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낡고 익숙한
대체로 내게 고백해 온 남자들은 성격이 이상하다거나 성적으로 이상하다거나 하는 단점이 있었지만 적어도 겉모습만큼은 멀쩡했다. 내가 이래 보여도 잘생긴 남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는 말 따위를 하려는 건 아니다. 한태평의 말마따나 나는 기본적으로 남자의 외모를 우선시하는 사람이고 같이 다니기에 쪽팔리지 않은 남자들과 데이트를 하고 연인으로 이어졌던 거니까.
따지고 보면 내가 한동안 연애는커녕 데이트도 하지 않았던 건 내 나이 또래의 잘생긴 남자들이 멸종 위기에 놓여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부지런하고 용감한 여자들이 머리숱 많고 배 안 나온 남자들을 먼저 채간 거지. 그런 점에서 생각해 봤을 때 한편으로는 채우수가 내게 고백해 왔을 때 이게 웬 떡이냐 하고 날름 받아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럼에도 내가 채우수의 고백을 듣고도 주저했던 이유는 그가 고백한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데 있었다. 채우수는 나더러 눈치 없다고 말하지만 나는 적어도 남자들이 내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그 마음이라는 것이 한바탕 침대에서 뒹굴다 끝내고 싶은 정도일 뿐인지 정도는 구별 가능했다. 물론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이 소리를 들었다면 채우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을 게 분명하니까. 바로 지금처럼.
“한연두 선임님.”
“……네?”
“물었는데. 할 말 더 있냐고.”
있어, 있어. 너 진짜 재수 없어 채우수. 같은 사노비 주제에 이렇게 꼼꼼하게 따져서 일해 봤자 누가 알아준다고. 대답을 기다리는 채우수의 한쪽 눈썹이 치솟았지만 나는 입술 안쪽을 꾹 누르며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말했다.
“……아니요, 없습니다.”
“거기서 뻗대지 말고 가 보세요, 그럼. 한연두 선임이랑 다르게 난 좀 바빠서.”
“네.”
“요령 피우지 말고 삽시다, 한 선임님.”
짜증이 난 듯 모니터로 고개를 돌리는 채우수를 살짝 쏘아본 뒤 내 자리로 돌아왔다. 또 채 책임한테 깨졌냐는 옆자리 주 선임의 얼굴이 날 더 괴롭게 만들었다. 나는 어쩐지 요즘따라 얼굴이 활짝 핀 것 같은 채우수의 얼굴을 다시 노려보며 의자에 앉았다.
저게 어떻게 날 좋아한다는 사람의 태도야…….
그의 통보 같은 고백을 받은 지도 한 달. 퇴사한다던 저 인간은 아직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차라리 그냥 퇴사나 해 버리지. 지금 마음 같아선 퇴사한다고 섭섭해했던 내 입을 꿰매 버리고 싶을 지경이다.
“한 선임님.”
아, 왜. 또 뭐. 대답조차 하기 싫은 마음에 날 부르는 채우수 쪽으로 목만 쭉 뺐다. 맞부딪친 시선에 담긴 열기는 오로지 내 몫이다. 그것도 아주 안 좋은 의미의.
“방금 메일 보냈으니까 확인하세요.”
“네.”
하아. 이번엔 저 대단한 채우수 책임이 무슨 트집을 잡으셨으려나. 맞춤법이 틀렸을까, 날짜 뒤에 점을 잘못 찍었을까, 대문자를 써야 할 것을 소문자로 썼을까. 마우스를 흔들어 메일 대신 모니터 하단에 깜빡이는 메신저 알림창으로 커서를 옮겨 클릭했다.
[채우수(책임) : 좋아해]
이 이중인격자! 나는 채우수가 보낸 사내 메신저 대화창을 신경질적으로 닫았다. 할 수만 있다면 조금 전까지 기안 재작성했다고 날 나무라던 채우수 책임이 뒤로는 이런 메시지나 보내고 있다고 동료들에게 보여 주고 싶다. 이런 걸 보면 사내 메신저도 모니터링 중이란 말은 순전히 거짓말이다. 채우수가 내게 보낸 메시지만 보면 복사기도 알 만큼 내게 구애 중인 남자가 따로 없는데 말이다.
[채우수(책임) : 퇴근 같이 할까]
또 번쩍거리며 날아온 대화창을 껐다. 어차피 계속 같이 하고 있는 출퇴근을 새삼스럽게 뭘 물어. 아주 별꼴이 반쪽이다.
아무튼 채우수가 내게 하는 건 사실 구애도 아니었다. 채우수는 제가 가진 감정을 털어놓기만 했지 나한테 뭘 더 기대하는 게 전혀 없어 보였으니까. 우리 사이는 내가 그에게도 말했듯 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음, 그러니까…… 아주 큰 틀에서는 그러했다.
채우수는 그날 이후로 아주 무감한 얼굴로 내게 좋아한다는 말을 잘도 지껄였다. 같이 퇴근하고 저녁이라도 먹을 땐 “난 B세트가 좋은데. 물론 한연두 너도 좋아.”하는 말로 빈속을 뒤집어 놓기도 했고 어쩌다가 같이 심야 영화를 보러 갔을 땐 “저 남자 한연두 네가 학교 다닐 때 좋아하던 배우잖아.” 하며 아주 낡아 빠진 얘기를 꺼내더니 “그때 난 너 좋아했어.” 하는 말로 날 얼어붙게 만들기도 했다.
그의 고백을 부정하려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인정하기 싫었을 뿐. 보통의 남자들은 고백 후 내 대답을 기다리며 제 마음이 거절당할까 봐 안달 난 척이라도 했었다. 그들은 내게 꽃이며 목걸이며 선물 공세를 하기도 했고 앞으로 더 잘해 주겠다며 입에 발린 말을 잘도 해 댔는데…….
아, 그렇다고 내가 지금 그런 물질적인 것을 따지려는 것은 아니다. 채우수도 내게 꼬박꼬박 밥은 잘 사 주고 있으니까.
다만 나는 채우수의 태도의 본질을 문제 삼고 싶었다. 어떻게 저렇게 태연할 수가 있지. 남의 속은 다 불 질러 놓고 그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같은 표정으로 말끝마다 날 좋아한다는 말을 붙이는 사람은 인공 지능 스피커가 따로 없다.
게다가…… 그날 이후로 한 달 동안 채우수가 내게 한 스킨십은 까딱해야 손잡기에 불과했으니 나로선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하다못해 키스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좋아하면 같이 있고 싶고 살 비비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 아닌가. 혹시 성욕이 없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호텔에서의 그를 돌이켜봤을 땐 오히려 넘치면 넘쳤지 없는 건 전혀 아니었다.
그러니까 채우수는 한 달 동안 내게 좋아한다는 말만 지겹도록 하고 있는 상태였다. 마치 좋아한단 말도 하지 못하고 죽은 총각 귀신이라도 씐 것처럼. 억울함을 푸는 것도 같고 자기 세뇌를 하는 것도 같고. 정말로 자기가 날 좋아한다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구는 채우수가 난 좀 짜증이 났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안달 난 건 채우수가 아니라 나다. 그와 또 자고 싶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물론 그날 밤의, 굳이 따지자면 그다음 날 아침 욕실에서의 채우수는 더 훌륭했지만 지금의 혼란스러운 이 감정은 단순한 몸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 몸정이라는 것이 들 정도로 우리가 몸을 맞댄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나는 그저 채우수가.
[채우수(책임) : 저녁 뭐 먹을까]
아, 정말. 맨날 묻긴 왜 물어.
[채우수(책임) : 차돌박이 어때]
[채우수(책임) : 양곱창도 있어]
이번에도 메신저 창을 바로 닫으려다가 키보드 위를 톡톡 두드리던 손으로 ‘됐고 라면이나 끓여 먹어요’라고 답장했다. 채우수가 뭐라고 답장을 쓰다가 지우는 모양인지 대화창 하단에 입력 중이라는 문구가 떴다가 멈췄다가를 반복한다.
[채우수(책임) : 좋아]
짧은 답을 확인하곤 곧장 대화창을 빠져나왔다. 오른쪽 시선 끝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채우수가 걸렸다. 눈이 잠깐 마주쳤다. 단정한 입매가 살짝 휘었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참나, 쓸데없이 웃긴 왜 웃어. 얽힌 시선을 먼저 풀어 모니터로 내렸다가 이내 눈꺼풀을 접어 올렸다. 어느새 채우수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코너를 꺾어 사라지는 그의 모습을 보고 나도 겨우 시선을 떼고는 하아,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러니까 나는 어쩌면 채우수가 조금은 불안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무게 중심을 잃고 무너지기 직전의 젠가 같기도 하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그럴듯한 포장지로 곱게 포장한 상태. 그게 바로 채우수고 우리 사이 같았다.
* * *
“골라.”
“진짜 선배 집에 라면 없어요?”
“없다고 했잖아. 너 먹는 거 골라 봐.”
누가 진짜 라면 먹고 싶어서 라면이라고 한 줄 아는 모양이다. 라면 먹자는 뻔한 말로 날 꼬셔 대던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나는 마트 진열대에 있는 라면 꾸러미들을 가만히 살펴보다가 할인 없는 비싼 걸 대충 골라 들었다.
“그거 맵지 않아? 너 매운 거 잘 못 먹잖아.”
“잘 못 먹는 거지 아예 못 먹는 건 아니에요.”
“제대로 먹을 수 있는 거 골라.”
“……이거 먹을 거예요.”
“고집은.”
“고집은 책임님이 더 부려요. 대문자 소문자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내 손에 든 라면을 들고 간 채우수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고작 그런 걸로 꽁했던 거냐는 눈빛에 어쩐지 발가벗겨진 기분이다.
