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열역학 제2법칙
자연의 과정들은 대부분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물속에 떨어뜨린 잉크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번져서 물과 구분할 수 없게 되고, 불에 탄 나무는 재가 되고 연기마저도 공중에서 흩어진다. 이처럼 자연계는 질서에서 무질서한 방향으로 흐르며 퇴화하고 붕괴된다.
채우수와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며칠간의 짧았던 들뜬 상태를 지우고 보자면 우리는 겉으로는 예전과 같은 질서를 되찾는 듯했지만 속으로는 자연의 섭리에 충실하여 비가역적인 상태에 도달했다. 한마디로 채우수와 나와의 관계는 다시는 예전으로 돌이킬 수 없는 혼돈, 무질서 상태에 이르게 됐다는 말과 같다.
그날의 채우수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걸 감사해야 할 정도로 날 자극했다. 만약 내게 총이 있었다면 나는 채우수의 머리통을 바로 날려 버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러시아 고위 간부의 딸만 됐더라도 채우수에게 홍차 정도는 보낼 수 있었겠지만, 선량한 소방관의 딸에게 폭력적인 행위는 양심상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얄팍한 자존심을 한 번 더 구기면서 나랑 자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남자에게 왜냐고 되물었고 채우수는 터진 입을 제어하지 못하는 듯 그 뒤로도 몇 가지 황당하기 짝이 없는 말들을 나불거렸다.
‘이제 너 재미 없어졌어.’
허, 누군 뭐 재밌었다고.
‘생각해 봤는데 한연두 너랑 섹스할 정도까진 아닌 것 같아.’
별……. 그 정도라는 것은 대체 어떤 기준으로 정한 건지.
‘그러게 좀 튕기지 그랬어. 네가 그렇게 빨리 넘어올 줄은 몰랐지.’
“이런 미친 새끼가…….”
“누구한테 하는 말이에요?”
젓가락으로 식판을 내리치자 마주 보고 앉은 주재희 선임이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설마 저를 보고 그러냐는 듯 눈동자를 사시나무처럼 떠는 꼴이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냥……. 요즘 쓰레기들이 너무 많잖아요. 뉴스에도 많이 나오고.”
“어휴 그렇게 스트레스 받으면서까지 뉴스 왜 봐요. 한 선임님 요즘 하루에 한 번씩은 욕하는 거 알아요?”
“욕으로 끝나는 게 다행이네요.”
숟가락으로 채우수 머리라도 때리고 나올 걸 그랬나. 늘 그렇게 후회는 뒤늦게 찾아온다. 채우수의 집에서 수제비를 먹은 지도 벌써 2주 가까이 지났다. 다시 말하자면 2주 가까이 채우수와 냉전 상태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 냉전이라는 것이 전적으로 내게만 해당되는 것인 양 채우수는 멀쩡한 꼴로 돌아다니는 것이 여간 속이 뒤틀리는 일이 아니었다.
“근데 한 선임님 소개팅도 거절하더니, 요즘 연애해요?”
“내가요? 갑자기요?”
“분위기가 좀 달라졌는데.”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그렇잖아도 작은 눈을 한껏 좁히면서 내 얼굴을 훑는 주재희의 시선이 마뜩잖다.
“연애는 무슨. 주위에 연애할 남자라곤 씨가 말랐는데요.”
“그러게 내가 소개팅 잡아 준다고 했잖아요. 다시 잡아 봐요?”
“됐어요.”
“왜, 그러지 말고 말 나온 김에 해 봐요. 내가 찾아볼게.”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주재희의 웃음에 빈정이 상한 것도 같다. 먹은 게 얹히기라도 한 듯 속이 답답해져서 수저를 내려놓자 다 먹었냐는 시선을 보내던 주재희가 내 식판에서 메추리알 반찬을 하나 가져갔다.
“주 선임님, 나 남자 얼굴 엄청 보는 거 알죠.”
“알지. 한 선임님은 남자 얼굴만 보잖아요.”
“나는 끼리끼리라는 말을 종교처럼 믿어요.”
주재희 선임 주위에 있는 남자들은 안 봐도 그만이라는 얘기가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입술을 꾹 눌러 삼켰다. 내가 남긴 반찬을 거리낌 없이 먹어 대는 주재희를 보니 어쩐지 비위가 상하는 건 도리어 나다.
“솔직히 말해서 저번에 소개팅해 주려던 사람은 좀 별로긴 했어. 책임님도 그때 옆에서 뭐라고 하더라고. 마침 내 친구 중에 급매물 있는데 이제 곧 크리스마스고 하니까 외로운 영혼들끼리 만나 보는 건 어때요.”
연애해요, 연두해요. 주재희가 모 식품 회사 광고 노래를 개사해서 불러 대자 옆 테이블의 시선이 짧게 모였다가 흩어졌다. 채우수는 참 불쌍하기도 하지. 이렇게 눈치 없는 직원들을 둘이나 거느리고 일해야 하다니.
“한 선임님, 남자 키는 잘 안 보죠?”
“왜 안 봐요. 난 188 밑으로는 안 사귀는데.”
“와, 욕심이 지나치시네. 우리 회사에, 아니 대한민국에 188 넘는 남자가 얼마나 된다고 그래요.”
“더러 있어요.”
“아, 채 책임님은 190도 넘으시던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볼 안쪽을 짓씹었다. 다행히도 잔반 처리에 여념 없는 주재희는 어색한 내 행동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근데 한 선임님 눈에도 요즘 책임님 얼굴 별로지 않아요?”
“글쎄요. 요새 얼굴 볼 일이 통 없어서요.”
“엥, 오늘 오전에 미팅했잖아요?”
“……뭐 그렇게까지 관심 갖고 쳐다보진 않아서.”
“한 선임님도 나중에 봐 봐요. 책임님 요즘 부쩍 초췌하다니까?”
그런가……. 그날 이후로 의식적으로 날 멀리하는 듯한 채우수에게 나도 딱히 별 관심을 주진 않았다. 피해 다니는 건 내 주특기였으니 눈에 뻔히 보이는 채우수 행동이 마음에 안 들었을 뿐.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 지내는 줄 알았는데 남들 눈에 초췌하다니 괜스레 또 걱정이 앞섰다. 그러고 보니 살이 조금 빠진 것도 같고. 어디 또 아프기라도 한 건가……. 주제넘은 오지랖이 자존심도 없이 휘날렸다.
“아무튼 어른들 하는 말 다 틀린 게 없어요. 남자 인물 아무리 좋아 봤자 서른 넘으면 다 똑같은 아저씨야. 책임님이나 나나 똑같지 뭐. 안 그래요?”
“전혀 안 그래요.”
대체 남자들의 이 자신감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채우수가 몇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도 주재희보다는 나을 거라는 말이 입술 끝에서 맴돌았다.
“뭐야, 한 선임님도 책임님 좋아해요?”
“세상에, 내가 왜요.”
“그게 아니면 동문이라고 감싸 주는 건가.”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는걸요.”
과연 채우수와 나 사이를 친하다고 정의 내릴 수가 있을까. 한때는 분명 친하다면 친한 범주에 있던 사람이었지만 뚝뚝 끊겨 버린 우리의 관계는 지금은 어떤 선 위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니, 내가 그 생각을 왜 못 했지? 이참에 둘이 잘해 보는 건 어때요. 책임님도 솔로잖아요?”
