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인내의 시간
내가 채우수가 게이라는 것을 처음 의심하게 된 건 그와 알고 지낸 지 1년쯤 지났을 때다. 그러니까 내가 3학년이고 채우수가 4학년이던 시절, 적당한 온도의 친분을 유지하던 그 시절.
우리는 때때로 도서관에서 공부를 같이했고, 과제를 공유했으며, 학식도 같이 먹었다. 가끔은 학교 앞에서 술도 마셨다. 둘이 붙어 다니는 시간은 점점 늘었지만 어디까지나 선후배 사이의 친분이었고 한 번씩 엇나가던 우리의 대화 주제도 관성적으로 수업 얘기로 돌아오곤 했다.
그때까지도 채우수에게 이성적인 관심이 없었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내게는 동갑내기 남자 친구가 있었으니까. 비록 그 배은망덕한 놈이 군화를 거꾸로 신어 버리긴 했지만. 내가 제게 갖다 바친 편지만 해도 얼만데. 물론 솔직히 얼마 되지는 않았다.
아무튼 지금은 얼굴도 가물가물한 그때의 남자 친구는 불행히도 물리과 동기였는데 과CC라는 이름하에서 내 연애의 모든 과정은 과 사람들에게 모조리 중계되기 일쑤였다.
6개월가량의 연애가 끝난 건 3학년 1학기 개강을 일주일 앞둔 때였다. 만난 시간보다 떨어져 있던 시간이 더 길었던, 끽해 봤자 군인 휴가 때나 데이트 같은 데이트를 할 수 있었던 지루하기만 했던 연애의 끝이었다.
헤어졌다는 얘기가 공공연해진 뒤로 물리과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스레 나와 채우수에게로 쏠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채우수와의 관계가 좀 더 편해지기 시작했던 건 그때부터였다.
둘이 사귀냐는 질문은 수도 없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럴 때마다 채우수는 대꾸할 가치도 못 느낀다는 듯 같잖은 웃음을 날렸고 나도 그런 채우수가 괘씸해서 나는 채우수 같은 꼰대보다는 상큼한 연하남이 좋다는 말로 되받아쳤다.
연하남이 좋다는 말은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철도 뭣도 평생 못 들 것 같은 남동생이 있는 나는 지금도 나보다 어린 남자라면 아주 질색이다. 어린 것들이 누나, 누나 하다가 연두야, 하며 은근슬쩍 말 놓는 것은 더욱 싫어한다. 그렇다고 남자 친구 주제에 누나라고 부르는 것도 싫으니 내게 있어 연하남과의 연애는 지구 평면설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가설이었다.
그러니까 연하남을 좋아한단 그 말은 결국 어떻게든 채우수와 날 엮어 보려는 이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좋은 수단이었을 뿐. 연막 같은 것이었지. 정작 그 연막은 누가 치고 있는지도 몰랐으면서.
내가 그렇게 거짓된 마음으로 연하남을 목놓아 외칠 때면 채우수는 이왕 만날 거 몇 살 더 먹은 뒤에 돈 잘 버는 연하나 만나라며 한마디 더 붙이곤 했다. 장난기를 머금은 말투에 비해서 팔십 노인 같은 진지함이 짙어졌던 그 눈빛은 뭐라고 해야 할까, 이상했다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된다.
아, 지금 생각하니 어쩌면 채우수가 연하남을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군인 남자 친구와의 이별은 내게는 호재였다. 세속적인 몸이 찾은 자유에 되레 기뻐하며 이별 후유증을 딱히 겪지도 않았던 나는 당시 내게 쏟아지는 관심들을 나름 즐기면서 살았다. 따지자면 ‘채우수 옆에 붙어 있는’ 나에 대한 관심이었다.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칭찬처럼 질투 어린 그 관심들은 아주 가끔씩은 헛된 설렘을 유발했다. 어디까지나 내게 닿는 관심들에 설렌 것이었다. 채우수의 외모가 내 이상형이 아닌 것과는 별개로 데리고 다니기에는 손색없었고 그 옆에서는 수수한 내 모습도 청순하다는 말로 포장될 수 있었으니 나로서는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도 믿진 않겠지만, 채우수를 잠재적 연애 상대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어쩌면 나 스스로 채우수는 내 상대가 아니라고 미리 단정 짓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직감이었을까. 내가 채우수를 좋아할 확률보다도 채우수가 날 좋아할 확률이 더 낮아 보였다. 채우수가 게이가 아니더라도 분명히 그랬다. 그만큼 우리는 소위 말하듯 노는 물이 달랐다.
1학기가 반쯤 지났을 땐 나와 채우수를 굴비 엮듯 엮어 보려던 사람들의 관심도 뜸해졌다. 무슨 놈의 시험을 세 번이나 보겠다는 수리물리 교수님 덕분이기도 했고, 수업 시작 전마다 퀴즈를 내던 양자역학 교수님 덕분이기도 했다.
매일 죽어 가던 우리에게 연애라는 이슈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와도 같았다. 물론 채우수는 조금 다른 이유로 제 연애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았다.
정말이지 또 말하기엔 너무나도 지겹고 짜증 나지만 채우수는 그만큼 잘났었기에 제가 연애에 무관심한 것과는 별개로 응당 당연한 인기를 누렸다.
지금보다는 덜 스마트하던 그때의 세상은 아날로그적인 고백도 혼재된 시기였다. 그가 앉은 도서관 책상에는 잠시 자리를 비울 때마다 쪽지 붙은 음료수가 자리했고 나는 어떠한 사명감을 가진 파수꾼처럼 그 음료수들이 제 주인에게 잘 돌아가길 경계했다.
열람실로 돌아온 채우수는 그럴 때마다 제 책상에 놓인 것들을 추수하듯 쓸어서 가방에 집어넣을 뿐, 크게 기뻐한다거나 그렇다고 크게 싫어한다거나 하는 내색을 보이진 않았다. 그저 제게 마땅히 주어진 일인 양 익숙하다는 듯 구는 꼴이 당시 미온적인 내 눈에도 썩 재수는 없었다.
