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기억의 편린 (9/14)

9. 기억의 편린

해가 또 한 번 바뀌었지만 이 동네는 딱히 변한 건 없다. 속사정이 어찌 됐든 높은 담벼락을 뛰어넘지는 못하고 겉으로는 고고함을 유지하는 곳. 채영환이 여기까지 올라오기 위해 쌓은 위선이 얼마던가. 주인 잃은 방을 훑어보다가 숨통이 조이는 느낌에 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왔다. 찬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후우. 무심결에 주머니를 더듬거리며 담배를 찾으려다가 금연한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흘렀다. 이런 걸 보면 겉으로 나이만 먹었지 정신 연령은 아직 열일곱 그때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르겠다.

테라스 난간을 짚으며 밖으로 몸을 반쯤 뺐다. 한연두가 옛날에 살던 집이 저기쯤이었던가. 재개발이니 뭐니 말이 많던 옆 동네는 본가에 올 때마다 새로운 건물이 세워진다.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변화의 속도는 제각각이다.

어어……!

누군가 당혹스러움을 급히 삼키는 목소리에 멀리 두었던 시선을 1층 정원으로 내렸다. 눈이 마주치자 짧게 묵례하는 여자는 벌써 20년 가까이 집안일을 봐주시는 우 씨 아주머니. 달리 말하면, 내 유년기는 물론이거니와 몇 번의 사고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사람.

불안한 그녀의 눈빛에 가볍게 미소 짓고는 난간을 짚었던 손을 뗐다. 여기서 떨어져 봤자 죽지도 않겠지만 그 시절의 날 아는 사람들은 아직도 내 행동 하나하나에 조바심을 냈다. 이제는 그때처럼 삶을 놓을 용기조차 없는데.

조금은 멍청한 기분으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몇 해 전, 그나마 남아 있던 짐마저 모조리 비워 적막해진 공간은 이제 화재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다.

여기서 끝낼 수도 있었는데. 아직도 가슴 한구석에 남은 미련 때문인지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셔츠 단추를 하나 풀고는 숨을 고르며 구석에 있는 소파로 몸을 내렸다.

텅 빈 공간에 유일하게 자리한 소파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양 불편하기만 하다. 나는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는 손바닥으로 두 눈을 덮었다. 깜깜한 시야에 그날의 기억들이 얼룩지기 시작했다. 열일곱, 그때의 화재 사고는 여전히 마음속에 잿더미 채로 남아 있다.

“우수 왔니?”

땅으로 꺼질 것 같던 정신을 단단히 붙잡은 건 어머니의 목소리다.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리는 걸로 봐서 우 씨 아주머니께 무슨 소리를 들으신 모양이겠지. 그게 아니라면 같이 외출했던 아버지와 언쟁이 있었다거나.

“네.”

나는 애써 입꼬리를 늘이며 어머니를 마주했다. 잠시 잠겼던 목소리가 사포에 갈린 듯하다. 소파에서 일어나 어머니께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잘 지내셨죠.”

“너 오늘 올 줄 알았으면 미역국이라도 준비할 텐데.”

“먹고 왔어요.”

“그러니.”

매년 같은 날 반복되는 비슷한 대화. 우리는 진의도 진실도 없는 말들을 끝으로 침묵 속에서 1층으로 내려왔다.

“아버지 서재에 계신다. 아주머니, 서재로 차 세 잔만 부탁해요.”

“아뇨, 두 잔만요. 저는 인사만 드리고 갈 거라서.”

그 말에 우 씨 아주머니께서 내 손을 가볍게 잡고 눈썹 끝을 내렸다. 괜한 분란 만들지 말아 달라는 표정이다. 그렇다고 이 집에서 시간을 길게 끌 생각은 없는데……. 아주머니와 내 대화에는 관심도 없었을 어머니는 벌써 내게서 달아나 서재 문을 열고 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나는 마지못해 “그럼 세 잔 부탁드립니다.”라고 답하며 발걸음을 뗐다.

* * *

“거기 다녀온 모양이구나.”