“싫어요! 책임님은, 책임님은 죽어도 싫어요.”
“왜, 책임님 좋아하는 직원들 은근 많던데.”
주재희의 말에 잊고 있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워크숍 때 채우수에게 꽂히던 지나친 관심들과 밸런타인데이라고 어디서 받았다며 채우수가 고스란히 팀에 나누어 주던 초콜릿들을 비롯해서 아니, 그땐 그런 미친 짓을 왜 회사 사람에게 하냐고 비웃었지만 은연중에 무시했던 그 모든 행위들은 결국 채우수가 인기 많다는 방증이었다. 그것들이 이제야 신경 쓰인다는 것은 역시 채우수가 게이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한 선임님, 내 말 듣고 있어요?”
“네?”
“한 선임님 눈에는 채 책임님 별로냐고요.”
“아, 그냥 사람이 좀…… 재수가 없잖아요. 정도 없고.”
“채 책임님이요?”
흠, 그런가. 입꼬리를 아래로 내리면서 생각을 되짚는 주재희는 내 말에는 크게 공감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하긴. 정이 없긴 하지. 책임님 퇴사 얘기도 우리한테 안 했잖아요.”
“잠깐만요. 채우수가, 아니 책임님이 회사 그만둔대요?”
“이럴 줄 알았어. 한 선임님도 처음 들었죠?”
“누구한테 들었어요 그 얘기?”
“데이시프트 팀에서 그러던데요.”
세상에, 별꼴이야. 갑자기 무슨 퇴사를 해. 설마 내가 보기 싫다고 퇴사까지 하는 거야 뭐야. 허, 웃기지도 않은 소리에 얼굴 근육이 딱딱하게 굳었다.
“책임님 지금 어디래요?”
“나야 모르죠. 아까 라인 들어간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나는 잔반 처리를 마친 주재희에게 식판 정리까지 떠넘기고는 식당을 빠져나왔다. 와, 채우수는 도대체 뭔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기가 차서 흘려보내는 웃음이 찬 바람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채우수는 정말이지 신경을 안 쓰려고 해도 안 쓸 수가 없는 인간이었다.
* * *
라인에 들어갔다던 채우수는 물론이고 실험실로 간 주재희까지 자리를 비운 오후 시간대의 사무실은 조금 한산한 편이었다. 누군가가 멀리서 펜을 똑딱이는 소리가 이따금씩 머리를 어지럽게 한 것만 빼고는 오히려 차분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내게는 다행이었다.
당장이라도 채우수에게 달려가 따져 묻고 싶던 마음은 생각을 거듭할수록 조금씩 흐려졌다. 어디까지나 내가 채우수의 퇴사 이슈를 따져 물을 수 있는지 당위성이 부족했던 탓이었는데, 그 당위성의 견고함에 따라 말싸움의 승패가 좌우될 게 뻔할 노릇이니 나로선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책임님! 얘기 좀 해요.”
“보고할 거 있으면 내일 하세요.”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이 내게 얼마나 설레고 긴장되는 시간이었느냐 이 말이다. 나는 채우수가 퇴근하기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눈치를 살피다가 그가 일어나자마자 곧장 뒤따라 일어섰고, 날 따돌리려는 발걸음을 겨우 따라잡으며 그가 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아니, 일 얘기 말고 선배랑 나…….”
“회사야. 조용히 해.”
“아, 무슨 상관이야. 그냥 우리 얘기 좀 하자구요.”
간만에 나누는 사적인 대화에 어딘가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나던 반가움은 채우수의 뾰족한 표정에 찔려 터져 버렸다.
“너랑 할 말 없어.”
“내가 있어요. 그…… 퇴사한다는 얘기는 뭐예요?”
“누가 그래?”
“직원들 사이에 소문 다 났던데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아주 근거 없는 헛소문은 아닌 모양이다.
“왜 갑자기 그만둬요?”
“내 일이야. 네가 알 거 없어.”
“혹시 나 때문이에요?”
“…….”
“내 얼굴 보는 게 그 정도로 불편해서?”
정곡을 찔린 듯한 표정이다. 이제는 불편한 기색도 감출 생각이 없는지 내 얼굴을 싸리 빗자루 쓸 듯 지나가는 채우수의 시선은 노엽기까지 하다.
“그래. 그런 이유도 없지 않아 있어.”
“도대체 왜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네가 잘못했다고 한 적은 없어.”
어느새 주차장으로 도착한 발걸음 소리가 스키드 마크라도 만들 것처럼 빨라졌다. 채우수는 뻔히 아는 길을 물어보는 도쟁이라도 떼어 내듯 긴 다리를 성큼성큼 움직여 제 차로 향했고, 나는 그가 만든 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잰걸음으로 그를 뒤따랐다.
“말만 그러면 뭐 해. 요즘 책임님 하는 거 보면 내가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굴잖아요. 꼴도 보기 싫다는 것처럼 도망이나 다니고.”
나는 채우수의 코트 소맷자락을 꽉 붙들었다가 주위를 의식하는 듯한 그의 시선에 덩달아 눈동자를 굴렸다. 맥없이 힘이 풀린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그의 코트 소매가 꼭 내 마음같이 구겨졌다.
“혹시 내 몸에 화상 흉터 있다고 미리 말 안 해 줘서 그래요?”
“그런 거 아니야.”
“자기 전에 미리 말 안 한 게 내 잘못이라면 사과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아니라니까?”
“미안해요. 그런 걸로 놀라게 했다면.”
진심이었기에 딱히 자존심을 굽힐 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기분이 더러워지는 것은 날 쳐다보는 채우수의 표정 때문이었을까. 채우수는 욕지거리를 참아 내는 듯 턱 근육을 움찔거리고는 운전석 문을 열며 내게 짜증 난다는 시선을 던졌다.
“참 여러모로 쉬워서 좋겠네, 한연두 너는.”
“……내가 뭐가 쉬워요?”
하지만 내가 아무리 자존심이 없대도 쉽다는 말에 반응하지 않을 만큼은 아니었다. 그를 따라 조수석에 오르자 안전벨트를 하던 채우수의 손이 멈칫했다.
“너 타도 된다는 말은 안 했는데.”
“말해 봐요. 내가 뭐가 쉽냐고.”
하아, 길게 내뱉는 한숨이 쓰다. 보조개 같은 건 언제 보였나 싶을 정도로 메마른 입매에 웃음기라고는 없이 건조하기만 하다.
“네 모든 행동이 짜증 나게 쉬워. 이렇게 남의 차에 막 타는 것부터 시작해서.”
“말 돌리지 말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똑바로 말해요.”
“……벨트나 해.”
어긋나는 시선에 속이 부대끼는 듯 울렁거렸다. 남의 속도 모르고 주차장을 거칠게 빠져나가는 차는 차주의 괴팍하기 짝이 없는 성격을 반영하기라도 한 모양이다.
“웃겨. 쉽긴 뭐가 쉬워. 내가 쉬운 게 아니라 선배가 위선 떠니까 혼자 어렵고 복잡한 거예요.”
