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아빠는 명절이 피곤하다. (完)
“우리 세화. 여기서 잘 잘 수 있지?"
나은이 세화를 꼬옥 안아준다.
“네. 근데 졸려요...”
밥을 많이 먹은 탓일까 세화는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잠이 솔솔 왔다.
“세호도 여기 와서 눕자."
낮에 점심을 먹은 이후 할아버지와 온종일 캐치볼을 하다 돌아온 세호는 기진맥진한 상태.
그런 상태로 저녁밥까지 먹고 씻었으니 세호 또한 눈이 감기기 일보직전이었다.
"네엥."
나란히 이불 위에 누운 쌍둥이.
나은은 손을 뻗어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할아버지네서 오랜만에 잔다. 그치."
“맞아요... 할아버지랑 캐치볼 재밌어.....
반쯤 감긴 눈으로 칭얼대는 세호.
아들의 모습이 엄마는 마냥 귀엽기만 했다.
“세화도 오늘 재밌었어?"
“네. 이모부가 캐러멜 사주셔서 좋았어요."
“캐러멜 너무 많이 먹으면 이 상해. 세화야.”
딸아이는 엄마의 손을 꼬옥 잡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두 개만 먹었어요..."
“엄마도 내일 하나 줄 거지?"
“아빠도 줄 거예요.”
"오구. 착해."
항상 제 먹을 것만 챙기는 세호와 달리 세화는 타인을 챙겨주는 것이 몸에 베어 있는 아이였다.
참 둘이 반반씩만 섞였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
나은은 그렇게 두 아이의 숨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방을 나설 수 있었다.
"동서 ~ 잔 받아~"
"좋습니다! 형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모두 주무시러 들어가신 후 남겨진 남자들은 식탁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어우... 취한다~"
“오빠. 내일 운전할 건 생각하면서 마셔야 되는거 알죠?”
나은이 의자를 당기며 민호에게 경고했다.
“아. 그럼. 적당히 마셔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민호는 일단 마시고 생각하자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내일도 휴일이었는지라 그렇게 급할 것은 없었다.
“형님. 제가 요즘도 형님 소설도 한 편씩 다 소장해서 보고 계신 거 아시나요?"
취기가 오른 재혁이 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민호는 또다시 소주가 마려워졌다.
“아... 뭐... 그런 걸 사서 읽고 그래. 민망하게.”
“에이. 형님도 아시잖습니까. 저희 부부 한겨울 작가님 골수팬인거.”
"보고 싶으면 그냥 말해. 메일로 보내줄 테니까.”
민호와 나은의 부탁으로 부모님이 계실 때나 아이들 앞에서는 민호의 작업 이야기를 자제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두 부부만 남아있는 야심한 밤.
한겨울 작가라는 것을 알고 난 이후로부터 재혁은 언제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형님에 대한 존경을 품고 있었다.
그야 그럴 수 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자신과 아내를 만나게 해준 은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를 감금했습니다]라는 소설이 없었더라면 지금 두 사람은 영원히 남이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이제 너희도 아이 생기니까 그런 거 그만 좋아하라구.”
민호가 난처하다는 듯이 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런 취미가 있다한들 자신보다는 나올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본인은 매일 작업을 해야만 하는 입장인 반면, 독자들은 막 숨어서 몇 시간씩 일을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근데 오빠 신작 내가 알기로는 제목이...
나은은 요놈봐라 같은 얼굴로 재혁을 바라보았다.
"[결혼 도장은 신중하게]였던 거 같은데...”
옆에 앉아있던 나연이 미묘한 표정으로 재혁을 바라본다.
"...자기야."
결혼까지 한 사이였음에도 나연이 저런 톤으로 저를 부르면 재혁은 둥골이 오싹해지고는 했다.
"아... 웅....?"
"몰입하면서 봤어? 막 그때 신중하게 찍을 걸... 그런 생각하면서?"
빼도박도 못하는 상황이 찾아왔다.
몰입을 안 하고 대충 봤다고 하기에는 은인님의 체면이.
그렇다고 과몰입해서 진짜 재밌게 봤다고 하기에는 아내의 철퇴가 기다리고 있었다.
난처하다는 눈빛으로 민호를 바라보자 민호는 괜찮다는 듯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그런 건 아니고 간간이 봤어. 간간이. 역시 형님 베테랑이라 그러신지 글올 잘 쓰시더라고. 하하하...
“너희도 이제 절약해야지. 그런데다 돈 쓰지 말고 아껴서 아기 장난감이나 하나 더 사주고 그래.”
재혁의 입장을 십분 이해하는 민호는 그의 대처에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도 나은의 말이라면 꼼짝을 하지 못했으니 신혼인 재혁은 얼마나 난처하겠는가.
한창 눈치 볼 시기였다.
그래... 나를 팔아! 나를 팔아서 살아남아라! 동서!
“언니 요즘도 그림 그려?”
“나는 오빠가 부탁하는 거 아니면 이제 잘 안 그리지."
애들 둘 키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찬 나은이었다.
