있다는 저 표정. 하지만 여진처럼 사느니 월급쟁이가 낫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그래도 엄마는 착하다. 착하고 영리하기에 무사히 이 자리까지 올랐다.
채우는 김밥 하나를 입에 욱여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박해 보일 테지만, 기대감을 주느니 실망하게 하는 편이 나았다.
룸을 나서는 채우의 뒤로 여진이 따라붙었다. 마치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와 채우에게 팔짱을 낀다.
포기하지 않는 엄마의 버릇 같은 거였다. 제가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하나뿐인 혈육을 놓지 못하는.
5, 60년대 재즈바를 연상케 하는 내부와 고급 라운지를 닮은 무대.
채우는 무대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에 의문을 표했다.
“원래… 있었나?”
“피아노 말이지? 몇 년 됐어. 우리도 호텔 라운지처럼 재즈피아니스트 초대해서 저녁에 연주하거든. 라이브가 좋은 거야, 뭐든.”
이젠 피아노만 보면 최이겸이 떠오른다. 그는 피아노를 칠 때도 섹시할게 분명했다.
“그럼 최이서는?”
“그게 누군데?”
“우리 회사 전무. 그러니까… 걔들 있잖아.”
“아…. 그 깡통들?”
혼자 있을 땐 뭣도 아닌 주제에 여럿이 모이면 그렇게 시끄러운 소릴 낸다 하여 깡통이란다. 채우는 퍽 잘 어울리는 별명이라고 생각했다.
“싸움이 났었다던데.”
자연스럽게 홀을 빠져나오며 묻자 엄마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여진은 나가려는 채우의 손을 잡고 말했다.
“채우야, 그쪽이랑은 엮이지 않아야 네 인생이 편해. 네 주변에 쓰레기를 늘리지 마.”
“그 정도야?”
“다 똑같지, 뭐. 어쨌든 가봐…. 여기 불편하면 엄마가 집으로 갈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없어.”
아쉬워하는 엄마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온 채우는 막 세단에서 내리던 중년 남자와 마주쳤다. 엄마의 연인이자 새아버지임을 자처하는.
“엄마 만나러 왔니?”
채우는 본능적으로 물러섰다. 어려서부터 저 눈빛이, 손의 방향이, 목소리와 숨소리가. 모든 게 싫었다. 저 남자는 뱀이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 그에 고개만 꾸벅 숙여 인사한 그녀는 새틴 앞을 벗어났다.
빠르게 걷던 채우는 결국 걸음을 멈추었다. 몸에 붙는 청바지에 넉넉한 반소매 셔츠. 그리고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그녀를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갔다.
최이겸이었다.
놀란 채우는 그를 향해 돌아섰다. 분명 저를 봐놓고도 태연하게 지나쳐간 그가 새틴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황당함에 말문이 턱 막혔다. 혹시 제가 못 알아볼 거라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굳이 알은체할 생각이 없던 걸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절 못 알아봤을지도 모르고….
채우는 건물 유리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시커먼 모자를 푹 눌러쓴 것도 모자라 화장기 없는 얼굴에 청바지까지.
최이겸이 저를 알아보지 못했을 거라고 확신한 채우는 다시 새틴으로 향했다. 입구를 지키던 관리인은 어떠한 저지 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무얼 두고 갔느냐고 물으며. 마치, 가족처럼.
그에 순간적으로 구역질이 날 뻔했지만, 채우는 싱긋 웃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문을 열자마자 들리는 피아노 소리. 조율하듯 같은 음을 여러 번 눌러보고, 낮은 음계부터 높은 음계까지 가볍게 훑는 소리가 홀을 채웠다.
채우는 멀리 떨어진 곳에 서서 피아노 앞에 있는 최이겸을 응시했다. 선글라스를 대충 움켜쥔 그의 얼굴엔 지금껏 본 적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딱히 연주하러 온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 홀 매니저인 여자가 차를 가져와 그에게 내밀었다. 오늘의 상무는 제가 아는 얼굴의 남자가 아니었다.
낯설고 평소와 다른 청량함이 느껴지는. 이른 아침 탈색된 빛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옅은 한숨을 내쉰 채우는 모자를 더 깊게 눌러쓰곤 뒷걸음질 쳐 벽에 기댔다.
상무는 이곳에서 저를 본 거였다. 그리고 저 역시 오늘 다른 얼굴의 최이겸을 보았다. 무대를 압도하는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 앞에 선 최이겸의 모습은 조금도 위축됨이 없었다.
피아니스트들은 다 저런가?
묘한 즐거움을 느끼며 제대로 된 연주곡 하나를 듣고 싶다고 생각할 때였다. 핸드백 안에 넣어둔 휴대 전화가 울렸다.
채우는 순간 이겸과 눈이 마주쳤다. 핸드백 안에 든 휴대 전화를 꺼낸 그녀는 서둘러 복도 끝으로 뛰어 도망쳤다.
발신자는 강서준. 분명 최이겸이 저를 알아보았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채우는 구석으로 가서 쪼그려 앉았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정 대리, 통화 가능해?]
“아, 지금은 좀….”
[우리 할 얘기 있잖아. 만날까? 내가 갈게. 정 대리, 지금….]
강 과장의 목소리엔 멋쩍음과 조급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채우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마음에도 없는 사과나 합리화 같은 건 사양이었다.
강서준이 그 제안을 거절한다 해도 결국 누군가는 하게 될 것이다. 한낱 사원이 끼어들어 바로잡을 수 없는 일.
“저기 과장님. 회사에서 얘기해요. 주말이기도 하고, 오늘은 제 생일이거든요. 약속이 꽉 차 있어요.”
[어? 아, 그래? 몰랐네. 정 대리, 생일 축하해.]
“네. 감사해요. 그럼 끊을게요.”
[어, 어어!]
채우는 더 이상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곤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했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도 못 알아봤는데,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알아봤을 리 없다. 아마도….
이왕이면 조용히 빠져나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정채우 씨.”
빌어먹을….
정확하게 제 이름을 부른 남자의 음성. 심장이 떨어지도록 놀란 채우는 헛숨을 들이켰다.
이럴 줄 알았지.
핸드백 끈을 강하게 움켜쥔 그녀가 마른 입술을 축이며 몸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차라리 처음부터 알은체할 걸 그랬다. 그럼 이렇게까지 가까이 붙어설 일은 없었을 텐데.
“놀라지 않네요? 언제 왔습니까.”
그건 내가 할 말이지.
“조금 전에요. 아시는 줄 알았어요. 아까 밖에서 스쳐 지나가시기에….”
“그랬습니까?”
“네. 근데 여기로 오실 줄은….”
어색한 웃음에 얼굴이 경직된다. 당황해야 할 사람은 최이겸이건만, 왜 제가 더 긴장해버린 것인지.
이중생활을 들켰음에도 되레 즐거워 보이는 최이겸.
