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오해의 산물
채우수는 저를 둘러싼 환경과 소문들에 비해서는 제 딴에는 나름 조용한 학교생활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애초에 그럴 성격도 아니었겠지만 그는 외조부부터 순서대로 한자리씩 하고 있는 법조계 집안인 걸 뻐기지도 않았고, 제 아버지가 처가 잘 만나 출세한 지검장이라고 비아냥대는 소리에도 별다른 대꾸 없이 침묵으로 일관하기도 했다.
우리는 때때로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며 기존 대화 축을 벗어났어도 가족에 관한 얘기로 입을 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채우수도 그랬겠지만 그건 나 역시도 별로 꺼내고 싶지는 않은 대화 주제였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애써 본들 채우수 주위의 파리 떼들이 떠들어 대는 가족 얘기는 막을 수는 없었다. 가끔씩 시답잖은 일로 엄마랑 싸웠다느니 하는 사람들 말을 들을 때면 나는 복에 겨운 투정이라는 눈빛을 발끝으로 보내며 운동화로 덮어 버렸다. 그럼 채우수는 옆에서 괜히 내 운동화를 툭툭 치면서 다른 얘기를 꺼내고는 했었다. 채우수가 뭘 알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그가 내심 고마웠다.
부모님의 부재는 내 세상의 모든 중심축을 바꿔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모든 사건을 부재라는 두 글자로 축약할 수가 있을까 싶지만 그것만큼 잘 와닿는 말도 없을 것이다. 내 부모님은, 엄마와 아빠는 더 이상 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엄마의 마지막은 재가 되기 직전의 모습 같았다. 엄마는 불길 속에서 나와 동생을 구하고도 다른 이웃까지 구했던 영웅이었지만 그 영웅에게 자신을 구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날따라 사고는 왜 그리 많았던 건지. 다른 구조 현장에 출동했다가 뒤늦게 우리 곁으로 달려왔던 아빠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잿더미처럼 무너졌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이 과연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웃 중 누군가는 그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소방관이 제집에 난 불 하나 꺼뜨리지 못해 아내가 타들어 가는 줄도 몰랐다고.
우리는 엄마가 없는 일상에 빠르게 적응했다. 이사를 가고, 전학을 가면서 바뀐 환경에 적응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엄마를 불구덩이에 밀어 넣고도 살아남았던 우리 가족은 그렇게 겉으로는 평범한 일상을 살았다.
아빠는 엄마 몫까지 두 배로 살았다. 나는 절망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침투해서 어떤 방식으로 인간을 부식시키는지 그때 알았다. 그렇게 스스로 타들어 가며 우리 남매 곁을 데웠던 아빠가 떠난 건 엄마 사고 후 2년 뒤 현장에서였다. 명예로운 순직이었다.
두 사람의 영웅을 만든 이 모든 사건은 내가 중학생일 때의 일이다. 사람들은 날 두고 겨우 중학생이라고 말끝을 흐렸지만,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사고의 폭은 비슷하다. 어쩌면 내 세상은 그때 그렇게 멈추었는지도 모르겠다.
멈춘 세상은 그래도 양지였다. 순직한 아빠 사연이 대단한 집안에 알려지기라도 한 건지 고아가 된 우리 남매 사정을 어찌 알고는 누군가 장학재단을 통해 대학까지 후원을 해 줬다. 만약 아빠가 알았다면 그는 마땅히 당신이 할 도리를 했을 뿐이라고 그들이 베푼 호의를 마다했을 게 분명하다. 나는 돌연변이 유전자라도 갖고 태어났던 건지 얼굴도, 이름도 제대로 알려 주지 않았던 그분들의 호의를 내 권리인 양 덥석 받았다.
가끔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자라 줬다는 칭찬 아닌 칭찬을 듣는다. 난 우리 남매가 특별히 못 자랄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비극적인 사건은 비단 우리 집에만 국한될 것은 아니었고 우리가 흘려보낸 눈물의 깊이만큼 시간은 자연스레 흘러갔을 뿐이다.
부모님의 사랑을 제대로 못 받고 자랐다는 동정 어린 시선에는 자신 있게 대꾸할 수 있다. 우리 부모님은 당신들이 평생 베풀어 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사랑을 내 인생의 절반 동안 아낌없이 주셨노라고. 게다가 지금은 큰아빠의 사랑까지 받고 있으니 충분하다고.
하지만 어쩌면 그래서 내가 사랑이란 감정을 버거워하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그 사랑의 형태는 다를지라도 이제는 받는 것도 주는 것도 어색해져 버린 그 감정이 비워 낸 자리를 그냥 남자들로 채우고 있었으니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나 싶지만은 말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의 결핍된 부분을 마주할 때 저마다의 방어 전략을 취한다. 내게는 그것이 공격이나 회피가 아닌 수용이었다.
이렇게 채우수가 내 코앞까지 다가온,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눈을 감으며 다음을 기다리고야 마는 수용. 이건 뭐 상대가 채우수여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입술이 닿았나? 별다른 느낌이 없어 질끈 감았던 눈을 한쪽만 뜨자 채우수가 제 이마를 내게 부딪치곤 얼굴을 떨어뜨렸다. 그는 겹친 손을 눌러 딸깍, 조수석 안전벨트까지 풀더니 여전히 얼떨떨한 내 뺨을 제 손으로 툭툭 두드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 표정이 새삼스레 다정해서 하마터면 오해할 뻔도 했다.
“한연두.”
“…….”
“잘 참고 있는 사람 자꾸 자극하지 마. 너만 손해니까.”
“…….”
“뭐 해. 안 내리고.”
어안이 벙벙하다는 말은 지금을 위해 존재하는 말인 것 같았다. 나는 차에서 내려서 같이 사무실에 들어설 때까지도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한 채로 자리에 앉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구는 채우수는 정말이지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웬일이야 진짜. 뭐가 저렇게 당당할까 싶다. 분명히 채우수는 내게 키스를 하려 했던 게 틀림없었다. 아무리 내가 채우수 몸을 좀 만졌기로서니 키스 같은, 이런 식의 스킨십으로 보상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니 잠깐, 보상을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는 것이었던가. 뭐, 어쨌든…….
그러니까 키스를, 왜. 나한테 왜. 남자를 좋아하는 주제에. 버젓이 반지까지 끼고 다니는 주제에. 대체 자기가 뭘 그렇게 참고 있다고.
스치듯이 떨어졌던 입술을 말아 물며 화이트보드 옆에서 뭐라 설명 중인 채우수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채우수가 ‘뭐’, 하고 입만 벙긋거리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긴 뭐야. 아무렇지도 않은 척 눈동자를 굴리며 화이트보드로 시선을 굴렸다. 어쩐지 가벼운 웃음에 날린 그의 향기가 몸을 데워 오는 기분이다.
오전 미팅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미팅이 끝나고 뒷정리를 하며 이미 다 지워져 깨끗한 화이트보드를 멍하니 계속해서 지우고 있자 주재희 선임이 내 팔꿈치를 툭 건드렸다.
“한 선임님, 무슨 일 있어요? 정신이 딴 데 팔린 것 같은데.”
“그냥…….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래요.”
