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패러다임의 전환
나는 정말이지 채우수가 너무 싫어서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만 해 대면서 불법 유턴까지 감행하던 그의 차가 멈춘 곳은 어이없게도 한우 고깃집. 채우수는 제가 언제 불량한 소리를 떠들었냐는 듯 멀끔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려서는 조수석 문을 열어 줬다.
애초에 호텔이니 뭐니 했던 건 저답지 않은 농담이었음이 분명했다. 진짜 어이가 없어서. 차에서 내려 이를 악물고 채우수를 노려보자 저를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건지 그의 입매에 얄궂은 웃음이 걸렸다.
“한연두. 다른 걸 기대했나 봐?”
“기대는 누가 기대를 해요.”
“영 아쉬워하는 것 같은데.”
“처음부터 호텔 갈 생각 없었죠? 차는 왜 그렇게 돌렸어요?”
“길을 잘못 들어서.”
악, 재수 없어 정말. 원래 고기 먹으러 가던 길이었지 않냐며 이기죽거리는 말투는 정말이지 입을 한 대 때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렇게 놀리면 재밌어요?”
“아니, 재미없어.”
훤칠한 키를 자랑하며 성큼성큼 앞서 걷는 채우수는 뒤통수마저 얄밉다.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당장이라도 손을 뻗으면 한 대 정도는 때릴 수는 있지 않을까. 이런 건 직장 내 괴롭힘에 안 들어가지 않을까 싶어 손만 떠는데 내 미천한 생각을 읽은 모양인지 채우수가 돌연 등을 돌렸다.
“재미는 없는데.”
“…….”
“네 반응은 좀 귀여워.”
채우수를 따라 쫓던 발이 멈췄다. 웃겨. 지금 누가 누구더러 귀엽다고……. 놀리지 말란 소리를 또 저런 식으로 받아치고 있다. 언제부터 나랑 이렇게 농담 따먹던 사이였다고 저러는지. 어찌 된 것이 대학생 때보다 장난기가 짙어진 얼굴이다.
“뭐 해, 안 들어오고.”
“내가 책임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해석할 게 뭐 있어.”
주차장으로 들어오던 차가 비키라는 듯 라이트를 깜빡였다. 그 불빛에 미간을 좁힌 채우수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을 빼내어 제게로 날 잡아당겼다.
“일단 밥부터 먹어. 해석은 나중에 하고.”
팔을 잡았던 큼지막한 그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가 내 등에 닿았다. 식당 안으로 이끌며 등을 두어 번 토닥이는 손길은 퍽 다정하기도 하다. 언제부터 이렇게 챙겨 줬다고 이러는지 모르겠어, 정말. 나도 모르게 잘근 씹은 볼 안쪽이 얼얼해졌다.
우리는 한쪽 벽면이 와인으로 가득 찬 벽을 지나서 채우수가 예약한 룸으로 들어갔다. 무슨 속셈인지 그는 내 외투를 받아서 라커에 넣어 두고 의자까지 빼 주는 알량한 친절을 베풀었다.
웃겨. 누가 이런 같잖은 매너에 속을 줄 알고. 나는 정말로 지퍼를 채운 것처럼 입술을 꾹 눌러 다물고는 채우수가 주문하는 걸 지켜봤다. 별다른 말은 오가지도 않았다. 와인을 권하는 담당 서버의 말에 채우수가 날 쳐다봤고 나는 작게 도리질했다.
그렇게 나만 입 다물면 채우수와 내가 조용한 사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이 어색한 침묵만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무쇠 철판 위에 두태 기름과 함께 안심이 올라가 취익, 듣기에도 좋은 소리를 내자 또 마음이 누그러졌다. 담당 서버가 결대로 부드럽게 찢은 고기를 감자 위에 올려 주니 급기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비죽 삐져나왔다.
채우수도 채우수지만 나도 참 별수 없는 사람이었나. 고작 고기 앞에서 이렇게나 설렌다. 그렇게 안심에 이어 등심, 채끝살까지 젓가락질 몇 번 만에 사라지더니 어느새 내 눈앞에 놓인 건 후식으로 나온 수정과 두 잔뿐이었다.
“해 봐, 이제.”
“뭘요?”
“질문이든 뭐든. 할 말 있을 거 아냐.”
따져 물을 말은 많았는데 해도 되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눈동자를 괜히 빙글빙글 굴리다가 찻잔을 두 손으로 잡아 입가로 가져다 댔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마시지는 못하고 입술만 축이고는 테이블에 내려다 두었다.
“그…… 저녁 선배가 사는 거 맞아요?”
“너 그게 걱정돼서 밥도 추가로 안 먹는댔어?”
“아니, 낙지볶음처럼 또 그럴까 봐 그러죠.”
“내가 사. 고기 더 시켜 줘?”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냥 집에 가서 컵라면이나 하나 더 끓여 먹는 게 낫겠다 싶다. 와인을 한 잔 마실 걸 그랬나. 그럼 이 답답한 분위기가 어느 정도 풀릴 텐데.
“낙지볶음은, 너 그날 그거 안 샀으면 더 큰 거 샀어야 했어.”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주재희 선임이 너 한턱 크게 쏴야 한다고 벼르고 있었던 거 알아, 몰라?”
“주 선임님이요?”
“그러니까 한연두 선임님도 이제 눈치 좀 챙기시고. 소개팅 같은 것도 해 준다고 덥석덥석 물지 말고.”
그럼 미리 귀띔이라도 해 주든가. 꼭 저렇게 뒤늦게 잘난 척이지.
“할 말은 그게 끝이야?”
수정과를 홀짝대는 모습이 영 재수 없다. 채우수의 큰 손에 들린 유리잔은 더없이 옹졸해 보였다. 하여튼 더럽게 안 어울렸다. 와인은 채우수가 마셔야 했나 보다. 그게 더 어울렸을 법한데. 그렇게 그의 얼굴을 보며 나도 모르게 몇 번 더 실쭉거렸나 보다. 채우수가 왜 웃냐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나는 어색하게 입술을 말아 물고는 표정을 지우며 물었다.
“왜 하필 나예요?”
“뭐가.”
“선배가 원한다는 그 평범한 삶에 굳이 날 끌어들이려는 저의를 잘 모르겠어요.”
“저의 같은 건 없어.”
“저의가 아니더라도 무슨 목적인지 도저히 파악이 안 돼요, 나로서는.”
“사귀는 데 무슨 목적이 필요해.”
목적은 없더라도 계기는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적어도 우리 사이에 어떤 감정이 생겨났다거나. 하다못해 나처럼 채우수의 몸이라도 갖고 싶다는 욕망 같은. 아니지, 갖고 싶긴 뭐가. 무슨 소리야. 아니야. 어쩐지 심장 박동이 빨라진 것만 같았다. 역시 술을 마실 걸 그랬나 보다. 핑계 댈 구석이 없으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우리 알고 지낸 지 10년이 넘었어요. 사귈 거면 진작에 사귀었을 거예요.”
“그렇겠지.”
“뜬금없다구요 진짜. 선배가 게…….”
아니, 채우수가 진짜 게이가 아니었다면 더 이상할 노릇 아닌가. 그 긴 시간을 서로 줘도 안 갖는다고 말하며 잘만 지내다가 이렇게나 갑자기.
“근데 10년이면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될 시기야.”
“그게 무슨 억지예요.”
“한연두 네가 자꾸 신경 쓰여.”
채우수가 쓴 한약이라도 삼킨 듯 미간을 잔뜩 좁혔다. 내가 어떻게 신경 쓰인다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간 건 채우수 본인인 주제에.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럼.”
“이미 쓰여. 네가 내 사정거리 안에 있었으면 좋겠어.”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보고 있잖아요, 보기 싫어도.”
게다가 이웃사촌이기까지 한 사이에 굳이 그 정도의 이유만으로 날 사귀는 사이로 묶어 두려는 건 과도한 집착이다. 채우수가 느긋하게 팔짱을 끼며 자세를 바로 하자 팽팽하게 당겨진 셔츠가 단단한 가슴팍을 자랑했다. 아아, 정말이지 내 심장은 주제 파악이 시급하다. 지금 이렇게 채우수의 가슴팍 따위를 보고 두근거릴 때가 아닌데.
“왜,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말도 있잖아.”
“세상에. 소름 돋았어.”
“물론 아직 그 정도로 중증은 아니니까 안심해.”
그럼 지금은 어느 정도까지 진행됐냐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어쩌면 이 순간까지도 채우수의 벗은 몸을 상상하고 있는 내가 중증인지도 모르겠다.
“한연두가 궁금한 건 사실이야. 그게 어떤 모습이든.”
느른하게 풀린 눈으로 날 훑으며 꾹꾹 눌러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 것 같아서 얼굴이 홧홧해졌다. 괜히 딴청을 부리며 수정과가 든 잔을 엄지로 쓸었다.
“사귀자는 말은 진심이에요?”
“진심이야.”
“내가 단지…… 적당하다는 이유로요?”
