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다 잊기엔 너무 아까운 (1/14)

1. 다 잊기엔 너무 아까운

세상에는 감히 태어나서도 안 될 족속들이 있다. 이를테면 하등 도움 될 게 없는 데다가 징그럽기까지 한, ‘바’로 시작하는 벌레라거나 그 벌레만도 못한 채우수라거나.

물론 남의 집 귀한 아들을 보고 이따위 막말을 퍼붓는 것이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채우수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소상히 아는 사람들은 내 말에 어느 정도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 분명하다. 애석하게도 그걸 아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혹자는 채우수의 겉으로 드러난 스펙을 두고 이름값을 한다고 할지도 모른다. 집안 좋아 인물 좋아 능력 좋아, 제 짝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성별을 막론하고 한 번쯤은 채우수를 흠모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최’우수가 아닌 ‘채’우수일 뿐. 껍데기만 요란하게 잘난 모양새의 채우수는 전혀 우수하지 못한 인성을 가지고 있었으니 정말이지 억울한 사람은 따로 있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내가 주차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디에서 나타난 건지 모를 채우수는 그 자리에 제 차를 밀고 들어와 새치기를 했고, 잠깐 기다려 달라는 내 말을 뻔히 들었으면서 그는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정확하게 여섯 번이나 두드려 코앞에서 문이 닫히게 만들고는 사무실로 먼저 올라가 버렸다.

그것만 그랬을까. 회의 시간에 공개적으로 망신 주기는 물론이고 자잘한 업무들은 모조리 내게 떠넘겼으며, 사내 식당 밥이 얼마나 맛있는데 팀원들을 이끌고 굳이 회사를 벗어나서는 내가 그렇게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보란 듯이 점심 메뉴를 낙지볶음으로 통일하기도 했다.

아니 잠깐, 고작 이 정도의 일들로 채우수 인성에 문제 있냐는 소리까지 들어야 하냐고 생각했다면 대단히 큰 오산이다. 그는 내가 우수 사원상을 받은 걸 들먹이면서 정작 나는 혐오해 마지않는 낙지볶음을 내 손으로 사게 만들었으니 이보다 더 악랄한 인간이 어디 있을까.

벼룩의 간을 빼먹어도 분수가 있지…….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식당 카운터에서 카드를 내밀면서 이제부터 채우수를 낙지볶음만큼이나 혐오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사람 마음이라는 게 한번 결심했다고 도깨비방망이 두드리듯이 뚝딱뚝딱 바로 바뀌진 않는다. 그러나 원래 싫었던 사람을 조금 더 싫어해 보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나는 채우수 책임을 원래부터 싫어했다. 고로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원래부터. ‘원래부터’라는 개념을 사전적으로 접근하자면 글쎄, 채우수의 첫인상에 대한 내 감상은 그렇게 싫진 않았다고 정의 내릴 수도 있겠다. 사실 처음부터 그를 몸서리치게 싫어할 이유는 전혀 없었으니까.

내가 꼭 남자를 외모로 먼저 판단하는 사람이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단지 채우수의 껍데기만큼은 호불호가 크게 갈리지 않는 절대적인 영역에 존재했으니 그걸 굳이 처음부터 꼬아서 볼 필요는 없었을 뿐이다.

왜 옛말에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 이런 말도 있지 않던가. 채우수는 분명 예술의 경지에 오른 보기 좋은 떡이었고 먹기에는…….

흐음, 어쨌거나 채우수와 나 사이의 단편적인 기억들은 많다면 많았지만 그것들이 모두 특별한 서사를 갖고 있진 않았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은 그러했다. 인간의 뇌는 꽤 사소한 부분들까지 잘 기억하기도 하는 반면 아주 큼지막한 사건들은 쉽게 잊어버리기도 하니까. 뭐, 후자의 경우 일부러 모르는 척한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채우수란 내게 그런 존재였다. 나는 채우수의 사소한 부분들, 가령 그가 기분 좋을 때 흥얼거리는 노래라거나 소개팅 때 입었던 옷이 어떠했는지까지도 아직 기억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기억력이 아주 뛰어나서 그런 것은 아니고, 채우수에 관한 사소하기 짝이 없는 것들을 일부러 기를 쓰고 기억하려던 건 더더욱 아니다.

그저 모든 건 채우수의 잘난 껍데기로 비롯된 일이다. 지금도 그러하듯 어딜 가든 주변 시선을 끌어모으는 채우수가 생물학적으로 어리기까지 했던 대학생 때는 그 얼마나 싱그러웠겠는가.

그야말로 채우수가 내딛는 행적 하나하나는 자연과학대학은 물론이고 드넓은 대학 전체를 소소하게 들었다 놨다 할 정도였으니 그와 같은 과였던 내가 그에 대해 모르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뿐이다.

