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명암 (10/14)

10. 명암

심장이 콩닥콩닥 주체할 수 없이 뛰었다. 떨려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그 떨림마저도 근본적으로는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당연하게도 채우수 때문이다.

채우수, 채우수, 채우수. 채우수를 빠르게 발음하다 보면 재수처럼 들리기도 한다. 어쩐지 평생 재수 없을 인간의 이름값 같다.

손에 묻은 비누 거품을 헹궈 낸 뒤 페이퍼 타월을 한 장 뽑았다. 물기를 닦으며 거울 속의 내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실수한 건 없는데. 게다가…… 아니, 내가 봐도 오늘 좀 예쁘지 않나. 채우수 취향이 이게 아닌가. 귀여운 쪽인가. 음, 귀여운 척하지 말라는 것 보면 것도 아닌데. 그래도 뭐…… 채우수도 오늘 나 예쁘다고 했잖아.

딱히 답도 없는 질문이다. 나는 눈 밑으로 화장이 번졌는지 확인하며 파우치를 뒤적였다.

아무튼 채우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분명했다. 내가 아무리 눈치가 없겠기로서니 그거 하나 모를까. 옆에 붙어 있던 세월이 얼만데. 조금의 과장을 보태자면, 나는 그가 생각 없이 내뱉는 문장들의 어미에 따른 기분 변화까지 잘 알고 있다.

‘오늘 내 생일인 걸 네가 어떻게 알았어.’

그러니까 이 문장에 담긴 그의 당황스러움을 넘어선 짜증까지 충분히 파악 가능했다는 말이다.

참 나. 누굴 바보로 알아? 아무리 음력 생일을 지낸대도 누가 그걸 몰라. 학교 다닐 때야 겨울 방학이어서 그냥 지나쳤다고 해도 회사에선 뻔히 다 아는 것을. 물론 우리 사무실 분위기가 서로 생일은 안 챙기고 넘어가는 분위기지만. 생일날마다 꼬박꼬박 연차 쓰고 도망가는 사람이 뭘 새삼스럽게 자기 생일 알고 있다고 기분 나빠해. 별꼴이야 정말…….

입술에 가볍게 톡톡 두드려 발랐던 립스틱을 파우치에 집어넣으면서 어깨를 내렸다. 흥,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어딘가 한계점에 도달한 기분. 그러게 수제비 먹자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 저 인간이 언제부터 수제비에 홀린 건지. 수제비 비하 발언은 아니지만 생일상으론 소박한 음식 아닌가. 채우수 생일이라는 핑계로 우아하게 칼질하며 기분 내고 싶었지만 생일 당사자가 먹고 싶은 거 먹게 해 주자는 마음으로 수제비까진 먹었더랬다.

그래, 수제비까지는 또 괜찮았어. 나도 맛있게 잘 먹었으니까. 갈수록 가관이어서 문제지.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오늘 저녁 약속을 잡은 것도 나다. 저녁 같이 먹자는 내 말에 채우수는 그러자고 했고, 수제비를 먹고 나서는 그는 할 일을 다 끝냈다는 듯 집에 가자고 했다. 그것도 섹스가 목적이 아닌, 말 그대로 귀가를 하자는 뜻으로. 그러니까 오늘따라 이상한 그를 붙들고 카페에 들어온 것도 결국 나다.

정말이지 어이가 없어서. 무슨 나 좋다는 남자가 이래?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일찍 안 해서 그런가 싶어서 커피 두 잔을 앞에 두고 가방에서 선물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생일 축하한다는 말도 곁들이면서. 그 순간 채우수의 표정은 어디 교과서에라도 실려야 할 정도였다. 선물 받았을 때 절대 지어서는 안 될 무례한 표정으로다가.

그는 내 선물을 마지못해 받으며 내 생일인 건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고, 나는 얼빠진 나머지 침묵했다.

나름 큰마음 먹고 산 넥타이는 그렇게 떨떠름한 반응 속에 포장도 풀리지 않은 채로 그의 옆자리에 놓였다. 포장부터 브랜드의 위엄을 드러내는, 나는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샀던 그 넥타이는 그렇게 그의 옆에서 초라해졌다.

재수 없어 정말…….

화장실에서 나와 자리로 돌아온 나는 가방 속에 파우치를 넣으면서 그의 옆자리를 훑었다. 여전히 뜯어보진 않은 듯 포장된 상태 그대로의 선물을 보자니 이가 빠드득 갈린다.

“한연두.”

“네.”

“내 얼굴 좀 보지?”

그의 옆자리에서 시선을 끌어 올려 눈을 마주쳤다. 사뭇 진지한 그의 표정에 치켜든 눈썹을 조금 내렸다.

“할 말이 있어.”

“해요. 아, 잠깐만요. 내가 먼저 말해요.”

그러니까 이건, 순간적인 감정에 치우쳐 앞으로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까지는 전혀 생각지 않은, 필터를 전혀 거치지 않은 말이었다.

“나 오늘 되게 많이 참았어. 사실 이런…… 나도 이런 방식은 처음이어서 자존심도 상하는데…… 뭐, 자존심 세울 일은 아닌 것 같아요. 나는 자존심 상하는 것보다도 답답한 거 제일 싫어하고, 답답한 거 계속 쌓이면 돌아 버릴 거 같으니까…….”

“한연두.”

“네?”

“말 돌리지 말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바로 얘기해.”

“나 선배 좋아해요.”

이런 식으로, 이런 엉망인 감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아니었지만 뱉고 나니 속은 시원하다.

“알아.”

……알아? 나도 최근에야 인정한 걸 자기가 어떻게 알아. 웃기고 있어.

“그게 다야? 하고 싶은 말이?”

놀랍지도 않다는 듯 눈썹도 하나 까닥하지 않던 그가 마지막 진술을 해 보라는 듯 거만하게 제 턱을 쓸었다.

“싫기도 해요.”

“흠.”

“솔직히 말하면 지금 더 싫어졌어. 세상에, 반응이 그게 뭐예요? 기껏 좋아한다고 말해 줬는데.”

“네가 나 좋아하는 거 하나도 안 반가워.”

“웬일이야, 그 말 진짜 재수 없어요.”

“그래. 그 편이 더 반갑지.”

정말이지, 정말이지……. 소리라도 꽥 질러 버리고 싶었지만 입술을 짓씹으며 겨우 참았다.

“너 나한테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뭔 줄 알아?”

“안 세어 봐서 모르겠는데요.”

“세상에, 재수 없어, 웃겨, 웬일이야, 짜증 나.”

“웬일이야……. 내가 언제 그렇게 재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어요? 웃겨.”

“거봐.”

……진짜 짜증 나.

“그럼 선배는 나한테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뭔 줄 알아요?”

“알아.”

“웃겨, 맨날 다 알아.”

“‘알아’ 이 말 아냐?”

아, 그 말이야? 그의 말에 맞다고 대답하기는 싫어서 입술을 꾹 눌러 다물었다. 날 보는 채우수의 입꼬리가 살짝 휘었다.

“거봐. 난 다 알아.”

잘났어 그래. 좁힌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머그잔을 들었다. 언제 다 마신 건지 입에 들어가는 커피도 이제 얼마 없다.

“근데 왜 요즘은 나 좋다고 안 해요?”

“이제 안 하려고.”

“아아……. 선배 막 그런 스타일인가? 자기 좋다고 하면 그때부터 마음이 식어 버리는?”

“그런 건 아니고. 다 마셨으면 일어날까.”

“선배 되게 이기적인 거 알아요?”

“한연두.”

“왜!”

“……거울이나 봐.”

채우수가 트레이에 머그잔을 올리고 일어났다. 이렇게 빠져나가겠다 이거지. 얄밉게. 그렇다고 오늘 이 대화를 포기할 생각은 없다. 나는 옆자리에 걸어 둔 코트를 팔에 걸면서 거울 대신 창에 비친 얼굴을 확인했다.

뭘 보라는 거야. 예쁘기만 하구만. 괜한 심술이야, 정말.

차를 주차해 둔 곳까지는 카페와 거리가 있었다.

“추워?”

한파는 지났다지만 겨울밤 찬 공기에 코가 뻥 뚫리는 듯했다. 내 목도리를 칭칭 감아 주는 그의 손가락 끝에 내가 건넨 선물 봉투가 달랑거렸다.

“괜찮으면 좀 걸을까. 소화도 시킬 겸.”