“적당하기도 어려워. 오차 범위 내에서 넘치지도 않고 그렇다고 모자라지도 않고.”
지금 누굴 물로 보나. 내가 아무리 오는 남자들, 물론 어디까지나 잘생겼다는 걸 전제로 한 남자들을 딱히 막진 않았다지만 그렇다고 한들 채우수와 사귈 이유까진 없었다. 그의 몸을 향한 내 그릇된 욕정과 채우수와 내가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는 건 다른 논점이다.
“난 솔직히 말해서 책임님 싫어해요. 예전부터 싫어했어요. 선배는 몰랐겠지만.”
“알아. 알고 있었고.”
자기가 뭔들 몰랐겠냐는 듯한 거만한 얼굴이다. 순간 내가 싫어한다는 말을 좋아한다고 잘못 말했나 싶을 정도로.
“아니. 선배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훨씬 더 많이 굉장히 싫어해요.”
“그래. 계속 싫어해.”
세상에, 뭐가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아니, 이건 아무렇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꽤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얼굴이다. 채우수의 풀어진 표정을 보고 있자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할 말을 다 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채우수가 라커에서 외투를 꺼내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익, 의자 끌리는 소리가 식당 분위기와는 다소 괴리감이 있었다.
“선배는 자길 그렇게 싫어하는 사람이랑 사귀고 싶어요?”
“넌 싫어하는 사람이랑 왜 섹스하고 싶은데?”
달라진 눈높이를 맞추려 엉덩이를 떼려다가 그의 말 한마디에 그만 다시 주저앉고야 말았다. 도대체 내가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다. 쿵 소리가 났던 건 엉덩이가 아니라 내 머릿속에서 발생한 가치 충돌 탓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내가 언제, 어? 내가 언제 선배랑 섹……, 자고 싶댔어요? 우…… 웃겨, 정말.”
나는 거짓말을 잘 못하는 성격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솔직한 사람도 아니다. 내가 아무리 채우수의 벗은 몸을 봤고, 만졌고, 되새기며 상상했다고는 해도. 그래, 자고 싶단 생각을 했다고는 해도 이런 식으로 속마음을 투명하게 보여 줄 만큼 뻔뻔한 사람은 아니었다.
“왜 그렇게 당황해. 수상하게.”
“책임님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그렇죠!”
“아, 당황하면 시선이 여기로 꽂히나 봐요, 한연두 선임은?”
채우수가 외투 깃을 정리하며 제 바지 앞섶으로 시선을 내렸다. 미쳤나 봐, 한연두. 숨을 길게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아무래도 미친 건 나다. 이 와중에도 자유분방했던 시선 처리에 입술만 짓씹었다.
“선배가 그 얘기를 꺼내니까 나도 모르게…… 그, 트라우마 같은 게 생겼나 봐요.”
“어련하실까.”
트라우마는 무슨. 따지자면 조건 반사지. 무의식은 이런 방식으로 인간을 지배한다. 나는 지금 그 마력에 의해 철저하게 조종되어 채우수를 원하게끔 만들어지는 중일지도 모른다.
“내가 선배를 좀…… 그렇게 했다고 본의 아니게 오해를 산 것 같은데요.”
“무슨 오해?”
“혹시나 날 쉬운 여자라고 생각한다거나…….”
채우수로부터 건네받은 옷에 팔을 하나씩 끼웠다. 같은 라커에 넣어 둬서 그런지 내 옷에서도 채우수의 향이 은은하게 나는 것만 같다.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며 그를 돌아보자 베르가모트 향이 코끝을 가득 채웠다.
“……밝히는 여자라고 생각한다거나 그런 거라면.”
“쉽다고는 생각 안 해 봤고.”
다음 말을 기다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설마 키가 더 자랐나. 오늘따라 채우수 키가 더 크게 느껴졌다. 너무 가까이 붙어서 쳐다봐서 그런가 싶어 뒤로 한 발 물러났다가 의자에 발이 걸릴 뻔했다. 습관적인 매너인지 채우수의 손이 내 허리를 받쳤다가 빠져나갔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내 얼굴을 훑으며 옅은 숨을 내쉬더니 문을 열며 고갯짓했다.
“다 챙겼으면 나가자.”
“뭐야, 왜 말을 거기서 끊어요?”
쉽다고는 생각 안 했지만 밝힌다고는 생각한다는 말이잖아. 허, 웃기지도 않아서 정말. 잠깐, 그래서 내가 적당하다고 생각한 거 아니야 이 인간? 온갖 변태 짓을 다 해 보려고? 세상에 날 뭘로 보고! 변태를 뒤따르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수상쩍은 건 변태인지 내 마음인지 모르겠다.
“대답해 줘요. 밝힌다고는 생각하는 거냐구요.”
“벨트나 해.”
“아니, 이건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해요.”
채우수의 차에 오르자마자 그의 팔을 붙들고 늘어졌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확실히 해 두고 싶었다. 내리깐 눈으로 제 팔을 잡은 내 손을 훑는 것이 여간 불쾌한 게 아니라는 표정이다. 머쓱함에 떼어 낸 손을 말아쥐면서 조수석 시트에 몸을 바로 기댔다.
“본능이 어쩌니 실컷 떠들어 놓고 밝힌다는 소리는 싫나 봐?”
“밝히는 거랑은 엄연히 다른 거라구요. 내가 모든 남자한테 다 그러는 건 아니거든요.”
“…….”
“나도 나름의 기준이 있어요. 선배가 우연찮게도 그 기준에 부합, 엄마야.”
내 말은 이제 제대로 듣지도 않겠다는 듯이 훅 다가온 채우수가 조수석 벨트를 채우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웬일이야, 정말. 아침에 있었던 일이 생각나 괜히 놀란 가슴이 요동쳤다. 심장이 들썩이는 게 티라도 날까 두려워 재킷을 여몄다. 마른 입술을 잘근 씹으면서 아직 출발할 생각도 없는 모양인 채우수를 곁눈질했다.
“이런 원치 않는 매너도 접촉도 상당히 부담스럽고 불쾌하다구요.”
“…….”
“혹시 내가 밝힌다고 생각해서 어떻게 해 볼 생각이면 접는 게 좋을 거예요. 나는 정말 선배랑 그 어떤 사이가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구요.”
“…….”
“오늘 이렇게 한우를 얻어먹었다고 해서, 물론 고기는 맛있게 잘 먹었어요. 육즙도 풍부한 게 역시 비싼 건 비싼 값을 하는 것 같고…….”
“…….”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튼 고작 밥 몇 번 먹었다고 우리 관계가 특별한 쪽으로 발전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키스할까, 우리.”
“여기서요?”
내가 떠드는 동안 핸들에 엎드려서 묘한 미소를 내걸던 채우수가 질문과도 같은 내 대답에 웃음을 흘렸다. 나도 참, 싫다는 말을 해야지 왜 장소를 먼저 따졌을까. 화들짝 놀란 입을 꾹 다물며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왜. 때와 장소에 맞지 않는 곳이야 지금 여기도?”
“아니, 고기 먹고 키스는 좀…….”
“안 돼?”
“그러니까 음, 마늘도 먹었구요.”
“됐어, 그럼.”
안 된다는 말보다 왜 그런 변명들이 먼저 입 밖으로 나온 걸까. 그리고 난 왜 바로 마음을 접어버리는 채우수에게 실망했을까. 맥락 없는 감정들에 심장이 널을 뛰었다. 핸들에 붙였던 몸을 바로 세우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이 마시지도 않은 술에 취한 것만 같다.
“이렇게 자꾸 놀리려고…… 흑.”
아아, 어쩌면 결국은 이렇게 될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한 순간 코앞까지 다가온 채우수에게 놀랄 새도 없이 그와 입술이 겹쳐졌다. 그가 큰 손으로 목뒤를 감싸오자 생경한 감각까지 일깨워지는 듯해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벌어진 틈으로 제 윗입술을 끼워 넣은 채우수가 내 아랫입술을 가벼이 문 채로 말하자 그의 목소리가 만드는 진동이 내 몸에서 퍼져 나갔다.
“싫으면 여기서 그만두고.”
어쩌지도 못하고 꽉 마주 잡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의 키스 한 번이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까. 파동의 진폭이 커져 머리끝까지 웅웅거렸다. 뭐가 이렇게 갑자기, 뭐가 이렇게…….
“싫어?”
어떡하지. 싫지가 않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싫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좋다. 말없이 속눈썹만 파들거리자 채우수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아, 어깨를 옹송그리며 잘게 떨었다. 그의 손가락이 날 달래기라도 하는 듯 느릿하게 내 목을 쓸었다. 차가운 감촉에 솜털까지 곤두섰다. 아, 어떡하지 정말…….
“한연두, 묻잖아. 싫어?”
들릴 듯 말 듯 낮은 목소리가 겹쳐진 입술 새로 울렸다.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헛웃음이 퍼졌다. 코끝이 스치면서 떨어지는가 싶던 입술이 그대로 삼켜버릴 듯이 내 아랫입술을 길게 빨았다.