채우수는 자기가 공짜로 받은 캔 음료들을 선심이라도 쓰듯이 내게 나눠 줬다. 잔반 처리와도 같은 행동이었지만 나로서는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당시 내가 채우수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오해하면서 살았던 것도 여기에 있었다.
먹을 걸 나눠 주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었으니까.
“그, 쪽지 말이에요.”
한번은 도서관 근처 벤치에서 한시적으로 착했던 그 사람과 함께 음료수를 처리하다가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무슨 쪽지?”
“왜, 선배가 음료수랑 같이 받는 거. 연락 달라면서 자기 전화번호 적어서 주는 거.”
아아. 채우수가 마치 그러고 보니 그런 게 존재했었지, 하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제 와서 그걸 왜 묻냐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읽어 보긴 하는가 싶어서요.”
“읽겠냐, 내가.”
“안 읽으면 어떡해요. 나 좀 알아봐 달라고 음료수도 주는 건데.”
“음료수 주면 봐 준다고 누가 그래?”
별말도 아니었건만 그 ‘누가’가 누구인지 따져 대는 것이 굉장히 까칠했다. 교양으로 듣던 철학 리포트에 괴로워하던 나는 “니체가 그랬다, 왜!”라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려다가 음료수를 대신 입 속에 털어 넣었다. 포도 맛 알갱이들이 꿀렁거리며 목젖을 간질였다.
“아님 말 것이지 성질은…….”
“아니야.”
“불쌍하다 정말.”
“내가?”
“선배 좋아하는 여자들이요.”
실로 진심이었던 그 말에 채우수가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수도꼭지를 잘못 건드려서 옷 입은 채로 해바라기 샤워기 물을 맞은 표정이라고나 할까.
그는 그렇게 보기 좋은 얼굴을 찝찝하게, 아니 찝찝한 얼굴을 보기 좋게 구기더니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어디선가 라일락 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그 순간 나는 채우수에게서 나는 향인가, 다소 어이없는 생각을 하며 그를 멍하니 응시했고 연달아 재채기를 하며 가당치도 않은 감정을 쏟아 냈다.
“둘이 또 뭐 하냐.”
때마침 류지환이 채우수와 나 사이의 공백을 가르며 다가왔다.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나는 딱히 채우수와 뭘 한 게 없음에도 괜히 제 발 저린 도둑 꼴로 류지환을 향해 음료수를 흔들어 보였다.
각종 과제나 시험, 보고서에 시달렸던 것에 비해서 우리 과 사람들은 열람실 밖에서 주로 생활했다. 교수님들이 내준 과제를 우리 머리 수준으로는 도저히 못 따라갔던 탓이다.
한편으론 믿는 구석이 있어서이기도 했다. 어지르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냐는 엄마 잔소리처럼 우리 과에는 과제 하는 사람 따로 있고 그걸 베끼는 사람들이 따로 있었다. 대체로 전자는 채우수였고 후자는 나머지였기에 채우수 곁에는 늘 파리 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채우수, 고체물리 과제 다 했냐?”
그중에서도 류지환은 왕똥파리를 맡고 있었다.
“안 넘겨, 인마. 알아서 좀 해라 이제.”
“야, 친구끼리 돕고 살자. 나도 졸업은 해야지.”
“미친놈이 저 좋을 때만 친구 찾고 있지, 류지환.”
말은 그렇게 해도 나는 채우수가 제 동기들에게 넘길 과제 복사본을 따로 준비해 뒀다는 걸 알고 있었다. 본인이 제출할 과제랑은 다른, 적당히 틀린 버전으로. 나는 그의 실험 파트너라는 이유로 그의 과제와 제일 유사한 복사본을 받는 편이었다.
“아, 그건 그렇고 채우수 너 소개팅 안 할래?”
류지환의 시선이 벤치에 나란히 앉은 나와 채우수에게로 번갈아 가며 닿았다. 채우수에게 던진 질문인데 왜 내 눈치를 보는 건지. 여전히 우리 둘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는 모양인 듯하여 나는 엉덩이를 옆으로 밀어 채우수로부터 조금 멀어졌다.
“헛짓하지 말고 졸업하려면 공부나 좀 해라, 지환아.”
“야, 그러지 말고 한번 만나나 봐. 완전 몸매가 어? 아주 어? 어?”
류지환의 손이 허공에서 크게 너울져 넘실거렸다. 꼴 보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렸던 채우수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미간을 더 좁혔다. 뭐야, 왜 나한테 화풀이야. 애꿎은 음료수 캔을 쓰레기통으로 던졌으나 오늘은 날이 아닌가, 찌그러진 캔이 쓰레기통을 빗맞고 튕겨 나왔다.
“야, 실물 완전 장난 아니래. 나도 구경이나 좀 해 보자. 잘생긴 친구 덕 좀 보게.”
“더러운 새끼. 네가 그러고 다니니까 욕먹는 거야.”
“미친놈. 아주 그냥 혼자 잘났지, 채우수.”
“내가 잘났으니까 네가 내 이름 팔아먹는 거겠지.”
재수 없는 새끼. 류지환이 낄낄대면서 쓰레기통으로 향하던 내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우리 잘난 채우수는 뭐가 모자라서 오는 여자를 다 마다할까.”
“여자 관심 없어.”
“미친, 꼭 관심 없다는 놈들이 뒤로는 존나 관심 많더라. 야, 연두야. 너도 이런 새끼 제일 조심해야 해.”
나름 합리적인 조언이라 네, 대답하자 채우수가 어이없다는 듯 내 얼굴을 훑었다. 원래 돈에 욕심 없다는 것들이 돈놀이 제일 좋아하고 그러는 법이니까 류지환의 말도 새겨들을 필요성이 있었다.
나는 시답잖은 말들을 뒤로하고는 이왕 일어선 김에 교양 과제 때문에 먼저 들어가 본다며 열람실로 향했다. 등 뒤로 류지환이 소개팅 어쩌고 해 대는 소리가 들렸다. 저렇게 졸라 봤자 크게 소득은 없을 것이다. 1년 동안 그를 알고 지내면서 채우수가 연애는커녕 소개팅조차 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으니까.