“넌 그게 문제야.”
“내가 뭘?”
“뭐든 네 기준에 맞추는 거. 너 좋아하는 소주도 살까.”
“……소주 말고 맥주요. 책임님이 너무 깐깐하다곤 생각 안 해요?”
“안 해. 결과적으로 내 방식이 틀린 적은 없어.”
흐응, 저만 잘났지 또. 나는 채우수가 든 맥주를 도로 진열대에 내려놓으며 그의 팔뚝을 붙잡으며 다른 곳을 가리켰다.
“저걸로 해요. 네 캔에 만 원.”
“술 앞에서는 또 적극적이지 아주.”
“웃겨. 누가 들으면 내가 술고래인 줄 알겠어요.”
“적당히 마실 필요는 있어, 너.”
“선배는 잔소리나 적당히 해요. 영감이야 뭐야.”
수입 맥주 코너로 그를 잡아끌던 손은 자연스레 그의 팔을 감았다. 내가 이 사실을 인지한 건 마트를 돌면서 시답잖은 업무 얘기로 내가 맞니 네가 맞니 옥신각신하다가 앞에 다가오던 신혼부부를 마주쳤을 때였다. 그들처럼 채우수의 팔짱을 끼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깜짝 놀란 나는 맨손에 잡힌 미꾸라지처럼 팔딱대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킥킥대는 채우수의 목소리가 낯간지럽다.
“난 좋았는데.”
“좋긴 뭐가 좋아요.”
“팔짱.”
아쉽다는 양 웃음을 머금은 채우수의 얼굴이 내 귓가에 붙었다. 코끝에 훅 감도는 그의 향수 향에 머리가 어지럽다. 관자놀이께에 붙을 듯 말 듯 한 그의 입술은 들으나 마나 또 좋아한다는 말이나 나불댈 것이 뻔했다. 또 그 영혼 없는 고백 따위나 할 거면 그냥 떨어지라고 밀어내려던 찰나, 채우수가 내 위 팔뚝을 슬쩍 주무르면서 말했다.
“너 가슴도 닿고.”
“……웬일이야 진짜.”
쇼핑 카트를 대신 밀면서 빠르게 발을 옮겼다. 섹스도 한 마당에 고작 팔짱이 대수겠냐마는 요즘 들어서는 사소한 스킨십이 어쩐지 더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별일도 다 있지. 채우수 말대로 이게 무슨 어쭙잖은 내숭인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그에게 먼저 자자고 한 것도, 육체적인 접촉도 결국 내가 먼저였던 주제에 날 좋아한단 소리 하나에 으스대고 싶었던 걸까.
나는 내 옆으로 붙어 어깨를 감싸는 그의 손을 못 이기는 척 내버려 뒀다. 쇼핑 카트 한쪽 귀퉁이를 잡은 그의 다른 손 때문에 바퀴가 방향을 잃고 겉돈다. 난 그에게 카트를 다시 맡기고는 좀 전처럼 팔짱을 꼈다.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야.”
“생각해 보니까 이게 편해요.”
입꼬리를 말아 올린 그가 더 필요한 건 없냐고 묻는다. 우리의 쇼핑 카트엔 라면과 맥주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이럴 거면 뭐 하러 마트를 몇 바퀴나 돌았는지도 모르겠다.
“……나 사실 진짜로 라면 먹고 싶은 건 아니었어요.”
“알아.”
“뭘 또 알아…….”
“생각해 봐. 너 같으면 우리 집에 라면 먹으러 오겠단 여자를 어떻게 받아들이겠어.”
와, 채우수. 정말이지 내가 무슨 의도로 그런지 다 알면서……! 알긴 뭘 그렇게 또 잘 알아. 혼자 잘나셨다 아주. 날 선 시선으로 잘나 빠진 채우수를 훑자 거만했던 그의 얼굴이 느슨해졌다.
“넌 그리고 메뉴를 좀 비싼 걸로 바꿀 필요가 있어. 라면이 뭐야. 네가 그 정도밖에 안 돼?”
“그거 알아요? 선배 진짜 재수 없어요.”
“그 소리는 너무 많이 들어서 타격감도 없어.”
“짜증 나.”
“쓸데없이 여기서 시간 축낸 나도 짜증 나.”
“내 입에서 하자는 말 나올 때까지 기다렸어요?”
“그런 셈이지.”
“비겁하게 남자가.”
“알면 됐어.”
감정의 크기 때문일까. 우리 관계의 무게 중심은 늘 채우수에게 있었다. 나는 채우수가 휘두르는 대로 흔들리면서도 언제나 내 몫으로 돌아오는 결정권이 부담스럽다. 눈치 없는 나는 선택지조차 내놓지 않는 채우수가 무슨 답을 원하는지, 나는 어떤 답을 쓰고 싶은지, 그 답으로 어떤 채우수의 반응을 기대하는지도 모르겠다.
갈까. 말없이 눈짓하는 채우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어깨를 감싸며 내려앉은 그의 손이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졌다.
* * *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채우수에게 설렌 적이 아예 없다고 하면 솔직히 거짓말이다. 스물한 살의 눈으로 봤을 때 채우수의 외모는 병든 닭도 날게 할 만큼 충분히 기적 같았으니까. 그 시절 채우수에게 흑심 한번 안 품어 본 여자가 얼마나 됐을까. 돌이켜 보면 나도 채우수를 아주 잠시나마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내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 채우수라는 존재가 너무 당연해서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간 감정일지도.
실험 파트너로 처음 만난 그와는 인연은 꽤나 질겼다. 채우수가 석사를 하던 랩실에서 내가 근로 장학생을 하기도 했으니 내 대학 생활의 대부분은 채우수와 같이 보냈다고 해도 무방하다. 과제는 당연했고, 오픈랩 준비도 같이 했으며 매 강의 시간 시작 전에 보던 양자역학 퀴즈 때는 옆자리에 앉은 채우수가 제 답안을 슬쩍 보여 주기도 했었다.
그 시간들이 어땠는지 굳이 물어본다면…….
“추우니까 여기 있어. 차 빼 올게.”
……싫지 않았다. 나는 마트 주차장으로 가는 자동문 앞에서 점점 멀어지는 채우수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채우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건 없다. 그는 지금처럼 썩 다정하진 않았지만 매너는 있었고 가시 돋친 말을 했어도 상처를 내는 법은 없었다.
싫지 않았다고 해서 좋았던 건 분명 아닌데. 그렇다고 내 20대에 그가 없었다고 가정하자니 숨이 턱 막혀 온다. 주인 잃은 개가 이런 심정이었을까. 내가 그 정도로 채우수에게 의지하고 살았던 걸까. 정말이지…… 정말이지 개 같은 기분이다.
그러고 보면 매일같이 붙어 있던 우리가 다른 관계로 발전하지 않았다는 게 더 이상한 건지도 모른다. 과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죽도록 엮어 댄 이유가 이런 거였나 보다. 연구도서관에서의 엘리베이터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우리 사이도 딱히 나쁠 것도 없었으니까. 뭐, 내가 남자 친구를 사귀면서 조금 데면데면해지긴 했다지만.
주위에서 우리를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엮었더라면, 내가 그때 같잖은 그놈들을 사귀지 않았다면 채우수랑 잘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지금쯤 이 차엔 아기 카시트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왕이면 채우수를 닮은 딸이면 머리도 좋고 예쁠 텐데. 뭐, 성격은 제 아빠를 닮았다면 지랄 같겠지만…….
“안에 있지 왜 쫄래쫄래 따라와.”
세상에, 한연두! 도대체 어디까지 앞서나간 거야. 좋아한다는 말 하나에 혼자 몇 단계를 건너뛴 건지 괜히 머쓱해진다. 나는 애써 그의 차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따라왔는지도 모르겠다.
“……저기서 여기까지 뭐 얼마나 된다고요.”
“춥잖아 너 지금. 귀도 빨개져서는.”
미화된 기억은 감정까지 조작해 버린다. 장 본 것들을 넣고 뒷좌석 문을 닫은 채우수가 내 앞으로 한 발짝 다가오더니 내 목에 헐렁하게 감긴 목도리를 졸라맨다. 새로운 놀잇감이라도 발견한 모양인지 재밌다는 듯 눈매가 휘었다.
“너 감기 걸리면 나만 고생이야.”
“내가 감기 걸리는 거랑 선배랑 무슨 상관이라구요.”
“너 기침 소리 듣기 거슬려. 짜증 나.”
“웃겨……. 나 좋아한다면서요. 그런 것도 좋아해 줘야지.”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고. 아닌 건 아니야.”
타. 채우수가 얼른 타라고 눈짓하며 조수석 문을 잡은 손가락을 두드렸다. 이제 쓸데없이 농담 따먹는 소리는 그만하라는 뜻이다. 저 인간이랑 애 낳을 망상까지 하다니. 나도 참 나지……. 속도 없다.
“표정이 왜 그래.”
“뭐가요.”
“왜 똥 밟은 표정이야.”
“뭔가 잘못 밟은 것 같긴 해요.”
예를 들면 추억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된 우리의 지난 시간들이라거나. 그러니까 지난 기억 같은 건 애초에 되새길 필요도 없는 건데. 나는 조수석에 앉아서 여전히 문을 잡은 채 서 있는 그를 올려다봤다. 뭐. 입만 벙긋거리며 물어보자 어이없다는 웃음이 번졌다가 흐려졌다.
“……발 들어 봐.”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들어 봐. 내 차에 더러운 거 묻는 거 싫어.”
참나, 웃기지도 않아서 정말. 못 이기는 척 차 밖으로 발을 뻗어 그에게 내보이자 발목이 덥석 잡혔다. 꼴에 제 차는 비싼 차라고 더럽게 아끼는 모양이다.