검은 정장의 내 복장을 훑던 아버지, 채영환의 시선은 당신 손에 든 찻잔으로 돌아간 지 오래. 대답을 바라고 묻는 질문이 아니란 걸 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생일 축하를 대신하는 말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가 진짜 답을 얻고자 하는 건 아마 따로 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그래서 너 회사는 언제 정리할 생각이냐.”

이런 것. 커피 테이블 위로 구겨진 채 던져진 신문만 봐도 앞으로의 대화가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나는 내리깔았던 눈꺼풀을 살짝 접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얼마 머금지도 않았던 차는 입 안에서 쓰게 번졌다.

“정리 안 합니다. 할 이유도 없고.”

“그만하면 회사 옮길 때도 됐어. 지금 네 능력 의심하자는 말이 아니야. 김 의원 꼴 나는 걸 미연에 방지하자는 거지.”

“의외네요. 삼선 의원까지 노리시는 줄 알았는데.”

“선거 끝날 때까지만 몸 사리고 있으면 돼. 네 자리 하나 새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런 식으로 돌려 막았다가 다음 총선 때는 또 어쩌시려고요.”

관행이라면 관행이던 일들도 선거철을 앞두고는 그들 사이에서도 별일이 되어 버린다. 채영환이 지검장을 거쳐 국회의원 배지 하나 더 달 수 있었던 데는 그가 평검사 시절부터 뒤처리하던 재벌가 사건도 한몫했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채영환 신경을 긁어 대는 것도 그 사건들 중 하나로, 최근 시사 고발 프로그램을 통해 재조명되고 있는 건이다. 문제 될 게 있다면 해당 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가 내가 근무 중인 회사라는 것. 제 발 저리기 좋아하는 내 아버지는 있지도 않았던 취업 특혜 논란에서 빠져나가고자 당신 아들을 지워 내려는 참이다.

일종의 가지치기.

“그러게 왜 하필이면 그따위 회사를 들어가. 네가 애초에 삐딱선만 안 탔어도 이런 일은 없었다.”

“그따위 회사 뒤까지 봐주시다가 뒤통수 맞은 분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죠.”

처리 과정의 혼탁함은 별개로 두고 그들이 네거티브라고 일컫는 것들은 얼마나 많은 진실들을 수면 위로 드러나게 만드는지 모른다.

불행히도 채영환과 나는 불편한 진실들을 같이 숨기고 있는 공생 관계다. 내 평생 그를 이겨 볼 날이 올까. 그가 의원 배지를 뗀다고 해도 불가능할 것이다.

한참을 날 노려보던 채영환은 퍽 재미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쾌쾌하게 웃으면서 등받이에서 등을 뗐다. 이내 두툼한 손이 찻잔을 휘어잡자 어머니가 참았던 숨을 작게 내뱉었다.

“허 의원 쪽에서 네 사고 관련해서 뭘 문 모양이다.”

순간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그간 안 쓰던 얼굴 근육을 무리하게 썼나 보다. 나는 어머니의 불안한 시선을 비껴 내며 입술을 비틀었다.

“제까짓 게 뭐라고 물고 말고 할 게 아직 남아 있던가 보죠.”

“우리도 그쪽에서 어디까지 쥐고 있는지 알아보는 중이야. 전산상으론 깔끔하게 처리했으니 네가 걱정할 건 없고.”

공식적으로 남은 기록은 없다. 그날 지검장 채영환의 이름으로 소방차의 방향을 바꾸는 데 가담한 몇몇도 돈 앞에서는 결국 침묵을 택할 것이다. 불길의 규모가 아니라 권력이 있고 없음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그때 그 사람들.

그렇다고 지금 와서 그 사건을 입에 올릴 명분은 누구에게도 없다. 그날 몇 건의 화재가 있었던 건 명백한 사실이다. 죽고자 했던 나는 살아남았고, 이웃을 살리고자 불길 속에 뛰어든 누군가의 어머니는 죽어 버렸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처럼.

“결론부터 말씀하세요.”

“우리가 먼저 터뜨릴 계획이다.”

