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길어진 그림자(2권) (7/14)

7. 길어진 그림자

제 누나의 잠버릇이 고약하기 짝이 없다는 한태평의 말은 사실이었다. 몸을 잔뜩 만 채로 내게 엉겨 붙어 이까지 아드득 갈아 대던 한연두는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할 말들을 웅얼거렸다. 대부분은 끙끙대는 소리에 가까웠지만 뭉개진 발음으로도 제 엄마를 찾는 것은 분명했다.

잠결에 외치는 그 엄마 소리에 속이 탔다. 술이라도 한 잔 마실 심산으로 한연두를 조심히 떼어 냈으나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한연두에게 팔을 붙잡혔다.

다리 하나 잃어버린 귀신 같은 꼴로 어딜 가냐고 묻는 얼굴이 제법 귀여워 쓴웃음을 삼키며 다시 몸을 내렸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한연두의 머리카락이 부드러웠다. 내 가슴팍을 밀어내며 답답하다고 투정 부리는 목소리가 반쯤은 잠에 젖어 있었지만 그래도 내 품이 아주 싫은 건 아닌 모양인지 한연두도 맞댄 살을 굳이 떼진 않았다.

잠귀가 밝은 건 선천적인 것인지 후천적인 것인지. 작은 소리에도 눈을 뜨는 한연두를 품에 안고 어서 자라며 어르고 달랬다. 물론 그 과정에서 몸을 섞었고 또 한 번의 섹스가 끝나고 나서야 한연두는 겨우 곯아떨어졌다.

밀린 잠을 몰아서 자는 건지 기절이라도 한 듯한 한연두를 옆에 두고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앉았다. 어차피 며칠째 자는 둥 마는 둥 했던 터라 오늘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끊은 지 오래되어 냄새조차 역해진 담배가 생각나는, 길다면 길었고 짧다면 짧았던 우리의 밤. 나는 한연두의 끝이 살짝 올라간 코, 좀 더 도톰한 아랫입술 따위의 것들을 내려다보며 담배 연기를 내뿜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원치 않던 밤이라면 거짓말이다. 한연두가 내 눈에 다른 의미로 띄기 시작한 이후부터 이따금씩 하던 상상들은 다 재현하지도 못한 밤이다. 아직도 교복을 입은 한연두의 모습이 눈에 선해 어쩐지 타락한 기분마저 들었다.

너는 알까. 내가 매일같이 널 비워 내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

볼이 통통했던 중학생 시절 한연두를 겹치며 나도 모르게 내걸었던 미소를 씁쓸하게 지워 냈다. 내뱉는 숨이 썼다. 애초에 시작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는데. 사귀자는 말을 건넸던 것은 그래, 조금은 충동적이었다. 소개팅을 또 하겠다는 소리에 화가 났던 것도 같고. 어쩌면 한연두도 나를 원하는지도 모른다며 같잖은 자신감이 생겼던 것도 같다.

잠깐 내가 미쳐 돌았다고는 해도 이런 식으로 한연두에게 말려서는 안 됐는데. 도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건지. 그동안 참아 왔던 모든 것이 삽시간에 무너져 내린 밤이다. 나는 잿더미와도 같은 감정 속에서 결국 한연두를 안았지만, 한연두는…….

한숨과 함께 벽에 쿵 부딪친 머리가 웅웅대며 잊히지도 않는 기억들을 토해 냈다.

*

사람들은 내게 수저 잘 물고 태어났다고들 말하지만 그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다. 나는 그 수저의 반쪽을 부러뜨리며 태어났다는 것을.

또래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솟아 있었지만 겨우 10살. 이제 알 만큼은 알 나이라며 아버지가 던져 준 내 열 번째 생일 선물은 내 시선보다 반 뼘 위에 위치한 상자였다. 조화며 사진이며 칸칸이 빼곡한 상자들 사이에 홀로 단출했던 작은 상자.

판도라의 상자가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가리킨 상자 속 유골함에는 내 생일 날짜가 세로로 쓰여 있었고 그 옆에 놓인 사진에는 만삭의 여자가 제 부른 배를 손으로 감싼 채로 날 보고 있었다. 못 볼 것을 본 듯한 느낌에 대리석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자 아버지는 내 어깨를 누르며 친절히도 말씀하셨다.

‘고개 들고 똑똑히 봐라. 널 낳아 주신 분이다.’

나는 그 직관적인 설명에 목이 졸리는 기분으로 사진 속 여자를 응시했다. 10살이나 먹고 처음 마주한 진짜 어머니는 돼먹지도 않은 아들을 웃는 얼굴로 반겨 주고 있었다.

양수 색전증. 어린 내가 기억하기도 힘들었던 그 단어는 이해하기까지에도 한참이 걸렸다. 분만 과정에서 산모의 폐정맥으로 흐른 양수가 모체에 과민 반응을 일으킨다는, 심할 경우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다는, 2만 명당 1명 정도로 발생한다는 그 확률에 걸려 버린 나의 생모. 배 속에 내리 품고 있던 것에 피가 굳어 버린 나의 엄마.

10번째 생일 선물로 미니카를 갖고 싶다던 내게 아버지가 선물한 것은 나와 닮은 눈의 생모가 아니었다. 내 남은 삶을 쥐고 흔들 죄책감이었다.

아버지와 사법연수원 동기였던 내 생모는 어린 나이에 날 가졌다. 아이를 빌미로 결혼까지 하기엔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는 소위 말하는 개천에서 난 용이었고 어머니는 용 무리에서 나고 자라 개천이라고는 모르던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결국 결혼식 없이 살림부터 합쳤고, 나는 불행 속에서 태어났다.