“뭔 생각을 그렇게 살벌하게. 아, 전에 말한 그 소개팅은 생각해 봤어요? 할 거면 빨리 말해요. 번호 넘기게.”
“음, 소개팅은…….”
“생각해 봐요. 그리고 난 고문님이랑 평가실 가서 샘플 테스트하고 점심 먹을 건데 한 선임님 시간 괜찮아요?”
“음, 그럼 그냥 따로 먹을게요.”
“그래요. 그럼 채 책임님이랑 둘이 먹어요.”
“네…… 에?”
서둘러 주재희를 잡아보려 했지만 이미 회의실을 빠져나간 뒤다. 어휴, 채우수랑 점심이라니. 상상만 해도 체할 것 같았다. 혼자 먹는 게 낫지. 유리창 너머로 회의실 바깥 채우수 책상을 살폈다. 화장실이라도 간 모양인지 채우수는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 빨리 식당으로 내려가야겠다 싶어 보드 지우개를 내려놓고 자료를 챙겨서 회의실 문을 열었다.
“아, 깜짝이야!”
문을 열자마자 채우수의 큼지막한 그림자가 시야를 덮쳤다. 어딜 갔나 했더니 왜 여기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를 지나쳐 내 자리로 향했다. 한 발씩 빠르게 떼어낼 때마다 채우수가 옆으로 가까이 달라붙었다.
“소개팅하나 봐, 한연두?”
“아직 한다는 말은 안 했는데요?”
웃겨. 자기가 뭔 상관.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그가 파티션을 짚으며 물었다.
“점심 먹어야지?”
“……여기 회사예요. 친한 척하지 마세요.”
“뭐 어때. 지금 우리 둘뿐인데.”
왜 하필이면 이럴 때 사무실은 텅텅 비는지 모르겠다.
“그거 얼른 정리해 놓고 와. 밥 먹으러 가게.”
“……오늘 점심 생각 없어요. 책임님 혼자 드세요.”
“한연두 네가 밥 생각 없을 때가 어디 있어.”
“무슨, 무슨! 그리고 저 할 일 있어요. 바빠요.”
“내 눈 피해 다니느라 바쁜 거 같은데.”
“아닌데요……?”
“아니면 화가 나셨나.”
화가 나긴 대체 누가 화가 났다고. 서류를 책상 위에 두고 등을 돌리니 채우수의 가슴팍이 시야를 꽉 채웠다. 웬일이니, 진짜. 왜 자꾸 이렇게 가깝게 몸을 붙여. 고개를 뒤로 빼면서 채우수를 올려다봤다. 내리깐 그의 눈이 건방져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가 선배한테 화날 게 뭐가 있어요?”
“나야 모르지.”
“그런 거 없어요. 화난 것도 아니…….”
“아, 키스할 뻔했는데 안 해 줘서 그런가?”
뭔 소리야, 미쳤나 봐. 그것도 사무실에서! 어이가 없어서 채우수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밀어냈다.
“그런 거 아니야?”
“아니에요, 그런 거!”
“아쉽네. 그래서 화난 거면 제대로 빨아 주고 풀어 주려고 했는데.”
세상에. 그동안 저런 말 못 해서 어떻게 참았을까. 날 두고 세상 변태 취급은 다 하더니 저 혼자는 온갖 요사스러운 생각은 다 하고 있던 모양이다.
“혹시, 혹시 설마 미치셨어요?”
“솔직해지라면서요. 한연두 선임님이.”
“저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요.”
“변태, 성욕, 본능 어쩌고 하길래 그런 뜻인 줄 알았는데.”
아주 그냥 고삐 풀린 망아지가 따로 없다. 세상에, 미쳤나 봐. 내가 변태를 봉인 해제하는 버튼이라도 눌렀던 것일까.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이렇게 한순간에 돌아 버리는 게 말이 될까.
“회사에선 내숭 떨고 싶나 봐요, 한 선임님은.”
“내숭 떠는 게 아니구요. 때와 장소를 가릴 뿐이에요.”
“아, 회사 주차장은 그럼 키스하기엔 적절한 장소였나 보네.”
“……안 했잖아요, 그래서?”
“역시, 아쉬웠나 봐?”
웬일이야. 따지고 보면 자기가 먼저 다가왔으면서. 누가 키스해 달라고 매달리기라도 한 줄 아는 모양이다.
“책임님, 도대체 갑자기 왜 그래요?”
“뭐가.”
“아니. 여자한테, 나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안 돼?”
아니…… 그런 얼굴로 안 되냐고 물어보니 안 된다고 대답하면 안 될 것만 같다. 나는 이성의 끈을 간신히 붙잡으려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채우수의 오른손에 끼워진 반지를 급히 가리켰다.
“그, 그 반지요. 그거 나눠 낀 사람이 있을 거 아니에요.”
시선을 따라 맞추던 그가 제 오른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고는 입가에 씁쓸한 웃음을 걸었다.
“없어.”
“……헤어졌어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
그렇다고 이렇게, 여자인 나한테 바로 들이대는 게 가능한 일인가.
“미안하지만 이건 못 빼. 나한테는 중요한 거라.”
“난 반지 빼라고 한 적 없는데요.”
“한 선임님이 신경 쓰는 거 같길래.”
“누가요? 내가요? 내가 왜요?”
“글쎄, 질투라도 하나 보지.”
“질투한 적은 없는, 아니…… 우리 대화 좀 이상한 거 알아요?”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매만지던 그가 내게로 시선을 끌어 올렸다. 삐딱하게 기울인 고개는 정말이지 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하다.
“어떻게 이상한데.”
“누가 들으면 꼭…….”
행여나 사무실에 다른 직원이 있는지 다시 목을 빼서 두리번거렸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눈치를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말린 입술 사이로 내보내는 목소리가 한없이 기어들어 갔다.
“……잖아요.”
“뭐?”
“……는 거 같다구요.”
“크게 말해. 안 들려.”
“아, 썸이라도 타는 거 같다고.”
썸이든 뭐든 내 속이 먼저 타들어 가겠다는 내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채우수의 날렵히 뻗은 곧은 눈매가 휘었다. 그 눈빛은 또 어찌나 기묘한지 그를 보던 눈동자가 자꾸만 헛돌았다.
“난 그런 거 안 타.”
“내 말이요.”
“그냥 사귀자고 그럴 거야 이제.”
“……네, 뭐. 책임님 연애 스타일은 잘 알겠구요.”
“그러니까 생각 잘하고 있어, 한연두.”
과제라도 주는 듯이 말하는 태도가 썩 달갑진 않았다.
“뭘요?”
“뭐.”
“뭘 생각해요, 내가?”
“옷이나 챙겨. 밥 먹으러 가게.”
입술 새로 마른 웃음을 날리며 먼저 등을 돌리는 채우수에게서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과연 뭐였을까. 코끝에 감도는 쌉싸름한 향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를 쫓는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내 세상의 중심축은 아마 이렇게 뒤바뀌었는지도 몰랐다.
*
내가 채우수를 싫어하는 이유는 많고 많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큰 이유는 바로 상황을 제멋대로 해석하며 자기 유리한 쪽으로만 끌고 간다는 것이다. 권모술수에 능하다면 능한 거겠지만 내 눈에는 견강부회, 아전인수가 딱인 그런 인간이 바로 채우수다.