그녀는 눈동자만 좌우로 굴리며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그럼, 가볼게요. 뭘 좀 가지러 온 거라.”
그는 비켜서지도, 더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그런 최이겸의 태도에 채우는 제 표현이 잘못됐나 싶어, 남자와 벽 사이로 슬그머니 발을 끼워 넣었다. 하지만 당연히 물러날 거로 생각했던 그가 몸을 비틀어 그녀의 전진을 막았다.
“오늘 생일입니까?”
채우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들으셨어요?”
“청력이 좋은 편이라.”
아직 축하한단 말을 듣지도 않았건만 대꾸할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색하고 멋쩍으며,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모르겠는 기분.
“몇 달 전까지 이곳에서 가끔 피아노를 쳤습니다.”
“…몰랐어요.”
“정채우 씨는 좌우를 잘 안 보더라고요. 앞만 보고 걷는 편이니 못 봤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 이젠 좀 더 주위를 봐야겠네요.”
“왜 질문 안 합니까?”
그가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왜 여기서 피아노를 치고 있냐고 안 묻냐고요.”
“아, 그야…. 상무님 마음이니까요?”
상무님 마음?
채우는 뚫린 제 입을 저주했다. 예상했던 대로 실소한 그가 일그러지는 입가를 가리며 고개를 몇 번 주억일 때였다.
“채우 생일이라고 이렇게까지 한 거야?”
소름 끼치도록 싫은 정영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들어갔던 0번 룸의 문을 열고 나오는 정영수와 여진. 놀란 채우는 저도 모르게 손에 잡히는 손잡이를 돌렸다. 그러곤 그 안으로 이겸을 끌어당겼다.
중심을 잃은 순간, 그녀의 몸을 강하게 압박하는 품이 느껴졌다. 엉덩방아를 찧기 직전 균형을 잡은 이겸이 그녀를 끌어안은 채 반쯤 상체를 숙였다.
무의식중에 그의 가슴팍을 끌어안은 상황. 커다란 손이 뒷머리를 감싸 가슴 방향으로 지그시 누른다.
쿵쾅거리며 뛰어대는 심장박동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요란하고 시끄럽게 머릿속을 덩덩 울렸다.
누가 누구를 끌어안았든, 첫눈에 반한 남자와 닿아있다는 건 뜨거운 늪 속에 빠져들어 가는 것과도 같았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따뜻한 체온과 더불어 옅은 비누 향이 넘어왔다.
채우는 이내 가쁜 숨을 서서히 진정시켰다.
“죄송합니다.”
“은근… 저돌적인 것도 같고.”
나직한 말투에 섞인 묘한 즐거움. 그의 숨결이 정수리 위로 쏟아지고, 채우의 뺨은 가슴팍에 눌렸다. 눌러썼던 모자가 바닥을 뒹군다. 엉망이었다.
“그게….”
불 꺼진 룸은 크기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애써 이겸의 품에서 빠져나와 벽을 더듬었다.
“죄송합니다. 같이 있는 모습을 보이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왜요? 정채우 씨 모친 아닌가?”
손끝에 스위치가 만져진다. 그리고 그녀의 손등 위로 그의 손바닥이 겹쳐졌다. 둘은 동시에 스위치를 눌렀다.
가벼운 진동음과 함께 점등된 간접조명.
그들은 동시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엄마가 좀 유난스러우셔서요. 죄송합니다.”
“아뇨. 사과를 너무 많이 하지 마요. 정채우 씨, 잘못한 거 없으니까.”
이겸은 그녀의 곁을 지나 소파에 앉았다. 고민하던 채우는 그의 맞은편 소파로 다가갔다.
헝클어진 앞머릴 쓸어넘긴 그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제가 곤란하게 한 건 아닌지….”
“내가 정채우 씨를 곤란하게 한 거죠.”
“아뇨, 아니에요.”
채우가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피식 웃은 그는 다리를 꼬며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익숙해 보이는 자세에서 느껴지는 여유와 우아함.
남자의 선은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그 정적인 틀 안에 위험한 무언가를 품고 있는 것처럼, 최이겸은 계절을 역행하여 피어난 꽃 같았다.
“여기서… 저를 보신 거예요? 가게 드나드는 거요.”
“예.”
“언제요?”
“꽤 자주.”
짤막한 대답은 질문의 흥미를 떨어트렸다. 그래서 채우는 질문 없이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상무가 제게 관심을 표한 건 업계에서 유명한 모친 때문이었다고.
어쩌다 우연히 제가 드나드는 걸 보았을 테지.
이곳을 찾을 때 채우는 종종 술에 취해 있기도 했다. 그러니 그가 저를 알고 있던 것도 이상하지 않다.
특별해서가 아니라, 특이해서. 그는 자신을 기억했던 거니까.
“다른 질문은 안 합니까?”
채우는 그제야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핸드백을 챙겨 일어나며 말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제가 빨리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작게 묵례한 그녀는 문밖 기척을 살핀 뒤, 손잡이를 당겼다.
“뭘 가지러 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웃음이 잔뜩 담긴 그의 음성. 최이겸은 알면서도 저를 놀리고 있었다. 슬쩍 돌아보자 선이 깊은 눈매가 부드럽게 휜다.
“식사나 같이하죠. 약속이 꽉 차 있는 거 아니면.”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지나 복도로 나간 최이겸은 당당히 홀을 가로질렀다. 그러곤 피아노 위에 올려둔 소지품을 챙겨 엄마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 틈을 타 밖으로 나온 채우는 요란하게 뛰어대는 심장 부근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생일 서프라이즈가… 너무 과했다.
***
“어제 케이크 주신 거, 잘 먹었습니다.”
처음이다. 생일을 가족 아닌 누군가와 보내게 된 것은.
최이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의도적인 침묵에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었다.
일부러 그런다, 이 남자. 고맙다는 말에도 고개만 한번 끄덕이는 것으로 끝.
데이트를 하게 되면 남자들은 항상 물었다. ‘우리 뭐 먹으러 갈까?’ 혹은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라고. 길고 끈적한 연애를 한 적은 없었지만,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술을 한잔한 뒤에 모텔로 이어지는 코스는 정석이라 하겠다.
적어도 그녀가 만나온 남자들은 모두 당연하리만치 같은 코스를 밟으려 했다. 하지만 상무는 연애 상대가 아니다. 여기서 밥을 먹고 헤어지거나 술까지 한잔 곁들일 수는 있겠지만, 오늘 이 남자와 벗고 뒹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장담할 수 있었다.
“갤러리 형태의 퓨전 다이닝입니다. 말이 갤러리지 성수동의 흔하고 흔한 갤러리 카페와 비슷하더군요. 아, 주인이 친한 놈이라.”
“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면 말해줘요. 원하는 대로 만들어주니까.”
“그러겠습니다.”
“비가 올 것 같네요.”
