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연신 쫑알거리는 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TV를 켜 놓고 잠들었던가. 아니면 휴대폰을……. 미간을 좁히며 눈꺼풀을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가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우수는 굳었던 표정을 풀며 다시 눈을 감았다.
아, 한연두 목소리였구나.
언제 내려온 건지. 오늘도 저보다 연두가 빨랐다는 것에 속으로 탄식한 것도 잠시, 우수는 모르는 척 팔을 움직여 연두를 제게 끌어당겼다. 그러나 연두는 그가 잠결에 뒤척이는 걸로 생각한 듯, 제 손에 든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우수의 품으로 파고들 뿐이다.
“웃겨, 정말.”
더 가까이 붙은 연두의 목소리가 골을 울려대는 통에 할 수 없이 눈을 떴다. 아까부터 뭐가 그렇게 웃기고 어이가 없다는 걸까. 흘깃 쳐다봤더니 역시. 휴대폰으로 채영환의 기사를 보고 있던 모양이다. 하긴, 그거 아니고서는 한연두가 이리 열을 낼 이유가 없지.
예상했던 그대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그저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세상을 바꾸기엔 이 땅에 뿌리내린 어둠이 너무 깊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채영환은 가까스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다소 오만한 당선 소감으로 또 한 번 화제가 되었으나 아직 도로에는 그의 얼굴과 이름이 인쇄된 현수막이 버젓이 걸려 있다.
한동안 조용하다 싶던 채영환은 다시 한연두를 들먹거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그가 낙선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만 만약 그랬다간 당신 아들을 두고 또 어딘가와 장사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채영환의 출세욕과 권력욕을 채우기에 제 아들은 너무나도 작은 인물인 줄도 모르고.
그러나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채영환은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짧으면 2년, 길면 3년 내 의원직을 상실할 것이다. 사실상 제 아들 손에 끌려 내려오는 셈일 터. 밑그림부터 하나하나 다시 그리느라 재단 일을 떠맡는 바람에 피곤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제 눈을 뜨면 한연두가 제 곁에 있다. 아직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잠은 다 쫓은 듯 옅은 미소를 띤 우수가 연두의 볼을 툭 건드리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
“응? 언제 일어났어요?”
그는 대답 대신 연두의 목덜미에 입술을 붙이고는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고단했던 며칠간의 피로가 연두의 살갗 위로 흩어졌다. 간지럽다며 멀어지려는 연두를 꽉 껴안자 저도 별수 없다는 걸 안 모양이다. 버둥거림을 멈추고 되레 우수에게 엉겨 붙은 연두가 그의 어깨에 제 이마를 찧으며 투정 부렸다.
“뭐야, 언제 깼냐고. 깼으면 말하지.”
“좀 전에 깼어. 넌 언제 내려왔는데.”
“음…… 나는 얼마 안 됐어요.”
물어보나 마나 거짓말이다. 일찌감치 내려와 놓고는 차마 깨우지도 못하고 침대 옆자리에 누워서는 그가 눈 뜨기만을 기다렸겠지.
지금 몇 시야. 우수가 연두의 어깨를 살짝 밀어내며 침대 옆 협탁 위의 시계를 확인했다. 아, 벌써 11시 30분. 연두와 만나기로 한 시간은 한참 지났다. 한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린 그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연두가 가지 말라는 듯 그의 허리를 감싸왔다.
“비켜 봐. 씻고 올게.”
“잠시만 이러고 있을래.”
“늦었잖아. 빨리 준비하고 올게.”
“으응, 싫어. 아직 시간 많아요.”
“……왜 이렇게 떼쟁이가 됐을까, 한연두.”
“선배도 나 보고 싶었잖아. 우리 엄청 오랜만에 보는 거라구요.”
사흘인데 엄청까지야. 말은 그러면서도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올 줄을 모른다. 제 표정을 감추려는 듯 연두의 이마에 입술을 붙인 우수가 나지막이 물었다. 잠긴 목소리 끝에 웃음이 배어 나왔다.
“잘 잤어?”
“응, 선배는.”
“그냥.”
“또 약 먹고 잤구나.”
대답 없는 걸 보니 그런 모양이네.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면서 고개를 들자 우수의 시선이 비스듬히 연두에게로 내려왔다. 약은 언제쯤 끊을 수 있으려나. 그의 어깨에 턱 끝을 콩콩 찧던 연두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나 그냥 매일 여기 내려와서 잘까요?”
