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므로 나는
처음에는 그냥 택시를 잡아탈 생각으로 채우수 본가에서 나왔는데 몇 발짝 걷다 보니 깨달았다. 내가 지갑도, 휴대폰도 안 챙겨서 나왔다는 것을. 그렇다고 해서 딱히 그런 걸 챙길 시간도 없었지만 말이다.
진짜 보잘것없네. 그나마 옷이라도 번듯한 걸 입고 있어서 다행이었나. 아니다. 뭘 입었다고 한들, 채영환 앞에서 나는 하찮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래도 날이 춥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바람이 조금 차갑긴 했지만 걷기에 나쁘지만은 않다. 여기서 우리 집까지 걸어가면…….
아, 나 너무 구질구질했다. 그냥 집까지 태워 준다고 할 때 고맙다고 할걸. 괜히 자존심만 내세워서.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돌려 조금 전까지 내가 있던 곳을 바라봤다. 드라마에서나 볼 듯한 높은 담벼락은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 같다. 채우수는 저런 곳에 살던 사람이었구나. 새삼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지금 내 처지와 비교됐다.
저런 걸 보여 주고 날 기죽이려고 저 집으로 데려간 건가. 그런 거라면 반은 성공하고 반은 실패한 셈이다. 기는 죽었지만 내가 뭘 제대로 본 건 없으니까.
사실은 채영환으로부터 들은 얘기는 많았는데 완벽하게 이해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도 그가 내뱉은 몇 가지 얘기는 흡수되지 않고 머릿속만 빙빙 맴돌 뿐이다.
‘아가씨가 충격이 꽤 큰가 보네. 숨 쉬어요, 편하게.’
채영환의 강강한 목소리는 뱀이 되어 내 지난 시간을, 숨통을 얽어맸다. 나는 채영환의 말을 도로 토해 내며 고개를 저었다.
‘믿기진 않겠지만 그렇게 부정한다고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지. 아가씨가 조금 전까지 있던 우수 방. 그날 아가씨 아버지, 한수열 씨가 들어간 곳도 바로 그 방이고.’
아니다. 채우수한테 직접 물어봐야지, 난 그냥 그렇게만 생각했다. 내가 들은 얘기가 진짜가 맞는지, 맞다면 그동안 왜 숨겼던 건지. 그 뻔뻔한 얼굴을 당장 제대로 마주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살 깎아 먹는 말 같다만, 아가씨한테도 우수가 그리 득 될 건 없지. 애초에 사람 구실도 제대로 못 하는 놈한테 거머리같이 붙어 있어도 뭐 하나 떨어질 게 없다 이 말이야. 이해는 해요?’
나는 당장 채우수를 찾아가 따져 묻고 싶었음에도 그를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그의 얼굴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채우수의 얼굴을 마주하면 내가 방금 들은 엄청난 얘기들이 모두 진실이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충격에 머리는 굳었음에도 다리는 착실히도 움직여서 어느덧 골목 어귀로 나왔다. 마치 이제야 내 세상에 도달한 것처럼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몇 명 걸어 다녔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게도 익숙한 길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걸어 올라가면 내가 중학생 때까지 살던 곳이 나온다. 채영환 말이 사실이라면 이 길을 기점으로 두 사람의 생사가 갈렸다는 말이겠지.
나는 오랜만에 옛 동네에 한번 가 볼까 생각했다가 말았다. 어차피 내가 살던 집은 다 허물어지고 신축 아파트가 들어서서 지난 흔적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흘러 버린 나와 채우수의 시간처럼.
순간 욕지기가 치밀어 올라 입을 틀어막았다. 채영환 앞에서 꾸역꾸역 삼킨 이야기들이 소화가 되지 않았나 보다. 길가에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헛구역질을 하고 있자 지나가는 아주머니가 발걸음을 멈추고 내게 다가오셨다.
“아이고, 아가씨. 괜찮아요? 어디 안 좋아요?”
나는 괜찮다고 대답하고는 감사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걱정이 됐던 건지, 발걸음을 옮기던 아주머니는 다시 내게 돌아와 당신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자두 맛 사탕 하나를 건네주셨다.
아주머니께서는 우선 뭐라도 달콤한 거라도 먹고 힘들면 어디 앉았다 가라고 하시면서 은근슬쩍 내 배를 쳐다보셨다. 임신부라고 오해를 하셨던 걸까. 난 감사하다고 꾸벅 목을 숙인 채로 아주머니와 반대 방향으로 다시 발걸음을 뗐다.
임신 같은 것을 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지만 나는 이 와중에도 만약 내가 채우수의 아이를 가졌다면 채영환의 반응이 어땠을지 상상해 봤다. 아마 오늘 같은 모습은 아니었겠지. 어쩌면 더 경멸 섞인 시선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오전, 채우수의 집에 들이닥친 채영환이 날 보고 짓던 표정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그도 나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당황한 정도로 따지자면 채영환 쪽이 훨씬 더 컸다. 그런 걸 보면 채우수가 아버지를 닮은 모양이다.
채우수의 집에서 나는 꽤 자연스럽게 채영환을 맞았다.
‘안녕하세요, 한연두입니다…….’
아버님이라고 불러야 할지 의원님이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 인사 끝에 내 이름만 붙였다. 태연한 내 인사에 짐짓 놀란 것 같던 채영환은 지금 그깟 것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얼굴로 채우수가 누워 있는 방으로 눈길을 돌렸다.
‘선배는 자고 있어요. 오늘도 약 먹고 자서 아마 깨워도 못 일어날 거예요, 아직.’
반쯤 열린 침실을 보던 채영환이 내 말에 “얼빠진 것.” 하고 혀를 찼다. 채우수를 두고 한 말이었겠지만 내 얼굴을 보고 던진 말이어서 그런지 꼭 내게 하는 말 같았다. 나는 그의 말처럼 얼빠진 표정으로 차라도 내와야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멈췄다.