흐읍, 들이마신 숨이 채우수의 숨과 얽혔다. 뺨을 어루만지는 왼손이 애달프다. 몸이 빠르게 달아올랐다. 뭐든 붙잡고 싶어 손가락 끝에 하얗게 힘이 들어갔다. 혀가 얽히고 젖은 소리가 차 안을 점점 데웠다. 입천장을 간질이는 혀끝에 몸이 징징 울리고 발끝까지 온몸이 녹진하게 늘어졌다. 목을 감쌌던 남자의 손이 스르르 어깨로 내려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별수 있나. 맞잡은 손을 풀어 채우수의 옷을 붙잡아서 내게 당겼다. 입 속을 헤집던 혀가 빠져나가더니 쪽, 하고 입술이 짧게 붙었다가 떨어졌다. 하아, 몰아쉬는 숨이 뜨거운 건지 얼굴에 내려앉은 채우수의 눈빛이 뜨거운 건지 모르겠다.
“왜……. 왜 멈춰요?”
“싫다며.”
“…….”
“어때. 싫은 사람이랑 키스한 소감이.”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채우수를 쳐다보자 성마른 입술이 입가에 잘게 내려앉았다. 어떡하지. 이대로라면 정말이지 심장 소리가 밖으로 들릴 것만 같다. 가쁜 숨을 조용히 삼키며 그를 살짝 밀어내자 뺨을 감쌌던 손이 내 손을 잡아 왔다. 이마를 맞대며 코끝에 입을 맞춘 채우수가 나직이 속삭였다.
“응? 어땠어.”
“뭐…… 그럭저럭 적당했어요.”
다행이네. 휘었던 그의 입꼬리 근처에 보조개가 쏙 들어갔다. 원래 보조개가 있던 사람이던가, 하는 생각도 잠시. 달싹이던 입술이 채우수의 입 속으로 다시 빨려 들어갔다. 잡혔던 손가락이 하나씩 얽히고 혀가 설켰다. 우리의 지난 시간들은 그렇게 뒤집혔다.
* * *
드르르륵, 돈 세는 소리를 들으며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ATM에 비친 내 얼굴이 멋쩍어 손등으로 볼을 꾹 눌렀다. 달아오른 볼은 아직도 붉은 물이 빠지질 않았다. 미쳤지, 한연두. 채우수랑 키스를 왜 해? 왜 받아 줘? 기계 벽에 머리를 쿵 찍었더니 기계가 화답하듯 오만 원권 네 장을 뱉어 냈다.
하아, 이십만 원이면 충분하려나. 평소보다 모자란 금액이지만 이번 달은 나도 어쩔 수가 없다. 한태평 학원비도 일시불로 내는 바람에 통장에 여유가 사라진 탓이다. 간추린 지폐를 봉투에 넣고는 등을 돌렸다.
은행 밖에는 아직 채우수의 차가 라이트를 깜빡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도망칠까. 어차피 집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는데. 복잡한 생각을 털어 내며 은행 문을 열고 나가자 찬 바람이 몸을 감싸고 돌았다.
이대로 모르는 척 집에 걸어가도 괜찮지 않을까, 다른 길을 힐끔거리다가 채우수의 차를 쳐다봤다. 그러자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양, 주인을 닮아 속이 새까맣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차에서 채우수의 손이 비죽 삐져나오더니 제 휴대폰을 흔들었다. 저건 또 뭐 하자는 신호인가, 가늘게 뜬 눈으로 마침 지잉 울려 대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한연두. 도망갈 생각 하지도 마] 09:41 PM
아, 정말. 내 머릿속을 다 읽은 모양이다. 어깨를 살짝 들었다가 떨구고는 할 수 없이 채우수의 차로 걸어가 얌전히 조수석에 올랐다. 옆얼굴에 닿는 시선이 따가웠지만 신경 안 쓰는 척 벨트를 하곤 차창 쪽으로 몸을 붙였다. 채우수도 딱히 할 말은 없는 듯 한숨을 작게 쉬고는 차를 움직였다.
한태평에게 걸려 온 전화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진도가 더 나갔을 게 분명하다. 그때쯤 끊어 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의 입술이 닿았던 목을 쓸면서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미쳤지, 맨정신에. 술이라도 마시고 할걸. 어쩐지 조금 부풀어 오른 것 같은 아랫입술을 윗니로 깨물었다.
“한연두.”
깜짝이야. 적막을 가르는 채우수의 목소리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를 향해 고개를 살짝 돌렸다. 지금 나만 이렇게 불편한 걸까. 채우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깟 키스 따위, 이런 마음인 걸까. 키스든 섹스든 자신 있다더니 어디서 나 몰래 많이 놀아 본 거 아냐? 뭐, 키스만큼은 그 자신감에 납득이 가는 건 사실이긴 하지만.
“왜요?”
“너 안 잡아먹어. 눈치 좀 그만 보라고.”
눈치 챙기라고 할 땐 언제고. 그리고 누가 눈치를 봤다고 그래. 마른 입술을 혀로 살짝 핥으면서 채우수의 입술에 닿았던 시선을 겨우 뗐다. 어느새 채우수의 차는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들어섰다. 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시간들도 이제 끝이라는 말이겠지. 큰아빠도 집에 오셨으니 주말 동안은 채우수와 따로 마주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의 키스도 단지 분위기에 취해서 했을 뿐이고, 이 키스 한 번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향후 그 어떤 일에도 내 책임은 없을 것임을 명백히 할 목적으로 운전석을 쳐다봤다.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 건데요. 우리가 오늘 키스를 했다고 해서…….”
“알았어, 그래.”
“아직 말도 안 했는데 선배가 뭘 알아요?”
“키스 한 번으로는 못 사귀겠다 그 말 아냐.”
맞는 말이지만 뭔가 이상하다. 어쩐지 투입량이 부족하다는 말처럼 들리지만 결과적으로는 사귀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니 맞는다고 쳐야 할까. 다소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거리자 채우수가 턱짓을 하며 내리라는 신호를 줬다.
“얼른 올라가 봐. 태평이가 너 기다리는 거 아냐?”
조수석 문을 열다가 등을 돌렸다. 웬일인지 그는 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선배는 같이 안 내려요?”
“난 지금 내리면 안 될 것 같은데.”
무슨 소린가 싶어 눈썹을 들어 올리자 채우수가 비뚜름히 웃으면서 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단정한 입매에 닿았던 시선이 그와 함께 바지춤으로 떨어졌다. 이미 여러 번 훔쳐봐서 익숙하다지만 이번엔 평소와 다르다. 제 위상을 자랑하듯 꼿꼿하게 일어난 그것이 자신을 가두고 있는 직물들과 싸우고 있는 모습이 분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미쳤나 봐요. 미쳤어!”
“뭐, 너만 괜찮다면 난 딱히 상관은 없어.”
세상에, 뭐가 상관이 없다는 거야. 내가 뭐가 괜찮아야 한다는 거야. 여기서 뭘 하기라도 하겠다는 말이야, 뭐야.
“아니, 됐어요! 그런 건 선배 혼자 알아서 처리하세요.”
“밖에서 그러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아무리 내 차라고는 해도.”
“아니, 아니! 처리가 아니라 아무튼 알아서 식혀요. 갈게요.”
웬일이니 진짜. 서둘러 가방을 챙겨서 차에서 내렸다. 그걸 왜 이렇게 뜬금없이 세우고 난리야. 찬 바람에 기껏 식힌 얼굴이 다시 불타올랐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어갔다. 간만의 뜀박질 때문인지 심장이 한참을 쿵쿵거렸다.
* * *
“연두, 귤 먹을래? 감 깎아 줄까?”
“아니에요. 저 밥 엄청 많이 먹고 왔어요!”
후드 티에 머리를 끼워 넣으면서 방문 밖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아무래도 집에 와서 먹으려던 야식은 오늘은 그냥 넘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몇 번 만에 입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던 한우는 맛있기는 해도 역시나 배를 온전히 채우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배가 고프다고 하면 큰아빠는 또 이것저것 많이 챙겨 주실 게 분명하니까 오늘은 그냥 이대로 자야지.
마르기는커녕 가을이 되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조금 살이 붙었다 싶건만 큰아빠 눈에는 무슨 깍지가 씌기라도 한 건지 나만 보면 그렇게 못 먹이셔서 안달이다. 하긴, 중학생 때를 생각하면 큰아빠가 저러시는 것도 당연하긴 하다. 바지까지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나는 가방에서 아까 찾았던 돈 봉투를 꺼냈다.
이십만 원. 역시 좀 모자라다. 그래도 이렇게 반찬까지 싸 오시는 걸 보면 차마 말은 못 하셔도 돈이 좀 필요하다는 말씀인데. 지갑 속에서 오만 원짜리 두 장을 더 꺼내서는 봉투에 추가로 넣었다. 그래도 곧 겨울이니까, 난방비도 더 나올 거니까. 월급 받으면 추가로 용돈을 더 드리든가 해야겠다 생각하며 방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반으로 접은 봉투를 큰아빠가 걸어 둔 점퍼 안주머니 안에 슬쩍 감추어 넣으며 말했다.