소화는 진작 다 된 것 같은데……. 갸웃거리던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앞서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어째 손도 잡지 않는다. 타다닥, 잰걸음으로 따라잡아 그의 팔짱을 꼈다. 내 손을 내려다보는 채우수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깔렸다.

“추워서요.”

그 말에 굳었던 얼굴을 겨우 푼 채우수가 내 손을 잡아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그와 맞잡은 왼손에 서서히 온기가 퍼졌다.

“아무튼 선배는 그걸 알아야 해요.”

“뭐가.”

“나 되게 큰 용기 낸 건데. 고민 엄청, 진짜로 많이 했단 말이에요. 내가 채우수를 정말 좋아하는지, 아닌지.”

“…….”

“사실 아직도 헷갈려요. 마음이 왔다 갔다 해.”

“한연두.”

“들어 봐요. 내 말 안 끝났어. 그동안 선배가 나한테 못되게 군 거 생각하면 나도 자존심 상하긴 하지만.”

“…….”

“지금 내 마음은, 선배를 싫어하는 마음이 여기까지라면.”

오른손을 턱 끝 위치까지 들며 그를 쳐다봤다.

“좋아하는 마음은 여기까지예요.”

좀 전보다 더 위로 올라가 코끝에 맞춘 내 손에 채우수의 시선이 닿았다 흩어졌다.

“아주 근소한 차이로 지금은 선배를 좋아하는 마음이 이겼단 말이에요.”

무슨 말을 더 해야 했을까. 우리 둘의 구두 소리가 인적 드문 골목길을 채웠다. 조금씩 어긋나던 그 소리도 어느새 같은 박자다. 쿵, 쿵 심장 박동도 조금씩 빨라졌다. 아마 고백의 후유증이거나,

“내가 여기까지 했는데 나머진 선배가 알아서 말하면 안 돼요?”

“무슨 말을 해, 내가.”

채우수를 향한 분노의 여진이거나. 그의 대답에 가던 걸음을 멈추자 그의 발도 덩달아 땅에 붙었다. 날 쳐다보는 얼굴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깔끔한 거 좋아하는 사람이 왜 나한테만 흐리멍덩해요? 왜 이렇게 질척여?”

“내가 뭘.”

“아, 사귀자고.”

“뭐?”

“결혼하자는 것도 아니고. 누가 반지 들고 프러포즈해 달래요? 남자가 돼서 비겁하게 사귀자는 말도 하나 제대로 못 하고.”

순간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동력으로 자유분방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입은 멈출 줄을 몰랐다.

“좋아한다고 하지나 말든가. 자꾸 신경 쓰이게 굴면서.”

“…….”

“나는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선배는 혼자 속 편하게 도망가고.”

“…….”

“나 좋다면서요. 좋아한다면서 나 밀어낼 기회만 보는 것 같아. 왜 자꾸 헷갈리게 굴어요. 나는 어떡하라고.”

“…….”

“진짜 짜증 나. 요즘 선배 때문에 잠도 잘 안 와요. 이럴 거면 왜 좋다고 그랬어. 새로 찾은 악취미예요? 나 그냥 한번 갖고 놀려던 건데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런 거 아니야.”

“아니면 뭐야 대체?”

혀끝까지 치미는 말을 삼키는 듯 그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비틀린 내 눈썹만큼이나 그의 표정도 일그러졌다.

“내가, 상등신이라서 그래.”

“…….”

“네 말대로 비겁하기 짝이 없는 머저리라서. 용기는 없고 겁은 많아서. 네가 도망갈까 무서워서. 잡을 용기는 더 없어서.”

허. 어쩜…….

어쩜 이렇게.

……어쩜 이렇게 뻔뻔한 얼굴로 사람을 되레 미안하게 만들지. 잘 들어 보면 결국 내 탓을 하는 말인 듯했지만 머리가 빨리 돌아가진 않았다.

“……그렇게, 선배가 어? 그런 식으로 자기 비하한다고 내 마음이 풀리진 않아요. 그리고!”

“…….”

“선배가 상등신이면 상등신을 좋아하는 나는 뭐가 돼요? 나 끼리끼리 되기 싫어.”

고장 난 가로등 조명이 깜빡댄다. 그늘이 내린 채우수의 얼굴에도 빛이 스몄다.

“대답해요, 얼른.”

“무슨 대답을 해.”

“아, 진짜. 내가 사귀자고 했잖아. 난 산뜻하게, 깔끔하게 제대로 시작하고 싶어요.”

“연두야.”

“싫다고 대답하면 죽여 버릴 거예요.”

“…….”

“…….”

“나는 네 손에 죽는 것도 나쁘진 않, 악!”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내 발에 정강이를 걷어차인 채우수는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이다. 웃겨 정말. 지금 황당한 사람이 누군데!

“대답해.”

“반말에, 이제 상사를 때리기까지 하네, 한 선임님?”

“똑바로 대답이나 해요. 사귈 거야, 말 거야.”

내 얼굴을 느릿하게 훑던 그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용기 있게 고백하긴 했지만 나는 그 순간까지도 채우수가 싫다고 대답할까 두려워 손끝이 덜덜 떨렸다. 까짓거 싫다고 하면 알겠다고 하면 되지. 나는 창피함을 감추듯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채우수를 향해 소리쳤다.

“대답!”

채우수는 한참을 날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는 듯 단정히 다물었던 입술 옆으로 보조개가 피어났다. 그는 내 손으로 천천히 시선을 내린 뒤, 제 손을 겹치면서 나직이 말했다. 목소리 끝이 젖었다고 느꼈다면 그건 내 착각이었을까.

“그래.”

“제대로 대답해요.”

“……그래, 사귀어.”

엎드려 절 받는 꼴이지만 이것도 고백이라고 가슴속에 꽃봉오리를 틔운 듯하다. 그의 눈빛이 먼저 마주한 봄은 다디단 목소리로 만연해졌다.

“사귀자, 우리. 제대로.”

“……나 좋아한다고도 해요, 빨리.”

“그건 못 하겠는데.”

“왜?”

“글쎄,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채우수가 내게로 한 발 가까이 다가오며 눈을 맞췄다. 그가 내 뺨을 감싸자 베르가모트 향이 나까지 에워쌌다.

“내가 한연두 너 많이, 아주 많이 좋아해. 알아?”

“……몰라요! 말로만 좋다고 그러는데 어떻게 알아, 내가? 내가 뭐, 신이야?”

“믿지도 않는 신 찾지 말고.”

“짜증 나. 짜증 나 죽겠어.”

“죽지도 말고.”

“말꼬리 잡지 마요. 진짜 짜증 나니까.”

스치듯 닿을 듯한 입술에 상체를 뒤로 물렸다가 그대로 등을 돌렸다. 씩씩대던 어깨 뒤로 그의 가슴팍이 붙었다. 뒤에서 내 허리를 껴안은 그의 목소리가 머리 근처에서 쏟아졌다.

“미안해.”

“애초에 미안할 짓을 하지 마요.”

“사람이 너무 완벽할 순 없어, 연두야.”

팔꿈치로 그의 배를 찍자 엇, 하던 목소리에 웃음이 섞이기 시작했다.

“알았어. 그럴게. 미안할 짓 안 할게, 이제.”

“…….”

“고마워. 나 좋아해 줘서.”

“알면 됐어요.”

“지금 상태는 어때.”

채우수가 내 손을 겹쳐 잡고는 왼손을 올리며 ‘좋아하는 마음’, 오른손을 올리며 ‘싫어하는 마음’ 나직이 속삭였다.

“이쪽이 더 커져도 너 나 안 버릴 자신 있어?”

왼손은 같이 내린 채로, 눈앞에서 내 오른손을 꽉 쥔 그의 오른손이 겹쳐져 흔들렸다.

“버리긴 누가 누굴 버려요.”

“버려도 좋으니까 네 옆에 버리겠다고 약속해.”

“……뭔 소리야. 그럴 일이 없도록 먼저 약속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슬그머니 등을 돌렸더니 그대로 그의 품 안에 갇혔다. 말아 쥐었던 양손을 그의 허리에 두르며 고개를 살짝 들었다. 하아, 한숨과도 같은 숨을 뱉던 그의 입술에 흐릿하던 미소가 선명해졌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럴 일 없도록 내가 노력할게.”

“흐응, 또 말로만 그러겠지.”

“온몸을 다 바쳐 막아 볼게.”

“뭐…… 그렇다고 또 온몸을 바칠 것까진…….”

“너 난 못 믿어도 내 몸은 믿어도 돼. 명이 꽤 질기거든.”

“음, 그런 것 같긴 해요. 밤새도록 그러는 거 보면. 생명력이 굉장히 강해요.”