소득 없을 대화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무거운 열람실 문을 열고 발소리를 죽이면서 내 자리를 찾아갔다. 슬쩍 훑어본 채우수 자리에는 역시나 초콜릿과 함께 쪽지 나부랭이가 놓여 있다.
아무래도 도자위, 도서관자치위의 활동이 느슨해진 것도 같다. 열람실 안에는 생수 이외 먹을거리는 반입이 안 된다고 적혀 있건만. 뭣보다도 저렇게 채우수한테 갖다 바쳐 봐야 소용도 없을 텐데…….
얼굴도 모르는 여자들의 정성스러운 용기에 탄식하며 좀 전의 채우수의 말을 괜히 곱씹어 보게 되었던 건, 읽지도 않고 버려지는 그 쪽지들도 한몫했다고 본다. 소개팅도 거절하고, 저 좋다는 여자들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게 그저 여자에 관심 없어서 그렇다기엔 지나치게 무감한 면이 없지 않다. 관심 없는 정도를 넘어섰나.
여자가 아니면 혹시 남자에 관심 있다는 건가.
짧은 단어의 치환으로 비롯된 내 의심은 그렇게 싹을 틔웠고 그날 이후로 내 모든 신경이 채우수에게 쏠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 * *
“어쨌든요.”
“뭐가 어쨌든이야.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지 마.”
“……내가 책임님의 그…… 소중한 것을 건드린 건 정말 죄송하게 됐다구요.”
“그래서?”
나는 묘한 상황에 입술을 달싹거렸다. 바닥을 보인 복국 뚝배기에 할 말을 잃은 내 얼굴이 비쳤다. 죄송하단 말을 했고 그걸 받아들일지는 채우수의 사정이다. 그렇지만 그래서라고 되묻는 건 나로서 대답하기 곤란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다.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 주의하겠다.’라는 틀에 박힌 사과 문구도 이 상황에는 적절한 말이 아닌 듯하다. 내가 살면서 또 채우수의 그것을 만져 볼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주의까지 해야 할까.
“그냥, 그냥 죄송하다구요.”
“사과로 어물쩍 넘어가시겠다?”
“……그렇다고 공평하게 내 몸도 만져 보라고 할 순 없잖아요?”
어머, 나 뭐래니.
“물론…… 물론 선배는 여자 몸에 별 감흥도 없겠지만……. 뭐, 선배가 그렇게 억울하다면 어쩌면 가슴 정도는…….”
“한연두 너 미쳤어?”
입에 빨간 구두라도 신겼던 것일까. 멋대로 나불거리는 내 입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가슴은 두 쪽이니 공평해지려면 나도 그의 것을 한 번 더 만져야 수지 타산이 맞는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꼭 어딘가에 조종당하는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어딘가에 의해 정지된 사고 회로는 끊임없이 특정한 사건과 특정 부위를 연달아 상기시켰고, 손끝에 닿았던 촉감의 기억들로 말미암아 종국에는 또 만져 보고 싶다는 거대한 열망을 만들었다. 어쩌면 진짜로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날 타락시킨 채우수라는 뻔뻔한 생각까지 들었던 나는 결국,
“그런데 선배, 여자 가슴은 제대로 만져 본 적 없죠?”
도리어 사과를 종용하는 미친 여자가 되어 버렸다. 채우수의 숟가락이 힘을 잃고 떨어졌다.
* * *
세상 사람들을 정상이냐 비정상이냐로 굳이 나눠야 한다면 나는 마음 편히 후자를 택할 것이다. 정상 범주에서 늘 번듯한 인생을 살아 온 자들은 사소한 결점도 크게 평가되기 마련인 반면 ‘쟤는 원래 좀 이상하잖아’라는 말들은 사고와 행동의 제약을 없애 주니까.
아빠는 특별한 것이라고 포장해 줬지만 어릴 때부터 특이한 애, 나아가선 이상한 애, 더 나아가선 또라이라는 말을 훈장처럼 달고 다녔던 내게 미쳤다는 말이 가져다줄 충격은 진도 1 정도의 세기에 불과하다. 아주 민감한 사람이 아니면 못 느낄 충격, 그 정도.
나는 민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고 내 감정에 있어선 둔하기까지 했으니 미친 여자가 되는 것에 그다지 큰 거부감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진짜로 채우수에게 내 가슴을 내어 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철없던 시절도 아니고 나도 어느 정도 사회성을 기른 사람인데.
그저 나는 어디까지나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자 한 것일 뿐.
채우수는 ‘너 진짜 미쳤냐’는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향했다. 나는 쥐가 난 다리로 어기적거리면서 그를 뒤따랐다. 한 발씩 디딜 때마다 발끝에서부터 진동이 느껴져 피식대며 웃었더니 그런 날 보고 정말이지 질린다는 듯 채우수의 인상이 구겨졌다.
웃겨, 정말. 앙탈은…….
누가 됐든 채우수의 남자 친구는 꽤 재밌는 상대를 만난 건 분명하다. 인정하긴 싫지만 채우수가 진저리 치는 모습은 의외로 귀엽고 계속 놀려 먹고 싶게 만들었다. 내가 채우수를 싫어하는 것만큼이나 채우수도 날 보고 치를 떠는 게 나름 재밌기도 했고.
운동화를 대충 구겨 신고 서둘러 식당을 나왔다. 징징대던 다리는 자글자글한 모래로 변해 버린 기분이다. 어쩐지 적정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 멀찍이 떨어져 있던 채우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 앞에 다가왔다. 나는 그의 허리 아래로 자꾸만 굴러떨어지려는 눈동자를 의식적으로 꽉 붙들어 매곤 홉뜬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저녁 잘 먹었어요.”
“너 집에 바로 갈 거지?”
“가야죠.”
“그래. 택시 타고 가.”
와, 어이없어. 집에 가던 사람 붙잡아서 여기까지 데려온 게 누군데.
“왜요. 집까지 태워 줘요. 치사하게!”
채우수가 제 차로 걸음을 빨리하자 나도 그를 따라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기서 집까지 택시비가 얼만데 이 교활하고 악마 같은 인간. 웬일로 비싼 걸 사 주나 했다.
“선배는 어디로 가는데요?”