“밤새 내릴 거래요.”
채우는 재벌 3세나 4세가 취미로 운영하는 상업적인 곳일 거라 생각했다. 넘쳐나는 돈으로 금싸라기 땅이나 건물을 매입해 잉여 생활을 영위하는.
하지만 최이겸이 멈춰선 곳을 본 순간, 판단에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좀 좁습니다. 조심히 들어오세요.”
원 테이블 다이닝.
주인이 직접 음식을 하고, 종업원조차도 없는 곳. 더불어 예약 없이는 올 수 없는 곳이었다. 유명해서가 아니라 다른 손님이 사용하고 있을 수도 있어서.
하지만 최이겸은 당당히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테이블엔 한 무리의 손님이 와인잔을 부딪치며 즐거워 하고 있는 상황.
주방에서 빼꼼히 고개만 내민 주인이 계단 위쪽으로 턱짓한다. 위로 올라가라는 뜻이었다.
채우는 좁은 내부를 신기한 듯 둘러보았다. 나무색의 낡은 벽엔 값을 추정할 수 없는 작품들이 가득했고, 아치형 주방 안에선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걱정 마요. 원본 아니니까.”
놀란 채우의 표정을 본 이겸이 피식 웃었다.
10평 남짓한 내부. 좁은 계단을 먼저 오른 그가 손을 내민다. 채우는 손을 잡는 대신 난간을 움켜쥔 채 조심조심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2층은 층높이가 낮은 다락방 작업실처럼 보였다. 그들은 실제 생활 공간인 듯 온갖 종류의 미술도구로 너저분한 곳을 지나 반 층을 더 올랐다.
크림색 파고라와 줄 전구, 4인용 테이블이 설치된 옥상. 채우는 잘 꾸며진 루프톱 라운지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파인다이닝을 생각하셨다면 미안합니다. 난 그런 쪽이랑은 거리가 멀어서. 느끼한 걸 먹으면 속이 좋지 않아요.”
그렇게 말한 이겸이 의자 하나를 빼 자리했다. 의자를 빼주는 오글거리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가리는 거 없이 잘 먹어요. 근데… 성수동 자주 왔지만, 여긴 처음 봐요.”
“가게가 너무 작죠? 저놈이 숫기도 없고, 눈에 띄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서요.”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채우는 조용히 저녁 풍경을 감상했다. 속이 뻥 뚫릴 듯 시원한 광경에 숨을 크게 들이켜는데, 한 방울씩 비가 내린다.
일기예보는 정확했다. 바람 없이 내리는 비. 부슬부슬 떨어지는 빗방울이 천막을 때린다. 어떠한 음악도 필요 없는 시간. 채우는 부러 그의 눈길을 피했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에 비를 맞은 것처럼 축축해졌다.
미리 주문해둔 것인지 오래지 않아 모두 서빙된 음식. 사장인 남자가 혼자 꽤 많은 양의 음식을 테이블에 착착 차려준 뒤, 채우에게만 꾸벅 인사하고는 옥상을 빠져나간다.
그녀는 인사할 타이밍을 놓친 채 어색하게 웃었다. 그에 웃음기 섞인 표정으로 젓가락을 드는 최이겸.
“일단 배부터 채우죠. 제가 허기진 건 잘 못 참아서.”
배가 빠른 속도로 채워졌다.
식욕이 없던 그녀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식의 향연에 절로 수저를 들었다. 문어 초회를 닮은 애피타이저부터 매콤한 고기볶음. 유자 향이 듬뿍 나는 샐러드와 먹음직스럽게 튀겨낸 튀김까지.
둘이 먹기에 꽤 많은 양이었으나 최이겸은 묵묵히 식사를 이어나갔다. 저도 먹는 양으론 누구에게 뒤지지 않건만, 이 남자는 더 하다. 먹는 게 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몰라도, 이렇게 먹고 나면 러닝을 10km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빗소리가 고즈넉하게 울리는 밤. 따뜻한 음식과 달콤한 알코올이라니.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툭 건드리면 깨어날 얕은 잠이 든 것처럼 몸이 붕 뜨는 기분이다.
“디저트로 커피, 괜찮습니까?”
“네.”
“맛은… 보장 못 합니다.”
“배가 불러서 커피 맛도 모를 거 같아요.”
“그래요, 그럼.”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어딘가로 메시지를 보냈다. 주인에게 연락을 취한 것인지, 벌컥 문을 열고 나타난 남자가 투박한 머그잔 두 개를 놓아주더니 낱개로 포장된 커피 스틱을 툭 내려놓고 사라졌다.
채우는 머그잔에 꽂힌 인스턴트커피 스틱을 보며 웃음을 꾹 참았다. 그러곤 이겸의 표정을 살피자 작게 욕설을 읊조린 그가 뒤에 놓인 포트에 물을 올린다.
익숙해 보이는 몸짓이었다.
“자주 오시나 봐요.”
“한국에 입국하고 얼마간 이곳에서 잠깐 살았었습니다. 옥상에 텐트를 치고요.”
“여기에서요?”
“예. 그땐…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니까요.”
최이겸은 입꼬리만 부드럽게 올려 웃었다. 대화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은…. 그러니까 상처 같은 것. 들여다보면 안 될, 무언가를 조금 들춰본 것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날도 비 왔는데.”
채우는 화제를 전환했다. 가벼워질 필요도, 더욱 무거워질 이유도 없기에 이겸에게서 뜨거운 물이 든 컵을 받았다.
토독, 쏟아 넣은 커피 가루가 아지랑이처럼 번진다. 작은 티스푼으로 그것을 휘휘 저으니 따뜻한 김이 피어올랐다.
“언제 말입니까?”
“회식 날이요. 상무님이 완전히 젖으셔서 오신 날이요. 뛰어오신 거예요?”
“아, 그날….”
그는 기억난다는 듯 피식 웃으며 냅킨을 두 번 접었다.
“비 때문에 차가 많이 막혔습니다. 외부 일정 중이었는데…. 고작 몇백 미터를 앞두고 갇혀버려서요. 더 늦었다간 시간을 못 맞출 것 같아서.”
“…회식이었는데요?”
“누가 가버릴까 봐.”
커피를 한 모금 삼키던 그녀는 식도가 뜨거워져 숨을 크게 들이켰다. 다행히 사레들진 않았지만, 뜨거움을 꾹 참은 탓에 눈가가 붉어졌다.
혼자만의 설레발이었다. 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오해하고. 저 좋을 대로 생각했다.
관심이란 건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기 쉽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미소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최이겸이라는 사람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정채우 씨는.”
시선을 내리깔았던 그가 고개를 든다.
“이번 일에서 빠지도록 해요.”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뜻하는지 되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네, 그러려고요. 제가 감당하기 좀 힘든 제안인 것 같아서….”