“밤에 과일 많이 드시는 거 안 좋아요.”
“난 안 먹어. 연두 너 먹이려고 그러지.”
쭈뼛거리며 서 있자 한태평에게서 귤 하나가 날아들었다. 갑자기 날아든 귤이 어깨를 때리고 떨어지자 한태평이 “나이스.”를 외치며 꼴사납게 웃었다.
“보자 보자. 오랜만인데 연두 얼굴 좀 자세히 볼까.”
“자주 못 찾아뵈어서 죄송해요.”
“아니야, 너 바쁜 거 뻔히 아는데. 시간 많은 사람이 와야지.”
결국 감도 깎으신 모양이다. 맛이나 한번 보라며 건네주시는 포크를 손에 들고는 식탁이며 냉장고 주위로 깔린 반찬들을 훑어봤다. 배추김치는 물론이고 깍두기, 갓김치에 마늘장아찌, 깻잎 반찬 등등 아주 한태평 몇 달 치 반찬은 될 것 같다.
“회사 일은 할 만해? 우리 연두 괴롭히는 놈들은 없어?”
“없어요. 다들 잘 해 줘요.”
“너 좋다는 남자들은 없어? 우리 연두가 나 닮아서 얼굴도 조막만 하고 눈도 새침한 게 얼마나 예쁜데.”
큰아빠를 따라 반찬 정리를 하던 한태평이 우웩, 토할 것처럼 표정을 구겼다. 또 또 저렇게 까불다가 한 대 맞지. 감을 입에 넣고는 빈 포크를 한태평을 향해 겨누자 태평이 어림도 없다는 듯 인중을 늘이며 웃었다.
“남자 없어, 연두야?”
“그런 거 없어요.”
“그 회사 사내놈들이 눈이 다 삐었구만.”
“에이, 큰아빠도 완전 고슴도치야. 한연두 같은 걸 어떤 남자가 좋아해요?”
찌를 듯이 가늘어진 눈 두 쌍이 제게 닿았건만 갓김치를 둘둘 말아서 입에 넣고 있는 한태평에겐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손가락에 묻은 양념을 쭉쭉 빨던 태평이 마치 당연한 이치라도 되는 듯이 입을 나불거렸다.
“저것 좀 봐. 입고 다니는 것 좀 보세요. 머리를 저 모양으로 잘라 놨으면 옷이라도 좀 여자 같은 걸 입고 다니든가.”
“태평이 너 이 새끼 누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큰아빠가 너 그렇게 가르쳤어?”
한태평 저거 덜 맞아서 그래요. 식탁 의자를 빼내어 앉으며 심드렁하게 말하자 두툼한 큰아빠의 손이 한태평의 등짝을 골고루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퍽퍽 내리갈기는 소리 사이로 악악 질러 대는 비명은 언제 들어도 정답다.
“맞아야 해! 정신 못 차리는 사내새끼들은 맞아야 해!”
“아! 큰아빠는 나만 미워하셔.”
“내가 안 그러게 생겼어? 냉장고가 이게 뭐야? 누나 좀 잘 챙기라고 한집에 보내 놨더니 이놈 자식 너 집에도 잘 안 들어온다며?”
“아, 요즘 독서실에서 공부한다고 그래요.”
“너 이 새끼 공부는 네가 무슨 공부야. 내 평생 너 공부하는 꼴을 못 봤는데.”
“진짜라니까요! 아, 뭐라고 말 좀 해 봐, 한연두!”
“이놈이 어디서 누나 이름을 함부로 불러?”
억울해 죽겠다는 한태평을 보고 입술을 샐쭉하고는 요즘 공부하는 것은 맞다고 덧붙이자 그제야 큰아빠의 손놀림도 멈추었다. 수상한 눈초리가 태평에게 내려앉았지만 큰아빠도 더 이상 따져 묻진 않으실 것이다. 그러게 왜 까불어. 한태평이 제아무리 까불어 봤자 이 집에서는 내 말이 곧 정답인 법인데.
“태평이 네가 얼른 자리 잡아야 네 누나도 마음 놓고 시집갈 거 아냐.”
“시집은 무슨. 전 아직 멀었어요.”
“왜. 나도 친구 놈들 다 하는 사위 자랑도 좀 하고 싶은데.”
잔소리 화살이 내게로 향하자 한태평의 움츠러든 어깨가 다시 펴졌다. 저러다 또 맞으려고.
“연두 너 전에는 남자 친구 있다고 하지 않았어?”
“한연두 연애 안 한 지 꽤 됐어요. 서른 넘어서 그런지 이제 소개팅도 안 들어오는 모양, 아악! 아파요! 머리는 때리지 마세요!”
그것 봐. 또 맞을 줄 알았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다리를 식탁 의자에 올려 무릎 사이로 턱을 갖다 댔다. 큰아빠의 손에서 태평의 손으로 건네지는 반찬들에 눈을 주다가 휴, 옅은 숨을 내쉬었다. 말은 그렇게 하셔도 모조리 다 한태평이 좋아하는 반찬들로만 싸 오셨다.
어쩌면 한태평이 저런 식으로 모자란 놈처럼 굴며 구박을 즐기는 것도 애정 결핍이라면 애정 결핍일 것이다. 아빠까지 사고로 보냈을 땐 한태평이 겨우 10살 때였으니까 그럴 만도 하지.
“큰아빠는 연두 네가 좋다는 남자면 다 오케이야.”
“에이, 아닐걸요. 누나 사윗감 깐깐하게 따지실 거면서.”
“우리 연두가 얼마나 똑똑한데. 남편감도 어련히 잘 골라 올까.”
“그건 큰아빠가 잘 몰라서 그렇…….”
또 가벼운 입을 놀리려던 한태평이 내 눈을 보고는 어깨를 괜히 으쓱거렸다.
“연두 너만큼만 하는 남자면 좋겠어, 나는. 착하고 똑똑하고. 넉넉하게 자라서 우리 연두 고생 안 시키는 남자면 더 좋겠고.”
새로운 반찬들로 꽉 채워진 냉장고가 그만 욕심부리고 빨리 문을 닫으라는 듯 삐이삐이 소리를 낸다. 저걸 빼고 새 반찬을 넣으면 될 것 같은데. 손가락을 들었다가 그냥 멈추었다.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정리될 냉장고다.
“그런 거 다 필요 없어요. 한연두, 누나는 남자 보는 일 순위가 얼굴이에요. 못생긴 남자랑은 겸상도 안 해요.”
“그건 우리 연두가 비위가 안 좋아서 그렇지.”
큰아빠의 말씀에 킥킥대면서 귤을 하나 까서 입에 물었다. 신맛이 강해 한쪽 눈이 저절로 접혔다. 윙크라도 한 것처럼 보이는지 한태평이 제가 다 비위가 상했다는 표정을 지어 댔다.
“그래서 제가 한태평이랑 밥 같이 못 먹잖아요.”
“연두야, 말은 바로 해야지. 우리 태평이는 못생기진 않았어. 그냥 눈, 코, 입이 좀 자유롭게 생겼지.”
“아, 큰아빠!”
나보다 큰아빠를 더 많이 닮은 한태평이고, 큰아빠도 그걸 은근히 뿌듯해하시는 게 뻔한데. 이것 또한 그들만의 애정 표현이라는 것을 안다. 이제 정리가 된 모양인지 태평이 냉장고의 문을 닫으면서 허리를 세웠다.
“아무튼 연두 네가 좋은 남자 만나서 가정 꾸리고 사는 걸 봐야 내가 마음 놓고 죽어.”
“죽는단 말씀은 하지 마시구요.”
“그래도 네 아빠 만나서 남들만큼은 다 했다, 평범한 아빠들만큼은 했다 하고 떵떵거리고 싶단 말이야.”
“지금도 충분해요.”
“나는 연두 네가 착하고 능력 좋고 돈도 많고 어? 그래, 인물도 좋은 남자랑 결혼하는 거 보는 게 내년 계획이야.”
벌써 3년째 근처에도 못 가고 없어지는 계획이지만 내년에도 변동 사항은 없을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귤 한 알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면서 다른 귤 하나를 손에 새로 넣었다.
“그런데 만약에 착하고 능력 좋고 돈도 많고 인물도 좋은데 이혼남이면 어떡해요?”
“……뭐?”
“누나 이혼남 만나고 다녀?”
너무 진지하게 물어봤던 것일까. 귤을 까던 손놀림이 두 사람의 반응에 둔해졌다.
“농담이에요.”
