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채색
“나는요, 사실 선배 같은 얼굴 내 취향이 아니라구요.”
“알아. 너 멍청하게 생긴 애들 좋아하잖아.”
“멍청한 게 아니라…….”
멍청하게 생겼다는 건 또 뭐야. 아니, 그럼 자기는 멍청하게 생기지 않았단 말인가. 머릿속까지 헤집던 혀가 빠져나가고 어쩐지 통통하게 부어오른 것 같은 입술이 떨어지자 시야를 새롭게 채운 것은 채우수의 침실이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이동했는지는 굳이 물을 필요가 없다. 그저 몇 번의 부딪침 끝에 채우수가 날 들어 올렸고 어느 순간 등 뒤로 폭신한 침대가 느껴졌을 뿐. 나는 몸을 살짝 일으켜 팔꿈치로 침대를 짚고는 침대 밖으로 빠져나간 채우수가 후드 티를 훌러덩 벗는 행위를 관망했다.
“불 끄면 안 돼요?”
“안 돼.”
“완전 제멋대로야. 진짜 이상해.”
“이상한 건 한연두 너야. 갑자기 웬 내숭이야.”
“내숭이 아니라……. 왜 그, 그건 마저 안 벗어요?”
후드 티 안에 받쳐 입은 검은 반팔은 채우수의 근육 잡힌 탄탄한 몸을 가리고 있었다. 이왕 벗을 거 같이 벗어도 되지 않나, 그의 상체를 향해 쭉 뻗었던 검지가 채우수의 헛웃음에 힘을 잃고 밑으로 가라앉자 어이없다는 웃음이 더해졌다.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너는 왜 아직도 그 모양이야.”
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여자가 정말 낯설지는 않은 양, 아니 오히려 왜 아직도 옷을 입고 있냐는 시선이 내 몸을 빠르게 훑었다.
“너 내가 하나하나 벗겨 주길 기다려?”
“아니에요. 내가 벗어요.”
그래, 낭만 따위는 개나 줘 버렸지만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분명 내가 채우수에게 기대하는 바이기도 했다. 그저 성욕에 이끌려서 서로의 몸만 탐하는 관계. 이 침대에 나도 모르는 여자가 몇이나 누웠는지는 내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다. 뭐, 남자가 아닌 게 다행이지. 채우수가 게이가 아니었기에 나한테도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에 안도해야 한다.
팔을 교차시켜 벗은 후드 티를 고이 개켜서는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렸다. 어디까지 벗는지 보겠다는 듯 붙박이장에 등을 기댄 채 물을 마시던 채우수에게서 낮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힘 빠진 웃음에 속옷 없이 민소매만 입은 몸이 조금 민망해져서 오른손으로 왼팔을 잡으며 가슴을 가렸다.
채우수가 손에 들고 있던 컵을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 소리에 놀라 웅크린 어깨가 그의 손바닥으로 덮였다. 몸을 숙인 채로 내 쇄골 부근을 엄지로 길게 쓸던 그가 짧게 입술을 붙이더니 제 무릎으로 매트리스를 짚으며 내 위로 올라왔다. 환하게 눈이 부시던 천장 조명이 채우수의 몸으로 반쯤 가려졌다.
“불은 끄고 싶어요.”
“네가 눈을 감으면 돼.”
채우수가 내 어깨를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줘 뒤로 밀자 매트리스를 겨우 짚으며 몸을 지탱하고 있던 팔에 힘이 풀렸다. 머리 뒤로 폭신한 침구의 촉감 대신 채우수의 손바닥이 느껴졌다.
“그래도 너무 환하잖아요.”
“그러니까 더 잘 보이지.”
미쳤나 봐. 뭘 그렇게 잘 보겠다는 거야. 답이 뻔한 질문들에 뭐라고 묻지도 못하고 눈을 흘기면서 입만 벙긋거렸다.
“예를 들면 벌써부터 빳빳해진 젖꼭지라든가.”
묻지도 않았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은 얘기들이 채우수의 웃음 섞인 목소리로 전해져 왔다. 조롱인가 희롱인가, 뒤통수를 받쳤던 손이 뱀처럼 빠져나가더니 옷 위로 가슴을 움켜쥐고는 손가락으로 유두를 튕겼다.
“아…… 불 꺼 줘요.”
“불을 왜 끄고 싶은데.”
“……나는, 난 밝은 곳에서는 흐응……분이 잘 안 돼요.”
“걱정 마.”
얄팍한 거짓말은 금세 티가 나게 되어 있다. 옷 속으로 들어온 손에 아랫배가 간질간질하다. 차라리 시선이라도 다른 곳에 뒀으면, 아니 차라리 몰아쳤으면 좋겠건만 가슴을 한 손에 쥐고 놀면서 재밌다는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채우수는 짓궂기 짝이 없었다.
흐응, 그리고 그 눈빛만으로 지나치게 예민해진 내 몸은 얼마나 얄궂은지. 고작 가슴 한번 만졌다고 채우수 아래에서 허리를 들썩이는 꼴이 여간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 아니다. 흘러나오는 비음을 애써 삼키려고 짓씹은 입술에 채우수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키스와 함께 배꼽 부근에서 시작된 파동은 크게 너울지면서 다른 생각들을 삼켰다. 며칠 동안 강력하게 주장하던 그 본능에 굴복한 몸들은 조금씩 더운 열기를 내뿜으면서 서로의 몸을 데웠다. 자존심이 뭐가 문제야, 이렇게나 좋은데. 어쨌거나 나는 채우수의 몸이 좋고 드디어 원하는 목표를 이루는 것일 뿐인데.
아니 잠깐, 그럼 이렇게 채우수와 한 번 자고 나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난잡하게 같이 뒹굴던 혀가 굳어 버리자 채우수의 입술도 떨어졌다. 누구 것인지도 모를 타액이 가는 선으로 이어졌다가 그가 내 아랫입술을 물며 길게 늘이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게 끝인가. 오늘 이 섹스 한 번이 끝일까. 계속하게 될까. 백팔 번뇌가 숨겨진 감각까지 일깨우는 듯하다. 움켜쥐었던 가슴에서 내려와 배꼽 주위를 간질이던 손가락이 바지 속으로 들어오자 허벅지 안쪽이 저절로 굳었다. 굳어진 근육을 달래는 듯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던 손가락이 팬티 위로 올라왔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물기로 달라붙은 속옷은 이미 달아오른 몸을 여실히 보여 줄 것이다.
“아무튼 입이랑은 따로 놀지, 아주.”
가운뎃손가락으로 갈라진 곳의 정점을 살짝 긁자 흐으, 옅은 숨이 잇새로 빠져나왔다. 그 반응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채우수가 씨익 웃으면서 제 손가락을 바꿔 가며 긁어 대자 속옷이 더 젖어 드는 기분이다.
어쩐지 홧홧해지는 얼굴을 감추려고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채우수는 관자놀이부터 촘촘하게 입술을 붙이더니 내 귓불을 살짝 깨물고는 가슴께로 고개를 내렸다. 여전히 팬티 위를 지분대던 손가락의 움직임도 멈출 생각은 없어 보인다.
“하기 전에, 흐읏, 확실히 해 두는 건데요.”
“…….”
“난 어디까지나 선배 몸이 좋은 거지, 아, 채우수라는 사람이 좋은 게 아니에요.”
“…….”
“내가 지금 선배랑 이런다고 해서 사귀지는, 하아…….”
“한연두.”
그새 목이 말랐던 건지 내 이름을 부르는 채우수의 목소리가 다소 거칠게 변했다. 상체를 일으킨 채우수가 검은색 반팔 티를 벗고는 침대 옆으로 던졌다. 그래 맞아. 난 어디까지나 벗었을 때 더 황홀한 채우수의 몸이 좋은 것뿐이야.
아직까진 불을 켜 둬서 다행이었다. 그의 가슴팍부터 옆구리까지 단숨에 훑은 눈을 올리자 비뚤어진 눈썹 밑으로 채우수의 반항기 어린 눈매가 살짝 휘었다.
“한연두, 너는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아.”
“아, 잠깐만요.”
뭐라고 준비할 새도 없이 채우수의 손에 의해 순식간에 벗겨진 바지가 발목에 걸렸다. 무릎을 붙여 다리를 오므렸더니 지금 와서 뭐 하냐는 눈빛이 따라붙었다. 쓸데없는 생각들까지 모조리 지워 내기에는 아무래도 조명이 너무 밝은 모양이다.
“갑자기 왜 그래, 너.”
“혹시나 묻는 건데 이상한 거 시키는 건 아니죠?”
“이상한 게 뭔데.”
“뭐……. 보편적인 상식을 벗어나는 아주 변태 같은…….”
“구체적으로 말해.”
“예를 들면 기구…… 같은 걸 쓴다거나 아니면 채찍 같은 걸 쓴다거나.”
어쨌거나 자신이 변태라고 선언했던 사람이 아닌가. 내 몸 위로 겹쳐진 그를 손바닥으로 겨우 밀어내며 가는 눈으로 쳐다보자 어이없다는 웃음이 내 이마 위로 흩날렸다.
“네가 그런 게 좋다면 참고는 해 볼게.”
“아니, 좋다는 게 아니잖아요.”
“싫어?”
“싫죠!”
“잘 모르겠어. 한연두가 싫다 좋다 번복을 워낙 많이 하셨어야지.”
아, 진짜. 채우수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찰싹 내리치는 소리가 손바닥을 울렸다. 발갛게 손바닥 자국이 남을 것만 같아서 그의 가슴팍에 달라붙은 손을 떼지도 못하고 제 몸을 더 내리는 채우수 밑에서 눈동자만 옆으로 굴렸다.
“한연두, 넌 수가 너무 잘 읽혀. 알아?”
“내가 뭘?”
“입으로만 방정이라고.”
“내가 무슨…….”
“무슨 생각 하는지 이렇게 뻔히 다 보이는데.”
오므린 무릎을 툭툭 치던 손이 허벅지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큼지막한 손바닥으로 허벅지 안쪽을 감싸듯이 쓰다듬자 숨은 엉덩이 근육까지 수축되는 기분이다.
“지금 내가 단순하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비슷해.”
“흐응, 무슨 그런…….”
“봐. 네 몸은 거짓말을 안 하잖아.”
채우수가 젖은 팬티 속으로 제 손을 집어넣고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아, 맨살에 닿는 손가락은 집요하기도 하다. 클리토리스를 뭉근하게 돌리던 손가락이 질구 쪽으로 미끄러졌다. 그것만으로도 왈칵, 애액이 흘러 엉덩이까지 적시는 듯해 손을 내려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젖은 살을 가르고 엄지를 느리게 돌리면서 허락을 구하는 듯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싫은 게 아니었다. 채우수의 손가락 끝에서 흥분하는 내가 부끄러웠을 뿐. 계속되는 손놀림에 그의 손목을 붙든 손에도 힘이 빠지고 되레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혀로 날 옭아매듯 아래로는 속살을 부드럽게 헤집던 손가락이 하나가 더 늘었다.
“하아, 언제부터 이런 사람이었어요?”
“뭐가.”
“원래 이렇게…… 여자들한테, 흐읏!”
휘어진 손가락이 간지러운 곳을 긁는 것처럼 한곳을 꾸욱 누르자 발등이 곱아들었다. 손가락이 빠져나갈 때마다 나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그를 잡는 것이 느껴졌다. 젖은 소리가 위아래를 가릴 것 없이 음탕하게 둘 사이를 채우고 밭은 숨소리가 그 틈을 메웠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빨라지자 허리가 절로 오목하게 휘었다.
아아, 이대로라면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다. 입술을 떼고 채우수의 팔뚝을 잡았다. 그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윗니로 꽉 눌렀지만 이젠 소리를 참아 낼 재간도 없다. 밝은 곳이라는 것이 무색하게도 엉덩이 밑이 축축한 것이 시트가 벌써 엉망이 된 것 같다. 내 입가에 제 입술을 붙인 채우수가 엄지로 정점을 꾹 누르며 손가락을 빼내자 허벅지가 잘게 전율했다.
그새 힘이 빠져 늘어진 몸을 추스를 시간도 없다는 듯이 채우수가 머리를 내렸다. 부풀어 올라 예민해진 살에 혀가 닿자 같이 늘어졌던 신경 세포도 다시금 깨어난 기분이다.
“아아……. 그렇게까진 안 해 줘도 되는데요.”
“계속 그렇게 떠들어 봐.”
허벅지 사이로 보이는 채우수의 얼굴이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손목으로 눈을 가렸다. 아래를 길게 쓸었던 혀가 질구 주위를 배회하자 절정을 맛본 곳은 염치도 모르고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만…… 그만요.”
“누구 좋자고 벌써 그만이야.”
“나, 나! 지금도 이미 충분하니까…….”
허리를 튕기면서 채우수의 머리를 잡아 누르자 뜨거운 숨이 아래로 느껴졌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은 눈으로 그와 눈이 마주쳤다. 번들번들한 입술을 제 혀로 핥으며 웃는 채우수를 보는 게 썩 유쾌하진 않았다.
