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아빠는 명절이 피곤하다.
세화는 최근 수진의 행보에 대해 굉장히 어이가 없었다.
강아지.
친구라고 생각했던 수진은 더 이상 친구가 아니었다.
거짓말 안 하고 세호의 강아지라는 표현이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어딜 가든 세호를 쫄래쫄래 따라다녔으며, 세호가 없으면 불안한 얼굴로 자신을 찾아와 그의 행방을 묻고는 했다.
압만 쌍둥이라고 하지만 학교 안에서 사라진 세호가 어디 갔는지 내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가장 가관이었던 건...
[세화야....]
[응?]
[이거 좀 그런 질문일 수도 있기는 한데...]
[뭔데?]
[나 세호랑 너무 뽀뽀가 하고 싶어!]
아. 정말이지.
고민이 있다고 해서 진지하게 임해주려 했던 자신이 바보였다는 생각을 거듭한 세화였다.
"야. 나 축구도 좋아하거든?"
세호는 세화의 태클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그녀를 한껏 노려보았다.
“아하하. 싸우지 말고. 세화는 뭐 재밌는 거 없니?”
재혁이 곤란하다는 듯 두 사람을 중재하자 세화가 화제를 돌렸다.
“저는 요즘 그림 그리는게 좋아요."
“진짜? 무슨 그럼?"
세호는 이때다 싶어 바로 쌍둥이를 응징했다.
“재 3학년인데 아직도 만날 공주 그림 같은 거 그려요! 이모부!"
"야!"
자기들끼리 티격태격하는 쌍둥이들.
재혁은 애들이 귀여우면서도 이렇게 5분이 긴 시간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어우... 이게 곧 나랑 나연이의 미래인가 싶었다.
마트에 도착한 세 사람.
재혁은 가장 먼저 부탁받았던 국간장을 집어든 후로 간식 코너 앞에 섰다.
“너희 먹고 싶은 거 편하게 골라봐. 이모부가 다 사줄게.”
바로 감자칩을 집어 드는 세호와 달리 매대를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세화.
재혁이 허리를 숙여 조카와 눈높이를 맞췄다.
“세화. 먹고 싶은 게 없어?"
“아뇨. 이거랑 이거 중에 고민하고 있어요."
세화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딸기맛 젤리와 자그마한 박스 안에 담겨져 있는 캬라멜.
재혁은 망설임 없이 두 개를 모두 다 집어서 장바구니에 집어 넣었다.
"다 먹으면 되지! 왜 고민하고 있어!"
"오오! 역시 이모부! 통이 크시군요!"
옆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빠도 말해줬어요! 뭐 해줄 때는 하나씩 주지 말고 시원하게 다 주라고.”
물론 이럴 때 쓰라고 알려준 말은 아니었지만 비하인드 스토리를 모르는 재혁은 웃으며 그 말이 맞다며 수긍해주었다.
“맞지. 이모부 그래도 너희 과자 사줄 정도는 된다! 가자!"
계산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상차림은 거의 끝나가는 분위기였다.
"고생했어. 자기야."
나연이 재혁에게 미안하다는 듯 웃어주자 재혁은 전혀 괜찮다고 대답을 하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뜨거!"
"오빠 괜찮아요?"
전을 부치고 난 후의 정리를 돕고 있던 민호의 입에서 곡소리가 났다.
“아... 이거 왜 이렇게 뜨거운 건데."
“...조금 전까지 전 구운 자리니까?"
나은의 대답에 민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아내를 바라보았다.
“야. 그걸 내가 모르겠니?”
“손 내밀어 봐요. 다쳤으면 가서 연고라도 발라주게.”
다행이 그렇게 심하게 부어오른 것은 아니었는지라 차가운 물에 닦아낸 민호는 재혁과 교대나 하라며 다시 거실로 퇴출당했다.
“이제 슬슬 차례 지내야지."
할아버지의 말씀에 아이들은 티비를 껐고 가족은 모두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그래... 다들 와서들 서라.”
그리 좁은 편이 아니었지만 이제 식구가 들어나자 제법 넓은 마루는 사람이 가득 찬 느낌이 들었다.
“다들 절."
아직 관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아이들은 어른들이 절하는 타이밍에 맞춰 함께 허리를 숙였다.
"자. 이제 끝.”
"세호야. 세화야. 그릇 나르는 거 엄마 도와드려.”
“네!”
아이들은 분주하게 상을 정리했으며 가족은 다같이 식사를 하기 위한 준비에 힘썼다.
"잘 먹겠습니다!"
상 앞에 앉은 세호는 눈을 크게 뜨고 숟가락을 꽈악 쥐었다.
진수성찬.
물론 나은이 언제나 맛있는 음식을 해주기는 했지만 이렇게 많은 메뉴를 먹을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할아버지가 숟가락을 드는 것을 확인한 세호가 매섭게 갈비찜에 달려든다.
"우움~~ 이 맛이지~~"
세호는 할아버지 댁에 와서 먹는 갈비찜이 너무 좋았다.
반면 세화는 나물과 잡채를 가져와서 조금씩 덜어먹고 있었다.
고기반찬만 탐내는 것이 아니라 오물오물 이런저런 맛을 보는 것은 세화도 즐기는 편이었다.
“이 서방 요즘 어때. 일은 잘 되고 있어?"