애초에 생기지도 말았어야 할 아이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한쪽에선 제 잘난 딸을 죽인 아이, 한쪽에선 제 잘난 아들 인생을 발목 잡는 아이. 태생부터 부정당한 부정 탄 아이, 채우수.

아버지는 핏덩이인 날 외면하지는 않았다. 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한 그는 당시 건설 업계에서 이름 좀 날린다는 집안의 딸과 재혼했다. 아니, 내 생모와 결혼한 적은 없으니 초혼이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막 배밀이를 시작한 내 존재까지 품을 수 있는 모종의 거래가 오간 결혼이었다.

아, 출세욕은 인간을 어디까지 추하게 만들 수 있을까.

부정으로 포장되었던 아버지의 책임감은 10년이 지나 그 납골당에서 본의를 내비쳤다. 나는 생모의 존재를 알게 된 지 1시간 만에 그녀의 아버지이자 내 외조부와 처음 마주했다. 철저하게 의도된 만남이었다.

납골당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아버지는 그것 또한 예상한 듯 흐트러짐 없는 어조로 날 내 외조부께 내보였다. 인사를 종용하는 아버지의 손이 내 어깨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안녕하세요. 채우수입니다.’

쥐어 짜낸 목소리에 산짐승 같던 외조부의 눈이 일순간 부드러워졌다. 제 딸을 잡아먹었으나 그녀의 눈을 쏙 빼닮은 손자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었을까. 잘했다는 듯 내 어깨 위를 두드리는 아버지의 손이 잘 벼린 칼날처럼 느껴졌다.

아버지는 당신의 출세를 위해 나를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잘나가는 건설 회사라고 해 봤자 주먹으로 세운 현 처가의 뒷배보다는 법조계에서 한자리씩 하는 옛 처가의 뒷배가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몇 번의 고성 끝에 나는 아버지의 출세를 위한 수단이 되어 내 외조부의 집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생일, 명절, 제사……. 이유는 갖다 붙이기 나름이었다.

시작이야 어떻든 단 한 번도 친엄마가 아니라고 의심해 본 적 없을 만큼 날 품어 주던 어머니와 그 집안 어른들의 태도도 그 이후로 조금씩 달라졌다. 증폭이라도 한 듯한 어머니의 한숨 소리가 밤마다 나를 짓눌렀고 10번째를 끝으로 지워진 내 생일은 해가 바뀔수록 스스로를 좀먹었다.

몸을 긁는 버릇이 점점 심해졌다. 손톱으로도 개운치 않자 커터 칼을 들었고 열두 살의 나는 정신과 상담을 시작했다. 불행히도 내 상태는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약을 바꾸고 병원을 바꿔도 봤지만 늘어난 건 아버지와 어머니가 소리 높이는 시간이었을 뿐.

‘차라리 우수 쟤, 그 집에 아예 보내 버리지 그래요……!’

하루는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어머니가 소리쳤다. 나는 조용히 내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이불 속에 숨었다. 세 집안의 알력 사이에서 그나마도 내가 편히 숨 쉴 수 있는 공간은 이 집이 유일하다는 건 나밖에 몰랐다.

‘우수 니는 니 엄마 목숨을 등에 업고 태어난 기다. 니 이 할아버지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 엄마 죽이고 태어난 것도 다 니 업보라 이 말이다. 니 죽은 엄마 인생이 앞으로 우수 니한테 달려 있다. 현정이 그 가시나 그게 그래도 지 닮은 아들 하나는 잘 낳아 놨다. 그쟈? 이놈 아가 울기는 와 우노. 내가 니 혼내키드나.’

‘친엄마 얘기만 나오면 입을 다무는 게 영 의뭉스럽잖아. 아니, 뭘 가만있어 봐. 피는 안 섞여도 나도 명색이 외삼촌인데 이 정도 말은 할 수 있잖아요? 마냥 어린 나이도 아니고 이 집안, 저 집안 떠돌면서 저도 생각이란 걸 할 텐데. 야, 너 평창동 그 노인네 집 가면 무슨 얘기 하냐? 그 집에서 너 재산이라도 좀 미리 떼 준다는 말 없어?’

‘혹이지, 혹. 걔만 아니었어 봐. 좋은 혼처가 얼마나 줄을 섰을 거야 그래. 어머,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 아들이 어디가 어때서. 얘, 꼭 그런 것도 아니더라. 난 내 손자여도 걔한텐 영 정이 안 간다? 꼭 지 엄마가 날 쳐다보는 거 같다니까? 걔 때문에 우리 아들이 팔자에도 없는 두 처가 눈치 보는 것만 생각하면 아주 미워 죽겠어. 어머, 얘! 너는 왔으면 왔다고 기척이라도 하지. 그래, 나중에 통화해. 우리 혹 덩어리 왔네.’

어둠은 빠르게 나를 집어삼켰다. 나는 내가 만든 어둠에 스스로 갇혀 나를 죽였고 시간마저 빨려 들어간 어둠 속에서도 하루하루 꾸역꾸역 살아남았다. 비겁하게 들릴지라도 나는 그날의 내 선택이, 내 시도가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적어도 한연두를 처음 마주치기 전까지는 그랬다.

* * *

내게 고등학교는 도피처이자 안식처였다. 0교시로 시작해 밤 10시까지, 잠자는 시간을 뺀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냈지만 집이 아닌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꺼운 날들. 나는 청소년기 사내놈들의 비릿한 냄새만 들끓는 곳에서 되레 마음 편히 숨 쉬었다.