나는 대학교 2학년, 전공필수과목이었던 현대물리실험에서 채우수를 처음 만났다. 당시 그는 3학년이었고 학점 관리 명목으로 몇몇 과목을 재수강하고 다녔는데 그 실험도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가 고작 2학점짜리 실험 수업을 재수강할 이유는 크게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갓 새내기를 벗어난 내 눈에 그런 것들이 보일 리가 없었다. 21살의 나는 적당히 순진했고 적당히 순수했으니까. 그렇게 같은 실험 조가 된 나는 채우수와 처음으로 개인적인 인사를 나누고, 번호를 교환했다.

내가 비록 지금은 채우수를 싫어하긴 한다지만 그때의 우리는, 인정하기는 싫지만 지금도 그러하듯이, 생각보다 꽤 합이 좋은 파트너였다. 실험 시간은 물론이고 실험을 준비하고 정리하는 과정까지도 그랬다. 어디까지나 실험을 위한 연락과 만남이 꾸준히 이어졌고 공강 시간을 서로 맞춘 우리는 연구 도서관에서 예비 보고서와 결과 보고서를 작성했다.

사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실험이야 같이한다고 해도 데이터를 가지고 보고서를 쓰는 건 개인의 몫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채우수는 제가 만들었던 보고서들과 족보 파일을 구해 와서 내게도 도움을 주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의 성격이 외모만큼이나 꽤 괜찮은 줄만 알았지.

그러니까 원래부터 채우수를 싫어했단 말의 ‘원래’에 그 시절은 포함하지 않는 게 맞다.

이렇게 내가 구태여 10년도 더 지난 옛날 일을 되짚는 건 채우수와의 첫 시작은 어디까지나 일종의 비즈니스였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단언컨대 그때의 나는 채우수에게 이성적인 호감이라곤 전혀, 티끌만큼도 없었다. 따라서 사람들이 우리를 두고 어떻게 생각했는지도 나중에 판단할 일이었다.

“한 선임님.”

“네?”

식당 앞에 서 있던 채우수가 저를 돌아보는 내게 사탕을 건넸다. 자두 맛 사탕. 이것 봐. 내가 자두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일부러 골라 내미는 것 좀 봐. 대충 고맙다는 식으로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사탕을 주머니 안에 넣었다. 주머니 속에서 며칠 전에도 그가 건네줬던 청포도 맛 사탕 하나가 손에 또 잡혔다.

내 사탕 취향 하나도 제대로 모르는 주제에…….

채우수를 괜히 쏘아봤다가 한 발짝 내디뎌 나머지 팀원들의 행방을 살폈다. 보아하니 내가 계산하는 동안 다른 팀원들은 옆쪽 골목 카페에 커피를 사러 간 모양이다. 안 봐도 뻔한 코스다. 점심 메뉴가 무엇이었든 간에 후식은 아메리카노로 귀결되는 직장인의 삶.

불행히도 카페인이 받지 않는 나는 그것만큼은 나랑 비슷한 채우수의 옆에서 그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예상치 못한 지출에 주머니에 구겨 넣은 영수증처럼 내 표정도 같이 구겨졌다. 그걸 본 건지 채우수가 피식, 같잖기 짝이 없다는 웃음을 흘리며 나를 쳐다봤다. 겉보기에는 마냥 보기 좋은 웃음이라 갓 나온 낙지볶음처럼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점심 잘 먹었어요. 한 선임님.”

대꾸도 하기 싫어 마지못해 알았다는 듯 고개만 까딱거리자 채우수의 눈썹이 위아래로 들썩였다. 그 현란한 눈썹의 운동을 흘끔 쳐다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식당 앞에 나란히 정렬된 화분들에 의미 없는 눈길이 닿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채우수 책임을 원래부터, 아니 어느 순간부터는 지독하게 싫어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와 둘이 남는 시간을 가급적 만들고 싶지 않을 만큼. 마땅히 이어 갈 말을 찾지 못해 눈으로 화분들의 이파리 개수만 세고 있는데 채우수가 제 입 속에 있는 사탕을 굴려 대면서 한마디를 툭 던졌다.

“오늘 저녁은 내가 살게요.”

“……네, 뭐.”

그러시든지. 낙지볶음 그거 얼마 안 한다고는 해도 이맘때쯤 카드값에 시달리는 내겐 제법 큰돈이었다. 이왕이면 낙지볶음보다 더 비싼 걸 얻어먹어야지. 아니다. 채우수는 돈도 많으니까 얻어먹을 거 확실히 비싼 걸로 얻어먹어야겠다.

회가 좋을까, 아니다 고기가 낫겠지. 그래도 이번 주에 고기를 너무 많이 먹었는데 역시 회가 좋지. 가을에는 전어회를 먹어 줘야 하니까…… 가 아니잖아!

나는 놀란 얼굴로 채우수를 올려다봤다가 햇빛을 후광 삼은 그의 얼굴이 눈부셔 순간적으로 인상을 확 찌푸렸다. 내 표정을 흡수라도 한 듯 채우수도 제 미간에 금을 만들었다.

눈앞에 마주한 남자는 인상을 쓰더라도 무섭기는커녕 말 못 할 사연이 있어 보이기까지 하는 수목 드라마 남자 주인공 얼굴이다. 나는 말도 안 되는 감정을 다시금 느끼면서 목소리를 막 되찾은 인어처럼 갈라진 음성을 겨우 입 밖으로 내보냈다.

