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훅의 법칙 (11/14)

11. 훅의 법칙

채우수와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나는 감정 기복이 심해졌다. 그를 좋아하는 만큼 평소와 다름없던 일상이 새삼스러워진 탓이다. 숨기고 싶던 감정까지 모두 내보인 나는 그의 앞에서 말린 감처럼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내 감정을 매단 추는 끊임없는 진자 운동을 반복했고 그 주기는 우리가 함께한 시간의 길이에 비례하여 빨라졌다.

모든 순간이 불안했다. 대체로 내 연애는 이런 식으로 끝났기에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만 상대가 채우수라는 건 다른 문제였다. 채우수와의 관계에도 마지막이 존재할까. 형편없던 지난 연애의 잔상은 끝도 없이 내 발목을 붙들었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사랑에 유효 기한이 있다는 말은 귀납적으로 추론된 사실이다. 명확한 기간을 정의 내릴 수는 없겠지만 모두가 알고 있지 않던가.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떠한 형태로 흩어지고 또 어떠한 색으로 새로이 더해지는지. 두 사람이 그리던 사랑은 처음과 같은 상태로 끝까지 온전할 수 없다. 절대로.

그러나 내 마음에 움튼 감정이 이미 지난한 변이 과정을 거친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이 묵은 감정도 결국은 처음부터 사랑으로 뿌리내린 것이라면. 헛된 떡잎들을 떨어뜨리면서 지금의 감정을 틔운 것이라면.

그렇다면 채우수를 향한 내 마음은, 수많은 색으로 수없이 덧칠한 그 감정의 유효 기간은 언제까지일까. 채우수가 내게 품고 있던, 적당하다던 그 감정은 지금쯤 어떤 상태인 것일까.

“그런데 한 선임님도 알고 있었어요?”

“뭘요?”

“왜, 그…….”

옆자리 주재희 선임이 채우수의 빈자리를 턱짓하며 뒷말을 삼켰다. 무슨 말이냐며 모르는 척, 주 선임을 의아하게 쳐다봤지만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나도 잘 알고 있다.

정치란 실로 얼마나 유치했던지. 우리 회사와 검찰의 커넥션을 쫓던 언론들은 당시 특수부 검사였던 채우수의 아버지, 그러니까 국회의원 채영환을 타깃으로 잡았다.

하지만 구정물에서 악취가 난다고 관심을 가질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여론이 생각만큼 들끓지 않자 봐주기 수사 의혹은 채영환의 지검장 부임을 비롯하여 채우수의 입사 시기를 트집 잡아 채용 특혜 논란으로 번졌다. 이 사건은 국민의 역린을 건드려 며칠간 언론을 시끄럽게 달구었으나 으레 그래 왔듯이 채영환 의원의 진영에서 터뜨린 다른 이슈들에 종적을 감췄다.

그러나 늘 그렇듯 잔불들은 쉬이 진화되진 않는 법. 사측에서는 뜬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채우수에게 대기 발령 조치를 내렸다. 진실이 무엇인지 가려 볼 시간도 없었지만 채우수 역시 저를 둘러싼 소문을 바로잡을 의지가 없어 보였다.

처음에는 대기 발령자를 위한 빈 사무실로 출근하던 것도 재택 대기로 전환되었다. 그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진 것은 나로선 불행한 일이었지만 사실 채용 비리의 온상이 된 그의 입장에서는 당분간은 회사를 떠나 있는 게 더 편했을 것이다.

“그렇게 안 봤는데 책임님 무서운 사람이었네.”

채우수의 곁에서 그를 오래도록 지켜본 주재희 선임의 입에서도 이따위 가시 돋친 말이 나올 지경이니 말이다. 나는 황당함에 주재희에게 가는 눈을 보이며 물었다.

“어떻게 봤는데요?”

채우수를 향한 비난 속에서 나는 요즘 보이지도 않는 투명 방패를 휘두른다. 다소 뾰족한 반응에 되레 놀란 건 나뿐이었던 건지, 주 선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계속 말을 덧붙였다.