“왜, 이젠 먹는 것도 모자라서 자는 것도 다 여기서 해결하려고?”
“아니, 선배가 나 있으면 잠 잘 온다고 했잖아.”
“네가 못 자잖아. 내 옆에서는.”
“그거야…….”
자려는 사람 자꾸 괴롭히니까 그런 거지. 웃기고 있어 정말. 괜히 딴청을 부리던 연두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접고 웃으면서 우수의 팔을 두드렸다.
“선배 그거 알아요? 자면서 내 이름 부른 거.”
“무슨. 그럴 리가.”
“아냐, 내가 확실히 들었어. 자면서도 내가 막 보고 싶고 그런가 봐, 채우수?”
“까불지 또.”
“꿈에도 내가 나오고 그래요?”
응, 응? 제 머리가 헝클어지는 줄도 모르고 기어코 우수의 품에 파고든 연두가 그의 턱 끝에 입술을 붙였다. 똥개 같다고 했더니 진짜 제가 개가 된 것처럼 굴고 있어. 고개를 저은 우수가 제 위로 연두를 들어 올리자 이번엔 입술 주위로 연두의 입술이 내리꽂혔다.
“하지 마. 양치 안 했잖아.”
“그니까 뽀뽀만.”
우수는 더 이상 안 된다는 듯 연두의 등을 쓸던 손바닥으로 제 입을 가렸다. 연두가 그의 가슴팍을 툭 치면서 갈 곳 잃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치사하게.”
“몰랐어? 나 원래 치사한 놈인 거.”
“왜 몰라? 나도 다 알아요.”
두고 보라지. 앞으로 내가 먼저 뽀뽀해 주나. 멋쩍음에 코를 훌쩍이며 시선을 돌렸더니 우수가 제게서 달아난 눈동자를 찾으려는 듯 연두의 코끝을 툭 튕겼다. 여전히 우수 위로 제 몸을 겹친 연두가 마지못해 고개를 들고는 그를 올려다봤다. 우수의 가슴팍에 턱을 찧자 그의 눈썹이 비뚤게 휘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안 본 사이에 너 얼마나 못생겨졌나 싶어서.”
“……어제 늦게 자서 부었다 그래, 씨.”
“씨이?”
“그래 씨. 왜, 뭐.”
자꾸 까불어. 우수가 연두의 미간을 꾹 누르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위에 있던 연두가 몸을 굴려 옆으로 비켜났다.
“있어. 씻고 나올게. 몇 시 공연이랬지?”
“2시요. 천천히 해도 돼. 공연장 근처에서 밥 먹으면 되니까. 내가 가고 싶은 곳 찾아 놨어.”
어느새 침대를 벗어난 우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건을 손에 들었다. 욕실로 향하던 그가 뭔가 생각난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한연두.”
“응?”
침대에 엎드린 채로 대답한 연두는 그에게 시선을 돌릴 시간도 없는 듯, 휴대폰을 보는 데 여념 없다. 데이트라고 신경 써서 입은 시폰 원피스가 아슬아슬하게 엉덩이를 덮은 줄도 모르고.
벽에 기대어 그 모습을 느릿하게 훑던 우수가 다시 연두를 불렀다.
“한연두.”
“응.”
“나 좀 봐 주지?”
“……왜요, 또 뭐.”
그제야 그에게 시선을 던지자 표정을 굳힌 우수가 제 쪽으로 가까이 와 보라며 턱짓했다. 웃겨. 또 왜 저래. 할 수 없이 휴대폰을 내려 둔 연두가 그에게 다가갔다.
“너 안 씻었지?”
“무슨 소리예요. 다 씻고 내려왔는데.”
“안 씻은 거 같은데.”
“웃겨요. 바쁘니까 괜히 시비 걸지 마.”
“눈곱 꼈어, 너.”
무슨 눈곱이야. 제 얼굴에 무겁게 내려앉은 시선이 조금 부담스럽다. 진짠가. 아까 깜빡 잠들어서 그런가. 눈가를 비비며 거울을 찾으려고 하자 우수가 연두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아무래도 다시 씻어야겠는데, 한연두.”
“나 씻고 왔다니까!”
“같이 씻을까.”
웬일이야. 목 뒤를 감쌌던 그의 손이 천천히 내려와 원피스 지퍼를 아래로 내렸다.
“정말이지 웃기지도 않아서…….”