찻잔을 쥔 어머니의 손가락 끝이 하얗게 변했다. 설마하니 터뜨린다는 것이 채영환이 소방대원을 붙들고 퍼부었던 저열한 말은 아닐 텐데. 나는 쓴웃음을 삼키면서 채영환에게 시선을 돌렸다.

“뭘요.”

“네 얘기 말이야.”

“그러니까 무슨 얘기요. 정신병으로 자해하던 아들이요, 아니면 그것도 모자라서 죽겠다고 집에 불낸 아들이요.”

“여론 뒤집는 데 동정표만 한 것도 없어. 물론 적당히 살은 붙일 거고.”

“…….”

지긋지긋한 체스 놀음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머리를 도끼로 찍어 내는 듯한 통증에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네 아버지도 고민 많이 하셨어. 이 중요한 시점에서 치부 드러내는 건 우리도 모험이야.”

“그렇다면 의원님 치부가 저라고 공식적으로 확인 사살하는 꼴이겠네요.”

“우수야.”

거들지 말라는 듯한 채영환의 시선이 어머니께 닿았다. 찻잔을 테이블로 내려놓으며 진득하게 날 응시하던 채영환의 얼굴에는 이내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말이다. 자기보다 바닥에 있는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위안을 얻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야. 저보다 높이 있던 사람들의 날개가 꺾이는 데서 더 희열을 느껴. 가끔은 그 심리를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걸 동질감으로 바꾸는 건 펜 몇 자루면 가능하고.”

“…….”

“우수 넌 어디까지나 피해자다. 그 화재로 인한 장학재단 설립까지 그럴듯한 소스는 우리한테 차고 넘쳐.”

“…….”

“네 얘기가 알려지면 보건복지위에서 정신보건법 개정하는 것도 새로 조명할 거다. 허 의원이 오히려 우리한테 미끼가 아닌 월척을 던져 준 게지. 그것도 모르고 허 의원 그 인간 망둑어처럼 날뛰는 꼴이 아주 꼴같잖아.”

“…….”

“아무튼 회사는 얼른 정리해라. 괜히 시끄러워지면 길게 봤을 때 너한테도 안 좋아. 선거 끝나면 내 적당한 자리 알아봐 줄 테니까.”

“필요 없어요.”

“말은 대충 맞춰 놨으니 걱정할 건 없어.”

“아니요. 제 뜻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당장 퇴사할 생각 없습니다. 의원님 정치 생명 연장하는 것도 관심 없어요, 저는. 오늘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일어섰다. 잘게 진동하던 어머니의 눈동자가 내 키에 맞춰 당겨 올라왔다. 이대로 나가는 것이 어머니에 대한 예의가 아닌 줄 안다. 그래도 어머니는, 내게 모질기만 했던 사람은 아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쓴 말을 내뱉으며 뒤돌린 등에 날 선 말이 박힌 것도 찰나의 순간이었다.

“이름이 한연두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 말에 놀랄 이유는 전혀 없었다. 이미 다 알고 있던 사실 아니던가. 그럼에도 짓이겨진 심장이 진창에 빠진 듯이 더러운 기분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일그러진 표정을 갈무리하며 천천히 등을 돌리자 채영환이 본 적 없던 자상한 미소로 화답했다. 팔걸이에 둔 그의 솥뚜껑 같던 손이 오늘따라 더 두껍게 느껴졌다. 그는 들리지도 않은 음악을 지휘하는 것처럼 팔걸이를 움켜쥔 손의 검지만 들어 허공을 휘젓기 시작했다.

“네가 후원 부탁했던 그 아이. 지금 같이 근무한다고 들었는데 말이다.”

“…….”

“설마하니 가까운 사이는 아닐 테고.”

“네. 아니에요, 그런 사이.”

“그래야지.”

그대로 찍어 누르는 듯한 채영환의 눈빛에 점점 숨이 가빠 왔다. 오늘 약을 챙겼던가. 이 답답한 공간을 빨리 벗어나고 싶지만 채영환의 말이 족쇄처럼 다리를 옭아맨다.

“필요하다면 그 친구 인터뷰도 같이 잡을 생각이다.”