“됐죠? 이제 놔줘요. 간지러워.”
“그래? 몰랐던 성감댄가 봐.”
“세상에, 미쳤나 봐요. 그냥 차 버리는 수가 있어요!”
“이미 너한테 매일같이 차이고 있어 나는.”
“웃겨, 차이긴 누가 차인다고 그래…….”
얼굴을 봐라. 저게 차인 사람의 얼굴인가. 그에게 풀린 발목을 가지런히 모아 바로 앉았다. 냉랭했던 그의 표정에 설핏 웃음이 스치는가 싶더니 조수석 문이 닫혔다.
차를 빙 둘러 운전석에 앉은 그가 뭐 하고 있냐는 듯 턱짓하며 안전벨트를 가리켰다. 손을 들어 벨트를 끌어 내리려다가 문득 치솟는 의문에 고개를 돌렸다. 반듯했던 그의 한쪽 눈썹이 내 얼굴을 보고 산을 이루었다.
“나 선배한테 궁금한 거 물어봐도 돼요?”
“안 된다고 해도 넌 물어볼 거잖아.”
“언제부터 나 좋아했어요?”
벨트를 하려던 그의 손이 잠깐 움찔거렸던 것도 같다. 찰나의 침묵.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인 걸까. 민망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오래전부터 좋아했다는 그 말이 대충 둘러댄 말이어서 그랬을까.
“뭐, 대답하기 싫으면 꼭 안 해도 돼요.”
“그게 중요해, 너한테?”
“중요하진 않지만…… 궁금하긴 하잖아요.”
“…….”
기어를 잡고 검지와 엄지를 툭 튕기던 그의 손끝에서 시선을 끌어 올렸다. 어떡하지. 괜히 물어봤나 봐. 마주친 시선에 흐르는 냉기에 어쩐지 말을 꺼낸 내가 더 민망해졌다.
“오래됐어.”
“그러니까 그 오래가 얼마나 오래냐구요.”
“…….”
어떡하지 정말. 난 왜 지금 이따위 것이 궁금해진 거지. 말을 돌리려고 해도 마땅한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책임님 기준으로 오래는 한 달도 오래잖아요. 맨날 오래된 데이터라면서 트집 잡으면서 팀원들한테 뭐라고 하고…….”
“…….”
“아니지, 팀원들도 아니야. 책임님은 나한테만 그러잖아요. 수석님도 뭐라고 안 하는 걸 왜 나한테 그래요. 그거 명백한 갑질이에요.”
목도리는 왜 이렇게 세게 졸라맨 거야. 순간 흥분한 탓인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도 같다.
“갑질은 지금 네가 하는 게 갑질이야.”
씩씩대며 목도리를 풀던 손이 채우수에게 잡혔다. 그의 목울대가 크게 꿀렁이자 나도 덩달아 마른침을 삼켰다. 움켜쥔 손에 힘이 빠지는가 싶더니 그가 하,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내 목도리를 풀어 줬다.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고 하는 갑질.”
“와. 뻔뻔해라.”
“너한테 늘 을이야, 나는.”
“웃기지도 않아요.”
“을도 아니고 병, 정이야.”
병정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다. 방금도 시답잖은 수작이나 부린 주제에. 나는 느슨해진 목도리를 마저 풀면서 뒷좌석을 힐끔거리던 눈동자를 그에게 돌렸다.
“지금 맥주 먼저 까도 돼요?”
“운전해야 해.”
“선배는 당연히 안 되고. 나만 마시는 것도 안 돼요?”
“안 돼.”
“왜요.”
“네가 지금 그걸 마시면, 연두야.”
채우수가 훅 가까이 다가오더니 내 한쪽 어깨를 감싼다. 예고도 없는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멈춘 숨을 마저 들이마시자 그의 향수 향에 코끝이 간질, 찡그린 콧잔등에 채우수가 제 코를 스쳤다.
“내가 너랑 키스를 못 하잖아. 안 그래?”
“……여기서 하자구요?”
“밖은 추워.”
“밖에서 하자는 말은 아닌……. 이것 봐, 나 또 낚였어. 이러면서 을은 대체 누가 을이에요?”
의도가 다분한 장난질. 내 머리카락을 흩뜨리고는 웃으며 떨어지는 얼굴은 그저 얄밉기만 하다. 뭐 이런 걸 가지고 놀라냐는 듯 눈썹을 들썩이던 그가 어서 벨트나 하라며 시선을 던졌다. 그러고는,
“원래 더 많이 좋아하는 쪽이 을이잖아.”
“…….”
“넌 나 싫어하니까 을도 못 되는 거지, 나는.”
세상에, 이렇게 뻔뻔할 수가 없다. 담백한 표정으로 억울하다는 말을 잘도 뱉어 냈다. 누가 들으면 내가 정말 갑질하면서 채우수 애만 태우는 줄 알겠어. 정작 자기는 말로만 좋아한다고 하는 주제에. 혼자 갑이고 을이고 따져 봤자 뭐 해.
“좋아하면서 갑을을 따지는 것부터가 아주 잘못된 거예요. 좋아할수록 표현을 더 하는 거지. 사귀는 사이에 갑을은 왜 따져? 물론! 지금 우리가 절대 사귀는 건 아니지만요.”
“맞아. 우리는 안 사귈 거야.”
“그러니까요.”
맞장구는 쳤다지만 어쩐지 단호한 대답이 신경을 긁었다. 손끝에서 놓친 벨트가 도르륵 다시 말렸다. 뭐 문제 있냐는 식으로 날 훑는 그에게 향하는 의문은 덤이다.
“……왜요? 왜 안 사귀어요?”
“지금이 덜 부담스럽고 적당해.”
웬일이야. 이 여우 같은 인간! 날 그냥 갖고 노시겠다 이거지. 적당하니까 사귀자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는 적당하니까 안 사귀겠단다.
“아아…… 선배한테 내가 딱 그거네요. 남 주기엔 아깝고 나 갖긴 싫고?”
“벨트나 해.”
“원나잇으로 끝났어야 했는데 아는 사이라 그것도 못 하겠고?”
“…….”
“자고는 싶은데 진지한 사이는 되기 싫고?”
“어차피 네가 나한테 원하던 것도 그런 거 아니었어?”
맞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지 이유를 모르겠다. 상호 이익이 맞는 관계에 불쾌감은 왜 내 몫인지.
“그래서 나한테 계속 영혼 없이 좋아한다고 하는 거예요? 나쁜 놈은 되기 싫어서?”
“너한테 좋은 남자로 남을 생각도 없어. 이미 글렀으니까.”
그의 낮은 목소리가 머릿속을 쿵쿵 찧는 것만 같다. 그대로 바스러지는 듯한 기분에 엄지손톱으로 말아쥔 검지를 꾹 눌렀다.
“잘 들어. 난 네가 날 어떻게 이용하든 관심 없어.”
“…….”
“내가 갖긴 싫고 남 주기엔 아깝다고? 틀렸어. 남 주기는 싫고 내가 갖긴 아까워. 네가 아까워, 나 같은 놈한테는.”
“…….”
“그러니까 난 등신처럼 네가 하자는 대로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알아?”
“……알긴 뭘 알아? 말만 그러면서 선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잖아요. 저녁도 맨날 선배가 정한 메뉴로 가고. 지금도 결국은…….”
스치듯 붙었다 떨어진 입술에 불이라도 붙은 것 같다. 타오르는 열기를 잠재우듯 그가 내 입술을 다시 물어 오자 그와 닿는 모든 곳이 뜨거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기분이다. 나는 무언가를 갈구하며 그의 입술에 마지못해 달라붙었다. 그러나 채우수는 깊은 키스를 하려던 건 아니라는 듯 일부러 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떨어지고는 이마를 맞대었다. 민망함이 눈꺼풀을 무겁게 짓눌렀다.
“결국 이렇게 선배 멋대로 할 거면서…….”
“그래서 항상 선택지를 주잖아, 내가.”
“…….”
“싫으면 지금이라도 말하라고.”
코끝에 내려앉았던 그의 입술이 내 윗입술을 머금었다가 반쯤 떨어졌다. 그가 내뱉는 단 숨이 아랫입술을 간질인다. 맞붙은 입술 새로 번지는 감정이 아직까지도 두려워 붙들지도 못하겠다.
“싫어?”
“……싫어요.”
“싫어?”
“싫다니까.”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틀자 어긋난 입술에서 허, 건조한 웃음이 날렸다.
“거짓말 참 잘해요, 한연두 선임님은.”
“거짓말이 아니라…….”
“키스도 참 잘하고. 우리 한 선임님은.”
“……갑자기 왜 그렇게 불러요? 무슨 수작이야?”
“글쎄.”
기어이 얼굴을 또 돌리게 만들지. 제게 고정하려는 듯 내 뺨을 감쌌던 그의 손이 내 목을 스치면서 어깨에 내려앉는다. 길쭉한 손가락 끝이 목을 쓰다듬자 하아, 생경한 감각까지 일깨웠다.
“네 말대로 갑질을 좀 해 볼까 싶어서.”
“무슨…….”
“상사로서의 갑질.”
맞물린 그의 눈은 음탕하기 짝이 없다. 나는 그게 덫인 걸 알면서도 내 발로 걸어가 꼼짝없이 걸려들었다. 뻔뻔한 입술이 엉겨 붙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밀려든 말캉한 살이 치열을 훑고 빠져나갔다.
“세상에, 대체 이런 갑질이 어디 있…….”