“물론 최이서 전무는 구제 불능에 가깝지만, 가끔은 정의감이 넘치기도 합니다. 형이 행하는 정의가 남들이 받아들이기엔 좀 벅차고 고압적으로 느껴지는 게 문제죠.”
“이해합니다. 그런 사람, 제 주변에도 있었거든요.”
“하지만 비서실로 부르고 싶다는 제안은 유효합니다. 김 실장님이 어렵게 아이를 가지셨다네요. 후임을 정해야 하는데, 마음 가는 사람이 없어서.”
그럼 제게는 마음이 가는 거냐고 물을 뻔했다.
멍하니 이겸의 얼굴을 바라보던 채우는 헛기침 하며 뜨거워진 목덜미를 만졌다.
“…그래도 저는 법무실이 좋습니다. 다른 부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요.”
“뭐, 정채우 씨가 굳이 그렇다면.”
두 번의 고사. 둘 사이엔 또다시 침묵이 만들어졌다. 계속 반복되는 기분이다. 그는 제안하고 저는 거절하고.
모든 것에 NO를 외치는 부하직원이라니.
괜스레 머쓱해진 그녀는 식어가는 커피를 빠르게 마신 뒤, 처마 밖으로 손을 뻗었다.
뚝뚝 떨어진 빗방울이 손바닥에 고인다. 이 정도 비라면 조금 맞는다 해도 큰일이 날 것 같진 않았다.
“저, 그럼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상무님의 시간을 더 뺏으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시간이 늦기도 했고.”
“그래요.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최이겸은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이렇게 식사까지 챙겨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됐는데.”
“아뇨, 오늘따라 혼자 밥 먹기 싫어서 정채우 씨를 끌어들인 겁니다. 나하고 밥 먹어줘서 고마워요.”
이런, 끝까지 예쁘게 웃는 건 반칙이다.
채우는 핸드백을 챙겨 일어나 꾸벅 인사했다. 그러곤 거침없이 빗속을 뛰어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가파른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오는데 발을 디딜 때마다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마음이 들뜬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발을 헛디딜 것 같았지만, 얼굴엔 참을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이게 복길이 말한 썸이라는 걸까?
적어도 상무가 제게 아주 관심이 없진 않다는 걸 증명받은 것 같았다. 나름의 배려를 해주고 생일을 챙겨주었다. 관심보단 호감에 가까운 태도일지 모른다고 오해하고 곡해했다. 제멋대로.
주인에게 잘 먹었다고 인사한 그녀가 비 내리는 밖으로 나와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을 때였다.
정수리에 닿는 축축한 느낌에 진저리치던 채우의 어깨가 잡힌다.
“이거, 놓고 갔는데.”
그 한마디에 채우는 확신해버리고 말았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그의 하얀 셔츠가 젖어간다. 그가 쥐여준 건, 엄마에게 받은 쇼핑백이었다.
“어, 어서 들어가세요! 고맙습니다.”
“잘 가요.”
축 늘어진 앞머리, 투명하게 젖은 어깨. 그리고 뺨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과 근처 카페에서 새어 나온 노란 불빛까지.
그날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멍하니 침대 끝에 앉아 최이겸의 이름을 검색했다. 그가 연주자로 참여한 모든 음악을 플레이리스트에 등록한 뒤, 이어폰을 꽂았다.
빗물에 흠뻑 젖은 채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최이겸의 연주를 들었다. 어떤 게 좋은 소리인지, 어떤 연주가가 실력이 좋은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를 흥분시키기엔 충분했다.
그 밤, 잔잔한 피아노 선율을 들으며 몹시도 야하고 열띤 꿈을 꾸었다. 꿈속의 최이겸은 여전히 아름답고 서늘했지만, 뜨겁기도 했다.
손길이 스칠 때마다 온몸의 세포가 잔뜩 곤두서고 입술을 부딪칠 땐 왈칵 눈물이 날 것도 같았다.
혼자만의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
“정 대리, 메일 확인 좀.”
절뚝거리며 스쳐 지나간 서 팀장이 그녀를 불렀다. 채우는 곧장 메일에 접속했다. 해외 공장설립 건과 관련하여 계약서를 확인해달라는 부서가 다섯. 창하 그룹 산하의 하늘 건설과 엘릭의 상장 때문에 해외 업무량이 급격하게 늘어나 버렸다.
계약서를 출력해 형광펜으로 죽죽 그어가며 내용을 확인하던 그녀의 곁으로 강 과장이 다가왔다.
“오늘 다 같이 한잔할 건데. 올 거지?”
“어디서요?”
“회사 근처. 새로 생긴 실내포차가 끝내준다네?”
“네, 일단 일 마무리 되는 거 봐서요.”
“그래.”
서준이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자리로 돌아간다. 한동안 서먹했던 강서준과의 관계를 회복할 기회였다.
최이겸의 말대로 저만 빠지면 될 일이다. 손해는 최이겸이 보는 거지 제가 보는 게 아니었다. 당사자가 동의한 일에 삼자가 나설 이유는 없다.
“어? 귀걸이 이거, 진짜야?”
하도급 업체가 중간에 끼어있는 복잡한 계약사항에 골머리를 앓던 채우는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동기인 선미가 그녀의 귀걸이를 가리켰다.
“이거 말이야. 이거 한정판이라 못 구하는 건데, 어떻게 샀어? 설마… 가짜야?”
“아, 이거? 난 잘 몰라. 선물 받은 거라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
“선물? 선물이면 가짜겠다. 이거 못 구해. 대기 장난 아니게 길어.”
“다 그런 거 아니겠니?”
가짜일 가능성은 0%였지만, 차라리 가짜이길 바랐다. 어쩐지, 제가 쇼핑백을 집어 들 때 엄마의 표정이 꽤나 만족스러워 보이더라니.
계속해 진품 여부를 의심하며 요리조리 살피던 선미는 서 팀장의 잔소릴 들은 뒤에야 자리로 돌아갔다.
이후 업무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36시간 내로 회신해야 한다는 영업팀의 닦달에 점심도 거른 채 매진한 결과, 오후 6시. 퇴근 직전에 영업팀으로 수정된 계약서를 보낼 수 있었다.
“으…! 제발, 이렇게 중요한 일은 미리미리 좀 줬으면 좋겠네.”
기지개를 켜며 말하자 립스틱을 꺼내 덧바르던 선미가 물었다.
“그래도 세이프 했잖아. 오늘 한잔하러 갈 거지?”
“응. 괜찮을 것 같아.”
채우는 뻐근한 어깨를 꾹꾹 주무르며 퇴근준비를 마쳤다. 최이겸의 꿈을 꾼 뒤, 어쩐지 쑥스러워져 그와 마주쳐도 똑바로 바라보질 못했다.