애무는 이제 그만해도 좋으련만 차마 넣어 달라는 말이 먼저 나오지는 않았다. 이런 내 마음을 놀리려는 것이 분명하다. 허벅지 안쪽을 가볍게 깨물어 가며 입술을 붙이던 채우수가 내 엉덩이 밑으로 손을 넣어 팔로 내 허벅지를 감으며 제게 더 붙였다. 배꼽 위로 돌돌 말린 민소매만 입은 채로 허리가 허공에 들린 몸은 어깨만 겨우 매트리스에 붙어 있다. 환한 조명이 더 민망해지는 순간이다.
“아, 잠깐만요…… 그렇게 자꾸…….”
“싫어?”
고개를 크게 끄덕이자 채우수가 고개를 살짝 뒤로 물렸다. 뚫릴 듯한 눈빛에 조금 전까지 그의 혀를 물었던 곳이 대답이라도 하는 양 움찔거렸다.
“안 싫다는데?”
“아니야, 아으. 아, 왜 자꾸 거기만…….”
“좋다고 할 때까지 해 줄게.”
아, 정말. 다시 아래에 붙은 그의 얼굴을 허벅지로 꽉 조여 봤지만 채우수는 별다른 타격도 없는 것 같다. 말랑한 혀로 클리토리스를 간질이는 그의 얼굴을 담은 시야도 점점 흐려졌다. 아아, 벌써 이러다가는 정말이지…….
“좋아요, 으응, 좋아.”
“그래.”
“좋아……. 이제 그만…….”
“알았어. 좋은 거 더 해 줄게.”
“아니, 흐읏…… 좋다니까?”
“말이 자꾸 짧아져, 한연두.”
“하아, 좋다구요. 그러니까 빨리…….”
쾌락에 젖은 몸이 잘게 떨리며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고여 있던 눈물방울이 흐르면서 발개진 눈가를 식혔다. 채우수에게로 옮겨 간 쾌락은 그저 웃음으로 번진 모양이다. 악랄한 미소를 건 남자의 입술이 목을 타고 내려왔다.
아랫배를 쓰다듬던 손이 돌돌 말린 옷을 가슴 위까지 올렸다. 그의 손을 급히 잡아 봤지만 이미 뭔가 다르다는 걸 눈치챈 듯 채우수의 손이 멈칫했다. 눈이 배로 커진 것이 내 몸을 보고 적잖이 놀란 모양이다.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굳어 버린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러게 내가 불 끄고 하자고 했잖아요.”
“너 이게 무슨…….”
“……화상 흉터예요.”
왼쪽 가슴 아래부터 옆구리를 길게 덮은 화상 흉터는 다른 피부와는 이질감이 느껴진다. 살을 하나 덧댄 듯 부풀어 오른 곳도 있고 부드럽다기보다는 미끌미끌한 곳도 있었다. 나도 가끔 내 피부가 징그럽게 느껴질 때도 있는데 채우수는 더 그렇겠지. 상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채우수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그……. 내가 불 끌까요? 보기 흉하면…….”
옷을 내리려던 손목이 꽉 붙잡혔다. 통증에 미간을 좁히자 채우수가 저도 놀란 듯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상처 주위를 쓸어 보려던 그의 손이 주춤거리며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너 이거 만지면……. 아니, 만져도…….”
“만져도 아프지는 않아요. 그냥 치료 시기를 좀 놓쳐서 피부가 그렇게 된 거라서.”
“그런 말은 없었잖아.”
“내가 선배한테 내 몸에 화상 흉터가 있다는 얘기를 왜 해요.”
그것도 비키니를 생활복으로 입지 않는 이상은 모를 부위인데. 흉터를 가진 사람은 난데 어쩐지 채우수의 몸에 낙인이라도 크게 찍힌 모양인지 그의 낯빛이 파리해졌다.
“많이 놀랐어요?”
“놀란 게 아니라 너는 대체 이걸! 시기를 놓쳤단 말은 뭐야?”
“……거기까지 말하고 싶진 않아요.”
화상 치료는 시기가 제일 중요했다지만 엄마 장례식이며 이사며 당시 신경 써야 할 게 많았던 내게 상처 따위가 우선일 리는 없었다. 처방받은 약을 스스로 발라 가며 진물을 닦아 내길 몇 달. 상처만 아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이렇게 큰 흉이 남을 줄은 누가 알았을까. 치료할 땐 힘들었다지만 그래도 옷으로 가려지는 부위라 천만다행이지.
상처를 눈으로 훑던 채우수가 징그러웠는지 일그러뜨린 얼굴을 제 손으로 쓸었다. 왠지 오늘은 여기까지가 끝인 것만 같다. 그의 눈치를 보면서 발목에 걸린 속옷을 주섬주섬 올려 입었다.
“괜찮아요. 내가 봐도 징그러워요.”
“그런 거 아니야.”
“충분히 이해해요. 처음 보면 놀랄 수 있으니까요.”
“…….”
“나 오늘은 그냥, 집에 갈게요.”
“…….”
“선배, 숨 쉬어요.”
넋 빠진 얼굴의 채우수가 눈썹을 비틀며 바지를 추어올리는 날 쳐다봤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다. 괜히 멋쩍은 마음에 그를 보고 작게 웃으며 협탁 위에 둔 후드를 손에 들었다.
“숨 크게 내쉬라구요. 놀라서 또 기절하면 어떡해.”
“너는 대체 이 와중에도 내 걱정을…….”
웃으라고 한 말인데 별 효과는 없었나 보다. 뭐, 내 앞에서 두 번이나 기절했다는 게 부끄럽기도 하겠지. 아니면 이대로 흥이 깨졌으니 싫기도 하겠고. 정색에 가까운 얼굴을 외면한 채 후드에 머리를 끼워 넣었다. 머리카락이 정전기로 붕 떴다.
그걸 보고 옅게 한숨을 내쉰 채우수가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딛고 일어섰다. 정전기로 날리는 머리카락을 제 손으로 가라앉히려던 채우수가 별 소용이 없었는지 정수리를 턱으로 꾹 누르며 날 당겨 끌어안았다. 그의 맨가슴에 닿은 내 입술이 새삼스레 민망해졌다. 볼 거 다 보여 준 사이에 이게 뭐라고 옆으로 돌린 볼에 열이 올랐다.
“내일 토요일이잖아요.”
“알아.”
“……책임님이 시간 비워 두라고 해서.”
“그것도 알아.”
뭔 줄 알고 안다는 거야. 내 말을 잘라먹는 대답에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그제야 채우수가 씁쓸하게 웃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내일 보자.”
나를 보며 내리깐 눈이 어쩐지 처연하다. 이것도 또 수작질이었을까. 뭔지는 몰라도 차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는 없었다. 그의 짙은 눈동자에 홀려 버린 듯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누군가 물감이라도 떨어뜨린 듯 가슴이 시큰거리며 온몸을 타고 번졌다. 나는 오늘 밤 무엇으로 물들었을까.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순서도 없이 채색되는 밤이었다.
* * *
가끔씩은 별것도 아닌 것들이 따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아프다고 소란 떨기엔 나만 유난스러운 사람이 되어 버리는, 이를테면 손톱 옆 거스러미와도 같은 말과 표정들.
채우수의 집에서 어색하게 빠져나와 집으로 올라온 나는 샤워부터 하고는 뿌옇게 김이 서린 거울을 손바닥으로 닦아 냈다. 손바닥이 쓸고 간 흔적들에 젖은 몸이 비치자 초점이 바로 잡힌 듯 화상 흉터가 선명하게 보였다.
실망이라는 감정은 잃을 것이 존재했을 때나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들은 실망감은 아니다. 애초에 내가 채우수에게 기대하고 있던 감정이라는 게 없었는데 뭘. 오히려 채우수가 내 몸의 흉터를 봤을 때 느낀 것이 실망감이겠지.
마치 세뇌라도 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기를 수건으로 닦았다. 오늘따라 흉터가 손끝에서 낯설게 느껴졌다. 열네 살에 생긴 흉터니까 인생의 절반 이상을 품고 살아온 치부다. 아니, 부끄러운 일은 아니니 치부는 아니지. 오히려 엄마가 마지막으로 남겨 준 소중한 흔적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몸을 비틀어 날갯죽지까지 연결된 흉터를 쓸어 보았다. 그래,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엄마가 봤더라도 놀랐을 게 분명한 흉터다. 섹스를 앞둔 남자라면 더 그렇겠지. 게다가 고고하게 자라난 도련님과도 같은 채우수 눈에는 더 그랬을 터.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은 모든 행위들에 크고 작은 정당성을 부여해 준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속이 허한 것은 양이 차지 않았던 저녁 때문일까, 아니면 끝까지 나가지 못한 진도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상처를 훑던 시선을 끌어 올려 거울 속 여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뭣 때문인지 불퉁하게 튀어나온 입술이 꼴 보기 싫어 입꼬리를 양옆으로 당겼다. 어쩐지 억지웃음이 되레 더 씁쓸해져 표정을 지우고는 서둘러 옷을 입었다.
욕실 문을 열고 나가자 언제 집에 왔는지 모를 한태평이 등 뒤로 맥주를 감추었다가 나보다도 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꼴사납게 웃었다.
“한태평 너 왜 이렇게 빨리 와?”
“언제는 늦게 온다고 난리 치더니 빨리 와도 잔소리야.”
“너 아까 큰아빠 보내 드리고 독서실 간다고 안 했어? 공부 제대로 안 해?”
“열심히 하고 있어.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그냥 온 거야.”
피곤하다는 애가 맥주는 왜 마시는지. 세상 근심 저 혼자 다 끌어안은 양 어깨를 무겁게 내린 태평이 휴우,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제 방으로 향했다. 저 쇼에 또 속으면 내가 바보지. 저벅저벅 물기 묻은 발바닥을 하나씩 떼며 한태평 방 문간에 서자 태평의 얼굴이 구겨졌다.
“너 공부 설렁설렁할 거면 지금이라도 시험 준비 때려치워.”
“……진짜 그래도 돼?”
“시험도 그만두면 앞으로 뭐 할 건데.”
태평이 기회라도 잡았다는 듯 눈을 빛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안 들어 봐도 허무맹랑한 소리일 게 뻔하다.
“누나, 내 친구 세진이 알지? 걔가 두 달 전부터 배달 시작했잖아. 근데 그렇게 돈이 잘된다는데…….”
“너 또 오토바이 타겠다는 소리 할 거면 죽여 버릴 거야.”
“아니, 요즘은 오토바이 그렇게 위험하지도 않아. 건당이어서 일주일에도 백만 원 이상은 그냥 벌고…….”
“죽여 버린다고 했어.”
이름처럼 사는 걸까. 저렇게 태평할 수가 없다. 도대체 왜 걱정은 오롯이 내 몫인 건지. 살기를 느낀 시선에 움찔거리던 태평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침대 위로 털썩 누웠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 죽으면 한연두가 잘도 살겠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공부나 제대로 해. 너 학원은 잘 다니는 거 맞아?”
“내가 다 알아서 해.”
“네가 뭘 알아서 해?”
이불을 부스럭거리며 머리끝까지 덮는 것이 더 이상 내 말에 대답하기 싫다는 표현이다. 누가 군대 다녀오면 인간 된다고 그랬는지 모르겠다. 전역한 지 보름도 안 됐을 때 오토바이 사고로 한 달 동안 병원 신세 진 걸 까먹기라도 한 건지 무슨 오토바이를 또 타겠다고…….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살자, 태평아. 어?”
“…….”
“남들처럼 평범하게. 좀 그렇게 무난하게 살아 보자 우리도.”
“나가.”
“씻고 자.”
“아, 좀 나가!”
저 건방진 새끼. 한태평은 지나친 애정과 관심이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여실히도 보여 준다. 한태평 입장에선 초등학생 때 부모님 두 분을 다 잃은 것이니 남들보다 더 심한 사춘기를 겪기도 했겠지만, 그래서 학교에서든 친척들 사이에서든 유난스러울 정도의 애정을 많이 받지 않았던가. 크게 엇나가진 않았지만 한태평의 인생 궤도가 비뚤비뚤해진 데는 지나친 애정이 원인 중 하나가 되었을 게 분명하다.
태평의 방문을 닫고 내 방으로 들어오자 서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화장 솜에 토너를 덜어 얼굴을 닦다가 입술 주위로 내리던 채우수와의 키스가 생각나자 거울을 그냥 반대로 돌려 버렸다. 삶의 궤도가 비뚤어진 건 비단 한태평만의 일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나 역시도 오늘 정상 궤도를 이탈한 셈이다.
키스만으로도 복잡했던 마음을 더한 걸로 흔들어놨으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감정의 역치를 넘어선 것만 같다. 아, 세상에. 채우수랑 도대체 뭘 한 거야 내가. 섹스라도 제대로 했다면 차라리 하룻밤 해프닝으로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래, 채우수가 내 흉터를 보고 놀랐든 어쨌든 알 게 뭐야 내가.
어딘가 주눅 들었던 마음에 삐죽삐죽 가시가 돋쳤다. 이래서 내가 채우수를 싫어하는 거다. 남자라는 놈이 약해 빠져 가지고는 툭하면 기절이나 하고 말이야. 흉터 보고 놀라 기절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그나마 채우수가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잘난 몸뚱이 하나인데 그것마저도 제대로 보여 주지도 않고.