“오늘 저녁을……요?”

“점심을 또 먹을 순 없으니까, 요?”

“아니, 내가 채, 책임님이랑 저녁까지 왜요?”

채우수가 대답 대신 내 앞으로 한 발 가까이 다가왔다. 흠칫 놀라 굳어 버린 날 보고 건방지게 미소 짓던 채우수는 널따란 제 어깨로 내 얼굴에 그늘을 만들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향수 냄새가 만성 비염으로 고생 중인 내 코를 본격적으로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채우수로부터 고개를 멀리 띄우려는데 큼지막한 손이 먼저 내 어깨 한쪽을 잡아 왔다. 그 손길을 거부할 새도 없이 채우수가 내 귀에 대고 얄궂은 목소리를 흘렸다.

“왜긴. 어제 하던 얘기 마저 해야지.”

아아, 그가 내뱉은 말보다 그의 차디찬 시선을 견딜 수가 없어서 나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한기가 도는지 주머니에 넣어 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 진동에 손바닥 안에 든 사탕 두 개가 부서질 것만 같다. 정말이지 채우수는 죽어 마땅할 사람이 분명하다.

물론 어제 일만 돌이켜보자면 나 한연두도 두말할 것 없이 마찬가지다.

채우수와 나 사이에 있었던 어제 일은 어찌 생각해 보면 그렇게 큰 사건은 아니었다. 우리는 어쩌다 보니 단둘이 퇴근을 같이했고, 퇴근길에 엘리베이터에 갇혔다. 갇힌 시간은 10분가량으로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자마자 나는 비상 버튼을 눌러서 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비교적 차분한 마음으로 엘리베이터 구석에 몸을 기댔다. 이런 상황은 예전에도 겪어 본 적 있었기에 딱히 호들갑 떨 것까진 없었다. 그때와는 다르게 휴대폰 배터리도 충분했으니 더더욱 마음이 놓였다.

문제 될 게 있다면 갇힌 지 5분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왼쪽 구석에 처박혀 식은땀을 흘려 대는 채우수였을 뿐.

채우수는 약간의 폐소 공포증이 있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가 숨기고 싶어 하는 치부임은 분명했다. 뭐, 잘난 맛에 사는 인간이니 약점 같은 건 잡히기 싫었겠지. 불행히도 나는 전에도 있었던 비슷한 사건으로 채우수의 약점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 되어 버렸고 어쩌면 그 시점부터 채우수와의 악연이 시작됐다고도 볼 수 있다.

나는 그에게 굳이 ‘괜찮냐’라거나 ‘곧 괜찮아질 거다’라는 입발림 소리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내가 채우수처럼 피가 차가운 인간이라 그런 건 아니었다. 괜히 채우수를 어쭙잖게 건드려 봤자 딱히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게 뻔하디뻔해서였을 뿐이다. 때문에 나는 채우수에게는 그 어떤 눈길도 주지 않은 채로 오른쪽 구석에서 엘리베이터가 다시 작동하기만을 조용히 기다렸다.

시계 초침 소리 사이로 그의 호흡이 거칠어지는 게 느껴졌다. 갑갑한 모양인지 채우수가 제 셔츠 단추를 두 개 정도 끌렀다. 담담한 척은 했지만 점점 더 부산스러워지는 그의 행동에 어쩐지 내가 더 초조해져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 소리가 엘리베이터를 가득 울리자 머쓱함에 흠, 목을 가다듬었다. 어쩐지 상황이 더없이 어색해졌다.

후우, 채우수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반사적으로 옆을 쳐다봤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평소 같았으면 모르는 척 그대로 눈동자를 굴려 다른 곳을 쳐다봤을 것이다.

여기서 미리 말해 두자면 채우수와 나, 우리 둘 사이에는 누구 하나 입 밖으로 내 본 적은 없지만 암묵적 규칙이 존재했다. 그것은 내가 채우수 팀에 발령받고 자연스레 만들어진 규칙으로 회사에서 사적으로는 절대 알은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제법 긴 시간을 지켜 온 것으로 봐서는 채우수나 나나 과거의 연을 굳이 언급할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 같다.

아무튼 우리가 갇힌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회사 소속이었으니 그 규칙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봐야 했다. 그러나 나 한연두가 누구인가. 누군가가 저마다 물고 태어난 금수저, 은수저를 자랑할 때 그 앞에서 당당하게 이타심을 품은 핏줄을 자랑하던 소방관의 딸이 아니던가.

수년 전 그날처럼 오지랖을 부리며 채우수의 호흡을 도와주는 것까진 아니어도 적어도 그의 심리적 안정에는 도움을 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몹쓸 자비로운 생각을 결론짓는 것보다 입술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이번에는…….”

채우수의 짙은 눈동자가 내 목소리에 반응하며 조금 흔들렸던 것도 같다. 아니, 어쩌면 내가 흔들려서 그렇게 보인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살짝 축이며 말을 덧붙였다.