솔직히 인사를 하는 편이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저와 최이겸은 TF를 함께 진행했던 과거 팀원.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법무실 동료들과 함께 1층 로비로 내려왔을 때였다. 나란히 걷던 선미가 옆구리를 툭 친다. 정면에 늙은 호랑이라 불리는 부사장과 최이서 전무. 그리고 최이겸 상무가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뒤로 늘어선 기전실 직원들의 얼굴에 피로가 가득하다. 양복을 차려입은 무리가 우르르 걸어들어오는 모습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길을 터주었다.
법무실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요즘 분위기 장난 없다더니. 최이서 전무가 일 터트리려나.”
그 말에 잠시 서준의 표정이 굳었지만,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왜요?”
“이번에 최대규모로 진행하는 국토사업. 그거 최이서 전무가 따냈대. 말이 안 되지? 최이겸이면 몰라도. 그래서 비상이라더라. 풀 야근. 어휴… 우리 예쁜 상무님, 얼굴 살 빠진 거 봐.”
선미가 고개를 쭉 빼곤 괜한 너스레를 떤다.
채우는 이겸이 걸어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승강기 홀 방향으로 꺾어 들어가던 그와 찰나 간 시선이 마주쳤다. 하지만 이내 자연스럽게 떼어졌다.
동요는 없었다.
마음의 술렁임만 있었을 뿐.
“요즘 다들 정신 다른 데 두고 있던데. 세상 사람 다 정신 놓아도, 우린 좀 제대로 살자. 알았지?”
서 팀장의 의미심장한 건배사에 몇몇이 멋쩍게 웃으며 눈을 맞췄다. 근래 크고 작은 실수를 했거나, 서 팀장의 눈 밖에 나 온갖 잔소리에 시달린 사람들이었다.
채우는 선미가 만들어준 신기한 칵테일을 한 모금 맛보았다. 소주와 맥주를 섞더니 과일 몇 개를 넣어 오묘한 맛을 만들어낸 선미는 자신만만하게 그것을 권했다.
“어우, 이 대리야. 우리 소주는 소주답게 마시자. 닭똥집에 무슨 칵테일이야!”
서 팀장은 그 맛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오만상을 찌푸렸다.
새로 생긴 실내 포장마차는 딱히 특별한 느낌을 주지 못했다. 차라리 항상 가던 동태탕 집이 더 낫다며 투덜대는 몇몇의 태도에 장소를 섭외한 서준의 뺨이 발개진다.
그는 묵묵히 술잔만 기울였다. 평소라면 우스갯소리로 받아쳤을 터였다. 유쾌하고 친절하며 젠틀한 강 과장. 강서준의 대표적인 이미지였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나가서 다른 데로 옮기죠.”
강서준의 예민한 반응에 그제야 투덜대던 사람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아냐, 그냥 먹어. 볶음면은 먹을만하네.”
다들 서로의 옆구릴 쿡쿡 찌르며 입단속을 했다. 오늘따라 말수 적고 묘하게 날이 선 강서준. 서 팀장은 그런 서준의 얼굴을 가만히 살피다 불쑥 물었다.
“근데 강 과장. 요즘 뭐 하는데 그렇게 정신이 없어? 나는 별로 일 안 준거 같은데 제일 바빠. 알아?”
칵테일에만 온 신경을 쏟고 있던 채우의 고개가 들린다. 서준은 혼자 술을 따라 입안으로 털어 넣고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별일 없습니다. 평소랑 똑같아요.”
“그래? 요즘…. 강서준 씨, 위에서 예쁘게 보는 거 같더라? 못 보던 얼굴들이 자주 찾아와. 전무 쪽이랑 뭐 있어?”
“있긴 뭐가 있어요. 그런 거 없어요, 팀장님.”
“에이, 내가 들은 게 좀 있는데…. 최이서 전무랑 정말 뭐 없어?”
순간 서준과 눈이 마주쳤다. 어금니를 눌러 문 강서준이 채우를 빤히 보며 비릿하게 웃는다.
“오해십니다. 저보다는… 우리 정 대리가 윗분들이랑 친하죠.”
비아냥 섞인 말에 서 팀장의 표정이 변했다.
“뭐?”
“모르셨나 봐요. 저 아니고 정 대리가 윗분들이랑 아주 찐한 사이라고요.”
채우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강서준을 노려보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제가 누구랑요?”
아직 취하려면 멀었다. 자리에 앉은 지 20분. 음식이 나온 지는 고작 3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채우는 당장에라도 이 자릴 벗어나고 싶었다.
“왜. 내가 없는 말 했나? 괜찮아, 정 대리.”
“과장님, 말씀이 좀 이상하시네요? 오해하기 딱 좋고요.”
차갑게 받아친 말에 강서준이 빈정대며 말했다.
“오해 아닌 거 같은데? 특히… 최 상무랑 각별한 사이잖아. 나는 그렇게 알고 있는데? 그래서 요즘 멍한 거 아니었어?”
“과장님.”
채우는 서준이 집어 든 술병을 빼앗았다. 그러자 능청 떨던 강서준이 대뜸 근엄한 척 목소릴 내리깔았다.
“어이, 정 대리. 위에서 뒤봐준다고 너무 기어오르는 거 아니야?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과장님이야말로 왜 이러세요?”
“내가 틀린 말 했나? 며칠 전에 성수동에서 최 상무랑 둘이 있는 거 봤어. 그 식당 예약제잖아.”
“네?”
“선물도 받고…. 그거 아니야? 그 귀걸이 브랜드 쇼핑백. 비까지 맞아가며, 아주 뜨겁더니만.”
채우는 경악한 얼굴로 서준과 눈을 맞췄다. 묵직한 둔기로 뒷머릴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어지럽다.
주말, 성수동, 비. 그리고 선물, 귀걸이.
“선물을… 받았다고요? 제가요?”
그녀의 반문에 귀찮다는 듯 손사래 친 서준이 술을 털어 넣곤 안주를 집어 먹는다.
“됐다, 그만하자. 내가 일 때문에 보자니까 약속 꽉 차 있다더니…. 차라리 솔직하게 상무님이랑 만난다고 했으면 기분 상할 일 없었잖아.”
“하!”
두 사람의 소란을 중재하는 이는 없었다. 채우는 더 해보라는 듯 눈을 빛내는 그들의 태도에 진저리쳤다. 선미마저도 귀걸이와 그녀를 번갈아 보며 실소하는 게 보였다.
소름 끼치고 무서웠다.
“무슨 오해를 하시는 건지 몰라도, 추측하신 거 다 틀렸어요. 상무님은 우연히 만난 거고, 제가 가게에 놓고 간 걸 가져다주신 게 다예요.”
“아아, 그래? 이상하네. 차에서 같이 내리는 거 같았는데.”
차에서 내리는 모습까지 봤다면, 대체 언제부터 본 걸까. 설마 연락을 해왔을 때 새틴 앞에 있기라도 했던 건가?
“무섭다, 과장님…. 언제부터 보신 거예요? 설마 뒤따라오셨어요? 스토커야?”