한쪽 눈썹을 들며 그의 바지 앞섶으로 내렸던 시선을 위로 끌어당겼다. 비스듬히 올라갔던 입술에서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늘따라 제법 앙큼하네, 한연두.”

“왜. 그래서…… 싫어?”

“……까불지 마, 너.”

“싫냐구요.”

“내가 어떻게 널 싫어하겠어.”

흐응, 작게 웃으며 내뱉던 투정이 그의 품으로 빨려갔다. 깜빡대는 가로등 조명처럼 심장이 두근두근, 평소 움직임을 잊은 듯하다.

“생일 축하해요.”

“응.”

“그 선물은…….”

“나중에.”

“아니, 나중이 아니라 풀어 보고 마음에 안 들면 교환을…….”

“한연두 너 하나로 충분해, 지금은. 이깟 걸로 방해받고 싶지 않아.”

……웃기지도 않아 정말.

“그래도 내가 준 선물인데 이깟 것이라는 말은 좀 그렇지 않아요? 내가 얼마나 열심히 골랐는-.”

“지금 몇 시지?”

“10시 지났을걸요.”

“그러니까. 12시까지 두 시간도 안 남아서 내가 지금 마음이 급해졌거든, 연두야?”

“……신데렐라 출신이에요?”

“생일 선물 빨리 뜯어보고 싶어, 오늘 안에.”

“지금 뜯어봐요, 그럼.”

“아니, 그 선물 말고. 너.”

제 가슴팍에서 날 떼어 낸 채우수가 내 코트 깃을 여미면서 검지를 가볍게 퉁 튕겼다.

“너 오늘 포장도 예쁘게 해서 뜯는 재미가 더 클 것 같은데.”

“웬일이야…….”

“싫어?”

“싫다기보다는…… 선배 짜증 나서 이 말까진 오늘 안 하려고 했는데.”

옆으로 굴렸던 눈동자가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에게 돌아왔다. 달싹이던 내 입술에 닿았던 그의 눈이 얄궂게 접혔다.

“해 봐. 무슨 말인데.”

“……내 가방 안에 스타킹 하나 더 있어요.”

“그래서.”

“그냥…… 그냥 그렇다구요…….”

“…….”

“지금 신은 것보다 얇은 거라 잘 찢……, 엄마야!”

채우수가 급히 발을 떼는 통에 순간 균형을 잃었다. 허리를 휘감은 그의 손이 날 받치고는 제게 당겨 붙였다.

“너 내가 말하기 전에 생각 먼저 하라고 했지.”

“뭘. 내가 뭘.”

“까불지 마, 진짜.”

그의 품에 쏟아지듯 안겨 발을 뗐다. 어쩐지 가속도가 붙어 점점 빨라지는 발걸음. 무언가를 털어 낸 듯 가볍게 땅에 닿는 구두 소리가 웃음소리 같았다.

* * *

순간에 충실할 것. 가훈과도 같았던 아빠의 말씀은 굴곡진 우리 남매의 삶을 조금은 단조롭게 만들었다. 과거야 어떻든 우리는 현재의 삶에 충실했고 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운다고 달라질 일도 아니었고 하늘에 계신 부모님이 바라는 일도 아니었을 거니까.

타고난 성격이 그런 탓도 있다. 한태평이나 나나 복잡한 건 싫어하는 편이고, 옛 감정에 매몰되기보다는 순간의 행복을 추구한다. 단순해 보일지라도 우리 남매가 지금까지 무던히 잘 버틸 수 있었던 나름의 생존법이기도 했다.

내게는 연애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의 감정이 어떻든 간에 나는 지금의 채우수가 좋고, 어쩌면 앞으로의 채우수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

“오늘부터 신을 믿어 볼까 해.”

침대에 나란히 누운 채로 뒤에서 날 껴안은 채우수가 내 입술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느끼하게 왜 이래. 뜬금없기 짝이 없는 그의 말에 할 말은 물론이고 조금 전까지 부지런히 떠들어 대던 말들도 뭐였는지 잊어버렸다.

“……선배가요? 갑자기요?”

응. 나른한 그의 숨결이 목을 간질였다. 어딘가 간지러워져 꿈틀댔더니 채우수가 날 안은 팔에 힘을 줘 벗어나지 못하게 붙들었다.

“혹시 알아? 내가 착하게 살면 오늘 같은 생일을 또 보낼 수 있게 해 주실지.”

“오늘 같은 생일이 어떤 건데요.”

“최악의 생일 순위권에 들어.”

“뭐야…….”

내 목을 지나는 그의 입술 새로 픽, 바람이 새어 나왔다. 잔잔한 진동과 함께 내 어깨에 점점이 내려앉는 입술은 점점 끈적해졌다.

“최고의 생일이기도 했고.”

“으음…….”

“만약에 죽기 직전의 나에게 딱 하루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아…….”

“기꺼이 오늘을 선택할 정도로.”

예민한 지점을 굳이 찾아서 혀로 핥다가 이로 살짝 긁어 대기까지 하던 그가 제 입술을 붙이고는 “그만큼 좋았어.”라고 작게 읊조렸다. 입술 끝에서 시작한 진동이 열이 식은 몸을 또다시 데우는 듯하다.

“……웃겨. 나랑은 오늘 겨우 사분의 일 정도만 같이 보냈는데요?”

“응.”

“여태…… 800시간이 훨 넘는 생일 중에 고작 6시간인데?”

“해피 엔딩이었잖아. 충분하지.”

“으음, 보람 있네요.”

스타킹 덕분인가. 네가 오늘 아주 수고했어. 침대 밑에 찢어진 채로 나뒹굴고 있을 스타킹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제 용도로 쓰지 못했다는 미안함은 덤이다.

“있잖아요,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마주 보려고 고개를 돌리자 채우수가 가만히 있으라는 듯 몸을 옥죄어 왔다. 정말이지 이건 무슨 취미인 건지. 뒤에서 들리는 그의 웃음 섞인 숨소리가 짓궂다.

“하나만 물어. 두 개 세 개 묻지 말고.”

“알겠어요.”

“내 대답 듣고 나면 그대로 입 다물어.”

“……그건 좀 불가능할 것 같은데?”

“묻지 마, 그럼.”

흥. 그런다고 누가 가만있을 줄 알고.

“혹시 선배 눈에는 내 뒷모습이 더 예쁜 편이에요?”

“뭔 소리야.”

“왜 매번 이렇게…… 뒤에서 안아요? 나는 얼굴 안 보여서 별로야.”

“왜, 너 내가 옆에 있어도 내 얼굴이 막 보고 싶고 그래?”

“…….”

“왜 대답을 빨리 못 하지? 그 정도로 내가 좋은가 봐, 한연두?”

“웃겨…….”

“아껴서 봐. 자주 보면 얼굴도 닳아.”

별……. 내가 봤으면 뭐 얼마나 쳐다봤다고 닳기까지 할까. 반박하고 싶지만 오늘은 내가 힘이 없으니 참는다. 뭐가 그리 웃긴지 채우수가 내 어깨에 제 얼굴을 묻고 킥킥댔다. 그러고는 날 감쌌던 팔을 내려 내 배를 쓰다듬으면서 한다는 말이,

“똥개 같아, 한연두.”

“……뭐라구요?”

“몰티즈 섞인 똥개 같아, 너.”

어이없어. 개 같다는 말 아냐. 발끈해서 고개를 돌리자 관자놀이께에 붙었던 그의 입술이 귓바퀴를 살짝 깨물었다. 누가 지금 개 같다는 거야, 정말.

“너 강아지들이 주인 앞에 등 보이고 앉는 이유가 뭔지 알아?”

“안 키워 봐서 몰라요.”

“그만큼 주인을 신뢰한다는 거야.”

“아…… 근데 무슨 상관인데요 그게.”

“너도 날 조금이라도 믿어 줬으면 좋겠어. 무슨 일이 벌어지든.”

“…….”

“내가 설명할 거니까. 내 말부터 들어. 알아들어?”

“그렇다고 해도 난 똥개 취급받기는 싫은데요? 순 개수작 같아. 이것 봐. 지금도 이렇게…….”

정말로 개 취급을 하겠다는 듯 배를 간질이던 그의 손은 어느새 내 가슴 한쪽을 쥐고는 주물럭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뭣보다 이 자세가 안정적이야. 가슴 만지기 딱 좋거든. 편안해.”

“세상에.”

“고개 돌려. 닳아.”

“……달다구요?”

“닳는다고.”