“그래서, 싫어?”
“싫어요. 나 다 씻고 왔, 엄마야!”
애초에 연두의 의사를 물을 생각은 없었다. 원피스 지퍼를 완전히 내리자 가슴 부근이 헐렁해졌다. 자연스레 원피스에서 팔까지 빼낸 그가 연두를 들어 올려 제 품에 안았다.
“너 좋아하는 뽀뽀 실컷 하게 해 줄게.”
“웃겨. 이제 내가 먼저 뽀뽀해 주나 봐요.”
“그래. 그러자.”
발끝이 들린 연두가 마지못해 그에게 다리를 두르며 매달렸다. 그렇게 웃음을 머금은 입술이 욕실에 들어서기도 전에 연두의 목덜미에 먼저 내려앉았다.
* * *
공연이 끝난 뒤, 연두가 우수를 기다리며 프로그램 북을 뒤적이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연두의 시선을 잡아챘다.
“한노랑?”
아, 정말. 굳이 누군지 따져보지 않아도 제 이름을 이렇게 부를 사람은 한 명뿐이다. 채우수 친구 강도우. 그를 향해 고개를 든 연두가 가볍게 목인사를 하며 말했다.
“한노랑 아니고 연두요, 한연두.”
“그래, 잘 지냈어? 빨강이.”
재미없어. 입술을 삐죽이자 제 말장난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도우가 히죽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혼자 왔어?”
“아니요.”
“데이트?”
“네.”
연두의 데이트 소식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듯 그가 혀를 쯧, 차더니 눈썹을 긁적였다.
“우수랑 술 한잔해야겠네.”
“……그러세요.”
“앉아도 돼?”
도우가 연두의 옆자리에 앉으며 뒤늦은 허락을 구했다. 묻지나 말든가. 웃기는 사람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프로그램 북을 덮자 사이에 끼워뒀던 공연 리플릿이 바닥에 떨어졌다. 몸을 숙여 리플릿을 주워 건넨 도우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너 내 결혼식 왔던가? 아, 청첩장 받았어?”
“아뇨. 혹시 한노랑한테 청첩장 잘못 보낸 거 아니에요?”
“그런가 보다. 아쉽겠다?”
“뭐, 괜찮아요.”
“그날 내가 진짜 멋있었거든. 너 그걸 놓쳤네.”
정말이지 강도우는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다. 채우수도 참, 어쩌다가 이런 사람이랑 친구인 거지. 연두는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애써 미소 지었다.
“네에, 결혼 축하드려요.”
“응. 낮 공연 본 거야?”
“네.”
“아, 나도 얼른 봐야 하는데 이거.”
“오늘 공연 보러 온 거 아니에요?”
“응, 아니야.”
그렇구나. 그는 뭔가 더 떠들고 싶은 듯 보였으나 연두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말을 나눌수록 더 피곤한 상대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동족 혐오라고나 할까. 그러나 도우는 연두의 반응은 신경 쓰지도 않은 듯 다시 입술을 뗐다.
“여기 지하에 중극장 무대 작업했거든. 내 다인이가.”
“아, 네에.”
“멋있지.”
“네.”
“내가 결혼을 참 잘했어.”
“네에. 그런 것 같아요.”
어쩐지 뿌듯함이 어린 얼굴이다. 하하, 그를 따라 같이 웃은 연두가 문득 이상한 점을 감지한 듯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왜 여기 혼자 있어요?”
“귀찮게 군다고 나가서 구석에 가만히 박혀 있으래.”
“아.”
“아주 프로페셔널해. 남편은 내팽개치고 말이야. 멋있어, 기다인. 나보다 일이 우선이라 이거지. 정말…… 감동적이야.”
감동적이라기에는 볼 안쪽을 굴리는 그의 혀 놀림이 심상치 않다. 연두는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눈치 보듯 그에게 내뱉는 목소리가 조심스럽다.
“혹시 싸웠어요?”
“아니. 우린 안 싸워.”
“네.”
“절대.”
“네에.”
어지간히도 싸우는 모양이다. 한숨을 내쉬며 연락 없는 휴대폰을 확인한 도우가 로비를 슬쩍 훑고는 연두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 데이트 상대는.”
“주차비 정산하러 갔어요.”
“썸? 남자 친구?”
“남자 친구.”
“결혼할 거야?”
“아직 그 정도 사이는 아닌데요?”