“나 참, 무슨 스토커 질까지. 무서워서 무슨 말을 하겠어? 그나저나 이러다 나 잘리는 거 아니야? 정 대리 예뻐하는 상무님이 나서시면 큰일인데…. 어이, 나 잘리면 변호사 사무실 소개해 주나? 아!”
뻔뻔한 표정으로 입을 가리며 놀란척한 강서준이 결국 폭탄을 던졌다.
“물장사한다고 했지? 어머니가. 직업여성에 편견을 갖고 있진 않지만, 전무랑 상무가 채우 씨 어머니 가게 단골이라며. 아아… 이제 알겠네. 미안해, 내가 오해했어. 연애는 무슨.”
몸 장사에 장사 있나.
그 작은 소릴 놓친 사람은 없었다.
결국, 채우는 손에 든 술병으로 상을 내리쳤다. 엄청난 소릴 내며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튄다.
다들 놀라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는 짓이냐고, 차라리 말로 반박하라고.
그들의 목소리가 윙윙 울린다. 파편이 뒹구는 테이블 위, 쏟아진 술이 주르륵 흘러 테이블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깨진 병을 내려놓고 이마를 문지른 채우는 글라스에 들어있던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것도 모자라 선미가 만든 기이한 칵테일까지 원샷 하자 삽시간에 눈앞이 핑 돈다.
“정 대리!”
“채우야, 진정해.”
“정 대리님, 참으세요. 과장님, 왜 그래요? 취하셨어요?”
빽 소리친 누군가 그녀를 부축했다. 그러나 채우는 부축한 손을 쳐낸 뒤, 지갑에 든 현금을 모두 꺼내 놀란 주인에게 쥐여주었다. 그러곤 허리를 90도로 숙여 사과했다.
“소란피워 죄송합니다. 모자라면 연락주세요.”
명함까지 내밀었지만, 주인은 한사코 괜찮다고 말하며 손사래 쳤다.
채우는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는 강서준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깬 병에서 흐른 술이 그의 바지를 적셨나 보다. 실수라도 한 것처럼 젖은 것을 보며 코웃음 쳤다.
“그 직업여성이 과장님 같은 사람을 말 한마디로 매장할 수 있다는 거 아세요? 그리고 내가 상무님이랑 붙어먹었다고 생각했으면 이러지 말았어야죠. 가서 일러바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야!”
“강서준! 적어도 난 법조인으로서의 양심은 안 팔아, 병신아.”
“뭐?”
“내가 왜 입 다물고 있다고 생각해? 까발리지 못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야. 치사한 새끼.”
채우는 만류하는 사람들을 뿌리치곤 밖으로 나왔다. 술이 오르는 건지, 되레 정신이 번쩍 드는 건지 모르겠다.
보도블록의 선을 따라 성큼성큼 걸었다. 술 마신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 앞만 보며 직진했다. 대체 강서준이 갑자기 왜 그런 짓을 저지른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서 팀장이 본인을 의심하는 것 같아서? 아니면 정말 상무와의 관계를 부적절하다고 여겨서?
짐작할만한 정황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손 놓고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채우는 서서히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들자 별 하나 없는 하늘과 드문드문 불 켜진 고층빌딩이 보였다. 답답하게 느껴지는 밤바람.
그녀는 복길에게 전화하기 위해 휴대 전화를 찾아 핸드백을 뒤졌다. 하지만 어디에도 없는 휴대 전화.
“하, 미치겠네….”
영업팀에게 보낼 계약서 검토에 정신을 빼앗겼나 보다. 점심시간 이후로 휴대 전화를 본 적이 없다는 걸 떠올렸다. 책상에 놓고 왔음을 깨달은 그녀는 방향을 바꾸었다.
서럽고 어렵다. 사회생활은 7년을 버텨도 여전히 버거웠다.
퇴근하고 고작해야 한 시간 남짓. 다시 회사로 돌아온 그녀는 야근 중인 사람들로 인해 불 켜진 건물을 올려다보며 한숨 쉬었다. 매일 드나드는 건물이 유난히 높게 느껴졌다.
채우는 사원증을 꺼내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막 퇴근 중인 한 무리가 그녀에게 알은체했지만, 채우는 보지 못했다. 아마 뒤늦게 오른 취기 때문일 것이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주시하는 관리인에게 눈인사한 뒤, 반듯한 걸음으로 승강기에 올랐다. 법무실이 있는 20층에 도착한 그녀는 비상구 불빛에 의지해 복도를 걸었다.
평소였다면 무서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두려움보다 충격이 더욱 컸다. 맞은편 건물의 불빛이 내려앉은 자리로 돌아온 그녀는 책상에 놓인 휴대 전화를 발견했다.
같은 팀 동료들에게 걸려온 부재중 전화가 열 건이 넘었다. 이어 울리기 시작한 휴대 전화. 채우는 서 팀장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지 않았다.
먹먹한 마음에 의자를 빼 털썩 주저앉은 그녀는 제 행동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참을걸. 내지르지 말걸. 차라리 그냥…. 아무런 대꾸도 하지 말걸.
의자 헤드레스트에 기대 후회와 자책을 반복하던 때였다. 가늘게 울린 진동.
-뭐합니까.
모르는 번호로 도착한 메시지.
채우는 가차 없이 삭제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또다시 메시지가 도착했다.
-최이겸입니다. 뭐합니까.
채우는 멍하니 메시지를 응시했다. 혹시 누군가 장난을 치는 건 아닐까? 의심부터 하는 제가 한심했지만, 쉽게 믿기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휴대 전화가 길게 울렸다.
“…네. 정채우입니다.”
[접니다. 최이겸.]
진짜 최이겸이었다. 지금의 상황과 그의 목소리가 맞물려 서러움을 만들어냈다.
“네.”
[뭐하냐고 물었는데, 대답이 없어서.]
“…야근 중이에요.”
[법무실 직원들 퇴근했단 보고 들었는데요.]
“다시 왔습니다. 마무리할 일이 생각나서.”
[휴대 전화를 놓고 가서 돌아온 거 아니고요?]
채우는 조금 전 보았던 부재중 전화 목록에 모르는 번호가 섞여 있었던 걸 떠올렸다.
그게 최이겸일 줄이야….
“상무님.”
[네. 말해요.]
“혼자 해결해보려고 했는데…. 오해가 좀 생겼어요. 그러니까…, 주말에 같이 식사한 걸 누가 본 거 같아요.”
[…그게 문제가 됩니까?]
“네. 저는 일개 회사원이거든요.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상무님이랑 붙어먹으면 잃는 게 너무 많다고. 지금 하나씩 잃어가고 있어요. 먹은 건 밥밖에 없는데.”
제 입으로 붙어먹었다고 말하는데 왜 서글픈 웃음이 튀어나온 건지.