우리가 처음으로 같이 갇혔던 그 엘리베이터 사건만 해도 그랬다. 아마 12월 마지막 주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상대적으로 외진 곳에 있던 연구 도서관은 평소에도 인적이 드문 곳이었는데, 마침 눈까지 내린 그날은 조금 스산한 느낌까지 감돌았다.
내가 그때 연구 도서관을 찾았던 건 계절학기 때문이었던가 뭐 때문이었던가, 아무튼 책을 빌리러 가던 길이었고 비슷한 이유로 도서관을 찾았던 채우수와 그렇게 연구도서관 5층에서 마주쳤다.
당시의 나는 채우수와 조금 데면데면한 상태였다. 나는 류지환이 소개해 준 제 고등학교 후배와 만나는 중이었는데, 지나치리만큼 채우수를 견제했던 남자 친구 탓에 의식적으로 채우수를 멀리하던 중이었다. 일련의 사건들로 채우수가 게이라는 의심이 최고조로 달한 시점이기도 했고.
“목도리 없어?”
몇 주 만에 학교에서 마주친 채우수는 흔하디흔한 인사 대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그렇게 물었다. 나는 마치 옷을 덜 입은 기분에 머쓱해져서 목을 쓸었다. 남자 친구와 크리스마스도 따로 보냈었기에, 간만의 데이트라 힘준 옷차림이 어쩐지 민망해졌다. 목도리 없냐는 그 말이 치마는 왜 그리 짧냐, 그게 너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하냐 뭐 이런 식의 말로 들렸던 것도 같다.
“어디 가나 봐?”
“데이트요.”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채우수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내 손에 든 전공 서적을 뺏어 들었다. 꽤 부피감 있던 책이 채우수 손에 들어가니 얇게만 느껴졌다.
“데이트하러 가는데 누가 이렇게 무거운 책을 들고 가.”
“그냥 나온 김에 겸사겸사 빌리려구요.”
우리는 시시한 얘기를 하면서 나란히 책 몇 권을 더 골라서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때 계단으로 내려가자던 채우수의 말을 들었어야 했을까. 나는 구두 때문에 발이 아프다며 꾸역꾸역 엘리베이터를 기다렸고, 내 책을 손에 든 채우수는 마지못해 엘리베이터에 같이 올랐다.
엘리베이터가 멈춘 건 한순간이었다. 원체 낡은 건물이라 엘리베이터 고장이 드문 일은 아니었다지만 그게 하필이면 내가 탔을 때일 줄이야. 덜컹거리며 멈추었던 엘리베이터는 조명마저 제구실을 못 하며 깜빡대더니 얼마 못 가 완전히 꺼져 버렸다.
그때 의외로 침착했던 건 채우수보다는 나였다. 사고라는 게 지갑 사정 봐 가면서 오는 건 아니라지만 부잣집 도련님이던 채우수는 이런 상황을 처리하는 데 낯선 듯했다. 엘리베이터 비상벨은 왜 하필 또 먹통이었던 건지. 나는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여차하면 119에 신고해야겠다는 생각에 휴대폰을 꺼냈다.
“선배, 일단 조금만 더 기다려 보고 신고를…….”
그때 휴대폰 조명에 의지하던 채우수의 얼굴은 어찌나 공포에 질렸던지, 저승사자라도 미리 만난 듯한 그 얼굴에 내가 먼저 놀랐더랬다.
“괜찮아요?”
“네 눈에는, 지금 이게……, 괜찮아 보여?”
숨을 몰아쉬던 채우수는 급기야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쿵, 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 들린 책들이 떨어졌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은 정말이지 심상치 않아 보였다. 나는 플래시를 켠 휴대폰을 바닥에 내리고는 그의 목에 답답하다시피 칭칭 감긴 파란색 목도리를 풀었다. 채우수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는 게 느껴졌다.
“신고, 빨리 119 불러야겠어요!”
그 말에 채우수가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을 내려 다급히 내 손을 잡았다.
“하지 마! 신고, 하아……, 하지 마.”
“왜 하지 마? 선배 지금 위험해 보여요!”
“하지 마. 그냥 좀! 하지 마.”
내 손을 붙드는 채우수의 악력이 얼마나 셌던지, 밭은 숨 사이로도 몇 번이나 신고를 거부하는 그에게 나는 일단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몰래 범죄라도 저지른 거야 뭐야. 신고한다는데 이렇게까지 치를 떨 이유가 뭔지. 나는 그에게서 손을 빼낸 뒤 일어나서 비상벨을 다시 눌렀다. 여전히 먹통이었다. 슬쩍 돌아본 채우수는 이제는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질식해서 죽은 사람도 있던가. 아빠, 아빠라면 어떻게 했을까. 기도 확보? 온갖 잡지식들이 머리에서 널을 뛰었다. 아무래도 구조 요청부터 해야 했다. 바닥에 놓아둔 휴대폰을 들자 엘리베이터 천장을 향했던 플래시가 채우수를 비추었다.
“……뭐 하는, 거야.”
“119 신고하려구요.”
“내가 하지 말랬잖아!”
“아!”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졌다. 절 돕겠다던 사람의 손을 쳐 내고도 날 노려보는 채우수는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그에게 맞은 손목이 시큰거렸다. 멍이라도 들었으면 가만 안 두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일단 채우수가 살아난 뒤의 일이었다.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엘리베이터 안이 헐떡거리는 채우수의 숨소리로만 가득 찼다. 곧 죽을 것처럼 굴지나 말든가, 채우수 완전 미친놈 아니야 저거…….
속으로 씨근덕거리면서 액정 나간 휴대폰을 붙잡고 숫자를 누르는데 배터리가 다 되었던 모양인지 휴대폰이 그대로 꺼졌다. 엘리베이터 안이 또 깜깜해졌다.
더듬더듬 팔을 뻗어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저기요, 크게 외쳤으나 별다른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아, 조금 있으면 연구도서관 문 닫을 시간인데. 이대로 갇힌 채로 하루를 보내야 하는 건 아닐까. 나야 괜찮지만 채우수는 저러다가 만약 혹시라도……. 문득 두려움이 앞서 심장이 쿵쿵거렸다.
뒷걸음질 치는 구두 소리가 요란했다. 형체 정도는 알아볼 수는 있게 어둠에 적응된 눈이 빠르게 채우수를 찾았다. 여전히 숨이 거친 걸 보면 살아는 있는 모양이다. 나는 몸을 낮추어서 채우수를 바닥에 눕히고는 손을 더듬거리며 그의 바지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꺼내 플래시를 켰다. 조명 탓인지 채우수의 얼굴이 더 파리하게 보였다.
채우수는 이제 날 말릴 정신까지도 없어 보였다. 나는 재빨리 119에 신고를 했다. 10분 정도 기다리면 된다는 구조대원의 말에 안도하는 마음보다도 불안함이 더 커졌다. 10분도 길게 느껴질 만큼 채우수는 그 정도로 심각해 보였다.
