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평범한 진심
한연두로부터 연락이 끊긴 건 다음 날 오후였다.
나는 거의 동틀 무렵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고 약 기운 때문인지 눈을 떴을 때는 오후 3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연두는 최근 들어 내가 잠들어 있는 상태를 불안해했는데 그 불안이 수면 유도제 때문인 것을 알면서도 나는 습관처럼 약을 꾸역꾸역 삼킬 수밖에 없었다.
연두의 망상 속에서 나는 지금 당장 죽음을 선택한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다. 고작 수면 유도제에 불과한 약도 그 망상 속에서는 위협적인 흉기였지만 사실 스스로 삶을 끝낸다는 것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10살. 내 진짜 외조부를 알게 된 이후부터 아버지의 이력은 해가 갈수록 화려해졌고 채영환의 지위는 끝을 모르고 올라갔다. 우리 가족은 해마다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갔는데 못해도 총리를 배출할 터라는 현재 집에 정착한 건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다.
뭣 모르는 나는 한때는 채영환이 자랑스러웠고 그가 시키는 대로 착실히 행동하는 나 역시 한때나마 당신의 자랑이었다. 그랬던 내 존재가 처음으로 부정당한 것은 그가 내 외조부와 잠시 틀어졌을 때다.
잘못했어요, 아버지. 제가 다 잘못했어요. 제발, 때리지 마세요. 엄마, 도와주세요. 제발. 아버지 좀 말려주세요.
나는 내 잘못이 뭔지도 모르면서 채영환 앞에서 무릎 꿇고 빌었고 날 외면하는 계모를 보며 울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제발. 지킬 수도 없는 부탁이고 구걸이었다. 실로 채영환이 내게 품은 분노는 그의 옛 장인이자 내 외조부에게서 굴절된 것이었으니까. 그 말을 지키기 위해서는 새로 태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내 아버지 같은 사람에게는 당치도 않은 이유였다. 물론 지금의 나 역시도 내 인생에서 도려내고 싶을 만큼 지우고픈 기억이지만 굳이 그런 일들이 없더라도 모두가 지나온 충분히 철없던 시기였다. 키도 마저 자라지 않은, 몸도 정신도 온전히 영글지 못한 그 시절. 그렇기에 청소년기 우울증으로 포장될 수도 있던 갖가지 시도들.
하지만 태어나길 누군가를 죽이면서 세상에 나온 나에게는 쉽게 죽을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았다. 외조부가 늘 하는 말처럼 내 육체에 깃든 목숨이 두 개라도 되는 양 내 시도는 늘 실패로 돌아갔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서 한 선택이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죽을 용기도 없었다. 사는 것의 반대말이 죽는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시절의 나는 그저 삶과 죽음 그 중간쯤에서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로 겨우 존재했을 뿐이다.
매일을 곤두박질치는 기분으로 살던 내가 부서진 삶의 조각을 내 손으로 다시 붙이게 된 건 한수열 소방위의 영결식에서였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의 딸, 한연두를 만난 이후부터.
한연두를 직접적으로 마주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소방정복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검은 상복을 입은 한연두는 주변 사람들의 절규 속에서 핏발 선 눈으로 눈물을 참아 냈다. 마치 제가 울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안간힘을 쓰다가도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면 그 아이는 염산이라도 닿은 듯이 제 뺨을 닦았다.
내가 갖고 있던 모든 절망은 그날, 겨우 중학생이었던 한연두 앞에서 한없이 옹졸해졌다. 동정으로 시작한 내 감정은 일종의 제어 장치가 되었다. 채영환은 날 두고 드디어 제정신을 찾은 것이라며 그나마 인간 취급을 해 줬으나 이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한수열 소방위의 순직은 지역 언론에 짧게 실렸는데, 극적인 이야기를 갖다 대기 좋아하던 기자들은 2년 전 그가 화재로 아내를 잃은 사건에 대해서도 덧붙이기도 했다. 내가 집에 불을 냈던 날과 같은 날, 비슷한 시간. 그리 멀지도 않은 곳에서 한 사람은 불 속에서 살아남았고 한 사람은 죽었다.