화장 솜을 휴지통에 집어 던지고는 불을 끄고 침대로 가서 누웠다. 좀 있으면 이불도 두꺼운 겨울 이불로 바꿔야겠다. 그러고 보니 채우수네 침대 시트는 알아서 잘 갈았겠지……. 아, 진짜. 도대체 내가 왜 이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해.
꾸물거리며 옆으로 돌아눕자 오래된 매트리스에서 스프링이 퉁 끊어지는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채우수와 엮이는 게 아니었다. 그 엘리베이터부터가 문제였던 것이다. 채우수가 기절을 했든 말든 병원으로 가도록 내버려 뒀어야 했는데. 그럼 내가 채우수의 집에 죽을 들고 갈 일도, 그걸 만질 일도 없었을 텐데. 며칠 동안 그것 때문에 번뇌하는 데 쓴 에너지만 해도 얼만데.
그러니까 처음부터 엘리베이터를 같이 안 탔어야 했다. 그랬다면 고장 난 엘리베이터에 채우수 혼자 갇혔겠지, 뭐. 채우수는 또 멍청하게 구조 요청도 안 했을 게 분명하고. 어쩌면 그렇게 채우수의 마지막이 됐을지도 모를…….
아, 아무튼 채우수는 진짜 이상한 성격이다. 10년 넘게 지척에서 봐온 사람이지만 도통 속을 알 수가 없다. 게이인 줄 알았던 인간이 여자 꼬시는 데 능한 변태일 줄 누가 알았을까.
고개를 작게 흔들고는 반대 방향으로 돌아누웠다. 오늘도 쉽게 잠들 것 같지는 않은 밤이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든 사고의 끝이 채우수로 향한다. 인정하긴 싫지만 채우수와 보냈어야 할 밤들에 아쉬움이 남는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하아, 침대 옆을 더듬어 잡으려던 휴대폰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세상에, 액정이 깨지진 않았을까 하는 걱정보다도 아래층에서 채우수가 이 소리를 듣진 않았을지가 먼저 걱정된다는 건 심각한 증상이다.
내 방 바로 아래에 채우수가 있다는 걸 이렇게까지 신경 써 본 적이 없는데 새삼스럽게. 침대 밖으로 몸을 반쯤 빼 휴대폰을 잡으려는데 화면이 반짝이며 메시지가 온 걸 알렸다. 연락 올 사람도 없는데 이 시간에 누가…….
[자] AM 12:09
별……. 방금 우당탕거리는 소리를 들었음이 틀림없는 채우수 메시지다. 자냐고 물어보는 건지 자라고 명령하는 건지. 물음표도 마침표도 없는 말은 참으로 간단하기도 하다. 가슴께에 휴대폰을 올려 두고 양 엄지를 놀리며 답장을 하려는데 검은색으로 바뀐 화면이 채우수의 이름을 띄우며 진동했다.
웬일이야 채우수. 이 시간에 무슨 전화야. 별꼴이야 정말. 괜히 입술 안쪽을 씹으며 화면만 쏘아보다가 목소리를 짧게 가다듬고는 엄지를 쓸어 전화를 받았다.
“웬 전화예요. 뜬금없이.”
- 층간 소음 항의하려고. 너 그렇게 해서 깨지겠어?
“웃겨. 내가 뭘 떨어뜨린 줄 알고요?”
- 너 손에 든 거 그거.
“……아니거든요.”
-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일주일에 두세 번은 휴대폰 떨어뜨려, 이 시간에.
“밑에서 나 감시하고 살아요?”
세상에, 채우수 이 인간 진짜로 변태 아냐? 내 이동 동선까지 다 꿰고 그러는 거 아냐?
- 이 아파트 설계가 잘못됐어. 너 집에서 뭐 하고 돌아다니는지 내가 알고 싶지 않아도 다 들려.
“어이없어. 그걸 왜 이제 말해요?”
- 재밌잖아. 말한다고 네가 조심할 것도 아니고.
“웃기지도 않아요, 진짜.”
재밌다는 말이 진심이었다는 듯이 채우수의 낮은 웃음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같은 사무실이지만 전화 통화를 할 일은 별로 없어서 그런가 그의 목소리마저 다른 사람의 것처럼 느껴졌다.
- 안 자고 뭐 해.
“자고 싶었는데 선배가……. 근데 목소리 왜 그래요?”
- 뭐가.
“왜 그렇게 낮게 깔아요, 새삼스럽게.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 수작은 아니었는데 한연두 귀에 듣기 좋나 봐?
웃겨 진짜. 누가 바라는 대로 대답해 줄 줄 알고.
“진짜 적응 안 되는 거 선배도 알죠? 내가 알던 그 채우수가 아닌 것 같아.”
- 네가 그동안 날 너무 얕봤지.
“얕보다니 무슨 소리야.”
- 봐. 말도 점점 짧아지잖아.
건방지게, 하고 덧붙이는 채우수의 말은 날이 무뎌져 오히려 부드럽기까지 하다.
“아, 서른 넘었으면 이제 위아래로 다섯 살까지는 말 놔도 돼요. 같이 나이 먹어 가는 사이에.”
- 너 태평이한테는 꼬박꼬박 누나 소리 들으려고 하더니.
“그런 얘기도 밑에서 다 들렸어요?”
- 전에 들은 소리야. 왜, 한태평이 또 네 말 안 들어?
“그냥…….”
이상한 노릇이다. 나는 아직도 여전히 채우수가 새롭고 낯설기만 한데 채우수는 나에 대해 사소한 것도 다 아는 척 퍽이나 다정하게 굴어 댄다. 언제부터 날 그렇게 신경 써 줬다고 이렇게.
- 태평이 언제 한번 밑에 내려오라고 해.
“한태평은 왜요.”
- 걔 아직 정신 차리려면 멀었어. 일주일 전에도 오토바이 타다가 걸려서 내가 한 소리 해줬는데 태평이가 그 말 안 해?
“…….”
- 보나 마나 안 했겠지. 친구 거라고는 하던데 잘 살펴봐.
“…….”
- 그래도 태평이가 네 생각 많이 해. 꼴에 남자라고 너 혼자 집에 있으면 위험하다면서 이것저것 신경도 많이 쓰고.
“…….”
- 듣고 있어? 너 왜 말이 없어.
채우수의 목소리가 어둠 속으로 침잠했다. 어둠이 까맣게 삼켜 버린 건 내 머릿속일지도 모르겠다. 자냐고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숨을 죽였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던 것도 같다. 아니, 사실 채우수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 아직 안 자는 것 같은데, 한연두.
“…….”
- 아까 일은.
“…….”
- 아니다. 그건 얼굴 보고 얘기하자.
“…….”
- 잘 자, 한연두.
어느 순간 채우수의 목소리도 지우고 휴대폰 불빛마저 앗아 간 어둠이 깊게 가라앉았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마음이 목적지도 잊은 채 방황하기 시작했다. 어디를 봐야 하는지도, 어디를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완벽한 궤도 이탈. 경고음은 쿵쿵거리는 내 심장 소리뿐이었다.
* * *
오랜만에 비가 내렸다. 새벽부터 돌풍을 동반한 폭우에 아침부터 안전 문자만 몇 개를 받았는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문자가 9시쯤이었고 그 뒤로 한참을 잤으니 지금은 낮이 분명한데 밖은 여전히 깜깜해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불규칙적으로 베란다 난간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가 몸을 일으켰다.
쿵, 소리를 내며 침대 밖으로 떨어진 발꿈치가 머쓱하다. 아래층에서 채우수가 또 들었을까. 이건 뭐 채우수와 한 공간을 공유하는 느낌이다. 쓸데없이 신경 쓸 일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다.
대충 양치부터 하고는 방으로 돌아와서 휴대폰을 확인했다. 벌써 오후 3시. 도대체 얼마나 잔 건지도 모르겠다. 몇 가지 광고 알림을 지우고 채우수와의 대화창을 확인했다. 토요일에 보자던 채우수는 아직 아무 연락이 없다.
뭐……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다. 어제 그 섹스가 그런 식으로 흐지부지되어 버렸으니 채우수도 내 얼굴 보기가 멋쩍을 수도 있지. 채우수는 생긴 것에 비해서 삶은 무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어제 날 보고 짓던 그 표정은 멸치 속에 따라온 꼴뚜기와도 같았으니 채우수의 심리 상태는 굳이 되짚지 않아도 알 만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매너 없는 행동이 용납되는 건 아니다.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화장대 의자를 발로 툭툭 찼다. 이 정도면 아래층에도 들렸겠지. 나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자를 응징하듯이 윗집 사람이라는 권력을 휘둘렀다. 쿵쿵 무거운 소리가 발끝에서 퍼졌다.
물론 채우수와 몇 시에 보자고 정확하게 정한 것도 아니고 아직 그 약속이라는 게 취소된 건지, 아니면 미뤄진 건지도 모를 일이다. 밖은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고. 이런 날 둘이 만나 봤자 할 게 뭐가 있겠어. 기껏해야 욕정에 취해 몸이나 섞고…….
조용한 휴대폰을 내려다보는 눈이 무감해졌다. 채우수를 고작 그 정도의 소모품으로 대한다면 나쁠 건 없다. 나쁠 게 없다가 아니지. 꽤 괜찮지. 아니, 아직 제대로 해 보진 않았으니 괜찮을 거라고 하는 게 맞다.
굳었던 몸을 길게 늘이자 묵은 소리가 마른 입술을 비집고 빠져나왔다. 팽팽히 당겨졌던 마음도 긴장이 풀려 흐물흐물 한결 가벼워졌다. 채우수에게 먼저 전화를 해 볼까. 간밤에 안녕하셨는지 문안 인사와도 같은. 그러나 그런 대접을 받을 지체 높은 양반은 못 되는지 휴대폰이 채우수의 이름을 띄우며 징징 울렸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 그러니까 몇 신데 여태 잔 거야, 너는.
“깬 지는 좀 됐거든요?”
- 내려와.
“……벌써 하게요?”
- 하긴 뭘 해. 너 밥 먹어야 할 거 아냐.
아……. 몸을 조금 숙여 화장대 거울을 들여다보며 엉망인 머리를 쓱쓱 정리했다. 귀 뒤로 넘긴 머리카락이 오늘따라 유난히 짧았다. 이제 머리카락을 좀 길러 볼까. 턱을 이리저리 치켜올리며 방향을 바꾸자 해쓱한 볼이 어쩐지 볼품없어 보였다.
입 안에 머금은 공기를 양쪽으로 굴리면서 볼을 쓸던 손을 내려 갈아입을 옷을 뒤적거렸다. 옷이 왜 이런 것밖에 없지. 쇼핑을 너무 오래 안 했나 보다. 며칠 전까지도 잘만 입던 옷들이 거적때기 같다. 그중 제일 깨끗한 옷으로 바꿔 입고는 현관으로 나갔다. 한태평의 어글리운동화가 없는 걸 보니 비를 뚫고 또 어딜 나갔나 보다. 공부라도 하러 간 거면 다행일 텐데.
바람 때문에 거세게 닫히는 현관문 소리에 깜짝 놀라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바람 한번 살벌하게 분다. 비가 그치고 나면 꽤 쌀쌀해질 것 같다. 문득 느껴지는 한기에 팔짱을 낀 채 계단을 내려갔다.
한 칸씩 아래로 내딛는 걸음에 울렁거리는 건 꽤 오랜 시간 공복이어서 그런 듯하다. 마지막 계단을 디딜 때쯤 채우수네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멸치 육수 냄새를 등에 업은 채우수가 턱을 까딱인다. 안 들어오고 뭐 하냐는 눈빛은 어떤 사명감이라도 가진 것 같다.
채우수를 따라 들어가서 식탁 의자를 하나 빼내어 앉았다. 이렇게 보는 뒷모습은 꽤 낯설다. 파를 써는 소리가 투박한 듯하지만 질서는 있다. 춥지도 않은지 검은 반팔 아래로 잔근육들이 칼질 한 번에 소심하게 춤을 춘다.
그 춤사위가 제법 귀여워 싱거운 웃음을 품었다가 얼른 놓아줬다.
“원래 집에서 밥 자주 해 먹어요?”
“원래가 어디 있어 원래가.”
“어쩐지.”
분명 숙련된 몸짓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생존 요리를 하는 듯한 움직임. 그럼에도 벌써 맛있는 냄새가 풍기는 것이 허기진 배가 용트림이라도 할 것만 같다.
“한연두, 너 몇 시에 잤어.”
“……전화 받다가 잠든 것 같은데.”
등을 돌려 내 얼굴을 확인하는 그의 표정이 어이없다는 듯 구겨졌다. 말 뒤꼬리를 잘라 버려서 그런 건가. ‘요’를 붙이려고 입술을 둥글게 모았다가 그냥 시선을 돌렸다.
“천둥 치면 무섭고 그래, 너도?”
“딱히……. 그런 건 안 무서워요.”
너도 그러냐는 말이 가랑비처럼 젖어 들었다. 누가 천둥 따위에 겁을 냈을까, 채우수 앞에서. 못마땅한 마음에 관자놀이께에 붙인 손가락을 구부려 기울어진 고개를 받쳐 들었다.
“그럼 뭐가 무서운데.”