우리 반에는 중학교 때처럼 달에 한 번 제비뽑기로 짝을 바꾼다거나 하는 아기자기한 문화는 없었다. 키 순서대로 고정된 자리는 학기 내내 바뀔 줄을 몰랐고, 그 덕에 나는 옆자리였던 강도우와 그의 뒷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류지환과 자연스레 어울리게 됐다. 주로 류지환이 헛소리를 하면 강도우가 헛소리로 되받아치는, 미친놈들의 생산성 없는 대화들을 적절히 끊어 내는 게 내 역할이었다.

우리 셋은 적당히 반에 어우러지면서도 좀처럼 섞이지는 않았다. 류지환은 이를 두고 강도우의 거만함 탓이라고 했고, 강도우는 류지환의 주접 때문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원인은 내게 있었다는 걸 다들 알았을 것이다.

정신과 상담을 받기 시작한 이후로 이따금씩 들었던 커터 칼은 내려놓았지만 나는 늘 예민했고 불안했다. 사춘기라서,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렇다고 하기엔 어쩌면 나는 타고나길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사교성이라곤 없는 내게 스스로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두 사람을 떼어 낼 생각은 없었다. 반장이었던 류지환은 가끔 수업 외 정보들, 가령 한문 시간에 소지품 검사가 있을 거라는 둥의 정보들을 물어다 줬고, 그럴 때마다 강도우는 내 책상 서랍에 있던 담배를 꺼내 대신 처리하곤 했다. 얼핏 들으면 꽤 대단한 우정 같지만 정도에 따라 적당량의 돈이나 그에 상응하는 노동 착취가 오가는, 계산적인 놈들의 술수였을 뿐이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석식을 먹고도 양이 차지 않는다는 강도우와 류지환에게 빵 하나씩을 입에 물리곤 반으로 들어왔다. 아직 야자 시간이 되려면 멀었음에도 몇몇 애들은 학원 숙제를 하는 모양인지 책에 조용히 머리를 박은 상태였고, 그중 몇 명은 적막을 깨뜨린 우리에게 시선을 두었다가 금세 회수했다.

나는 완벽한 이방인의 기분을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4분단 끝자리란 원래 그런 자리라는 양 좀처럼 전체에 동화될 수 없는 분위기가 있다. 햇빛이 가장 짧게 닿는 곳. 우습게도 나는 여기서 안락함을 느끼는 동시에 빠져나가고자 부단히도 애썼던 것 같다.

“야, 맞다. 오늘 야자 때 담임 없다는데 쨀래?”

본인 생각에도 반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던 류지환이 뒤에서 고개를 내밀면서 강도우에게 속삭였다. 항상 반복되는 패턴으로 체제에 순응하는 규칙주의자 강도우는 이 제안을 거절할 것이 분명하지만 류지환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째고 뭐 하게.”

“피시방 갈까. 스타?”

“싫어. 침 뱉는 쌈박질 게임.”

“미친. 강도우 니는 붕어빵이나 존나 구우세요. 평화주의자 새끼.”

낄낄대며 제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리는 강도우는 본격적으로 뭔가를 해 보겠다는 듯 삐딱하게 앉아 있던 몸을 틀어 벽에 등을 기댔다.

“뭔 붕어빵? 강도우 붕어빵 장사하냐.”

이번엔 날 꼬셔 보겠다는 듯 내 어깨를 두드리던 류지환의 손이 내 말에 힘이 빠진 듯 주르륵 흘러내렸다. 답도 없다는 표정은 덤이었다.

“채우수 이 새낀 대체 뭐냐. 존나 남들한테 관심도 없는 새끼.”

“왜, 뭔데.”

“강도우 요즘 하루 종일 저 지랄인데 옆에 앉은 애가 아직도 모르냐.”

류지환의 턱짓에 따라 강도우의 휴대폰으로 슬쩍 돌린 시선 끝에 조악한 이미지의 붕어빵 몇 마리가 걸렸다. 강도우가 쌈박질 게임 대신 선택한 것이 바로 이 붕어빵 게임인가 보다. 제 나름의 규칙이 있는 듯 엄지가 몇 번 오가자 노릇하게 색이 변하는 붕어빵을 보니 강도우답다 싶다. 나는 오늘도 소득 없는 논란에 고개를 작게 저으며 가방에서 문제집을 꺼내 펼쳤다.

“채우수한테 뭘 바라냐, 지환아. 우리 우수는 공부하느라 바쁘잖아. 아! 이 형님은 몇 개를 달라는 거야.”

양심도 없는 새끼. 작게 웅얼거리며 키패드를 딸깍대는 소리가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다. 류지환 말에 의하면 강도우는 요 며칠 계속 이 게임을 해 왔다는 건데 이제야 귀가 트인 나도 참 어지간히도 남들에게 관심이 없었나 보다.

“아, 담임 없는 날 별로 없는데 어디라도 가 보자.”

“귀찮아.”

“노래방 갈까?”

“거긴 더 귀찮고.”

저번에 강도우 때문에 노래방에서 벌어진 소란만 생각하면 납득이 된다는 듯 혀를 차던 류지환이 느물거리면서 제 책상에 엎드렸다. 아무래도 오늘 야자 째는 것도 글렀다고 판단한 듯했다.

“갈 데 없으면 나 대신 우리 할머니 댁이나 들렀다 가든가.”

“뜬금없이 뭔 소리야.”

“우리 할머니가 류지환 너 보고 싶다셨어.”

“나를? 왜?”

“류지환이라는 애가 내 한약 훔쳐 먹는다고 말씀드렸거든.”

“와, 강도우 이 새끼…….”