결국 추락하던 나를 멈추게 한 건 한연두였고 그런 나를 또 다른 절벽 끝으로 내몬 것 역시 한연두였다. 무너지는 땅 위에서 간신히 발끝으로 버틴 나를 또 한 번 구원해 준 것도 바로 한연두였다.
나는 감히 연두에게 다가갈 수도 없었다. 제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줄도 모르는 아이에게 나는 감히 좋아한다는 말조차도 쉽게 할 수가 없었다. 내 사랑은 나만큼이나 초라하고 형편없이 어두웠기에 그걸 입 밖으로 표현하는 순간 한연두를 검게 태워 버릴 것 같았다.
정말이지 나는 비겁하고 비열한 놈이어서 속으로만 타오르던 불길 속으로 제 발로 걸어온 한연두를 내칠 용기 같은 건 없었다. 연두는 제 이름처럼 푸르기만 했고 속이 검은 나는 한연두의 색깔을 빼앗으며 한때 내게도 있었을 푸른색을 덧칠했다. 우리는 섞여서 혼탁해졌으나 그렇다고 이제 와서 멈추기엔 너무 늦어 버린 때였다.
채영환과 맞설 생각은 없었다. 그럴 상대도 아니었고 그런다고 달라질 것도 아니었다. 내가 바라는 건 그저 채영환이 내게 채운 족쇄로부터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적당히 행복하고 적당히 힘든 삶. 나는 적당량의 우울을 다시 삼켰다. 내가 가진 우울감이 그 아이를 물들인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감히 한연두를 놓지도 못했다.
아니, 한연두가 있었기에 더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내게 연두는 환락 같은 구원이었다. 찰나의 쾌락일지라도 기꺼이 삼키고 싶은.
의외로 우울증 환자들의 행동은 아주 우연한, 작은 사건에서 비롯된다. 그런 면에서 내게 닥친 사건은 우연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작은 것도 아니었기에 한연두의 요란한 걱정은 내게 큰 감흥은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언젠가는 터질 일이 이제야 터진 것이었고, 그 사이에 내 이름이 조악하게 자리 잡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욕하든지 간에 날 과잉보호하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남은 삶의 동력은 충분했다.
“연두야.”
나는 한연두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라는 걸 직감했다.
평소와 같았다면 한연두는 지금 내 옆에 누워서 다 늙은 노인을 대하듯 내 생사를 살폈을 것이다. 그 유난스러운 행동에 내가 한마디를 던지면 연두는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뭐라고 대들었겠지.
한연두는 항상 얼토당토않은 말을 이치에 맞게 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나는 그 뻔뻔한 얼굴에 질려 연두의 목에 웃음으로 얼룩진 입술을 묻었을 것이다. 그럼 연두는 날 보면서 또 왜 웃냐고 물었겠지.
왜 웃냐니. 그렇게 황당한 질문이 어디 있을까. 한연두는 아직도 나를 잘 모른다. 제가 내게 어떤 존재인지, 내 유일한 숨구멍이 자신이라는 것조차 여전히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한연두 때문에 지금껏 버텨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질투 섞인 동정과 잿더미 속에서 드러난 죄책감이 추락하던 나를 묶었고, 나는 한연두를 통해 겨우 호흡했다.
모든 것들, 그러니까 지금의 어머니 집안에서 시공한 아파트, 재단을 통한 장학금, 사소하게는 학교 과제까지. 한연두를 위해 베풀었던 그것들은 사실 나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죄책감을 덜고 한연두를 내 시야에 옭아매는. 나란 놈은 원래 염치도 없이 태어났으니 여기서 더 뻔뻔해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나는 그렇게 참아 온 숨을 토해 내듯 한연두의 어깨에 입술을 붙인 채 숨을 내뱉고 다시 길게 숨을 들이마셨을 것이다. 그럼 연두는 간지럽다고 주먹으로 내 등을 내리쳤겠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결국 날 이기지도 못하고 내게 다시 깔렸을 게 분명하다. 그것도 아니면 별 이유도 없이 삐친 강아지처럼 방문 앞에서 날 노려보며 모종의 시위를 했으려나.