닳기는……. 내 가슴이 먼저 닳을 판이다.

“너 머리를 좀 더 길러 보는 건 어때.”

“왜요?”

머리카락 길이를 가늠해 보려는 그의 입술이 내 목선을 따라 내려왔다. 그러고는 대충 이쯤이라는 듯 자리를 잡은 입술이 살갗을 당기듯 빨았다 놓아줬다.

“그럼 목에 남긴 건 어느 정도는 가려질 거 아냐.”

“뭐야, 남기지 마요 진짜!”

“이런 거라도 남겨 놔야 오늘을 기억하지.”

“완전 이기적이야. 기억할 거면 왜 내 몸에만 해요?”

“너도 해. 말린 적 없잖아.”

웃겨. 말릴 시간은 있었게. 그제야 몸이 붕어빵 뒤집듯이 돌려졌다. 마주친 시선 속 그의 눈빛이 보내는 의미가 명징하다. 누가 속을 줄 알고.

“해, 얼른.”

“싫어요.”

“내가 내 몸에 할 순 없잖아. 해, 네가 남겨.”

“싫어, 피곤해. 내가 하나 남기면 선배는 더한 것도 할 거잖아. 싫어요.”

“싫은 것도 참 많아. 좋겠어, 한연두는.”

싫어요, 싫어요. 날 흉내 내는 채우수의 목소리가 내 이마에 앉았다가 콧대를 스치며 내려왔다. 코끝을 살짝 깨물며 떨어지는 입술은 얄밉기만 하다.

“너 진짜 싫은 거 말할 때는 목소리부터 달라. 모르지 너는?”

“흐응, 잘났어 정말. 좋겠어요 다 알아서.”

“좋지 그럼.”

나른한 숨은 이제 내 머리 위에서 흩어졌다.

“좋아 죽겠어.”

채우수가 한숨처럼 나직이 내뱉은 말은 이마에 내리는 자잘한 키스에 묻혀 버렸다. 팔베개를 한 그의 손이 이제 그만 자자는 듯 내 팔뚝을 토닥였다. 나는 그의 품에 더 엉겨 붙은 채 고개를 들었다.

“여기는?”

“뭐.”

“여기도 해 줘요.”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두 번 두드리자 채우수의 한쪽 입꼬리가 옆으로 길게 휘었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감춘 그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밀어냈다.

“싫어.”

“왜 싫어요? 입술에도 해 줘, 얼른.”

“달아.”

“웃겨. 닳긴 뭐가 자꾸 닳아.”

“달다고. 닳는 게 아니라. 난 단 거 싫어하거든.”

말장난은. 주먹으로 채우수의 가슴을 퍽 두드리고는 그 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뭐, 왜. 의문스러운 눈빛을 그대로 받으며 그의 입술을 머금었다. 달긴 뭐가 달아. 웃기고 있어. 설탕이야 사탕이야 뭐야.

쪽. 경쾌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입술이 만족스럽다. 작게 웃으며 그를 쳐다보자 알 듯 말 듯 한 눈빛이 내 입술을 스치고는 눈가에 닿았다.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 듯 입천장에서 혀를 떨어뜨리며 똑, 소리를 낸 채우수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너……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연애했어?”

“이런 식이 뭔데요? 나는 원래 연애하면…….”

“됐어. 말하지 마. 물어본 내가 등신이지.”

……그럴 거 왜 물어봐? 이상한 성격이야 정말. 가늘어진 눈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그의 뺨을 툭툭 두드리고는 고개를 내려 그의 가슴팍에 기댔다. 허, 바람 빠진 소리에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요망해, 한연두.”

“내가 뭘.”

“틈만 나면 맞먹고.”

“무슨 상관이야. 내가 좋다는데.”

“눈 감고 얼른 자. 너 잠 못 잤다며.”

“사실은 잠은 잘 잤어요. 요즘 너무 피곤해서 잠은 잘 와. 회사에선 책임님이 괴롭히고 퇴근해서는 또…….”

“하여튼 자기 직전까지 이 입은 가만두질 않지.”

코끝을 살짝 깨물었던 그의 입술이 제자리를 찾으며 내 입술 위로 겹쳐졌다. 얼른 자라고 해 놓고는. 다른 뜻이었나. 입술을 벌리며 들어 온 혀가 날 휘감았다. 달다. 우리의 닳고 닳은 시간도 이 순간만큼은 달게 녹아들었다.

* * *

“한연두.”

“응.”

“이것 좀 보라니까.”

“응.”

“아, 누나!”

하마터면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이게 어디서 누나가 밥 먹는데 큰소리야. 날 선 시선을 보내자 한태평이 되레 찌푸린 얼굴로 되받아쳤다.

“사람이 말하면 반응을 해야 할 거 아냐. 무거워. 이것 좀 받아 줘.”

“내려놔 그냥.”

그제야 바닥에 내려놓은 택배 상자들이 제법 둔탁한 소리를 냈다. 오늘따라 여러 개 도착한 택배 상자가 어지간히도 무거웠던 모양이다. 그래 봤자 경비실에서 엘리베이터까지 얼마라고.

“뭐가 이렇게 많아. 한태평 너 뭐 주문했어?”

“큰아빠가 반찬 보내 주셨나 봐. 근데 누나 연애해?”

“그럼 조심히 놨어야지! 연애는 무슨 연애야 내가.”

“연애한다던데, 우수 형이.”

세상에. 이건 무슨 꿍꿍이야.

“채우수가 나 연애한다고 했다고?”

“응. 좀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만났거든. 형이 그러던데? 누나 남자 친구 잘 있냐고.”

미친 거 아냐? 한태평한테 그런 말은 왜 해. 왜 물어. 내가 오늘 연락 안 했다고 그러는 거야?

“뭐……. 채우수가 딴소리는 안 해?”

“음, 딱히. 이번엔 괜찮은 남자 만나나 봐? 근데 커터 칼 어디다 뒀지.”

“거기, 너 뒤에 연필꽂이 통.”

“누나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형이 누나 남친들 마음에 안 들어 했거든. 내가 그래도 누나 거둬 간 남자들이라 고맙다고 생각한다니까 형이…… 아, 이 칼 다 녹슬었잖아.”

“서랍에도 하나 있어. 채우수가 뭐라고 했는데 그래서.”

“누나가 아깝대. 진짜 착하지, 우수 형? 난 그 말 듣고 토할 뻔했잖아.”

이게 진짜. 쪼그려 앉아 택배 상자를 뜯는 한태평을 발로 밀어 보지만 꿈쩍도 않는다.

“이것 봐, 이것 봐. 한연두가 밖에서 얼마나 내숭을 떨었으면 형이 그런 말을 해. 이렇게 폭력적인 모습을 봐야 형도 아,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싶을 거야. 내가 언제 한번 형한테 누나 본모습 다 까발린다. 그런 의미에서 오만 원만 줘.”

“한태평, 결론 도출이 상당히 이상하지 않아?”

“내 입 채우는 조건치고는 저렴한 편이지. 누나의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

“돈은 왜 필요한데. 너 벌써 용돈 떨어졌어?”

“책이랑 이것저것 사면 오만 원이 뭐야, 십만 원은 금방이야.”

아주 날강도가 따로 없다. 그래도 요즘은 채우수 덕분에 고정 비용을 빼고는 돈 쓸 일이 없긴 한데. 한태평 용돈을 올려 줘야 하나.

“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매실장아찌! 역시 큰아빠밖에 없어. 그렇지 누나?”

이렇게 된 거 큰아빠께도 용돈을 더 보태 드려야겠다. 나는 식탁 의자에 기대어 앉아 이름값을 하며 반찬을 맛보는 한태평에게 슬쩍 운을 띄웠다.

“그거 있잖아…… 아래층에도 좀 갖다줄까?”

“아래층 어디. 우수 형한테?”

“응. 어차피 우리 둘은 집에서 밥도 잘 안 먹으니까.”

“형도 요즘 야근 많이 한다던데?”

“야근……을 하긴 하지만…….”

“누나, 형 갖다주고 싶으면 갖다주고 싶다고 해. 누가 뭐래?”

웬일이니. 얘는 왜 쓸데없는 곳에 눈치가 빠르니.

“그냥 책임님 혼자 사니까……. 잘 못 먹고 다닐까 봐 안쓰러워서 그러는 거야.”

“에이, 그건 누나 착각이야. 형 엄청 잘 챙겨 먹어. 형네 집 냉장고 못 봤지? 다 유기농에다가 몸에 좋다는 거 엄청 많아. 한약도 많고. 별의별 영양제 다 있어. 약국 같아.”