“그런 농담은 하지도 말어! 죽어서 너네 아빠한테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잔소리의 화살 끝은 그렇게 완벽하게 나를 꿰뚫었다. 어린놈이 뭘 안다고 한태평까지 합세해서는 있지도 않은 내 남자 친구에 대해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말하기 전에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나는 두 사람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불쑥불쑥 떠오르는 채우수의 목소리에 나도 몰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반찬 정리를 끝낸 큰아빠가 주섬주섬 남은 짐을 챙기셨다. 오늘은 그냥 여기서 주무시고 가시란 걸 한사코 거절하던 큰아빠는 못내 찝찝했던지 엘리베이터 앞에서 의심스러운 눈빛을 다시금 꺼내셨다.
“연두 너 진짜 이혼남 만나는 거 아니지?”
“에이, 농담이라니까요.”
“아무리 잘난 놈이 간이랑 콩팥 다 떼 준대도 이혼남은 안 돼.”
“그러겠다는 남자도 없어요. 큰아빠는 날 너무 과대평가하셔.”
“못난 놈들한텐 함부로 웃어 주지도 마.”
입술을 옆으로 당겨 웃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내려가는 김에 쓰레기도 버려야겠다는 한태평까지 태운 엘리베이터의 문이 천천히 닫혔다.
“한연두 맹해서 잘생긴 남자 앞에서는 웃음이 그냥 절로 나올걸요.”
“너 이놈 새끼, 또 누나 이름 막 부르지?”
내려가는가 싶던 엘리베이터가 바로 한 층 밑에서 멈추더니 익숙한 낯짝을 안으로 들였다. 아, 채우수. 하필이면 또 채우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아래층 문 열리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우리보다 먼저 나와 있었나 보다. 우리 대화 소리를 들었으려나……. 아니, 들었대도 뭐 상관은 없다.
“어, 우수 형!”
뭘 얼마나 잘 가라앉혔는지 모를 채우수가 후드 티에 트레이닝 바지 차림으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태평에게 슬쩍 웃는 걸로 인사를 대신한 채우수는 태평과 나 사이의 큰아빠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내 앞자리에 섰다. 널따란 등이 엘리베이터 번호 키를 다 가렸다. 그의 등짝을 훑어 올라가자니 왠지 거울로 채우수와 눈이 마주칠 것만 같아 고개를 틀어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큰아빠의 눈빛이 수상해지는 것이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아래층 총각인가?”
“아, 맞아. 누나랑 같은 회사 다니는 그 형이에요. 제가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왜.”
“아, 그때 그 총각?”
입 가벼운 한태평이 채우수의 어떤 얘기를 전달했는지는 모르겠다. 큰아빠가 반가운 미소를 한가득 머금은 채로 채우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대외적으로는 공손하고 예의 바른 인간이던 채우수는 등을 돌려 큰아빠에게 다시 고개를 숙이면서 저를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연두 학교 선배이자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채우수라고 합니다. 뭐 이런 형식적인 설명들이 끝나자 엘리베이터도 어느새 공동 현관에 도착했다.
우리 아빠는 이 정도로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오랜 택시 운전 탓일까, 큰아빠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쉽게 말을 붙이셨다. 아파트 건물을 빠져나가는 동안 그렇게 나이는 몇이냐, 결혼은 했냐 따위의 오지랖 넓은 말이 채우수에게 날아들었다. 큰아빠의 호구 조사도 난감했지만 나는 그것보다도 큰아빠를 대하는 채우수의 태도가 더 황당했다.
저것 봐, 저것 봐. 처음 보는 어른 앞이라고 저렇게 또 예의 바르게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좀 봐.
나는 앞서가는 남자 셋 뒤에서 터덜터덜 걸으면서 채우수의 뒤통수를 쏘아봤다. 한태평이 그래도 182cm는 될 텐데 채우수는 그것보다 훨씬 크니까 어쩌면 190cm이 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러니까 내가 채우수를 올려다보는 게 힘들었지. 나도 딱히 작은 키는 아닌데. 그에게 안기면 내 머리는 채우수 가슴팍에 겨우 닿을 것 같다.
아니, 세상에 미쳤나 봐, 한연두. 채우수랑 안을 생각을 뜬금없이 왜 해?
정말이지 주책이다. 채우수가 게이라는 가설이 무너지자마자 생각이 자꾸만 다른 쪽으로 돌아간다. 나는 잡생각을 떨쳐 내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큰아빠를 보내드리자마자 행여나 채우수와 마주칠까 주위를 살피면서 서둘러 아파트 공동 현관으로 향했다. 한태평은 독서실로 다시 간댔으니 아마 새벽이나 되어야 들어올 것이었다. 밤공기가 싸늘해 후드 모자를 뒤집어썼다. 이대로 겨울인가, 소매통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몸이 덜덜 떨렸다. 움켜쥔 소매 밖으로 검지만 빼내어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려는데 긴 그림자가 등 뒤에서 드리웠다. 익숙한 향이 코끝을 간질이는 걸 보니 누군지 안 봐도 뻔했다.
아, 또 채우수야. 어깨 뒤로 힐끗 눈길만 보냈다가 번호를 다시 눌렀다. 어쩐지 손가락이 겉도는 듯 떨리는 것은 추위 때문일 것이다.
삐삐삐. 비밀번호가 틀렸다는 알림음이 들렸다. 등 뒤로 채우수의 웃음소리가 옅게 퍼진 것도 같다. 아, 정말 하필이면 또. 손가락을 접었다가 펴고는 비밀번호를 다시 눌렀다.
삐삐삐. 뭘 또 잘못 눌렀는지 이번엔 숫자를 다 누르지도 않았는데 오류가 떴다. 입술을 말아 물고는 키패드에 손가락을 다시 가져다 댔다. 이번엔 제대로 눌러야지. 별것도 아닌데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긴장이 됐다.
삐삐삐.
아, 진짜……. 또 틀렸다. 어쩐지 더워져서 후드 모자를 벗었다. 머리가 윙윙 울렸다. 비밀번호가 이게 아니었던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꽉 쥐었던 주먹을 폈다. 관자놀이에서 심장이 춤추는 기분이었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 다시 번호를 누르려는 순간 등 뒤로 느껴지는 채우수의 움직임에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한연두, 천천히.”
건조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불어왔다. 채우수의 왼손이 내 머리를 쓸었다가 목을 따라 내려와서는 어깨를 감쌌다. 무심코 오른쪽으로 돌린 고개 옆으로 채우수의 오른손이 뻗어 나왔다. 이 와중에도 나는 여전히 그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신경 쓰였다.
“천천히 하나씩.”
키패드 위로 얼어붙은 내 손가락을 감싸 쥔 채우수의 손가락이 말 그대로 숫자 하나하나를 천천히 꾹꾹 눌러 나갔다. 몇 번의 터치 만에 공동 현관문이 제대로 열리자 그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목에서부터 붉은 열기가 퍼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뒤에서 느껴지는 채우수의 시선을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말없이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와서 엘리베이터 앞까지 내딛는 걸음이 꼭 흐물거리는 오징어 같았다. 뭐, 여차하면 먹물이라도 쏴야지 싶다.
꼭 이럴 때 엘리베이터는 꼭대기 층에 있지. 초조함을 삼키며 옆에 선 채우수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엘리베이터 문 위로 점점 작아지는 숫자들만 응시했다.
17, 16, 15.
내 얼굴을 향한 뚫어질 듯한 눈빛이 그대로 느껴졌다. 안 돼, 안 돼. 말리면 안 돼. 뚫리면 안 돼.
12, 11, 10.
빨리 내려와라, 빨리. 채우수가 헛소리하기 전에 빨리.
6, 5, 4.
“한연두.”
빨리빨리. 귓가에 다정히 내려앉은 그의 목소리를 부정하며 홉뜬 눈으로 숫자들을 셌다.
“자고 갈래?”
그 순간 붙박이처럼 숫자만 쳐다보던 눈을 왜 채우수에게 돌렸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지하 1층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빈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렸다. 채우수가 방금 뭐라고 말했는데. 잘못 들었을 리 없는 그 말은 되묻지 않아도 분명한 의미를 품고 있었다.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채우수가 안 타고 뭐 하냐는 듯 고갯짓을 했다. 자신이 무슨 말을 뱉은 줄은 아는 걸까. 아무렇지도 않은 그의 얼굴은 내가 채우수의 말을 착각했나 싶기도 하다. 타고 갈래, 뭐 이런 말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기에 저 입매에 걸린 미소는 다소 음흉함을 담고 있는 것 같지만.
“타서 생각해. 자고 갈지 말지.”
아아, 역시 내가 파악한 그 의미가 맞았다. 내가 여기서 엘리베이터를 타면 그게 긍정의 답이 될까. 그렇다기엔 우리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이기도 한데……. 차라리 걸어 올라갈까. 비상구 계단을 쳐다보자 채우수가 내 생각을 읽은 듯 피식대며 웃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고민이 되는 거지. 나는 입 안 여린 살을 잘근거리면서 발을 뗐다. 집으로 올라가는 동안, 딱 그 정도의 시간만큼을 벌어 보기로 했다. 비록 그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선택이었는지 후회한 것이 나중 일일지라도.