“…….”
“솔직하게 말하면 그거 아니에요? 계기야 어떻든 나랑 자고 싶어서 며칠 동안 수작 부렸는데 막상 벗겨 놓으니 상태가 안 좋아.”
“한연두.”
“섹스할 마음도 이제 없어졌어. 근데 계속 얼굴 마주치자니 불편해. 이 간단한 마음을 포장하려니까 자꾸 복잡해지는 거잖아요.”
“넘겨짚지 마. 네가 뭘 안다고 떠들어.”
내가 알아야 할 게 대체 뭐야. 내 왼쪽 뺨을 뚫어 버릴 듯한 눈빛이 뒤에서 울리는 클랙슨 소리에 전방으로 향했다.
“선배가 날 두고 그렇게 생각했대도 놀랄 것도 없어요, 나는. 애초에 선배한테 뭘 기대한 적도 없고.”
“…….”
“내가 선배랑 잘 뻔했다고 선배에 대한 내 감정이 바뀐 게 아니란 말이에요. 난 여전히 선배가 재수 없고 싫으니까.”
“잘됐네. 내가 싫은 이유 하나 더 늘어서.”
누구 것인지 모를 헛웃음이 쓸쓸히 흩어졌다. 생각해 보면 채우수는 내가 저를 싫어한다는 걸 은근히 즐기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선배랑 이런 식으로 답답한 사이가 되긴 싫어요.”
“…….”
“책임님이 자꾸 나 피해 다니는 것도 꼴 보기 싫구요.”
“…….”
“아니, 그렇다고 퇴사까지 할 일은 아니잖아요. 뭐가 그렇게 극단적이야…….”
차창 밖으로 크리스마스트리 조명에 팔렸던 눈길을 정리하며 운전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보던 트리 조명이 채우수의 눈동자에 그대로 녹아든 것도 같다. 순간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린 듯 갈피를 잃은 시선이 바뀐 신호를 가리키며 제자리를 잡았다.
“그래요. 뭐 퇴사할 수도 있지. 선배 인생이니까. 근데 그런 거 다 떠나서 나는 선배가 혼자만 다시 원점을 찾았다는 게 너무 불쾌해요.”
“무슨 원점을 찾아, 내가?”
“그렇잖아요. 날 막 갖고 놀면서 정신 빼놓을 땐 언제고 이렇게 혼자만 멀쩡하…… 근데 어디 아픈 건 아니죠? 안색이 진짜 왜 그래.”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그래서 한연두 네가 지금 원하는 게 뭔데.”
에둘러 말했지만 본질은 결국 간단했다. 채우수와 내가 같은 원점을 밟을 수 있게끔 만드는 단 한 가지의 방법.
“그…… 그, 한 번만 해요.”
“뭘 해.”
“선배가 내 흉터 때문에 마음 식은 게 아니라면 깔끔하게 한 번만 자고 끝내자구요. 선배가 하기 싫든 말든 내가 하고 싶으니까. 이왕 깐 거 끝은 봐야겠으니까.”
한연두 너는 자존심도 없냐는 말이 굳이 입 밖으로 소리 내지 않아도 온몸으로 전달됐다. 애초에 습자지처럼 얇디얇았던 것이 내 자존심인데 또 한 번 구겨져도 뭐 어떨까. 어차피 우리 관계의 변형은 내 손짓 한 번에 시작됐거늘. 완벽하게 돌이킬 수 없다면 뭐라도 제대로 된 결괏값을 구해야 한다. 나는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채우수를 쳐다보며 가볍게 웃었다. 정작 제대로 구겨진 건 내 자존심이 아니라 채우수의 얼굴인 것에 더 기뻐하면서.
* * *
내 말에 얼굴을 한껏 구기던 채우수는 밥부터 먹자며 근처 백반집에 차를 댔고 우리는 별다른 대화 없이 저녁을 먹었다. 카운터에서 누가 계산하느니 하는 실랑이를 벌였다가 채우수는 백반집 주인아주머니로부터 잘생긴 총각이 어디서 여자 친구 카드나 꺼내게 하냐며 꾸지람을 들었고, 여기에 다소 빈정이 상한 듯한 채우수는 근처 호텔로 차를 몰아서는 남는 것 중에 제일 좋은 객실로 달라는 패기를 부리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호사스러운 하룻밤을 원한 건 아니었으나 우리는 그렇게 호텔 방 안에 들어왔다. 호기롭게 자자고 말을 던진 건 나였다지만 막상 섹스만을 위해 들어선 공간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고 채우수는 그런 날 비웃는 듯 먼저 씻고 오겠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오기에서 비롯한 말이 만들어 낸 즉흥적인 밤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았다. 채우수는 물기를 제대로 닦지도 않은 몸에 배스 가운을 걸친 상태로 호텔 방 한구석에 굳어 있는 내 등을 떠밀었고,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욕실에 마지못해 들어간 나는 샤워 후 배스 가운을 걸치는 순간까지도 얼떨떨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아직 도망 안 갔네요?”
“도망가길 바란 거라면 지금이라도 모른 척 가 주고.”
“그럴 거면 호텔에 같이 오지도 않았어요.”
얇게나마 남아 있던 걸 접고 접어 두께를 늘린 자존심은 적당량의 용기로 치환되었다. 비록 그 용기 낸 움직임이 침대에 기대앉아 날 차갑게 응시하는 채우수의 시선에 무너져 버리긴 했지만.
“해 봐, 이제.”
“……뭘 해요.”
“네가 하고 싶은 거 먼저 해 보라고.”
채우수가 가까이 오라는 듯 턱짓했다. 등줄기로 닦이지 않은 물이 흘러내렸다. 오후 내내 고민한 결과물치고는 성급하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이제야 몰려들었다.
“내가 벗겨 줘? 아님 내가 먼저 벗을까?”
“아, 아직 벗지 마요!”
“너 좋을 대로 해. 가만히 있어 줄게.”
내 얼굴을 담은 무심한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나는 채우수의 허벅지에 걸터앉았다. 내 움직임에 맞춰 살짝 흔들리던 그의 눈이 이내 재밌다는 듯 꼬리를 휘었다. 그와 맞닿을 듯한 아랫배가 벌써부터 단단하게 뭉치는 기분이다.
“뭐부터 할 건데.”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에 눈꺼풀이 떨렸다. 키스? 끝을 올린 두 음절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그의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까짓거 뭐. 더한 것도 할 건데 키스가 뭐가 어려워. 처음도 아닌데. 숨을 들이마시며 채우수에게 다가갔다.
채우수의 이마를 반쯤 가린 흑갈색 머리카락이 여전히 촉촉했다. 기분 탓일까. 그의 눈도 물기를 머금은 것만 같다. 반듯한 코를 지나 입술에 두었던 시선을 끌어 올리자 내 입술을 훑던 채우수의 시선도 덩달아 따라왔다.
“한연두, 안 하고 뭐 해.”
“있어 봐요…….”
“왜. 막상 하려니까 자존심 상해?”
“약간은 그래요.”