한방 병원 손자라 한약이라면 지긋지긋하다면서 제 몫의 한약을 친구들한테 뿌릴 땐 언제고. 류지환더러 네 키가 올해 들어 5cm나 더 자란 건 자기가 준 한약의 공이 크다는 강도우는 뻔뻔하기 짝이 없다.

“우리 집은 어때.”

이번에도 두 사람의 쓸모없는 대화를 끊어 내는 건 내 몫이었다. 손에서 샤프를 한 바퀴 굴리며 대답 없는 둘을 쳐다보자 강도우가 제 휴대폰을 반으로 접으며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남고생 셋이 어른 없는 빈집에 모여서 할 일이 뭐 얼마나 있었겠냐만, 진의를 가리는 듯한 둘의 시선이 내 얼굴을 뚫어지게 훑는 것이 조금은 불쾌했다.

“난 반대.”

“나도 반대. 채우수 아버지 무서워.”

그러면서도 은근히 기대감을 내비치는 눈들은 영락없는 열일곱 살의 눈빛을 띠고 있었고. 나 역시도 열일곱의 치기 어린 마음으로 문제집을 덮고 책상 옆에 걸린 가방을 꺼내 들었다.

“가자. 오늘 우리 집에 아무도 없어.”

그렇게 시작된 일탈이었다. 일탈의 축에도 들지 못하는 소소하기 짝이 없는 반항. 비록 그것이 내 죄책감의 여진이 될 줄은, 그 여진이 남은 삶을 송두리째 쥐고 흔들어 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

* * *

키가 자라면 그림자도 길어진다.

어른들의 체스판 위에서 그들이 정한 규칙대로 움직이던 내 존재는 사고 이후로 점점 힘을 잃었다. 내 존재가 사실은 킹도 뭣도 아닌 폰(Pawn) 정도에 불과했다는 걸 비로소 깨달은 탓이다.

사고. 아버지는 그 사건을 단순 사고로 치부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시끄러워지면 안 되니까. 아, 대한민국에서 검사 권력이 그 정도였던가. 모 지자체장은 소방대원에게 관등 성명을 요구했다가 별명까지 생겼다는데. 아버지가 지검장이라는 이름으로 휘두른 공권력은 소방차의 경로를 바꾸었고 그날의 사건 기록까지 말끔히 지웠다.

난 공식적으로 미친 새끼가 되었다. 아버지는 미친 새끼에게 가끔 골프채를, 그것도 안 될 땐 손을 휘둘렀다. 오죽하면 내게 데면데면했던 어머니가 말릴 정도였으니까 말은 다 한 것이다. 어느 집에서 그랬더라, 차라리 몇 달 정신 병원에 입원시키는 게 낫지 않겠냐는 말도 나왔지만 내 생모의 아버지 측에서 기를 쓰고 반대했다. 어디에 있든 갇힌 삶인 건 똑같았을 텐데 그들이 날 살려 보겠다고 애쓰는 것이 내 눈엔 퍽이나 가련해 보였다.

살고 싶어서 한 선택이었지만 그날의 나는 또 한 번 죽었다. 화재로 인한 그을음은 어둠이 짙어진 삶에 딱히 큰 영향도 없어 보였고 모든 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 빠르게 정리됐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높아졌다. 보충 수업도 없는 짧은 방학이 찾아 왔다. 불과 10분 전까지도 같이 웃고 떠들던 내가 그들이 돌아가자마자 집에 불을 지르고 갇혔다는 것에 짐짓 충격을 받았던 강도우와 류지환은 그 사고 이후로 내게 병적으로 집착하며 화장실 가는 것까지 감시했는데, 그때야말로 비로소 그들을 겨우 떼어 놓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연두의 아버지, 한수열이 날 다시 찾은 건 그 무렵이다. 하루 중에서도 유난히 그림자가 짧았던 시간, 사고 후 두 달 만이었다.

첫째 딸은 아빠를 닮는다고 했던가. 한연두 역시 제 아버지를 닮은 게 분명할 정도로 그는 능청스럽게 내게 말을 걸어왔다. 쉬는 날 굳이 일부러 날 찾아왔다는 사람을 외면하지 못해 난 그와 점심을 같이 먹었다.

밥알들이 입에서 모래처럼 겉돌았다. 사고로 맺은 연이었지만 추억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불길 속에서 스스로 갇힌 나를 구출해 준 사람이었고 동시에 이 삶에 다시 갇히게 만든 사람이었다.

한 번의 점심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증식했다. 문자, 전화, 가끔은 저녁까지. 귀찮았다. 내 아버지보다 한연두의 아버지와 얼굴 맞대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는 사고와 관련된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이따금씩 팔목에 남긴 주저흔을 훑는 시선도 느껴졌지만 침묵했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지금의 한연두가 그러하듯이 늘 중구난방이었다.

넌 드라마 보는 거 있냐, 우리 딸은 요즘 이 드라마에 나오는 누굴 좋아하던데, 우수 넌 축구 좋아하냐, 우리 연두는 요즘 축구를 좋아하는데 내 보기엔 축구가 아니라 잘생긴 축구선수에 빠진 것 같다, 우리 딸이 이 아이스크림 맛있다던데 우수 너도 한번 먹어 봐라, 우리 예쁜 연두가, 우리 멋진 딸이…….

나는 아저씨의 입으로 한연두의 얘기를 전해 들었다. 딸이어서 그랬을까. 내가 딸이었으면 나도 뭔가 달라졌을까. 내 부모가 바뀌지 않는 이상 또 다른 지옥이었을 거란 결론 뒤에는 늘 질투가 일었다.

나는 아직도 종종 한연두에게 내 과거를 겹쳐 본다.