이 나이에 뭐가 무서운지 묻고 답하는 게 새삼스럽기도 하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불이라고 대답하자 칼질 소리가 짧게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선배도 다 봤으니까 하는 말인데 나 중학생 때 집에 불났거든요.”
“…….”
“다친 것도 그때예요. 옷에 불이 옮겨붙는 바람에.”
“…….”
“선배 불난 거 가까이에서 본 적 없죠? 난 지옥 불이 왜 지옥 불이라는 건지 알았잖…… 뭐야, 국물 넘치잖아요!”
식탁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가스 불부터 줄였다.
“불 무섭다는 얘기하는 중인데 불조심을 안 해.”
불이 무서운 건 나보다도 채우수였던가. 하얗게 질린 얼굴이 험상궂은 팔뚝과 따로 놀았다. 이래서 오늘 밥이나 제대로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할까요?”
“됐어.”
“또 기절할 거 같고 그래요?”
“제발 한연두 너나 좀 신경 써.”
참나. 그럼 그렇지. 채우수에게 가졌던 좁쌀만 한 걱정도 그새 달아났다. 그렇다고 ‘제발’까지 붙일 건 또 뭐야.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든 적이 한 번도, 단 한 번도 없다. 이렇게 내가 제 걱정을 사서라도 해 주고 있으면 빈말이라도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 줄 것이지. 팽하니 돌아서서는 의자에 다리를 꼬아 앉았다.
“선배가 잘 모르나 본데 나는 다정한 남자를 좋아해요.”
제법 도도하게 내뱉은 말에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이냐는 눈빛이 돌아왔다.
“사람이 염치를 알고, 받은 건 배로 돌려주고.”
“너 내가 지금 염치도 모른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염치도 모르는 내가 싫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둘 다요.”
입천장에서 혀를 똑, 튕기는 소리가 건방졌다. 제가 짓는 표정이 더 건방진 줄도 모르고 채우수는 나를 보고 예의 없다는 식으로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인정하기 싫은가 봐요, 그런 건 또.”
“적어도 한연두한테는 안 듣고 싶은 말이야.”
“이상한 경쟁 심리가 있나 봐.”
“앉기나 해.”
“앉아 있잖아요?”
식탁 위로 반찬을 나르던 채우수가 똑바로 앉으라는 듯 겹쳐진 다리를 쳐다봤다. 뭐 이런 것까지 잔소리인가, 꼰 다리를 풀었다가 반대 방향으로 꼬았더니 비뚤어진 채우수의 입술을 비집고 빠져나온 헛웃음이 냉장고 쪽으로 흘러갔다.
나는 반찬이 하나둘씩 식탁 위를 채우는 걸 가만히 앉아 구경만 했다. 대화가 끊긴 주방에는 펄펄 끓는 국물 속으로 수제비 반죽이 퐁당대는 소리만 들렸다.
“딴것도 많은데 웬 수제비예요, 귀찮게?”
“그러게.”
그릇에 옮겨 담은 수제비마저 맛을 내는 걸 귀찮아하는 모양새다. 간단히 밥이나 먹지, 반죽은 왜 이렇게 두껍냐느니 하는 소리는 삼킨 채 뜨거운 국물을 한 모금 입에 넣었다.
“…….”
“…….”
은근히 맛 평가를 기대하는 채우수의 시선이 내 입술 끝에 닿아 있다. 솔직하게 말해 주는 게 좋을까. 그래도 예의를 차려야 할까.
“먹을 만해요.”
“됐네, 그럼.”
좁힌 미간의 주름이 하나씩 펴지더니 채우수의 보조개가 예쁘게 피어났다. 양파 탓인지 삼삼했던 국물이 달다.
“입맛이 형편없이 관대하네, 너.”
날 따라 국물을 한 모금 입에 넣던 채우수가 인상을 구겼다. 자기가 만들어 놓고 맛 평가를 제대로 못한 내 탓이라는 태도는 그저 황당하기만 하다.
채우수는 그렇게 숟가락을 열 번도 들지 않고는 내가 먹는 걸 쳐다봤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체할 것 같았지만 눈을 마주치면 잘 씹어 삼킨 것도 도로 뱉을 것 같아 그릇에 고개를 떨군 채 입을 오물거렸다.
“있죠.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려요, 선배.”
“내가 너 건드리는 건 아니잖아.”
“근데 부담스럽게 왜 자꾸 쳐다봐?”
“너 먹는 게 신기해서.”
깻잎 반찬으로 젓가락을 뻗자 채우수가 팔짱을 풀고는 깻잎을 한 장씩 잡아 줬다. 원하지도 않은 배려는 오히려 속셈이 무엇인지를 따져 보게 만든다.
“나야 늦게 일어났다 해도 선배는 지금 먹는 게 점심이에요, 저녁이에요?”
“아침.”
“뭐야, 하루 종일 그럼 아무것도 안 먹었어요?”
그렇다는 듯 짧게 끄덕이는 얼굴이 평소보다 초췌한 것도 같다. 잠을 못 잤을까, 어두운 낯빛에 되레 궁금증만 쌓였다. 어제 일 때문일지, 오늘 얼굴 보고 하겠다는 말은 어떤 말이었을지 맞붙은 입술을 떼어 내려는 그 순간 천장이 무너질 듯 쿵쿵대는 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태평이 왔네.”
“세상에, 윗집 소리가 이렇게까지 잘 들렸어요?”
“내가 다 들린다고 했잖아.”
윗집이 빈집이라서 층간소음은 잘 모르고 살았던지라 이 정도로 소리가 크게 들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천장으로 향했던 눈을 채우수에게로 내렸다.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아 하니 어쩐지 더 미안한 마음이다.
“나도 저렇게 크게 소리 내요? 한태평처럼?”
“적당히.”
“세상에. 그 소리를 다 참고 살았어요? 나라면 진작에 이사 갔어.”
“좀 참고 살다 보면 익숙해져.”
익숙해질 일도 참 없다 싶다. 한태평이 화장실에 다녀온 뒤 냉장고 앞에서 잠시 멈춘 후, 제 방으로 향하는 발소리는 굳이 직접 보지 않아도 눈에 선명한 장면을 만들어 냈다.
“웬일이야. 이거 완전, 완전 사생활 침해 같아요.”
“누구 사생활. 설마 너?”
“당연히 나죠! 내가 집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모르는 사람이 다 알게 됐는데.”
“내가 모르는 사람은 아니니까 걱정 마.”
그러니까 더 찝찝하단 소리지. 옛날에 지은 아파트가 층간 소음이 별로 없다는 말도 다 들어맞는 건 아닌가 보다. 나랑 한태평이야 여유가 없어 이사 갈 엄두도 못 낸다지만 채우수는 돈도 많은 인간이 왜 꾸역꾸역 이런 곳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 먹었으면 이제 올라가.”
깍두기를 씹는 소리에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앞으로 뺐다. 가늘게 뜬 눈으로 저를 쳐다보자 채우수가 턱짓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그냥 집에 가라구요?”
끄덕이는 고개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이건 무슨 새로운 수작질인가 하는 생각도 잘게 흩어졌다.
“이대로 가라고? 진짜?”
“왜. 내가 너 집 앞까지 데려다줘야 해?”
“그런 말이 아니라…….”
원래도 썩 다정한 인간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까칠했다. 날 선 시선으로 그의 얼굴에 돋친 잔가시들을 쳐 내자 채우수가 하아, 한숨을 내쉬며 큰 손으로 제 얼굴을 쓸었다. 저것 봐. 또 상대하기 귀찮으니 알아서 꺼지라는 저 재수 없는 태도.
“……반지 뺐네요?”
그러면서도 오른손에 있던 반지, 어제까지만 해도 끼고 있던 그 반지가 없다는 것에 생각이 쏠리자 어쩐지 속이 더 답답해졌다. 마른세수를 하던 채우수가 내 말에 손등 사이로 얼굴을 내보였다. 일그러진 표정이 내가 반지를 빼든 말든 네가 뭔 상관이냐고 묻는 듯하다.
“진짜 올라가요?”
“왜. 너 나한테 볼일 있어?”
처음부터 밥 먹자고 부른 것이니 남은 볼일이 없는 건 당연하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서…….
“오늘 기껏 이런, 이런 수제비나 먹이려고 시간 비워 두라고 한 거예요?”
“계획이 수정됐어. 이따위 수제비여서 유감이지만.”
“……원래 뭐였는데요.”
내 말에 반찬 통을 정리하던 채우수의 오른쪽 눈썹이 들썩였다. 피식거리며 끌어 올린 입매 끝에 보조개가 파였다. 아는 답을 물어봐 놓고 마음을 졸이는 이유는 엉뚱한 대답이 나올까 두려운 탓일까, 기대한 답이 바뀐 것에 실망한 탓일까.
“무슨 마음을 먹고 내려온 거야, 한연두.”
“별생각 안 했어요. 그냥 밥도 먹고 다른 것도 먹고….”
“뭐?”
“아니……. 후식 같은 거 말이에요. 웃겨. 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너야말로 무슨 수작질이야.”
눈치 하나는 더럽게 빨라서 수작질이 통할 것 같지도 않은 인간이 재밌다는 듯 내걸었던 웃음기를 싹 지워 냈다.
“난 한연두 너랑 섹스할 생각 없어.”
이제 와서 갑자기 왜 그럴까. 놀란 듯이 눈을 키우자 채우수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싫다며.”
“언제부터 선배가 내 말을 그렇게 잘 들었다고?”
피곤함을 가득 담은 채우수의 눈에 언뜻 스치는 감정이 차갑다. 그러고는,
“그냥 내가 너랑 하기 싫어졌어 이제.”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말들이 재가 되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6. 열역학 제2법칙
자연의 과정들은 대부분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물속에 떨어뜨린 잉크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번져서 물과 구분할 수 없게 되고, 불에 탄 나무는 재가 되고 연기마저도 공중에서 흩어진다. 이처럼 자연계는 질서에서 무질서한 방향으로 흐르며 퇴화하고 붕괴된다.
채우수와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며칠간의 짧았던 들뜬 상태를 지우고 보자면 우리는 겉으로는 예전과 같은 질서를 되찾는 듯했지만 속으로는 자연의 섭리에 충실하여 비가역적인 상태에 도달했다. 한마디로 채우수와 나와의 관계는 다시는 예전으로 돌이킬 수 없는 혼돈, 무질서 상태에 이르게 됐다는 말과 같다.
그날의 채우수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걸 감사해야 할 정도로 날 자극했다. 만약 내게 총이 있었다면 나는 채우수의 머리통을 바로 날려 버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러시아 고위 간부의 딸만 됐더라도 채우수에게 홍차 정도는 보낼 수 있었겠지만, 선량한 소방관의 딸에게 폭력적인 행위는 양심상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얄팍한 자존심을 한 번 더 구기면서 나랑 자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남자에게 왜냐고 되물었고 채우수는 터진 입을 제어하지 못하는 듯 그 뒤로도 몇 가지 황당하기 짝이 없는 말들을 나불거렸다.
‘이제 너 재미 없어졌어.’
허, 누군 뭐 재밌었다고.
‘생각해 봤는데 한연두 너랑 섹스할 정도까진 아닌 것 같아.’
별……. 그 정도라는 것은 대체 어떤 기준으로 정한 건지.
‘그러게 좀 튕기지 그랬어. 네가 그렇게 빨리 넘어올 줄은 몰랐지.’
“이런 미친 새끼가…….”
“누구한테 하는 말이에요?”
젓가락으로 식판을 내리치자 마주 보고 앉은 주재희 선임이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설마 저를 보고 그러냐는 듯 눈동자를 사시나무처럼 떠는 꼴이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냥……. 요즘 쓰레기들이 너무 많잖아요. 뉴스에도 많이 나오고.”
“어휴 그렇게 스트레스 받으면서까지 뉴스 왜 봐요. 한 선임님 요즘 하루에 한 번씩은 욕하는 거 알아요?”
“욕으로 끝나는 게 다행이네요.”
숟가락으로 채우수 머리라도 때리고 나올 걸 그랬나. 늘 그렇게 후회는 뒤늦게 찾아온다. 채우수의 집에서 수제비를 먹은 지도 벌써 2주 가까이 지났다. 다시 말하자면 2주 가까이 채우수와 냉전 상태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 냉전이라는 것이 전적으로 내게만 해당되는 것인 양 채우수는 멀쩡한 꼴로 돌아다니는 것이 여간 속이 뒤틀리는 일이 아니었다.
“근데 한 선임님 소개팅도 거절하더니, 요즘 연애해요?”
“내가요? 갑자기요?”
“분위기가 좀 달라졌는데.”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그렇잖아도 작은 눈을 한껏 좁히면서 내 얼굴을 훑는 주재희의 시선이 마뜩잖다.
“연애는 무슨. 주위에 연애할 남자라곤 씨가 말랐는데요.”
“그러게 내가 소개팅 잡아 준다고 했잖아요. 다시 잡아 봐요?”
“됐어요.”
“왜, 그러지 말고 말 나온 김에 해 봐요. 내가 찾아볼게.”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주재희의 웃음에 빈정이 상한 것도 같다. 먹은 게 얹히기라도 한 듯 속이 답답해져서 수저를 내려놓자 다 먹었냐는 시선을 보내던 주재희가 내 식판에서 메추리알 반찬을 하나 가져갔다.