“음…….”

“그래도 좀 갖다줄까? 그래, 그러자. 내가 나중에 나가는 길에 형한테 주고 갈게.”

챙겨야 할 눈치는 정작 필요할 때 챙기지도 않고. 나도 나지만 한태평도 참 답이 없다. 빈 반찬 통을 들고 와서 반찬을 옮겨 담는 한태평은 금방이라도 채우수 집으로 내려갈 기세다. 갖은 생색은 혼자 다 내려고 저러는 거겠지. 나는 식탁 의자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와 한태평 옆에 쪼그려 앉았다.

“아냐, 내가 갈게.”

“엥. 쉬는 날 회사 사람 보는 거 제일 싫다더니 웬일이래?”

“회사 사람 아니고 그냥…… 그냥 이웃 주민으로 가는 거야.”

“그게 더 이상해, 한연두. 우리 윗집에는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윗집에 누가 살고 있었어……? 언제부터? 놀라 쳐다보자 한태평이 어이없다는 듯 내 얼굴을 훑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장아찌를 옮겨 담은 반찬 통을 제 옆에 둔 채로 다른 택배를 뜯기 시작했다.

“근데 한슬 장학재단에서 뭐 보냈나 봐, 누나. 갑자기 뭐지.”

“너 학교 졸업한 거 재단에서 아직 모르는 거 아냐?”

“에이, 돈 나가는 걸 누가 그렇게 허술하게 관리하냐. 그리고 이것 봐. 누나 이름으로 왔는데?”

찌익, 요란한 테이프 소리와 함께 스티로폼 상자가 열렸다. 한우로 보이는 생고기 위에 놓인 명함 한 장. 태평은 나에게 읽어 보라는 듯 명함부터 건네고는 고기를 살폈다.

굳이 따로 찾아볼 필요도 없는 익숙한 인물의 이름에 명함을 든 손끝이 저렸다.

* * *

등잔 밑이 어둡다는 건 어느 정도의 명도를 말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어두운 등잔 밑에 살았던 것일까. 내 아둔함의 끝은 과연 어디까지였는지. 채우수도 처음부터 내 아둔함을 이용했던 것인지. 나는 쓰게 웃으면서 현관을 나섰다.

생각해 보면 아주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채우수의 아버지가 높은 곳 어딘가에서 한자리하고 있다는 건 학교 다닐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그의 외가는 유명 건설 회사라는 것 역시나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

내가 몰랐던 건 그저 몇 가지 사실들. 한슬 장학재단이 채우수 어머니 집안의 소유라는 것과 몇 해 전 그의 아버지인 국회의원 채영환이 재단 이사장을 맡았다는 것.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나오는 기본 정보들.

그렇다고는 해도 재단에서 내 앞으로 보낸 한우 세트와 이 명함은 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단 말인가.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드라마 장면들을 지워 내며 채우수네 현관문 앞에 섰다.

“아니요. 제가 지금 가겠…….”

깜짝이야. 초인종을 누르기도 전에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눈이 마주친 채우수가 잠깐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나중에 전화하겠다며 휴대폰을 내렸다. 어딜 그리 급히 가려는지 코트에 팔을 한쪽만 끼운 상태다. 그가 발을 빼내자 등 뒤로 현관문이 닫히며 전자음을 울렸다.

“무슨 일이야?”

채우수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날 돌아봤다. 짜증이 난 것도 같은 얼굴. 다시 울리는 전화를 거절한 그가 내 대답을 재촉하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반찬이랑…… 고기 좀 갖다주려구요. 재단, 아니 어디서 선물 들어온 게 있어서.”

“괜찮아. 너 먹어.”

“……기껏 생각해서 내려왔는데.”

“두고 가, 그럼. 비번 알지?”

“…….”

채우수는 지금 제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긴 알까. 누가 여자 친구를 이런 식으로 돌려보내. 불퉁한 시선을 던졌지만 이미 엘리베이터에 오른 그는 손을 훠이 저으면서 어서 들어가라고 받아칠 뿐이다.

“어디 가는데요.”

“있어. 일이 좀 생겨서.”

“무슨 일? 라인에 문제 생겼대요?”

“회사 일은 아니고.”

갈게. 짧은 대답을 끝으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뭐가 이래. 멍하니 그가 떠난 자리만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닫힌 현관문. 사방이 아주 다 닫혔지……. 답답한 마음에 입술을 잘근대며 손에 든 반찬 통과 포장된 고기로 시선을 내렸다.

그냥 나중에 내려올까, 아니면 들어가서 두고 갈까. 사실 이런 건 핑계에 불과했는데.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볼까 싶어서 내려온 건데.

흐음. 고개를 돌려 확인한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지하 1층이다. 채우수는 벌써 내려갔겠지. 아무래도 다시 오는 게 낫겠다 싶다. 나중에 직접 얼굴 보고 말해야지 생각하며 비상계단으로 발끝을 돌렸다.

계단으로 발을 내딛는데 아래에서 쿵쿵, 누군가 바삐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더니 어딘가 익숙한 남자의 정수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뭐야 정말. 저를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건지 고개를 든 채우수와 눈이 마주쳤다. 가만히 있으라는 듯 눈짓하던 그가 두 칸씩 오르던 계단을 세 칸씩 오르더니 몇 걸음 만에 내 앞에 섰다.

“왜 벌써 왔어요?”

“너 이러고 있을까 봐. 신경 쓰여서.”

채우수가 내 볼을 툭툭 두드리더니 어깨를 감싸고는 집으로 방향을 돌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번호를 눌러 현관문을 열어 등을 떠미는 그는 제 뺨에 닿는 따가운 시선은 아랑곳하지도 않는 기색이다.

“들어가.”

“선배는요?”

“여기서 얌전히 놀고 있어. 금방 올 테니까.”

“……어디 가는데?”

“갔다 와서 말해 줄게. 기다려. 도망가지 말고.”

“도망은 누가 도망을 가요. 그리고 도망가 봤자 위층인데?”

“기다려, 아무튼. 사고 치지 말고.”

빙긋 웃던 채우수가 금세 표정을 지우고는 닫힌 문을 반쯤 열었다. 정말 급한 일이긴 한 모양이다.

“언제 올 건데요?”

“얼마 안 걸려.”

“빨리 와요. 나도 선배한테 할 말 있으니까.”

“무슨 말? 지금 해.”

“나중에. 여기서 할 말은 아니에요.”

“……기다려, 너. 가지 마.”

채우수는 그렇게 나를 집에 들여다 놓고 다시 떠났다. 마치 택배를 안으로 들이는 듯한 신속한 움직임이었지만 연신 내 어깨를 두드리던 그의 손과 경직된 턱 근육에서 느껴지던 초조함에 더 이상 따져 볼 생각도 들지 않았다.

신발을 벗고 그의 집으로 들어가서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반찬 통을 정리해서 넣고, 재단에서 받은 소고기도 일단 냉장고에 넣었다. 한태평의 말대로 그의 냉장고는 몸에 좋다는 건 다 품고 있는 듯하다. 서랍을 한가득 채운 한약까지.

채우수가 한약을 먹는 모습은 딱히 본 적은 없는데. 뭐, 나라고 채우수에 대해 다 알고 있을 리는 없으니까…….

새삼스럽게 그에게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동안 몸도 마음도 가까워졌다고 내가 큰 착각을 하고 살았던 걸까. 돌이켜 보면 나는 처음부터 채우수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고 치부하지 않았던가.

위층 우리 집으로 다시 올라갈까 하다가 채우수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의 말대로 사고 치지 않고, 도망도 치지 않고 소파에 가만히 앉아서 묵묵히. 채우수에게 하고 싶은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면서. 나는 무릎을 세워 앉으며 주머니 속에서 명함을 꺼내 들었다.

재단에서 고기를 보내며 보란 듯이 억지로 끼워 넣은, 이제는 바뀌어서 쓰지도 않는 옛 버전의 채우수 명함. 무슨 뜻으로 이걸 내 앞으로 보냈을까. 사실 깊게 생각지 않아도 보낸 이의 의중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채우수와 가깝게 지내지 말라는 뜻이겠지. 일종의 경고.

유치하다 정말. 굳이 이렇게 티 내지 않아도 나는 내 분수를 잘 아는데.

고작 한우 세트. 돈 봉투도 뭣도 아니고 그냥 고기나 먹고 떨어지라는 건가. 상대도 하기 싫다는 비대면 방식은 내 처지가 어떤지를 더 확인해 줄 뿐이다.