“의원님.”

“우수 네 화재 트라우마랑 엮기에도 소스가 아주 좋아. 순직한 소방관, 그 자녀들을 위한 장학재단 설립. 얼마나 훌륭해. 다행히 그 친구도 재단 돈 허투루 먹으면서 자란 것도 아닌 모양이고.”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 게다가 저 때문에…… 저 때문에 그렇게 되신 분들을 이용하면.”

“어허,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거야. 꼭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그 친구도 후원금 출처에 대해 알 때도 됐어. 인간이라면 은혜는 갚아야지. 나는 갚을 수 있는 기회를 베푸는 거고.”

“은혜 갚을 사람은 따로 있는 거 아시잖아요.”

“너도 이제 그만하면 됐다. 대체 어디까지 할 셈이야. 아파트며 학비며 그 아이에게는 이미 분에 넘친다.”

“……제 목숨값이 그 정도밖에 안 됐나 봅니다, 의원님께는.”

“우수야! 너 아버지께 그게 무슨…….”

고저 없던 대화도 어머니의 말을 끝으로 흐름이 깨졌다. 그것마저도 가볍게 제압한 채영환은 소파에서 일어나서 느긋하게 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은 이미 충분히 했으니 너는 따르기만 하라는 뜻이다.

“차라리 그때 그냥 죽게 놔두지 그러셨어요.”

날 스치듯 지나쳐 서재 문으로 향하던 채영환이 등을 돌렸다. 키는 내가 한참 더 크다지만 나이에 비해 풍채가 좋은 아버지는 결코 아들 앞에서 작아지는 법이 없다.

“그러게 말이다. 네가 내 발목을 이리 잡을 줄 알았으면 너 그딴 식으로 구하지도 않았다, 나도.”

“…….”

“키다리 아저씨 노릇도 결국 잘 포장한 동정심일 뿐이다. 네 같잖은 죄책감을 무기로 삼지 마. 그 아이도 그걸 원하는 건 아닐 걸 아니까 너도 지금까지 숨겼던 거 아니냐.”

“…….”

“며칠 내로 네 인터뷰부터 하나 잡을 거다.”

“거절하겠습니다.”

“하고 말고는 내가 결정해.”

“아버지!”

그대로 얼굴을 후려칠 것 같았던 아버지의 손이 내 어깨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마주친 시선에 담긴 저 흐린 감정도 아버지라는 존재가 갖고 있는 부정이었을까.

“그래, 아버지. 네 아버지 일이다, 우수야.”

“…….”

“난 이번 일이 네가 내 아들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효도라고 생각한다.”

내 어깨를 눌러 쥐었던 아버지의 손아귀에 힘이 풀렸다. 아버지를 뒤따라 서재를 빠져나가던 어머니가 잘 들어가라고 말했지만 귀에 제대로 들리진 않았다. 홀로 남은 서재에 헛웃음이 새어 나온다. 비틀린 부정에 감격한 나머지 눈물도 고였다가 말라 버렸다.

나는 이제 와 내 아버지를 감히 부정할 수도 없다. 그를 부정하면 그간 참고 살았던 내 인생을 도륙 내야만 한다. 태생이 비겁한 나는 치솟는 화를 또다시 삼켰다.

* * *

[어디냐] PM 04:27

[뭐 하길래 폰을 꺼 놔] PM 04:41

[너 오늘 출근은 안 했을 거잖아] PM 04:50

[어딘데] PM 04:52

[어디] PM 04:52

[어디냐고] PM 04:52

[대답할 때까지 보낼 거] PM 04:53

[어디] PM 04:57

[ㅇㄷ] PM 04:59

“아, 이 미친 새끼.”

휴대폰을 켜자마자 강도우의 광기 어린 메시지가 쏟아졌다.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뇌까린 말에 카드를 건네며 주차 여부를 묻던 직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별일 아니란 듯이 웃으며 눈썹을 들어 보이자 되레 쑥스러운 듯 제 얼굴을 붉히던 직원으로부터 카늘레를 건네받았다.