“주 선임님, 나 남자 얼굴 엄청 보는 거 알죠.”
“알지. 한 선임님은 남자 얼굴만 보잖아요.”
“나는 끼리끼리라는 말을 종교처럼 믿어요.”
주재희 선임 주위에 있는 남자들은 안 봐도 그만이라는 얘기가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입술을 꾹 눌러 삼켰다. 내가 남긴 반찬을 거리낌 없이 먹어 대는 주재희를 보니 어쩐지 비위가 상하는 건 도리어 나다.
“솔직히 말해서 저번에 소개팅해 주려던 사람은 좀 별로긴 했어. 책임님도 그때 옆에서 뭐라고 하더라고. 마침 내 친구 중에 급매물 있는데 이제 곧 크리스마스고 하니까 외로운 영혼들끼리 만나 보는 건 어때요.”
연애해요, 연두해요. 주재희가 모 식품 회사 광고 노래를 개사해서 불러 대자 옆 테이블의 시선이 짧게 모였다가 흩어졌다. 채우수는 참 불쌍하기도 하지. 이렇게 눈치 없는 직원들을 둘이나 거느리고 일해야 하다니.
“한 선임님, 남자 키는 잘 안 보죠?”
“왜 안 봐요. 난 188 밑으로는 안 사귀는데.”
“와, 욕심이 지나치시네. 우리 회사에, 아니 대한민국에 188 넘는 남자가 얼마나 된다고 그래요.”
“더러 있어요.”
“아, 채 책임님은 190도 넘으시던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볼 안쪽을 짓씹었다. 다행히도 잔반 처리에 여념 없는 주재희는 어색한 내 행동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근데 한 선임님 눈에도 요즘 책임님 얼굴 별로지 않아요?”
“글쎄요. 요새 얼굴 볼 일이 통 없어서요.”
“엥, 오늘 오전에 미팅했잖아요?”
“……뭐 그렇게까지 관심 갖고 쳐다보진 않아서.”
“한 선임님도 나중에 봐 봐요. 책임님 요즘 부쩍 초췌하다니까?”
그런가……. 그날 이후로 의식적으로 날 멀리하는 듯한 채우수에게 나도 딱히 별 관심을 주진 않았다. 피해 다니는 건 내 주특기였으니 눈에 뻔히 보이는 채우수 행동이 마음에 안 들었을 뿐.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 지내는 줄 알았는데 남들 눈에 초췌하다니 괜스레 또 걱정이 앞섰다. 그러고 보니 살이 조금 빠진 것도 같고. 어디 또 아프기라도 한 건가……. 주제넘은 오지랖이 자존심도 없이 휘날렸다.
“아무튼 어른들 하는 말 다 틀린 게 없어요. 남자 인물 아무리 좋아 봤자 서른 넘으면 다 똑같은 아저씨야. 책임님이나 나나 똑같지 뭐. 안 그래요?”
“전혀 안 그래요.”
대체 남자들의 이 자신감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채우수가 몇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도 주재희보다는 나을 거라는 말이 입술 끝에서 맴돌았다.
“뭐야, 한 선임님도 책임님 좋아해요?”
“세상에, 내가 왜요.”
“그게 아니면 동문이라고 감싸 주는 건가.”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는걸요.”
과연 채우수와 나 사이를 친하다고 정의 내릴 수가 있을까. 한때는 분명 친하다면 친한 범주에 있던 사람이었지만 뚝뚝 끊겨 버린 우리의 관계는 지금은 어떤 선 위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니, 내가 그 생각을 왜 못 했지? 이참에 둘이 잘해 보는 건 어때요. 책임님도 솔로잖아요?”
“싫어요! 책임님은, 책임님은 죽어도 싫어요.”
“왜, 책임님 좋아하는 직원들 은근 많던데.”
주재희의 말에 잊고 있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워크숍 때 채우수에게 꽂히던 지나친 관심들과 밸런타인데이라고 어디서 받았다며 채우수가 고스란히 팀에 나누어 주던 초콜릿들을 비롯해서 아니, 그땐 그런 미친 짓을 왜 회사 사람에게 하냐고 비웃었지만 은연중에 무시했던 그 모든 행위들은 결국 채우수가 인기 많다는 방증이었다. 그것들이 이제야 신경 쓰인다는 것은 역시 채우수가 게이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한 선임님, 내 말 듣고 있어요?”
“네?”
“한 선임님 눈에는 채 책임님 별로냐고요.”
“아, 그냥 사람이 좀…… 재수가 없잖아요. 정도 없고.”
“채 책임님이요?”
흠, 그런가. 입꼬리를 아래로 내리면서 생각을 되짚는 주재희는 내 말에는 크게 공감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하긴. 정이 없긴 하지. 책임님 퇴사 얘기도 우리한테 안 했잖아요.”
“잠깐만요. 채우수가, 아니 책임님이 회사 그만둔대요?”
“이럴 줄 알았어. 한 선임님도 처음 들었죠?”
“누구한테 들었어요 그 얘기?”
“데이시프트 팀에서 그러던데요.”
세상에, 별꼴이야. 갑자기 무슨 퇴사를 해. 설마 내가 보기 싫다고 퇴사까지 하는 거야 뭐야. 허, 웃기지도 않은 소리에 얼굴 근육이 딱딱하게 굳었다.
“책임님 지금 어디래요?”
“나야 모르죠. 아까 라인 들어간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나는 잔반 처리를 마친 주재희에게 식판 정리까지 떠넘기고는 식당을 빠져나왔다. 와, 채우수는 도대체 뭔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기가 차서 흘려보내는 웃음이 찬 바람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채우수는 정말이지 신경을 안 쓰려고 해도 안 쓸 수가 없는 인간이었다.
* * *
라인에 들어갔다던 채우수는 물론이고 실험실로 간 주재희까지 자리를 비운 오후 시간대의 사무실은 조금 한산한 편이었다. 누군가가 멀리서 펜을 똑딱이는 소리가 이따금씩 머리를 어지럽게 한 것만 빼고는 오히려 차분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내게는 다행이었다.
당장이라도 채우수에게 달려가 따져 묻고 싶던 마음은 생각을 거듭할수록 조금씩 흐려졌다. 어디까지나 내가 채우수의 퇴사 이슈를 따져 물을 수 있는지 당위성이 부족했던 탓이었는데, 그 당위성의 견고함에 따라 말싸움의 승패가 좌우될 게 뻔할 노릇이니 나로선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책임님! 얘기 좀 해요.”
“보고할 거 있으면 내일 하세요.”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이 내게 얼마나 설레고 긴장되는 시간이었느냐 이 말이다. 나는 채우수가 퇴근하기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눈치를 살피다가 그가 일어나자마자 곧장 뒤따라 일어섰고, 날 따돌리려는 발걸음을 겨우 따라잡으며 그가 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아니, 일 얘기 말고 선배랑 나…….”
“회사야. 조용히 해.”
“아, 무슨 상관이야. 그냥 우리 얘기 좀 하자구요.”
간만에 나누는 사적인 대화에 어딘가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나던 반가움은 채우수의 뾰족한 표정에 찔려 터져 버렸다.
“너랑 할 말 없어.”
“내가 있어요. 그…… 퇴사한다는 얘기는 뭐예요?”
“누가 그래?”
“직원들 사이에 소문 다 났던데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아주 근거 없는 헛소문은 아닌 모양이다.
“왜 갑자기 그만둬요?”
“내 일이야. 네가 알 거 없어.”
“혹시 나 때문이에요?”
“…….”
“내 얼굴 보는 게 그 정도로 불편해서?”
정곡을 찔린 듯한 표정이다. 이제는 불편한 기색도 감출 생각이 없는지 내 얼굴을 싸리 빗자루 쓸 듯 지나가는 채우수의 시선은 노엽기까지 하다.
“그래. 그런 이유도 없지 않아 있어.”
“도대체 왜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네가 잘못했다고 한 적은 없어.”
어느새 주차장으로 도착한 발걸음 소리가 스키드 마크라도 만들 것처럼 빨라졌다. 채우수는 뻔히 아는 길을 물어보는 도쟁이라도 떼어 내듯 긴 다리를 성큼성큼 움직여 제 차로 향했고, 나는 그가 만든 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잰걸음으로 그를 뒤따랐다.
“말만 그러면 뭐 해. 요즘 책임님 하는 거 보면 내가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굴잖아요. 꼴도 보기 싫다는 것처럼 도망이나 다니고.”
나는 채우수의 코트 소맷자락을 꽉 붙들었다가 주위를 의식하는 듯한 그의 시선에 덩달아 눈동자를 굴렸다. 맥없이 힘이 풀린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그의 코트 소매가 꼭 내 마음같이 구겨졌다.
“혹시 내 몸에 화상 흉터 있다고 미리 말 안 해 줘서 그래요?”
“그런 거 아니야.”
“자기 전에 미리 말 안 한 게 내 잘못이라면 사과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아니라니까?”
“미안해요. 그런 걸로 놀라게 했다면.”
진심이었기에 딱히 자존심을 굽힐 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기분이 더러워지는 것은 날 쳐다보는 채우수의 표정 때문이었을까. 채우수는 욕지거리를 참아 내는 듯 턱 근육을 움찔거리고는 운전석 문을 열며 내게 짜증 난다는 시선을 던졌다.
“참 여러모로 쉬워서 좋겠네, 한연두 너는.”
“……내가 뭐가 쉬워요?”
하지만 내가 아무리 자존심이 없대도 쉽다는 말에 반응하지 않을 만큼은 아니었다. 그를 따라 조수석에 오르자 안전벨트를 하던 채우수의 손이 멈칫했다.
“너 타도 된다는 말은 안 했는데.”
“말해 봐요. 내가 뭐가 쉽냐고.”
하아, 길게 내뱉는 한숨이 쓰다. 보조개 같은 건 언제 보였나 싶을 정도로 메마른 입매에 웃음기라고는 없이 건조하기만 하다.
“네 모든 행동이 짜증 나게 쉬워. 이렇게 남의 차에 막 타는 것부터 시작해서.”
“말 돌리지 말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똑바로 말해요.”
“……벨트나 해.”
어긋나는 시선에 속이 부대끼는 듯 울렁거렸다. 남의 속도 모르고 주차장을 거칠게 빠져나가는 차는 차주의 괴팍하기 짝이 없는 성격을 반영하기라도 한 모양이다.
“웃겨. 쉽긴 뭐가 쉬워. 내가 쉬운 게 아니라 선배가 위선 떠니까 혼자 어렵고 복잡한 거예요.”
“…….”
“솔직하게 말하면 그거 아니에요? 계기야 어떻든 나랑 자고 싶어서 며칠 동안 수작 부렸는데 막상 벗겨 놓으니 상태가 안 좋아.”
“한연두.”
“섹스할 마음도 이제 없어졌어. 근데 계속 얼굴 마주치자니 불편해. 이 간단한 마음을 포장하려니까 자꾸 복잡해지는 거잖아요.”
“넘겨짚지 마. 네가 뭘 안다고 떠들어.”
내가 알아야 할 게 대체 뭐야. 내 왼쪽 뺨을 뚫어 버릴 듯한 눈빛이 뒤에서 울리는 클랙슨 소리에 전방으로 향했다.
“선배가 날 두고 그렇게 생각했대도 놀랄 것도 없어요, 나는. 애초에 선배한테 뭘 기대한 적도 없고.”
“…….”
“내가 선배랑 잘 뻔했다고 선배에 대한 내 감정이 바뀐 게 아니란 말이에요. 난 여전히 선배가 재수 없고 싫으니까.”
“잘됐네. 내가 싫은 이유 하나 더 늘어서.”
누구 것인지 모를 헛웃음이 쓸쓸히 흩어졌다. 생각해 보면 채우수는 내가 저를 싫어한다는 걸 은근히 즐기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선배랑 이런 식으로 답답한 사이가 되긴 싫어요.”
“…….”
“책임님이 자꾸 나 피해 다니는 것도 꼴 보기 싫구요.”
“…….”
“아니, 그렇다고 퇴사까지 할 일은 아니잖아요. 뭐가 그렇게 극단적이야…….”
차창 밖으로 크리스마스트리 조명에 팔렸던 눈길을 정리하며 운전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보던 트리 조명이 채우수의 눈동자에 그대로 녹아든 것도 같다. 순간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린 듯 갈피를 잃은 시선이 바뀐 신호를 가리키며 제자리를 잡았다.
“그래요. 뭐 퇴사할 수도 있지. 선배 인생이니까. 근데 그런 거 다 떠나서 나는 선배가 혼자만 다시 원점을 찾았다는 게 너무 불쾌해요.”
“무슨 원점을 찾아, 내가?”
“그렇잖아요. 날 막 갖고 놀면서 정신 빼놓을 땐 언제고 이렇게 혼자만 멀쩡하…… 근데 어디 아픈 건 아니죠? 안색이 진짜 왜 그래.”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그래서 한연두 네가 지금 원하는 게 뭔데.”
에둘러 말했지만 본질은 결국 간단했다. 채우수와 내가 같은 원점을 밟을 수 있게끔 만드는 단 한 가지의 방법.
“그…… 그, 한 번만 해요.”
“뭘 해.”