하물며 아이들도 보통 아이들이랴.
하루가 멀다 하고 사건 사고에 휘말리는 두 아이들을 키우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언니 지금도 의뢰 들어오는 것 많지 않아?"
“문의 받는다고 하면 들어오기는 하는데, 그냥 집안일 하는 것도 바빠서. 너도 이제 애 생기면 바로 이해할 걸.”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돈이면 돈. 시간이면 시간.
아이들을 키운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자신을 위한 생활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일과가 반복되고 있었다.
“그래도 남편이 나는 많이 도와주는 편이라. 흐.”
나연이 재혁의 팔에 팔짱을 꼈다.
가사 노동은 오히려 재혁이 더 잘하는 편이었다.
실제로 요리 실력도 재혁이 위였으며, 집안 청소나 정리도 재혁이 대부분 하는 편이었다.
나연이 게을러서 안 한다기보다는 재혁은 제 손으로 깔끔하게 해두는 것이 더 마음이 편했기에 먼저 나서서 집안일을 하고는 했다.
“부럽네. 그건."
나은이 살짝 눈치를 주듯 민호를 올려다보자 민호는 모르는 척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사랑한다. 한나은."
정말이지....
나은이 민호의 대처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참 한결같은 남자였다.
“괜찮아요. 그래도 뭐 내가 부탁하는 건 다 해주잖아요.”
아침마다 애들 태우고 왔다갔다 해주는 것이 어디란 말인가.
출근시간에 낑겨서 같이 그러고 있는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었다.
“근데 동서 요즘도 내 소설 보는 거 보면 좀 쌓여있긴 한가봐?”
나은이 임신했을 때를 떠올리면 민호는 참 기나긴 인고의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같이 섹스를 해주던 여자친구가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는 건 무척 괴로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아뇨. 저보다는 나연이가... 악!"
민호와 재혁은 음주를 한 상태였지만 나연은 맨정신이었다.
재혁의 정수리에 꿀밤을 내리꽂는 나연.
“아주 그냥 형부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다. 응?"
나은은 그 모습을 보며 웃기다는 듯이 키독였다.
“아~ 뭐. 나도 이해하지~ 그때 오빠 완전 시무룩해져갖고 내가 막.”
“야야. 한나은 너는 뭔 소리를 하려고 그래.”
비단 입을 틀어막아야 하는 것은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너. 지금 얘네 앞에서 오나홀로 대딸해준 이야기 뭐 그런 거 할 생각은 아니지? 너.
숨겨야할 것이 서로 너무 많은 부부들이었다.
슬슬 사온 술도 안주들도 바닥나자 두 부부는 식탁을 정리하고는 잘 준비에 들어갔다.
나연과 재혁은 한 방에서 민호와 나은이 마루에서 자는 걸로 합의를 봤다.
내년부터 나연이네 아이까지 찾아온다면 다 같이 묵고 가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나은은 양치를 하며 내년에는 그냥 당일로 왔다 가는 것을 건의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잠옷으로 갈아입은 나은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어."
이미 이불 위에 누워 있는 민호가 피로 가득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은은 쪼르르 이불 앞으로 다가가다니 그대로 민호의 품 안으로 쏙 들어갔다.
“나 술 마셔서 몸 뜨거워."
덥다는 듯이 떨어지라고 눈치를 줬지만 나은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쫌만 이러고 있죠. 그러지 말고.”
“어머님이 보면 어떡하려고 이렇게 붙어있어.”
“부부끼리 끌어안고 자는 게 뭐 이상하다고 그래요.”
"그럼 이상하게 만든다.”
민호가 나은의 가슴 위에 손을 얹자 나은은 오히려 더 장난기가 돌았다.
"하앙~ 오빠. 거기는~"
민호의 귀에 대고 속삭인 것이었기에 남에게는 들릴 리가 없었지만 민호는 식은땀을 삐질 홀렸다.
"하지 마라."
“오빠가 가슴 만져놓고 나한테 하지마라 하는 게 이치에 맞아요?”
“내가 미안하니까 하지 마라.”
“흑흑. 애정이 식었어... 연애할 때는 막 학생들 오가는 모형 제작실에서도 해주고 그랬는데... 흑...”
나은이 우는 시늉을 하며 슬퍼하는 척을 하자 민호는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
"야. 한나은."
민호의 커다란 손이 이불 안쪽에서 은밀하게 움직인다.
종착지는 남들이 절대 봐서는 안 되는 그곳.
나은의 눈이 커다랗게 확대되었다.
“오... 오빠...?"
“집에서 울면서 빌 때까지 박아줄 테니까...
중지가 보지 둔턱을 스윽 아래에서 위로 훑고 올라간다.
나은의 허리가 반사적으로 살짝 올라갔다.
"제발 오늘은 이제 그만 까불어."
"...헤으응."
진짜 명절은 언제나 너무 피곤하다는 생각을 하며 민호는 나은올 끌어안았다.
그렇게 비밀 많은 일족의 밤은 깊어져만 갔다.
-아빠는 명절이 피곤하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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