여태 남부럽게 살진 않았어도 열심히는 살아왔는데. 객관적인 스펙만 두고 보자면 나는 철없는 남동생까지 둔 부모 없는 고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그쪽 집안의 귀한 아들을 내게 당장 보내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만나 보겠다는 건데. 채우수가 대체 뭐라고 여태 잘 달리고 있던 내 인생을 한순간에 하찮게 만드는 건지. 오늘은 채우수에게 원망이 앞섰다.

생각이 많아진 머리가 무겁게 기울었다. 나는 무릎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기며 옆으로 누웠다. 뜀박질이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고되다.

많고 많은 장학재단 중에 왜 하필이면 한슬 재단이었을까. 우연도 참 얄궂다.

*

복도에 화재경보기가 시끄럽게 울렸다. 불길은 뭔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이제는 걷잡을 수도 없이 크게 치솟기 시작했다.

‘태평이, 엄마! 태평이는!’

저녁 8시는 7살 한태평에게는 졸린 시간이었고, 엄마는 거실에 있던 나부터 복도로 대피시켰다. 당장 눈에 보이는 수건을 물에 적셔 내게 건넨 엄마는 태평이가 잠든 작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펑! 연달아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복도에는 대피처를 찾느라 우왕좌왕하던 사람들의 고함과 비명도 섞였다. 무서워서 그런 건지, 연기 때문인지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복도에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자고 있던 한태평을 업고 나오던 엄마가 날 발견하고는 내 이름을 크게 부르며 소리쳤다.

내 옷에 달라붙은 불은 어떻게 껐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한태평과 같이 밖에 나와 있었고 엄마는 이웃집 할머니의 손자를 구하러 아파트로 다시 들어갔었다.

‘염병할 119 신고한 지가 언젠데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얼굴이 벌겋게 익은 아저씨가 욕을 하며 고함을 치자 한태평이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을 토해 내는 건 태평이를 비롯한 아이들만은 아니었다. 오래된 아파트 하나가 가진 재산의 전부였던 사람들과 그마저도 아닌 사람들 모두가 옷도 신발도 제대로 입고 신지 못한 채로 발만 구르며 타오르는 불길만 하염없이 쳐다봤다.

‘누나, 어헝, 누나. 흐아아, 엄마…….’

나는 한태평을 끌어안으며 그저 엄마가 무사히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우리 아파트까지 소방차가 진입하기에는 다소 좁은 길목이었고 금방 올 것 같았던 소방차는 불법 주정차된 차량들 탓에 5분이 더 지나서 현장에 도착했다. 최초 신고 후 13분 만이었다.

사람들은 늦게 도착한 소방차를 두고 입을 댔지만 난 그럴 수도 없었다. 인구 대비 소방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지역구였고 관할 구역 또한 넓은 동네에서 소방관인 아빠가 어떻게 일하는지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작은 누군가 평소처럼 화단에 던진 담배꽁초였다. 그곳에서 시작된 불길은 근처 트럭에 실린 가스통으로 옮겨 갔고 그것이 연달아 폭발하면서 대형 화재로 번졌다. 다른 서에서 지원을 받은 소방차들이 뒤늦게 도착했다.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만든, 골든 타임을 놓친 화재 사고. 나와 태평이는 그렇게 엄마를 잃었다.

나는 화상 입은 자리가 아픈 것도 몰랐다. 그저 장례식장에 상복을 입고 앉아서 불이 나기 전, 엄마랑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 따위의 것들을 생각했다.

어떤 내용이었더라. 일일 연속극 얘기를 했던 것도 같고. 그해 여름은 더울 거라는 얘기를 했던가. 우리 엄마는 국화보다는 다른 꽃을 좋아하는데. 그 꽃 이름이 뭐였더라. 우리 엄마가 나는 검은색 옷보다 밝은색이 더 잘 어울린다고 했는데. 시선 끝에 닿는 모든 것이 엄마 생각으로 흘렀다.

이제는 엄마 없이 살아온 날들이 더 긴데도 불구하고 꿈속의 나는 여전히 엄마와 함께했던 사소한 순간들을 그린다. 기억에서 흐려진 엄마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칭찬을 곱씹고 잔소리까지도 주워 담으면서.

한연두, 일어나야지. 학교 갈 시간이야. 태평아, 너도 연두 누나처럼 씩씩하게 커야 해. 누굴 닮아서 이렇게 수학을 잘할까, 우리 연두는. 한연두, 너 양말 뒤집어 벗지 말랬지. 연두야, 너 좋아하는 오빠 티브이 나온다. 한연두, 한연두, 한연두, 연두야.

* * *

“한연두.”

나는 오랜 잠수 끝에 수면 위로 겨우 빠져나온 것처럼 현실로 돌아왔다. 숨을 몰아쉬며 눈동자를 굴리자 이제야 채우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자.”

아……. 또 엄마 꿈이었구나.

“방에 가서 편하게 잘 것이지.”

맞아. 채우수 집이었지, 참.

“잘 놀았어?”

채우수가 땀에 젖은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더니 제 손으로 내 뺨을 감쌌다. 그는 엄지 끝으로 젖은 내 눈꼬리를 훔쳐 놓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흐릿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잘 기다리고 있었네. 도망도 안 가고.”

“…….”

“더 잘래?”

나는 대답 대신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웅웅, 제야의 종 속에 머리를 욱여넣어 같이 진동하는 기분이다.

소파에 등을 기대며 커피 테이블 위에 걸터앉은 채우수를 마주 봤다. 아직 잠이 덜 깬 걸까. 그의 얼굴을 보니 막상 머리가 텅 비어 버린 듯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괜히 깨웠나 보네.”

눈만 느릿하게 깜빡였다. 목구멍에서 뭔가가 걸린 듯, 달라붙은 입술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채우수가 손을 잡으며 눈을 맞춰 왔다. 어쩐지 그의 얼굴을 마주하기 싫어져 고개를 내렸다. 나도 안다. 괜한 자존심이다.

“왜 이렇게 심술이 났을까, 한연두.”

“…….”

“응? 내 꿈이라도 꿨어?”

장난기 어린 여상한 말투에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달래 보려는 듯 엄지로 내 손등을 천천히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 꾹 다문 입술이 잘게 떨려 왔다.

“내가 네 꿈에서도 짜증 나게 굴었어?”

“…….”

“다시 나갈까. 꼴 보기 싫어?”

“…….”

“더 잘래? 좀 이따 들어올까 그럼.”

옆으로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말은 섞기 싫구나.”

그의 말에 동의하며 이번에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자 잇새로 픽,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덤덤히 내 얼굴을 어루만지던 그의 시선이 내 뺨을 지나 턱 끝까지 떨어졌다. 고여 있던 눈물을 따라 시선도 같이 흐른 탓이다.

“한연두.”

채우수가 부르는 내 이름에 참고 있던 눈물이 후두두 쏟아졌다. 그가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닦아 냈지만 한번 터진 눈물길은 여러 갈래로 길을 더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 숨겨 두고 싶은 감정은 몰라주면 섭섭하고 알아봐 주면 그것대로 또 서운하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눈물을 닦아 주던 그의 엄지가 붉어진 눈자위까지 천천히 쓸었다.

“알려 줘, 연두야.”

“…….”

“말하기 싫으면 내가 지금 어떻게 하면 되는지 가르쳐 줘.”

언제는 전부 다 알 것처럼 굴던 사람이 왜 이런 건 모를까. 하지만 그를 탓하기엔 나조차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단지, 채우수가 조금 밉다.

채우수로 인해 인지하게 된 내 현실이 새삼스러워서. 꿈에서 깨어난 현재가 조금은 새삼스럽게 초라해서.

“가르쳐 줘, 한연두.”

“…….”

“마음 같아선 왜 우냐고 묻고 싶은데 나 때문일까 봐 묻지도 못하겠잖아.”

“…….”

“울지 말라고도 못 해. 내가 울려 놓고 그러는 것도 이상하니까. 그러니까 네가 알려 줘. 내가 지금 네 옆에 있어도 괜찮은지. 꼴도 보기 싫다면 나가 줄 테니까.”

“…….”

“응? 싫어?”

“그런 게 아니라…… 너무…….”

알량한 자존심으로 깔아뭉갰던 감정이 이제야 비죽비죽 삐져나왔다.

“너무, 너무…….”