“왜, 채 책임님 일도 깐깐하게 잘하고 머리도 좋아서 제 능력으로 입사한 줄 알았지. 낙하산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 회사 이미지 다 버렸어, 쪽팔리게.”

“주 선임님이 쪽팔릴 게 뭐 있어요. 회사 이미지는 우리 입사하기 전부터도 진작 안 좋았는데.”

“쯧. 아무튼 좀 그래. 비싼 차 타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우리 월급에 그 차가 가당키나 해요? 난 책임님 잘사는 줄은 알았지만 검은돈 받아먹고 잘사는 줄은 몰랐네.”

“…….”

“그나마 회사 차원에서 강경 대응하니 차라리 다행이다 싶고. 대기 발령이면 사실상 나가라는 말 아니에요?”

“……진짜요?”

“알아서 나가라는 말이지. 책임님 그래도 우강 건설 손자라면서요? 여기 나가도 갈 데는 많겠네. 아니, 갈 거면 애초에 우강 가서 고속 승진하지 왜 하필 우리 회사에 입사해서 분위기 시끄럽게 만드나 몰라. 다른 사람들이 우리 회사를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안 그래요?”

연수원에서 세뇌받은 애사심은 아직 주재희 선임에게는 효력이 있는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누가 회사에 이렇게까지 자아를 의탁할까. 나는 주 선임에게 꽂혔던 비웃음 어린 시선을 거두고는 빈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아무튼 책임님 그렇게 안 봤는데 참 씁쓸하네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더 이상 채우수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으나 주 선임의 말은 끊어질 생각이 없는 듯하다. 채우수가 채영환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좋은 사람이 아니게 될까. 21세기에 이게 무슨 연좌제야. 친일파도 아닌데.

“주재희 선임님. 주 선임님이 직접 본 걸로만 판단해요. 증거도 없이 확실치도 않은 말에 휩쓸리지 말고.”

“얼레, 한 선임님은 채 책임님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요? 왜 편을 들어?”

“……좋고 싫고를 떠나서 짜증 나잖아요.”

“하긴. 우리 팀까지 싸잡혀서 욕먹는 건 좀 짜증 나지.”

그게 아니라……. 에휴, 더 말해 뭐 해. 나는 뭐라고 더 구시렁대는 주 선임을 향해 그냥 얼굴을 찡긋거리며 인사를 하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채우수가 사무실로 출근을 하지 않은 것도 일주일째. 회사에서 하루 종일 보던 얼굴을 이제는 해가 지고 나서야 겨우 본다. 그것도 사람들의 눈을 겨우 피한 곳에서.

“선배는 어찌 된 게 갈수록 얼굴 좋아 보이네요?”

나는 구석에 주차해 둔, 엄밀히 말하자면 채우수가 주차한 내 차 조수석에 오르면서 그를 흘겨봤다. 정말이지 뻔뻔하게 혈색이 좋아진 채우수가 날 보며 빙긋이 웃어 보였다.

“그래? 욕을 처먹어서 그런가.”

“누가 욕을 해, 감히? 혹시 어디서 벌써 누구 만났어요?”

“너 표정만 봐도 뻔하지.”

이번엔 주재희까지 그랬다고 일러줄까. 간질거리는 입술 끝을 깨물며 그의 턱짓을 따라 안전벨트를 채웠다. 출근만 사무실로 안 했다뿐이지 채우수는 매일같이 내 출퇴근 운전기사를 자처했다. 물론 제 차는 사람들 눈에 띈다는 이유로 내 차로 대신하면서.

“오늘은 하루 종일 뭐 했어요?”

“뭐, 낮잠도 자고. 이것저것.”

“팔자도 좋아.”

“좋네. 백수가 체질인가. 이참에 회사 아주 그만둘까 봐.”

“……그만두고 뭐 할 건데요?”

“글쎄, 한 1년쯤 여행이나 다녀올까.”

“세상에, 철도 없어.”

“너도 같이 갈래?”