소파에 앉은 채영환은 멀뚱히 서 있는 날 보고 어째서 지금 이 시간에 내가 여기 있는 거냐고 물었다. 오늘 휴무라며, 출근 안 했다고 대답하자 채영환의 눈썹이 비뚤게 올라갔다. 그가 던진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나도 알았지만, 채영환도 답을 뻔히 알고 던진 질문이 아니었겠나 싶다.
나는 뻘쭘한 얼굴로 할 말을 찾다가 마침 적당한 말이 생각나 보내 주신 선물은 잘 받았다고 채영환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내 생각엔 그는 아마 거기서부터 기분이 나빴던 것 같다. 하긴 나였어도 그랬겠지. 떼어 내려고 보낸 선물을 고맙다고 덥석 받아 놓고는 찰거머리처럼 더 달라붙었으니 징그럽기도 했겠지.
한심하다는 듯 날 위아래로 훑던 그의 시선이 내 목덜미 부근에 머물렀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나는 잠깐 숨을 멈췄다. 설마 채우수가 또 자국을 남긴 걸까, 민망함에 애꿎은 옷을 목 위로 잡아당겼다.
어쨌거나 나는 채영환 의원이면 몰라도 채우수의 아버지 앞에서는 그리 당당한 입장은 아니었다. 채우수에게 한껏 젠체하긴 했어도 내 분수를 잘 아는 건 누구보다도 나였으니까. 제 아들 짝으로 나 같은 여자를 환영할 부모는 사실 별로 없을 것이다.
채영환은 겉으로는 인자한 척 굴면서 잠시 조용한 데서 얘기 나눌 시간이 있냐며 물어 왔다. 밖으로 나갈 수 있냐는 말이었다. 나는 채우수가 자고 있는 이 집보다는 밖이 더 낫다는 생각에 그게 좋을 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한적한 카페로 갈 생각인 듯했던 채영환은 보좌관과 몇 마디를 나누더니 채우수의 본가로 방향을 틀었다. 그 결정에 내 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뒷자리에 앉아 급히 챙겨 입은 코트 앞섶을 가지런히 모았다.
공간이 주는 위엄이 있는지, 채우수의 본가에 들어서자마자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숨이 턱 막혔다. 본디 내가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은 아니나 그 집이 가진 기운에 압도당했던 것 같다.
채영환의 아내이자 채우수의 어머니와도 짧게 인사를 나눴다. 채영환은 잠시 업무 처리를 할 게 있으니 그동안 채우수의 방을 구경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조금 의아했지만 나쁠 건 없었다. 채우수가 고등학교 때까지 살던 방이라니 궁금하기도 했고.
채우수의 어머니는 잠시 당황하는 듯했으나 채영환과 눈짓을 주고받더니 날 2층으로 이끌었다. 흡사 예비 며느리를 대하는 듯한 환대에 나는 조금 멋쩍어졌다. 어쩌면 내가 괜히 지레 겁먹었던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채우수의 방은 뭘 구경하고 말고 할 게 전혀 없었다. 지금의 내 머릿속만큼이나 텅 빈 상태로, 이 방에서 도대체 뭘 봐야 할지 몰라서 나는 눈만 끔뻑였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채영환은 그것마저도 다 계산하고 행동했던 것 같다.
서재로 날 다시 부른 채영환은 제 아들 방 구경은 잘했냐고 물었다. 뭘 구경해야 할지 모르겠던데요, 하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굳이 말을 길게 늘이기 싫어 “네.” 하고 짧게 대답했다.
채영환은 국회의원답게 웃는 낯짝으로 사람을 깔보는 데 용했다. 하지만 그의 의도와는 달리 나는 정말이지 가진 거라곤 알량한 자존심 하나뿐이었는지 그가 일부러 상처 주려고 던지는 멸시 어린 말은 딱히 아프지도 않았다.
‘우리 우수가 아가씨 같은 스타일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요. 그 녀석 연애에는 영 젬병이다 싶더니, 딴 건 안 따져도 여자 몸은 따졌나 보네. 아, 혹시 실례되는 말인가? 나는 칭찬으로 한 말인데. 요즘 말 한마디마다 예민하게 구는 아가씨들이 너무 많아서 말이지.’
채영환은 날 채우수의 대학 후배나 직장 동료가 아닌, 그저 한때 제 아들이 데리고 놀 만한 아가씨로 치부했다. 그의 말투는 얼핏 들으면 부드러웠지만 문장을 하나하나 따져 봤을 때 결국은 이 말이었다. 순진한 제 아들 몸으로 꼬여 낸 보잘것없는 계집애.
몸으로 꼬신 건 당신 아들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냥 덩달아 같이 웃었다. 이런 말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았으니까.
채영환은 몇 가지의 내 신상 정보를 더 물었다. 태평이에 대한 것도, 또 큰아빠에 대한 것도. 그는 “혹까지 달고 사느라 고생이 많겠군.” 하며 내 유일한 가족들을 두고 혹 취급을 하기도 했다.
마치 사랑이라는 감정에 함몰된 머저리가 된 기분이었다.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혹을 떼면 채우수의 곁에 당당히 있을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치욕스럽게도 나는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다.
채영환과의 대화 주제는 다소 뜬금없이 널을 뛰었다. 채우수에 대한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던 채영환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제 아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한번은 그런 적이 있었지. 우수 그놈은 어릴 때부터 그랬어. 사내새끼가 나약해 빠져서는. 어디서 엄마 잃은 개새끼 하나 불쌍하다고 집까지 데려와서는 어찌나 지극정성이었던지.’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채우수의 어린 시절 미담이라고 생각하며 들었다.
‘한데 그런 똥개 새끼는 우리 집에 별 도움이 되는 개는 아니거든. 키우더라도 좀 제대로 된, 혈통 좋은 개를 데려와야지. 어디서 난지도 모르는 똥개 새끼를 좋다고 데려와.’