“이번에는 휴대폰 배터리 나갈 걱정 안 해도 돼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채우수가 한쪽 눈썹을 비틀어 올리며 또 한 번 후우, 숨을 내뱉었다.

위로랍시고 뱉은 말이 과연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번에는’이라는 말이 우리가 억지로 꼭꼭 숨겨 두었던 지난 기억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나는 채우수의 하얗게 질린 얼굴로부터 시선을 내렸다. 그의 셔츠 아래 감추어진 탄탄한 가슴팍이 빠르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조금은 위험한 상태인 것도 같았다. 채우수가 밭은 숨을 내뱉으며 낮은 목소리를 쥐어짰다.

“이번에는, 후우…….”

엘리베이터 손잡이를 하늘에서 내린 생명줄처럼 붙든 그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그 손등을 따라 끌어 올린 시선 끝에 채우수의 얼굴이 걸렸다. 파리하게 질린 그의 낯빛에 내 마음이 요동쳤던 건, 인류애적인 접근이지 그 어떤 다른 마음도 없었다고 확신한다.

그는 다시 한번 숨을 가다듬고 거친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번에는 네 도움 같은 거, 필요 없어.”

누가 그때처럼 도와준댔나. 김칫국부터 마시는 채우수가 기가 차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나는 조금 화난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고 채우수는 그런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숨을 다시 들이켰다. 그러고는,

털썩.

채우수는 내쉰 숨에 그대로 제 큰 키를 내리며 쓰러졌다. 그것이 어제 그 모든 사건의 작고도 큰 발단이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일의 책임은 전적으로 채우수에게 있었다 그 말이다.

* * *

점심시간이 지나고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의도적으로 채우수를 피해 다녔다.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정보 센터에 갔다가 평가실에도 갔다가 일이란 일은 내가 다 하고 다니는 것처럼 회사 건물을 쏘다니며 채우수를 닮은 그림자조차 밟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물론 애초에 채우수를 닮은 그림자 같은 것은 우리 회사에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왜, 잘생긴 사람들은 그림자마저도 잘생겼다지 않던가. 비록 채우수가 내가 그리던 이상형처럼 조신하고 청순한 얼굴은 아닐지라도 재수 없는 성격만큼이나 재수 없이 잘생긴 얼굴은 멀리서 보더라도 한눈에 띌 만큼 높이 솟아 있었으니 그를 피해 다니는 것도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오후 시간을 빨빨거리며 돌아다닌 끝에 광복과도 같은 퇴근 시간을 맞이한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아주 태연한 표정으로 책상을 정리하고 가방을 손에 들었다. 그럼에도 일말의 양심이 존재했던지, 슬쩍 눈만 굴려서 채우수의 책상을 쳐다봤다.

뭐야, 없잖아.

잘못 봤나 싶어서 등을 뒤로 젖혀서 채우수의 자리를 훑었다. 정말 없다. 채우수 책상도 제 얼굴만큼이나 티 하나 없이 깔끔한 걸로 봐서 이건 틀림없이…….

“한 선임님, 벌써 퇴근하게요?”

고개를 쭉 뺀 채로 몸을 앞뒤로 흔들며 희한한 바운스를 타고 있자 옆자리 주재희 연구원이 의아한 눈길을 보내며 말을 붙여 왔다. 나는 놀란 눈을 가릴 생각도 없이 주재희에게 채우수 책상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네. 책임님은 벌써 퇴근하셨어요?”

“아까 조퇴하셨어요.”

“조퇴요? 책임님이요?”

“네, 책임님 몸이 안 좋은 것 같던데요.”

“아아…….”

조퇴를 했구나. 채우수가. 몸이 안 좋아서. 채우수가. 저녁 먹자고 할 땐 언제고. 하하, 그럴 줄 알았으면…….

내가 그렇게 피해 다니지 않아도 됐잖아! 누구 때문에 칠천 보 이상을 걸었는데. 어쩐지 억울한 마음이 비죽비죽 솟아났으나 지금 중요한 것은 채우수가 내 눈앞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단전에서부터 밀려드는 환희를 입술을 꾹꾹 눌러 가며 제어했다.

“한 선임님 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니에요?”

“제가요?”

내가 채우수를 너무 좋아한다고……? 세상이 뒤집어질 소리에 눈을 끔뻑대며 주재희를 쳐다보자 그가 그렇잖아도 작은 눈을 더 접으며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책임님 아프다니까 한 선임님 표정부터 달라졌잖아요.”

“아아.”

“이것 봐라. 부정하지도 않네.”

딱히 채우수가 아프다는 게 기분이 좋은 건 아니었지만, 아니 채우수가 아프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찌 됐든 저녁에 보자는 채우수의 말은 자동으로 취소되었으니 마음이 한결 편해진 건 사실이었다. 웃으며 놀려 대는 주재희에게 나는 긍정의 미소로 화답한 후 사무실을 나섰다. 오후 내내 가슴을 답답하게 짓누르며 신경 쓰이게 했던 말들도 이제야 흩어진 듯, 나는 발걸음을 사뿐사뿐 가볍게 놀리며 건물 밖을 빠져나왔다.