눈을 뜨기 무섭게 입술이 다시 붙었다. 마치 조금 전의 것은 오버추어였다는 양, 시간을 덧댈수록 농밀해지는 키스가 우리를 집어삼켰다. 나를 휘감았던 혀가 입천장을 느리게 훑자 흐응, 온몸이 느슨하게 풀렸다. 내 코트 속으로 파고든 그의 손이 녹진하게 녹아 버릴 것 같은 몸을 붙들었다. 끈적한 숨소리가 그저 달다.
“하아, 우리 회사는 수평적인 관계를 추구…….”
말도 안 되는 변명은 그의 웃음소리와 함께 겹친 입술 사이로 흩어졌다. 나는 채우수에게 정신없이 흔들리면서도 불완전한 안정감에 그를 놓지 못해 더 붙들었다.
*
나는 의외로 아빠의 죽음을 덤덤히 받아들였다. 갑작스레 엄마를 먼저 보낸 충격이 훨씬 크기도 했고 아빠의 직업상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늘 해 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까지 무너져 버리기엔 한태평이 너무 어리기도 했고.
아빠의 장례식은 소방관서장으로 치러졌다. 명예로운 순직. 언론에 오르내리던 기사들이 금세 잊힌 것처럼 그날들의 기억들도 어느새 흐릿해졌다. 드문드문 끊긴 기억들 사이로 오가던 서류들. 나는 몇 번의 도장으로 그의 삶을 정리했다.
나는 부모님 없는 세상에서 홀로 어른이 되는 게 두려웠다. 친구들은 이제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도 볼 수 있는 거라며 법적으로 스무 살이 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나는 미성년자라는 그 법적 테두리에서 강제로 떠밀려 나오는 기분이었다. 마치 벌거벗은 채로 타국에 버려진 듯한 기분. 옷부터 새로운 언어까지 내가 스스로 얻고 터득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
그동안 큼지막한 일들은 큰아빠가 처리하고 우리 남매를 위해 집까지 따로 구해 주셨다지만 어디까지나 한계는 있었다. 밀려든 자유 앞에서 방종에 빠지지 않았던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던 스무 살 그 무렵의 시간들.
그 무거운 책임감이 서서히 버거워질 때쯤 만난 게 채우수다. 덕분에 적어도 학교 문제에 있어서는 덜 신경 쓰게 됐던 것도 같고. 한때는 내가 너무 힘들까 봐 하늘에 계신 우리 엄마 아빠가 붙여 준 사람이 채우수가 아닐까 싶기도 했었다. 채우수가 그만큼 내게 잘 해 줬다기보다는 내가 겨우 그 정도에도 감사했을 만큼 힘든 상태였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 * *
“토할 것 같아요.”
나는 안전벨트를 풀면서 채우수를 흘겨봤다. 정말이지 바이킹이라도 탄 것처럼 속이 메슥거리는 기분이었다.
“오버하지 마, 너.”
“진짜 멀미했단 말이에요.”
“……할 거면 내려서 해. 차에 하지 마.”
“선배 운전 실력 나보다도 형편없는 거 알아요? 부산에서 택시 탄 줄 알았어.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뭐가 급한지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고. 무슨 답을 원해. 오늘 섹스 계획을 묻는 거야?”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삐딱하게 웃는 그의 입술에서 불순한 말들이 튀어나왔다. 으아, 노골적인 단어 선택에 머리를 흔들면서 차에서 내렸다. 킥킥대며 따라 내린 채우수가 뒷자리에서 라면과 맥주를 꺼내어 손에 들고는 내 옆에 붙었다.
“너 이런 걸로 벌써 부끄러워하면 어떡해.”
“혹시 가끔 인격이 막 바뀌고 그래요? 웬일이야……. 저질!”
“그 저질스러운 거 너도 같이 했잖아 벌써.”
“책임님이 말하는 그런 것까지는 안 했잖아요?”
“오늘 중으로 데이터 뽑아낼 거니까. 분발하시죠, 한 선임님.”
……변태. 갑질은 누가 하고 있는 건지 몰라.
그의 난잡한 계획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난 건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사람이 없었으니 망정이지 뻔뻔한 얼굴로 끊임없이 치근덕대던 채우수도 지하 1층에서 열린 엘리베이터 앞에서는 잠시나마 말을 잇지 못했다.
“아씨 뭐야, 한연……. 어, 우수 형!”
밖에서 만나면 알은척 안 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날 보고 얼굴을 구기던 한태평이 내 옆의 채우수를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난데없는 한태평의 등장에 채우수의 얼굴에 짜증이 스친 것도 모르면서.
“어째 둘이 같이 와요?”
“그렇게 됐어. 너 왜 지금 집에 와. 독서실에 있어야 할 시간 아냐?”
“나? 집에서 밥 먹고 가게.”
한태평이 채우수와 나 사이를 파고들어 중간에 섰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는 채우수는 이 상황에 조금 화가 난 것도 같다. 경직된 그의 턱 근육이 이상하게 섹시해 보였다면…… 나도 모르게 세뇌를 당했나 보다.
“와, 형 우리 얼굴 보는 건 진짜 오랜만이죠. 형도 우리 집에 올래요? 저녁 안 먹었으면 같이 먹어요.”
“안 돼!”
“왜 누나가 대답해? 난 형한테 물었는데.”
“너 그런……, 그런 중요한 걸 왜 한태평 너 혼자 결정해. 그리고 책임님 그렇게 경우 없이 남의 집에 함부로 오는 사람 아니야. 우리 집에서 먹는 반찬 책임님 입에도 안 맞을 거고. 맞죠?”
빨리 싫다고 안 된다고 대답하라는 식으로 채우수에게 시선을 던졌다.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 뭔지. 제가 사는 9층 버튼을 눌러 지운 채우수는 내 쪽으로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말했다.
“그걸 왜 한 선임님이 결정하지?”
“……네?”
뭐 하자는 거야 이 인간. 진짜 우리 집에 오겠다는 거야? 눈썹을 한껏 들썩이면서 그를 쏘아보자 채우수가 입술을 길게 늘이며 웃었다.
“뭐야, 잠깐. 가만있어 봐. 이제 보니까 형이랑 누나…….”
저를 사이에 두고 뜻 모를 눈빛을 주고받는 나와 채우수 사이가 의아했던 건지 태평의 눈이 가늘어졌다. 얘가 뭘 눈치채기라도 한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 아니, 눈치챌 만큼 애초에 우리가 대단한 사이는 아니다만…….
“둘이 회사도 같은데 카풀 하면 되겠네!”
……그럼 그렇지. 왜 그동안 이 생각을 못 했냐며, 대단한 아이디어라도 발견한 것처럼 눈을 반짝이는 태평을 보니 긴장했던 게 무색해졌다.
“누나 차 주차장에 계속 처박아 놓을 거면 차라리…….”
“한태평 너 수작 부리지 마.”
“수작이 아니라 합리적인 선택을 해 보자는 거지.”
“내가 책임님이랑 카풀을 하더라도 차 키 너한테는 안 넘겨.”
“하여간 눈치는 드럽게 빨라.”
허, 눈치 빠르다는 말에 채우수에게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못 들을 소리라도 들은 모양이다. 엘리베이터가 10층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내렸다. 한태평만 끼어들지 않았다면 채우수 발이라도 밟고 내리는 건데. 뭔가가 불만인 듯 연신 중얼거리는 태평의 목소리가 10층에 울렸다. 등을 반쯤 돌려서 채우수에게 그만 가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하자 그가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턱짓했다.
“들어가.”
“엥, 형 그냥 가게요? 같이 먹어요, 저녁.”
“됐어.”
“아, 누나는 신경 쓰지 말고. 그러지 말고 난 괜찮으니까 이왕 먹을 거 같이 해요.”
“다음에 해. 오늘은…….”
물끄러미 날 쳐다보던 채우수가 제 손에 든 라면을 내게 건네면서 한태평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좀 있다 손님이 오기로 했거든.”
“오오, 무슨 손님? 설마 여자예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던 그의 눈이 내게 잠시 머물더니 이내 계단으로 향했다. 라면을 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시선이 마주칠 때쯤 등을 돌려 버렸다. 왠지 웃고 있을 것만 같은 채우수를 태연하게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가세요, 형!”
태평의 인사 소리를 등에 업으며 현관으로 들어왔다. 이렇게나 집이 엉망인데 누구 마음대로 채우수를 집에 들여. 한태평은 철도 없고 생각도 없고 눈치도 없지 정말.
“와, 우수 형 진짜 여친 있나 봐. 옆에서 뭐 들은 거 없어?”
“네가 그런 게 왜 궁금해.”
“누나는 안 궁금해? 형 딱 봐도 눈 엄청 높을 거 같잖아. 형은 어떤 여자 사귈지 궁금하다 진짜.”
“……적당한 여자 사귀겠지 뭐.”
나는 한태평의 과도한 채우수 찬양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면서 채우수에게서 건네받은 라면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하아, 한숨이 흘러나온 가슴이 자꾸만 두근거렸다.
* * *
[밥 다 먹었으면 적당히 핑계 대고 내려와] PM 07:37
[?] PM 08:02
[너 씻는 소리 다 들려] PM 08:06
[고문이 따로 없어] PM 08:19
세상에 별꼴이야, 채우수. 이럴 거 한 달 동안은 어떻게 참았니. 대단도 하셔라. 늦게나마 확인한 그의 메시지들은 그저 어이가 없다. 머리카락에 묻은 물기를 닦아 내면서 뭐라고 답장을 할까 고민하던 것도 잠시,
[내가 올라갈까] PM 08:22
제가 보낸 걸 확인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채우수가 새로 보내 온 메시지에 고개를 작게 저으며 답장했다.