장인어른이 근황 토크를 시작하려는 낌새를 보이자 민호는 바로 물을 한 잔 쭉 들이켰다.
“저야 뭐 비슷하죠."
물론 지금 쓰고 있는 소설도 수익이 있기는 했지만 주된 수입원은 여태 써놓은 구작들과 2차 창작물들.
비슷하다는 말은 그냥 그게 제일 쉽게 넘어갈 수 있는 표현이라 차용한 것이었다.
“참 이 서방도 독해. 아직까지 펄명도 안 알려주고 말이야.”
“아빠. 애들 아빠가 그 이야기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왜 자꾸 물어봐요.”
이미 피곤한 상태일 텐데 민호에게 더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았던 나은이 제지에 나섰다.
“아니. 그냥 근황 정도는 궁금할 수 있잖아.”
"필병 이야기 꺼내지 마세요.”
단호하게 경고하는 나은.
옆에서 듣고 있던 세화가 엄마의 옷깃을 붙잡았다.
“엄마 필명이 뭐에요?"
“아빠가 쓰는 또다른 작가 이름. 작가 ID라고 해야 할까.”
이 정경을 지켜보던 나연 부부는 난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한겨울 작가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재혁이 제대한 이후의 일이었다.
그냥 스쳐지나가는 인연이 아니라 두 사람이 진지하게 미래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민호는 자신의 정체를 공개하기로 마음을 굳혔었다.
물론 결과는 대참사.
나연과 재혁은 배신감과 감사함에 치를 떨었다.
특히 나연은 한동안 나은과 말도 하지 않을 정도로 삐쳐 있었다.
어떻게 가족인 자신에게까지 그 중대 사항을 숨길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자신이 [그녀를 감금했습니다] 팬이었다고 솔직하게 고백까지 했거늘.
“아빠. 그러지 말고 내 남편 걱정이나 좀 해줘요.”
나연이 가족으로 신규 등록된 재혁을 통해 관심을 분산시켰다.
"최서방이야 근데 워낙 싹싹하니까.”
“아빠. 지금 우리 오빠는 안 싹싹하다는 거예요?"
괜히 민호가 무시당한 거 같아서 눈살을 찌푸리는 나은.
"아니. 그게 아니라 성격이 좀 다르다는 거지. 성격이.."
이건 솔직히 민호도 인정하는 바였다.
동서는 학생때 처음 봤을 때부터 자신과는 완전 다른 스타일이었다.
귀찮은 일도 도맡아서 하고, 계획도 열심히 짜고, 심지어 주말에도 아침 8시에 일어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진심으로 혀를 내둘렀었다.
나은의 마음이 고맙기는 했지만 장인어른의 말에는 틀림이 없었다.
“동서도 이제 회사 생활한지 얼마나 지났지?"
민호가 됐다는 식으로 나은의 허벅지를 보이지 않게 두드리고는 웃으며 물었다.
"저 이제 3년차입니다."
기어코 대기업을 고집했던 재혁은 제법 오랜 취준 기간을 거쳐 28살에 입사할 수 있었다.
높은 경쟁률을 뚫었다는 소식에 나연과 가족들은 진심으로 축하를 전해줬었다.
“오오... 이제 완전 신입은 아니네?"
민호가 재혁을 띄워주자 재혁은 칭찬이 머쓱하다는 듯 머리를 긁었다.
“그렇기는 한데, 아직도 만날 눈칫밥 먹고 그래요. 워낙 위에 사람이 많아서요.”
“또 기다리면 금방 올라가겠지."
사실 조언을 해주고 싶어도 민호는 회사 생활 경력이 없는 몸.
소셜올 쓰기 위해 드라마나 소셜 등에서 여러 장면들을 봤을 뿐이지, 자신이 겪어보지는 못한 필드였다.
물론 잘 안다고 해서 훈수를 둘 생각도 없었기는 했다.
자신의 아이들한테도 잘 안 두는 훈수를 동서한테 둘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언니는 이맘때쯤에 태교 음악 같은 거 열심히 들었어?"
일을 그만둔 나연에게 있어서 1순위 관심사는 태교.
그녀는 가장 건강하고 예쁜 아이를 갖기 위해 그녀는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질문은 나은에게 했으나 대답은 민호가 했다.
“처제. 그런 거 나은이가 열심히 했었거든? 별 의미가 없는 거 같아.”
“아니.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발끈하는 나은.
“세호가 막 엄청 똑똑한 타입은 아니잖아."
세호는 옆에서 본인이 디스당하고 있는 것은 관심도 없다는 듯 잡채를 호로록 입에 넣었다.
“세화 공부 잘하고, 세호도 못하지는 않거든요?"
가정교육의 총대를 메고 있는 나은은 민호의 팀킬에 어이가 없었다.
"알긴 아는데, 그거 네가 모차르트 음악 들어서 그런 건 아닌 거 같아."
“모차르트 음악 들어서 이 정도래도.”
질문은 자기가 했는데 갑자기 부부싸움을 시작하는 언니 부부를 지켜본 나연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형부와 언니는 엄청 사이가 좋으면서 늘 이런 식으로 투닥투닥거렸다.
"언니가 나중에 들었던 거 알려주면 나도 들어볼게.”
이면에 감춰진 쌍둥이의 진실을 몰랐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