채우수 제가 나랑 저녁에 따로 봐서 뭐 어쩌겠다고.

어제 일로 채우수는 남은 얘기가 있어 보였지만 나는 아니었다. 이미 벌어진 일 굳이 되짚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제 일 같은 건 잠깐의 해프닝쯤으로 넘길 수 있을 만큼 서른을 넘긴 성인 남녀가…….

아니, 이렇게 말하니까 내가 채우수와 섹스를 했다거나 그런 일이 벌어진 것만 같은데 꼭 그런…… 상황까지 간 건 아니었다. 그런 일은 차라리 옆자리 주재희와 일어났으면 일어났음 직한 일이지, 물론 주재희와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면 나는 사표를 던져 버리기 전에 한강에 먼저 뛰어들어 수온 체크를 할 것이지만, 채우수와 나 사이에선 절대 벌어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냥 우리는, 아니 나는 약간의 이성을 잃었을 뿐이고 채우수는 단지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도 너무 훌륭한…….

빠앙.

깜짝이야, 클랙슨 소리와 함께 내 옆으로 차가 멈추어 섰다. 흠칫 놀라 굳었던 어깨를 다시 펴면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다소 신경질적인 클랙슨 소리가 한 번 더 울리더니 조수석 창문이 내려갔다.

“한 선임님.”

차라리 내가 김씨나 이씨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흔하디흔한 성이었다면 날 부르는 소리인지 인식도 못 하고 모르는 척 지나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나는 귀에 익숙한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빠르게 인식했음에도 바보같이 목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려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채, 책임님?”

멍청하게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굳이 되물어 확인까지 해 버렸고. 채우수는 그렇게 운전석에서 조수석으로 몸을 기울이며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표정으로 길에 서 있는 날 마주하며 소리쳤다.

“타요.”

“왜…… 요?”

“뭐가 왜요야. 저녁 먹어야지.”

채우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데서 기인한 기쁨의 감정이 공든 탑이 무너지듯 삽시간에 무너져 내렸다. 아프다며. 조퇴했다며! 온갖 의문점은 오히려 입술을 얼어붙게 만들었고, 말도 안 되는 핑곗거리들은 내 발목을 붙잡았다.

얼마 전 목돈을 털어 큰아빠 잇몸에 박아 드린 임플란트처럼 땅에 뿌리박힌 채 가만히 서 있자 채우수가 답답했는지 차에서 내렸다. 몇 걸음 만에 조수석 앞에 선 그가 문을 열고 내게 말했다.

“뭐 해요, 타라니까.”

“다음에 먹으면 안 될까요. 제가 오늘은 속이 좀…….”

“저녁은 넘기고 얘기만 하죠, 그럼.”

“책임님 제가, 큼큼, 갑자기 목감기에 걸려서…….”

명랑했던 목소리가 채우수의 눈치를 살피는 듯 눈치껏 저절로 기어들어 갔다.

“크흠, 목소리가 제대로…….”

“한연두 선임.”

“……안 나와서 얘기를 못.”

“회사 앞이야. 보는 사람도 많은데 그냥 좀 타지?”

채우수가 반듯하게 정돈된 이목구비를 찌푸리며 조수석 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 나는 저 표정과 동작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다. 지금 채우수는 짜증이 극에 달한 상태로, 내가 저보다 전자기학 성적을 더 잘 받았을 때와도 같은 표정이다.

짙은 눈썹을 끌어 올리며 다시금 제 차를 턱짓으로 가리키는 협박과도 다름없는 그 동작에 나는 결국 달리 뚜렷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그의 차에 몸을 구겨 넣을 수밖에 없었다.

뭐, 그렇게 원한다면 까짓것 얘기하면 되지. 누구 손해라고.

차 안에 들어서자 코끝에 채우수의 향수 냄새가 더욱더 짙어졌다. 어쩐지 더 아득해진 정신을 겨우 부여잡으며 운전석에 들어선 채우수를 곁눈질로만 쳐다봤던 건 절대로 졸아서가 아니다. 나는 가늘어진 목소리를 최대한 정중하게 내보냈다.

“책임님, 그럼 여기서 얘기하고 끝내면 안 될까요.”

“…….”

“우리가 그렇게까지 길게 할 말이 남지도 않았고 또…….”

“…….”

“어제 일 때문이라면 굳이 다시 꺼내 봤자…….”

“한연두.”

원인 모를 긴장감에 짓씹은 아랫입술이 채우수가 부른 내 이름 석 자에 반응하며 툭 튕겨 나왔고,

“한마디만 더 하면 성추행으로 신고해 버릴 줄 알아.”

채우수가 그다음으로 내뱉은 말에 눈알이 튀어나올 듯 졸도할 지경까지 간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 * *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고 넘어가자. 채우수의 호흡 곤란으로 인한 기절이 어제 일의 발단이었다면 전개는 내 몫이라고 봐도 좋다. 불행히도 그건 사실이었으니까.