평소와 같던 일상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적막한 분위기에 되레 골이 울려 이마를 손바닥으로 짚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옆자리도 정리되지 않은 걸 보니 제집에 올라간 것도 아닌 모양인데.
“한연두.”
잠겼던 목소리가 연두의 이름을 부르자 조금씩 트이는 것 같았다. 한연두는 여기 없는 게 확실했다. 연두는 숨바꼭질 같은 장난을 칠 만큼 인내심이 그리 강하지는 않고 또 그런 장난을 칠 정도로 요즘의 우리 사이가 편하지는 않았다.
나는 손을 더듬거려서 침대 옆에 둔 휴대폰을 들었다.
전역 후 복학을 한 이후부터 한연두를 내 시야 밖에 둔 적은 드물었기에 연두가 안 보일 때면 어디에 갔는지보다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부터 앞선다.
출근했나. 아닌데, 오늘 연차 쓸 거라고 하지 않았나.
마음을 바꿔 출근을 하더라도 한연두는 내게 메시지라도 남겼을 것이다. 나는 어제저녁이 마지막인 연두와의 대화창을 빠져나와서는 부재중 전화 목록을 확인했다.
장학재단 박기진 실장에게 걸려 온 전화가 두 통, 강도우로부터 온 것이 세 통, 한태평으로부터가 한 통.
보나 마나 강도우는 시답지 않은 제 신혼 생활을 자랑하려는 전화임이 분명하고, 태평이의 전화도 딱히 별 용건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한연두로부터 아직까지 그 어떠한 연락도 없다는 말인데.
고등학교 후배이기도 한 박기진 실장의 전화가 다소 거슬렸지만 그 역시 재단 일이 아닌 일로도 평소에 연락을 주고받곤 했기에 문제 될 건 없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최근 통화 목록을 엄지로 쓸어 올려서 한연두의 이름을 누르고는 바닥에 다리를 내리며 침대에서 벗어났다. 온몸이 물에 젖은 솜이불처럼 무겁다. 발끝으로 모든 체중이 쏠렸다. 머리부터 기운 몸이 자꾸만 가라앉았다.
희미한 진동 소리에 나는 추를 달고 바닷속으로 떨어지는 기분으로 등을 돌려 한연두가 누워 있었을 침대를 내려다봤다. 내 이름을 띄우며 화면을 번쩍이는 한연두의 휴대폰이 내 숨통을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좋지 않은 예감에 전화를 끊고 박기진 실장에게 통화 연결을 시도했다. 연결음이 얼마 가지도 않은 상태에서 기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결론부터 말해. 그래서 한연두는 어디에 있어 지금.”
침잠하던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커튼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어지러워 눈을 질끈 감았다. 기진의 말이 이명처럼 들린다. 나는 휴대폰을 귀에서 떼어 낸 채로 침대에 몸을 내렸다.
한연두가 사라졌다.
* * *
결국은 채영환이 한연두를 만났다. 그가 언제고 연두를 따로 찾을 거라 생각 못 한 바는 아니었으나 이번 경우는 내 예상을 벗어난 범위였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집을 찾은 채영환이 한연두와 대면했다. 나는 약에 취해 자느라 그 사실도 몰랐다. 멍청하게도.
서른 넘긴 남녀가 한집에서 밤을 같이 보냈다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나라한 광경을 보일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 상대가 누군가의 부모라면 더더욱. 채영환이 내 집을 찾았을 때 한연두가 얼마나 정신없는 상태였는지는 정리하지 못한 이부자리와 미처 챙기지도 못한 한연두의 휴대폰이 말해 준다.
채영환이 국회의원으로든 채우수의 아버지로든 한연두를 만날 것은 분명했다. 그는 제 앞길을 막을 것 같은 장애물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치워야 하는 사람이고, 어떻게든 도움이 된다 싶으면 제 편으로 끌어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으니까.