그는 그제야 안심이라는 듯 슬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만나, 가볍게.”
뭐야, 채우수랑은 결혼하지 말라는 얘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도우가 다소 언짢은 표정으로 연두에게 말했다.
“근데 너 말이야. 채우수가 그렇게 별로야?”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우수가 생긴 건 나보다 못해도 그 정도면 괜찮잖아. 아냐?”
“네. 아닌 것 같아요.”
채우수가 훨씬 낫다는 식으로 대답한 것이었지만 어쩐지 강도우는 다르게 받아들인 것 같다.
“하긴. 내 탓이지 뭐. 아쉽겠지만 난 이미 결혼도 했고. 너도 마땅한 놈 없다 싶을 때 이왕이면 네 옆에 가까이 있는 우수도 한번 신경 써 보라고.”
“…….”
“아무튼 너 내 친구 어지간히 괴롭혀. 그래도 뭐, 너 때문에 그나마 사람 구실 하면서 살고 있는 놈이니까. 고맙긴 해, 노랑이 너한테.”
강도우가 뭐라고 떠들든 간에 연두의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은 것 같다. 계속 도우의 등 뒤만 바라보던 눈에 우수가 가까워지자 굳었던 연두의 얼굴도 활짝 피었다. 연두가 곧장 일어서서 우수의 옆에 붙었다.
“왜 남의 여자 친구 이름을 네 멋대로 불러.”
“그니까. 재미도 하나도 없어요.”
“질 떨어지는 네 말장난 상대하느라 힘들다잖아, 우리 연두가.”
자연스레 연두와 손가락을 얽은 우수가 이제야 도우를 내려다봤다. 허, 어이없다는 시선이 우수 얼굴에 붙었다.
“너 뭐야? 둘이 뭔데?”
“뭐긴.”
“뭔데 진짜. 언제부턴데? 그럼 노랑이가 말하는 남자 친구가 채우수 너였어?”
“간다. 연락할게.”
우수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등을 돌렸다. 와, 저것들 봐라. 등 뒤로 강도우의 허탈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연두가 고개를 까딱이며 도우에게 인사를 건네자 우수가 맞잡은 손에 힘을 줘 발걸음을 재촉했다.
“선배, 오늘 저녁은 그냥 집에 가서 먹을까요?”
“싫어.”
“왜 싫어?”
“잘 생각해 봐. 내가 왜 싫어할 거 같은지.”
그거야 당연히……. 집에서는 모든 일이 제 남자 친구의 몫이 되니까 그렇겠지. 피곤하다는 사람에게 집안일까지 시킬 순 없지 그래. 연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우수와 눈을 맞췄다.
“그럼 나 맛있는 거, 비싼 거 사 줘요.”
“뭐 먹고 싶은데.”
“왜, 우리 전에 갔던 거기 있잖아. 오리고기 막 고급스럽게 잘라 주던 곳.”
“호텔에 있는 거?”
“응.”
공연장 로비를 지나던 우수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가늘어진 그의 시선이 연두의 눈썹을 타고 내려와서는 입술 위로 매달렸다.
“무슨 속셈이지, 한연두.”
“나 속셈 같은 거 없는데? 돈 많은 남자 친구한테 밥 사 달라고 그러는 건데?”
없기는. 맞잡은 손을 들어 연두의 볼을 툭 건든 우수가 다시 발을 뗐다. 그의 손에 이끌려 따라가던 연두는 아쉽다는 양 그에게 치근덕거렸다.
“응? 귀찮으면 그냥 룸서비스 부르구요.”
“너 저녁을 먹고 싶은 거야, 다른 걸 먹고 싶은 거야.”
“둘 다.”
허, 얘 좀 봐라. 저를 올려다보는 눈꼬리가 의도적으로 한껏 접혔다. 뻔한 수작인 걸 알면서도 우수의 얼굴에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이 번져 나간다.
“넌 네가 가진 걸 너무 잘 이용해, 한연두.”
“난 가진 거 별로 없는데요.”
“나한테 없는 거 너한테는 다 있어.”
“그런 게 어디 있어.”
아, 가슴인가.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렸더니 우수가 웃음을 허공에 흩뿌렸다. 그는 제 입가에 번진 미소를 채 갈무리하지도 못하고서는 사뭇 단호한 눈빛을 연두에게 던졌다.
“여우짓 하지 마, 한연두.”
“여우짓은 무슨.”