나는 기절한 채우수를 어쩌지도 못하고 가만히 내버려 둔 상태로 때마침 도착한 구조대원과 엘리베이터 관리 업체 직원을 맞이했다. 그때 그들을 포함한 몇몇 구경꾼들이 날 보던 표정이 어찌나 살벌했던지. 빠르게 정신을 차린 채우수가 아니었다면 나는 사람이 죽어가는데 멀뚱히 지켜만 보고 있는 소시오패스라고 소문이 났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잠깐 기절한 남자를 붙들고 그때처럼 주제넘게 또 인공호흡 따위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남자……. 이 와중에 성별을 따져서 뭐가 중요한가 싶지만 채우수와 나 사이에선 중요한 논점이 될 수도 있는 부분이다.

아무튼 나는 경험으로 축적된 채우수에 대한 지식으로 그에게 평균치 이상의 친절을 베풀지 않았던 것이지 절대로 내가 못돼 처먹어서 채우수의 죽음을 기다렸던 것은 아니다. 그저 채우수가 죽더라도 내가 없는 곳에서 알아서 죽길 바랐다면 몰라도.

그렇게 나는 회초리처럼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채우수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와서는 얼떨결에 그의 병원 길에 동행했다. 그러나 채우수가 누구던가. 그는 제 상태는 누구보다도 양호하다며, 물론 이목구비만 보자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제일 양호했던 건 사실이지만, 곧 죽어도 병원에는 갈 수 없다고 우겨 댔다.

정말이지 채우수의 고집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일찌감치 그 파탄 난 인성을 알고 있던 나는 빠르게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채우수의 주장, ‘저는 지극히 멀쩡합니다’에 맞장구를 쳐 줄 수밖에 없었다. 정신이 멀쩡하지 않아 보이는 여자의 동조는 어쩐지 오해만 산 것 같았으나 병원으로 가던 채우수를 회사 일을 핑계 삼아 구원해 줬다는 데에는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그러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 또한 문제였던 것이다. 채우수가 기절을 했든 말든, 병원을 싫어하든 말든 내가 알 게 뭐란 말인가. 그러려니 하고 나는 곧장 집으로 갔으면 그만일 것을. 왜 굳이 병원까지 따라가려 했으며 그렇게 병원에서 벗어난 채우수와 그의 집까지 동행하는 불상사를 저질렀는지 나조차도 어제의 나를 이해할 수가 없다.

알고 보면 채우수가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얼굴이라도 되는 것일까. 어제의 일을 되새김질하던 나는 얼토당토않은 추론을 애써 입증해 보려고 운전석을 곁눈질했다.

채우수와 보호 본능이라니……! 이 무슨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소리란 말인가. 그는 제가 누구를 지켜 줬으면 지켜 줬지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 외모는 절대 아니다. 문짝만 한 키에 농구 동아리 출신답게 운동복 매장에 떡하니 놓인 마네킹 같은 몸을 가진 자가 채우수 아니던가.

그렇다고 애초에 채우수가 누군가를 지켜 줄 위인도 아니겠지만.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채우수는 저를 찌른 사람을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피를 모조리 뽑아 버릴 성격인데 내가 이런 인간에게 보호 본능을 느꼈을 리가 없다.

보호 본능이 아니라면…… 결국은 그러니까 다 내가 너무 착해서 그런 거지 뭐. 예나 지금이나 채우수를 도와줬던 것도 같은 과 후배로서의 우정, 같은 팀원으로서의 동료애, 인류애 뭐 그런 것이다. 어디까지나 인간 대 인간으로. 남자와 여자가 아닌.

채우수를 이성적으로 느껴서도 안 되는 거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는 말도 이제 먹는 주체가 누군지 확실히 정해 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채우수가 제아무리 보기 좋아 봤자 어차피 내가 여자인 이상 그림의 떡일 텐데.

내가 지은 죄를 굳이 찾아야 한다면 못 먹는 감 한번 찔러나 본 죄밖에 없는데. 그랬다고 성추행이라니, 신고라니. 나는 채우수가 내뱉은 말이 그저 어이가 없어서 그가 이끈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꾹 다물었다.

“내려.”

못 먹는 감의 떫은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피니 복요리 전문이라는 간판의 복어 한 마리가 가련한 내 처지를 비웃고 있었다.

“난 저녁 안 먹겠다고 했는데요.”

“먹지 마, 그럼. 넌 내가 먹는 거 구경이나 해.”

그리하여 나는 채우수와 마주 본 채로 미나리와 팽이버섯이 듬뿍 올라간 맑은 복국 두 그릇을 맞이했다.

“내가 진짜로 속이 안 좋았는데 선배가 사 준다니까 성의껏 먹는 거예요.”

말 같지도 않은 변명까지 덧붙여 가면서.

한 입으로 두말한대도 채우수 앞에서 내세울 자존심 같은 것은 딱히 없었다. 게다가 은복도 아닌 참복인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고추냉이를 간장에 풀며 입맛을 다시니 채우수가 옅은 한숨을 내쉬면서 식초를 건넸다.