무슨 소리야 정말. 나까지 회사 그만두라는 거야 뭐야. 출근 며칠 안 했다고 사람이 이렇게까지 여유로워지는 걸까. 제 뺨에 닿는 따가운 시선을 느낀 건지 채우수가 날 흘깃 보더니 말을 덧붙였다.

“내가 생각보다 돈이 많거든. 한연두 너 하나쯤은 먹여 살릴 수 있어.”

“웃기는 소리 하지 말아요. 내가 이래 보여도 아직 우리 집 가장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선배 돈은 뭐 화수분이야? 가진 돈 다 까먹으면 어쩔 건데요.”

“그때 되면 가진 거 다 팔아 봐야지. 차를 팔든가.”

“웃겨…….”

“차 팔고 지금처럼 네 차 얻어 타고 다니면 되겠다.”

“웬일이야, 싫어요!”

“싫어?”

“싫지 그럼. 좋게 생겼어요? 백수 남자친 구 누가 좋아해.”

“너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아무 조건 없이 내가 좋은 거라고 그랬어.”

“말꼬리 잡지 마요. 난 선배가 이번 일만큼은…….”

“한연두 너 손이 왜 이렇게 차.”

또, 또 이런 식이지. 쓸데없는 소리를 차단하려는 듯 내 왼손을 얽어매는 채우수의 손가락은 얄밉기만 하다.

“선배 헛소리 때문에 피가 식어서 그렇잖아. 진짜 회사 그만둘 생각은 아니죠?”

“아직 겨울이야. 멋 부리지 말고 따뜻하게 입어. 회사에 잘 보일 사람도 없잖아 이제.”

“왜 말을 돌려요? 그리고 선배 있다고 해서 특별히 멋 부린 적은 없어요.”

“좋을 대로 생각해.”

자기가 멋대로 생각해 놓고서는. 불퉁한 시선 끝이 내 무릎 위에 떨어졌다. 오랜만에 꺼내 입은 원피스가 괜히 멋쩍다.

“오늘 저녁은 집에서 먹을까 그냥.”

“수작 부리지 마요.”

“밥 먹자는데 뭐가 수작이야.”

“나도 이제 척하면 척이야. 밥 먹자고 집으로 데려가 놓고는 딴 거 먹일 거잖아요.”

“딴 거 뭐.”

“……됐어요. 그냥 밖에서 간단하게 먹고 들어가요.”

“너 오늘은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요즘의 우리는 늘 이런 식이다. 나는 불안하다는 핑계로 불만을 표시하고 채우수는 내 불만을 잠재우려고 새로운 트집거리를 만들어 낸다.

“피곤해서 그래요. 조용히 가고 싶어.”

나는 내 왼쪽 뺨에 닿는 채우수의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고개를 돌렸다. 깍지 낀 손에서 퍼지는 온기도 그저 손가락 끝에 머무를 뿐이다.

“한연두.”

“왜.”

“누가 내 얘기를 어떻게 하든, 욕을 하든 넌 그냥 가만히 있어. 회사에서 말 길게 늘여 봤자 너한테 좋을 거 하나도 없어.”

“…….”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해요.”

“애쓰지 말란 얘기야. 네가 애쓴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나 역시 채우수가 뜻하는 바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는 척, 그의 짐을 외면할 정도로 내 감정의 크기가 가볍지는 않았다.

“그거 알아요? 가만 보면 선배는 내가 자기 여자 친구라는 걸 잊고 사는 것 같아요.”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속상하다구요. 속상해 죽겠는데 선배는 그럴 틈도 없게 벽만 치잖아. 내가 채우수한테 뭣도 아닌 존재가 된 것 같아서 더 속상해.”

“난 네가 내 문제까지 같이 안고 가는 게 싫어서 그래.”

“그러니까요. 왜 싫냐고, 그게.”

“왜 좋아야 하는데. 내가 네 위로 같은 거 바란 적 있어?”

정말이지, 정말이지……! 채우수를 싫어했던 과거에 대한 부채감은 매번 이런 식으로 자동 소멸한다.

“넌 신경 쓰지 마. 어디까지나 내 문제니까.”

“…….”