그제야 채우수의 표정이 느른하게 풀렸다. 자존심 탓인지 뭔지 입술을 짓씹자 채우수가 제 뒷머리를 받치던 손을 빼내어 내 입술을 꾹 눌렀다.
“한연두, 너는 문제 접근 방법부터가 틀려먹었어.”
“내가 뭘요.”
“이런 식으로 한번 자고 나면 뭐가 남아, 너한테.”
“……추억 정도는 남겠죠, 뭐. 좋든 싫든.”
허, 코끝을 간지럽히던 웃음소리가 맥이 빠진 채로 빙글빙글 맴돌았다.
“넌 내가 싫다면서 이러고 싶은 이유가 뭐야.”
“……그러는 선배는 나랑 하기 싫다면서 왜 이러는 건데요.”
아까부터 무언가가 찌르는 듯한 엉덩이를 들썩이며 시선을 밑으로 내리자 채우수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어쩐지 목까지 붉게 물들어 간 얼굴을 보니 저도 아주 감정 없는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본능이지, 나는.”
“나도 마찬가지예요. 본능적으로 선배랑 한번 자 보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말이나 못 하면.”
“대체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거예요.”
“키스 하나 제대로 못 하겠으면 그냥 내려가.”
또 발뺌이지. 그놈의 본능에 제대로 농락당해 보라지. 그의 허벅지에 앉아 엉덩이를 슬쩍 움직이자 채우수의 눈썹이 뒤틀렸다. 배스 가운 밑으로도 느껴지는 그의 것은 굳이 보지 않아도 어떤 상태인지 알 것 같다.
“어디까지가 진심이에요?”
“뭐가.”
“나랑 진짜 하기 싫은 거 맞아요?”
“무슨 답을 듣고 싶은 거야.”
모르겠다. 재미가 없어졌니, 쉽니 하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채우수에게서 들을 말이 또 남아 있을까. 그렇다고 그저 본능에 충실해서 이렇게까지 세우고 있단 말은 또 듣기 싫었다.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
“내가 자존심은 없지만 자존감은 꽤 높은 편인데 선배가 했던 말 때문에 요즘 잠이 안 와요.”
“넌 남자들한테서 네 자존감을 채우나 봐.”
“그런 말이 아니잖……. 도대체 왜 말을 그따위로 해요?”
“글쎄, 너 정떨어지라고?”
정말이지 떨어질 정이라도 남아 있었으면. 채우수의 어깨를 짚었던 손을 말아쥐고는 그의 가슴팍을 두어 대 때려 봤지만 짜증의 강도에 비해 내리치는 소리가 부드러워 괜한 성질만 돋울 뿐이다.
“그만 때리고 누워.”
“됐어요. 나도 선배랑 하기 싫어요 이제.”
“알아. 너 안 건드려. 건드릴 생각도 없었고.”
퍽이나……. 그를 향했던 가는눈에 돌연 천장이 비쳤다. 안 건드리겠단 말에 이건 해당되지 않는 건지, 채우수가 내 허리를 잡아 침대에 바로 눕힌 탓이다. 한 번만 자고 끝내자던 패기는 어디로 도망갔을까. 혹시나 가슴이 보일까 배스 가운 앞섶을 한 손으로 여몄다.
“누워. 잠이나 자고 가. 그냥 나가면 돈 아깝잖아.”
“그럼 선배가 자고 가면 되겠네.”
“괜한 데서 자존심 세우지 말고 누워. 너 제대로 재우려고 여기 온 거니까.”
웃겨. 뭐가 이래……. 그는 정말로 날 재우는 데 목적이 있다는 듯 침대 밖으로 빠져나온 내 다리를 집어넣고는 꾸물거리며 일어나려는 내 몸을 꾹 눌렀다. 의지와는 다르게 폭신한 시트 속에 파묻힌 몸은 어쩐지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 것도 같았다. 나는 고개만 돌린 채로 멀어지는 채우수의 뒷모습에 대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선배보다 하루라도 더 오래 살 거예요. 선배 죽는 날 파티 좀 하게.”
“고마워. 난 한연두 네가 날 죽도록 싫어하고 경멸했으면 좋겠어.”
등을 돌려 은은한 조명 밑에서 옅은 웃음을 보이던 남자는 제가 품은 감정을 굳이 구부려서는 뾰족하게 날을 세워 날렸다. 그러고는,
“앞으로도 계속 나 좋아하지 마.”
90년대 드라마 주인공 같은 대사나 치고 있다. 웃기지도 않지, 정말.
“별걱정을 다 해요.”
가당치도 않다는 웃음을 고이 받아 내던 채우수는 이제 볼일이 끝났다는 듯 벗어 놓은 옷가지들을 하나씩 꺼내어 입기 시작했다.
“뭐야……. 어디 가요?”
“집에 가야지 나는.”
“나 혼자 여기 두고?”
“왜. 너 혼자서는 잠도 제대로 못 자?”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채우수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차마 무섭다는 솔직한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혀끝에서 흩어졌다.
“돈 아까우면 선배가 자고 가요. 내가 집에 갈게.”
“됐어.”
“아님 나 잠들 때까지는 있어 줘요. 무섭단 말이야.”
배스 가운 밑으로 바지를 입은 채우수가 하아, 긴 한숨과 함께 침대 옆자리로 와서 누웠다. 그래도 혼자 있기 무섭다는 여자의 말을 거절할 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의 향수 냄새가 코끝에 훅 스며들었다. 나는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감추면서 그에게 말했다.
“안 건드리겠단 말은 지켜요.”
“너 이제 와서 태세 전환하는 건 웃기지 않아?”
“……내가 뭘.”
피식대는 웃음이 언제 말랐는지 물기를 날려 버린 채우수의 머리카락처럼 퍼석퍼석하다. 옆으로 마주 보고 누운 채우수의 얼굴에 간접 조명이 만든 그늘이 짙어졌다.
“등은 돌려주면 안 돼요?”
“왜.”
“선배 얼굴 보고 자는 거 부담스러워요.”
“…….”
“난 원래 이쪽 방향으로 누워서 자거든요.”
“나도 그래.”
하여간 고집은. 별수 없다 싶어 내가 등을 돌렸다. 기분 탓인지 목 뒤로 그의 시선이 닿는 것 같아 따끔따끔했다.
“근데 진짜 퇴사하는 거 맞아요?”
“아직 결정된 건 없어.”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이건 그냥 팀원으로서 얘기하는 건데……. 선배 퇴사 안 하면 안 돼요?”
“…….”
“아니, 책임님 나가고 나면 우리 팀 어떡해요.”
“나 하나 없다고 회사 안 망해.”
“그래도…….”
“신경 쓰지 말고 자. 나 없어도 너 일하는 데엔 지장 없어.”
그걸 해 보지도 않고 자기가 어떻게 알아. 정작 쉬운 사람은 내가 아니라 채우수인지도 모른다. 뭐가 그렇게 맺고 끊음이 간단한지. 마지막 연습장을 찢어 버린 것 같은 내 감정이 찌릿하게 퍼져 나갔다.
“아, 한태평한테 집에 안 들어간다고 연락해야 하는데.”
“걱정 마. 내가 아까 너 씻을 때 연락해 뒀어.”