꾹꾹 눌러왔던 울음과 함께 겨우 토해 내는 감정이 버거웠다. 차분히 내 대답을 기다리는 채우수에게 어긋난 원망이 꽂혀 이가 갈렸다. 하지만 그마저도 눈물에 쉽게 녹아 흘려보냈다.

녹아 버린 마음은 한없이 흐물거렸다. 아직 꿈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 원초적인 감정까지 내보인 상대 앞에서 더 이상 숨기고 싶은 게 있었을까.

“너무 뭐.”

“너무, 보고 싶어. 짜증 나게…….”

나는 원망 섞인 목소리를 쥐어짜며 일렁이는 시야에 채우수를 담았다. 그가 잘못한 건 전혀 없다는 건 안다. 그럼에도 그로 인해 비참해진 내 기분을, 내 초라한 현실을 탓할 상대는 채우수밖에 없었다.

“나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처음이었다. 남 앞에서 엄마 얘기를 이런 식으로 꺼낸 것은. 고작 엄마가 꿈에 나왔다고 서른 넘어서 이렇게 울 일인가. 밀려드는 창피함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바닥 밑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리자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채우수가 내 옆으로 자리를 옮기며 바들바들 떨리는 내 어깨를 감쌌다. 그의 품에 안기자 억울함이 짙어졌다. 짜증 나 정말. 채우수 네가 뭔데 고작 명함 한 장으로 날 이렇게 형편없게 만들어. 네가 뭔데 내 입에서 엄마 얘기까지 꺼내게 해. 속에 있는 말은 차마 하지도 못하고 그의 가슴만 두드렸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가만히 내 등을 토닥이는 그의 손길이 더 잔인하게 마음을 할퀴었다. 자존심이 벗겨진 감정은 화상이라도 입은 양 쓰라렸다.

* * *

인디언 말로 친구란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채우수에게 얼마만큼의 슬픔을 떠넘긴 걸까.

넘쳐흐르던 감정도 어느새 눈물과 함께 말라 버렸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에 되레 상쾌함까지 느껴진다면 나는 대체 어느 정도까지 단순하고 뻔뻔한 사람인 것인지. 비록 코는 막히고 눈은 퉁퉁 부었지마는.

갑작스러운 눈물에 제법 당황했을 법도 한데 채우수는 제 품을 내어 주며 한참을 말없이 내 등만 토닥였다.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았다. 사실상 우리의 대화는 내게 주도권이 있었고…… 물론 그건 내가 입을 끊임없이 놀려서 그런 것이지만 아무튼, 그는 내 침묵을 달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눈물이 멎어 드는 듯하자 채우수가 내 얼굴을 제게서 떼어 냈다. 눈물, 콧물이 범벅된 얼굴은 당연히 엉망이었겠지. 하지만 그는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이 티슈만 건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을 뿐이다. 나는 소파에 기대어 앉아 몸을 둥글게 만 채로 눈동자만 굴려 채우수의 뒷모습을 좇았다.

나는 오히려 그의 침묵이 두려웠다. 뒤통수까지 예쁜 그의 잘나 빠진 머리통에는 지금 무슨 생각이 들어 있을지 궁금했다. 혹시 내가 너무 추하게 운 건 아닐까. 괜한 얘기를 꺼냈을까. 상처받은 사람은 난데 왜 내가 채우수 눈치를 보고 있는 건지.

널따란 어깨를 축 늘어뜨린 그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작게만 느껴졌다. 내가 그에게 떠넘긴 감정이 그만큼 무거워 그를 짓눌렀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물.”

나는 채우수가 손에 든 유리컵으로 손을 뻗었다. 코가 막혀 비음이 섞여 든다. 날 보는 채우수의 눈썹이 삐딱해졌다. 그는 보란 듯이 물을 벌컥 들이마시고는 한 모금 정도를 남기고 내게 컵을 건넸다.

안 주느니만 못한 컵을 받아 들고 입을 대자 소주 냄새가 확 풍겼다. 눈을 키운 채로 그를 쳐다봤다. 뭐, 왜. 태연한 그의 반응에 황당함은 내 몫이다.

“빈속에 이렇게 마시면 속 버려요.”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해.”

해 줘도 뭐라고 해. 미간을 좁히며 그를 올려다보자 채우수가 내 손에서 컵을 낚아채곤 남은 소주까지 털어 넣었다. 웃겨 정말. 술도 잘 못 마시는 주제에. 소주를 마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속이 쓰린 건 나다.

허공에서 부딪친 시선이 냉담하다. 동시에 찾아온 정적에 머쓱해져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옆에 앉으라는 눈짓에 그제야 채우수가 미끄러지듯 제 키를 내렸다.

나보다도 더 침울한 눈빛이 내 얼굴을 훑었다. 민망함에 입꼬리를 당기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더니 그가 하아, 한숨 같은 웃음을 같이 토해 냈다.

묻고 싶은 게 많은 눈이지만 함부로 입을 떼진 않았다. 나 역시나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아직 내 눈물로 축축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마 위로 쏟아지는 머리카락을 넘겨 주던 그의 손이 내 눈가를 덮었다.

“앞으로 한연두 절대 울리면 안 되겠네.”

“…….”

“너무 못생겼다.”

“나 지금 선배랑 장난치고 싶은 마음 없어요.”

“장난 아니야.”

울지 말란 소리 한번 복잡하게도 한다.

“이제 집에 올라갈래요.”

“너 나한테 할 말 있다며.”

“하기 싫어졌어.”

“하고 가.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하고 가.”

“싫어.”

그의 손을 내치며 어깨에 기댔던 고개를 바로 들었다. 채우수가 제 눈꺼풀을 느릿하게 끌어 올리며 나와 마주했다. 왜 싫어. 나직하게 묻는 목소리에 소주 냄새가 쓰게 묻어 나왔다.

“……쪽팔려요. 선배 앞에서 운 것도 쪽팔리고, 엄마 찾으면서 운 건 더 쪽팔려. 눈 부어서 못생겼단 소리 들은 것도 짜증 나요. 쪽팔리고 짜증 나서 선배랑 당분간 말 안 하고 싶어.”

“그런 것치고는 이미 말을 너무 잘하고 있지 않아, 너?”

“무슨 상관이야…….”

“그래, 무슨 상관이야. 그러니까 나한테 하려던 말도 해 봐. 욕이든 뭐든 괜찮으니까.”

채우수는 대체 어디까지 알고 이러는 걸까. 내게서 듣고 싶은 말이 따로 있는 걸까.

“왜 내가 선배한테 욕할 거라고 생각해요?”

“네 표정이 딱 그렇잖아.”

“……도둑이 제 발 저린 거 아니야?”

“그럴지도. 해 봐. 하고 싶은 말 있잖아, 너.”

그것도 아니면 내 입을 통해 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일까. 어렵다. 나는 채우수가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

“나는……, 선배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나 정도면 괜찮게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 갔고, 선배처럼 석사까지는 못 땄어도 선배랑 같은 회사는 들어왔어. 내가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왔어요, 나는. 이 정도면 잘 살아온 거 맞잖아.”

“맞아.”

“나는 어떻게든 잘 살았을 거라고 자신해요. 굳이…… 굳이 한슬재단 후원이 없었더라도요. 그게 선배네 집안 기준에는 턱없이 부족할지는 모르겠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재단 이야기에 채우수는 놀라는 기색도 없다. 애초에 놀랄 일도 아니다. 그러니 내가 상처받을 일도 아니다.

“선배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거 맞죠? 내가 한슬재단 후원받았다는 거.”

“…….”

“알았나 보네. 맞아, 여태 몰랐던 내가 이상한 거야. 선배 말대로 난 눈치가 더럽게 없으니까. 찾아보려면 얼마든지 찾아볼 수도 있었는데 말이에요.”

“……그건 연두야.”

“사실은 오늘 그거 알고 자존심이 되게 상했거든요? 후원받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는데, 선배 때문에 조금 부끄러워졌어. 우리 아빠 생각하면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돈이야 재단에서 나왔다지만 아빠의 순직이 빚어낸 재물이자 제물이 아니겠는가. 결과론적인 당위성에 민낯을 드러낸 자존심도 찰나일 뿐이다.

“나도 알아요. 나는 선배만큼 잘난 배경도 없고 그런 건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다는 거.”

“그건, 한연두 네 생각처럼 잘난 거 아무것도 없어. 그쪽에서 뭘 어떻게 했는지는 아직 모르겠는데 네가 생각하는-.”

“아니요. 내 말 끊지 말고 끝까지 들어요. 어쨌든 난 선배 배경 같은 거 원한 적 한 번도 없어요. 부럽지도 않아. 알아요?”