“집.”
“우리 집 밑에 그 집?”
“어.”
“……그럼 같이 가면 되잖아?”
“내 차에 미친 사람 태우기 싫어.”
별……. 그러나 그 미친 사람이라는 말에 굳이 토를 달 필요는 없어 보였다. 나는 내가 지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순박하고도 불쌍한 표정으로 채우수를 쳐다봤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조용히 갈게요.”
“…….”
“가슴 얘기 안 하면 되잖아요.”
내 말에 허,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치던 채우수가 날 한참 쳐다보더니 제 차 조수석의 문을 여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결국 이렇게 태울 거면서 밀당이야 뭐야.
“입도 뻥긋하지 마, 너.”
볼에 남은 공기까지 모조리 들이마시며 고개를 끄덕이자 하아, 긴 한숨이 이어졌다. 저렇게까지 한숨 쉴 일인가 싶지만 저녁도 얻어먹고 차도 얻어 타는 마당에 저 정도는 감내할 수 있었다.
아니 잠깐. 그러니까 저녁. 뜬금없이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던 건 채우수가 아니던가. 지난밤의 사건을 덮고 넘어가고자 한 건 난데. 계속 그 사건을 상기하는 사람은 채우수 본인인 주제에. 내 사과는 들은 척도 안 한 주제에…….
아무튼 뒤집어씌우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인간이다. 내가 가슴을 운운하긴 했지만, 뭐 그 정도의 얘기로 속된 말로 꼴린다거나 했을 리도 없지 않겠는가. 저렇게 질색할 것까지 뭐 있어.
한편으론 자존심도 상했다. 그런 취급을 받을 정도로 내 가슴이 못나지도 않았는데. 내 자랑 같아서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그동안 사귄 남자들은 황홀해 마지않던 가슴이었는데.
그러니 더더욱 합당한 등가 교환일 수 있는 제안이었다. 어디까지나 채우수가 어떤 피해 보상을 논했을 때 말이다. 아무리 채우수가 남자를 좋아한다고는 해도 여체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궁금증. 그러니까 결국은 궁금증이었다. 채우수야 여자 몸을 모른다고는 해도 나는 남자 몸을 아는 사람이니까. 이건 뭐 이미 맛을 아는 사람의 코앞에 감히 손도 대지 못할 치킨 냄새만 풍겨 대는 꼴이 아닌가.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처럼 채우수의 그것이 잘 세워진 빌딩이 되어 눈앞에 어른거렸다. 이래서 오늘 하루 종일 채우수를 피해 다닌 것도 있었다. 변태적인 생각들을 합리화하며 자꾸만 다른 마음을 품게 될까 봐. 가혹하디가혹한 고문 행위와도 다름없는 상황에 입술을 짓씹으며 차창 밖만 응시하던 나는 그냥 눈을 질끈 감았다.
“한연두.”
“…….”
“불렀잖아.”
“……왜요?”
“어디 아파? 왜 끙끙거려.”
마음이 아팠다. 평생 가질 수 없는 걸 욕심내고 있는 내 마음이.
“아무것도 아니에요.”
“뭔데?”
“……나는 그냥 집 근처 편의점 앞에 내려 줘요.”
“왜.”
“맥주나 사 가게.”
마음이 장마철 눅눅해져 버린 감자칩이 된 것만 같다. 씹히는 맛은 없고 짠맛만 가득한, 질기기만 한 그런 마음.
어쩌면 내가 남자를 너무 오래 만나지 않아서 이런 건지도 모른다. 내 마지막 연애가 언제였더라. 1년 전인가. 그러니까 새 남자를 만나면 이 변태 같은 생각도 자연스럽게 없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새로운 남자가 채우수보다 더 나은 것을 달고 있을 거란 보장이 있을까.
“한연두 너 울어?”
“울긴 누가 울어요.”
“눈이 촉촉한데?”
“본연의 촉촉함이에요.”
내 얼굴을 힐끗 쳐다보던 채우수가 피식거리고는 바뀐 신호에 핸들을 돌렸다. 진짜 울었던 건 아니지만 어쩐지 정말로 울고 싶어졌다. 억울한 마음이 한데 뭉쳐서 가슴을 짓누르는 기분에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웬 한숨이야.”
“현실이 너무…… 너무너무 개탄스러워서 그래요. 너무 억울하고…….”
“뭐가 그렇게 억울한데.”
얼핏 들으면 꽤 다정하게 느껴질 법한 말이 귓가에 잔인하게 스며들었다. 이 억울함을 누가 알아줄까. 봐서는 안 될 것을 보고 알아선 안 될 것을 알아 버린 모양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라도 한 것처럼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범람했다.
“말해도 몰라요, 선배는. 여기 앞에서 세워…… 뭐야, 세워 달라니까요?”
“집에 들어가서 곱게 잠이나 자. 맥주는 무슨. 내일 오전 미팅 있잖아. 너 어제도 소주 마셨고.”
내가 내 돈 주고 사 마시겠다는데. 딴 걸 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이런 것 하나 내 맘대로 못 먹나 싶어서 가늘어진 눈을 채우수에게 던졌다.
“너 감기 기운도 있다며.”
“……내가요?”
“그래서 기껏 비싼 복국 먹여 둔 거니까 헛짓하지 마.”
내가 감기 기운이 있었던가. 아, 그건 그냥 채우수를 피하려고 둘러댄 말이었는데. 새삼스럽게 왜 이러나 싶다. 아무래도 이상한 건 나뿐만이 아닌 것 같다.
“갑자기 이렇게 잘 해 주면 내가 오해하게 되잖아요.”
“뭘 오해해?”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을 때가 된 거라는데.”
“……뭐?”
매끄럽게 주차장으로 들어선 차가 비스듬히 멈췄다. 어느새 맥주 생각도 달아난 것 같다. 어제 엘리베이터에서 기절한 뒤로 채우수에게 심경의 변화가 생기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 짧은 순간 조상님을 만난 건지도.
뒤에서 클랙슨이 울리자 그제야 채우수가 한참 내 얼굴을 훑던 제 얼굴을 돌리고는 빈자리를 찾아 주차했다.