웃기지도 않아. 누가 그런 것까지 신경 써 달랬나. 다시 등을 반대로 돌리자 채우수가 한 뼘은 더 가까이 다가온 기분이다. 순간 놀라 뱉지도 못할 말들이 입 속에서 쌓여 입술만 불룩하게 튀어나왔다.
“자.”
채우수가 저를 쳐다보는 눈을 큰 손으로 덮었다. 코까지 덮여 깜깜해진 시야에 얼룩덜룩한 빛이 모여들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손바닥에 닿는 속눈썹이 간지러운 듯 그가 내 눈에서 손을 뗐다.
“눈 감고 어서 자.”
“왜 갑자기 다정한 척 굴어요.”
“척이 아니라 다정한 거야.”
“나한테는 안 그랬어요 원래.”
“너한테는 원래부터 그랬어. 네가 눈치가 없어서 몰랐겠지.”
뻔뻔하기도 해라.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잘도 해 댄다.
“웃겨. 아무튼 자꾸 잘해 주는 척하지 마요. 오해할까 봐 겁나요.”
“무슨 오해를 어떻게 하는데.”
“……선배가 한태평이나 나한테 자꾸 필요 이상으로 잘해 주는 게 혹시나 다른 마음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오해요.”
“다른 마음?”
“뭐, 태평이를 좋아한다거나…… 아니면 날 좋아하기라도 한다거나.”
옆으로 누운 채우수의 얼굴에 보조개가 달처럼 걸렸다. 조명이 비친 눈이 반짝거리는 것이 이름값을 하는 듯 제법 우수에 찬 눈망울이다.
“지금 속으로 비웃었죠.”
“그냥 웃었어.”
“비웃은 거 맞네.”
어서 자. 짧게 내뱉는 말에 진심인 듯 아닌 듯한 웃음기가 서려 있다. 긴장이 풀리기라도 했는지 어느새 노곤해진 눈꺼풀을 천천히 내렸다가 접어 올리자 아직까지도 미미하게 휘어진 채우수의 눈이 물음표를 띄웠다.
“선배, 나 잠들면 진짜 갈 거예요?”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반반이에요. 나 자는 동안 선배가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는 거니까.”
어쭈, 채우수가 타박하듯 미간을 좁혔다. 그를 보던 내 얼굴도 만만치 않았던지 내 눈썹 사이를 톡톡 두드리던 그의 엄지가 내 오른쪽 눈썹을 두어 번 쓸었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어서 자. 너 요새 못 잤잖아.”
“어떻게 알아요, 그걸?”
“네가 아까 말했어. 잠도 제대로 안 온다고.”
“아아.”
잠자리가 바뀐 탓인지 쉬이 잠들 것 같지는 않은 밤. 내 잠을 재촉하기만 하는 채우수의 속셈을 내가 온전히 받아들여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그의 손바닥에 뺨을 맡긴 채로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진짜 잠만 잘 줄은 몰랐어요.”
“처음부터 잠만 자려고 온 거야. 애초에 콘돔도 없었고.”
“뭐야, 진짜…….”
“그만 쫑알거리고 잠이나 자.”
먼저 눈을 감은 채우수의 얼굴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쌓였다. 어찌 된 것이 10년 넘도록 매일같이 보던 얼굴이 왜 요즘따라 초면처럼 느껴지는 건지. 균형이 깨진 관계의 틈을 무언가가 자꾸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는 기분이다.
“잠이 안 와?”
그의 말에 벌어진 앞섶 사이로 그의 가슴팍까지 훑던 시선이 급히 제자리를 찾았다. 불순한 시선을 모른 척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채우수가 팔을 뻗어 내 등을 토닥거렸다.
“애도 아니고, 내가 너 잠까지 재워 줘야 해?”
“나도 뭐 이런 것까지 바란 건 아니네요.”
“자장가라도 불러 줘?”
시키지도 않은 짓을 제가 감히 해 주겠다며 나중엔 모조리 비용 청구라도 할 것 같은 저 행동들은 정말이지 참으로 다정하기도 하다.
“무슨. 선배 목소리는 좋지만 솔직히 노래는 진짜 못해요.”
“반쪽짜리 칭찬 아주 고마워.”
“선배 노래 들으면 오던 잠도 다 도망갈 거예요.”
“그래, 고맙다.”
“…….”
“뭘 그렇게 봐.”
“나는 채우수 진짜 모습이 뭔지 모르겠어요.”
당장이라도 내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채우수랑 그 정도까진 아닌 채우수. 그리고 지금 같을 땐 오히려……. 어디에서 시작된 건지 모를 파동에 눈동자가 빙빙 굴러가던 것도 잠시. 나는 그의 손목시계로부터 천천히 시선을 끌어 올려 날 지그시 내려다보는 그와 마주했다.
“자꾸 헷갈리게 하지 마요.”
“……뭘.”
“내가 선배를 어느 정도로 싫어해야 할지 헷갈리니까 노선을 제대로 잡으라구요.”
“넌 어떤 모습이 진짜였으면 좋겠는데.”
“뭐 지금 같은 정도면……. 적당히 싫어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고.”
설익은 웃음이 쓰다. 채우수가 등을 토닥이던 손으로 내 목뒤를 감싸더니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꼼짝없이 그의 품속에 안긴 꼴이지만 썩 괜찮은 안정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래. 너는 나 좋아하지 마, 연두야.”
“안 좋아해요. 싫어한다니까요.”
내 정수리를 꾸욱 눌러 대는 그의 턱 끝이 잘게 떨렸다. 그 진동 탓일까, 주제도 모르고 같이 쿵쿵대는 심장이 야속하다. 더운 숨이 닿을까 입술을 말아 물고 그를 올려다보자 느른하게 풀린 눈이 반쯤 접혔다.
“안 건드린다고 하지 않았어요?”
“너 재우려는 거잖아.”
순 개수작이야. 치켜든 턱을 내리고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뭣 때문인지 붉어진 얼굴을 이렇게나마 가릴 수 있다는 건 다행인지도 모른다.
“자고 가요. 도망가지 말고.”
“…….”
“응?”
“그래, 그럴게.”
“나보다 먼저 잠들지도 말구요.”
“여태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어.”
시답잖은 허세에 터진 숨이 꽉 조여 오는 그의 품속에서 제대로 흩어지지도 못하고 눅눅하게 데워지자 숨이 점점 가빠 왔다.
“갑갑해요.”
“난 한연두 너만 보면 갑갑해.”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있는 사람이 뭐가 갑갑해요.”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한다고 누가 그래.”
“지금도 그렇잖아요. 나 안 건드린다는 사람 어디 갔나 몰라.”
“내 마음대로 다 했으면 여기 들어오자마자 너 벌거벗겼어.”
웬일이야. 남사스러운 말들에 맥박이 수치도 모르고 각기춤을 췄다. 도대체가 어떤 얼굴이 진짜인지. 어찌 된 게 채우수는 갈수록 헷갈리게 굴고 있다.
“웃겨……. 이제 나 재미없다면서요. 나랑 안 하고 싶다면서요.”
“선의의 거짓말이지.”
“누굴 위한 선의예요 그게.”
“너.”
흐응, 정말 말이나 못 하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자 맞닿은 가슴팍이 크게 널을 뛰는 듯하다.