건네받은 식초를 몇 방울 넣고는 복국을 숟가락으로 휘휘 젓자 뜨거운 김이 얼굴을 감싸왔다. 굳었던 표정도 이제야 느른하게 풀렸다. 오후 내내 채우수를 피하느라 에너지 소모를 많이 한 탓인지 허기진 배는 따뜻한 국물을 생명수처럼 받아들였고 우리는 정말 저녁만 먹으러 온 사람들처럼 전투적으로 수저를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얘기를 해 보자고 만난 게 아니었던가. 성의껏 먹는다는 게 너무 지나쳤나, 나는 어색해진 공기를 깨 보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입을 열었다.

“책임님 아까 조퇴했다던데요.”

“어.”

“몸 안 좋은 것 같다고 하던데요, 주 선임님이.”

“맞아. 안 좋아.”

복 살에 미나리를 칭칭 감아서 초장에 찍다가 젓가락질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행간을 못 읽는 사람인가. 조퇴했다는 사람이 왜 여기 있냐는 내 말뜻을 알아차리기가 그리 어려웠을까.

“근데 아픈 몸으로 왜 굳이 나랑 저녁을?”

“저녁 먹기로 약속했잖아.”

채우수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으로 입가에 묻은 초장이나 닦으라는 듯 휴지를 건넸다. 약속은 제멋대로 정한 주제에. 날 위해 제 아픈 몸을 희생한 양 굴어 댄다. 참 나 어이가 없어서. 받아 든 휴지로 입가를 대충 닦고는 가는눈으로 채우수를 쳐다봤다.

“난 선배랑 그런 약속 한 적 없어요.”

“하나만 해. 선배랬다가 책임님이랬다가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진짜 왔다 갔다 하는 게 누군데?”

“누군데.”

……나란 말인가? 조금 벙벙한 기분으로 말을 이었다.

“책임님이 갑자기 친하게 구는 거 무섭고 이상해요.”

“친하게 군다는 건 한연두 선임님 비약이고.”

“선배랑 둘이 밥 먹는 거 불편하다구요.”

“알아. 너 불편하게 하려고 같이 먹는 거니까.”

얼핏 들으면 상당한 배려라도 해 주는 것만 같아서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채우수의 말을 곱씹었다. 재수 없는 말을 친절하게 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그리고 불편하다기엔 네가 나보다 더 많이 먹은 거 알아?”

“……비싼 거 남기면 아깝잖아요.”

“비싼 거 더 시켜 드려요, 한 선임님?”

“왜 그래요, 진짜. 내가 선배한테 뭐 잘못했어요?”

따지자면 잘못을 하긴 했기에 그를 당당히 노려보던 눈동자가 테이블 밑으로 또르르 자유 낙하했다. 반성이라도 하는 양 갈피를 잃고 방황하던 눈동자가 어젯밤의 일들을 추억이라도 할 것처럼 길게 포물선을 그렸다.

어제, 그러니까 문제의 어젯밤. 이제껏 뭐 대단한 일이라도 일어난 듯 굴었지만 팩트는 아주 간결하다.

나는 채우수와 같이 저녁을 먹었다.

“네가 발뺌한다고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지.”

조금의 정보를 더 추가하자면 나는 채우수의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발뺌한 적은 없어요.”

조금 더 추가하자면 나는 채우수의 집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소주까지 마셨다. 물론 나만 마셨고, 나만 취했고.

“이렇게 다시 겸상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아.”

그러고는 채우수의 집에서 잠들었다. 근데 그래서 뭐. 그렇다고 내가 주정을 부린 것도 아닌데. 얌전히 잠들었을 뿐인데. 게다가 잠에서 깨서 내 발(네 발이 아니라 내 발이 확실하다)로 멀쩡하게 우리 집까지 찾아갔는데.

물론 채우수가 말하고자 하는 그 일들은 채우수의 집에서 눈을 떠서 현관문을 열기 전까지의 그 시간 동안 벌어진 일들이지만은 말이다.

다시 말해서 채우수는 벗었고, 나는 만져 버린 그 잠깐의 일들…….

테이블에 가려 보이지도 않건만 어쩐지 채우수의 바지춤으로 향하는 시선을 애써 끌어 올리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어제 책임님 집에서 있었던 그 사고에 대해서 말하는 거라면-.”

“사고?”

“-가 아니면 돌발 사건?”

“허, 계획형 범죄겠지.”

범죄, 범죄라니……! 그렇게 따지면 채우수 저도 썩 예의 바른 습관을 가진 것도 아닌 주제에.

“그렇다고 성추행이라는 건 말도 안 돼요.”

“당사자 동의 없이 만졌잖아.”

“만지지…… 않았어요. 그냥 손이 스쳤-.”

“헛소리하지 마. 네 손은 충분히 의도적이었고 심지어 느끼기까지 했어.”

“느끼진 않았어요!”

그저 아주 살짝 감탄만 했을 뿐인데! 뒷말은 차마 내뱉지도 못하고 삼키고만 있자 채우수가 고개를 비뚜름히 기울이며 더없이 차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나는 제대로 느꼈어.”