“내가 여우 새끼를 키웠어.”
“키우긴 누가 키워요? 난 혼자 잘 컸는데.”
그래, 그렇겠지. 주차장으로 향하려던 우수가 여전히 제 옆에 붙어서 쫑알대는 연두의 이마를 살짝 눌렀다. 연두의 말을 이대로 다 받아치기에는 날이 너무 좋다.
“좀 걸을까.”
“차는?”
“잠깐 두지 뭐.”
“그래요, 그럼.”
바깥을 슬쩍 쳐다본 연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점점 길어져 산책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공연장 근처를 걸으며 오늘 봤던 공연 얘기를 쉴 새 없이 재잘대던 연두가 우수의 얼굴 뒤로 깨끗하게 펼쳐진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빨리 여름 됐으면 좋겠다. 휴가도 가고. 선배는?”
“난 별로. 여름 싫어.”
“선배 여름 싫어해요? 난 몰랐네.”
“한연두 네가 나에 대해 아는 게 대체 뭐 있어.”
“왜 이래, 나 다 알아.”
퍽이나. 못 믿겠다는 우수를 두고 연두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나 다 알아. 들어 봐요. 채우수가 좋아하는 과일은? 방울토마토.”
“그건 한연두 네가 좋아하는 거야. 토마토는 채소고.”
집에 방울토마토 많길래 그가 좋아하는 건 줄 알았는데. 눈동자를 크게 굴린 연두가 이건 맞힐 수 있다면서 다시 눈을 키웠다.
“그럼 채우수가 좋아하는 색깔은? 회색!”
“틀렸어.”
“검은색?”
“연두.”
뭐야……. 뭐야, 정말. 멋쩍음에 우수의 어깨를 툭 치고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입술 새로 삐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감춘 연두가 고개를 살짝 치켜올렸다. 뭔가 불만이 생긴 듯한 표정이다.
“근데 왜 강도우 오빠한테 우리 사귀는 거 말 안 했어요?”
“너도 태평이한테 아직 말 안 했잖아.”
“태평이는 내 동생이니까 경우가 다르지. 가족이잖아. 강도우 오빠한테는 말할 수 있지.”
“강도우도 가족 같은 존재야, 나한테는. 사고 때도 그랬고. 내가 등신 같은 짓 할까 봐 옆에서 신경도 많이 써 줬고.”
그랬구나. 그러니까 게이라고 의심을 했지. 히힛. 지난날이 생각나 작게 웃자 우수가 왜 웃냐는 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내가 너무 큰 오해를 하고 살았어요.”
“무슨 오해.”
“내 말 듣고 화 안 낸다고 약속해요.”
“들어 보고.”
“그럼 말 안 해.”
우수가 알겠다며 일단 말해 보라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방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 화가 나기는커녕 아직 웃기기만 한지 연두가 킥킥대며 고개를 저었다. 바람에 날리는 연두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쳐다보던 우수가 빨리 말하라며 재촉했다.
“나 사실, 선배랑 강도우 오빠랑 사귀는 줄 알았잖아요.”
“……뭐?”
“화 안 내기로 했어. 웃어요!”
이럴 줄 알았어. 우수의 표정은 잔뜩 굳었는데 그걸 보는 연두는 아직 즐겁기만 하다.
“나랑 누가 뭘 해? 사귀어? 강도우랑 내가?”
“아니…… 둘이 자꾸 붙어 다니고 그러니까 나는…….”
“너는, 너는 진짜 어떻게 된 애가 그따위 상상을.”
“화내지 마. 그리고 도우 오빠가 선배한테 뽀뽀까지 했잖아요.”
“한연두 너는, 하…….”
정말이지 말문이 막혀버린 듯 허, 어이없는 한숨만 내뱉던 우수가 돌연 눈빛을 바꾸었다.
“그런 논리라면 우리는 뭐야. 우리도 너 대학 다니던 내내 같이 붙어 다녔고 키스까지 했었어.”
“잉? 우리가 언제 키스를 했어요?”
“너 기억 안 나? 엘리베이터에 갇혔을 때. 네가 나한테 키스했잖아.”
“세상에, 그게 어떻게 키스야. 그건 선배가 숨을 못 쉬니까 내가 도와준 거지!”
“키스였어.”
“아니에요. 웬일이야, 정말.”
이제껏 착각은 되레 채우수가 하고 살았나 보다.
“기분 되게 나빠 보인다, 너.”