“참 복잡하게도 살아요. 선배처럼 사느니 나처럼 쉽게 사는 게 나아.”
“시답잖은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자. 네가 자야 나도 자.”
뒤통수를 감쌌던 손이 목뒤를 어루만지듯 쓸었다. 차가운 감각에 어깨를 옹송그리자 덩달아 움찔했던 그의 손가락이 달래듯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제법 다정한 손길에 탄성을 잃고 헤매는 건 내 시선일까, 아니면 내 마음일까. 갈피를 잃은 생각들이 할 말을 겨우 찾았다.
“선배 퇴사하면 이사도 갈 거예요?”
“아직 몰라.”
“이사 가더라도 천천히 가면 안 돼요?”
“내가 이사 가는 게 너랑 뭔 상관이야.”
“아니, 매일 보던 사람 안 보이면 괜히 그렇잖아요. 회사에도 없는데 동네에서까지 안 보이면 좀 서운할 것 같아요.”
슬쩍 고개를 들어 확인한 채우수의 얼굴이 냉동실에서 발견한 정체 모를 음식처럼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한연두, 너나 노선 제대로 정해. 너 나 싫다며.”
“싫어요. 싫은데……. 그래도 선배가 옆에 있어서 마음은 편했단 말이에요. 선배가 회사에선 알은척하는 거 싫어하길래 나도 모르는 척은 했지만.”
“…….”
“책임님 팀에 발령받았을 때도 내심 얼마나 반가웠는데. 아는 얼굴 하나 있다고.”
“…….”
“솔직히 선배 없는 생활 적응 안 될 것 같아요. 막상 이제 선배 없다고 생각하니까 나도 마음이 이상해.”
“…….”
“나도 모르게 선배한테 많이 의지하고 살았나 봐요. 학교 다닐 때도 그렇고……. 나 사실은 선배 퇴사 얘기 딴사람한테 들은 것도 좀 섭섭했단 말이에요. 그리고 만약에 선배 또 쓰러지거나 하면 어떡해요? 병원 가는 것도 싫어하면서. 난 선배가 죽더라도 내 눈앞에서 죽었으면 좋겠어.”
“…….”
“이기적인 거 나도 알아요. 선배도 뭐 이런 애가 다 있냐고 생각하겠지만…….”
“그래.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진짜.”
두서도 없는 얘기들에 정말이지 짜증 나 죽겠다는 얼굴로 날 내팽개치듯 품에서 놓아 버린 채우수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한연두, 넌 자존심도 없어? 뭐가 이렇게 제멋대로야.”
화가 난 걸까. 이런 얼굴마저도 적응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인데. 그를 따라 몸을 일으키자 침대 시트가 서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왜 그래요, 갑자기.”
“너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긁어.”
“내가 뭘…….”
“밀어내면 밀리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밀어내겠다는 사람이 오히려 밀려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내 어깨를 옥죄듯 잡아 왔다. 잡아먹기라도 할 듯 눈을 부라리며 끈질기게 부딪쳐 오는 시선에 무섭다는 감정보다도 걱정이 먼저 앞섰다.
“선배, 잠시만……. 이것 좀 놓고 얘기해요, 아파요.”
“네가 이럴 때마다 나는 살아 있는 하루하루가 죄스러워. 알아?”
“내가 뭘…….”
“내가 널 무슨 자격으로…… 내가 여태 어떤 마음으로 널!”
“…….”
“한연두 네가 뭔데 왜 날 자꾸 주제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어. 왜 자꾸 사람을 욕심나게 만들어.”
“…….”
“왜 사람을 자꾸……, 비참하게 만들어.”
채우수가 짓씹은 입술 새로 억울한 듯한 한숨을 토해 냈다. 내가 뭘 또 놓친 걸까.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듯 날 쳐다보는 눈에서 무슨 감정을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딱히 못 할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저를 싫어한다는 말도 아니었는데 이렇게까지 발끈할 일인지. 내 어깨를 잡은 손에 다시금 힘이 들어가자 그의 표정을 헤아리는 얼굴이 같이 일그러졌다.
“후회할 짓 하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 한연두.”
“…….”
“네가 뭘 놓치고 살아왔는지 똑똑히 기억하란 말이야.”
나는 채우수의 이런 모습이 싫었다. 나보다 수십 살은 더 먹은 늙은이처럼 구는, 훈장님과도 같은 꼬장꼬장한 말투. 꼬일 대로 꼬여 버린 복잡한 제 마음을 뒤로 숨긴 채로 풀어 볼 생각조차 않는 오만하고도 음흉한 태도.
하지만 이 순간 내가 그에게 가진 감정이 혐오의 범주에서도 한참을 벗어났던 건, 되레 정반대의 감정을 들켜 버릴까 꾹꾹 눌러 삼켜야 했던 건 나를 보던 채우수의 얼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화가 났다기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한 붉은 눈자위, 잘게 떨리는 입매, 울분을 녹여 내는 거친 숨소리.
달리 설명은 필요 없었다. 채우수의 말들을 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가 지금 제 마음을 스스로 갉아먹으면서까지 원하는 상대가 나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으니까. 나는 뭔가에 이끌리듯 그에게 다가가 두 뺨을 감싸고는 입술을 겹쳤다.
조금은 충동적이었고 또 조금은 진심이었던 입맞춤에 채우수가 고개를 비틀어 입술을 떼어 냈다. 코끝을 스치며 그의 입술을 다시 쫓아가자 하아, 울음 같은 숨이 전해졌다.
어차피 모든 행동엔 후회가 남는 법. 그 후회까지 집어삼키며 겹친 입술을 벌리자 나지막한 욕지거리와 함께 채우수가 내 입술을 물었다. 목뒤를 감싼 그의 손이 등을 훑고 내려와서는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천천히 기운 시야에 채우수의 얼굴이 들어찼다. 잡생각을 할 틈도 없이 질척이는 소리가 머리를 하얗게 비웠다. 오늘 밤이 후회로 남을지라도 아쉬울 것 없는 시간들이 우리 두 사람을 그렇게 촘촘하게 얽고 있었다.
누군가 내게 채우수와의 기억들 중 하나를 지워 준다고 하면 나는 주저 없이 이 밤을 선택할 것이고, 하나만 기억할 수 있다고 한대도 나는 망설이지 않고 이 밤을 택할 것이다.
선처럼 곧기만 하던 사람이 내 위로 무너졌다. 채우수가 떨어뜨린 묵은 감정들은 살갗에 닿아 금세 흩어졌지만 그가 얄궂게 틔운 내 감정은 놀리듯 곳곳에 열꽃을 피웠다.
목을 타고 점점이 찍어누르는 입술에서 뜨거운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달뜬 몸이 잘게 떨렸다. 전적으로 채우수라는 인간이 자초한 밤이었지만 그는 제 손끝 하나 닿는 것에도 허락을 구하듯 내 반응을 살폈다. 배스 가운을 벌리고 들어온 손이 조심스레 가슴을 감싸자 몸이 오므라든다. 싫어한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다시 빠져나가려는 그의 손을 잡아 내 오른쪽 가슴 위에 얹었다. 하, 채우수가 짧게 내쉰 한숨이 겹친 입술 사이로 흩어졌다.