까딱하면 심폐 소생술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그거 함부로 해도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은 금방 사라졌다. 채우수가 숨을 멈춘 듯 기절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의식을 확인했다. 달리 생각나는 방법이 없었다. 채우수의 반듯한 코를 손가락으로 쥐고 그의 턱을 치켜올린 뒤 벌어진 입에 내 입을 겹쳤다. 후우, 숨을 불어넣고 가슴팍이 올라오는지 확인했다. 그렇게 하기를 몇 번. 채우수가 숨을 토해 내듯 뱉었다.
단언컨대 채우수에게 없던 정도 떨어지던 순간을 꼽으라면 나는 이다음 순간을 으뜸으로 꼽을 수 있다. 괘씸하기 짝이 없었던 그 순간. 누가 절 살려 줬는지도 모르고 패악질을 부려 대던 그때의 채우수를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바득바득 갈린다. 아마도 나는 그때부터 채우수를 싫어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 * *
“……뭐라고요?”
“사귀자고.”
그러니까 채우수에게서 듣는 이 네 글자가 얼마나 가당치도 않은 소리냐, 이 말이다. 나는 놀라 자빠질 뻔한 마음을 겨우 추스르고는 최대한 평온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 사귀……. 아니, 아니야. 제가 잘못 들었나 봐요.”
“제대로 들었을 텐데.”
“그…….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못 들었으면 다시 말할게. 사귀자, 한연두.”
“진짜로요? 갑자기요? 아니, 선배가 나랑요? 여자랑?”
머리를 빠르게 굴려 봤지만 채우수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는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제 것을 만졌다고 해서 책임지라는 것도 아닐 테고. 세상에, 남자 좋아하는 사람이…….
아아, 설마 그건가 그럼. 이거 연막인가? 지금 나한테 한번 당했다고 나랑 쇼윈도 커플 그런 거 하자는 건가. 집안 어른들한테 게이라고는 차마 밝히지 못하고 사귀는 여자가 있다고 둘러대기 위해서?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안 되지. 제 사정을 소상히 설명하고 마땅한 대가를 먼저 제시할 것이지. 대뜸 사귀자니. 이렇게 어영부영 은근슬쩍.
나는 왠지 더 억울한 마음에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그에게 속삭였다.
“모르시나 본데 저 책임님 안 좋아해요.”
“누가 나 좋아해 달래? 좋아하지 마.”
“……사귀자면서요?”
“너 꼭 좋아해야 남자 사귀는 거 아니잖아. 소개팅할 거 뭐 있어. 나랑 사귀어.”
채우수는 나보다도 더 평온한 표정으로 카페 픽업대에서 레몬 생강차 두 잔을 받아 와서는 내게 한 잔을 건넸다. 웃기고 있어. 내 차 취향도 하나 제대로 모르는 주제에…….
“그렇지만…… 선배도 여자, 아니 날 좋아하는 거 아니잖아요?”
“노력 중이야.”
“노력까지 해 가면서 여자를 사귈 이유가 있어요?”
“이유야 갖다 붙이기 나름이지.”
“……붙여 봐요, 그럼.”
실컷 점심 배부르게 잘 먹고 한다는 소리가 사귀자라니. 그것도 좋아하려고 노력까지 해 가면서. 어디선가 사랑을 노력한다는 게 말이 되냐는 노래 구절이 들리는 것 같았다. 물론 채우수가 내게 요구하는 게 사랑까지는 아니겠지만. 얼굴만 보자면 내가 채우수에게 먼저 고백이라도 한 것 같다. 어이가 없어서 벌겋게 달아오른 내 얼굴을 채우수가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몰라 묻냐는 듯 입술을 뗐다.
“일단 네가 날 만졌고.”
“아, 촌스럽게. 그거 한번 만졌다고 사귀면.”
“그럼 몇 번 더 만져야 세련된 건데.”
웬일이야. 원한다면 더 만지게 해 줄 법한 얼굴이다. 내가 그런, 그런, 그런 얄팍한 수에 넘어갈 줄 알고!
“그렇다고 내가 너한테 내 인생을 책임지라고 한 것도 아니고.”
“내가 책임님 인생까지 왜요?”
“내 친구는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결혼도 하더라고.”
결혼도 아니고 사귀기만 하자는 건데 뭐가 대수냐는 말이다. 세상에, 이 뻔뻔한 인간.
“항상 그런 식으로 쉽게 연애했잖아, 너는.”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와요?”
“나랑도 그 연애 해 보자고.”
그러니까 내가 왜. 내가 채우수랑 왜. 목이 바짝바짝 말라서 레몬 생강차를 벌컥 들이켰다. 목구멍이 뜨거워서 그런 건지 아니면 황당함에 그런 건지 얼굴이 활활 타올랐다.
“아무래도 이상해. 그때 기절했을 때 책임님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봐요.”
“그랬는지도 모르지.”
“병원 안 간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 완전 미쳤나 봐.”
“너도 적당히 미쳤으니까 괜찮아.”
느긋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대꾸하는 채우수의 말은 너무나도 논리적인 것 같아서 하마터면 내 욕인지도 모르고 넘어갈 뻔했다.
“……근데 이제 몸은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봐. 한연두 너처럼 내 몸을 안팎으로 잘 아는 여자도 없어.”
세상에, 말 돌리는 것 좀 봐. 사실 말은 내가 돌렸다지만 용케도 그걸 되돌려 결국 원점으로 돌려놓는 채우수다.
“그러니까 내 눈에는 한연두 네가 제일…….”
느른하게 풀린 것 같은 채우수 시선이 내 얼굴을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그러고서는 고작 한다는 말이,
“적당해.”
“웬일이야, 어이없어! 적당…… 무슨 물건 골라요? 적당해서 여자랑 사귀게?”
“그냥. 나도 평범하게 살아 보고 싶어졌어.”
“…….”
“여자 친구랑 밥 먹고 영화 보고 공연도 보고.”
남자랑은 대놓고 못 했다 이건가. 숨기고 해야 했던 그의 사랑에 어쩐지 놀란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안쓰럽기도 하고. 나도 딱히 바쁜 건 아니었으니까 연막이 필요하다면 그에게 협조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자 친구랑 손도 잡고.”
손도 제대로 못 잡고 다녔나. 채우수도 그 남자랑 포옹까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것 같은데. 아니지, 일방적이긴 했지만 뽀뽀하는, 아니 당하는 것도 봤는데…….
“키스하고 섹-.”
“아니, 잠깐만요! 상상되니까 더 말하지 마세요.”
아직 채우수가 남자랑 키스 이상의 스킨십 하는 것까지 부담 없이 상상할 만큼 열린 마음은 아니었다.
“상상력이 부족하다면 먼저 해 봐도 좋아.”
“뭘…… 해요?”
“키스든 섹스든. 넌 뭘 더 좋아해?”
아니, 잠깐. 그냥 연막 하나 치는 건데 내가 채우수랑 그런 스킨십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알아서 골라. 어느 쪽이든 자신 있으니까.”
이건 고백도 뭣도 아니었다. 마치 돼지국밥이냐 순대국밥이냐 고르라는 듯한 그의 태도에는 그 어떤 로맨틱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아 보였다.