‘…….’
‘하여간 쓸데없이 정만 많은 놈이지. 가릴 데 안 가릴 데도 모르고. 동정이 지나쳐.’
짧은 눈치로도 날 빗댄 얘기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채우수가 날 똥개 취급하긴 했지만 설마하니 날 동정해서 그랬을까. 나는 이를 사리물고는 채영환의 눈을 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저는 그래서 선배를 좋아해요.’
나는 잔정 많은 채우수가 좋다는 말이었지만 채영환은 다르게 해석했던 모양이다. 물끄러미 날 쳐다보던 그는 날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채영환이야말로 진심으로 날 동정하는 것 같았다. 한수열의 딸이었던 한연두를 말이다.
그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가 떠오르자 뒤늦은 모멸감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조금 전 아주머니로부터 받은 자두 맛 사탕을 입에 물었다. 혀를 씹고 싶은 마음으로 애꿎은 사탕을 대신 씹었다. 깨드득 사탕이 부서지는 소리가 내 마음 같았다.
그렇게 또 얼마나 걸었는지를 모르겠다. 집으로 가는 방향도 잃어버렸다. 사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보나 마나 채우수가 날 찾을 게 뻔한데, 당장은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지쳤다. 짜증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 누군가를 붙들고 속을 털어놓고 싶었는데 당장 생각나는 사람도 없었다. 아니, 없다기엔 거짓말이다. 아까부터 생각나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으니까.
대체 채우수는 날 얼마나 길들여 놓은 건지. 마땅히 갈 곳도, 의지할 사람도 없는 나는 이 순간 기댈 사람이라곤 채우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흘렀다.
* * *
채우수는 별다른 말 없이 그래서 지금 어디냐고 물었다. 식당 전화기를 붙잡고 “여기가 어디더라…….”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리자 나이 지긋한 사장님이 옆에서 큰 소리로 상호명을 말씀해 주셨다. 그 소리를 들은 건지 채우수는 알겠다며 얼마 안 걸리니 꼼짝 말고 거기 가만히 있으라며 몇 번이나 내 대답을 받아 냈다.
“아, 알았다고!”
반복되는 얘기에 결국은 짜증을 버럭 내고 전화를 끊었다. 머쓱해진 나는 사장님께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식당 밖으로 나가서 채우수를 기다리려고 하자 사장님이 그냥 안에 앉아 있어도 된다고 날 붙드셨다.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싶었던 건지 그냥 대화 상대가 필요했던지, 사장님은 내게 남자 친구랑 싸웠냐고 물어보셨다가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더 이상 말을 잇진 않으셨다. 대뜸 찾아와서 전화 한 통만 하게 해 달라는 무례한 손님도 손님이라고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주셨을 뿐.
근처에 있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차를 반쯤 비울 때쯤 채우수의 차가 식당 앞에 멈춰 섰다. 나는 사장님께 감사하다고 인사를 전하고는 식당 밖으로 나갔다. 그새 운전석에서 내려 내게 달려오던 채우수는 날 잠시 쳐다보더니 내 손을 붙잡아 조수석으로 끌고 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날 조수석 문을 열었고 나도 아무 말 없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어디 도망이라도 갈까 걱정됐는지 내 자리 안전벨트까지 채운 그는 차 문을 닫고는 식당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채우수는 사장님께 고맙다고 돈을 건네는 것 같았다. 돈지랄하는 꼴이 보기 싫어서 나는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얼마가 지났을까, 채우수는 뭔가를 들고 운전석에 올랐다. 뭘 들고 왔는지 궁금했지만 그와 말하기는 싫어 입을 다물었다.
“그냥 돈은 안 받으신다고 하셔서. 그럼 음식 아무거나 하나 포장해 달라고 부탁했어.”
통화비치고는 과하다고 생각했지만 꾹 다문 입술은 열릴 줄 몰랐다. 채우수의 시선이 내 왼쪽 뺨에 따갑게 달라붙었다. 내가 그냥 눈을 감아 버리자 채우수는 작게 한숨을 내뱉은 뒤 차를 움직였다.
우리는 말 없이 한참을 달렸다. 이따금씩 채우수의 한숨 소리라거나 침 삼키는 소리 같은 게 들렸지만 무시했다. 그도 딱히 날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우습게도 채우수의 옷에 남은 향수 잔향이라거나 그의 한숨 소리 같은 것만으로도 내달리던 심장이 조금은 안정되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사실이 지긋지긋해서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겨우 그런 것에 위안이 된다는 게 어이가 없어서.
차가 멈춘 건 대략 한 시간쯤 지나서였다. 집까지 이렇게 먼 거리였던가. 식당에서 채우수에게 연락하기까지 대체 얼마나 걸은 거냐고 생각하며 나는 눈을 떴다.
“……뭐예요?”
도착한 곳은 집이 아니었다. 나는 눈앞에 보이는 익숙한 건물에 기가 차서 채우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심한 얼굴로 내 시선을 받아치던 그는 벨트를 풀고 차를 빠져나가서는 조수석 문을 열고 말했다.
“내려.”
“뭐냐고 물었잖아, 내가.”
“태평이한테 물어봤어. 어머니 여기 모셨다며.”
“누가 지금 그거 물었어요? 여길 왜 와? 누가 여기 오고 싶댔어?”
“나중에 따지고 일단 내려. 시간 얼마 없어.”
채우수를 노려보고만 있자 날 내려다보던 그가 제 몸을 차 안으로 넣고는 조수석 안전벨트를 풀었다. 안 내리겠다고, 싫다고 버둥거리니 급기야 그는 날 안다시피 해서 밖으로 끄집어냈다.
“싫다잖아, 내가! 이게 무슨 짓이에요? 싫다고. 내리기 싫다고!”
“싫어도 가. 가서 어머니 뵙고 와.”