평균적으로 일반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는 분당 100m를 올라간다고 한다. 아파트 한 층을 2.5m로 잡는다면 채우수의 집인 9층까지는 공동 현관이 있는 지하 1층까지 감안했을 때 대략 25m. 문이 열리고 닫히는 시간까지 넉넉하게 계산한다면 내게 허락되는 시간은 고작 20초다.
나는 그 20초의 시간 동안 내가 채우수를 싫어하는 이유, 다시 말해 그와 더 이상의 진도를 빼면 안 되는 이유를 빠르게 생각해 봤다.
첫 번째, 채우수는 전적으로 내 스타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잘생겼긴 하지. 그러니까 키스까지는 뭐 괜찮았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두 번째, 채우수는 내가 본 것 중 가장 우수한 것, 심지어 화난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완벽에 가까운 그것을 달고 있으나 여자를 좋아하지 않고…… 아니, 이건 이제 아니잖아. 어쨌거나 세 번째, 채우수는 날 제외한 사람들에게는 착한 척 가식적으로 구는 위선자인 데다가 네 번째…….
“결정했어?”
도대체 20초는 왜 이렇게 빠른 거야? 언제 도착했는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채우수가 날 빤히 쳐다봤다. 느릿하게 기울인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아직 아니라는 신호를 보내자 채우수가 퍽 귀찮아졌다는 표정을 짓고는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에 제 발을 끼워 넣었다.
“그럼 라면 먹고 갈래?”
“……너무 뻔한 수법 아니에요?”
“그런 게 위험 부담이 적거든.”
이것 보라며 그가 내린 시선 끝엔 어느새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온 내 운동화가 걸려 있다. 세상에, 나는 언제 따라 내린 거야 대체……. 아무래도 뭔가에 홀린 것이 분명하다. 맞아. 홀린 거야. 채우수가 라면 얘기를 꺼냈잖아. 그것도 겁나 좋은 음역대의 목소리로. 이러니 내가 어떻게 안 넘어가겠어.
“소주도 있어. 너 그거 좋아하잖아.”
“지금 나한테 술을 먹이겠다는 말이에요?”
“먹여 주는 게 좋다면 해 줄 수는 있어.”
채우수가 열린 현관문을 한 손으로 지탱한 채 날 뒤돌아봤다. 표정만 보자면 정말로 단순히 라면을 권하는 얼굴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라면 먹고 가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성인 남녀가 얼마나 있을까. 저 음흉한 속셈을 누가 모를 줄 알고.
“어떡할래.”
왜 이렇게 항상 내게 선택권을 주는 척인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 선택권이 내게 주어졌다는 것에서 왠지 모를 자신감이 차오른 나는 턱을 도도하게 살짝 치켜들어서는 채우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싫다면요?”
“어쩔 수 없지. 강요는 안 해.”
어라, 이건 아닌데. 예상치 못한 흐름에 멀뚱히 서서 눈만 깜빡였다. 아니 잠깐만. 이거 내가 또 눈치 없이 오해한 거야? 아니잖아. 우리는 오늘 키스를 했고, 채우수는 제집에서 자고 갈 건지를 물었고, 그걸 라면 먹고 갈 건지 돌려 말하며 재차 확인까지 했는데. 누가 봐도 섹스하자는 신호가 맞잖아. 그런데 채우수는 뭐가 저렇게 또 여유로워?
어쩐지 조금 더 재수가 없어졌다. 키스 한 번에 발정 난 듯 아래를 세울 땐 언제고, 하면 하고 안 하면 안 하고 아쉬울 건 전혀 없다는 저 같잖은 채우수의 상반신을 보라. 세상에. 어깨 넓은 것 좀 봐. 어쩜 저렇게 잘났을까. 저건 운동으로 나오는 몸은 아니야. 그냥 타고나는 거지…….
그의 어깨를 꾸물꾸물 기어가던 변태 같은 시선을 황급히 거뒀다. 모든 게 내 말 한마디로 결정될 상황이라면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나는 채우수를 싫어하니까 채우수와 섹스할 이유가 없다. 없어, 맞아. 누가 뭐래도 없어. 그저 이대로 인사를 하고 계단을 올라가면 끝날 상황이다. 나는 제법 쿨하게 계단 쪽으로 발끝을 30도가량 돌렸다.
“근데 싫지 않잖아, 너도.”
채우수의 말이 내 발을 가볍게 낚아챘다. 계단으로 향했던 발끝은 어느새 채우수의 집 안으로 들어갈 기세로 방향을 틀었다.
“라면 먹는 것도 싫어?”
진짜 라면만 먹자는 것일까. 그런 거라면 더더욱 내가 거절할 명분은 없지 않을까. 채우수 집에서 밥을 먹은 전적도 있으니까. 술만 안 마신다면 라면만 먹고 집으로 올라가면 되지 않나. 어쩐지 복잡하게 꼬였던 감정의 매듭이 풀린 기분이다.
“……술은 안 마셔요.”
“알았어.”
“라면만 먹어요 진짜.”
“그래.”
“난 원래 우리 집에 가서 라면 먹으려고 했었다구요. 마침 선배가 라면을 권하니까 내가…….”
“알겠으니까 들어오기나 해.”
“……진짜로, 어쩔 수 없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렇게 나는 채우수의 집으로 또 들어왔다. 현관문에 달린 풍경이 딸랑, 예쁜 소리를 내자 괜스레 머릿속에도 음표가 날아다녔다. 나는 현관에 벗어 둔 운동화를 가지런히 정리하고는 채우수와 일정 간격을 유지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라면도 먹고 밥도 말아 먹는다고 하면 민폐려나, 그것도 눈치 없는 행동일까 생각하며 주방 쪽을 훑다가 채우수와 눈이 마주쳤다.
“먼저 씻어.”
“왜, 왜, 왜 씻어요?”
“손 씻어야 할 거 아냐.”
“아아.”
나는 언제 이런 게 내 몸뚱이에 붙어 있었냐는 듯이 내 손을 내려다봤다. 내가 지금 긴장한 걸까. 아니잖아. 난 그냥 라면 먹으러 온 거잖아. 어쩐지 삐거덕삐거덕 고장 난 것만 같은 몸을 이끌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하필이면 또 문제의 그 욕실이었다. 며칠 전의 채우수의 벗은 몸이 생각나자 얼굴이 화르르 달아오르는 것이 내가 봐도 꼴불견이다. 웬일이니 정말. 찬물로 비누 거품을 헹군 손으로 뺨을 감쌌다. 별것도 아닌 걸로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한 이유는 단지 이 욕실이 가진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같이 씻을까?”
깜짝이야. 거울 속으로 욕실 문간에 몸을 기댄 채우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뺨을 감싼 손을 떼고는 몸을 돌렸다. 채우수의 몸이 욕실 문을 꽉 채우는 것이 틈을 비집고 빠져나가기는 힘들 것 같다.
“손……을 굳이 같이요?”
“설마 손뿐이겠어.”
세상에, 세상에. 이게 지금 무슨 말이야? 뭘 그럼 더 씻겠다는 말이야. 팔짱을 낀 채로 날 내려다보는 채우수의 눈빛은 음탕하기 짝이 없다. 세상에, 웬일이야. 화장실 갈 때 마음이랑 나올 때 마음이랑 다르다더니 이 인간은 밖에서부터 요망한 눈빛을 보내고 있잖아.
“설마 지금 꼬시는 거예요?”
“내가 너를?”
“그럼 내가 책임님을 꼬셔요?”
“그런 것 같은데.”
이것 봐, 내가 뭘 했다고 또 책임 전가야. 뭐라고 따질 새도 없이 채우수가 욕실로 들어오자 흠칫 놀라서는 벽에 몸을 붙였다. 흐읍, 숨까지 참아 가며 납작하게 만든 몸을 보고 피식 웃던 채우수가 핸드워시를 펌핑하면서 거울 속으로 눈을 맞춰 왔다.
“따지자면 네가 지금 날 꼬시고 있어.”
“이상한 소리 하지 말아요.”
“왜 이상한 소리라고 생각해?”
“내가 무슨 수로 선배를 꼬셔요.”
“글쎄.”
세면대에 물이 흐르던 소리가 뚝 끊겼다. 그때까지도 거울 속으로 시선을 계속 맞추며 날 빤히 쳐다보던 채우수가 내 쪽으로 등을 돌렸다. 방황하는 눈동자 옆으로 채우수의 손이 쭉 뻗어 오더니 내 옆에 있는 수건을 가져다 물기를 톡톡 닦아 냈다.
“예쁘잖아, 너.”
세상에. 어쩌면 저 수건이 채우수로부터 흡수한 것은 물기가 아니라 염치일지도 모르겠다.
“웃겨. 갑자기 선배 눈에 내가 예뻐 보이기라도 해요?”
“갑자기라기보단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긴 했어.”
“웬일이야. 그런 거라면 그게 어떻게 갑자기 꼬시는 게 돼요? 원래부터 예뻤는데?”
“아, 한연두 생각에도 네가 원래부터 예뻤다는 거네?”