얼굴도 제대로 모르던 애를 시기하던 채우수, 세상 모든 불행은 나만 떠안은 줄 알았던 채우수, 비겁하고 한심했던 열일곱의 채우수를.

* * *

자기 연민에 가까운 생각을 떨쳐 내며 미니바에서 맥주를 하나 꺼내 들고 침대로 돌아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도 깨지 않는 걸 보면 한연두는 꽤나 깊은 잠에 빠진 모양이다.

‘진짜라니까요, 형. 우리 누나는 웃으면서 자요.’

웃기는. 나한테는 꼬박꼬박 우리 누나, 우리 누나, 하면서 은근슬쩍 제 누나를 치켜세우기 바쁘던 한태평은 한연두를 닮아 눈치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이게 웃는 거면 태평아, 공포 영화지…….

무심결에 한연두의 휘어진 눈썹 앞머리를 엄지로 툭 건드렸다. 내가 나오는 꿈이라도 꾸는 모양인지 찌푸린 눈썹은 쉬이 풀어질 생각을 않았다. 혹시나 또 깰까 싶어 잠시 굳었던 손가락으로 눈썹을 덧그리듯 쓸었다. 엄지가 지나갈 때마다 서서히 풀리는 눈썹에 마음이 같이 풀린 것도 잠시. 투정 같은 잠꼬대와 함께 한연두의 긴 속눈썹 끝에 매달렸던 눈물이 코를 타고 흘러내리자 추를 매단 마음이 바닥을 향해 가라앉았다.

내가 거기서도 한연두 널 괴롭게 할까.

눈물을 닦아 주려던 손가락을 접었다가 다시 펼쳐서는 한연두의 눈을 가렸다. 내가 만든 어둠이 한연두에게 드리웠다. 얼굴의 반을 덮었던 손으로 이마 위로 쏟아지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손가락에 엉키지도 않고 빠져나가는 머리카락들이 꼭 한연두 같다. 풀리지도 않게 답도 없이 꼬여 버린 건 내 감정뿐이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내가 한연두 옆에 지금처럼 계속 머물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밝혀지면 나는…….

아니, 나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한연두는 다르다.

알게 모르게 내게 의지했다는 한연두의 말이 텅 빈 가슴을 헤집어 놓았다. 애초에 그러려고 그동안 한연두 곁에 있었는데 정작 그 말을 직접 들으니 왜 이리도 마음이 고된지. 내 손으로 만들어 주고자 했던 한연두의 양지는 결국 나로 인해 어두워졌다.

맥주를 들이켜며 다른 손으로 한연두의 눈가를 쓸었다. 손가락 끝에 맺히는 물기가 뜨거웠다.

나는 네가 쓰다, 연두야. 그래서 버겁다 참.

* * *

직장인의 주중 생체 리듬은 어찌나 대단한지 잠자리가 바뀌어도 몸은 기상 시간을 기억한다. 아직 알람이 울리려면 10분 정도는 남았지만 한연두의 숨소리가 지나치게 차분해진 걸 보면 이미 깬 건 분명해 보였다. 자는 척하는 이유야 짐작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만 내가 제 옆에 앉아 있는 한 계속 이러고 있을 게 뻔했다.

“한연두, 그만 일어나지? 너 벌써 깬 거 다 알고 있어.”

“……일어난 지는 얼마 안 됐어요.”

“알아.”

잠긴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목소리를 가다듬던 한연두가 그제야 눈꺼풀을 접어 올렸다. 태블릿에서 조식 메뉴를 넘겨보던 손가락으로 한연두의 코를 툭 건드렸더니 차마 마주치지 못하고 딴 곳만 배회하던 눈동자가 드디어 날 올려다봤다.

“잘 잤어?”

“……네.”

“그럼 됐어.”

“혹시 나 코 골았어요?”

한연두는 지금 겨우 그딴 게 궁금한 모양이다. 밤새 눈물까지 흘려 가며 끙끙대던 걸 보면 악몽이라도 꾸는 것 같았는데 다행히 기억엔 남지 않은 듯하다. 태블릿을 협탁에 올리고는 헤드에 기댔던 등을 떼어 한연두를 보며 옆으로 몸을 돌렸다.

“코는 안 골고 이는 갈던데.”

“……무슨 소리예요. 누가 이를 간다고 그래. 웃기지 마요.”

그런 걸로 저를 놀리냐는 듯 어이없다는 표정에 그냥 어깨를 으쓱거리고 말았다. 저를 향한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슬금슬금 엉덩이를 뒤로 빼며 멀어지는 자신이 더 웃긴 줄도 모르면서.

“몇 시예요? 출근해야 하는데.”

“아직 시간 남았어. 넌 오늘 반차 올려놓을 거야. 천천히 나와.”

“내 반차를 왜 책임님이 마음대로 써요?”

“너 옷은 갈아입어야 할 거 아냐. 뭐, 둘이 자고 왔다고 광고할 거면 같이 출근하고.”

새삼 나와 하룻밤을 보냈다는 게 생각난 모양인지 한연두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하나만 할 것이지. 발칙한 말을 잘도 쏟아 낼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또 부끄러운 척이다.

“사람들은 남들한테 그렇게까지 관심 없어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관심의 척도가 다를 뿐이지.”

“그러니까요. 책임님이면 몰라도……. 내가 어제 무슨 옷을 입었는지, 오늘도 같은 옷을 입었는지 아무도 신경 안 쓸걸요.”

“내가 신경 쓰여.”