“무슨 억지야? 나한테 왜 이래? 왜 나한테 묻지도 않고 함부로 이래?”
“한연두 너야말로 억지 부리지 말고 어서 다녀와. 난 건물 밖에 있을 거니까.”
정말이지 나는 채우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언제 납골당에 데려다달랬나. 입술을 짓씹으며 그를 쳐다보고 있자 내 손을 잡아챈 채우수가 앞장서서 발을 옮겼다.
“난 안 가요. 가기 싫어. 지금 와서 이런다고 뭐가 달라져? 이런다고 내가……. 이런다고 내가 선배를!”
“날 어떻게 해 달라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말고.”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요? 선배 같으면 지금 내가 여기 와서 엄마 보고 싶겠어? 오늘 내가 무슨 얘기를 들은 줄은 알고 이래요?”
“한연두.”
“왜!”
“다녀와. 다녀와서 얘기해.”
“싫어. 안 갈 거야. 빨리 집에나 가요. 여기 오자고 선배 부른 거 아니야.”
나는 채우수의 손을 뿌리치고 등을 돌려 차로 향했다. 웃기지도 않아. 어떻게 여기 올 생각을 해. 어떻게 감히. 어떻게. 정신없이 움직이던 발이 멈춘 건 채우수가 내 어깨를 잡아 돌렸을 때였다.
“나라고 여기 오고 싶었겠어?”
“……뭐라구요?”
“내가 무슨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을지는 생각 안 해 봤지, 너.”
내 어깨를 잡은 채우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니, 어쩌면 내가 떨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 이 와중에 선배 마음까지 생각해야 해요?”
어이가 없어서 그냥 웃었다. 채우수는 결국 막다른 곳에서 자기 생각뿐이다. 이런 사람을 내가, 이런 사람이 좋다고 나는 오늘 하루 반나절을……. 나는 언제 흘렀는지도 모르는 눈물을 닦아 냈다. 옷자락을 부여잡은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렸다.
“나 솔직히 말하면 지금 선배 얼굴도 보기 싫어요.”
“알아.”
“알아? 아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막무가내야. 지금 와서 이런다고 뭐가 달라져?”
“달라지는 게 없을 거니까 이러는 거잖아.”
그는 차분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내 얼굴을 훑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걸 예감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내 딴에는 무슨 짓이든 해 보려는 거고.”
“…….”
“오늘 여기 온 건 다른 이유는 없어. 네 말대로 넌 지금 내가 보기 싫을 거고, 그렇다고 태평이 붙들고 하소연할 수도 없을 거고. 결국 넌 또 입 꾹 다물고 혼자서 삭이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굴겠지. 네가 그러는 거 꼴 보기 싫어, 난.”
“…….”
“가서 엄마 앞에서라도 털어놓고 와. 내 욕을 하든 뭘 하든. 혼자 끙끙대면서 참지 말고.”
멍청이. 채우수는 내가 지금 왜 엄마가 보고 싶지 않은지 제대로 모른다. 정작 내가 참고 있는 게 뭔지도 모른다.
“한연두.”
“그래도 오늘은 아니에요. 나 밖에서 이러기 싫어.”
울음을 참아 내는 입가가 잘게 경련했다. 나는 그 꼴을 보이기 싫어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하아, 머리 위로 채우수의 한숨이 짙어졌다. 그는 내 어깨를 잡은 손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가만히 두고는 엄지만 살짝씩 꿈틀거렸다.
우리는 정말이지 위로를 하는 법도 받는 법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나는 채우수의 옹졸한 위로가 같잖아서 그의 손을 뿌리치고 등을 돌렸다. 날 뒤따르던 채우수가 몇 걸음 만에 내 앞을 막아섰다. 그는 내 턱 끝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보고 목울대를 꿀렁이더니 목소리를 겨우 내보냈다.
“네 마음 다 알아.”
“……알아? 선배가 알긴 뭘 알아.”
“…….”
“선배는 내 마음 하나도 몰라. 내가 오늘, 무슨 생각으로 그 집에서 나왔는데. 무슨 생각으로 선배한테 연락했는데. 대체 선배가 뭘 안다고 날 위하는 척 떠들어?”
“미안해.”
하, 밑도 끝도 없는 사과가 잘난 입술을 비집고 머리 위로 쏟아졌다. 내가 채우수에게 고작 이런 말이나 듣겠다고. 내가 겨우 이런 사람을 좋아한다고…….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토해 낸 울음을 제가 모조리 되삼킨 양 얼굴을 구긴 채우수는 또다시 버석한 말을 내뱉었다.
“미안해.”
“…….”
“미안해, 한연두.”
“…….”
“너 데리러 가는 내내 그 생각만 했어. 네가 무슨 얘기를 어디까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그는 오랜 잠수를 끝낸 사람처럼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얼마나 속이 없는 사람인지, 그 짧은 와중에도 채우수가 걱정되어 얼굴이 굳었다.
“……그걸 들은 네가 내 얼굴을 마주하고 내 얘기를 들어 줄지도 모르겠지만.”
“…….”
“미안하다는 말만이라도 제대로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
“그 생각만 하면서 너한테 왔어.”
그런 내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간신히 쥐어 짜낸 그의 목소리가 상처를 비집고 쑤셔 댔다. 뻔뻔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는 이런 관계였던 것이다. 걱정은 항상 내 몫이고 그는 제 속만 편히 털어 내면 되는.
“그래서 선배는 나한테 하고 싶은 말 다 해서 이제 속이 시원하겠네요.”
“…….”
“한 사람이라도 시원해졌으면 됐네. 가요, 이제. 어차피 6시 지났어. 못 들어가.”
나는 손등으로 턱에 고인 눈물까지 훔쳐내고는 그를 지나쳐서 차로 향했다. 산이라 그런지 저녁 공기가 차갑게 내려앉아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코트를 여미며 어깨를 옹송그리자 뒤에서 덮친 큰 그림자가 제 코트를 벗어 내게 겹쳤다.