[한태평 아직 집에 있단 말이에요] PM 08:23
[그래서?] PM 08:23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숫자 1이 사라지기 무섭게 날아든 답장만큼이나 그가 원하는 건 명확하다. 뭐, 나도 싫지는 않다. 먼저 말 꺼낸 사람도 나고 채우수가 언제 또 마음 바꿀지 모를 일이니까.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하는 거니까. 그것이 약속이니까…….
그에게 기다리라는 메시지를 보낸 뒤 옷을 대충 갈아입고는 방문 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거실이 조용한 걸로 봐서는 한태평도 제 방에 들어간 모양이다. 이때를 틈타 몰래 나가야지. 방문 손잡이를 최대한 조용히 돌려서 밖으로 빠져나왔다.
“어디 가.”
아, 깜짝이야. 방에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냉장고에 기대어 주스를 홀짝이던 한태평이 날 위아래로 훑어봤다.
“……뭐?”
“어디 가냐고. 밤에.”
“어…… 음, 쓰레기 버리러…….”
“그러고 가게?”
“왜, 이상해? 보기 싫어?”
너무 편한 복장인가. 아무리 채우수라지만 남자 집에 가는 건데 신경 썼어야 했나…….
“밖에 춥잖아.”
새삼스레 옷 타령이냐며 태평이 꼴사납단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도 눈치는 못 챈 모양이다. 나는 머쓱함에 휑한 목뒤를 긁적이며 현관으로 향했다.
“괜찮아. 너는 독서실 안 가?”
“이제 갈 거야. 갔다가 오늘 석준이 집에서 자고 올게. 새벽에 같이 축구 보기로 했거든.”
“너 축구 핑계로 또!”
현관 거울 속으로 비추어 보던 얼굴 뒤로 한태평과 눈을 마주쳤다. 축구는 무슨. 그 핑계로 술이나 진탕 퍼마시겠지. 그럼에도 잔소리를 길게 못 하는 건 지금 나도 썩 떳떳하지는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한태평 너 술 마실 거면 적당히 마셔.”
“알겠어. 근데 누나.”
“뭐, 왜.”
“쓰레기 버리러 간다며.”
“그런데?”
“왜 빈손인데.”
“아…… 깜빡했다, 참.”
……쓰레기가 어디에 있나. 며칠 전에 비워서 종량제 봉투가 다 차진 않았을 텐데. 태평에게서 급히 눈을 돌리며 주변을 훑었다. 아, 그냥 다른 핑계를 댈 걸 그랬나 보다.
“수상해, 한연두.”
“……뭐가 수상해?”
“나 눈치 깠어.”
“……뭘?”
“지금 쓰레기 버리러 가는 거 아니잖아.”
한태평이 냉장고에 기댔던 등을 바로 하곤 저벅저벅 걸어와서는 현관 앞에서 날 마주 보고 섰다.
“아니야. 쓰레기 버리러 가는 거 맞아.”
“한연두 네 동생 눈치 빨라. 솔직히 말해.”
“뭘 솔직히 말해.”
“누나 지금…….”
들켰나. 뭐라고 말하지. 나 지금 네가 좋아하는 채우수 집에 간다. 내가 그 손님이다. 그렇다고 내가 채우수 여자 친구는 아닌데……. 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태평을 올려다봤다.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담배 피우러 가지?”
……허, 웬일이니. 얘는 눈치가 왜 이 모양이야. 안도감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아주 조금은 뻔뻔한 표정을 지으면서 한태평에게 말했다.
“그래. 네 누나 담배 좀 피우고 커피도 마시고 올게.”
“딱 걸렸어. 오래 걸려?”
“글쎄. 적당히 오래 걸릴 것 같은데.”
“너무 늦게 다니지 마.”
꼴에 제법 컸다고 내 걱정까지 하는 게 기특할 지경이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는 운동화를 구겨 신었다.
“한태평 너는 쓸데없는 짓 하고 다니지나 마.”
“늦으면 우수 형한테 연락하고.”
“내가 늦는데 왜 채우수한테 연락해?”
“형이 걱정한단 말이야.”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머리를 정리하던 손이 움찔거렸다.
“채우수가 나를?”
“글쎄, 말은 그렇게 해도 시민들이 아닐까. 밤길에 못생긴 누나 얼굴 보고 놀랄 선량한 시민들.”
“웃기고 있어. 나 못생겼다고 해 봤자 네 얼굴에 침 뱉는 거야. 나도 인정하기 싫지만 한태평 너 나랑 똑 닮았거든.”
“아, 욕하지 마. 언제는 엄마 닮았다며?”
“네가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잘 안 나나 본데 우리 둘은 다 기본적으로 아빠 닮았어.”
“그럴 수가 없는데? 나는 아빠보다 키도 크고 다리도 길어서 모델 해야 한다고 그랬어, 큰아빠가. 얼굴도 아빠는 선이 굵은 편이고 나는 좀 예쁘고 섹시하게 섬세하게 잘생긴 편이잖아. 게다가 웃을 땐 귀엽기도 하고.”
“……여러모로 토할 것 같아 오늘.”
한태평의 제 외모에 대한 근거 없는 자신감은 누굴 닮은 건지. 어디 가서 한연두 동생이라고 할까 봐 무섭다. 나는 더 이상 태평의 말을 참을 수가 없어서 서둘러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내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는지 계단에 발을 딛자마자 아래층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나 마나 채우수다. 계단을 반쯤 내려왔을 때 비상등 조명 아래에서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얼른 내려오라고 재촉하는 그의 눈빛이 꽤 재밌어 웃음이 비죽 삐져나왔다. 골려 주고 싶은 마음에 한 발 한 발 천천히 내려가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헛웃음을 내뱉던 그가 어디 한번 끝까지 해 보라는 듯 혀로 볼을 굴렸다. 슬슬 짜증이 나는 것도 같지만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채우수를 놀려 보나 싶다.
“아, 잠깐…….”
……만요. 마지막 계단을 내려오기 무섭게 결국 그에게 붙잡혀 집으로 빨려 들어가긴 했지만.
“사람 말려 죽이려던 계획이라면 거의 성공했어.”
“흐응, 손님맞이를 꽤 과격하게 하네요.”
“안 어울리게 왜 귀여운 척이야, 너.”
“척이 아니라……. 선배 눈에 귀여워 보였나 보죠.”
“허?”
“왜요. 나 종종 귀엽단 말 들어요.”
신발을 벗으며 들어선 몸이 채우수에게 밀려 벽에 붙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내 얼굴에 닿아 번졌다.
“귀여운 건 배 뒤집는 강아지들이나 귀여운 거고.”
옆구리를 감쌌던 그의 손이 내 배를 어루만졌다. 옷 위로 전해지는 손의 열기가 충분히 뜨겁다. 성마른 손이 엉덩이를 움켜쥐자 아, 벽에 붙었던 등이 잠시 떨어졌다.
“넌 커서 별로 안 귀여워. 그리고…….”
스러질 듯한 그의 눈빛이 위태롭다. 두 손을 들어 그의 목을 감싸자 제 허벅지를 내게 붙이던 채우수가 입꼬리를 길게 늘였다가 짧게 입술을 겹쳤다.
“꼬시려면 무슨 말을 못 해.”
“걱정하지 마요. 그런 말에 잘 안 넘어가니까.”
맞붙은 입술 사이로 가벼운 웃음이 퍼졌다. 코끝을 스치며 떨어진 채우수가 제 엄지로 내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귀엽네, 한연두.”
“……안 넘어간다니까요.”
“그러니까.”
순식간에 몸이 기울더니 허공에 들렸다. 종아리 뒤로 넣은 팔에 오금이 걸쳐지자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그의 목을 꽉 붙들었다. 날 안은 채로 발걸음을 옮기던 채우수가 내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마치 대단한 구출 작전이라도 성공한 사람 같다. 나는 공주님이라도 된 듯이 가만히 안겨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이 순간에도 마음 편히 기댈 수 있는 곳은 결국 채우수였다는 것처럼.
* * *
“이렇게 안고 와서 침대에 눕히는 것도 원래 계획이었어요?”
“아니.”
눕힐 거면 좀 제대로 눕히든가. 침대 끝에 걸린 엉덩이를 비틀면서 조금씩 위로 움직이자 채우수의 한없이 단조로운 시선이 날 위아래로 훑었다.
“계획대로 하자면 현관에서 한 번 끝내고 와야지.”
흐응, 말은 잘하지. 나는 결국 내게 쏟아지는 그의 따가운 눈빛을 이겨내지 못하고 윗몸을 일으켜 앉았다. 팔을 뒤로 뻗어 매트리스를 짚은 채로 윗옷을 훌러덩 벗는 채우수를 가만히 쳐다보자 그의 눈이 살짝 휘었다.
“불은 마저 꺼 줘?”
나는 은은한 스탠드 조명 속에서도 제 존재감을 자랑하는 그의 몸에서 겨우 눈을 뗐다. 괜스레 목이 마르다. 제 다리 사이에 가둔 내 무릎을 툭 건드리면서 끌까, 다시금 물어보는 목소리가 답지 않게 다정해 어딘가 간지러웠다.
“선배는 어떻게 했으면…….”
“나 말고 한연두 네가 어떤지 묻는 거잖아.”
“……나는 지금도 괜찮아요.”
“그럼 됐어.”
이미 몇 번이나 보인 흉터. 더 이상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여전히 내 무릎을 가두고 선 채우수는 그대로 몸을 살짝 죽여서 협탁 서랍을 열었다. 아마도 콘돔을 꺼내는 거겠지. 으레 해왔던 일을 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구는 채우수가 오늘따라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어쩌다가 우리가 여기까지 왔을까.
“……그거요.”