“……싫어요?”
“싫어.”
“진짜 싫어요?”
“내가 싫다 정말.”
나도 그래요, 하고 무심히 붙인 말에 채우수가 떫은 웃음을 흘렸다. 저를 싫어한다는 말인지 아님 나도 스스로가 싫다는 말인지도 모르면서. 희미하게 흐려지는 채우수의 미소를 보자 그의 손바닥 아래의 가슴이 세차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나 약 먹고 있어요. 미리 준비한 건 아니구요. 주기 조절하느라 먹는 건데…….”
“…….”
“그러니까 없어도 돼요, 콘돔.”
“…….”
“해도 괜찮다구요.”
“하아, 너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그럼 이 상황에서 피임법보다도 쓸모있는 말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나한테 원래부터 다정했다는 건방진 착각 속에 빠져 살던 남자는 저를 향한 가늘어진 눈에 입술을 붙였다가 내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확실히 해. 다 네가 저지른 일이야, 한연두.”
간질이며 떨어진 입술 새로 퍽이나 다정한 말들이 쏟아진다.
“전부 네가 자초한 거야.”
“…….”
“한연두 네가 먼저……. 항상 시작은 너였어, 예나 지금이나. 알아?”
나는 그 다정함에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왼손으로 그의 목덜미를 잡아 끌어당겼다. 스치듯 맞닿은 입술이 뜨거웠다. 내 입가에 내려앉은 그의 입술이 잔잔하게 진동했다. 마지못해 떨어진 채우수의 잇새로 앓는 소리가 흘렀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한연두.”
비겁한 자기방어다. 성마른 눈은 감출 생각도 못 하는 주제에. 나는 보채듯이 내 얼굴을 긁어 대는 그의 시선을 좇으며 채우수가 차라리 울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괜찮겠냐는 질문 대신 이마를 맞댄 채 내뱉는 숨이 달았다.
“선배.”
저를 부르자 아직까지도 내 한쪽 가슴 위에 얹어진 그의 손끝이 움찔댔다. 채우수의 손등 위로 겹쳐진 손을 들어 까슬해진 그의 뺨을 쓸자 그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나는 가끔 채우수가 내게 했듯이 반듯한 이마 위로 흐트러진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시끄러워요.”
픽, 바람 빠진 헛웃음이 공허한 공간을 울렸다.
콘돔이 없다던 채우수의 바지 주머니 속에서는 무려 콘돔 네 개가 나왔다. 그는 이것밖에 없어서 어떡하냐는 다소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이 뻔뻔한 인간의 거짓말에 또 한 번 질려 버렸다. 하지만 나 역시나 피임약을 먹는다는 거짓말을 한 건 마찬가지였으니 길게 따져 봤자 내 손해임을 직감했다.
꾹 눌러 다문 입술을 제 입술로 두드리던 채우수가 마뜩잖은지 가슴을 움켜쥐었던 손을 내렸다. 옆구리를 스친 손에 반사적으로 입술이 열리고 그 틈을 놓칠세라 말캉한 혀가 들어왔다.
나는 채우수를 굳이 색으로 표현하자면 그가 대학 시절 잘 입고 다니던 후드 티 색깔과도 같은 차가운 회색이라고 생각했다. 색을 잃은 것 같은 사람에게 내리쬐는 조명이 너무 자극적이었던 건 아닐까 어이없는 생각이 들 만큼 그와 닿는 모든 곳이 뜨겁다 못해 델 듯했다.
뱉는 숨까지 모조리 앗아 가는 키스에 고개를 틀어 그를 살짝 밀어냈다. 아쉬운 듯 턱을 타고 내려가던 입술이 숨 가쁘게 오르내리는 가슴께에 닿았다. 어느덧 그의 손에 의해 벗겨진 팬티가 발목에서 흘러내리자 오금부터 허벅지 안쪽을 훑던 손이 더 이상 거리낄 게 없다는 듯 점점 위로 올라왔다.
젖은 곳을 감싸는 손길에 가슴을 그에게 물린 채로 허리를 들썩였다. 입술을 깨물어 삼켜 보려고 해도 비집고 새어 나가는 소리를 어쩔 수는 없다. 그가 제 입에 물고 있는 둥근 정점을 녹이기라도 할 것처럼 혀끝으로 간질이자 으응, 낯간지러운 소리가 절로 흩어졌다. 그런 내 반응이 재밌기라도 한 건지 마른 웃음으로 가슴을 희롱하던 그가 입술을 떼고는 사실상 다 벗은 것이나 다름없던 내게서 마지막으로 남은 배스 가운마저 벗겼다.
나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무릎 사이에 내 몸을 끼우곤 제가 걸치고 있던 가운을 벗고 남은 옷가지들을 벗어 내던 채우수가 미간을 좁히며 날 내려다봤다.
“왜.”
“불……. 불은 다 끄고 싶어요.”
“그대로 둬. 괜찮아.”
내 얼굴부터 흐르던 짙은 눈동자가 가슴 아래 화상 흉터에 멈췄다. 괜스레 민망해져 입술 안쪽을 잘근 씹으면서 손을 내려 흉터를 감추었다. 하아, 탄식 같은 숨을 내쉬던 그가 몸을 낮춰 짧게 입을 맞췄다. 턱 끝을 살짝 물었다가 점점이 아래로 내리던 입술이 가슴 아래로 흉터를 가린 손등에 닿았다.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붙여 대는 입술이 괜히 간지러워 손끝을 오므리자 채우수가 제 이마로 내 손을 밀어내고 흉터에 입을 맞추었다.
“아, 거기는…….”
힐끗 날 쳐다보던 채우수가 고개를 조금 올려 내 가슴을 머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가슴 아래 흉터에 닿는 입술에 허리를 비틀며 두 손으로 채우수의 얼굴을 감싸며 막아 봤지만 되레 양 손목이 붙잡혀 그의 손안에 고정되었다.
“괜찮아.”
그는 성실히도 입술을 붙였다. 상처를 빨아들이기라도 할 것 같은 입맞춤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속죄라도 하는 듯한 행동에 나는 처음으로 내 몸이, 엄마에 대한 죄책감처럼 남아 있는 흉터가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의 입술이 흉터에 닿을 때마다 목이 눌린 듯 잠겼다.
괜찮아, 괜찮아를 읊조리던 채우수는 마지막 괜찮아의 끝을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눈동자가 젖어 들었다. 내 표정을 읽는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침묵이 주는 긴장감은 오히려 몸을 데워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괜찮아요?”
되레 저를 보고 묻는 말에 채우수가 어이없다는 듯 눈썹 사이를 좁혔다. 그는 내게 정말 괜찮냐고 물어 왔고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한숨과도 같은 말을 내뱉었다.
“너만 괜찮으면 나도 괜찮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이번엔 썩 다정한 말을 던지는 게 웃겨서 피식댔더니 까불지 말라며 채우수가 입술을 살짝 깨물어 왔다. 진득한 키스와 함께 아래를 지분대던 손도 점점 짓궂어진다. 부풀어 오른 살점이 그의 엄지에 뭉그러질 듯했다. 아아, 아아. 그의 손놀림에 맞춰 허리를 뒤틀어 보지만 쉽게 멈출 것 같은 움직임은 아니다. 아직까지 그의 손에 붙들린 손목이 시큰거렸다.