“선배가 내 흉터 때문에 마음 식은 게 아니라면 깔끔하게 한 번만 자고 끝내자구요. 선배가 하기 싫든 말든 내가 하고 싶으니까. 이왕 깐 거 끝은 봐야겠으니까.”
한연두 너는 자존심도 없냐는 말이 굳이 입 밖으로 소리 내지 않아도 온몸으로 전달됐다. 애초에 습자지처럼 얇디얇았던 것이 내 자존심인데 또 한 번 구겨져도 뭐 어떨까. 어차피 우리 관계의 변형은 내 손짓 한 번에 시작됐거늘. 완벽하게 돌이킬 수 없다면 뭐라도 제대로 된 결괏값을 구해야 한다. 나는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채우수를 쳐다보며 가볍게 웃었다. 정작 제대로 구겨진 건 내 자존심이 아니라 채우수의 얼굴인 것에 더 기뻐하면서.
* * *
내 말에 얼굴을 한껏 구기던 채우수는 밥부터 먹자며 근처 백반집에 차를 댔고 우리는 별다른 대화 없이 저녁을 먹었다. 카운터에서 누가 계산하느니 하는 실랑이를 벌였다가 채우수는 백반집 주인아주머니로부터 잘생긴 총각이 어디서 여자 친구 카드나 꺼내게 하냐며 꾸지람을 들었고, 여기에 다소 빈정이 상한 듯한 채우수는 근처 호텔로 차를 몰아서는 남는 것 중에 제일 좋은 객실로 달라는 패기를 부리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호사스러운 하룻밤을 원한 건 아니었으나 우리는 그렇게 호텔 방 안에 들어왔다. 호기롭게 자자고 말을 던진 건 나였다지만 막상 섹스만을 위해 들어선 공간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고 채우수는 그런 날 비웃는 듯 먼저 씻고 오겠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오기에서 비롯한 말이 만들어 낸 즉흥적인 밤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았다. 채우수는 물기를 제대로 닦지도 않은 몸에 배스 가운을 걸친 상태로 호텔 방 한구석에 굳어 있는 내 등을 떠밀었고,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욕실에 마지못해 들어간 나는 샤워 후 배스 가운을 걸치는 순간까지도 얼떨떨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아직 도망 안 갔네요?”
“도망가길 바란 거라면 지금이라도 모른 척 가 주고.”
“그럴 거면 호텔에 같이 오지도 않았어요.”
얇게나마 남아 있던 걸 접고 접어 두께를 늘린 자존심은 적당량의 용기로 치환되었다. 비록 그 용기 낸 움직임이 침대에 기대앉아 날 차갑게 응시하는 채우수의 시선에 무너져 버리긴 했지만.
“해 봐, 이제.”
“……뭘 해요.”
“네가 하고 싶은 거 먼저 해 보라고.”
채우수가 가까이 오라는 듯 턱짓했다. 등줄기로 닦이지 않은 물이 흘러내렸다. 오후 내내 고민한 결과물치고는 성급하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이제야 몰려들었다.
“내가 벗겨 줘? 아님 내가 먼저 벗을까?”
“아, 아직 벗지 마요!”
“너 좋을 대로 해. 가만히 있어 줄게.”
내 얼굴을 담은 무심한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나는 채우수의 허벅지에 걸터앉았다. 내 움직임에 맞춰 살짝 흔들리던 그의 눈이 이내 재밌다는 듯 꼬리를 휘었다. 그와 맞닿을 듯한 아랫배가 벌써부터 단단하게 뭉치는 기분이다.
“뭐부터 할 건데.”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에 눈꺼풀이 떨렸다. 키스? 끝을 올린 두 음절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그의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까짓거 뭐. 더한 것도 할 건데 키스가 뭐가 어려워. 처음도 아닌데. 숨을 들이마시며 채우수에게 다가갔다.
채우수의 이마를 반쯤 가린 흑갈색 머리카락이 여전히 촉촉했다. 기분 탓일까. 그의 눈도 물기를 머금은 것만 같다. 반듯한 코를 지나 입술에 두었던 시선을 끌어 올리자 내 입술을 훑던 채우수의 시선도 덩달아 따라왔다.
“한연두, 안 하고 뭐 해.”
“있어 봐요…….”
“왜. 막상 하려니까 자존심 상해?”
“약간은 그래요.”
그제야 채우수의 표정이 느른하게 풀렸다. 자존심 탓인지 뭔지 입술을 짓씹자 채우수가 제 뒷머리를 받치던 손을 빼내어 내 입술을 꾹 눌렀다.
“한연두, 너는 문제 접근 방법부터가 틀려먹었어.”
“내가 뭘요.”
“이런 식으로 한번 자고 나면 뭐가 남아, 너한테.”
“……추억 정도는 남겠죠, 뭐. 좋든 싫든.”
허, 코끝을 간지럽히던 웃음소리가 맥이 빠진 채로 빙글빙글 맴돌았다.
“넌 내가 싫다면서 이러고 싶은 이유가 뭐야.”
“……그러는 선배는 나랑 하기 싫다면서 왜 이러는 건데요.”
아까부터 무언가가 찌르는 듯한 엉덩이를 들썩이며 시선을 밑으로 내리자 채우수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어쩐지 목까지 붉게 물들어 간 얼굴을 보니 저도 아주 감정 없는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본능이지, 나는.”
“나도 마찬가지예요. 본능적으로 선배랑 한번 자 보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말이나 못 하면.”
“대체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거예요.”
“키스 하나 제대로 못 하겠으면 그냥 내려가.”
또 발뺌이지. 그놈의 본능에 제대로 농락당해 보라지. 그의 허벅지에 앉아 엉덩이를 슬쩍 움직이자 채우수의 눈썹이 뒤틀렸다. 배스 가운 밑으로도 느껴지는 그의 것은 굳이 보지 않아도 어떤 상태인지 알 것 같다.
“어디까지가 진심이에요?”
“뭐가.”
“나랑 진짜 하기 싫은 거 맞아요?”
“무슨 답을 듣고 싶은 거야.”
모르겠다. 재미가 없어졌니, 쉽니 하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채우수에게서 들을 말이 또 남아 있을까. 그렇다고 그저 본능에 충실해서 이렇게까지 세우고 있단 말은 또 듣기 싫었다.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
“내가 자존심은 없지만 자존감은 꽤 높은 편인데 선배가 했던 말 때문에 요즘 잠이 안 와요.”
“넌 남자들한테서 네 자존감을 채우나 봐.”
“그런 말이 아니잖……. 도대체 왜 말을 그따위로 해요?”
“글쎄, 너 정떨어지라고?”
정말이지 떨어질 정이라도 남아 있었으면. 채우수의 어깨를 짚었던 손을 말아쥐고는 그의 가슴팍을 두어 대 때려 봤지만 짜증의 강도에 비해 내리치는 소리가 부드러워 괜한 성질만 돋울 뿐이다.
“그만 때리고 누워.”
“됐어요. 나도 선배랑 하기 싫어요 이제.”
“알아. 너 안 건드려. 건드릴 생각도 없었고.”
퍽이나……. 그를 향했던 가는눈에 돌연 천장이 비쳤다. 안 건드리겠단 말에 이건 해당되지 않는 건지, 채우수가 내 허리를 잡아 침대에 바로 눕힌 탓이다. 한 번만 자고 끝내자던 패기는 어디로 도망갔을까. 혹시나 가슴이 보일까 배스 가운 앞섶을 한 손으로 여몄다.
“누워. 잠이나 자고 가. 그냥 나가면 돈 아깝잖아.”
“그럼 선배가 자고 가면 되겠네.”
“괜한 데서 자존심 세우지 말고 누워. 너 제대로 재우려고 여기 온 거니까.”
웃겨. 뭐가 이래……. 그는 정말로 날 재우는 데 목적이 있다는 듯 침대 밖으로 빠져나온 내 다리를 집어넣고는 꾸물거리며 일어나려는 내 몸을 꾹 눌렀다. 의지와는 다르게 폭신한 시트 속에 파묻힌 몸은 어쩐지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 것도 같았다. 나는 고개만 돌린 채로 멀어지는 채우수의 뒷모습에 대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선배보다 하루라도 더 오래 살 거예요. 선배 죽는 날 파티 좀 하게.”
“고마워. 난 한연두 네가 날 죽도록 싫어하고 경멸했으면 좋겠어.”
등을 돌려 은은한 조명 밑에서 옅은 웃음을 보이던 남자는 제가 품은 감정을 굳이 구부려서는 뾰족하게 날을 세워 날렸다. 그러고는,
“앞으로도 계속 나 좋아하지 마.”
90년대 드라마 주인공 같은 대사나 치고 있다. 웃기지도 않지, 정말.
“별걱정을 다 해요.”
가당치도 않다는 웃음을 고이 받아 내던 채우수는 이제 볼일이 끝났다는 듯 벗어 놓은 옷가지들을 하나씩 꺼내어 입기 시작했다.
“뭐야……. 어디 가요?”
“집에 가야지 나는.”
“나 혼자 여기 두고?”
“왜. 너 혼자서는 잠도 제대로 못 자?”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채우수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차마 무섭다는 솔직한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혀끝에서 흩어졌다.
“돈 아까우면 선배가 자고 가요. 내가 집에 갈게.”
“됐어.”
“아님 나 잠들 때까지는 있어 줘요. 무섭단 말이야.”
배스 가운 밑으로 바지를 입은 채우수가 하아, 긴 한숨과 함께 침대 옆자리로 와서 누웠다. 그래도 혼자 있기 무섭다는 여자의 말을 거절할 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의 향수 냄새가 코끝에 훅 스며들었다. 나는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감추면서 그에게 말했다.
“안 건드리겠단 말은 지켜요.”
“너 이제 와서 태세 전환하는 건 웃기지 않아?”
“……내가 뭘.”
피식대는 웃음이 언제 말랐는지 물기를 날려 버린 채우수의 머리카락처럼 퍼석퍼석하다. 옆으로 마주 보고 누운 채우수의 얼굴에 간접 조명이 만든 그늘이 짙어졌다.
“등은 돌려주면 안 돼요?”
“왜.”
“선배 얼굴 보고 자는 거 부담스러워요.”
“…….”
“난 원래 이쪽 방향으로 누워서 자거든요.”
“나도 그래.”
하여간 고집은. 별수 없다 싶어 내가 등을 돌렸다. 기분 탓인지 목 뒤로 그의 시선이 닿는 것 같아 따끔따끔했다.
“근데 진짜 퇴사하는 거 맞아요?”
“아직 결정된 건 없어.”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이건 그냥 팀원으로서 얘기하는 건데……. 선배 퇴사 안 하면 안 돼요?”
“…….”
“아니, 책임님 나가고 나면 우리 팀 어떡해요.”
“나 하나 없다고 회사 안 망해.”
“그래도…….”
“신경 쓰지 말고 자. 나 없어도 너 일하는 데엔 지장 없어.”
그걸 해 보지도 않고 자기가 어떻게 알아. 정작 쉬운 사람은 내가 아니라 채우수인지도 모른다. 뭐가 그렇게 맺고 끊음이 간단한지. 마지막 연습장을 찢어 버린 것 같은 내 감정이 찌릿하게 퍼져 나갔다.
“아, 한태평한테 집에 안 들어간다고 연락해야 하는데.”
“걱정 마. 내가 아까 너 씻을 때 연락해 뒀어.”
웃기지도 않아. 누가 그런 것까지 신경 써 달랬나. 다시 등을 반대로 돌리자 채우수가 한 뼘은 더 가까이 다가온 기분이다. 순간 놀라 뱉지도 못할 말들이 입 속에서 쌓여 입술만 불룩하게 튀어나왔다.
“자.”
채우수가 저를 쳐다보는 눈을 큰 손으로 덮었다. 코까지 덮여 깜깜해진 시야에 얼룩덜룩한 빛이 모여들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손바닥에 닿는 속눈썹이 간지러운 듯 그가 내 눈에서 손을 뗐다.
“눈 감고 어서 자.”
“왜 갑자기 다정한 척 굴어요.”
“척이 아니라 다정한 거야.”
“나한테는 안 그랬어요 원래.”
“너한테는 원래부터 그랬어. 네가 눈치가 없어서 몰랐겠지.”
뻔뻔하기도 해라.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잘도 해 댄다.
“웃겨. 아무튼 자꾸 잘해 주는 척하지 마요. 오해할까 봐 겁나요.”
“무슨 오해를 어떻게 하는데.”
“……선배가 한태평이나 나한테 자꾸 필요 이상으로 잘해 주는 게 혹시나 다른 마음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오해요.”
“다른 마음?”
“뭐, 태평이를 좋아한다거나…… 아니면 날 좋아하기라도 한다거나.”
옆으로 누운 채우수의 얼굴에 보조개가 달처럼 걸렸다. 조명이 비친 눈이 반짝거리는 것이 이름값을 하는 듯 제법 우수에 찬 눈망울이다.
“지금 속으로 비웃었죠.”
“그냥 웃었어.”
“비웃은 거 맞네.”
어서 자. 짧게 내뱉는 말에 진심인 듯 아닌 듯한 웃음기가 서려 있다. 긴장이 풀리기라도 했는지 어느새 노곤해진 눈꺼풀을 천천히 내렸다가 접어 올리자 아직까지도 미미하게 휘어진 채우수의 눈이 물음표를 띄웠다.