“나쁘죠. 그게 키스였다면 선배는 더 나쁜 놈이야. 기억 안 나요? 그 일 있고 나서 선배가 나 대놓고 무시하고…… 그날도 내 손 막 뿌리치고…….”
“네가 나한테 키스하고 나서 다른 새끼한테 가 버렸잖아.”
“세상에, 그래서 지금 내 탓이라는 거예요?”
“일정 부분 책임이 있지.”
“웃겨, 웃겨!”
정말이지 황당하기 짝이 없다며 제 가슴팍을 퍽퍽 두드리던 연두의 손을 휘어잡은 우수가 나직이 말했다.
“대체로는 내 잘못이 크고.”
“…….”
“그때 내가 조금이나마 용기 냈더라면 달라졌겠지. 네가 쓸데없는 오해도 안 하고.”
어쩌면 네 손가락에 반지 하나는 벌써 끼워 줬을지도 모르겠다. 뒷말은 그대로 삼킨 우수가 조용해진 연두의 손을 잡았다. 서로를 향해 멈췄던 발끝이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갔다.
“아까 도우 오빠가 뭐라고 한 줄 알아요?”
“뭐라고 했는데.”
“결혼할 생각이냐고 해서 아직 아니라고 하니까 그냥 가볍게 만나라던데?”
미친놈.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너 근데 왜 나는 선배고 강도우는 오빠야.”
“강도우 오빠가 내 선배는 아니니까.”
“오빠라고 부르지 마.”
“왜요? 왜? 내가 오빠라고 했다고 혹시 막 질투 같은 것도 하고 그러나, 채우수?”
응, 응? 아무래도 또 뭐 하나 잘못 걸린 모양이다. 우수의 귓가에 제 목소리를 욱여넣던 연두가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근데 우리 가볍게 만나는 사이 맞아요?”
“왜,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내가 먼저 물었잖아.”
“나는.”
말을 잠깐 멈춘 우수가 바지 주머니 속에 넣어 둔 반지를 손에 굴렸다. 언젠가는 한연두에게도 이 반지를 전해 줄 날이 올까. 굳었던 입매가 연두의 얼굴을 보자 느슨하게 풀렸다. 우수는 연두와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차분하게 목소리를 내보냈다.
“너만 좋다면 적당히 가볍지는 않게 만나고 싶은데.”
“그게 뭐야.”
“적당히 무겁게.”
적당히 부드럽고도 단호한 목소리에 연두가 코를 찡그렸다가 폈다. 이 정도면 채우수에게서 듣는 말 중에 제일 좋은 애정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만 갈까.”
“얼마나 걸었다고 벌써 가요.”
“하고 싶은 게 생겼어.”
어떤 거, 하고 그를 올려다보자 입술이 먼저 붙었다. 짧게 붙었던 입술은 코를 스치며 떨어지는가 싶더니 연두의 뺨까지 붙든 채로 조금 더 길게 입술을 머금었다. 돌발 행동에 깜짝 놀란 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연두가 주위를 둘러보며 우수의 옆구리를 찔렀다.
“미쳤나 봐, 길에서.”
“뭐 어때.”
대체 이런 뻔뻔함은 그동안 어디에 숨겨 두고 살았던 건지. 그조차도 제 용기에 웃음을 흘리면서 연두의 손에 깍지를 꼈다.
“한연두.”
“응?”
“좋아해.”
연신 주위를 살피며 창피하다고 말하던 입술이 이제야 조용해졌다. 연두를 흘깃 내려다본 그가 깍지 낀 손을 들어 연두의 뺨을 툭 건드리자 이리저리 흔들리던 눈동자가 그에게 닿았다.
“왜 말이 없어, 한연두.”
“그냥.”
“그냥?”
“그냥…… 선배가 하는 말 꼭꼭 씹어 먹으려고.”
그의 눈빛까지 씹어 먹으려는 듯 미간을 좁히며 눈을 부릅뜬 연두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튼 한연두. 그 웃음소리에 덩달아 입꼬리를 올린 우수가 시선을 돌렸다. 연두가 좋아한다는 여름은 굳이 기다리지 않아도 코앞에 다가온 듯하다. 어느새 잎이 무성해진 가로수를 보던 우수가 다시 연두를 바라보며 눈꼬리를 휘었다. 그가 보는 세상이 온통 연두색으로 푸르게 덮인 어느 오후였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