“뭘요?”

“너 때문에 아주 제대로 느꼈다고.”

“그러니까 뭘?”

“수치심.”

“아아.”

느꼈다기엔, 그러니까 수치심을 느꼈다기엔 채우수는 지나치게 태연한 얼굴이다. 웃기지도 않지. 그러게 누가 샤워하고 다 벗고 나오랬나. 그곳이 채우수의 집이었고, 나는 그의 집에서 술 먹고 뻗어 버렸다는 것에 적지 않은 부채감이 쌓인 건 사실이지만.

자기 집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샤워를 하고 반나체로 나왔던 채우수에게 어떻게든 책임을 전가해 보려던 어긋난 마음이 내 입꼬리를 그릇되게 당겼다.

“……그러게 누가 그런 걸 달고 있으래요?”

세상에. 내가 말하고도 남사스럽기 짝이 없어서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눈만 깜빡대는 와중에 ‘그런 걸’ 복기라도 하려는 듯 시선이 자꾸만 채우수의 배꼽 아래로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도 남다른 존재감을 자랑하던 ‘그런 것’이 생각나자 귓등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한연두, 너 어딜 쳐다봐.”

정작 ‘그런 걸’ 달고 있던 남자는 딱히 부끄럽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는 눈썹만 미세하게 비틀면서 내 시선을 끌어 올리려는 듯 젓가락으로 테이블을 쾅 두드렸다.

이쯤에서 시간을 돌려 어젯밤 내 행동에 대한 변호를 해 본다.

혼자 사는 남자 집에, 그것도 채우수의 집까지 스스로 들어갔던 건 빌어먹을 책임감 때문이었다. 아무리 내가 채우수를 싫어한다고는 해도 눈앞에서 기절했던 사람을 외면하기란 쉽지 않았을뿐더러…… 놀랍게도 우리는 아랫집 윗집에 사는 사이였으니 그저 겸사겸사 그의 집까지 책임지고 데려다줬을 뿐이다.

그렇게 이웃사촌을 향한 나의 선량한 마음은 농도 짙은 오지랖으로 변질되어 집에 있던 인스턴트 전복죽을 아랫집 남자, 바로 그 채우수에게 전달하게끔 만들었는데 속 깊은 내 마음을 보고 채우수는 제집 현관에서 뭐라고 했더라.

“쓸데없이 착한 척하지 말고 이왕 내려온 거 저녁이나 먹고 가.”라고 했던가.

정말이지 착한 척은 누가 하고 있었던 건지. 그리하여 나는 어디까지나 착한 마음으로 채우수의 집에 들어가서 그가 차린 저녁을 얻어먹었고, 소주를 곁들였으며, 훅 올라오는 취기에 그만 소파에서 잠들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밤 1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앞서 말했듯 채우수와 나는 같은 아파트, 같은 라인에서 그의 집 천장을 내 집 바닥으로 두고 살고 있었다. 집 구조가 똑같았던 탓에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채우수의 집이라는 걸 채 인식하지 못한 상태로 화장실을 찾았을 뿐, 절대로 어떤 불순한 의도를 가진 건 아니었다.

그렇게 화장실 문을 열었을 때 막 씻고 나온 채우수를 맞닥뜨렸고, 나는 아주 조금 놀란 마음에 채우수를 밀었다. 그 과정에서 채우수의 샤워 가운이 그만 시원하게 개방되었는데…… 그의 가슴팍을 짚었던 손에 힘이 풀리면서 ‘그런 것’으로 스치듯 떨어진 손이 느껴 버린 감촉에 ‘우와’ 하고 탄성을 내뱉었던 건 무조건 반사와도 같았다.

그러니까 채우수는 벗었고 나는 무심결에 만져 버린 그 사건은 어디까지나 채우수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를테면,

“미안해요. 변명하자면 나도 그렇게 큰…… 그런 건 처음 봐서.”

그냥 보기에도 확연히 남다른 자태를 자랑하던 ‘그런 것’을 달고 태어난 죄 같은, 그리고 그게 절대 내 몫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그치만 어제도 말했다시피 그런…… 걸로 절대 선배한테 이성적으로 접근할 생각은 없어요. 그래서도 안 될 일이고. 어차피 책임님은 여자한테는 관심이 전혀 없으니까…….”

“누가 그래?”

채우수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제 오른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화가 난 것 같다. 그럴 만도 하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일종의 아웃팅 같은 거니까.

“음……. 아무리 그래도 그런 무거운 얘기를 내 입으로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렇다고 내가 어떤…… 소수에 대한 편견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구요.”

그렇다. 채우수는.

“선배도 어제 일에 대해선 그냥 없던 걸로 넘기는 게 피차 편할…….”

“한연두, 너 어제부터 대체 무슨 헛소리야.”

그러니까 채우수는 게이다. 내가 알기로는 확실히 그러했다. 고로 내가 그의 벗은 몸을 좀 봤기로서니, 조금 스치듯 만졌기로서니 우리 사이엔 그 어떤 감정도 안 생길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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