이깟 빵 쪼가리 몇 개 사려고 10분이 넘게 줄을 서다니. 평소 같았으면 어림도 없었다. 그나마 오늘 같은 날 별생각 없이 멍 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차라리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또 한 번 집착 어린 메시지 발신자, 강도우에게 전화를 걸며 뒤를 돌아 매장을 슬쩍 훑었다. 내 뒤로도 한참 줄이 긴 걸로 봐서는 한연두의 말대로 인기 있는 곳이긴 한가 보다.

- 어디냐고, 인마.

신호음이 얼마 울리지도 않았는데 강도우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누가 보면 빚쟁이라도 되는 것 같다. 뭐…… 빚쟁이도 아주 없는 얘기는 아니다. 금전적인 빚은 아니라지만.

“내가 애새끼냐. 어딘지 왜 궁금해. 가정도 있는 놈이.”

- 어딘데. 밖? 옆에 시끄러운데.

“백화점.”

- 거긴 왜.

“이유까지 너한테 갖다 바쳐야 하는 줄은 몰랐는데.”

- 청승 떨기 좋은 날이잖아.

별. 생일을 생일답게 보내 본 적도 까마득하지만 강도우도 제 딴엔 내 생일 축하를 한답시고 건네는 말이다.

“이제 나한테 신경 끄고 너네 다인 씨나 챙겨. 왜, 벌써 신혼 재미가 떨어졌나 봐?”

- 그럴 리가 있나. 부러우면 그냥 부럽다고 해, 우수야.

“시답잖은 소리 할 거면 끊어.”

- 별일 없는 거 같네.

“없어.”

이 통화의 본래 목적은 이런 거겠지. 생일날 납골당에 이어 본가, 외조부 댁까지 들렀다 빠져나온 시간까지 감안한 안부 인사다.

- 됐어, 그럼. 아, 그런데…….

내 목소리에서 별일 없다는 판단까지 마친 모양인지 짧은 통화를 마치려던 강도우가 말끝을 늘였다. 제법 진지해진 목소리에 휴대폰을 귓가로 도로 가져다 댔더니 기껏 한다는 말이,

- 너 기다인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뭐?”

- 네 목소리로 그 이름 들으니까 좀 짜증이 나네.

별. 짜증 낼 사람은 따로 있구만.

“미친놈. 다인 씨도 알아? 너 한참 덜떨어진 놈처럼 구는 거.”

- 모를 리가. 기다인은 다 알아. 모르는 거 없어. 특히 강도우에 대해서는. 내 몸에 점이 몇 개인지도 다 알아, 내 기다인은.

좋겠다 새끼야. 사랑에 미쳐 버린 친구 놈 때문에 주름진 미간은 펴질 틈이 없다.

“끊어. 남의 신혼 생활 관심 없어.”

- 부러우면 연애라도 해라, 우수야. 그 연둔가 노랑인가한테 고백이라도 해 보든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 너 아직 걔 좋아하는 거 맞잖아. 아무튼 채우수는 생각이 많아도 너무 많아. 뭐가 문제야. 내가 너였어 봐. 벌써 애 둘은 초등학교 보냈어.

“살다 살다 강도우한테 별 조언을 다 들어 본다.”

- 왜. 내가 본격적으로 좀 알려 줘? 여자들이 뭐 좋아하는지. 그래, 이참에 잘 들어 봐. 우선 여자들은 나처럼 얼굴이 잘…….

더는 들을 필요도 없을 것 같아서 종료 버튼을 눌렀다. 미친놈. 여자들이 아니라 제 여자가 좋아하는 취향이겠지. 꼴에 첫 여자를 못 잊어서 갖은 지랄은 색깔별로 다채롭게 다 떤 주제에. 그럼에도 10년 가까운 시간을 지나 기어코 그 여자와 결혼까지 성공한 걸 보면 강도우는 늘 입버릇처럼 해대는 말마따나 운이 좋은 놈이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운도 용기도 없는 머저리다.

‘아니에요, 그런 사이.’