“선배, 나 잠들면 진짜 갈 거예요?”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반반이에요. 나 자는 동안 선배가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는 거니까.”
어쭈, 채우수가 타박하듯 미간을 좁혔다. 그를 보던 내 얼굴도 만만치 않았던지 내 눈썹 사이를 톡톡 두드리던 그의 엄지가 내 오른쪽 눈썹을 두어 번 쓸었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어서 자. 너 요새 못 잤잖아.”
“어떻게 알아요, 그걸?”
“네가 아까 말했어. 잠도 제대로 안 온다고.”
“아아.”
잠자리가 바뀐 탓인지 쉬이 잠들 것 같지는 않은 밤. 내 잠을 재촉하기만 하는 채우수의 속셈을 내가 온전히 받아들여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그의 손바닥에 뺨을 맡긴 채로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진짜 잠만 잘 줄은 몰랐어요.”
“처음부터 잠만 자려고 온 거야. 애초에 콘돔도 없었고.”
“뭐야, 진짜…….”
“그만 쫑알거리고 잠이나 자.”
먼저 눈을 감은 채우수의 얼굴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쌓였다. 어찌 된 것이 10년 넘도록 매일같이 보던 얼굴이 왜 요즘따라 초면처럼 느껴지는 건지. 균형이 깨진 관계의 틈을 무언가가 자꾸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는 기분이다.
“잠이 안 와?”
그의 말에 벌어진 앞섶 사이로 그의 가슴팍까지 훑던 시선이 급히 제자리를 찾았다. 불순한 시선을 모른 척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채우수가 팔을 뻗어 내 등을 토닥거렸다.
“애도 아니고, 내가 너 잠까지 재워 줘야 해?”
“나도 뭐 이런 것까지 바란 건 아니네요.”
“자장가라도 불러 줘?”
시키지도 않은 짓을 제가 감히 해 주겠다며 나중엔 모조리 비용 청구라도 할 것 같은 저 행동들은 정말이지 참으로 다정하기도 하다.
“무슨. 선배 목소리는 좋지만 솔직히 노래는 진짜 못해요.”
“반쪽짜리 칭찬 아주 고마워.”
“선배 노래 들으면 오던 잠도 다 도망갈 거예요.”
“그래, 고맙다.”
“…….”
“뭘 그렇게 봐.”
“나는 채우수 진짜 모습이 뭔지 모르겠어요.”
당장이라도 내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채우수랑 그 정도까진 아닌 채우수. 그리고 지금 같을 땐 오히려……. 어디에서 시작된 건지 모를 파동에 눈동자가 빙빙 굴러가던 것도 잠시. 나는 그의 손목시계로부터 천천히 시선을 끌어 올려 날 지그시 내려다보는 그와 마주했다.
“자꾸 헷갈리게 하지 마요.”
“……뭘.”
“내가 선배를 어느 정도로 싫어해야 할지 헷갈리니까 노선을 제대로 잡으라구요.”
“넌 어떤 모습이 진짜였으면 좋겠는데.”
“뭐 지금 같은 정도면……. 적당히 싫어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고.”
설익은 웃음이 쓰다. 채우수가 등을 토닥이던 손으로 내 목뒤를 감싸더니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꼼짝없이 그의 품속에 안긴 꼴이지만 썩 괜찮은 안정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래. 너는 나 좋아하지 마, 연두야.”
“안 좋아해요. 싫어한다니까요.”
내 정수리를 꾸욱 눌러 대는 그의 턱 끝이 잘게 떨렸다. 그 진동 탓일까, 주제도 모르고 같이 쿵쿵대는 심장이 야속하다. 더운 숨이 닿을까 입술을 말아 물고 그를 올려다보자 느른하게 풀린 눈이 반쯤 접혔다.
“안 건드린다고 하지 않았어요?”
“너 재우려는 거잖아.”
순 개수작이야. 치켜든 턱을 내리고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뭣 때문인지 붉어진 얼굴을 이렇게나마 가릴 수 있다는 건 다행인지도 모른다.
“자고 가요. 도망가지 말고.”
“…….”
“응?”
“그래, 그럴게.”
“나보다 먼저 잠들지도 말구요.”
“여태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어.”
시답잖은 허세에 터진 숨이 꽉 조여 오는 그의 품속에서 제대로 흩어지지도 못하고 눅눅하게 데워지자 숨이 점점 가빠 왔다.
“갑갑해요.”
“난 한연두 너만 보면 갑갑해.”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있는 사람이 뭐가 갑갑해요.”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한다고 누가 그래.”
“지금도 그렇잖아요. 나 안 건드린다는 사람 어디 갔나 몰라.”
“내 마음대로 다 했으면 여기 들어오자마자 너 벌거벗겼어.”
웬일이야. 남사스러운 말들에 맥박이 수치도 모르고 각기춤을 췄다. 도대체가 어떤 얼굴이 진짜인지. 어찌 된 게 채우수는 갈수록 헷갈리게 굴고 있다.
“웃겨……. 이제 나 재미없다면서요. 나랑 안 하고 싶다면서요.”
“선의의 거짓말이지.”
“누굴 위한 선의예요 그게.”
“너.”
흐응, 정말 말이나 못 하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자 맞닿은 가슴팍이 크게 널을 뛰는 듯하다.
“참 복잡하게도 살아요. 선배처럼 사느니 나처럼 쉽게 사는 게 나아.”
“시답잖은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자. 네가 자야 나도 자.”
뒤통수를 감쌌던 손이 목뒤를 어루만지듯 쓸었다. 차가운 감각에 어깨를 옹송그리자 덩달아 움찔했던 그의 손가락이 달래듯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제법 다정한 손길에 탄성을 잃고 헤매는 건 내 시선일까, 아니면 내 마음일까. 갈피를 잃은 생각들이 할 말을 겨우 찾았다.
“선배 퇴사하면 이사도 갈 거예요?”
“아직 몰라.”
“이사 가더라도 천천히 가면 안 돼요?”
“내가 이사 가는 게 너랑 뭔 상관이야.”
“아니, 매일 보던 사람 안 보이면 괜히 그렇잖아요. 회사에도 없는데 동네에서까지 안 보이면 좀 서운할 것 같아요.”
슬쩍 고개를 들어 확인한 채우수의 얼굴이 냉동실에서 발견한 정체 모를 음식처럼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한연두, 너나 노선 제대로 정해. 너 나 싫다며.”
“싫어요. 싫은데……. 그래도 선배가 옆에 있어서 마음은 편했단 말이에요. 선배가 회사에선 알은척하는 거 싫어하길래 나도 모르는 척은 했지만.”
“…….”
“책임님 팀에 발령받았을 때도 내심 얼마나 반가웠는데. 아는 얼굴 하나 있다고.”
“…….”
“솔직히 선배 없는 생활 적응 안 될 것 같아요. 막상 이제 선배 없다고 생각하니까 나도 마음이 이상해.”
“…….”
“나도 모르게 선배한테 많이 의지하고 살았나 봐요. 학교 다닐 때도 그렇고……. 나 사실은 선배 퇴사 얘기 딴사람한테 들은 것도 좀 섭섭했단 말이에요. 그리고 만약에 선배 또 쓰러지거나 하면 어떡해요? 병원 가는 것도 싫어하면서. 난 선배가 죽더라도 내 눈앞에서 죽었으면 좋겠어.”
“…….”
“이기적인 거 나도 알아요. 선배도 뭐 이런 애가 다 있냐고 생각하겠지만…….”
“그래.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진짜.”
두서도 없는 얘기들에 정말이지 짜증 나 죽겠다는 얼굴로 날 내팽개치듯 품에서 놓아 버린 채우수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한연두, 넌 자존심도 없어? 뭐가 이렇게 제멋대로야.”
화가 난 걸까. 이런 얼굴마저도 적응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인데. 그를 따라 몸을 일으키자 침대 시트가 서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왜 그래요, 갑자기.”
“너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긁어.”
“내가 뭘…….”
“밀어내면 밀리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밀어내겠다는 사람이 오히려 밀려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내 어깨를 옥죄듯 잡아 왔다. 잡아먹기라도 할 듯 눈을 부라리며 끈질기게 부딪쳐 오는 시선에 무섭다는 감정보다도 걱정이 먼저 앞섰다.
“선배, 잠시만……. 이것 좀 놓고 얘기해요, 아파요.”
“네가 이럴 때마다 나는 살아 있는 하루하루가 죄스러워. 알아?”
“내가 뭘…….”
“내가 널 무슨 자격으로…… 내가 여태 어떤 마음으로 널!”
“…….”
“한연두 네가 뭔데 왜 날 자꾸 주제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어. 왜 자꾸 사람을 욕심나게 만들어.”
“…….”
“왜 사람을 자꾸……, 비참하게 만들어.”
채우수가 짓씹은 입술 새로 억울한 듯한 한숨을 토해 냈다. 내가 뭘 또 놓친 걸까.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듯 날 쳐다보는 눈에서 무슨 감정을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딱히 못 할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저를 싫어한다는 말도 아니었는데 이렇게까지 발끈할 일인지. 내 어깨를 잡은 손에 다시금 힘이 들어가자 그의 표정을 헤아리는 얼굴이 같이 일그러졌다.
“후회할 짓 하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 한연두.”
“…….”
“네가 뭘 놓치고 살아왔는지 똑똑히 기억하란 말이야.”
나는 채우수의 이런 모습이 싫었다. 나보다 수십 살은 더 먹은 늙은이처럼 구는, 훈장님과도 같은 꼬장꼬장한 말투. 꼬일 대로 꼬여 버린 복잡한 제 마음을 뒤로 숨긴 채로 풀어 볼 생각조차 않는 오만하고도 음흉한 태도.
하지만 이 순간 내가 그에게 가진 감정이 혐오의 범주에서도 한참을 벗어났던 건, 되레 정반대의 감정을 들켜 버릴까 꾹꾹 눌러 삼켜야 했던 건 나를 보던 채우수의 얼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화가 났다기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한 붉은 눈자위, 잘게 떨리는 입매, 울분을 녹여 내는 거친 숨소리.
달리 설명은 필요 없었다. 채우수의 말들을 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가 지금 제 마음을 스스로 갉아먹으면서까지 원하는 상대가 나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으니까. 나는 뭔가에 이끌리듯 그에게 다가가 두 뺨을 감싸고는 입술을 겹쳤다.
조금은 충동적이었고 또 조금은 진심이었던 입맞춤에 채우수가 고개를 비틀어 입술을 떼어 냈다. 코끝을 스치며 그의 입술을 다시 쫓아가자 하아, 울음 같은 숨이 전해졌다.
어차피 모든 행동엔 후회가 남는 법. 그 후회까지 집어삼키며 겹친 입술을 벌리자 나지막한 욕지거리와 함께 채우수가 내 입술을 물었다. 목뒤를 감싼 그의 손이 등을 훑고 내려와서는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천천히 기운 시야에 채우수의 얼굴이 들어찼다. 잡생각을 할 틈도 없이 질척이는 소리가 머리를 하얗게 비웠다. 오늘 밤이 후회로 남을지라도 아쉬울 것 없는 시간들이 우리 두 사람을 그렇게 촘촘하게 얽고 있었다.
누군가 내게 채우수와의 기억들 중 하나를 지워 준다고 하면 나는 주저 없이 이 밤을 선택할 것이고, 하나만 기억할 수 있다고 한대도 나는 망설이지 않고 이 밤을 택할 것이다.
선처럼 곧기만 하던 사람이 내 위로 무너졌다. 채우수가 떨어뜨린 묵은 감정들은 살갗에 닿아 금세 흩어졌지만 그가 얄궂게 틔운 내 감정은 놀리듯 곳곳에 열꽃을 피웠다.
목을 타고 점점이 찍어누르는 입술에서 뜨거운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달뜬 몸이 잘게 떨렸다. 전적으로 채우수라는 인간이 자초한 밤이었지만 그는 제 손끝 하나 닿는 것에도 허락을 구하듯 내 반응을 살폈다. 배스 가운을 벌리고 들어온 손이 조심스레 가슴을 감싸자 몸이 오므라든다. 싫어한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다시 빠져나가려는 그의 손을 잡아 내 오른쪽 가슴 위에 얹었다. 하, 채우수가 짧게 내쉰 한숨이 겹친 입술 사이로 흩어졌다.
“……싫어요?”
“싫어.”
“진짜 싫어요?”
“내가 싫다 정말.”
나도 그래요, 하고 무심히 붙인 말에 채우수가 떫은 웃음을 흘렸다. 저를 싫어한다는 말인지 아님 나도 스스로가 싫다는 말인지도 모르면서. 희미하게 흐려지는 채우수의 미소를 보자 그의 손바닥 아래의 가슴이 세차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나 약 먹고 있어요. 미리 준비한 건 아니구요. 주기 조절하느라 먹는 건데…….”
“…….”
“그러니까 없어도 돼요, 콘돔.”
“…….”
“해도 괜찮다구요.”
“하아, 너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그럼 이 상황에서 피임법보다도 쓸모있는 말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나한테 원래부터 다정했다는 건방진 착각 속에 빠져 살던 남자는 저를 향한 가늘어진 눈에 입술을 붙였다가 내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확실히 해. 다 네가 저지른 일이야, 한연두.”