“누가 지금 이런 거 해 달래?”
결국 참지 못하고 새된 소리가 나갔다. 채우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땅에 떨어진 그의 코트를 주워 손으로 툭툭 털더니 다시 내 어깨 위에 걸쳤다. 신경질이 났다. 그가 내게 베푸는 친절은 모조리 동정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추워. 입고 있어.”
“하나도 안 추워.”
“고집부리지 말고 입어.”
“웃겨. 고집은 누가, 대체 누가 고집부렸다고 그래요? 싫다는 사람 여기까지 끌고 온 것도 선배고, 고집대로 저 하고 싶은 말만 한 사람도 선배야. 나는, 내 마음은 어떤 줄도 모르면서 선배 혼자 속 편하게!”
“…….”
“이럴 줄 알았으면 선배한테 연락하지 말 걸 그랬어. 아니,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냥 선배 좋…….”
좋아하지도 말 걸 그랬어. 소리치면서 울고 싶었지만 나는 입술만 깨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삼켜진 뒷말은 오히려 내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들어 깊숙이 박혔다.
“네 마음이 어떤데.”
“…….”
“한연두, 고개 들고 나 봐.”
채우수는 가늘게 경련하는 내 어깨를 붙들었다. 한연두. 꼿꼿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다시금 부르자 방울진 눈물이 투두둑 쏟아졌다.
“응? 연두야.”
“……나는 진짜 선배가 싫어요.”
“…….”
“근데 선배보다 싫은 건 나야. 아무것도 모르고 채우수를 좋아하게 된 내가 더 끔찍해. 오늘 선배 아버지한테 그날 일을 듣는 와중에도 나는, 멍청하게, 나는…….”
“그러게 내가 시작하지 말자고 했잖아.”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차마 다 이을 수도 없는 문장이었지만, 채우수의 날 선 말에 뒷말이 댕강 잘려져 나갔다. 나는 고개를 들어 표정을 남김없이 지운 그를 올려다봤다. 무슨 말이냐고 굳이 묻지 않았다. 앙다문 입술에서 뺨을 덧그리며 올라간 시선이 차갑기 그지없는 그의 눈에 멈췄다.
“나 좋아하지 말라고 했잖아. 항상 시작은 한연두 네가 먼저 했어. 이제 와서 나보고 뭘 어쩌라고 대체!”
그는 아직도 모른다. 내가 얼마나 저를 좋아하는지. 그가 내뱉은 단어 하나하나에 내가 얼마나 기뻐하고 얼마나 맘 졸이는지. 태껏 내 뒤에서 지원했다는 그깟 돈보다도 그가 불러 주는 내 이름 세 글자가 더 가치 있었다는 것을. 그 다정한 목소리를 스스로 끊으려고 했다는 끔찍한 사실이 내게 닥친 불운마저 지워버렸다는 것을. 그리하여 모든 것을 알게 된 지금 이 순간에도 저 말을 토해 낸 그가 되레 걱정되는 내 마음을, 이 멍청한 인간은 아직도 모른다.
* * *
화가 난 한연두는 나를 차 버렸다. 당연히 물리적으로 찼단 말이다. 이 와중에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온 힘을 가득 실은 발길질에 나는 정강이가 이대로 부러지는 줄만 알았다. 물론 겉으로 티는 안 냈지만.
“채우수 이 멍청아!”
한 번으로는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반대쪽 정강이에 한 대가 더 날아들었다. 악, 이번에는 나도 참지 못해 소리를 냈다. 아팠다.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너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한연두!”
“채우수 너야말로 뭐 하자는 거야!”
너라니. 이제 아주 맞먹겠다는 건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리자 한연두가 씩씩대며 쳐다봤다. 연두의 젖은 눈에는 원망보다는 다른 감정이 스친 듯했다.
“왜, 뭐! 기분 나빠? 너는 내가 고작 너라고 했다고 기분 나빠?”
“한연두!”
“내 이름 부르지 마, 짜증 나니까!”
연두가 억울해 죽겠다는 듯이 울음을 토해 냈다. 네 이름마저 못 부르면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미안하다는 말도 감히 내뱉지도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엉엉 목놓아 우는 소리만 점점 짙어졌다.
장소가 장소였던 탓일까. 한 명은 울고 한 명은 그 울음을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듯했다. 그저 우리 사이를 엮는 누군가가 떠났겠거니 생각하겠지. 그래, 아주 틀린 얘기도 아니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울던 연두는 한참을 어깨를 들썩이더니 급기야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내 코트를 연두에게 둘러 주며 무릎을 굽혀 마주 앉았다. 긴 코트가 땅에 쓸렸다.
“한연두.”
“부르지 마, 말하지 마! 자꾸 마음에도 없는 말 할 거면 그냥 입 다물고 있어!”
울음으로 꽉 짓눌린 연두의 목소리가 겨우 삐죽 빠져나왔다. 연두는 제 얼굴을 가린 손바닥을 떼고는 말문이 막힌 나를 향해 날 선 시선을 날렸다. 눈물을 머금은 시선은 날이 섰다기엔 그 끝이 너무나 무뎠다.
“뭐? 좋아하지 말라고 했다고? 시작은 내가 먼저 했다고? 웃기지 말아요! 선배는……, 나는!”
나는 연두가 미처 삼키지 못하는 감정을 대신 삼키며 시선을 떨구었다. 목이 뜨거웠다. 열이 끓어 목구멍이 턱턱 막혀서 눈자위까지 붉어지는 듯했다.
“네가 내 마음을 알긴 뭘 알아? 선배는 내 마음 하나도 몰라. 나는 오늘, 채영환한테 그 얘기까지 듣는 나는!”
“…….”
“내가 얼마나 비참, 흐윽…….”