“막말로 그동안 우리가 서로 걱정해 주던 사이는 아니잖아요.”
“넌 아니었겠지.”
안전벨트를 풀던 손이 멈칫했다. 이 어색한 분위기 뭐야. 순식간에 무거워진 공기에 벨트를 부여잡은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아니라는 말은 그럼 자기는 내 걱정을 했다는 말이야 뭐야.
“난 항상 너 걱정하면서 살고 있어.”
“……왜, 왜요?”
“뭐가 왜요야. 한연두 선임이 언제 사고 칠지 모르니까 그렇지.”
“아.”
“그리고 너 딴 남자 앞에서도 그렇게 가…….”
내 가슴께에 닿았던 채우수의 시선이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급히 달아났다. 고개를 돌린 채우수의 귓등이 멀리서 비춰 오는 헤드라이트 탓인지 발갛게 물든 것도 같다.
“그렇게 가, 뭐요.”
“한연두 넌 말하기 전에 생각을 좀 할 필요성이 있어.”
“그건 알고 있어요, 나도.”
“알면 좀, 입조심하고 다니라고.”
나는 말 없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제 욕을 하는 건 아는지 그동안 제어되지 않던 입도 눈치는 있는 모양이다.
“한연두 너한테 내가 아무리 편하다고는 해도.”
“편하지는 않아요.”
“잘됐네. 어쨌든 조심하란 말이야. 나도 남자니까.”
“책임님이요?”
“한연두, 생각하고 말하랬어 바로 조금 전에.”
“아니, 선배가 남자는 맞지. 맞는데…….”
“……너 또 어딜 쳐다봐?”
어머, 언제 또 눈동자가 거기로 내려갔을까. 왼쪽 볼에 닿는 따가운 시선에 데구루루 오른쪽으로 굴렸던 눈동자를 슬그머니 그에게로 돌렸다. 멋쩍어 흘리는 내 미소에 채우수가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보였다.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자꾸 생각나서…….”
“…….”
“원래 놀라운 걸 보면 뇌리에 박히고 그러잖아요.”
“…….”
“나도 충분히 참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근데 본능적으로 자꾸…….”
채우수가 핸들에 고개를 묻고는 현실을 부정하는 듯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위로라도 해 줘야 할까, 그의 어깨를 두드리려 뻗은 왼손이 채우수의 날 선 눈빛에 머쓱하게 오므라들었다.
참 나. 그 기억을 떨쳐 내고 싶은 건 정작 난데.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을 채우수가 알았다면 제가 느낀 수치심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축에 들 텐데.
내리기나 하라는 듯 턱짓하는 채우수를 억울한 눈으로 노려본 뒤에 조수석 문을 열었다. 마음 같아서는 문콕이라도 당했으면 좋겠지만 채우수의 비싼 차 주위로는 어지간해서 다른 차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여간 못마땅한 게 아니었다.
지하 주차장에 채우수의 구두 소리와 종종거리는 내 발소리가 울렸다. 긴 다리를 쭉쭉 뻗는 걸음에 가속도라도 붙기라도 하는지, 결국에는 뛰다시피 해서 그를 따라잡아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근데요. 그렇게 따지고 보면 나도 피해자예요.”
“뭐? 피해자?”
“피해자죠. 훌륭한 비교군을 만났는데 어지간해선 감흥이 없을 거 아니에요. 앞으로 남자들을 어떻게 만나겠어요, 내가.”
“만나지 마, 그럼.”
자기 인생 아니라고 저렇게나 쉽게 말한다. 엘리베이터에 먼저 오른 채우수가 미간을 좁히며 입술을 짓씹었다. 벌써부터 폐소 공포증 증상이 왔을 리는 없을 텐데. 걱정스러운 시선이 제게 닿기 무섭게 튕겨 내는 채우수는 정말이지 내 관심도 사치인 사람이다.
“나보고 수절하고 살란 말이에요?”
“그것도 좋겠네.”
“좋을 게 뭐 있어요, 선배가.”
“일하는 데 방해돼.”
“그동안 내가 연애하면서 회사 일에 지장 준 적은 없는데요, 책임님?”
어이가 없어서. 딱히 숨기면서 살아오지도 않았지만 같은 학교, 같은 직장, 같은 아파트에서 얼굴 부딪치는 사이에 채우수에게도 자연스레 노출된 내 연애사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방해될 만큼 공사 구분을 못한 적도 없다.
“너 그 남자 같지도 않은 새끼들 만나는 거 짜증 나니까.”
“허, 남이사 누굴 만나든 뭔 상관.”
“내일 아침에 연락해.”
제가 사는 9층 버튼을 눌러 지우고는 10층에 같이 내린 채우수가 헛소리 그만하고 집으로 들어가라는 듯 현관문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갑자기 왜 말을 돌려요. 근데 아침에 왜요?”
“같이 출근하게. 네 차 회사에 있잖아.”
“아.”
그렇다고 같이 출근할 필요까지 있나. 하지만 나는 어지간해선 내게 주어질 편의를 외면하진 않는 편이다.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채우수가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고는 계단으로 등을 돌렸다.
“선배.”
그때 채우수를 불렀던 건, 조금은 충동적이었다. 그러고 보면 채우수를 선배라고 불러 본 것도 꽤 오랜만인 것 같다. 어제 일 때문일까. 왠지 어느 순간부터 우리 둘 사이에 존재하던 경계가 깨진 듯하다.
계단을 반 층 정도 내려가던 채우수가 절 부르는 소리에 날 올려다봤다. 왜 불렀을까. 막상 불러 놓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거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거지. 미안하단 말도 고맙다는 말도 더없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채우수 말대로 말하기 전에 생각이란 걸 먼저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제법 긴 시간 할 말을 고르는 동안 채우수의 얼굴에 내려앉은 주황색 센서 등이 어쩐지 미소 짓는 것처럼 음영을 만들었다. 아니, 어쩌면 채우수가 진짜로 웃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얼굴에 조금은 홀렸던 것 같기도 하고. 내게서 별다른 말이 없자 모나리자 같던 그 얼굴에서 낯간지러운 말이 흘러나왔다.
“잘 자, 한연두.”