“굳이 한연두 너 아니라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너랑 있는 시간만큼은 일부러라도 다른 생각 안 하고 싶어. 알아들어?”

“…….”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야.”

앞차 미등의 붉은빛이 채우수의 얼굴에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나는 그 모습마저 꼴 보기 싫어 고개를 차창 밖으로 돌렸다. 불쑥불쑥 솟아나는 감정은 요즘 날씨처럼 변덕스럽기 짝이 없다.

“잘났네요, 정말.”

“알아.”

“재수 없어.”

“원래 잘난 애들이 재수도 없어.”

“운전이나 똑바로 해요.”

하아, 내쉰 숨이 무겁다. 그러면서도 그와 잡은 손을 쉽게 풀지도 못하는 건 이제는 답도 없이 꼬여 버린 내 감정 때문일 것이다.

* * *

채우수의 더운 숨을 빼앗기 무섭게 맞붙인 입술 사이로 내가 가진 열기를 토해 냈다. 정말이지 나로서는 억울한 얘기인데, 뻔뻔한 표정으로 돼먹지 않은 아랫도리를 들이대면서 결국 내 입에서 하자는 말을 이끌어 내는 과정은 손쓸 틈도 없이 자연스럽다. 그러고는 내가 원해서 할 수밖에 없었다고 저는 마치 봉사라도 했다는 양 굴겠지.

웃기지도 않지만 나는 그 뻔한 술수에 오늘도 쉽게 항복하고야 말았다. 그의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지는 것은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재수 없이 잘난 몸뚱이 탓이 크다. 그렇게 습관처럼 몸을 맞대면서도 평소와 다른 게 있다면 순간순간 채우수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내게 괜찮냐고 묻는 건 채우수였지만, 나야말로 그가 괜찮은지 궁금했다. 그는 내게 위로 같은 걸 바라지 않는다고 했으나 내 짧은 눈치로도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요즘 들어 부쩍 이런 식으로 날 안는 횟수가 늘어났으니 말이다.

채우수에게 섹스란 성욕 해소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게 분명하다. 허튼 생각을 비울 수 있는 행위인 동시에 귀찮게 떠들어 대는 내 입까지도 막을 수도 있었으니 이보다 좋은 게 어디 있을까.

겹겹이 쌓은 감정에서 비롯된 섹스가 아니라는 점은 다소 자존심이 상하지만 이런 것이 채우수에게 위로가 된다면 아무래도 좋다. 나는 그의 골반께를 내 다리로 휘감았다. 그가 또 한 번 밀려 들어온다. 괜찮아, 괜찮아. 서툴기만 한 위로가 붙인 입술 사이로 흩어진다.

우리는 오늘도 서로에게 의지하며 또다시 무너졌다.

* * *

용수철과 같은 탄성체의 복원력에 관한 이론인 훅의 법칙은 탄성 한계 범위 내에서만 성립한다. 달리 말해서 범위를 벗어난 힘을 가했을 때 용수철이나 고무줄은 원 상태로 돌아가지 못한다.

뜬금없이 이걸 떠올린 것은 전적으로 채우수 때문이다. 제가 겪고 있는 상황의 무게에 비해 너무나도 태연한 걸 보면 그의 한계 범위 안이어서 그런 것일까. 당사자가 평소처럼 별일 아니란 듯이 굴어 대니 나도 더 이상 할 말은 없다만…….

답답하지. 아무래도 답답하다.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아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얼굴 모르는 사람들도 저를 욕하기 바쁜데 어찌 저럴 수 있을까. 나였다면 억울하다고 명예 훼손이니 뭐니 기자들에게 고소장부터 날렸을 텐데. 채우수는 어찌 저렇게 한태평보다도 더 태평하게 굴 수 있을까. 삶에 더는 욕심도 없는 것처럼. 언제 잘못되어도 아쉬울 것 하나 없다는 듯이.

“연두야.”

……세상에. 침대 밑으로 널브러진 속옷을 잡은 손이 순간 놀라 허공에서 멈추었다. 채우수가 혹시라도 나쁜 생각을 한 건 아닐까.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것처럼 삶에 초연한 그의 자세는 되레 불안감만 키운다.