“농담이죠?”
“너 내가 언제 농담하는 거 봤어?”
“세상에. 사귀자는 소리를, 아니 그런…… 제안을. 어? 이딴 식으로 하는 남자 처음 봤어요! 물론 선배 같은, 그런 유형의 남자에게 이런 제안을 들은 것도 처음이지만!”
“나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거 처음이야.”
처음인 상대가 왜 하필이면 나야. 여전히 채우수는 자신이 게이고, 그래서 연막 작전에 내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꺼낼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러니까 그에 대한 정보가 드러나지 않은 이 상황은 이성애자인 남자가 내게 사귀자고 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그가 먼저 제가 게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는 한 아는 척을 할 수는 없기에 나는 일단 그의 가짜 고백을 거절하기로 했다.
“나는 책임님이랑 이성……적인 그런 관계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건 좀 아니지.”
“그러니까요. 우린 아니지!”
“아니. 어떻게 생각을 한 번도 안 할 수가 있어, 날 두고.”
역시 좀 미친 걸까.
“허, 책임님 스스로가 그 정도로 잘났다고 생각하나 본데요.”
“한연두. 네 전 남친들에 비해서 감개무량한 수준 아닌가, 나 정도면.”
그건 또 맞는 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나는 스펙을 따졌을 때의 일이지. 이렇게 뭣도 아닌 감정으로 대뜸 연애나 하자니. 나는 찌푸린 미간을 한껏 좁히며 채우수를 쏘아봤다.
“……선배 여자한테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요.”
“맞아. 관심 없어.”
“혹시 내가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겠…… 어딜 쳐다봐요?”
가슴께에 닿는 채우수 시선에 손을 엑스 자로 모으며 가슴을 가렸다. 손에 든 종이컵에서 얼마 남지 않은 차가 출렁거렸다. 미쳤나 봐. 변태라고 선언하더니 이제 아주 노골적이다.
“그럼 여자 말고 한연두한테 관심이 좀 생겼다고 쳐.”
“그러니까 그걸 왜 쳐야 하냐구요.”
“오늘 퇴근 같이하고.”
“……싫어요!”
“야근하고 싶은가 봐, 한연두 선임? 테스트할 거 더 던져 줘?”
세상에. 협박도 협박도 아주 저 같은 협박만 하고 앉아 있지. 놀란 입을 다물며 채우수를 가는 눈으로 훑었다. 채우수가 날 보고는 세상 차가운 표정으로 뭐, 입을 벙긋거렸다.
아아…. 이제야 아귀가 들어맞는 것 같다. 그랬구나. 내가 왜 이걸 몰랐을까. 밥 좀 먹었다고 내 머리가 이제 좀 돌아가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협박임에 분명했다.
여우 같은 놈. 그래, 그런 거였어. 내가 채우수를 좀 만지고 입 좀 놀렸다고 이런 식으로 복수하는 거구나. 그렇지. 게이든 뭐든 다 차치하더라도 채우수가 나한테 이렇게 맥락 없이 사귀자고 달려들 리가 없지. 날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서는 내 입으로 꼭 사과를 제대로 받겠다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숨을 고르며 눈꺼풀을 접어 올렸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조용히 내뱉는 목소리도 같이 떨려 왔다.
“……해요.”
“뭐? 안 들려.”
“……죄송해요.”
“갑자기 뭐가.”
“내가, 아니 제가 책임님께 너무, 너무 많이…… 까불었어요.”
“흠.”
“어제도 오늘도 입방정 참 많이 떨었고……. 이제 지퍼 채울게요.”
입술을 말아 물고는 채우수의 눈치를 살폈다. 정말이지 악랄하기도 하지. 이런 식으로 내 고개를 숙여 보겠다고. 내 속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모양인지 채우수가 제 오른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반듯한 그의 입매에도 비뚤어진 웃음이 걸렸다. 하아, 뭘 어떻게까지 해야 이 어이없는 상황이 끝날지 모르겠다.
“그, 책임님의 감히 만져서는 안 되는 곳을 건드리고…….”
“…….”
“그곳을 쳐다도 보고 생……각도 했어요. 그것도 아주 많이.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채우수는 말없이 남은 차를 들이켜고는 내 손에 든 종이컵을 가져가 제 것과 한데 모았다. 컵을 뺏긴 손이 멋쩍게 허공에서 굳었다.
모든 게 슬로 모션이라도 걸어 놓은 것 같았다. 그 순간 바람에 날리는 내 머리카락도. 그 머리카락을 정리해 귀 뒤로 넘겨 주는 채우수의 손가락도. 그 손가락으로 허공에 멈춘 내 손을 감싸 내리던 것도. 잡힌 손에 놀란 날 보며 고개를 기울이며 짓던 미소까지도.
채우수는 그렇게 내가 본 중 제일 쾌쾌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그 사과 받아 주면, 사귈래?”
아악. 이 인간 대체 어디까지 하자는 거야. 가을바람에 낙엽이 바스락거리면서 바닥을 긁고 지나갔다. 긁히는 건 아스팔트 바닥인지 아니면 까맣게 타 버린 내 마음인지. 가슴이 따끔거렸다. 어쩐지 텅 비어 버린 마음에 작은 불씨가 살아났다.
“그럴래?”
뭐, 속에 천불이라도 나려는 모양이었다.
*
수많은 의혹들 가운데에서 내가 채우수를 게이라고 확신할 수밖에 없었던 몇 가지 계기는 따로 있었다. 따지자면 그 ‘설마’ 하는 의심들을 ‘역시’로 바꿔 버린 건 사실 채우수가 아닌 다른 인물이긴 했다지만…….
정말이지 여러모로 유명했던 문제의 인물은 채우수의 고등학교 친구로, 심심할 만하면 채우수를 찾아와서 귀찮게 굴어 대곤 했다. 처음엔 왜 남의 학교까지 와서 저러나 싶었는데 옆에서 꾸준히 지켜본 바로는 채우수가 아니고는 친구가 없을 만도 했기에 나도 자연스레 그의 존재에 익숙해졌던 것 같다.
듣자 하니 수능 만점자로도 유명세를 치렀다던 그 사람은 반반한 낯짝으로도 꽤나 인기를 끌었다는데 내가 보기엔 뭐, 채우수가 더 나았던 것 같기도 하고. 물론 두 사람 모두 내 취향의 외모는 아니었다지만 평균치를 훨씬 웃도는 외모임을 부정할 수는 없었으니까.
어쨌거나 강도우라는 이름의 그 사람은 채우수와 잘 어울리는, 그게 어울린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보기 좋은 한 쌍이긴 했다. 원 플러스 원 행사 상품과도 같았던 둘의 모습을 보고 한 동기는 ‘내가 못 가질 바에 차라리 두 사람이 사귀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고 다른 동기는 ‘알고 보면 둘이 벌써 사귀고 있을지도 모른다, 잘생긴 애들은 다 게이라지 않냐’라며 그렇잖아도 강도우가 게이라는 소문이 있다면서 농담처럼 얘기하기도 했었다.
그때까지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건만. 내가 처음으로 그 둘의 사이를 친구 이상의 다른 쪽으로 생각했던 게 언제부터였더라. 아, 류지환이 물어다 줬던 소개팅 자리였던가.