진심으로 강서준이 제 등에 칼을 꽂으려 한 건 아닐 거라 믿고 싶었다. 약간의 취기와 몰아가는 분위기에 타깃을 저로 바꾼 거라고. 실수였다고.
[지금 20층에 있습니까?]
“네.”
[기다려요.]
“네?”
[기다리라고.]
갑작스럽게 멈춰버린 머릿속의 회로.
채우는 뜨거운 얼굴을 비비며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지금 오겠다는 뜻일까? 뭔데 당신은 이토록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걸까.
어떠한 의도로, 저의로, 계획으로.
[고작 밥 한 끼 했다고 이상한 소문이 퍼질 정도라니. 더한 짓을 하면 무슨 소리가 돌지 궁금하네요. 기다려요. 확인해보게. 싫으면… 도망치든지.]
나는 지금 도망치는 걸까?
법무실을 나온 채우는 세워져 있던 승강기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몸을 실었다. 로비 층을 누르는데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붉은빛이 들어온 숫자 버튼. 승강기는 곧장 문을 닫고 아래로 쑥 내려갔다. 지상으로 향하는 그 순간은 심해에 빠져들어 가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가슴이 뛰어 안절부절못하며 자릴 맴돌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고. 술에 취해서라고. 강서준의 미친 짓에 동요해 상무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인 벌이라고.
“내일… 회사에서 어떤 얼굴로 보려고?”
쓰게 웃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아직도 15층. 평소라면 눈 깜짝할 새 로비에 다다르던 승강기답지 않았다.
현실 파악을 하면 괜찮아질 줄 알았건만, 아니었다.
‘몸 장사에 장사 있나.’
‘더한 짓을 하면 무슨 소리가 돌지 궁금하네요.’
강서준과 최이겸의 목소리가 번갈아 취한 뇌를 울렸다.
그래서. 싫어서 도망치는 거야…?
결국, 채우는 8층을 지나는 순간 버튼을 눌러 꺼버렸다. 6층 즈음에 멈춰선 승강기. 그리고 다시 20층을 누르는데, 정말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헛웃음이 터졌다.
그녀는 승강기 벽에 기댄 채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모든 게 엉망이다. 싫지도 않으면서 도망치려다, 혹시라도 실망할 그에게 설명해야겠단 마음으로 다시 찾아가고 있었다.
이건 감정의 농간이었다. 최이겸에게 반해버린 그녀의 마음은 어리석은 사랑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나직한 웃음소리와 저만 아는 모습, 그가 보여주는 관심 따위가 미래 같은 건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짧은 시간 이어진 온갖 생각과 고민에 무너질뻔한 그때, 20층에 다다른 승강기 문이 열렸다. 그리고 채우는 제가 돌아올 줄 알고 있던 사람처럼 서 있는 이겸을 발견했다.
표정을 굳히기도 잠시. 열린 문 너머에서 그녀를 지긋이 응시하던 그가 한 손으로 승강기 문을 잡는다.
“도망 실패인지, 아니면 또 뭘 놓고 간 건지 몰라도. 타도되겠습니까?”
살짝 거친 호흡과 이마에 맺힌 땀. 미약한 짜증이 섞인 표정의 남자가 승강기에 오른다. 채우는 멍하니 그가 올라타는 걸 보고만 있었다.
창백한 형광등 불빛이 점점 가늘어지며 승강기 내부에 선을 긋는다. 로비가 아닌 지하 주차장 버튼을 누른 그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돌아섰다.
“누가 그런 소릴 했습니까.”
혼잣말하듯 착 가라앉은 음성. 혹시 뛰어 내려온 걸까? 저 같은 걸 위해서?
이미 머릿속은 제멋대로 오해하고 뒤엉켜 반죽이 되는 중이었다.
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 과장의 말처럼 그에게 일러바치는 치졸한 사람이 될 것 같아서.
“정채우 씨.”
“상무님이 끼어있긴 하지만 개인적인 일이에요. 이러다 말겠죠. 억울하긴 한데…. 항상 이러다 마니까요. 금방 흥미를 잃을 거예요.”
“괜찮다… 이겁니까?”
차마 그렇다고, 혹은 아니라고도 말하지 못했다.
조금 전 그녀가 멈췄던 6층을 지날 때쯤 최이겸이 한숨 쉬며 고개를 젖혔다. 한참이나 천장을 응시하던 그가 서늘해진 시선으로 턱을 내린다.
“우린 아직 손도 안 잡았고 키스도 안 했고 섹스는 더더욱 안 했습니다. 정채우 씨 말대로 밥만 먹은 걸 가지고 붙어 뒹군 사이라고 하는데도요?”
몰아붙이는 말투에 순간 눈앞이 흐려졌다. 이게 다 술 때문이다. 억울했다. 엄마의 삶을 원망하는 건 저 또한 마찬가지였다. 엄마의 삶이 제게 끼친 영향을 이 남자는 알까? 모르면서 동정하는 걸까?
눈물이 떨어질까 봐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곤 고개를 저었다.
힘이 들어가 하얗게 질린 입술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가 반보 가까워졌다.
“어떻게 할까요.”
이 남자는 치사하다.
이겸은 그녀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채우는 알고 있었다. 선택이란 것에 얼마나 큰 책임이 따르는지. 온갖 법과 규제, 어긋난 정의와 사회규범. 그리고 양심. 지긋지긋하다 못해 진절머리가 났다.
“이왕이면… 값은 제대로 쳐주세요.”
그의 옷 소매를 당겼다.
“저, 안 괜찮아요.”
***
현관 센서 등이 켜지자마자 그녀의 몸이 신발장에 부딪혔다. 허리 뒤로 들어온 커다란 손. 서늘할 줄 알았던 남자의 체온은 뜨거웠다.
까치발을 든 그녀는 이겸의 목덜미를 끌어안은 채 키스를 받았다. 입술을 벌리고 단맛이 나는 그의 혀를 빨아들였다.
회사 지하 주차장에 내린 상무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그녀를 차에 태웠고 중간에 잠시 멈추었다. 불 밝힌 편의점에 들어가 담배 한 갑과 콘돔을 사 온 그는 숨기지 않고 콘솔 위에 그것을 올렸다. 채우는 심플한 디자인의 텍스트를 멍하니 응시했다.
숨 막히는 침묵. 평소 같으면 분위기 전환을 위해 애썼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더운 날씨, 정체된 공기. 그리고 자동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실내 환기 시스템.
그녀는 블라우스 안이 축축하게 젖어가는 걸 느꼈다. 재킷을 벗어 바닥으로 떨어트리자, 그도 입고 있던 양복 상의를 벗었다. 둘은 서로의 단추를 다급하게 풀어헤쳤다. 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덤빈 건 그녀 쪽이었다.
채우는 최이겸의 가슴을 밀어내고 벨트를 풀었다. 드로어즈 안으로 조급히 손을 넣자 냉랭했던 그의 눈동자에 열이 차오른다.