간질이며 떨어진 입술 새로 퍽이나 다정한 말들이 쏟아진다.
“전부 네가 자초한 거야.”
“…….”
“한연두 네가 먼저……. 항상 시작은 너였어, 예나 지금이나. 알아?”
나는 그 다정함에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왼손으로 그의 목덜미를 잡아 끌어당겼다. 스치듯 맞닿은 입술이 뜨거웠다. 내 입가에 내려앉은 그의 입술이 잔잔하게 진동했다. 마지못해 떨어진 채우수의 잇새로 앓는 소리가 흘렀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한연두.”
비겁한 자기방어다. 성마른 눈은 감출 생각도 못 하는 주제에. 나는 보채듯이 내 얼굴을 긁어 대는 그의 시선을 좇으며 채우수가 차라리 울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괜찮겠냐는 질문 대신 이마를 맞댄 채 내뱉는 숨이 달았다.
“선배.”
저를 부르자 아직까지도 내 한쪽 가슴 위에 얹어진 그의 손끝이 움찔댔다. 채우수의 손등 위로 겹쳐진 손을 들어 까슬해진 그의 뺨을 쓸자 그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나는 가끔 채우수가 내게 했듯이 반듯한 이마 위로 흐트러진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시끄러워요.”
픽, 바람 빠진 헛웃음이 공허한 공간을 울렸다.
콘돔이 없다던 채우수의 바지 주머니 속에서는 무려 콘돔 네 개가 나왔다. 그는 이것밖에 없어서 어떡하냐는 다소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이 뻔뻔한 인간의 거짓말에 또 한 번 질려 버렸다. 하지만 나 역시나 피임약을 먹는다는 거짓말을 한 건 마찬가지였으니 길게 따져 봤자 내 손해임을 직감했다.
꾹 눌러 다문 입술을 제 입술로 두드리던 채우수가 마뜩잖은지 가슴을 움켜쥐었던 손을 내렸다. 옆구리를 스친 손에 반사적으로 입술이 열리고 그 틈을 놓칠세라 말캉한 혀가 들어왔다.
나는 채우수를 굳이 색으로 표현하자면 그가 대학 시절 잘 입고 다니던 후드 티 색깔과도 같은 차가운 회색이라고 생각했다. 색을 잃은 것 같은 사람에게 내리쬐는 조명이 너무 자극적이었던 건 아닐까 어이없는 생각이 들 만큼 그와 닿는 모든 곳이 뜨겁다 못해 델 듯했다.
뱉는 숨까지 모조리 앗아 가는 키스에 고개를 틀어 그를 살짝 밀어냈다. 아쉬운 듯 턱을 타고 내려가던 입술이 숨 가쁘게 오르내리는 가슴께에 닿았다. 어느덧 그의 손에 의해 벗겨진 팬티가 발목에서 흘러내리자 오금부터 허벅지 안쪽을 훑던 손이 더 이상 거리낄 게 없다는 듯 점점 위로 올라왔다.
젖은 곳을 감싸는 손길에 가슴을 그에게 물린 채로 허리를 들썩였다. 입술을 깨물어 삼켜 보려고 해도 비집고 새어 나가는 소리를 어쩔 수는 없다. 그가 제 입에 물고 있는 둥근 정점을 녹이기라도 할 것처럼 혀끝으로 간질이자 으응, 낯간지러운 소리가 절로 흩어졌다. 그런 내 반응이 재밌기라도 한 건지 마른 웃음으로 가슴을 희롱하던 그가 입술을 떼고는 사실상 다 벗은 것이나 다름없던 내게서 마지막으로 남은 배스 가운마저 벗겼다.
나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무릎 사이에 내 몸을 끼우곤 제가 걸치고 있던 가운을 벗고 남은 옷가지들을 벗어 내던 채우수가 미간을 좁히며 날 내려다봤다.
“왜.”
“불……. 불은 다 끄고 싶어요.”
“그대로 둬. 괜찮아.”
내 얼굴부터 흐르던 짙은 눈동자가 가슴 아래 화상 흉터에 멈췄다. 괜스레 민망해져 입술 안쪽을 잘근 씹으면서 손을 내려 흉터를 감추었다. 하아, 탄식 같은 숨을 내쉬던 그가 몸을 낮춰 짧게 입을 맞췄다. 턱 끝을 살짝 물었다가 점점이 아래로 내리던 입술이 가슴 아래로 흉터를 가린 손등에 닿았다.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붙여 대는 입술이 괜히 간지러워 손끝을 오므리자 채우수가 제 이마로 내 손을 밀어내고 흉터에 입을 맞추었다.
“아, 거기는…….”
힐끗 날 쳐다보던 채우수가 고개를 조금 올려 내 가슴을 머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가슴 아래 흉터에 닿는 입술에 허리를 비틀며 두 손으로 채우수의 얼굴을 감싸며 막아 봤지만 되레 양 손목이 붙잡혀 그의 손안에 고정되었다.
“괜찮아.”
그는 성실히도 입술을 붙였다. 상처를 빨아들이기라도 할 것 같은 입맞춤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속죄라도 하는 듯한 행동에 나는 처음으로 내 몸이, 엄마에 대한 죄책감처럼 남아 있는 흉터가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의 입술이 흉터에 닿을 때마다 목이 눌린 듯 잠겼다.
괜찮아, 괜찮아를 읊조리던 채우수는 마지막 괜찮아의 끝을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눈동자가 젖어 들었다. 내 표정을 읽는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침묵이 주는 긴장감은 오히려 몸을 데워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괜찮아요?”
되레 저를 보고 묻는 말에 채우수가 어이없다는 듯 눈썹 사이를 좁혔다. 그는 내게 정말 괜찮냐고 물어 왔고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한숨과도 같은 말을 내뱉었다.
“너만 괜찮으면 나도 괜찮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이번엔 썩 다정한 말을 던지는 게 웃겨서 피식댔더니 까불지 말라며 채우수가 입술을 살짝 깨물어 왔다. 진득한 키스와 함께 아래를 지분대던 손도 점점 짓궂어진다. 부풀어 오른 살점이 그의 엄지에 뭉그러질 듯했다. 아아, 아아. 그의 손놀림에 맞춰 허리를 뒤틀어 보지만 쉽게 멈출 것 같은 움직임은 아니다. 아직까지 그의 손에 붙들린 손목이 시큰거렸다.
“나 그냥, 흐읏, 지금 바로 해도 될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한연두.”
“지금 충분히 괜찮, 하아, 아…….”
“넌 직접 만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얌전히 있어. 귀에 입술을 붙인 채로 흘려보내는 낮은 음성은 그저 야속하기만 하다. 이미 충분히 젖을 대로 젖어 버린 곳으로 그의 손가락이 오가며 내는 소리가 음탕하기 짝이 없다. 물기를 머금은 손가락이 하나 더 늘자 눈을 질끈 감았다. 곱아든 발끝에서부터 흐른 전류가 뇌까지 녹일 듯하다.
내벽을 넓히며 긁는 손놀림에 흐윽, 울음과도 같은 소리가 더해졌다. 윗니로 깨문 아랫입술이 저절로 툭 튕겼다. 그만, 그만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지 채우수는 집요하게 한곳만을 노렸다. 절정의 제물이 된 듯한 기분이다. 애원하듯 그의 품에 파묻혔던 얼굴이 저절로 천장을 향했다. 접어 올린 눈꺼풀 끝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아아, 숨길 수도 없는 신음과 함께 손가락이 빠져나가자 허벅지가 짧게 경련했다. 밭은 숨을 정리할 틈도 없이 입술이 먼저 빨렸다. 거칠어진 키스에 아래에선 왈칵, 또 한 번 액을 쏟아 내며 달싹거렸다.
채우수는 내가 저를 비참하게 만든다고 했지만 틀렸다. 절정이 회오리처럼 몰아친 곳에 새로운 감정이 남았다. 온몸이 열려서는 그를 원하고 있었다. 텅 비어 버린 마음은 채우수 하나로도 충분히 꽉 들어찰 것만 같아 참담한 기분이다.
맥 빠진 몸을 옆으로 돌려 눕자 채우수가 날 뒤에서 껴안으며 제 몸을 붙였다. 손가락에 유두를 끼운 채 내 가슴을 쓰다듬던 그의 손이 배꼽을 지나 아래로 내려갔다. 그새 익숙해진 것일까, 그의 손끝에서 퍼질 전율에 몸이 벌써 달아올랐다.
채우수가 내 어깨에 입술을 붙이면서 제 것을 내게 맞췄다. 닿는 것만으로도 흐으, 숨이 가빠진다. 젖은 살을 가른 것은 어쩐지 쉬이 들어 올 생각이 없어 보인다. 엉덩이까지 적신 탓에 그를 품는 건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부피를 키운 그의 것은 생각보다도 훨씬 버거워 끝만 겨우 머금을 뿐이다. 숨을 몰아쉬며 그를 향해 돌아보자 입술이 짧게 스쳤다가 떨어졌다.
“아, 이거…… 잠깐만…… 지금 안 될, 안 돼요.”
“괜찮다며.”
“아니, 아니……!”
“뭐가 아니야. 네가 충분하다며.”
뒤로 제 몸을 물리던 그가 반동을 주며 허리를 짓쳐 들자 움찔대던 붉은 속살이 그를 반쯤 삼켰다. 서서히 빠듯하게 들어차는 묵직함에 허리가 말리자 채우수가 내 몸을 고정하듯 한 팔로 옭아맸다.
몇 주 동안 남모르게 원하던 그의 것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빠져나갈 듯하던 그는 더 큰 쾌락을 몰고 와서 내 속으로 깊게 박혔다. 그가 밀려 들어올 때마다 온몸을 쪼개는 듯한 감각이 아래에서부터 번졌다. 하아, 귓가로 흩어지는 그의 낮은 신음에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아직 한연두를……, 다 몰랐네.”
“흐읏, 아, 으응…….”
“이런 거, 하아, 좋아했나 봐.”
채우수가 귓불을 살짝 깨물고는 내 귀에 대고 제 숨을 뱉어 냈다. 그가 뒤에서 움직이며 제 것을 치받을 때마다 그의 팔뚝에 눌리다 만 가슴이 흔들거렸다.
“너도 느껴? 내가 이럴 때마다 밑으로 아주, 하아……. 씹어 먹을 듯이 구는 거.”
“으응, 아아, 흣!”
“봐. 지금도.”
그가 내 귓가로 내뱉는 숨에 아래가 저도 모르게 제가 품은 것을 조였다. 이번엔 고의가 아니었는지 시발,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던 그가 시트에 파묻힐 것 같던 내 얼굴을 제게로 돌렸다. 틈이라곤 없어 보이던 채우수의 눈빛이 느슨하게 풀렸다. 낯설다고 느꼈던 것도 잠시, 그에게 맞춰 정신없이 흔들리며 벌어진 입술이 다시금 그에게 잠식되었다.
혀를 휘감으며 서로의 타액을 삼키는 소리가, 완성되지 못한 채로 그의 입 속에서 녹아내리는 비음들이 살이 부딪치는 소리만큼 농염하다.
빨라진 허리 짓에 집어삼킬 듯한 입술도 떨어졌다. 절정으로 내달릴수록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커진다. 우리는 언제라도 결국은 이렇게 될 운명이었을까. 문득 채우수가 쏟아 내던 말들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뒤에서 느껴지는 그의 온기에도 가슴이 싸하게 내려앉았다. 나는 그가 흔드는 대로 흔들리면서도 악착같이 그를 붙들었다.
“한연두, 후회해.”
질문일까, 명령일까. 아니면 부탁일까. 혼잣말처럼 내뱉던 채우수는 내 대답을 딱히 원하지는 않는 듯 눌러 찍듯이 안쪽 깊숙한 곳을 찌르고 빠져나갔다.
옥죄던 팔이 풀리고 그의 품 안에서 전율하던 몸도 바로 눕혀졌다. 눈으로 핥듯이 느리게 내 몸을 내려다보던 채우수의 얼굴에 드리운 감정은 나와 같은 곳을 향해 있었을까. 알 수 없는 미소를 내걸던 그가 부딪쳐 오는 입술은 부드럽기만 하다.
나는 그에게 매달리듯 둥글게 말려 그와 같은 점을 만들었다. 애초에 섹스에 큰 의미를 두려던 건 아니었다. 그 상대가 채우수라면 더더욱. 그러나 이 눅진한 키스를 받고 있노라면, 그의 아물지 않은 눈빛을 받아 내고 있노라면 한낱 욕정 따위에 패배한 짐승은 되고 싶지 않았다.
온전히 안아 주고 싶었다. 그저 서로에게 깊숙이 파고들어 그 감정까지도 품을 수만 있다면. 그가 쏟아 내던 절망을 내가 녹일 수만 있다면. 누군가 이 순간을 사랑이라는 낯선 감정으로 매도할지언정 굳이 부정할 마음도 없었다.
도심의 불빛들도 다 가려진 방 안에 채우수가 만든 어둠이 한층 더 짙어졌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얕게나마 웃었다. 그가 참아 내는 불안을 대신 삼키면서, 울면서도 웃었다.
<2권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