“그거야…… 못난 얼굴은 아니잖아요.”
가벼운 웃음이 이마 위로 날렸다. 예쁘다니 뭐니 하는 소리는 놀리려고 하는 말이 뻔하디뻔할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예쁘다는 소리에 치를 떨며 부정할 만큼 지나치게 겸손한 성격은 아니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넘어가야지. 나도 채우수 정도는 아니어도 뭐 나름 적당히 괜찮게 생긴 편이니까.
나는 이만큼 놀아 줬으면 됐다는 마음으로 내 앞을 가로막은 채우수의 몸을 살짝 밀었다.
“이제 그만 비켜 줘요.”
“왜. 예쁜 얼굴 좀 더 보자?”
“……예쁘다는 말 이제 그만 얘기해요.”
“닥치란 말도 예쁘게 하네, 한연두는.”
아, 진짜. 눈썹 사이를 한껏 좁히며 채우수를 올려다봤다. 단정한 입매에 비뚜름히 걸린 미소는 욕실 조명 아래에서 어쩐지 더 재수가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재수 없게 너무나도 잘생겨서 더 재수가 없을 뿐이고…….
“싫어?”
“네, 놀리지 마요.”
“아니, 아직도 하기 싫냐고.”
채우수가 한 팔로 벽을 짚으며 내게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욕실이어서 그럴까. 갑자기 어디선가 몰려든 습기로 숨이 턱턱 막혀 오는 것이 꼭 아가미가 생길 것 같다. 갈 곳 잃은 눈동자가 금붕어처럼 채우수의 가슴팍만 맴돌았다.
“뭘 하기 싫어. 뭘, 뭘…… 할 건데요?”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 주던 채우수가 엄지로 내 귓바퀴를 쓸었다. 물기가 다 닦이지 않은 손가락으로 귓불까지 만지작대던 채우수는 급기야 고개를 숙여서 얄궂은 음성을 흘렸다.
“섹스.”
“미쳤나 봐, 싫어요!”
두 손으로 채우수의 가슴팍을 밀어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간지러운 건지 뭔지 킥킥대던 그가 내 도주를 막아보려는 듯 한 발 더 다가와서는 제 몸으로 날 가두었다.
“그럼 키스하면서 생각해 볼까?”
“아니, 싫다니까요?”
“알았어.”
“알았으면 좀…… 비켜 줘요.”
“그런데 한연두. 나는 이혼남도 뭣도 아닌데.”
“갑자기 그게 무슨…….”
아아, 역시 아까 큰아빠랑 나눈 얘기를 들었나 보다. 나는 채우수의 가슴팍을 짚었던 손을 스르르 풀고는 밑으로 내려 그의 허리춤을 붙들었다. 확실히 해 두는 거지만 절대로 채우수의 몸을 만지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 채우수와 나 사이의 어떠한 간격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스킨십이었을 뿐이다.
“인물 좋고 능력 좋고. 집안도 좋고. 빠질 것도 없잖아.”
“웃겨. 제일 중요한 성격이 이상하잖아요.”
“그러니까 너랑 어울리잖아.”
“나랑 왜 어울려요 그게?”
“지금도 충분히 밀어낼 수 있으면서 말로만 싫다 그러면 누가 믿어.”
아 정말. 채우수가 몸을 더 붙여 오자 그의 향수 냄새가 내 몸을 적셔 오는 듯하다. 도대체 향수를 들이붓는 거야 어쩌는 거야. 코끝이 간질간질 재채기가 나올 것만 같아 콧등에 주름을 잡았더니 채우수가 기다란 검지로 내 콧등을 툭툭 두드렸다.
“아니…… 그건 책임님이 자꾸 이런 식으로 하니까.”
“한연두 선임님, 출근한 기분 만들지 마시고.”
“아니, 그래요. 선배가 자꾸만…… 세상에! 이거 왜 이래요?”
나는 채우수가 생물학적으로 남자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내렸다. 아까부터 자꾸 허벅지부터 붙여 대는 게 이상했어, 진짜. 웬일이야 정말.
“뭐가.”
“알잖아요?”
“모르겠어.”
“이거요. 왜 벌써…….”
“벌써 발기했냐고?”
“네!”
“자꾸 쳐다보면 더 커질 수도 있어.”
“세상에…….”
말도 안 돼. 얼마나 더 커진다는 걸까. 어디까지나 인간의 한계를 향한 원초적인 궁금증으로 목이 말라서 침을 꼴깍 삼켰다.
“봐, 하고 싶잖아 너도.”
“아니에요! 지금 그냥 좀…… 그냥, 그냥 혼란스러워서 그래요.”
“뭐가?”
“아, 붙지 말고 떨어져요.”
“응? 뭐가 혼란스러워.”
“선배가 자꾸 이런 식으로, 아 진짜…… 이렇게 몸으로 어필하는 거요.”
“내가 너한테 어필할 수 있는 게 몸뿐이라면 최선을 다해야지.”
그 어필을 왜 나한테 해야 하냐고 그러니까.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갑자기 이렇게 급발진해도 돼요?”
“그러게 왜 건드려. 잘 참고 살던 사람을.”
이것 봐, 이것 봐. 그러니까 결국 내가 제 몸 좀 보고 만졌다고 괴롭히는 거 맞잖아.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채우수를 향해 날 선 시선을 날렸다.
“하아, 며칠 전 그걸 말하는 거라면 어디까지나 사고였다구요. 내가 일부러 작정하고 선배를 만진 것도 아니고.”
“좋아, 그때는 사고라 치고. 지금은?”
“…….”
엄마야, 한연두 미쳤나 봐. 긴장 상태에서는 신경계의 교란이 일어나기라도 하는 걸까. 멋쩍어진 나쁜 손을 고이 모아서 깍지를 꼈다. 흡사 기도라도 하는 자세로 데구루루 굴리던 눈동자를 어쩔 수 없이 채우수에게 고정시켰다.
“지금은 사고가 아니잖아.”
“죄송해요. 근데 옷 때문에 제대로 느끼진 못했어요. 진짜요.”
“그 짧은 순간에 느끼기까지 했어?”
“아니, 느낀 게 아니라…….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또 이걸로 무슨 트집을 잡아 댈지 모를 일이다. 며칠 전에는 술이라도 마셨지, 지금은 왜 만졌지? 아니지. 어떻게 생각해 보면 비슷한 상황에서 손이 먼저 뻗어 나가는 것은 지극히도 본능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일종의 귀소 본능, 아니 관성의 법칙 같은 거지. 절대 내가 지독한 변태여서 그런 게 아니다. 난 그냥…… 적당한 변태일 뿐이고 진짜 변태는 시도 때도 없이 세워 대는 채우수임이 분명하다. 이 변태의 입을 다물기 위해서는 이제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데요.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이런 거 물어봐도 돼요?”
“또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려고 그래.”
이상한 소리는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건데. 그래도 이왕 생각난 김에 물어보는 게 낫겠다 싶어서 달싹이던 입술을 조심스레 뗐다.
“그거요. 혹시 재 본 적 있어요?”
“뭘.”
뭐긴 뭐야. 이 모든 사달의 원인이지. 하지만 굳이 내 입으로 말하기 싫어서 턱짓으로 그의 아래를 가리켰다. 채우수의 입에서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이 샜다.
“넌 이 와중에 그게 그렇게 궁금해?”
“아니, 남자들은 자기 거 재 보고 그런다고 들었는데…….”
가진 자의 여유란 말인가. 내가 채우수였어 봐. 길이부터 둘레까지 자랑스럽게 기록해 둘 텐데. 다른 때는 잘난 척 잘만 하면서 쓸데없이 웬 겸손이야. 그의 못마땅한 듯한 시선으로부터 눈을 돌리던 순간이었다.
“한연두 너 발 사이즈가 얼마야.”
“갑자기 그런 걸 왜 물어요? 난 여자치고 발 좀 큰 편이라서 보통 245 신고, 가끔 작게 나온 건 250도 신는데 그래서 구두 사기는 너무 어려워…….”
“비슷하겠네 그럼.”
“……뭐가 비슷해요? 선배 발 사이즈가?”
채우수가 지금 제 발 사이즈를 말하겠냐는 듯한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럼 발 말고 뭘 말하는……. 세상에, 세상에. 그럼 그 사이즈를 말하는 거였어?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내 발로 시선을 떨구었다.
“말도 안 돼.”
“너도 이미 다 봐 놓고 뭐가 말도 안 된다는 거야.”
세상에, 그럼 저기서 더 커질 거 아냐. 미쳤나 봐, 말이야 뭐야. 나는 그때까지도 내 발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침을 꼴깍 삼켰다.
“못 믿겠으면 한번 대 보든가.”
“아니, 아니. 대 보긴 뭘 대 봐요.”
이대로라면 당장 내 한쪽 다리를 들어서 제 것에 갖다 대고도 남을 사람이다. 해 볼 테면 어서 해 보라는 듯한 당당하기 그지없는 그의 눈빛은 남사스럽기만 하다. 나는 다급히 채우수의 팔을 잡았다.