새삼스럽게 채우수가 낯설다. 입술을 말아 물며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그의 구두 소리가 멀어졌다. 채우수가 제집 현관문을 열고 닫을 때까지도 멍하니 서 있었던 건 그가 남겨 두고 간 향수 냄새 탓이었을까.
나는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며 비밀번호를 눌렀다. 차라리 채우수랑 같이 올라오지 말고 맥주를 사 올 걸 그랬다. 왠지 쉽사리 잠들지는 못 할 것 같은 밤이었다.
* * *
“아, 진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속에서 뭔가가 솟구쳤다. 울분이라기엔 무언가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끝낸 것 같은 찝찝함, 뭐 그런 기분. 체하기라도 한 걸까. 속이 답답해진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시계를 확인했다. 자려고 누웠을 땐 12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는데 벌써 2시간이 훌쩍 지났다. 아, 채우수. 아, 진짜. 이게 다 채우수가 벌려 놓은 시곗바늘이다. 그가 했던 말을 끊임없이 되뇌며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다 보니 어느새 침대 위를 반 바퀴를 돌았다. 침대 바깥으로 빠져나간 짧은 머리카락이 방바닥에 닿을락 말락 했다.
채우수 때문에 이게 뭐야. 진짜 별꼴이야, 한연두. 거꾸로 누워 얼굴로 피가 몰린 내 꼴을 보면 귀신도 놀라 달아날 것이다. 하, 숨을 크게 들이쉬며 눈을 끔뻑거렸다. 어둠 속에서 거꾸로 보는 세상도 색다를 것은 없다. 여전히 시간은 같은 속도로 흐르고 있고 모든 사물들도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며 중력을 견디고 있다. 그러니까 나도…….
자야지, 그래 일단은 자야지. 잠이라도 자 둬야 내일 아침 채우수를 만나서 뭘 하든 할 수 있다. 그대로 상체를 접어 올리자 얼굴로 몰렸던 피가 전신에 감도는 듯하다. 꾸물꾸물 기어가서 다시 베개를 베고 누웠다. 안 잔다고 달라질 건 없다. 이미 늦었지만 한 시간이라도 더 자고 일어나서 맑은 정신으로 채우수한테 따져 물어야겠다.
……따져 물어? 뭘? 왜 그런 말을 해서 잠도 못 들게 하냐고? 하아, 한숨이 깊어졌다. 채우수의 단호하기 짝이 없던 말이 귓가에 자꾸만 맴돌았다.
남자 같지도 않은 새끼들이라니.
내 전 남친들이 그렇게 훌륭한 인격체들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채우수에게 남자 같지도 않다는 평을 듣기엔 어폐가 있다. 그들은 그래도 여자인 나를 좋아했고, 여자인 나와 관계했다. 물론 남자라면 응당 여자만 좋아해야 한다는 포비아적 사고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채우수 자기가 뭘 안다고 그렇게 함부로 떠들어. 그렇잖아도 게이인 제게 욕정을 품고 있는 내가 한심해 죽겠는데.
이대로는 정말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서 손을 더듬어 협탁 위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드라마라도 볼까 싶어 어제 보다 말았던 미국 드라마를 재생했다. 재밌어서 몇 번은 돌려 본 드라마지만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드라마 속 주인공이 실제로도 게이라는 걸 인지하고 나니까 채우수로 인한 억울함이 다시금 고조됐다.
신경질적으로 드라마를 껐다. 지금 봤다간 속만 시끄럽지. 몇 가지 어플을 확인하다가 깔아 두고 잘 하지도 않던 SNS 어플을 열었다. 얘도 이제 결혼하나 보네. 이 선배네 첫째가 언제 이렇게 컸지. 얘는 한국에 아예 들어온 모양이구나. 화면 속 그들의 세상을 쓱쓱 넘겨보던 엄지가 어딘가 익숙한 남자 얼굴에 멈추었다.
아, 류지환 친구다. 류지환 소개로 만났다가 4개월 정도 사귀고 헤어졌던 내 전 남자 친구이기도 하고. 그게 언제였더라. 3학년 가을쯤이었던가. 그러고 보니 딱 10년 전 일이다.
전공 특성상 직장도 비슷한 계열로 이어지기에 내 얕지만 넓은 인맥들은 대체로 과 사람들로부터 파생된 것이고, 내가 그동안 만나 온 남자들 역시나 그러했다. 몇 다리 건너면 알 법한 그 나물에 그 밥.
그 말인즉슨 내가 만난 남자들이 남자 같지도 않았다는 채우수의 표현에 어느 정도의 신뢰성을 부여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채우수 네가 뭘 아냐고 따져 묻기엔 그는 제법 많은 걸 알고 있다.
10년이라는 세월을 배로 먹은 것만 같은 옛 남자의 사진을 벗어나 피드를 내렸다. 류지환 이 인간은 SNS 중독이야 뭐야. 도대체 하루에 사진을 몇 개나 올리는 거야. 몇 개의 음식 사진들을 내리다가 류지환이 올린 채우수 사진에 또 손이 멈췄다.
어디 등산이라도 갔던 모양이다. 햇빛을 보고 찡그린 표정이 제법 근사했다. 얼굴에 맺힌 땀은 어쩐지 섹시해 보였다. 반팔 아래로 살짝 드러나는 근육들도 듬직하기 짝이 없다. 이 좋은 걸, 이렇게나 멋진 걸 남자들에게 양보해야 한다니.
아아, 채우수. 진짜 싫다. 정말이지 진짜 너무 싫었다.
* * *
“한연두 너 꼴이 왜 그래?”
“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
채우수는 새벽 6시에 전화를 해서 날 깨웠다. 3시간을 겨우 채운 수면 시간에 짜증이 있는 대로 치밀어 올랐지만 7시까지 주차장으로 내려오란 말에 전화를 끊고 묵묵히 칫솔을 잡았다. 그렇게 반쯤 감은 눈으로 채우수 차 조수석에 올랐을 땐 정확하게 7시. 급하게 내려오느라 머리도 다 말리지 못한 상태에 눈 밑은 꺼질 대로 꺼졌으니 꼴이 말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너처럼 속 편히 사는 애가 잠 못 잘 일이 뭐 있어.”