연신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 내던 연두가 입술을 짓씹으며 턱을 달달 떨었다. 턱 끝에 고인 눈물이 투두둑 무릎으로 떨어졌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등신같이 멍청한 눈으로 한연두를 응시했다. 연두가 묶어 둔 내 입은 여전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한연두는 그런 내가 더 짜증 난다는 듯이 주먹으로 내 어깨를 내리쳤다. 그게 자극이 됐는지 내 눈에 고였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얼룩진 시야가 그제야 맑아졌다. 아랫입술을 꽉 누른 연두가 내 얼굴을 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젖은 속눈썹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이제 여러 갈래로 길이 나뉘었다.
“이 멍청아. 언제까지 그럴 거야, 언제까지!”
“…….”
“내가 울고 있으면 그냥, 흐윽, 그냥…… 안아 달란 말이야!”
짜증이 한가득 실린 손바닥으로 내 어깨를 밀어내던 연두가 내 품으로 무너졌다. 나는 사죄라도 하듯이 양쪽 무릎을 꿇으며 연두를 안았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움직임이었지만 오늘 얼굴을 다시 마주한 순간부터 저를 품에 안고 싶었던 내 마음을 한연두는 아마 모를 것이다.
“왜 그랬어, 왜, 왜!”
연두의 외침이 내 품에서 먹먹하게 흩어졌다.
“아무것도 몰랐잖아,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나는…… 흐윽, 난 선배를 대체, 몇 년을…….”
연두는 흐느끼며 내 어깨에 제 이마를 붙였다. 저를 놓지 말라는 듯이 낑낑거리면서 자꾸만 내 품으로 안겨 왔다. 그런 연두를 나는 감히 달랠 수도 없어 보잘것없는 손바닥으로 말없이 연두의 뒤통수만 어루만졌다.
나는 우리의 시간이 이대로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욕심내지 않을 테니 그냥 이렇게, 너를 내 품에 안을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뭐라도 붙잡고 싶은 간절한 손가락이 연두의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었다. 연두의 눈물로 젖어 든 니트가 염치없는 마음을 싸늘하게 식혔다.
“한연두.”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서 입술만 달싹거렸다. 수도 없이 예상했던 이별 시나리오였는데, 차마 입 밖으로는 내뱉을 수가 없었다. 같이 있으면 한연두가 지금처럼 무너질 줄을 알면서도 나는 그 부서진 조각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연두야.”
그러니까 나는 원래 이렇게 태어난 놈인 것이다. 어미를 죽이고 태어나서는 평생 남들에게 기생하며 살도록. 내 우울한 생을 사랑하는 사람에게까지 덧씌우며 졸렬하게.
나는 씨발 대체 얼마나, 어디까지 지질해져야 하는 것일까. 입술 새로 터뜨린 비웃음이 귓가에는 울음처럼 번졌다.
“나 좀 봐, 한연두.”
잘게 떨리는 한연두의 어깨를 손으로 잡아서 내게서 떼어 내려 했다. 연두는 싫다며 내 어깨에 묻은 얼굴을 도리질했다. 손에 힘을 줘 억지로 떼 내자 연두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그러지 말고 나 좀 봐 줘, 연두야.”
“…….”
“연두야, 응? 나 좀…….”
“…….”
“한 번만…… 한 번만 봐 줘. 제발.”
나는 쪽팔림도 무릅쓰고 한연두에게 무릎 꿇고 애원했다.
제발 나 좀 봐 달라고. 잘못했다고. 그러니 제발. 제발 날 버리지 말아 달라고. 그나마 널 보면서 지금껏 살아왔는데 너마저 없으면 내 삶은 이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뱉지도 못한 뒷말들은 혀끝에서 사라졌다. 그저 오기로 뭉친 눈물만 버석한 얼굴 위로 뚝뚝 떨어졌다.
연두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코가 빨갛게 변했다. 연두는 내 얼굴을 보더니 다시금 뭔가에 사무친 듯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막상 시선이 마주치자 등신같이 또 입이 굳어 연두의 어깨를 부여잡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뭐 하는 거야, 씨이……, 봐 달라며! 보라며!”
한연두는 제가 가진 짜증을 내게 다 털어놓을 생각인 듯했다. 그걸 털어놓기 무섭게 나로 인한 짜증이 다시 채워지는 것 같았지만. 주먹 쥔 손으로 날 때리던 연두가 고개 숙인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어떻게든 절 보게 만들겠다는 듯이 힘을 줘 끌어 올렸다.
“봐! 내 얼굴 봐 봐요! 왜 선배가 울어? 뭘 잘했다고 울어?”
선배가 울면 내가 뭐가 돼. 정말이지 억울하다는 듯이 징징대는 목소리가 또다시 나를 찾았다. 대학 시절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실험 보고서에 짜증 내고 과제에 투정 부리던 그때처럼. 한연두, 하고 부르면 네? 하며 눈을 키우고 뺨을 밝히던 그때처럼, 나 같은 놈에게도 꼬박꼬박 선배라고 부르던 그때처럼.
나는 한연두의 눈을 보며 우리의 지난 시간을 되짚었다. 풍화된 기억들이 지금껏 미처 깨닫지 못했던 감정들을 몰고 왔다.
연두야, 어쩌면.
내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연두의 손바닥 아래에 맺혔다. 나는 그 손바닥에 겨우 닿은 내 입술을 비비며 시선을 끌어 올렸다.
어쩌면 나는.
“왜 그랬어, 왜! 내가 얼마나, 선배를……. 나는 선배가 그렇게 힘든 줄도 모르고……, 흐윽. 왜 날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로 만들어. 왜, 왜!”
……한연두, 나는.
“왜 죽으려고 했어, 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한연두 널 이기지 못할 것 같다.
연두가 내 뺨을 감싼 손으로 내 목을 감으며 안겼다. 나는 내게 쏟아지는 감정까지 떠안으면서 잘게 흐느끼는 연두를 껴안았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품으로 무너졌다.