후배 박기진은 내가 장학재단에 심어 놓은 파수꾼으로, 그가 재단 소속 직원으로 지켜야 하는 건 각종 이중장부였지만 실제로 사수하고 있는 것은 한연두와 채영환의 만남이었다.
의원실의 누군가와 사귄다는 박기진 덕분에 채영환의 세세한 일정까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원체 벌여 놓은 일이 많은 양반인 데다가 여론 조사가 생각보다 당신에게 유리하게 나오자 채영환은 요즘 더 바빠진 모양이었다. 덕분에 채영환의 일정 사이에 한연두를 따로 부를 시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회사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한연두를 옆에 끼고 있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나 한 사람 더 있다고 채영환이 눈 하나 깜짝하진 않았겠다만, 적어도 내게 상황을 컨트롤할 시간은 주어졌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도 내 오만이었던 거지. 채영환이 불시에 내 집까지 찾아올 줄 누가 알았을까.
그런 면에서 박기진 또한 무능력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뭘 어쩌겠는가. 이미 벌어진 일인 것을. 나는 앞으로의 일들을 어찌 해결해야 할지 그것부터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한연두는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기진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렇다고 말했다. 나는 그냥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채영환이 한연두를 두고 뭐라고 했을지보다 한연두가 뭐라도 잘 챙겨 입고, 뭐라도 먹긴 먹었을지가 걱정되는 나는 이 순간마저도 본질적인 문제에서 한참을 돌아가는 비겁한 인간이다.
나는 한연두의 휴대폰을 챙겨서 차에 올랐다. 연두가 너무 요란해서 싫다고 말했던 내 차 옆에는 한연두의 차가 아직 가지런히 주차되어 있다. 당연하게도 내 솜씨다. 고로, 주차에는 소질이 없는 한연두가 차도 휴대폰도 없이 맨몸으로 채영환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간 뒤로 아직 집으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채영환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서 한연두를 내 본가로 데려갔다고 했다. 배지 자랑 좋아하는 사람이 왜 이럴 때만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하는지. 하여간 입바른 말을 하더라도 선거철에는 양심껏 행동해야지 않나.
막상 핸들을 잡고 나니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머리가 텅 비었다. 그래서 지금 한연두는 어디에 있을까. 기진의 말에 따르면 연두는 제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채영환의 제의도 한사코 거절한 채로 내 본가에서 걸어 나갔다고 했다. 제 딴에는 자존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길을 혼자 걸어 내려가면서 한연두가 무슨 생각을 얼마나 했을지 감히 짐작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 와중에도 박기진에게 “그래서, 한연두는 울었대?” 하고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쪽팔린 줄도 모르고 그렇게 책임감 없는 말을 내뱉고 나면 한연두와 이대로 한없이 멀어질 것 같았다.
일단 시동을 걸고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한연두가 갈 만한 곳을 대충 떠올려 봤지만 명확하게 이곳이라고 생각나는 곳은 없어 등신처럼 아파트 주변만 빙빙 돌았다. 내가 지난 세월 동안 한연두 주위만 떠돌 듯이 말이다.
사람마다 제가 처한 상황을 다루는 법은 제각각이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그저 순응하는 편이다. 내 짧은 인생 평생을 그렇게 살도록 길들여졌고, 나 역시 그게 편했기 때문이다. 좋은 말로 포장하면 평화주의자고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패배자다.
한연두가 남자 친구를 사귈 때만 해도 그랬다. 그래도 내 딴에는 나름의 투쟁을 하기도 했다. 연두는 쓸데없이 정에 약한 구석이 있는데, 그걸 알고 파고드는 여우 같은 새끼들이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가지치기하듯이 내 손에서 잘라 낸 것만 해도 몇 놈은 됐는데, 이제 한 놈 끝났나 하고 손을 털고 나면 한연두는 그사이 다른 놈팡이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렇다고 한연두가 쉬운 여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연두에게도 나름대로의 확고한 남자 보는 기준이 존재했고 그 남자들은 제가 정해 놓은 기준들을 적어도 세 개 이상은 충족해야 했으니까. 그 기준이라는 것이 주로 남자 얼굴과 키, 어깨, 엉덩이, 허벅지 따위의 신체 부위에 국한된다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웠다만.