한 손에 잡히지 않는 두툼한 성기는 부드럽고 뜨거웠다. 점점 가빠지기 시작하는 숨결. 채우는 작은 손으로 그의 성기를 문질렀다. 그러자 뒷머릴 받친 그가 탁한 숨을 토해내며 웃는다.
“괜찮네요. 이런 것도.”
그러곤 강하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는 남자.
이겸은 게걸스럽게 채우의 입술을 핥고 혀를 빨아들였다. 그러다 번쩍 안아 들어 거실 중앙에 놓여있는 피아노 위에 앉혔다. 건반 뚜껑은 닫혀있었지만, 특유의 미끄러움에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균형을 잡아야 했다.
치마가 허리께까지 말려 올라가고 피부색 스타킹은 발목에 걸렸다. 채우는 차마 그의 혀가 팬티 위를 핥는 걸 볼 수 없었다. 입술을 질끈 깨문 채 뜨거운 혀가 속옷을 젖히고 들어오는 감각을 만끽했다.
셔츠를 반쯤 풀어헤친 채 잘 정돈되었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 남자의 모습.
채우는 무릎을 굽혀 그의 목덜미를 살짝 조였다. 단정하고 우아할수록 흐트러졌을 때의 간극이 크다. 검고 어두운 남자의 눈동자엔 알 수 없는 열기가 가득했다.
“술을 안 마셨으면 더 좋았겠지만…. 필름이 끊길 정도는 아닐 테니까.”
채우는 호기를 떨며 미소지었다. 몸은 벌벌 떠는 주제에….
이내 블라우스 단추를 모두 푼 그녀가 브래지어를 위로 올려 젖가슴을 양손으로 모아쥐었다. 흰 손가락 사이로 튀어나온 살과 분홍 젖꼭지를 본 그의 입꼬리가 비틀린다.
이겸은 타액에 젖은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채우는 덜렁거리던 브래지어를 아예 벗어버리고 앓는 듯이 신음하며 피아노를 움켜쥐었다.
“빨리… 해줘요.”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
그에게 안겨 피아노 위를 벗어날 때, 검은 표면이 자신의 애액으로 얼룩진 걸 보았다. 묘한 쾌감이 치밀어 최이겸의 목덜미를 안은 채 키스하자, 엉덩이 사이로 두꺼운 성기 끝이 닿았다.
최이겸의 향기로 가득한 침실. 그것만으로도 정신이 멍해져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붓는 사이, 침대 위에 눕혀짐과 동시에 다릴 벌린 그가 밀려들었다.
적나라한 자극에 놀라 헛바람을 들이켠 그녀의 입술이 떨린다.
“젠장….”
그는 몇 번 허릴 움직여 깊숙하게 박아넣은 뒤, 손을 뻗어 콘돔 박스를 뜯었다. 그러곤 포장째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어 무릎을 넓게 벌린 그가 느리게 허리짓을 하며 그녀를 내려다본다. 채우는 떨리는 손으로 포장을 벗겨 콘돔을 꺼냈다.
“하아, 상무님. 이거….”
“직접 해봐요.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요.”
쑥 빠져나간 그가 그녀의 얼굴 앞까지 무릎 걸음으로 다가왔다.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성기가 입술에 닿자, 채우는 거리낌 없이 그것을 물었다.
하지만 반도 제대로 넣지 못했다. 볼우물이 깊게 팰 정도로 세게 빨아들이는 제 뺨에 닿은 손바닥.
그는 그녀의 입안에 손가락을 넣어 벌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거 말고. 깊게 박고 싶은데요.”
단정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투. 채우는 타액으로 젖은 입가를 훔치곤 성기 위에 콘돔을 씌웠다. 미끄럽고 이상했다. 조금 전까지 제 입과 안을 헤집던 그의 일부라고 생각하자 뒤늦은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순간, 그녀의 목 뒤로 손을 넣은 이겸이 한쪽 무릎을 번쩍 들어 접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아까보다 더한 자극에 채우는 손톱을 세웠다. 놀란 마음에 그의 팔을 할퀴었고 시트를 움켜쥐었다.
커다란 어깨와 잘 다듬어진 몸. 가만히 내려다보는 그의 모습은 그날, 비 맞은 채 제 어깨를 움켜쥐었던 그때와 닮았다.
채우는 뒤늦게 알 수 있었다.
욕망이 넘치는 눈빛이 어떤 것인지를.
그가 박혀 들어올 때마다 그녀의 세상은 몇 번이나 뒤집히길 반복했다. 질척한 소릴 내며 살이 부딪친다.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았으나, 할 수만 있다면 그를 완전히 삼켜버리고 싶었다.
생경한 둔통과 눈앞을 하얗게 만드는 절정이 밀려든다.
씨근덕거리는 숨소리에 뒤섞인 욕설. 지금, 이 순간만은 그가 누구든 상관없었다.
그저 이 순간을 방해하는 이가 없기를. 짧은 짝사랑의 끝이 부디 허무하지 않기를. 남자가 건넨 동정심을 주워 먹은 몸뚱이가 제발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
채우는 긴 회상에서 빠져나왔다.
오늘따라 낯설어 보이는 해랑의 복도.
왼편으로 법무법인 해랑이란 커다란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면, 옛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벽에 기대있던 그녀는 헛웃음 지으며 다이어리를 품에 안은 채 쪼그려 앉았다.
벌써 1년 가까이 지난 일을 굳이 왜 떠올려서 이렇게 힘들어하는지….
그날 최이겸과 밤을 보낸 이후, 그녀의 세상은 180도 달라졌다. 다음날 그의 키스를 받으며 눈을 떴고 셔츠를 빌려 입었다.
그녀가 욕실을 사용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최이겸은 얼룩이 남은 피아노 앞에 서 있었다. 연인을 대하듯 표면을 어루만지다 피식 웃는데, 살면서 그렇게 부끄러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회사에서 봅시다.’
실수는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아니, 적어도 파트너 정도의 자리는 차지한 거라고. 연인이 되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남들보다 훨씬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고.
그 달콤한 헛꿈에서 깨어난 건 고작해야 몇 시간 뒤였다.
출근과 동시에 내려온 인사발령 공고. 이유에 대한 언질도, 변명할 기회도 없었다. 동료들은 그녀와 눈을 맞추지 않았고 서 팀장마저도 어쩔 수 없단 말로 질문을 막았다.
제주 창하 아트센터, 법률대리인.
수식어는 참 거창하다만, 눈에 안 보이는 곳으로 내쫓긴 것과 다름없었다.
‘위에서 내려온 겁니다. 원치 않으시면 대안을 요청해볼 수는 있지만, 아시잖아요. 아니꼬우면 사표 쓰라는 거지.’
그리고 그 이후, 사직서를 내는 그날까지. 단 한 번도 최이겸과 마주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