한연두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했던 건 내 자만이고 오만이었다. 연두는, 내 생각보다도 훨씬 바보 같은 한연두는 그 모든 걸 알고도 결국은 나를 걱정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선배가, 흐윽, 죽었으면 좋겠다고 싫어했잖아, 흐윽.”
이 와중에도 한연두는 불손했던 제 마음을 탓한다. 진심인 듯 진심 아닌 듯한 절절한 후회에 나는 고개를 돌려 연두를 쳐다봤다.
“진작 말하지 그랬어. 흑, 내가 알았으면, 나는! 선배가, 흐윽, 그렇게.”
두서없는 말들이 날 위한답시고 연두의 입술 새로 쏟아져 나왔다. 너는 지금 고작 그런 게 중요했을까. 나 때문에 뭘 잃었는지도 다 알면서 너는 지금 고작 나 같은 걸 위한답시고.
나는 비로소 한연두가 한수열의 딸이라는 걸 깨달았다. 당신이 가진 상처는 나로 인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 걱정이 우선이던 그를. 그리고 그의 딸을. 심장을 짓누르는 것만 같던 젖은 한숨을 토하며 연두를 떼어 냈다.
“연두야.”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나는. 선배가 그렇게 힘들어한 줄도 모르고, 나는…….”
“한연두, 너 괜찮아?”
미간을 좁히며 시선을 맞추자 미처 흐르지 못한 눈물이 연두의 코끝으로 방울져 흘러내렸다. 제 어깨를 잡았던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니 연두가 거칠게 내 손을 쳐 냈다.
“뭐가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아! 너 같으면 괜찮겠어?”
제 딴에는 한껏 눈에 힘을 줘 날 바라보지만 한연두 눈에 담긴 진의를 내가 모를까. 갈피를 잡지 못하는 감정에 그저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던 것 같다. 상황 파악도, 주제 파악도 하지 못한 내 웃음은 한연두의 화를 더 돋우었다. 연두는 뭐라고 욕 같은 걸 삼키며 날 노려보는 듯했지만 그 순간 연두를 품에 안은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왜 안아? 이제 와서 이런다고……, 이런다고 내가! 내가…….”
내 품에서 버둥거리며 날 밀어내던 연두가 여태 울었던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끅끅 울음을 삼키는 소리 사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빠져나왔다.
우리가 가진 사연들도 한연두가 두서없이 내뱉는 감정만큼이나 어지럽게 꼬였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연두에게도 드러난 이상, 이제 복잡한 고리들을 하나씩 풀어야겠지.
나는 한연두에게 대단한 이해를 바라지도, 사랑을 갈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내가 우는 너라도 이렇게 껴안고, 네 목덜미에나마 입 맞출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니까.
“한연두.”
내가 네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연두야.”
그 부름에 맞춰 너와 눈이 마주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네가 괜찮으면 나는 언제나 괜찮아, 한연두.”
“…….”
“나 안 죽어. 넌 왜 자꾸 멀쩡한 사람을 죽이려고 해.”
엉뚱하기 그지없는 네 걱정도 별거 아니라 넘길 수 있다면.
“미안해.”
“뭐가 미안해.”
“너 혼자 내버려 둬서.”
내 진부한 사과에도 지루해하지 않는다면.
“미안해, 한연두.”
“…….”
“내가 멍청해서. 등신 같아서. 지질해서.”
“그래, 채우수 이 멍청아…… 네가 알긴 뭘 알아, 대체!”
“미안해. 그러니까.”
그러니까 연두야.
“나 좀 봐줘.”
내가 너를 사랑해도 될까.
연두는 퉁퉁 부은 눈으로 날 보고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있는 힘껏 또 내 어깨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봐주긴 대체 뭘 봐달라는 거야……. 내가, 오늘 이렇게, 흐윽, 선배한테 왔잖아! 내가 결국은, 채우수를 찾았는데! 왜 자꾸 봐달래. 봐주긴 뭘 봐줘?”
“…….”
“내가, 흐윽, 쪽팔려서……. 엄마한테도……. 그 말 듣고도 채우수부터 생각나는 내가 얼마나 쪽팔렸는데…… 여길 데리고 오면, 나보고 어쩌라고.”
“…….”
“너 때문이야! 이게 다 채우수 너 때문에! 나까지 멍청하게…….”
“…….”
“왜 날 이렇게 만들었어? 어쩌자고. 나야말로 진짜 어떡하라고. 왜 날 채우수밖에 모르는 멍청이로 만들어서! 왜, 왜. 이제 싫어하지도 못하게 만들어서. 왜 좋아하게 만들어서.”
“한연두.”
“씨…… 또 미안하다고 할 거면 그냥 입 다물어요.”
나는 정말로 미안하다고 할 생각이었기에 입술을 꾹 눌러 다물었다. 잠깐의 침묵이 길어지자 연두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물었다.
“그런다고 진짜 다물면 어떡해?”
“뭘 원하는데, 그럼.”
“……진짜, 진짜…… 진짜 짜증 나, 채우수.”
“알아.”
연두가 얼굴을 구기면서 다시 주먹을 쥐었다. 그 주먹이 날 내리치기 전에 나는 연두의 손을 감쌌다. 마지못해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내 손가락을 하나씩 얽었다. 이대로 다시는 널 놓칠 수는 없다는 듯이.
나는 꿇었던 무릎을 하나씩 세워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잡은 손에 힘을 주어 흔들자 연두도 마지못해 키를 높였다. 연두가 제 어깨에 걸친 내 코트를 내게 건넸다. 괜찮다고 하자 정말로 사람 하나 죽일 듯이 쳐다보는 통에 할 수 없이 받아서는 팔을 끼웠다.