아무리 그래도 채우수가 그럴 리는 없지.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잘게 흔들었다. 어딜 찔러도 피는커녕 눈 하나 깜빡대지 않을 듯한 사람을 두고 말 같지도 않은 생각이다. 비록 내 눈앞에서 두 번이나 쓰러졌던 약해 빠진 인간이지만, 마음만은 단단하고 또 가슴팍도 단단하고…….

“한연두.”

“……응?”

“다 했으면 나와서 간 좀 봐.”

“아……. 그냥 시켜 먹자니까요.”

역시 채우수 집으로 오는 게 아니었다. 딴 건 몰라도 밥은 밖에서 먹었어야 했는데. 벌써 시간이 몇 시야. 그러잖아도 늦은 저녁인데 채우수가 뭘 또 만들기 시작했으니 제대로 된 저녁을 먹으려면 한참은 더 걸릴 듯하다.

“빨리 나와, 한연두.”

아, 정말. 뭔데 자꾸 재촉일까. 나는 몸의 물기를 마저 닦아 내고 브래지어의 훅을 채운 뒤 침실 밖으로 나왔다. 그새 육수를 냈는지 체에 거른 멸치가 싱크대로 향했다. 간장을 손에 든 채우수가 등을 돌려 날 보더니 눈을 가늘게 좁혔다.

“……왜 그렇게 봐요?”

“옷은 제대로 입지, 한연두?”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가 손바닥으로 빠르게 흉터를 가렸다. 속옷만 달랑 입은 몸이 부끄러운 건 아니지만 화상 흉터를 채우수에게 내보이는 건 여전히 싫었다. 물끄러미 날 보는 채우수의 눈빛에 어딘가 간지러운 기분이다. 나는 괜스레 몸을 움츠리며 등을 돌렸다.

“됐어. 간이나 보고 있어.”

옷은 제가 대신 가져다주겠다는 듯 채우수가 내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어깨에서 미끄러지듯 떨어지는 그의 손이 썩 달갑지만은 않았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는 그의 등 뒤에 대고 뭐라고 말을 덧붙일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끓는 국 냄비에 한 발 가까이 다가가 국자를 들었다. 오늘 메뉴도 물으나 마나 수제비겠지. 썩 잘하지도 못하는 음식을 왜 기어코 제 손으로 하려는 건지. 하여간 고집도 대단하다. 간장을 조금 더 넣은 뒤 국자를 내려놓자 등 뒤로 채우수가 성큼 다가왔다.

“너 밥 먹고 바로 올라갈 거지?”

“뭐야…….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가려고 했는데요?”

“집에 가서 자. 집이 바로 코앞인데 왜 여기서 자.”

“한태평한테 나 오늘 외박할 거라고 했는데?”

“너 다 큰 애가 무슨 외박을 그렇게 자주 해.”

“웃겨요. 다 컸으니까 외박하는 거지. 이러려고 열심히 나이 먹었는데 이런 것 하나 내 마음대로 못해?”

“옷이나 입어.”

“자고 갈 거예요.”

“어차피 보내 줄 생각도 없었어.”

빙글거리며 웃는 그의 손에서 낚아챈 옷은 얄궂기 짝이 없다. 애초에 내가 입고 온 원피스가 아닌 제 티셔츠를 가지고 온 걸 보면 채우수는 발끈하는 내 반응을 기다리고 일부러 날 긁어 댄 것이다. 정말이지 얄미워서 진짜…….

“그거 알아요?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장난치면 하나도 안 웃겨요.”

“그래도 잘생겼잖아.”

“세상에…….”

“왜. 너도 나 잘생겨서 좋아하는 거잖아.”

“……웬일이야.”

“내가 틀렸어?”

“틀렸어요!”

갑자기 이게 무슨 소득 없는 논쟁인지. 경망스러운 말과는 달리 내 대답을 갈구하는 그의 표정은 심히 학구적이다.

“물론, 물론 내가 선배 좋아하는 건 맞고, 선배가 보통 남자들보다 조금 더 우수한 상태인 것도 맞지만…….”