류지환이 채우수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몰라도 여자에 관심 없다던 채우수는 내 예상과는 다르게 실물이 그렇게나 예쁘다는 그 여자와의 소개팅 자리에 나갔다. 그것도 꽤 멀쩡한 꼴로.
어두운 초록색 니트는 그날따라 채우수의 어깨를 더 넓어 보이게 만들었고 운동화에 맞게 딱 예쁜 길이로 떨어지는 바지는 그의 긴 다리를 자랑하듯 감쌌다.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던 모습이었지만 그날의 채우수를 또렷하게 기억할 수밖에 없었던 건 류지환의 야트막한 술수 때문이기도 했다. 나도 그 자리에서 류지환의 고등학교 후배와 소개팅을 하던 중이었으니까.
우리는 테이블을 두 개 띄운 자리에서 각자 소개팅을 했다. 내가 상대 남자의 질문에 대답하고 나면 채우수 쪽에서 피식대는 웃음이 날리는, 타이밍도 별나게 들어맞는 각각의 대화들이 몇 번 이어지던 무렵이었다.
“채우수 이 미친 새끼 너 정신 똑바로 안 차려?”
어디서 알고 나타났는지 강도우가 씩씩대면서 채우수에게 다가왔다. 어찌나 위협적이던 모습이었던지 사천왕상을 마주하기라도 한 듯 긴팔 블라우스 밑으로 소름이 돋아날 정도였다.
“네가 지금 이딴 여자나 만나고 다닐 때냐고.”
강도우는 바람난 여자 친구라도 잡으러 온 것처럼 채우수를 위아래로 노려봤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도 이 어이없는 상황에 기가 찼는데 채우수의 소개팅 상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녀는 예쁘게 다듬은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강도우에게 찬웃음을 날렸다.
“저기요. 이딴 여자라뇨?”
“잘 모르면 그쪽은 빠져.”
“그쪽은 뭘 얼마나 아시는 사인데요?”
“알 만큼은 알아. 같이 벗고 뒹굴던 사이니까.”
세상에, 벗고 뒹굴었대……. 둘이 정말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말인가. 어느새 나는 내 소개팅 상대의 존재도 잊어버리고는 채우수와 강도우 쪽으로 아예 고개를 틀었다. 강도우는 얼른 일어나라는 듯 채우수의 의자를 발로 찼다. 채우수가 뭐라고 낮게 욕을 했던 것도 같다.
“끌어내기 전에 조용히 나와.”
성가신 듯 얼굴을 구기던 강도우가 마지못해 일어나는 채우수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고는 내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선자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내 옆에 붙어 있던 류지환을 쳐다보면서.
“류지환 너도 거기서 주접떨지 말고 빨리 나와.”
“아오, 미친. 강도우 저거 또 지랄 났네.”
그렇게 류지환에게 네가 진짜 채우수 친구 맞냐는 둥 욕지거리를 내뱉던 강도우는 채우수와 류지환을 이끌고 카페에서 사라졌다. 버펄로 떼가 휩쓸고 지나간 듯 매캐한 연기만 자욱한 기분에 나는 소개팅 상대가 뭐라고 수작질을 건 것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 이후로도 강도우는 종종 채우수의 집으로 찾아왔다. 가끔은 그렇게 엘리베이터에서, 재활용품 수거장에서, 아파트 앞 편의점에서 둘을 마주쳤다. 강도우는 가끔씩 취한 상태로 채우수에게 들러붙어서는 끊임없이 입을 놀려 댔다.
고맙다, 채우수 너밖에 없다, 근데 너한테도 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먼저 씻겠다, 네가 생각해도 내가 침대에서 별로일 거 같냐, 오늘은 내가 위에서 자겠다, 약은 챙겨 먹었냐, 내가 진짜 찾기만 하면 가만 안 둔다, 감히 강도우를…… 아, 이건 다른 얘기인가. 어쨌든 차가운 외모에 비해서 경망스럽게 입을 나불대던 강도우를 나는 그냥 미친놈이라고 정의 내렸다.
술에 진탕 취한 그 미친놈은 보고 싶었다며 채우수에게 뽀뽀도 서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채우수는 날 의식한 듯 강도우의 정강이를 발로 차가면서 떼어 냈는데 어쩐지 내 눈에는 기겁하는 채우수의 모습이 더 이상하게 보일 뿐이었다. 왜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말도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게이라는 소문을 달고 다녔던 그 미친놈 강도우와 벗고 뒹굴었으며, 뽀뽀까지 익숙하게 받아 내던 채우수를 내가 의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이 모든 게 강도우라는 인간만 미친놈이었다고만 단순히 정의한다면 채우수가 게이라는 가정은 힘을 잃을 것도 같지만…….
하지만 아무리 눈치가 없다는 소리를 듣는 나였어도 내게 주어진 상황들은 오해하기 충분할 법한 상황이 아니었을까. 아, 아닌가……? 그렇다고 이걸 누구한테 물어볼 수 있었던 것도 아니잖아. 물어봐서 뭐. 채우수가 게이가 맞는다고 해도 나한테 직접적인 피해가 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뭘.
지금처럼 채우수가 제 이별의 극복을 핑계 삼아 나한테 개수작질을 걸어오는 것이라면 몰라도. 나는 사귀자는 미친 소리를 뒤로한 채 사무실로 도망쳤다. 이번엔 그도 딱히 날 붙잡을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사실 뛰어 봤자 채우수 손바닥 안이기도 했다.
정말이지 그간 제가 갖고 있던 상식의 궤도를 벗어난 것처럼 굴던 채우수는 그 누구보다 평온한 성인의 모습으로 사무실로 돌아왔다. 웬일이니, 정말. 내숭은 누가 떨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오후 내내 채우수 눈에 띄지 않으려고 갖은 힘을 썼다.
그리고 그 엄청난 노력들이 무색하게도 나는 꼼짝없이 채우수와 같이 퇴근하게 되었다.
어차피 같은 아파트니까 내 퇴근길이기도 했고, 뭐 태워 준다는데 굳이 거절할 것도 없고, 어떤 감정을 떠나서 내가 누릴 수 있는 건 최대한 누려 보는 게 편하니까.
그렇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 확실히 짚고 넘어갔어야 했나. 채우수 네놈이 게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날 그런 식으로 이용하려는 생각은 하지 말라고.
그러나 만약 게이가 아니라면, 혹시라도 그게 내 오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다못해 류지환에게라도 물어봤어야 했던 걸까. 네 친구 두 명이 진짜 그렇고 그런 사이가 맞냐고?
나는 채우수의 차에 오르면서 그에게 슬쩍 운을 띄워 봤다.
“류지환 선배는 결혼 안 한대요?”
“갑자기 웬 고리타분한 관심이야.”
“그냥. 어제 간만에 SNS 보다가 생각나서요. 학교 다닐 때 그 언니랑 아직 만나는 모양이던데. 둘이 벌써 10년째 아니에요?”
“몰라. 류지환한테 관심 없어.”
“그 선배 비혼주의 그런 건가?”