“……자꾸 신경 쓰여요.”
“너 내려.”
조수석 선바이저를 내리려다 말고 운전석을 쏘아봤다. 채우수 자기가 먼저 태워 준대 놓고 또 무슨 변덕인가 싶다.
“쓸데없는 말 할 거면 내리라고.”
“아니, 그거 말구요. 누굴 진짜 그 생각만 하는 변태로 아나 봐.”
“이제 와서 내뺀다고 아닌 게 되는 건 아니지.”
건전한 생각을 방해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아침부터 정말 그 생각을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의식적으로 시선을 단속하며 언제 또 마음이 변할지 몰라 서둘러 안전벨트를 채웠다. 핸들을 돌리는 채우수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아무튼 그거 말고. 내가 남자 같지도 않은 새끼들 만났다는 말이요.”
“그게 왜.”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 정도로 엉망인 연애를 한 것 같진 않단 말이에요.”
채우수의 시선이 내 왼쪽 뺨에 닿았다가 전방으로 흩어졌다. 시선 끝에도 향수가 달린 것인지, 별다른 동작이 없음에도 그가 움직일 때마다 기분 좋은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왜. 내가 네 전 남친들 씹으니까 기분이 안 좋아?”
“딱히 좋진 않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걔들이야 씹히든 말든 상관없었다. 다만 신경을 긁었던 건 채우수가 탓하는 것이 그들이 아닌, 그들을 선택한 나 한연두인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놈들 좀 만나란 말이야.”
바로 지금처럼.
“선배가 뭘 안다고 그래요.”
제대로 되지도 못한 놈들을 선택한 내가 문제라는 저 말투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내가 혼나는 기분인 건지.
“내가 하나하나 다 읊어 줘? 너 마지막으로 사귄 놈 세 달 전에 딸 낳은 거 알아?”
“헐. 결혼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알고 보니 내가 세컨드였던 내 마지막 남자 친구는 그렇게 이별을 고했었다. 말이 좋아 이별이지 당하는 사람은 바보 만드는 환승 이별이었고.
“그전에 만난 새끼는 코인으로 돈 날리고 월급까지 차압된 거 알아, 몰라?”
“알아요.”
그 새끼와는 꿔 준 돈 백만 원을 겨우 받아 내며 더럽게 헤어졌다.
“코인 그 새끼 전에 만난 놈은 또 뭐야, 두 달에 한 번씩 필리핀 가서 여자 끼고 노는 쓰레기였고. 더 말해 줘?”
“……됐어요.”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꾼 행세를 하던 그놈은 안마방 단골이기도 했다.
“선배 말 듣고 보니 내가 쓰레기만 골라 모으던 쓰레기통이었네요.”
“게네가 뒤로 구린 짓 한 거지. 한연두 네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야.”
“이미 그렇게 들렸어요.”
채우수 말처럼 많고 많은 남자 중에서 하필이면 그런 놈들만 골라 만난 내가 문제일지도 모른다. 연애를 쉽게 여겼던 게 문제였던가. 연애는 끊임없이 했어도 사랑이란 감정에는 데면데면했던 게 패착인가. 그래도 마지막으로 사귄 남자는 꽤 좋아했었는데. 그 충격에 1년 가까이 연애를 쉬고 있는 것도 있었는데.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아니에요. 내가 남자 보는 눈이 없는 건 사실이니까.”
그러니까 게이인 채우수를 보고도 내가 이러지…….
“선배는 남……자들 보면 괜찮은 사람인지 바로 보여요?”
“내가 어떻게 알아. 사람은 겪어 봐야 알지.”
“그래도 어떤 느낌 같은 게 올 거 아니에요.”
“느낌 믿지 마. 너 느낌이라면서 결국 얼굴 보는 거잖아.”
남자 얼굴 안 보면 그럼 뭘 보나. 어차피 다 고만고만한 사람들, 얼굴이라도 잘나야지.
“그럼 선배는요? 얼굴 안 봐요?”
물끄러미 내 얼굴을 응시하던 채우수가 바뀐 신호에 고개를 돌렸다. 아침 햇살이 그의 높다란 콧대에 부서지듯 산란했다.
“왜 대답을 안 해요. 선배는 얼굴 안 보냐고.”
“봐. 왜 안 봐.”
“그것 봐. 우리는 본능에 솔직해질 필요가 있어요.”
“두 번 솔직했다간 아주…….”
“……아주 뭐요?”
“아니야.”
이것 봐. 저도 결국 남자 얼굴 보는 주제에. 왜 혼자 고고한 척이야. 내가 채우수랑 붙어 있던 남자를 못 봤다면 몰라도 몇 년 전까지도 낯짝만은 반반한 그 남자랑 둘이 있는 걸 몇 번이나 목격했는데.
“근데 선배 이상형은 어떤 스타일이에요? 이런 거 물어봐도 돼요?”
“이미 물어봐 놓고는 뭘 물어.”
그러고 보니 채우수의 애인으로 추정되는 그 남자를 못 본 지도 오래다. 헤어졌나. 그렇다기엔 채우수가 제 오른손에 끼고 다니던 반지는 그대로다.
“키 크고 몸도 좋은 남…… 그런 스타일인가?”
“나쁠 건 없지.”
“머리도 되게 좋구요?”
“딱히 그런 것 같진 않은데. 눈치도 없고.”
그래도 그 남자는 수능 만점자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왜. 한연두 네가 내 이상형 알아서 뭐 하게. 소개라도 해 주게?”
“가능……하다면요?”
“말해 줘도 넌 못 찾아.”
물론 채우수 눈에 맞고, 게이인 남자를 내가 찾아준다는 일은 가능성이 제로에 수렴하는 상황이겠지만 시도도 안 해 본 상태에서 괄시하는 태도가 썩 기분이 좋진 않다. 딱히 색다를 것도 없는, 여상한 일이라지만 불퉁한 표정은 감출 수가 없었는지 채우수가 내 얼굴을 흘끔거리곤 피식, 건조한 웃음을 날렸다.
“거울이나 봐.”