“조금 더라니. 평균에서 한참은 차이 나잖아. 뭘로 따져도.”

“그래요. 평균보다 한참은 우수…….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해? 어쨌든요. 내가 그렇게 세속적인 마음만으로 선배 좋아하진 않아요. 내가 선배 좋아하는 마음은 아주, 아주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왜 웃어요?”

“너 지금 이 꼴로 나 좋다고 박박 우기는데 내가 안 웃고 배겨?”

느른하게 풀린 눈이 내 가슴을 지나 배꼽까지 빠르게 훑고 올라왔다. 단정한 입매에 걸린 웃음은 삐딱하기 짝이 없다. 어이가 없어서. 아주 작정을 한 거지. 욕이라도 듣고 싶어서 이러는 건가. 나는 그를 흘겨보며 재빠르게 몸을 가렸다.

“다 벗고 재밌게 잘 놀아 놓고 이제 와서 왜 가려.”

“옷 입으라면서요.”

“가리라고 한 말 아니야. 안 가려도 돼.”

“그게 아니라…….”

“흉터 말이야. 내 앞에서 일부러 가릴 필요 없다고.”

“…….”

“나한테 보여 줘도 괜찮잖아, 너.”

“나는, 나야 뭐…….”

“네가 괜찮으면 된 거야.”

그는 흉터를 가리고 있던 내 손을 떼어 내고는 돌돌 만 티셔츠를 내 머리에 끼워 넣었다. 내려앉은 목소리에 비해 그의 손길은 제법 다정하기도 하다.

“앉아 있어. 반죽만 뜯어 넣으면 돼.”

정전기 탓인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던 채우수가 식탁을 가리키며 턱짓했다. 그러니까 그는 항상 이런 식으로 제 감정의 동요 없이 내 마음만 흔들어 놓는다.

감정의 높낮이가 큰 나에 비해서 채우수는 한없이 정적이다. 어쩌면 그래서 제게 벌어지는 큰 사건도 아무렇지도 않게 삼켜 버릴 수도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설마 나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게 이런 건 아니죠?”

“이런 게 뭔데.”

“삼시 세끼 수제비 뜯어서 먹여 살린다는 말이면 미리 거절할 거예요. 수제비가 다 뭐야. 한우만 먹여도 모자랄 판에.”

“내일은 고기 먹어 그럼.”

“아니…… 고기 먹자는 말이 아니잖아요. 왜 매번 수제비냐는 거지. 특별히 잘하는 음식도 아니고 선배가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손을 씻고는 반죽을 뜯어 넣는 채우수의 옆에 붙었다. 도와줄 생각으로 그의 손에서 반죽을 반쯤 떼려고 했지만 팔꿈치로 내 어깨를 밀어내는 것이 오늘도 저 혼자 다 할 생각인가 보다.

뭐, 나야 좋지. 어차피 채우수가 만들든 내가 거들든 결과물은 엉망일 게 뻔한 수제비다. 그의 옆에서 서성이던 것도 잠시, 그냥 수저나 놓으라는 타박이 떨어지자 마지못해 식탁에 자리 잡았다.

“너 거기 기억나? 학교 북문 근처에 우리 잘 가던 식당.”

“어디요? 우리 가던 데가 한둘이어야지.”

“왜, 너 여자라고 밥 적게 준다고 사장님이랑 싸우고 했던 곳.”

“아아, 거기…….”

“너 알고 그러는 거야, 기억나는 척하는 거야?”

“기억나요. 그 집이 밥 양으로 차별하긴 했지만 반찬도 깔끔하고 밥도 빨리 나와서 어쩔 수 없이 자주 갔잖아.”

“맞아. 하루는 우리가 오픈랩 준비할 때였는데…….”

“아, 오픈랩 얘기는 이제 안 꺼내기로 한 거 아니에요?”