옷을 입느라 놓쳤던 그 손이 내 코트 깃을 바로 했다. 나는 그 손가락에 내렸던 시선을 끌어 올려 한연두의 얼굴을 훑었다. 눈길이 닿았던 자리마다 내 손가락을 쓸면서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아 냈다. 그 손짓에 아직도 토해내지 못한 울음이 간헐적으로 퍼졌다.
지난 세월을 연두의 주위만 맴돌면서 나조차 모르고 지나쳤던 것들이 이제야 내 눈에 들어왔다. 가령 한연두 눈에 비친 내가 이리도 멀쩡한 사람이었는지 하는. 아니,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내가 그럴듯한 인간이 된 건지도 모르겠다.
“한연두.”
“응.”
툭 튀어나온 연두의 입술을 엄지로 살짝 눌렀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해 줘야 할까. 나는 연두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싼 채로 날 담은 눈동자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도망치지 않고 내 눈을 빤히 쳐다보던 연두가 다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응.”
“응은 뭐가 응이야, 너.”
“나도 채우수가 무슨 말 하고 싶은 건지 다 알아.”
“무슨 말인데.”
연두는 괜히 딴청을 피우며 눈을 크게 굴렸다.
“응? 내가 무슨 말 하고 싶어 했는데, 한연두.”
“내 입으로 말하기 싫은데.”
나는 양 손바닥으로 연두의 볼을 꾹 눌렀다. 그러잖아도 불퉁했던 입술이 툭 튀어나오자 마른 웃음이 피식 터졌다.
“한연두.”
나는 연두의 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놓으며 코끝을 가볍게 부딪쳤다. 갑자기 닿은 내 입술에 놀란 듯 연두가 미간을 좁히며 내리깐 눈꺼풀을 접어 올렸다.
“좋아해.”
그 찌푸린 미간에 또 한 번 입술을 붙이며 나직이 속삭였다. 수천 번, 수만 번 속으로 되뇌며 연습한 그 말은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그 어떤 말보다도 서툴고 낯선 말이 된다. 아득한 정신을 붙잡고 한연두의 윗입술 위에 입술을 가볍게 내리며 말했다.
“좋아해, 한연두.”
“……나는 아닌데.”
“알아.”
나는 내 실패한 인생이 여기서 끝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웃겨. 선배가 알긴 뭘 알아. 내 말은 그게 아니라…….”
하지만 지금처럼 너로 인해 이따금 웃음 지을 수는 있겠지. 우리는 서로에게 무너지면서도 그게 서로의 품인 것에 안도할 것이고, 매일같이 무너지면서도 나는 네 손을 잡고 어떻게든 일어날 것이다.
나는 연두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감히 바라 본 적도 없는 감정을 용기 내어 쏟아 냈다.
“사랑해.”
나는 너를, 어쩌면 너도 나를.
한연두는 내 말에 눈을 잠깐 키우더니 입술 안쪽을 잘근 씹었다. 사랑해. 한 번 더 내뱉은 말에 연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맞붙은 입술이 서로를 가만히 머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꺼운 순간, 나는 쓴웃음을 삼키며 생각했다.
이런 너를 내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사실 내 마음은 널 처음 본 순간부터 네게로만 기울었는지도 모르겠다. 널 위해 만든 그늘은 그렇게 내 그림자를 만나 더 짙어졌을지도. 어쩌면 널 위한다고 베푼 알량한 호의들도 결국은 독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른다. 수많은 가정들은 우리 사이를 빙빙 맴돌며 끊임없이 서로를 괴롭히겠지.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 같았던 내 인생은 한연두를 만나 비로소 굴절되었노라고. 네가 결국 날 먼저 찾고, 내가 네게로 달려왔듯이 우리는 언제든 함께일 거라고.
나는 우리가 처음으로 입을 맞췄던, 갇힌 엘리베이터에서의 그때처럼 한연두의 입술을 벌리며 내 숨을 불어넣었다.
연두가 무슨 짓이냐며 눈을 번쩍 뜨고는 내 코트 자락을 붙잡아 흔들었다. 나는 코끝의 방향을 틀어서는 혀끝에 녹아 버린 말들, 결국 사랑한다는 그 말을 모조리 연두에게로 넘겨주며 달게 웃었다.
어쩌면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바뀌지 않는 것이 당연할지도. 어둠은 항상 그런 식으로 세를 늘려 왔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매일같이 그 어둠 속에서 도망치는 것뿐. 여태 그래 왔듯이 오늘도, 내일도.
우리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불길 속에 갇혀 있을 것이고 잿더미를 뒤집어쓰기도 하겠지. 그리고 그 속에서 기어코 싹을 틔운 감정에 가끔은 웃고 또 가끔은 무너질 것이다. 하나 다른 게 있다면 이제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고 최선을 다해 달아날 것이라는 것.
나는 아마 평생 스스로를 옭아매는 질문 속에서 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불확실한 삶의 연장선에서 비굴하게 답을 구하겠지. 어제의 나를 탓하고 내일의 우리를 꿈꾸며 오늘의 너를 사랑해도 되겠냐고.
한연두는 내게 어떤 답을 줄까. 어쩌면 쓸데없는 소리나 한다며 정강이를 걷어차일지도 모르겠다. 바라건대 우리가 우리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한, 모든 고통은 오롯이 내 몫이길. 겨우 꺼내 보인 내 마음에 걸려 넘어지는 건 오직 나 한 사람뿐이길. 부정할수록 견고하게 뿌리내린 감정은 부디 행복으로 흩어지길. 나는 그렇게 또 한 번 염치없는 기도를 건네 본다.
우리가 멈췄던 시간은 이제야 제대로 흐르는 듯했다. 울음도 웃음도 적당히 머문 입술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너를, 그리고 너는 나를. 서로를 탓하고 원망하다가도 눈을 접어 웃으면서.
결국은 돌고 돌아 사랑이란 말로 서로를 얽어매면서.
나는 너를.
그러므로 너도.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