“해마다 결혼 타령하는 게 류지환인데 비혼은 무슨.”
관심 없다면서 그런 건 어떻게 알아. 채우수가 몸을 돌려 제 가방을 뒷좌석으로 보내자 갑자기 덮쳐 오는 그의 향기에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럼 언니가 그런가 봐요. 요즘 그런 여자들 많은데.”
“그럴지도.”
그러거나 말거나 별 관심도 없다는 말투다. 시선은 화면에 고정한 채로 휴대폰 알림들을 몇 개 확인하던 그의 손이 안전벨트를 하려다 말고 멈칫거렸다.
“너도 그래?”
눈썹을 휜 채로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왠지 그렇다고 말하면 큰일이라도 날 것만 같다. 나는 그의 눈에 닿았던 시선을 내 허벅지로 내리며 괜히 두 손을 공손하게 마주 잡았다.
“난 하고 싶은 사람 생기면 한번 갔다 오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해요.”
“그럼 됐어.”
쓸데없는 말 말고 안전벨트나 하라는 듯 채우수가 가볍게 턱짓했다. 퇴근길이어서 그런가.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도 같았다.
“갔다 오지는 말고.”
왔다 가지도 말고. 뭐라고 구시렁대던 채우수는 마치 기분 나쁜 것이라도 생각났다는 것처럼 혀를 차고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하긴, 결혼이라면 강도우보다 류지환이 먼저 갔어야 하는데.”
“……누구요?”
“뭐가.”
“누가 어딜 먼저 가요?”
“왜. 너도 알잖아, 강도우. 이번에 결혼하거든.”
세상에. 강도우 그 미친놈이 결혼을 왜 해? 채우수를 버리고?
“그 선배 남자 친……, 고등학교 친구 강도우 그 오빠가요?”
“왜. 너도 걔 좋아했어? 왜 그렇게 놀라.”
“그 사람이 결혼을 해요? 왜요?”
“왜긴. 미친놈이 어디서 순진한 여자 꼬신 거지.”
채우수는 또 뭐가 저렇게 덤덤해. 아무리 헤어졌다고는 해도 이렇게까지 쿨할 수가 있나 싶어 목덜미에 소름이 올라왔다.
“아니다. 다인 씨가 순진하다기엔, 그냥 딱 강도우 2인분이지.”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 사람이 결혼한다는데?”
“썩 좋진 않아.”
표정을 보면 썩 좋지 않다는 수준을 넘어선 것도 같지만. 어리둥절한 내 얼굴을 힐끔거리던 채우수가 팔을 뻗어 조수석 안전벨트를 채웠다.
“난 내가 먼저 결혼할 줄 알았거든.”
“……강도우 오빠랑요?”
“뭔 소리야.”
미국마저도 동성 결혼 합법화가 된 지 얼마 안 된 걸로 아는데……!
“아무튼 그 새끼 요즘 결혼 앞두고 뇌가 설탕에 절여졌어. 사진도 어디서 꼭 저 같은 징그러운 거 찍어 가지고…….”
생각난 김에 차단해야겠다며 휴대폰을 꺼내 드는 채우수는 어쩐지 강도우에게는 그 어떤 애정도 갖고 있진 않은 것 같았다.
“나도 사진 보여 줘요.”
흉물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짓던 채우수에게서 휴대폰을 뺏었다. 세상에. 사진 속에서 드레스 같은 흰색 원피스에 제 큰 몸을 욱여넣은 강도우와 그 옆에서 하늘색 슈트를 입은 예비신부가 서로를 보면서 웃는 얼굴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뭐야, 진짜잖아. 아니, 강도우가 결혼을. 아니 왜. 아니 진짜 왜?
“너 진짜 이 새끼 좋아했어? 뭘 그렇게 뚫어져라 봐.”
“아니……. 아니, 이 사람 선배랑 그런…….”
다음 말을 기다리는 채우수의 얼굴이 낯설다.
“그런, 그러니까…… 어떤 그런 사이…….”
그런 사이가 아니었냐고 물어야 하는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채우수는 다음 말을 직접 꺼내 보기라도 하려는 듯 달싹이는 내 입술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침 걸려 오는 전화만 아니었다면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대치 상태로 있었을 게 분명했다. 채우수는 전화를 끊고 뭔 일이 있었냐는 듯 시동을 걸었고 차 안은 그렇게 침묵이 찾아왔다.
나는 채우수가 게이라는 걸 알았을 때보다 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제 전 애인 결혼사진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기꺼이 보여 줄 게이가 얼마나 될까. 연막을 치는 걸까. 채우수가 날 그런 식으로 이용했듯이? 그렇다기엔 강도우는 너무나도 행복해 보이던데. 채우수도 제 친구 예비 신부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부르던데.
운전석으로 고개를 슬쩍 돌렸다. 내가 10년 가까이 알고 있던 채우수가 생물학적 변태라도 한 것처럼 새삼스럽게 달리 보였다.
그러니까 채우수가 진짜 게이가 아니었다면, 연막을 치는 것도 아니었다면 대체 낮에 한 그 말은 무슨 저의를 품고 하는 말일까.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아까 그 말은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야.”
평범하게 여자 친구랑, 여자 친구랑 평범하게…….
“뭘 모르나 본데 평범하게 사는 거 그게 제일 힘든 거예요. 다들 평범하게 살아 보겠다고 얼마나 아등바등하면서 사는데.”
평범이라는 단어가 채우수의 입을 거쳤다고 이렇게 이질적으로 들릴 줄이야.
“선배 같은 사람이 어디 가서 그런 말 하면 재수 없다고 돌 맞아요.”
“좋네.”
“……돌 맞는 거 좋아해요?”
“벌써부터 내 걱정 해 주는 여자 친구 있으니까 좋다고.”
세상에, 미쳤나 봐. 사람이 왜 이렇게 제멋대로야.
“나 아직 사귀자는 말에 대답 안 했어요! 누구 마음대로 여자 친구야.”
“남자 친구라고 해, 그럼. 너 머리도 짧고 괜찮네.”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리고 내 머리 스타일에 태클 걸지 말아요.”
괜히 딴지 걸고 있어, 정말.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머리칼이 손가락에 제법 길게 걸리는 것이 미용실을 갈 때가 온 것도 같다.
“근데 너 머리는 왜 안 길러?”
“새삼스럽게 왜 그런 걸 물어요. 계속 이 머리였던 거 알면서.”
“그냥 새삼스레 궁금해지네. 그러고 보니 너 중학생 때부터 그렇…….”
“중학생 때부터 뭐요?”
“그때부터 그렇게 머리 짧았을 거 아냐. 두발 규정 뭐 그런 거 때문에.”
“우리 학교는 귀밑 15cm여서 별 상관은 없었어요.”
특별한 이유로 일부러 고집한 건 아니지만 머리 감는 시간을 줄이려다 보니 자연스레 계속 유지해 오던 짧은 단발이다.
“이 머리도 잘 어울린대요.”
“어떤 놈이 그래?”
“……우리 아빠가.”
나도 참. 남들 앞에서 아빠란 말을 얼마 만에 입 밖으로 꺼냈던 걸까. 순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 얼굴에 갑작스레 찬 바람이 일었다.