그러나 내가 비록 강도우 같은 나르시시스트는 아니었다고는 해도 객관적으로 살펴봐도 내가 한연두의 그 남자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건 전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연두 역시 지나가는 말로 “선배 정도면 걷다가 3초마다 텀블링하지 않는 이상 웬만한 여자들은 다 환영할걸요.” 하며 제 곁에 있는 날 띄우기도 했으니까. 물론 그 말에 덧붙여서 “하지만 선배는…….” 하고 이상한 눈빛으로 못 먹는 떡 취급을 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대학 시절의 한연두는 날 같이 데리고 다니기에 제법 괜찮은 선배 취급 정도는 해 주었다. 나도 딱 그 정도의 역할이 내 분수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연두를 욕망하되 욕심내지는 않았다. 되레 한연두가 날 욕심내게 만들고 싶었다면 몰라도.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은 저와 닮은 사람들을 쉽게 알아본다. 굳이 나와 한연두의 접점이 없었더라도 한연두를 알아봤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접점이 된 그 사건만 아니었다면 연두가 제 부모님을 잃는 일도 없었겠지만.
나는 내게 기생하듯 엉겨 붙은 죄책감을 한연두의 주위에 머물면서 하나씩 털어 내려 애썼다. 한연두를 구심점으로 그 주위를 돌다 보면 가장 가벼운 감정부터 털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예를 들자면 질투 같은 얕은 감정부터.
그래, 나는 속 좁게도 한연두를 질투하기도 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수열 소방위 입에서 나오는 한연두를 말이다. 사실 나는 아직도 그 마음을 완전하게 이해하지도, 또 완벽히 버리지도 못했다.
한번은 아저씨, 그러니까 한연두의 아버지가 밤늦게 날 찾아온 적이 있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예비 고3을 붙들고 밤 11시까지 야자를 시켰는데, 그가 날 불러낸 건 두 번째 야자 쉬는 시간이었다.
간만에 술 한잔 걸쳤다는 아저씨는 기분이 평소보다 좋아 보였다. 술을 마시자 내 생각이 났다던 그는 푹푹 한숨을 내쉬더니 “얼굴 봤으니 됐다.” 하며 낯간지러운 소리와 함께 교문 앞에서 날 돌려보냈다.
나는 꾸벅 목을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발걸음을 뗐다. 몇 발짝을 걸었을까, 아저씨의 젖은 한숨이 자꾸만 내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는 통에 다시 등을 돌려 그에게 뛰어갔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세요. 금방 가방 챙겨서 나올게요.’
알겠다는 그를 뒤로한 채로 학교로 뛰어가서는 가방만 들고 나왔다. 등 뒤로 류지환과 강도우가 곧 종 칠 시간인데 어디 가냐고 소리쳤지만 답할 정신은 없었다. 아저씨의 비틀거리는 걸음이 눈에 밟혀 마음이 급해졌다.
그렇게 교문에서 막 벗어나서 아저씨에게 손을 흔드는 찰나, 퇴근하는 옆 반 담임을 마주쳤다. 너무 어두워서 그랬을까, 아니면 피곤해서 그랬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채영환의 인지도가 아직 그 정도였던 것일까. 그는 내 등 뒤의 아저씨를 보고는 “아버지시니?” 하고 물었다.
나는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라고 하면 되는데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연두의 아버지가 내 아버지로 보였다는 사실이, 보통의 아버지들은 아들에게 이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내 마른 입술을 달라붙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렇다고 고개를 짧게 주억거렸다.
‘너 인마, 야자 째는 거 딱 걸렸는데 아버지 오셔서 봐주는 거야.’
그는 어서 아버지께 가 보라며 손을 훠이 내젓고는 아저씨와 짧게 목례까지 나눴다.