“거울은 왜요.”
“너 눈곱 나왔어.”
……재수 없어. 선바이저를 내려 거울을 살폈다. 으, 느끼해. 잠을 못 자서 그런지 눈두덩이에 굵은 쌍꺼풀이 생겨 버렸다. 눈을 몇 번 깜빡이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이제야 좀 사람 같은 꼴이라 아침에 채우수가 날 보고 놀란 것도 이해는 간다.
“한연두 너 토요일에 뭐 해.”
“별 계획 없는…… 아니, 뭐야 나 바빠! 일 시키지 마세요, 책임님!”
“그래. 시간 비워 둬.”
“왜요, 왜. 내 소중한 토요일인데.”
“출장이라고 생각해.”
출장이면 출장이지 출장이라고 생각할 건 뭐 있어. 때마침 회사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차에 혹시나 동료들 의심을 살까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뭔데요. 책임님 요즘 이상해. 점점 더 무서워요.”
“나는 타락한 네 눈이 더 무서워.”
“날 타락시킨 게 누군데?”
“원래부터 네가 변태였던 걸 나 때문이라고 뒤집어씌우지 마.”
일찍 출근한 탓인지 텅텅 빈 주차장 구석에 채우수의 차가 우아하게 자리 잡았다. 초보 운전자인 내겐 경탄을 금치 못할 수준의 주차 실력이다. 주인을 잘못 만나 일주일의 절반 이상을 회사 주차장에서 보내는 내 차를 목을 빼 살피고는 운전석을 쳐다봤다.
“사람들은 다 저마다의 변태 같은 구석을 갖고 있어요.”
“그래.”
“영혼 없이 대답하지 말구요. 그리고 내가 왜 변태야. 난 그저 더 큰 걸 찾고자 하는 본능에 충실할 뿐인데?”
“알았어.”
“인간에게도 다른 암컷들처럼 더 우수한 수컷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구요.”
“그래. 참 좋겠네.”
“선배는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여자들도 남자들만큼 성욕을 가지고 있고 그걸 당당히 표출할 수 있는 사회가 됐구요.”
“좋은 사회야, 그래.”
“그러니까요. 겨우 이 정도로 변태라고 하면 이 세상 여자들이 전부 변태게?”
“하아…….”
아침부터 열띤 변태론에 질려 버린 모양인지 채우수가 헤드레스트에 제 뒤통수를 두드리고는 운전석 안전벨트를 풀었다. 도르르 말려 제자리를 찾는 안전벨트로 향했던 눈이 채우수의 것과 부딪쳤다.
“선배도 부끄러워하지 말고 솔직해질 필요가 있어요.”
“…….”
“그런 걸로 내숭 떨기엔 너무 많은 걸 알아 버린 나이잖아요.”
“…….”
“혹시 모르지. 우리가 분야는 달라도 알고 보면 선배도 나보다 더한 변태일지 어떻…….”
순식간에 채우수가 제 몸으로 내 시야를 가렸다. 그가 내 오른쪽 어깨 옆을 짚자 베르가모트 향기가 내 몸을 에워싸듯 덮쳤다. 흐읍, 들이마신 숨을 내뱉으면 채우수 얼굴에 바로 닿을 것만 같아 그대로 숨을 멈추었다. 놀란 얼굴에 닿는 채우수의 눈빛이 겹겹이 쌓였다. 서로를 훑던 곧은 시선이 적분이라도 한 듯 둘 사이의 공간을 채웠다.
“어, 어떻게 알아요…….”
“맞아.”
“……뭐가 맞고 소오오…… 손은 왜 잡아요?”
“너보다 더한 변태 맞아, 나.”
갑작스럽게 고백해 오는 변태 때문에 입이 쩍 벌어졌다. 이렇게 빠른 인정을 바란 건 아닌데. 안전벨트를 풀려던 내 손등 위로 겹쳐진 채우수의 손이 더없이 야릇하게 느껴진다면 그래도 내가 더 한 수 위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적당히 까불어. 변태 안 건드리려면.”
“그렇다고 갑……자기, 갑자기 이렇게 본능적으로 나오면…….”
그의 손아귀 힘에 꽉 눌러진 손등이 아팠다. 옴짝달싹하지도 못 하는 손에 닿은 시선을 도르래 올리듯 끌어 올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채우수와 마주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코끝이 스칠 것 같은 거리다. 꿈인가. 꿈이 이렇게나 희망적일 수가 있을까.
“한연두. 내가 너 말하기 전에 생각하랬지.”
“……또 뭘.”
“내가 본능대로 움직이면 너 어떻게 될 거 같아?”
그럼에도 왠지 모를 양심의 가책에 눈동자를 바깥으로 굴리자 채우수가 시선을 낚아채려는 듯 내 턱을 잡아 제 쪽으로 돌렸다. 아침이라서 그럴까, 잠을 못 잔 탓일까. 딱딱하게 굳어 버린 머리는 상황을 인지하는 데 예열이 필요한 모양이다.
“몰라요, 모를래 나는.”
“알고 싶은 거 같은데, 너.”
“아니, 왜…… 왜 이래요. 나 한연두예요! 여자! 한연두!”
“네가 한연두고 여자라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근데 왜 이래…… 미쳤나 봐.”
픽, 새는 웃음이 입술 위로 닿았다. 이상하다. 채우수가 너무 가깝다. 이렇게까지 가까이에서 본 적은 없…… 한 번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폐부까지 채우수의 향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시트 깊숙이 몸을 묻으며 그를 밀어내려던 손이 어쩐지 자연스럽게 남자의 가슴팍을 더듬거렸다. 진짜 꿈인가. 꿈이라기엔 이거 너무…… 괜찮은데.
“미친 게 아니라 네 말대로 본능에 따를 뿐이야.”
“그러니까 그 본능을 왜 여자인 나한테…….”
“글쎄. 참아 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네.”
“뭘, 뭘 참아요.”
“지금 네가 생각하고 있는 거.”
“그러니까 그걸 왜…….”
“싫으면 지금 말해.”
“아니, 싫은 게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사고가 정지한 순간, 채우수의 입술에서 빠져나온,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들이 내 입술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