오늘따라 아버지와 나눈 많고 많은 말들 중에서도 그 대답이 턱에 걸려 삼켜지지도 않고 혀끝을 배회했다. 손끝에 대롱거리는 카늘레 상자가 어색하기만 하다.

* * *

한연두가 내 첫사랑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다. 첫사랑의 정의를 어떻게 내려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얼떨결에 동아리 선배 누나와 사귀었고 그 짧은 연애를 끝낸 이후로도 몇 번의 가벼운 만남은 있었으니까.

한연두를 여자로 보게 된 건 언제부터였는지 잘 기억나진 않는다. 그냥, 어느 순간 그렇게 되어 버렸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특별할 것도 없는 애였다. 눈이 뒤집힐 만큼의 외모도 아니었고 캉캉대며 기어오르는 게 꽤 귀엽긴 했지만…… 그래, 사실 한연두에 대한 내 첫 감상은 그 정도였다. 집을 잃어버린 유기견처럼 꼬질꼬질. 낯선 인물에 잔뜩 경계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꼬리는 살랑살랑 흔드는 것이 제발 저 좀 봐 달라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채영환 말도 틀린 건 아니다. 처음은 동정이었지. 아빠까지 잃고 혼자 남아 애쓰는 게 가여워서, 저도 어린 주제에 동생까지 챙겨 대는 게 안쓰러워서, 반질반질해진 교복 치마 아래로 뒷굽이 닳은 빨간 컨버스 운동화가 딱해서.

지금의 한연두가 낯선 남자에게 팔을 뻗어 가며 베풀고 있는 친절처럼. 동정, 연민. 죄책감에서 비롯된 과도한 친절. 그 모든 게 섞여서 지금의 감정을 만들었다.

남자를 붙들고 무언가 한참을 설명하던 한연두는 하아,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어깨를 들었다 내렸다. 그러곤 답답한지 주변을 훑다가 내 차를 발견한 모양인지 손을 들어 보였다.

칭칭 감긴 목도리에 묻혀 잘 보이진 않았지만 짜증이 가득하던 하얀 얼굴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남자에게 꾸벅거리며 인사하고 차로 가까워지는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뭐가 급하다고 뛰어. 왜 달려와. 내가 뭐라고. 괜한 짜증이 끓었다.

종종거리던 걸음이 조수석에서 멈췄다. 아직 잠금이 풀리지 않은 조수석 문에 한연두의 눈이 한껏 커졌다. 창문을 똑똑 두드리며 밖에서 보이지도 않는 안을 들여다보는 얼굴에 물음표가 가득 찼다.

내게 전화를 하려는 듯 한연두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밖에 오래 있었던 모양인지 손이 빨갛다. 달칵, 그제야 잠금이 풀린 문에 한연두의 눈이 살짝 휘었다. 조수석으로 들어온 한연두 주위로 찬 공기가 맴돌았다.

“나 오는 거 못 봤어요?”

“봤어.”

“뭐야, 다 보고도 일부러 문 안 열었어요?”

“응. 너 딴 남자랑 얘기하는 게 괘씸해서.”

“아아, 봤어요? 저 사람 완전 웃겨. 말귀를 전혀 못 알아들어요. 코앞에 있는 건물이 어딘지 가르쳐달래. 사이빈가 봐요. 멀쩡하게 잘생겨서는.”

그게 대체 뭐가 잘생겼냐는 말이 툭 튀어나올 뻔했다. 하여간 취향 한번 희한하지.

“그러게 천천히 나오라니까. 도착하면 연락한댔잖아.”

“선배 올 때 됐다 싶어서 나왔어요. 별로 안 기다렸어. 그리고 괜히 거기 있다 보면 통근 버스 타고 오는 직원들 마주칠 것 같아서…….”

잘했죠. 속도 모르고 칭찬이 고픈 양 저 혼자 반짝거리던 눈이 뒷좌석까지 슬쩍 훑었다가 내 얼굴에 닿았다.

“근데 어디 있어요?”

“뭐가.”

“뭐야, 오는 길에 카늘레 사 와 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했잖아.”

“아.”

“아아?”

“못 샀어. 아니, 안 샀어. 거기 줄 서서 사야 한다며. 기다려서 먹을 거 사는 거 취미 없어.”