그러니까 결국 이 모든 건 다 채우수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작도 하기 전에 천을 뚫어 버릴 기세로 벌써 세워진 채우수의 저것. 저것만 아니었어도. 그날 밤 저것만 안 만져 봤어도. 나는 자꾸만 그의 배꼽 밑으로 떨어지는 시선을 억지로 끌어 올렸다.
“……만져 봐도 돼요?”
“언제는 내 허락받고 만졌나 봐. 한연두.”
“전에도 말했지만 그땐 그냥 손이 스친 거구요.”
“말장난은.”
채우수가 드로어즈에 엄지를 끼워 내리자 묵직한 것이 제 무게를 못 이기고 퉁 튕겨 나왔다. 세상에. 배꼽 위로 달라붙은 흉물 같은 것을 막상 눈앞에서 보자니 선뜻 손이 나가진 않는다.
뭐가 저렇게, 저게 왜 저렇게까지……. 원래 저랬나.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헙, 놀라서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그를 올려다보자 뒤따르는 건 정말이지 어이없다는 그의 표정이다.
“한연두, 너 지금 연기하는 거야 뭐야.”
“아니…… 맨정신에 보니까 더 신기해서…….”
“지금도 딱히 맨정신 같진 않아 보여, 너.”
어쩐지 두려운 마음에 제대로 만져 보겠다는 패기는 날려 버린 채로 몸을 뒤로 기울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팔꿈치로 지탱한 몸 위로 채우수의 만든 그림자가 겹쳐졌다.
“그러니까요……. 인체의 신비를 맨눈으로 보는 기분이네요.”
“칭찬을 참 이상하게 하는 재주가 있어, 한연두.”
“아니, 내가, 내 몸이 대견해서요. 그게 어떻게 다 들어가나…….”
“긴장했나 봐, 너. 또 아무 말이나 지껄이지.”
긴장이 아니라……. 나는 팔꿈치를 하나씩 뒤로 물리면서 침대 헤드 쪽으로 머리를 붙였다. 옷을 다 벗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부끄러워지는 건 정작 아직 하나도 벗지 않은 나다. 내가 제게서 멀어질수록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리던 채우수의 팔이 내 어깨 옆을 짚었다. 느릿한 그의 움직임에 내달리는 건 내 심장뿐인 듯하다.
“책임님은, 아니 선배는…… 어? 자식들을 아주, 아주 많이 낳아야 해요. 좋은 유전자를 널리 퍼뜨릴 도의적인 책임이 있어. 이왕이면 아들로 낳아서 여자들을 기쁘게-.”
“그럴 일 없어. 난 그딴 거 안 만들어.”
“왜……, 흣!”
시끄럽다는 듯 내 입을 틀어막았던 채우수의 입술이 턱을 지나 목에 달라붙었다. 더운 숨이 여린 살을 핥고 지나가자 입 속에서 맴돌던 말도 흩어져 사라졌다. 스치듯이 닿는 곳도 어쩔 줄을 몰라 몸이 절로 달뜬다. 그의 손끝에서 긴 니트 치마가 돌돌 말려 올라가자 아래로 휑한 바람이 들어오는가 싶더니 허벅지를 쓰다듬는 손에 머리끝까지 열기가 퍼졌다.
“아, 잠깐만요, 그렇게 한 번에 벗기면…….”
“그러게 쓸데없는 소리 하기 전에 알아서 벗으면 좀 좋아?”
뭐가 이렇게 순식간인지. 어느새 속옷까지 벗겨진 다리를 오므리며 그가 빨고 놓아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진짜……, 읏, 말 안 해 줄 거예요?”
“뭘.”
“얼마나 오래된 건지.”
지독하리만큼 내 가슴에 머물던 그가 그제야 고개를 반쯤 들었다. 삐딱하게 솟은 그의 눈썹만 보자면 마치 내가 대단한 걸 방해한 것만 같다.
“딴생각도 하고 아직 여유롭나 봐.”
“흐응, 그게 어떻게 딴생각이에요.”
도대체 왜 그걸 물고 말하는 거야……. 간지러움에 허리를 비틀면서 그의 어깨를 붙잡자 나지막한 음성이 잔잔하게 진동하며 그제야 가슴에서 떨어졌다. 입으로 충분히 괴롭혀 놓고는 부족했던 모양인지 유두를 비트는 손은 짓궂기 짝이 없다.
가슴을 지나 옆구리를 쓰다듬던 그의 손이 아랫배를 지나자 흐으, 허리가 오목하게 말렸다. 성실한 내 반응에 벌어진 입술 위로 내려앉은 그의 입술 사이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가슴을 놀리던 것만큼이나 쭈웁, 쭉 내 입술을 빨아 대는 소리가 점점 젖어 들었다.
하아. 그와 섞이는 숨이 달다. 아래를 지분대던 손끝이 부푼 살점을 건드리자 녹아 버릴 듯한 정신을 그의 혀로 겨우 엮었다.
“한연두 넌 언제부터.”
“아……흐으…….”
“싫어했는데 나를.”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채우수의 목소리에는 웃음이, 내게선 뜻을 알 수 없는 소리가 묻어나왔다. 그의 손끝에서 끝도 없이 젖어 가던 아래가 다시금 왈칵 물기로 얼룩졌다.
응? 장난스레 되묻는 그의 입술이 내 턱 끝을 살짝 깨물고는 점점이 제 흔적을 남기며 내려갔다.
“오래 됐, 흐으……어요.”
“비슷하겠네 그럼.”
“그게 아니라……. 하아.”
“그런데, 연두야.”
가슴 사이를 눌러 내려가던 채우수의 입술에서 갈라질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목소리로 내 이름을 듣고 있자니 어쩐지 이미 벗은 몸이 또 한 번 발가벗겨지는 기분이다. 부끄러움에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자 그가 내 한쪽 가슴을 움켜쥐었던 손으로 내 턱을 잡아 제게 고정했다. 음험한 눈빛 속에 찰나의 다정함이 깃들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지금은.”
“…….”
“안 그래?”
답을 종용하는 그의 눈빛이 내 입술 위로 떨어졌다.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그가 이끌어 내려는 답은 뭐가 됐든 딱히 중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사실은 나도 그가 날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얼마나 오래됐는지 따위는 별로 궁금하진 않으니까. 그것보다는 다른 걸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채우수가 지금 내게 갖고 있는 마음이 어디까지인지. 나는 그 마음의 무게를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답을 듣기도 전에 내 다리 사이로 제 고개를 묻어 버린 채우수는 보지도 못했겠지만. 아아, 공평도 하셔라. 그의 혀끝이 가슴의 정점을 희롱하듯 여린 살을 머금었다.
그날 호텔에서 보았던 채우수는 지금 온데간데없다. 그가 갖고 있던 불안은 게워 낸 것일까, 그대로 감춘 것일까. 그를 보며 내가 불안해지는 걸 보면 내게로 옮겨 온 것일까.
“네 말대로 신기하긴 해.”
“아흐…….”
쾌감에 들떠 신음하는 날 보는 남자의 얼굴은 이제 즐거워 보이기까지 한다. 이 악질. 채우수가 누구 것인지 모를 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옆으로 길게 늘이며 낮게 웃었다.
“어떻게 여기로 내 걸 다 먹어 치우는지.”
“아……. 그만, 그만요. 이제 그냥, 으응!”
“내 손가락도 겨우 머금는 주제에.”
그의 숨이 가까이 닿을 때마다 달싹이는 곳은 내 입술뿐만은 아니다. 그것마저 잘 알고 있을 채우수는 얄밉기 짝이 없어서 정말.
“흐응, 제발요. 그만…….”
“그만해도 되겠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지만 채우수는 들을 생각도 없어 보인다. 아아, 으으. 속도 모르고 빠져나오는 교태로운 목소리를 입술을 깨물어 가며 삼켰다. 제가 들어갈 곳을 확인이라도 하듯이 혀끝을 세워 내벽을 긁는 것이 집요하리만큼 반복됐다.
시트를 움켜쥐었던 손가락이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나 좀 제발. 이제 좀 제발. 구름 위를 걷는 것 같다. 걸음을 내딛는 족족 작은 구멍이 뚫렸다. 나는 언젠가 추락할 것을 알면서도 낙하하는 순간의 쾌감을 알기에 다음 발을 또 뗄 수밖에 없다.
아아. 결국 비틀어 대던 허리가 잘게 떨리면서 곱아들었던 발등에도 힘이 풀렸다. 나도 모르게 조인 허벅지 사이에서 채우수가 흡족해 마지않는 표정을 짓는다.
“잘했어.”
잘하긴 대체 뭐가…….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쾌락에 정지된 머리는 도통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그저 거친 숨을 다듬으며 다음을 준비할 뿐. 늘어진 내 위로 몸을 겹친 채우수가 방금까지 제 입으로 핥던 곳을 손을 넣어 벌리곤 살을 맞춰 왔다. 관자놀이께에 닿는 그의 입술은 끊임없이 무어라 속삭이는 듯하다.
“아읏…….”
미끄러지며 조금씩 내 안에 들어오던 것이 얼마 가지 못하고 멈추었다. 안 되겠는지 허리를 뒤로 물리려는 채우수의 팔뚝을 붙잡았다. 쿵, 나락으로 떨어졌던 심장이 그와 맞대었던 가슴 아래에서 빠르게 박동했다.
“한연두.”
눈꺼풀 위로 채우수의 더운 숨이 닿더니 그의 것이 거세게 밀고 들어왔다. 흐으, 온몸의 신경을 일깨우는 몸짓에 눈이 절로 뜨였다. 찌푸린 눈썹으로 옮겨 간 그의 입술이 잔키스를 내리자 굳었던 몸도 서서히 풀리는 듯하다.