“……그냥 키스나 할까요 우리?”
“싫다며?”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
“글쎄. 어디까지 아닌지 알 수가 있어야지.”
어이없어. 이제 와서 저렇게 아닌 척 뻔뻔하게. 배꼽 밑으로는 난리가 났으면서 그 위로는 퍽도 태연하게 굴어 댄다.
“뭐…… 키스까지는 한 번 더 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요. 아까도 했으니까.”
“해 봐, 그럼.”
“내가요?”
채우수가 제 입꼬리에 비열한 웃음을 내걸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참나, 누가 하라고 하면 못할 줄 알고. 나는 그때까지도 공손하게 깍지를 끼고 있던 손을 풀고는 채우수의 가슴팍을 짚었다.
“고개 좀 숙여 줘요 그럼.”
“그러지 뭐.”
“웃지 마요.”
“거울 좀 봐. 안 웃을 수가 있나.”
“눈을 감으면 되잖아요.”
채우수가 눈을 감고는 입술을 옆으로 길게 늘이면서 고개를 숙였다. 막상 먼저 입술을 붙이려니 속이 간질거렸다. 나는 입술을 짓씹으면서 그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채우수가 원래 이렇게 생겼던가. 아직 피부도 탄력 있는 것이 나이에 비해서는 동안이다. 눈썹도 짙고 높은 코에 비해 콧구멍도 옹졸하지 않고. 뭐, 내 취향처럼 예쁜 얼굴은 아니더라도 이런 얼굴이 늙어서도 꾸준히 잘생겼을 얼굴이지. 그리고 저 반쪽짜리 보조개도 가만히 보면 꽤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뭐라는 거야. 귀여워? 채우수가 귀여워?
“키스하랬더니 얼굴 감상을 하고 있어.”
채우수가 감았던 눈을 한쪽만 뜨며 웃었다. 세상에, 윙크했어. 귀엽게……. 난데없는 감상은 심장에 헬리콥터라도 띄운 것처럼 감정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언제부터 여기 보조개가 있었어요?”
“와, 한연두 너 진짜…….”
“아니, 선배 얼굴을 이렇게나 가까이에서 자세히 볼 일이 없어서 몰랐지 나는.”
“차라리 싫어한다고 해. 무관심이 더 상처니까.”
“걱정 마세요. 싫어하는 건 변함없어요.”
그래. 나는 채우수를 싫어해. 누가 뭐래도 나는 채우수를 정말로 싫어하고, 앞으로 더 이상은 채우수와 사적으로 엮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지금 나는 단지 채우수의 육체를 원할 뿐이다. 껍데기는 남고 알맹이는 가라, 이런 말도 있지 않던가……. 있어. 아, 있어, 아무튼 있어 그런 말.
“그래. 싫어하는 사람한테 키스도 마음껏 해 봐, 어디.”
변명 같겠지만 누군가를 싫어하는 마음과 그 누군가와 키스 정도의 스킨십을 하고 싶은 것은 전적으로 다르다. 나는 마음을 다잡으면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직 턱없이 높은 어깨를 툭툭 때리자 채우수가 키를 더 내렸다.
“눈 감아요.”
“응.”
“웃지도 말구요.”
채우수가 입술을 말아 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러고 있는데 도대체 키스를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고개를 어떻게 돌려야 하나. 첫 연애도 아니고 첫 키스도 아닌데 그의 앞에 서자 모든 게 어색해졌다. 나는 차 안에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인형들처럼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리면서 채우수에게로 다가갔다.
“뭐 해.”
“아, 웃지 말라니까요.”
“한연두 너 뭐가 그렇게 비장해.”
“내가 뭘?”
“누가 보면 전쟁 나가는 줄 알겠어.”
잇새로 웃음을 실실 흘려 대던 채우수는 급기야는 못 참겠다는 듯 웃음을 크게 터뜨리며 낮춘 키를 올렸다. 그러고는 내 정수리에 제 턱을 올리면서 포박하듯이 날 꽉 껴안았다.
“아, 안아도 된다는 말은 안 했어요.”
“그래서 싫어?”
“……싫다고 해도 안 풀어 줄 거잖아요.”
“드디어 눈치라는 게 생겼어, 한연두.”
머리 위로 채우수의 콧바람이 날린다. 그의 어깨에 올려 둔 손에 힘이 풀려 주르륵 흘러내렸다가 그의 탄탄한 가슴팍에서 안정감을 찾았다.
“솔직히 난 아직도 내가 왜 선배랑 지금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선배가 왜 날 보고 이렇……게까지 그걸 세우는지도 모르겠고.”
“…….”
“내가 눈치가 없어서 그렇다기엔 모든 게 갑작스럽지 않아요?”
“…….”
“생각해 봐요. 나는 사실 선배가…….”
여기서 그가 게이인 줄 알았다고 말하면, 그것도 10년을 게이라고 착각했다고 말하면 난 얼마나 눈치 없는 사람 취급을 받을까. 채우수는 그걸로 약점이라도 잡은 듯이 굴면서 날 평생 괴롭힐 게 뻔하다. 옅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댔다. 어쩐지 안정감이 느껴지는 것이 꽤 자연스럽다.
“여자한테, 그것도 나한테 관심 가질 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는 걸 누가 상상이나 해 봤겠어요?”
“한연두.”
“네?”
“그만 더듬거려.”
“…….”
“상상한 적 없다는 애가 구석구석 잘도 만지고 있어.”
습관적으로 죄송하다는 말을 내뱉으려다가 입술을 꾹 눌러 다물었다. 죄송할 건 없었다. 그러게 내가 만지는 게 싫었으면 안 돼요, 싫어요, 말했어야지…….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요?”
“글쎄.”
“물이나 올려요. 라면이나 먹고 가게.”
“없어.”
“뭐가 없어요?”
“우리 집에 라면 같은 건 없어.”
“웬일이야. 원래 이런, 이런…… 이런 사람이었어요?”
미쳤나 봐, 채우수. 라면도 없으면서 처음부터 이럴 계획으로 세상에. 나는 주먹 쥔 손으로 채우수의 가슴팍을 퍽퍽 때렸다. 감정 실린 주먹이 꽤나 아팠는지 채우수가 미간을 좁히며 한 발짝 뒤로 떨어졌다.
“이런 사람이 뭔데?”
“이렇게 어? 없는 라면 얘기하면서 여자 들이고?”
“오해하지 마. 개수작 부리면서까지 집에 들인 여자는 네가 처음이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요?”
“뭐, 보통은 여자들이 알아서 잘 들어오거든.”
“세상에, 세상에…….”
나는 채우수가 이대로 외계인으로 변했대도 믿었을 것이다. 차라리 그쪽이 더 타당성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채우수가 여자랑 연애하는 건 내 눈으로 본 적이 없었는데. 대학 시절 강도우 때문에 파투 났던 그 소개팅도 애프터까지 두 번 정도 더 이어졌다가 흐지부지하게 끝난 걸로 안다.
그런데 채우수와 다른 여자라니. 그것도 여자가 아니라 여자들이라니. 내가 정말 채우수에게 그만큼의 관심도 없어서 몰랐던 걸까. 속 깊은 곳에서 원인 모를 흉포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럼 도대체 내가 몇 번째예요? 나 몰래 그러고 다녔어요? 어떻게 내가 여태 그걸 몰랐지? 그동안 그렇게 문란하게 살았어요? 세상에! 더러워…….”
뭘까 이 감정은. 채우수가 제 아랫도리를 나 모르게 놀린 것에 대한 주제넘은 원망? 질투? 배신감?
“지금 그게 중요한 것 같진 않은데.”
“그럼 대체 뭐가 중요해요?”
“글쎄. 조금 전까지 하려던 거?”
코끝이 스치면서 채우수의 입술이 내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놀라 내쉰 숨이 그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달래듯이 엉겨 붙는 입술에 마른 입술이 금세 촉촉해졌다. 간 보는 듯 붙었다 떨어지는 입술은 마치 내 허락을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다.
정말이지 이런 식으로 채우수에게 넘어갈 생각은 아니었는데. 입술에 닿는 숨결이 달콤해서 다른 감정까지 녹였다. 적어도 이렇게 입술을 맞부딪치는 시간 동안은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을 듯하다.
끊임없이 잘게 입술을 붙이던 채우수가 등을 어루만지던 손을 내려 내 허리를 제게 당겼다. 떨어진 입술이 아쉬워 고개를 살짝 들었더니 기다렸다는 듯 입술이 맞붙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질척하게 얽혀 대는 혀처럼 채우수를 밀어내려던 손가락에 그의 손가락이 얽혔다.
아아, 알 수 없는 감정은 조금 뒤로 제쳐 두어도 좋지 않을까.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을 감으며 다른 생각들을 하나씩 지웠다. 어쨌거나 채우수와의 키스가 좋은 건 분명한 듯 서로를 감은 혀끝에 웃음이 녹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