아직도 제 존재감을 모르는 한연두다. 입사 때부터 한연두에게 닿는 음흉한 시선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흡연실에서 들려오는 같잖은 음담패설에 질려 버려 담배도 끊고 흡연실마저 없애자고 건의한 사람이 나라는 건 생각도 못 할 것이다.

이미 볼 거 다 본 사이에 뭐가 그리 또 숨길 게 있는지 한연두는 이불을 똘똘 뭉쳐서 몸을 가린 채 뭔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 내 앞이라서 일부러 이러는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며 몰래 흘리는 웃음이 나도 멋쩍다.

“씻고 아침 먹을래? 룸서비스 불러도 되고.”

“괜찮아요. 나 원래 아침은 잘 안 먹어요.”

“군말하지 말고 챙겨 줄 때 먹어.”

모르는 척 건넨 배스 가운을 낚아채는 손이 매섭다. 선녀 날개옷 숨긴 나무꾼이라도 된 기분이다. 침대에 걸터앉은 한연두가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재빠르게 이불을 내리곤 가운을 걸쳤다.

“사육해요? 왜 나만 보면 뭘 자꾸 먹이려고 해.”

“난 한연두 네가 네 입에 뭘 물고 빨고 있을 때가 좋아.”

“무슨……, 그게 무슨 더러운 말이에요?”

“그때가 제일 조용하잖아.”

“너무 감격스럽다 정말.”

정말 날개옷이라도 됐던 걸까. 가운 하나 걸쳤다고 자신감이라도 얻은 건지 한연두의 목소리부터가 달라졌다. 아마도 제 속옷을 찾는 듯 이리저리 바삐 돌려 대는 눈동자가 귀여워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너 인스턴트 죽 같은 것도 이제 그만 먹어. 몸에 안 좋아.”

“맛으로 먹는 거예요. 몸 생각했으면 보약을 먹었지.”

“강도우한테 말해서 한약 한 재 지어 줘?”

“됐어요. 쓴 거 싫어해요.”

침대 주위를 한 바퀴 빙 돌던 한연두가 내가 따로 챙겨 둔 속옷을 발견했다. 먼저 꼬신 사람은 본인인 주제에 입술을 말아 물고는 날 쏘아보는 한연두는 정말이지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이다.

“이제 아침도 챙겨 먹고. 너 아침을 안 먹으니까 오전 내내 집중도 못 하잖아.”

“오전부터 일에 집중하는 사람은 애초에 별로 없어요.”

“앞으로 나랑 있을 땐 아침 먹어 둬.”

“…….”

“왜 말이 없어.”

“……아침에 뭐 얼마나 같이 있을 거라고.”

아무래도 룸서비스를 시키는 게 나을 것 같아서 태블릿을 넘겨보던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시선에 흠칫 놀란 한연두의 귓등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니, 챙겨 주는 건 고맙지만요. 그렇다고 내가 선배랑 이런 식으로 또 아침을 먹을 거란 보장이…….”

“아쉬운가 보네, 너.”

“네. 아무래도. 아니……, 뭐가요?”

등 뒤로 모은 손안에 속옷을 감춘 한연두가 내 말뜻을 뻔히 알면서도 괜히 딴청을 부렸다. 그 덕에 가운 앞섶이 점점 벌어지는 것도 모르면서. 그걸 보는 내 눈이 답도 없이 끈적해지는 줄도 모르면서.

“씻고 와.”

“왜 말을 돌려요?”

“씻고 얘기해.”

날 좇던 얄궂은 시선이 그제야 접혔다. 욕실로 향하는 한연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묵혀 왔던 것을 한바탕 쏟아 냈음에도 여남은 감정이 다시 가지를 뻗쳤다.

아직도 한연두는 모른다. 언제부턴가 한연두가 날 보는 눈이 내가 저를 보던 것과 닮아 가기 시작했다는걸. 우리의 지난밤을 단순한 일탈로 치부하기엔 켜켜이 쌓인 감정이 벌써 두텁다. 몸만 섞은 게 아니라 감정까지 섞어 버린 밤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적어도 한연두 몸에 남은 화상 흉터를 내 눈으로 본 이상은, 결국에는 상처만 입고 끝날 관계였다.

나는 마음만 앞서 섣부른 말을 내뱉었던 입술을 탓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염치도 없이 감히 무엇을 욕심냈던 걸까. 애초에 나는 평범하게 살 수가 없는 사람인데. 남은 생을 후회만 하며 보낸다고 해도 부족한 사람인데. 내 마음 하나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고, 이렇게.

그래, 이쯤에서 나만 정리하면 될 일이다. 기우일지도 모른다. 한연두가 내게 품은 감정도 한낱 호기심에 불과할지도 모르지. 차라리 잘된 것일지도. 퇴사 준비를 서둘러야겠다고 다짐하면서 휴대폰을 찾았다. 조금 전까지 한연두가 누워 있던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휴대폰은 전원을 다시 켜자마자 몇 가지 메시지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한동안 조용하다 싶더니 무슨 일이 또 터진 듯, 본가에서 날 찾는 연락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아버지라는 이름을 띄운 부재중 전화 목록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려나. 대뜸 내 퇴사까지 종용하던 채영환의 목소리가 생각나자 헛웃음이 터졌다.

도대체 내 인생은 어디부터 어디까지 채영환 의원의 손에서 움직여야 하는 것일까. 그때의 채영환만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쯤 이따위 고민을 할 일도 없었을 텐데. 애초에 한수열도, 그의 딸 한연두를 만날 일조차 없었을 텐데.

나는 마른침과 함께 죄책감을 애써 눌러 삼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반지가 있던 손가락이 허전하다. 죄책감처럼 붙들고 있던 한수열의 반지. 빼면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되레 더 신경 쓰이는 것이 꼭 한연두 같다.