천천히 허리 짓을 하며 뭉근하게 가슴을 쓰다듬던 그의 손이 내 옆구리를 쓸었다. 흉터를 덮는 듯한 손짓에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채우수는 내게서 빠져나가는 만큼 이렇게 더 큰 감정을 몰고 왔다.
“한연두.”
“아, 으, 흐읏.”
나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도 알아차리기 전에 무작정 삼켜 버렸다. 여태까지 그렇게 해 왔듯이. 채우수가 내게 그릇된 걸 권한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그에게 박혀 흔들리며 같이 허리를 흔드는 나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뻔뻔하게 그에게 받아먹을 생각뿐이다.
“부르잖아, 연두야.”
“흐으, 왜……. 앗! 흣, 으응.”
“하아……. 너 말이 짧아져, 자꾸.”
젖은 곳을 찌걱거리며 드나드는 소리가 거친 숨소리를 삼키고 그것마저도 살이 퍽퍽 부딪치며 잘게 부서졌다. 흐으, 흐으. 듣기 민망한 소리에 손등으로 입을 막자 채우수가 내 손을 떼어 내어 제 손가락을 하나씩 얽었다.
“나 좀 봐.”
이상하게 마주 볼 자신이 생기지 않는다. 내가 채우수에게 원하던 게 이런 게 아니었던 것일까. 그렇다기엔 그가 움직일 때마다 황홀을 뒤집어쓴 기분인데.
“연두야.”
응? 나 좀 봐 줘. 그 와중에도 선명히 귀에 박히는 그의 음성에 옆으로 돌렸던 고개를 바로 했다. 고였던 눈물이 흘렀다. 날 내려다보던 그가 목울대를 한 차례 꿀렁이더니 눈물을 대신 훔치려는 듯 눈가로 제 입술을 붙였다. 잘게 진동하는 그의 입술이 또 미안하다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게 아닌데. 또 미안하다는 소리 따위를 들으려던 게 아닌데. 이건 그냥, 이건 단지…….
나는 채우수와 겹쳤던 손을 풀어서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하아, 내 어깨에 제 머리를 묻으며 무거운 숨을 내쉬던 채우수가 팔로 매트리스를 짚으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계속…….”
“알아.”
방금과는 확연히 다른 차분한 음성. 그 목소리에 놀랄 틈도 없이 채우수가 내게 깊게 파고들었다. 꿰뚫을 듯한 움직임에 그를 머금고 있던 아래가 움찔거리며 그를 조였다.
하.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던 그가 집어삼켜 버릴 듯이 입술을 붙여 왔다. 곧장 벌어진 입술 새로 들어온 혀는 내 머릿속까지 헤집으며 날 정신없이 휘감았다.
그의 허리 짓이 점점 빨라졌다. 아아, 쉴 새 없이 흔들리는 탓에 숨이 막혀 입술을 떼자 이번엔 잇새로 비음이 흘렀다.
“흐으, 그만, 읏, 아, 으응.”
“아직 아니잖아.”
“흐, 아, 앗, 아니! 흣.”
“그래 아니라고. 이제 시작인데.”
그에게 꽂힌 채로 시야가 뒤집혔다. 머릿속까지 뒤집혀 텅 빈 듯한 기분. 나는 순서를 모르고 몰려드는 감정이 조금씩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어쩌면 채우수를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 열린 모든 감각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혹은 채우수가 제 것을 내게 박아 대듯이 끊임없이 주입하고 있는 감정일지도.
하아, 좋아, 아, 좋아요. 조각난 단어들을 내뱉으며 침대 위로 쓰러졌다. 시트 위로 짓눌린 가슴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자 살이 오른 유두가 쓰라렸다.
겪어 본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채우수는 뒤로 하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다. 얼굴을 마주하는 게 불편했을까. 역시 내 화상 흉터 때문일까. 아무래도 상관은 없다. 어떤 자세든 나는, 내 몸은 그를 기꺼워하며 받아 내고 있으니 말이다.
등 뒤로 그의 더운 숨이 가까워졌다. 뭉개진 가슴 밑으로 욱여넣었던 남자의 손이 내 아랫배를 위로 들어 올렸다. 감각은 이제 통제 밖이다.
매트리스를 짚은 팔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이전보다 빨라진 허리 짓에 겨우 일으켰던 몸이 시트 위로 또 한 번 무너졌다. 달뜬 숨이 시트를 축축하게 적셨다. 흐으, 입술을 깨물며 흐느끼듯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채우수의 입술이 빠르게 붙으며 내 신음마저 앗아 가 버렸다.
입 속을 훑고 빠져나간 그의 혀는 내 귓불로 자리를 옮겼다. 젖꼭지라도 빠는 것처럼 귓불을 잘근대는 색정적인 소리가 모든 사고의 흐름을 끊는다. 끈적한 시간들에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초조해졌다.
“허리 들어, 한연두.”
거친 목소리를 귓가에 흘리던 채우수가 내 어깨를 누르면서 제 상체를 일으켰다. 시트 위로 늘어져 있던 내 팔이 그와 맞붙었던 등 뒤로 한데 잡혀 모였다. 그러잡힌 양 손목에 통증을 느끼기도 전에 뒤에서 깊숙하게 파고드는 것에 교성부터 터졌다.
그가 허리를 뒤로 물렀다가 짓쳐 올릴 때면 거센 파도가 몸을 휘감는 것만 같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것이 머리를 하얗게 비우면 그에 반발하듯 한계를 모르고 몸이 끓어올랐다. 아아, 이대로라면 흠뻑 젖은 몸은 이내 곧 물크러질 것 같다.
“만약, 만약에요.”
한 손으로 내 아랫배를 잡아 제게 당겨 붙인 채우수가 미끌미끌한 접합부로 제 손가락을 내렸다. 터럭을 움켜쥐었던 손가락이 클리토리스를 건드리자 몸이 잘게 떨리며 수축했다. 그를 뻐근하게 물었던 질구가 쥐어짜듯 좁혀지자 하, 씨발. 내 어깨를 찍어 누르던 그의 입술 사이로 거센소리가 튀어나왔다.
“만약에 내가 좋아하는……, 흐읏, 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하아, 어떡해요.”
“뭐?”
“내가, 하읏, 선배 말고……, 다른 사람을, 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하아, 허리나 똑바로 들어.”
“아, 나 너무……, 아아, 흐으.”
미칠 것 같아. 죽을 것 같아. 내 목소리 같지도 않은 소리가 이성을 잃고 비죽비죽 삐져나왔다. 내벽을 꽉 채웠던 것은 내게 다시 파고들 때마다 부피를 더 키우는 것만 같다. 채우수의 손에서 물커진 여린 살이 즙이라도 터뜨린 듯 아래가 또 젖어 온다. 번들거리는 허벅지를 훔치며 옆구리를 쓸어 올리던 그의 손이 내 가슴을 움켜쥐었다. 문신처럼 하고 다니는 그의 손목시계가 맨살에 닿자 차가워 몸을 움찔거렸다.
아아, 그가 젖꼭지를 비틀던 손으로 날 감싸 안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내 등 뒤로 손목을 결박했던 그의 손아귀에도 힘이 풀렸다. 젖은 살이 부딪치는 소리에 수치 따위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그와 뒤엉킨 각도가 달라지자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나는 내 몸을 옭아맨 그의 팔에 의지한 채 허리를 같이 흔들었다.
“우리 한 선임님은, 하아, 상상력이 지나쳐 가끔.”
“아, 흣, 아, 으응.”
“허리는 내 앞에서 흔들면서, 마음은……. 다른 새끼한테, 하, 잘도 주시겠어.”
“아, 아니, 흐으, 앗.”
허벅지가 잘게 떨리더니 채우수의 몸이 다시 겹쳐졌다. 그에게 짓눌린 몸이 같은 속도로 진동했다. 하아, 하아. 물기를 날려 버린 더운 숨이 그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눅진한 키스 끝에 입가로 잘게 내리는 그의 입술은 장난스럽기 짝이 없다.
“지금 마음 같아선, 죽여 버릴 수도 있겠는데.”
“으응, 아, 나, 나를요, 아, 흣.”
“둘 다.”
“아, 이제, 그만, 앗, 흐으, 아!”
“방법은 다르겠지만.”
찰나의 떨림이 영원 같은 열락을 몰고 왔다. 세차게 두근대는 가슴 소리를 들킬까 두려운 밤. 그의 밑에서 매몰된 감정이 출구를 잃고 고립되었다.
* * *
“마셔.”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아직도 열이 채 가시지 않은 뺨에 뭔가가 닿았다. 갑작스러운 차가움에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채우수가 내 눈앞에 컵을 들어 보인다. 느릿하게 웃는 그의 얼굴은 그사이 씻고 나온 건지 멀끔하다.
“여기서 씻고 올라갈래?”
“……끝이에요 오늘?”
“네가 그만하자며.”
그러긴 했지만……. 엎드린 몸을 반만 일으켜서 그가 건넨 물을 마셨다. 머릿속에서 누가 꽹과리라도 친 것처럼 골이 울렸다. 그에게 컵을 건네고는 다시 침대 위로 축 늘어졌다. 온몸이 흐물흐물, 연체동물이 된 것 같다.
“왜, 아쉬워?”
“아니.”
“반말은.”
채우수가 내 입가로 제 손가락을 뻗었다. 순간 흠칫하며 잘게 떨었지만 그는 태연히 내 입가로 흐른 물을 제 엄지로 닦아 낼 뿐이다. 아랫입술 위를 덧그리던 손가락은 내 귓불을 만지작대더니 얼굴을 덮으며 쏟아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줬다.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돼요?”
“안 돼.”
“왜?”
“잠은 집에서 자야지.”
“무슨 손님 대접이 이래요.”