아저씨께 다가가는 발이 그리 무거울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깟 거짓말이 대체 뭐라고 중죄라도 지운 것처럼 굴었는지.
아저씨는 옆 반 담임과의 대화를 다 들으셨던 건지 “내가 네 아버지라고 하기엔 쪽팔리지?” 하고 물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발끈해서 대답하자 아저씨는 그럼 됐다며 내 팔짱을 끼고 호탕하게 웃으셨다.
그날 나는 아저씨와 처음으로 소주를 나눠 마셨다. 알코올을 들입다 꽂아 넣는 기분이라 불쾌했지만, 쓴맛 끝에 찾아오는 찰나의 단맛이 다음 잔을 계속 찾게 만들었다.
아저씨는 당신 아내가 보고 싶을 때마다 날 찾는다는 걸 알게 된 건 아주 나중의 일이었다. 날 만날 때 그에게서 은근하게 풍기던 술 냄새가 사실은 그가 속으로 삼킨 눈물이었다. 그러면서도 아저씨는 나 같은 놈을 붙잡고 내 친부 채영환보다도 더 아버지처럼 굴었다.
아내 대신 살아남은 날 보면서 아저씨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흉터로 남은 내 지난 시도들을 보면서 왜 죽어야 할 사람이 가지 않았냐고 억울해하지는 않았을까. 당신을 아버지라고 말했던 나를 차라리 죽여 버리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나 억울한 마음도 나 같은 지질한 놈들만 느끼는 것이었던가 보다. 제대로 된 용서를 구하기 위해 아저씨를 찾은 내게 그가 전한 것은 반지 하나였다.
‘내가 너 예뻐서 주는 건 아닌 거 알지? 돈이야 너희 집안에 차고 넘칠 테고. 금이야 언제든 팔 수 있는 거니까.’
‘…….’
‘원래는 내가, 어? 우수 너 팔찌를 하나 해 주고 싶었는데. 사내놈들은 아무래도 팔찌는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 반지로 주는 거야. 괜찮지? 우리 헤어지는 기념이야, 인마.’
그는 내 손목의 상처로부터 시선을 끌어 올리며 웃으셨다. 달리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아저씨가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우수야, 나는 네가 남들처럼 평범하게 잘 살길 바란다. 잘 사는 거 그거 별거 아니야. 그냥 배고플 때 먹고 싶은 거 한 끼 먹고, 힘들면 힘들다고 털어놓을 수 있으면 되는 거야. 할 수 있지?’
그렇게 하겠다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나는 아저씨가 건넨 반지만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게 아저씨와의 마지막이 될 줄 알았더라면, 몇 번이고 그러겠노라 대답을 했을 텐데.
나는 아저씨가 내게 베풀었던 딱 그만큼만 연두의 곁에 있고자 했다. 우연이 우리를 묶었던 모양인지 연두는 내 과 후배가 되었고, 나는 선배라는 이름으로 연두 옆에 함께할 수 있었다. 그 시간이 이리도 길어질 줄은, 다른 감정까지 혼자 쌓아 버릴 줄은 나도 미처 몰랐다.
- 누나 아직 집에 안 들어왔는데. 왜요? 누나 폰 연락 안 돼요?
“네 누나 폰 나한테 있어.”
- 엥? 왜요?
“그렇게 됐어. 아무튼 한태평 너한테도 연락 없다는 거지 아직?”
- 없어요. 왜, 뭔 일인데요, 형?
한연두와 아직 연락이 닿지 않는 이 시점에서 태평하게 구구절절한 옛이야기를 되짚어 보는 이유는 딱 하나다.
“연락 없었으면 됐어. 혹시 한연두 집에 들어오면…….”
- ……듣고 있어요. 들어오면 뭐요, 형?
“아니다, 끊자.”
내가 한연두에게 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길을 돌아왔는지. 네 주위를 맴돌면서 만든 길들이 얼마나 깊게 파였는지. 그 수렁 같은 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얼마나 사랑을 구걸했는지.
내 나름대로는 얼마나 큰 용기를 냈던 것인지 한연두만큼은 제대로 알아주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