곧이어 들리는 샤워기 소리에 머릿속이 착잡해졌다. 한연두의 몸을 타고 흐르는 저 물이 내 죄책감까지 씻겨 주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래, 어쩌면 그냥 나만 입 다물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내 잘못도 아니었다. 그날 있었던 사고도, 그 사고의 어긋난 처리 과정도. 모든 건 욕심 많은 채영환의 손에서 비롯되었던 것을. 더군다나 용서라면 이미 한수열 소방위, 한연두 아버지께 이미 충분히 구하지 않았던가.

“근데 오늘은 진짜 아침 먹기 싫어요!”

“…….”

“억지로 먹으면 체할 것 같아요.”

아침은 진짜 안 되겠는지 씻다 말고 욕실 밖으로 불쑥 외치는 소리에 이 와중에도 쓴웃음이 쓰게 번졌다.

“내 말 들었어요?”

“…….”

“룸서비스 시키지 마요.”

아무래도 안 되겠는 건 지금 한연두의 아침 따위가 아닌 듯하다. 밤새 고민하고 내린 결론은 온데간데없이 지워지고 내뱉지도 못할 말들이 혀끝에 맴돌았다. 이러다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입술을 짓씹었다.

“아, 들었냐고. 거기 없어요?”

한연두. 엉킨 마음은 한연두라는 이름 세 글자도 제대로 내뱉지 못한다.

“진짜 없어요?”

그러나 10년을 참아 온 내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네 이름만큼 온전한 것도 없다.

“채우수!”

그러니까 한연두. 내가 너를 감히, 욕심내도 될까.

왼손을 들어 확인한 시간은 아직 7시 30분. 출근까지는 충분한 시간이다. 나는 수갑 같던 손목시계를 풀어 침대에 던지고는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면서 일어났다. 어차피 내 인생부터가 일탈로 시작된 게 아니던가. 우리가 조금 다른 궤도를 선택하더라도 책임은 내 몫이 될 것이다.

거기 있냐며 날 찾는 목소리를 찾아가는 발걸음이 벌써부터 묵직하게 젖어 들었다.

* * *

“진짜…… 책임님 완전, 완전…… 상종도 못 할 변태인 거 어떻게 숨기고 살았어요?”

“오버하지 마. 누가 들으면 너 묶어 두고 박기라도 한 것 같잖아.”

“세상에, 뭘 박아 세상에!”

저도 좋아할 땐 언제고 날 뒤돌아보는 한연두의 눈이 한껏 커졌다. 어찌나 서둘렀는지 안으로 말린 코트 깃을 빼 주려고 손을 뻗었더니 기겁을 하며 몸을 뒤로 물리고는 멋쩍은지 얼굴을 붉혔다.

“뭐, 그게 내 페티시인 건 맞아.”

“악! 못 들은 걸로 할게요.”

“너도 원하는 거 있으면 말해. 맞춰 줄게.”

출근하려면 서둘러야 하는 사람은 난데 마음이 급한 건 정작 한연두다. 깃을 정리하던 손가락으로 일부러 목덜미를 스쳤더니 바삐 굴리던 눈동자가 내게 멈췄다.

“없어?”

“없어요.”

“진짜 없어?”

“아니…… 잠시만 있어 봐요. 생각 좀 해 보고요. 그런 걸 갑자기 물어보면 어떡해. 뭐야, 먼저 물어봐 놓고 웃긴 왜 웃어요?”

억울하다는 투로 내 팔뚝을 툭 치는 주먹이 제법 맵다. 아, 아픈 척 팔뚝을 감싸 쥐어도 터져 나오는 건 웃음뿐. 한연두도 더 이상은 상대할 여력도 없는지 어이없다며 헛웃음을 내뱉고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발걸음을 빨리 옮겼다.

“한 번만 하자더니 계속할 마음은 생겼나 봐.”

“그거야…… 선배가 적당히 쓸 만했어요.”

“아. 취향이 꽤 고급스러운가 봐, 한연두.”

말간 얼굴에 갖가지 표정이 스쳤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급한 건 언제나 나다. 모르는 척 시선을 먼저 옮기자 좁아졌던 눈도 내게서 벗어났다.

“너 마음에 드는 섹스 하려면 분발해야겠어.”

“조용히 좀 해요. 나랑 잤다고 자랑하고 다녀요?”

“어차피 호텔에 오는 커플들 대부분은 섹스도 하러 오는 건데 무슨 내숭이야.”

“웃겨. 우리가 커플은 아니잖아요.”

“커플이 뭐 별건가. 같이 밥 먹고 같이 자고. 남들 눈엔 우리도 커플이야.”

제대로 보이지도 않건만, 엘리베이터 문에 비치는 제 모습을 보며 미처 다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을 정리하던 한연두의 오른손이 스르르 내려오더니 제 왼손을 감싸 쥐었다.

“우리는 감정이 결여됐으니까요.”

“결여된 건 아니지. 너 나 싫어한다며.”

“그러니까요. 어떤 커플이 싫어하는 감정으로 만나요.”

별안간 공손히 모은 한연두의 두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 모양인지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꾸역꾸역 감추려는 제 감정도 저렇게 티가 나는 줄도 모르고.

“나는 아니니까.”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한 손을 빼내어 한연두의 손등에 겹쳤다. 차가운 손이 놀라 움찔댄다.

“나는 너 안 싫어. 좋아해.”

놀라 달아나려는 손을 잡아채어 손가락을 하나씩 얽었다. 마지못해 힘이 풀린 손에 적당한 온기가 퍼지는 듯하다.