“……알아.”

“나는 단지 그냥……. 나는 그냥 선배가 채우수라서 좋은 거예요. 아무 조건 없이.”

물론 그 조건이라는 것에 외모적인 것들까지 제외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뱉고 나니 남사스러운 고백이다. 입을 꾹 눌러 다문 그의 표정을 계속 보자니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헤맸다. 나는 열이 끓는 귓등을 괜히 손으로 만지작대다가 채우수와 겨우 눈을 마주쳤다.

“……왜 그렇게 봐요?”

“쪽팔려서.”

웃겨. 쪽팔린다는 사람이 뭐 이렇게 잡아먹을 듯이 쳐다봐.

“내가 너 따라가려면 한참은 멀었다 싶어.”

채우수의 화법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자조적인 웃음 끝에 묻어나는 감정이 내가 가진 것보다 더 크다는 것만큼은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어? 내가 선배보다 좋아하는 마음이 클 거라고 착각하지 말아요. 나는 아직 선배 싫기도 하고, 짜증도 나고, 밉기도 하고…….”

“한연두.”

“응?”

시끄러워. 채우수가 팔을 내 어깨에 두르며 제게로 끌어당겼다. 나랑 말하기 싫다던 애는 어디 갔을까. 나직이 내뱉는 그의 말에 옅은 쓴웃음이 섞였다.

“재단에서 너한테 뭘 보냈다고 들었는데.”

“아…… 고기?”

“고기?”

“응, 한우. 선배 냉장고에도 한 팩 넣어 놨으니까 알아서 먹어요.”

한숨과도 같은 바람이 머리 위로 불었다. 황당하다는 그의 표정에 어이가 없는 건 나다.

“뭐, 왜요. 주는 건 받아야지.”

“다른 건 없었고?”

“선배 옛날 명함만 하나 들어 있었어요. 나한테 채우수의 잘난 위치를 알려 주고 싶었나 봐요.”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런 치사한 방법을 썼을까 싶다만.

“이게 전부야?”

채우수가 내 손에 든 제 명함을 뺏어 들더니 위조지폐를 확인하듯 앞뒤를 살폈다.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더 숨겨 둔 것처럼.

“뭐가 더 있어야 해요?”

“아니야. 없으면 됐어, 그럼.”

“근데요, 이거 엄밀히 따지면 선거법 위반 아니에요? 재단 이름만 빌렸지 선배네 그…… 의원님이 보낸 거잖아? 나 증거 사진도 다 찍어 뒀어. 선배랑 사귀다가 수틀리면 바로 선관위에 신고할 거예요. 되든 안 되든.”

“지금이라도 신고해. 난 상관없어.”

누구 좋으라고 지금 신고해. 하아, 남은 감정을 마저 내뱉으며 채우수의 어깨에 기댔다. 깜깜한 TV 화면 속에 비치는 우리 둘의 모습은 여느 평범한 연인과 다를 바가 없다.

“기분은 좀 풀렸어?”

채우수가 내 귓불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냥 그래요. 태평이한테 이르지 마요. 나 오늘 울었다는 거.”

“응.”

“오늘 운 거는 그냥…… 그런 거예요. 오랜만에 엄마 꿈꾸고 눈 떴는데 눈앞에 채우수까지 있잖아. 속에서 울분이 끓어오른 거지. 무슨 마음인지 알죠?”

“모르겠는데.”

얌체. 자기 편할 때만 모르는 척이지.

“너는 내 앞에서 다른 건 안 참으면서 눈물은 왜 참으려고 해.”

“……쪽팔리잖아요.”

“뭐가 그렇게 쪽팔려. 나도 뻔뻔하게 네 옆에 있는데.”

“선배가 뻔뻔할 건 또 뭐 있어.”

“한연두.”

“응?”

“내 앞에서는 울고 싶으면 얼마든지 울어도 돼, 연두야.”

“…….”

“못생겼다고 안 놀릴게.”

아, 진짜. 안 그래도 퉁퉁 부었을 눈을 한껏 찌푸렸다. 웃음을 눌러 참는 모양인지 채우수가 목울대를 한 차례 크게 꿀렁였다.

“아무튼 난 다른 건 아무것도 안 따지고 싶어. 선배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복잡한 거 딱 질색이고…… 나는 지금 좋으면 그걸로 됐으니까. 알았어요?”

“…….”

알았냐고. 그의 어깨에 기댄 채 시선을 올렸다.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채우수가 무겁게 입술을 뗐다.

“어머님은 어디에 모셨어?”

“그건 갑자기 왜요?”

“다음에 같이 인사드리러 가.”

“우리 엄마한테요? 왜?”

“가 보면 알아. 너한테 하고 싶은 말도 있고.”

채우수가 우리 엄마 앞에서 나한테 할 말이라는 게 뭐가 있을까. 어머 세상에 웬일이니, 이 인간 설마…….

“세상에!”

나는 눈을 크게 키우며 그에게서 멀찌감치 몸을 떨어뜨렸다.

“뭐가 세상에야.”

“나 선배랑 결혼 같은 거 안 해요!”

“무슨 소리야. 누가 결혼하자고 했어?”

프러포즈하겠다는 거 아니야? 놀란 눈은 깜빡일 틈도 없다. 채우수는 나보다도 황당하다는 얼굴로 미간을 좁히고는 입이나 다물라며 내 아래턱을 위로 툭툭 쳤다.

“너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어. 너 혼자 몇 단계를 앞서가는 거야.”

“드라마 같은 일들이 많이 벌어져서 그런가 보죠. 선배도 따지고 보면 나한테는 드라마 같은 세상 속 사람이고……. 뭐, 드라마처럼 헤어지라고 돈 봉투를 던지진 않았지만.”

“하, 오늘 일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의도가……. 잠깐만. 돈 봉투 못 받아서 아쉽다는 표정이네, 너?”

“아쉽다기보다는 좀……. 이왕이면 반대를 하더라도 얼굴 보고 교양 있게 얘기하는 게 좋으니까.”

채우수의 단정한 입술이 비뚤어졌다. 뭐, 왜. 문제 있냐는 눈길을 던지자 헛웃음이 노골적으로 퍼졌다.

“그래서 넌 얼마 받으면 나랑 헤어질 건데.”

“……천만 원?”

“…….”

“너무 많은가? 그럼 오백?”

“한연두 너한테 내 몸값이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돼?”

“아니……. 나는 돈 봉투 시세를 잘 모르니까요.”

그렇다고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대단한 재벌가도 아닌데 제 아들이랑 헤어지라고 몇천을 던질 리가 있을까. 어쩌면 이참에 적정한 가격선을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사람은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일들을 불시에 맞닥뜨리게 되기 마련이고, 이성적인 판단은 늘 뒤늦은 후회와 함께 찾아오는 법이다.

“아무튼 너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재단에서 연락한 건 그냥 너 이용하려고 한 거니까.”

“날 어디에 이용해요?”

“선거에 너 후원한 걸 이용하고 싶어 해, 채영환이.”

“아아.”

“그러니까 혹시라도 너한테 인터뷰니 뭐니 따로 연락 오면 나한테 바로 얘기해. 내가 최대한 막아 보고는 있지만…….”

“왜 막아요? 난 괜찮은데.”

“뭐가 괜찮아.”

“후원받은 건 틀린 사실 얘기하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고 선배도 알잖아. 나 인터뷰 같은 거 되게 잘해요. 이번에 회사 홍보 영상도 나 찍어도 된다고 했는데? 사람들 관심받는 거 은근 좋거든. 한태평은 대놓고 좋아하고…….”

난 상관없어요. 어깨를 으쓱이며 그를 쳐다봤다. 장난기 어린 말투였지만 어쩐지 채우수는 단호한 얼굴이다.

“내가 상관있어. 아무튼 모르는 번호 연락 오면 받지 마. 등기든 우편이든 뭐가 오든지 간에 출처 불분명한 건 나랑 같이 봐. 알아들어?”

“……알아는 듣겠는데 이해가 되진 않아요.”

“이해가 안 되면 외워. 에프는 엠에이라고 생각하고 외워.”

“세상에…… 완전 재미없어.”

돌이켜보면 이날이 제일 평화로웠다. 채우수에게 내 감정을 숨기지 않고 보여 줄 수 있었던 날. 다른 건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채우수를 향한 내 마음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날. 그래서 그가 만든 그림자에 내 어둠이 짙어진 건 미처 몰랐던 날. 우리가 함께라는 것만으로 웃을 수 있었던 마지막 날이었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