“웃겨…….”

어쩜 이렇게까지 속을 다 드러내 보일까. 채우수 진짜 실망이다, 내가 먹고 싶다는데 그것도 하나 못 기다리냐는 말은 차마 내뱉지도 못하고 섭섭함을 삼키는 얼굴이다. 그걸 계속 보자니 웃음이 터질 것 같아 고개를 반쯤 돌리며 기어에 손을 올렸다.

“내가 몇 번이나, 어? 몇 번이나 말했는데.”

“너 날 기다린 거야, 아님 그 카늘렌지 뭔지를 기다린 거야.”

“당연히 카…….”

“자알 생각하고 말하세요, 한 선임님. 업무 밀린 거 많을 텐데. 추운 날 걸어가고 싶지도 않을 거고.”

“……늘레를 손에 든 선배를 기다린 거겠죠?”

웃음을 참느라 얼얼해진 광대를 누르면서 한연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쏘아보는 눈빛에 욕이 한가득. 주름진 미간을 누르며 볼을 툭 건드리자 제 손등으로 내 손을 쳐 내는 게 제법 앙칼졌다.

“그래서 삐졌어?”

“내가 애도 아니고 먹을 걸로 삐질 나이는 한참 지났어요.”

“삐졌는데, 한연두.”

“아니라니까. 나도 뭐 선배한테 딱히 기대한 건 아니었어요. 언제 선배가 내가 해 달라는 거 제대로 해 준 적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네가 하고 싶다고 할 때마다 나는 착실히 대 줬는데.”

“세상에, 대 주긴 뭘 대 줘?”

“아, 정정할게. 대 준 건 아니지. 내가 더 많이 움직였으니까, 항상.”

세상에, 웬일이니……. 괜한 말을 꺼냈다는 듯 한연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입을 꾹 눌러 다문 채 안전벨트를 채웠다.

“근데 오늘 어디 갔다 오는 길이에요?”

“그냥 이곳저곳.”

“이렇게 차려입고 이곳저곳 어디?”

“있어.”

짧은 대답에 시무룩한 것도 잠시, 익숙하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쉰 한연두가 제 무릎 위로 손을 얹었다. 손가락 끝에 걸린 치맛자락을 자꾸만 밑으로 내리는 것이 오랜만에 입은 원피스가 불편한 듯했다.

“너는 오늘 누구 만난다고 차려입었어.”

“나는…… 이건 그냥, 그냥 입은 거예요.”

“그래?”

“네. 입던 거 다 빨고 입을 게 없어서. 급해서. 아무거나 입다 보니까…….”

“알겠어.”

뻔히 보이는 변명에 부끄러운지 한연두가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붉게 물든 귀엔 평소엔 하지도 않던 작은 귀걸이까지 달랑거렸다.

“예쁘네.”

“…….”

“물론 다 벗은 게 더 예뻤지만.”

“웃겨…….”

멈춘 신호에 조수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오른뺨을 뚫을 듯하던 한연두의 시선에 그제야 장난기가 더해졌다.

“선배도 그래요. 벗은 게 훨씬 나아요.”

“유감이네. 한 살 더 먹어서 벗고 다니는 건 이제 좀 곤란한데.”

“어우, 고정하세요 어르신.”

피식거리는 웃음이 귓가를 간질이자 덩달아 웃음이 터졌다. 오늘 같은 날 이렇게 웃는 것도 오랜만이다.

“근데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왜.”

“그냥 좀 달라 보여서요. 옷 때문인가.”

“왜, 그래서 싫어?”

“좋아요.”

그래, 너만 좋으면 됐어. 이 말을 했던가 안 했던가. 길게 내뱉는 숨 끝에 웃음도 뿔뿔이 흩어졌다.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전방만 쳐다봤다. 지난하고도 잔인한 하루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우리 관계의 끝처럼. 나는 오늘 길다면 길었던 내 단꿈을 이제야 비로소 끊어 낼 생각이었다. 전하지 못한 카늘레처럼 모든 걸 덮어 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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