“너야말로 무슨 손님이 이렇게 경우가 없어.”
경우가 없는 건 채우수다. 그가 날 만지는 손길이 최면제같이 느껴졌다. 무거워진 눈꺼풀은 쉬이 떠지지도 않은 상태로 반쯤은 잠에 취한 듯 말이 점점 느려졌다.
“나 올라가기 귀찮아요. 움직일 힘도 없어…….”
“너 지금 입은 잘만 움직이고 있어.”
“……오늘 태평이도 친구 집에서 잔다 그러고……. 또 내일 주말이기도 하고…….”
“주말인 게 무슨 상관이야.”
“혼자 자기 싫어요. 같이 자.”
“…….”
내 눈썹 결을 반대로 쓸던 그의 엄지를 손가락으로 감싸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잠에 취한 느슨해진 눈동자가 그에게 겨우 초점을 맞추었다. 비스듬히 보이는 그의 표정에 흐릿한 웃음이 감도는 것도 같다.
“갑질이 심하네, 한연두.”
“선배도 싫은 건 아니잖아요.”
엄지는 내 손에 붙잡힌 채로 대답 대신 남은 손가락으로 내 볼을 툭툭 두드리던 그가 내 어깨를 잡고 날 일으켰다.
“씻고 와.”
“귀찮아…….”
“얼른 씻고 와. 시트 갈아 줄게.”
내가 이미 채우수를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다. 우선 그는 내 이상형과는 다소 거리가 있을뿐더러…… 외모적인 걸 차치하고서라도 이렇게 한순간에 갑자기 그를 좋아하게 될 리가 없다. 사람 감정이라는 것이 이리 쉽게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다고 차곡차곡 쌓아 온 감정이라기엔 나는 오래도록 채우수를 싫어했으니까. 아니, 이것도 다시 말하자면 싫어했다기보다는…… 그는 아주 오랫동안 내게 거슬리는 사람이었으니까.
채우수는 어디에 있든 늘 짜증 나게 신경 쓰이는 그런 존재였다. 지금 내 목에 새겨진 키스 마크만큼이나 말이다.
“세상에! 여기 이렇게 자국 만들면 어떡해요?”
나는 물기를 채 다 닦아 내지도 못한 채 대충 윗옷만 입고 욕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내 다리부터 훑고 올라오던 그의 눈은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묻는 듯, 가늘게 좁혀졌다.
“어디.”
“여기!”
정말이지 뻔뻔하기는. 나는 눈을 부라리며 손으로 목덜미 부근을 가리키며 짚었다. 침대에 기대앉았던 채우수가 그제야 제 눈썹을 삐딱하게 들어 올리며 관심을 보였다.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모르긴 뭘 몰라요? 여기 이쯤에 떡하니 새겨 놓고는.”
“난 안 보여. 모르겠어.”
웃기지도 않아. 시치미 떼는 표정은 얄밉기 짝이 없다. 채우수의 팔을 잡아당겨서는 침대 옆에 둔 전신 거울 앞에 섰다. 못 이기는 척 내게 당겨 온 그의 팔이 내 허리를 감싸더니 뒤에서 날 가볍게 끌어안았다.
“……여기 봐 봐요, 여기.”
“여기?”
“네. 어떡할 거야. 며칠 동안은 옷 입을 때 신경 써야 하잖아요. 이제 보이죠?”
“모르겠는데.”
“무슨 소리야 정말. 여기요, 여기! 보이잖아.”
“글쎄.”
“글쎄는 무슨 글, 쎄. 아…….”
아, 뭐야 정말…….
“너한테 내 냄새 나, 연두야.”
목덜미에 닿은 그의 숨결에 어느새 색이 더해졌다. 기묘한 기분에 살갗이 돋아났다. 향을 음미하기라도 하려는 듯한 남자의 입술이 돋은 살을 꾹꾹 누르며 천천히 자리를 옮겼다. 마른 입술은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으며 짓궂어지고 그를 아는 몸도 서서히 데워졌다.
이게 아닌데. 이러려던 게 아닌데. 흐응, 움찔대며 허리를 비틀어 뺐다. 내 움직임에 낮게 웃던 그가 허리를 감쌌던 두 손을 올려 내 양쪽 팔뚝을 움켜쥐었다.
“잠깐, 잠깐만요. 아, 거길 또 빨면 어쩌자는 거야…….”
그의 앞에서 고정된 채로 옆으로 젖혔던 목을 바로 하며 언제 감았는지도 모를 눈꺼풀을 접어 올렸다. 거울 속에서 마주친 그의 눈이 정념으로 일렁였다. 하지만 채우수는 마지막으로 어깨에 제 입술을 누르고는 내 옷을 정리해 줄 뿐, 다음 진도까지 원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러게 얌전히 보내 줄 때 갔어야지.”
“무슨 억지예요 그게.”
“한연두 네가 다 자초한 거야.”
맨날 내가 뭘 자초했다는 거야. 나는 내 정수리를 턱으로 찍어 누르며 웃고 있는 채우수의 배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뒤로 뻗은 팔은 별 힘도 쓰지 못하고 그에게 금방 잡혀 버렸지만.
“놔줘요. 씻었으니까 올라갈래요.”
“자고 가. 자고 간다며.”
“싫어요. 마음이 바뀌었어요.”
“왜.”
“생각해 보니까 우리가 필요 이상으로 친해진 것 같아요.”
“핑계도 좋아. 알아서 해.”
제법 쿨하게 떨어지는 채우수는 매정하기까지 하다. 침실을 빠져나가는 그는 마치 배부른 사자 같다. 제 욕심은 다 채웠다 이거지. 나는 그의 느린 걸음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치마에 발을 마저 끼워 넣어 올리며 뒤따랐다.
“……왜 안 잡아요?”
“가겠다는데 내가 널 무슨 수로 말려.”
“흐응.”
“잡아 줘야 해? 상황극이야?”
“매번 이런 식으로 여자 돌려보냈어요?”
“뭘 알고 싶은 건데.”
채우수의 감정은 극히 단조롭다. 그는 내 말에 제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거실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 물과 함께 삼켰다. 그의 목울대가 크게 꿀렁거렸다.
“네가 몇 번째 여자냐, 뭐 이런 게 궁금해?”
“그렇다고 뭐…… 그런 것까진 아닌데요.”
“아쉽네. 말해 주려고 했는데.”
입가에 묻은 물기를 가볍게 훔친 채우수는 또 다른 약통을 꺼냈다. 옆으로 세운 통을 툭툭 쳐서 손바닥 위에 꺼낸 약은 그의 입 속으로 빠르게 삼켜졌다. 나는 멍하니 그 모든 움직임을 좇던 눈을 끌어 올려 그와 시선을 부딪쳤다.
“이 집까지 데려온 건 네가 처음이야.”
“거짓말.”
“좋을 대로 해석해 그럼.”
내가 아는 한 채우수에게 여자는 없었다. 남자라면 몰라도. 그 남자 역시 내 오해로 비롯된 것이었대도……. 내가 채우수를 몰라도 너무 몰랐나. 근데 뭐가 이렇게 능숙해. 어찌 된 것이 살을 맞대고 몸을 섞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채우수라는 존재는 미궁으로 빠져 버린다.
“그거…… 그 약은 뭐예요.”
“수면 유도제.”
“아까 먹은 건 뭔데요.”
“비타민.”
“수면 유도제는 왜 먹어요.”
“왜겠어. 잠이 안 오니까 먹지.”
참 예쁘게도 대답해요. 이제 먹을 약은 다 먹은 모양인지, 서랍을 닫으며 한 발짝 가까이 다가온 채우수의 입술이 묘하게 휘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인 건지, 싱크대에 빈 컵을 놓아둔 큰 손이 내 허리를 휘감았다. 그의 입가에 걸린 보조개가 이젠 너무나도 불순해 보였다.
“내가 요즘 윗집 여자 때문에 통 잠이 안 오네.”
“웃겨.”
“그래서 말인데.”
그가 피아노라도 연주하듯 내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키를 낮춰 나란히 맞춘 채우수의 시선이 내 얼굴을 느릿하게 훑었다.
“한 선임님이 여기서 자면 잠도 잘 올 거 같은데.”
“…….”
“윗집 여자도 조용해지고.”
참 나, 웃기지도 않아. 정말이지 뻔뻔하기 짝이 없는 얼굴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졌다.
“그럴 거 약은 왜 먹었대요.”
“어차피 잘 듣지도 않은 약이야.”
“핑계도 좋아요.”
“자고 가지?”
“명령하는 거예요?”
“아니, 부탁하는 거.”
흐응, 누가 부탁을 이런 식으로 해. 잘근대는 입술 위로 채우수의 입술이 붙었다가 떨어졌다. 그는 저를 향해 좁혀진 눈을 빤히 쳐다보며 웃고는 다시 짧게 입술을 붙였다. 이미 내 대답을 들은 양 굴고 있는 채우수는 어이없기 짝이 없다. 이런 식으로 굴면 내가 넘어갈 줄 알고…….
“응? 귀여운 척 그만하고.”
“……척이 아니라니까요.”
“뭐가 됐든.”
“잠만 같이 잘 거예요. 원래 그럴 계획이었으니까.”
“그래. 손만 잡고 잘게.”
“뭐…… 방금 하던 것까진 계속해도 괜찮아요. 뭐야, 왜 또 웃어요?”
나는 네가 제일 웃겨, 한연두. 나직하게 내뱉는 말이 입술 새로 파고들었다. 부드럽게 휘감는 혀가 시간을 촘촘하게 엮으면서 부질없이 쌓아 올린 헛된 감정들을 녹였다.
어쩌면 나는 정말로 채우수를 좋아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