돌이켜 보면 대학 시절 채우수와는 그다지 좋지 않은 추억들만 한가득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크게 싸웠던…… 말이 좋아 싸운 거지 내가 일방적으로 혼나기만 했던 오픈랩. 그 얘기는 꺼내 봤자 내 성질만 돋울 것이 뻔한데 또 무슨 수작인지. 나는 그의 너른 등짝을 할퀴듯이 훑다가 눈이 마주칠 뻔하자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아무튼 그때 너 거기서 수제비 먹은 적 있거든.”

“그런데요?”

“세 숟갈 뜨더니 맛없다고 바로 내려놨어.”

“그럴 리가.”

“그 기억은 없나 봐.”

“지어낸 거 아니에요 지금?”

자기가 뭐하러 그런 수고를 하냐는 눈빛은 십여 년 전 오픈랩 그때의 싸늘한 눈빛과도 닮았다.

“나도 이상하다 생각했지. 한연두가 맛없다고 밥을 거를 애는 아닌데. 오픈랩 때문에 나한테 혼나고 반항하는 건가 싶었어.”

“그럴 만도 하지. 선배가 내가 하는 것마다 트집 잡았잖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선배랑 얼굴 맞대고 밥 먹은 게 기특할 지경이야.”

“알고 봤더니 그다음 날이 네 아버지 기일이더라고.”

“…….”

“너 아버지가 만들어 주시던 수제비 좋아했다며.”

아, 정말……. 진짜 짜증 난다. 그런 얘기는 누구한테, 아아 한태평. 아, 정말이지 이 쓸모없는 애는 대체 어디까지 입을 놀려서…….

“누가 그래……. 누가 좋아했대요. 내가 아빠가 해 주는 음식 얼마나 싫어했는데…….”

“싫어했어?”

“……싫었어요, 나는. 선배는 왜 갑자기 쓸데없는 얘기를 꺼내고 그래요.”

“나는 아직도 가끔 그날 생각이 나거든. 그날 네 표정이 마음에 걸려서.”

“내 표정이 뭐 어땠다구요.”

“딱 지금 같았어. 울지도 못하고 잔뜩 골 난 표정.”

뒤통수에 눈이 달렸나. 내 얼굴은 보지도 않은 주제에 잘도 아는 것처럼 떠들어 댄다.

“그래서 난 네가 웃을 때까지 질리도록 수제비만 만들어 줄 생각이야. 그때 표정 같은 건 내 머릿속에서 다 지워 버리게.”

“세상에, 도대체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

그러니까 날 위한 게 아니라 순전히 저를 위한, 자기 편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웃기지도 않아. 내 표정이 제 마음에 안 들었기로서니 맛있지도 않은 수제비 따위를 꾸역꾸역 먹어야 할 이유는 대체 어디에서 나온단 말인가.

괴롭히는 방법도 가지가지야 정말. 어쩌자고 내가 이런 인간을 좋아하게 된 걸까. 그의 말대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잘난 낯짝을 칭송하기엔 새삼스럽기만 하다.

“너 나 좋아한다며. 좋아하는 사람이 주는 건 뭐든 잘 받아먹어야지. 한연두 잘하잖아 그런 거. 입으로든 어디로든.”

게다가 어느 순간부터 당신 변태입니까, 하는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중의적인 말들을 내뿜어 대는 입은 이제는 놀랍지도 않을 정도다.

“웃……겨. 내가 선배 좋아하는 걸 대단한 권력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요.”

“대단한 권력 맞아.”

“뭘 또 그렇게까지…….”

“적어도 나한테는 그래. 네가 날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꺼워.”

“…….”

“한연두 네가 날 위해서 뭘 특별히 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야. 위로라면 이미 너 하나로 충분하니까.”

알겠어? 나직이 되묻는 말에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곧이어 국물이 바특한 수제비가 식탁 위에 놓이는가 싶더니 내 옆으로 다가온 채우수가 날 제게 당겨 안았다. 그의 품에서 얼굴이 일그러지자 내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감싼 그의 손이 날 토닥이며 달랜다.

위로는 대체 누가 누구에게 한다는 건지. 나약한 사람은 누구란 말인지. 우리는, 아니 나는 농도 짙은 감정에는 전혀 면역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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