“나 그냥, 흐읏, 지금 바로 해도 될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한연두.”
“지금 충분히 괜찮, 하아, 아…….”
“넌 직접 만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얌전히 있어. 귀에 입술을 붙인 채로 흘려보내는 낮은 음성은 그저 야속하기만 하다. 이미 충분히 젖을 대로 젖어 버린 곳으로 그의 손가락이 오가며 내는 소리가 음탕하기 짝이 없다. 물기를 머금은 손가락이 하나 더 늘자 눈을 질끈 감았다. 곱아든 발끝에서부터 흐른 전류가 뇌까지 녹일 듯하다.
내벽을 넓히며 긁는 손놀림에 흐윽, 울음과도 같은 소리가 더해졌다. 윗니로 깨문 아랫입술이 저절로 툭 튕겼다. 그만, 그만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지 채우수는 집요하게 한곳만을 노렸다. 절정의 제물이 된 듯한 기분이다. 애원하듯 그의 품에 파묻혔던 얼굴이 저절로 천장을 향했다. 접어 올린 눈꺼풀 끝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아아, 숨길 수도 없는 신음과 함께 손가락이 빠져나가자 허벅지가 짧게 경련했다. 밭은 숨을 정리할 틈도 없이 입술이 먼저 빨렸다. 거칠어진 키스에 아래에선 왈칵, 또 한 번 액을 쏟아 내며 달싹거렸다.
채우수는 내가 저를 비참하게 만든다고 했지만 틀렸다. 절정이 회오리처럼 몰아친 곳에 새로운 감정이 남았다. 온몸이 열려서는 그를 원하고 있었다. 텅 비어 버린 마음은 채우수 하나로도 충분히 꽉 들어찰 것만 같아 참담한 기분이다.
맥 빠진 몸을 옆으로 돌려 눕자 채우수가 날 뒤에서 껴안으며 제 몸을 붙였다. 손가락에 유두를 끼운 채 내 가슴을 쓰다듬던 그의 손이 배꼽을 지나 아래로 내려갔다. 그새 익숙해진 것일까, 그의 손끝에서 퍼질 전율에 몸이 벌써 달아올랐다.
채우수가 내 어깨에 입술을 붙이면서 제 것을 내게 맞췄다. 닿는 것만으로도 흐으, 숨이 가빠진다. 젖은 살을 가른 것은 어쩐지 쉬이 들어 올 생각이 없어 보인다. 엉덩이까지 적신 탓에 그를 품는 건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부피를 키운 그의 것은 생각보다도 훨씬 버거워 끝만 겨우 머금을 뿐이다. 숨을 몰아쉬며 그를 향해 돌아보자 입술이 짧게 스쳤다가 떨어졌다.
“아, 이거…… 잠깐만…… 지금 안 될, 안 돼요.”
“괜찮다며.”
“아니, 아니……!”
“뭐가 아니야. 네가 충분하다며.”
뒤로 제 몸을 물리던 그가 반동을 주며 허리를 짓쳐 들자 움찔대던 붉은 속살이 그를 반쯤 삼켰다. 서서히 빠듯하게 들어차는 묵직함에 허리가 말리자 채우수가 내 몸을 고정하듯 한 팔로 옭아맸다.
몇 주 동안 남모르게 원하던 그의 것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빠져나갈 듯하던 그는 더 큰 쾌락을 몰고 와서 내 속으로 깊게 박혔다. 그가 밀려 들어올 때마다 온몸을 쪼개는 듯한 감각이 아래에서부터 번졌다. 하아, 귓가로 흩어지는 그의 낮은 신음에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아직 한연두를……, 다 몰랐네.”
“흐읏, 아, 으응…….”
“이런 거, 하아, 좋아했나 봐.”
채우수가 귓불을 살짝 깨물고는 내 귀에 대고 제 숨을 뱉어 냈다. 그가 뒤에서 움직이며 제 것을 치받을 때마다 그의 팔뚝에 눌리다 만 가슴이 흔들거렸다.
“너도 느껴? 내가 이럴 때마다 밑으로 아주, 하아……. 씹어 먹을 듯이 구는 거.”
“으응, 아아, 흣!”
“봐. 지금도.”
그가 내 귓가로 내뱉는 숨에 아래가 저도 모르게 제가 품은 것을 조였다. 이번엔 고의가 아니었는지 시발,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던 그가 시트에 파묻힐 것 같던 내 얼굴을 제게로 돌렸다. 틈이라곤 없어 보이던 채우수의 눈빛이 느슨하게 풀렸다. 낯설다고 느꼈던 것도 잠시, 그에게 맞춰 정신없이 흔들리며 벌어진 입술이 다시금 그에게 잠식되었다.
혀를 휘감으며 서로의 타액을 삼키는 소리가, 완성되지 못한 채로 그의 입 속에서 녹아내리는 비음들이 살이 부딪치는 소리만큼 농염하다.
빨라진 허리 짓에 집어삼킬 듯한 입술도 떨어졌다. 절정으로 내달릴수록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커진다. 우리는 언제라도 결국은 이렇게 될 운명이었을까. 문득 채우수가 쏟아 내던 말들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뒤에서 느껴지는 그의 온기에도 가슴이 싸하게 내려앉았다. 나는 그가 흔드는 대로 흔들리면서도 악착같이 그를 붙들었다.
“한연두, 후회해.”
질문일까, 명령일까. 아니면 부탁일까. 혼잣말처럼 내뱉던 채우수는 내 대답을 딱히 원하지는 않는 듯 눌러 찍듯이 안쪽 깊숙한 곳을 찌르고 빠져나갔다.
옥죄던 팔이 풀리고 그의 품 안에서 전율하던 몸도 바로 눕혀졌다. 눈으로 핥듯이 느리게 내 몸을 내려다보던 채우수의 얼굴에 드리운 감정은 나와 같은 곳을 향해 있었을까. 알 수 없는 미소를 내걸던 그가 부딪쳐 오는 입술은 부드럽기만 하다.
나는 그에게 매달리듯 둥글게 말려 그와 같은 점을 만들었다. 애초에 섹스에 큰 의미를 두려던 건 아니었다. 그 상대가 채우수라면 더더욱. 그러나 이 눅진한 키스를 받고 있노라면, 그의 아물지 않은 눈빛을 받아 내고 있노라면 한낱 욕정 따위에 패배한 짐승은 되고 싶지 않았다.
온전히 안아 주고 싶었다. 그저 서로에게 깊숙이 파고들어 그 감정까지도 품을 수만 있다면. 그가 쏟아 내던 절망을 내가 녹일 수만 있다면. 누군가 이 순간을 사랑이라는 낯선 감정으로 매도할지언정 굳이 부정할 마음도 없었다.
도심의 불빛들도 다 가려진 방 안에 채우수가 만든 어둠이 한층 더 짙어졌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얕게나마 웃었다. 그가 참아 내는 불안을 대신 삼키면서, 울면서도 웃었다.
<2권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