“책임님, 혹시 좋아한다는 감정을 잘 모르는 거 아니에요?”

“내가?”

“그럼 여기 선배 말고 누가 있어요?”

“너.”

깍지 낀 손을 들어 한연두를 가리키자 어이없단 듯 제 손을 노려봤다. 몇 초간 무슨 생각이 오갔을까. 내 손을 비틀어 제 손을 빼낸 한연두는 또 말도 안 되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 틀림없다.

“설마 이거 지금 고백하는 거예요?”

“고백이 아니면.”

“협박 같아요.”

“협박까진 아니고.”

“…….”

“통보.”

알고는 있으라고. 덧붙인 말에 한연두가 눈썹 사이를 좁히며 한 발 더 멀어졌다. 이제는 아예 손잡을 기회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는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이 간식 뺏긴 몰티즈 같다.

“난 선배한테 나 책임지라고 할 생각 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가식적인 감정도 필요 없어요.”

“누가 가식이래.”

“가식이 아니면 누가 좋아한다는 말을 이렇게 해요? 적선하듯이?”

허, 누가 적선을 이런 식으로 한다고. 어렵게 내뱉은 말도 한연두라는 필터를 거치니 적선으로 둔갑했다. 꾸밈없던 내가 잘못일까, 꼬아 듣는 한연두가 문제일까.

“미안해.”

내가 문제겠지.

“뭐야, 미안하긴 뭐가 자꾸 미안해요?”

“너 좋아해서.”

“아 진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좋아한다고 말하지 마요.”

“미안해, 그럼.”

그건 더 하지 마요. 뾰족한 눈초리만큼이나 날 선 목소리도 내게 닿는 순간 무뎌졌다. 내 감정은 벌써 이 정돈데 한연두는 지금 어디까지 온 걸까. 지난 시간들을 베어 낼 수만 있다면 상처는 오롯이 내 몫이어도 기꺼울 것 같다.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사고로 인한 내 죄책감만 모르는 척 숨길 수만 있다면, 10년 넘게 참아 왔던 내 마음을 이렇게나마 보여 줄 수만 있다면.

“오래됐어.”

“뭐가요.”

“너 좋아한 지.”

“…….”

“적선도 아니고 책임감 때문에 이러는 것도 아니야. 내가 그냥 널 좋아해. 그게 다야.”

이번에도 한연두가 말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한연두 마음에 드는 표정은 대체 어떻게 지어야 했나,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먼저 올라탔다.

“안 탈 거야?”

“…….”

“계속 그러고 있을 거면 먼저 내려가고.”

단번에 삼키기엔 버거운 감정이었던 건지 엘리베이터에 탈 생각도 않는 한연두의 팔을 잡아당겼다. 균형을 잃은 한연두가 내게로 쏟아졌다.

“선배가 날 진짜로 좋아한다고 해도 당장 달라지는 건 없어요.”

“알아. 그래도 신경은 쓰이겠지.”

“…….”

“내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릴 거고.”

“이미 충분히 거슬려요.”

“알아.”

“알긴 뭘 맨날 다 알아…….”

슬쩍 감싸 잡은 손으로 한연두의 시선이 떨어졌다. 좀 잡아 줘. 빠져나가려는 손가락 사이로 내 손가락을 얽어 붙들자 가늘어진 눈이 끌려 올라왔다. 잠까지 자 놓고 손 한번 잡는 게 이리도 힘들 일인가. 한연두는 저답지 않게 괜한 데 까탈스럽다.

“나 숨 못 쉴 것 같은데, 연두야.”

“또요? 갑자기요?”

이렇게 하찮은 수작질에도 금방 속아 넘어오는 주제에. 한연두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자 참지 못한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장난인 줄 눈치챈 건지 한연두의 얼굴에 짜증이 번졌다.

“그런 걸로 장난치지 마요. 사람 놀라게.”

“미안해.”

“안 어울리게 미안하단 말도 하지 마요.”

“그래, 그럼…….”

손깍지를 느슨하게 풀었더니 한연두도 머뭇거리며 제 손가락을 펼쳤다. 맞닿은 손바닥이 정전기라도 인 것처럼 따끔거렸다. 펼친 손가락을 스치며 다른 방향으로 깍지를 끼자 한연두도 제 손가락을 접었다. 내 손등을 손톱으로 꾹 누르는 것이 제 딴에는 나름의 반항인가 보다.

“좋아해.”

“하지 말라니까요.”

“미안하단 말보다는 좋아한단 말이 더 낫지 않아?”

“둘 다 하지 마요.”

“그런 건 없어. 하나만 골라.”

“도대체 이런 억지가 어디 있어.”

억지라도 부려 가며 외면하고 싶은 게 있단 걸 한연두는 모른다. 입이 쓰다. 앞으로도 쓴 건 나만 삼키면 될 일이다. 애써 걸어 올린 입꼬리도 한연두의 얼굴을 보면 어느 순간 부드러워져 나조차 어색하다.

“그럼 할 수 없지, 뭐. 내 마음대로 해야지.”

“하지 마요. 뭐든.”

“좋아해.”

“아, 진짜…….”

“그래. 진짜야. 좋아해, 한연두.”

“알겠으니까 그만 말해요.”

앓던 이를 뽑아도 이보다 시원할까. 뽑힌 자리에 피처럼 쏟아 낸 감정은 멎을 생각도 없어 보인다. 붉게 물든 한연두의 얼굴은 부디 핏빛은 아니길. 그저 한연두가 좋아한다는 장밋빛이길. 다시 찾아온 겨울. 길어진 그림자는 또 한 번 비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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