“뭐야, 추워요. 문을 왜 열어?”
“잠시만 참아. 갑갑해서 그래.”
갑갑하긴 뭐가 갑갑하다고. 아무튼 더럽게 예민하다며 절레절레 흔들던 고개를 홱 돌려 채우수를 바라봤다. 일그러뜨린 표정이 엘리베이터에 갇혔을 때의 그 얼굴이다.
“혹시 차에 있어도 갑갑하고 그래요? 숨 쉬기 힘들어요?”
“아니야.”
“또 기절하는 거 아냐? 공황 장애 그런 거예요?”
“아니라고.”
“목 단추 풀어 줘요?”
“한연두 너나 잘해.”
참 나, 이것 봐. 제 생각을 해 줘도 이런다니까. 걱정해 줘서 고맙다는 말은 못할망정. 채우수에게 향했던 눈이 걱정을 덜어 낸 모양인지 가늘어졌다.
“운전 중이잖아. 괜찮아, 이 정도는.”
자기도 머쓱하긴 한 모양인지 채우수의 날 선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웃기지도 않아. 진작에 저럴 것이지.
“선배 운전 힘들면 내가 할까요?”
“됐어. 너한테 맡겼다가 도로에서 하루 다 보내려고.”
“허, 끼어들기를 못해서 그렇지 다른 건 이제 잘해요.”
“퍽이나.”
“내가 면허 시험이 너무 쉬울 때 면허 따서 그래요. 게다가 장롱면허기도 했고!”
핑계도 좋다며 채우수가 눈을 휘고 웃었다. 그가 반사하는 빛들일까, 도심의 빛들이 채우수의 얼굴을 훑고 흩어졌다. 살짝 열린 차창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이 그의 머리칼도 흩뜨렸다.
“선배같이 좋은 차 몰고 다녀서 도로에서 무시 안 당하는 사람은 내 맘 몰라요.”
“무시가 아니라 널 무서워하는 거 아닐까.”
“선배가 내 차 한번 몰아 봐요. 삼지창 붙은 차가 경차 인생을 어떻게 알아?”
남은 빛들을 모조리 흡수해 버린 짙은 눈동자가 내 것마저 흡수하려는 듯 날 빤히 쳐다봤다.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알겠어요. 이제 조용히 할게요.”
“왜. 계속 떠들어 봐.”
“아니에요. 나중에 또 무슨 소리를 들을 줄 알고.”
이러다간 그 얼렁뚱땅 결혼의 대상이 내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정신 차려야지. 채우수가 게이든 그게 아니든, 아니 이제 게이가 아니라는 것이 확실시된 것 같지만 이제 내 알 바는 아니다.
오늘은 비록 이렇게 같이 퇴근을 한다지만 내일이면 주말이고 월요일부턴 다시 평소처럼 돌아가야지. 채우수 속셈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그 수작질에 안 넘어가면 된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는 고개를 잘게 끄덕이며 낯선 길을 달리는 차창 밖을 쳐다봤다.
“근데 우리 어디 가요? 집 가는 방향 아닌데?”
“저녁 먹으러.”
“아, 왜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왜 자꾸 그렇게 선배 마음대로 해?”
“고기 먹을 건데, 소고기.”
“…….”
“한우. 예약도 해 뒀어.”
아 진짜. 정말이지 얄미워 죽겠다. 뭐가 이렇게 계획적이야. 조악한 향수 냄새를 풍기던 4D 영화관처럼 어디선가 고기 굽는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집으로 갈까?”
“……예약도 해 뒀다니까 내가 어쩔 수 없이 가는 거예요.”
“아무튼 변명은.”
“식당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
“한우한테 지키는 예의겠지.”
그게 그거지. 한우까지 먹여 가면서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러나 싶다. 불현듯 머리를 휘젓는 생각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런 말 실례인 줄 아는데 혹시 죽을병 걸렸어요?”
“뭐?”
“아니, 나한테 자꾸 잘해 주는 게 이상하잖아요. 사귀자고 하질 않나. 뭘 자꾸 먹이질 않나.”
“내가 네 앞에서 본의 아니게 두 번이나 쓰러졌다지만 장기는 다 멀쩡해.”
장기 자랑을 이런 식으로 하고 있다.
“너도 봤다시피 거기도 멀쩡하니까 안심해도 좋아. 남자 친구로 손색없어.”
“남자가 자기 입으로 그러는 걸 어떻게 믿어요. 말로는 뭘 못해.”
“확인이 필요해?”
그 순간 채우수의 눈이 제가 가진 에너지를 다 발하였다고 느꼈다면 내 착각이었을까.
“갑자기 차선을 왜 이쪽으로 바꿔요?”
“호텔로 가. 확인시켜 줄게.”
“아, 됐어, 됐어요! 난 아직 거기까지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웬일이야. 진짜 미쳤나 봐. 채우수의 차가 왔던 길을 되돌리자 뒤로 헤드라이트가 깜빡이며 클랙슨 소리가 뒤따랐다.
“누가 섹스를 준비까지 하고 해. 눈 맞으면 하는 거지.”
“세상에. 눈이, 눈이 언제…… 우리가 눈이 언제 맞았어요?”
“그래. 나만 맞은 걸로 쳐.”
뭘 자꾸 쳐. 그냥 닥쳤으면……! 나는 무심결에 채우수의 오른 팔뚝을 붙잡았다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불이라도 만진 듯 손가락부터 시작된 열이 얼굴로 퍼졌다.
“아니, 아니 잠깐만. 농담 아니라 진짜로요?”
“아까부터 왜 그래. 너 내가 농담하는 거 봤어?”
“그게 아니라……. 아니, 나 오늘…… 속옷도 안 맞춰 입은 것 같단 말이에요!”
아니, 왜 이런 말을 한 거지. 겨우 이런 말로는 채우수를 말릴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나는 또 한 번 제멋대로 놀렸던 내 입을 탓하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어차피 벗을 건데 무슨 상관이야.”
“아니, 뭐가 이렇게 갑자기 맨정신에…….”
“궁금하지 않아, 너도?”
채우수는 사냥감을 앞에 둔 흡혈귀처럼 날 보고 제 아랫입술을 혀로 축였다. 웬일이야, 그는 정말 진심인가 보다.
“난 궁금한데.”
“뭐가요?”
“한연두가 내 밑에서 어떤 표정을 짓는지. 위에서는 어떤 소리를 내는지.”
“미쳤나 봐. 이제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살 냄새는 어떨지. 어떤 맛이 날지. 궁금한 거투성인데.”
한때 게이라고 생각했던 남자는 제가 변태라는 걸 당당히 커밍아웃하기로 한 모양이다. 채우수는 더 이상 거칠 게 없어 보였다. 그때 수많은 구절 중에서도 초록은 동색, 유유상종 뭐 이런 말들이 먼저 뇌리를 스쳤던 건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원 플러스 원이라는 게 그냥 미친놈 더하기 미친놈은 아니었을까. 나는 그렇게 비로소 깨달았다. 채우수는 게이도 뭣도 아니라 그저 강도우라는 미친놈의 똑같이 미친 친구였을 뿐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