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 아빠는 명절이 피곤하다.
"이세호! 엄마가 차에서 내릴 때 뛰지 말라고 했어.”
"우와아아아!"
나은이 뒤에서 잔소리를 했지만 세호는 모른척 호다다닥 밖으로 튀어나갔다.
"에휴."
옆에서 한숨을 쉰 세화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더니 자신도 차에서 내렸다.
아침 9시.
처갓집에 도착하기 위해 아침 6시에 일어난 민호는 기지개를 쭈욱켰다.
“어우... 너무 멀어....
“고생했어요. 여보.”
나은이 옆에서 위로 겸 격려를 해줬음에도 민호는 졸음이 쏟아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먼저 좀 들어가 있어. 나 잠깐만 차에 있다 갈게.”
“오빠. 작년에도 그 말 하고 차에서 안 돌아온 거 알아요?”
“...올해는 알람 맞을 거야. 진짜로.”
작년 추석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던 나은은 민호가 그냥 안으로 함께 들어가기를 바랐다.
“그러지 말고, 집도 있는데 드는 것도 도와주고 그래요.”
“...아들로 어떻게 안 될까?"
“아드님 겨우 10살이시고, 이미 뛰쳐나가서 없네요. 가요."
결국 민호는 나은을 거부하지 못하고 함께 내려서 트렁크에 챙겨온 선물과 식재료들을 들어주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내가 낑낑 대면서 계단을 올라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이 서방!"
장인어른이 반갑게 맞아주시자 민호는 피로를 이겨낸 자본주의 미소를 지었다.
“장인어른 오랜만에 찾아뵙습니다."
"어서 오게. 차 막히지는 않았어?"
“그냥 괜찮았습니다. 좀 박히는 구간도 있기는 했는데...”
말은 저렇게 했지만 민호는 이미 몇 번이고 차에서 뛰쳐나가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인 후였다.
명절의 고속도로는 인세의 지옥.
그 자체였다.
"엄마. 나연이는?"
이번 봄 식을 올렸던 나연과 재혁.
꼬박 연애를 시작한지 10년이 지나고 나서야 두 사람은 결혼이라는 종착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올해는 재혁이 처음으로 한 명의 식구로서 이 집에 찾아오는 해였다.
"남편이 길 잘못 들었대서 늦는단다.”
“그래? 옆에서 좀 잘 봐주지. 걔도."
“아서라. 애도 있는데 최 서방이 어련히 그냥 자라고 했겠지."
나연이의 말로는 두 사람은 신혼여행 때 정확히 관계를 갖고 아이가 생겼다고 했다.
민호네의 선례를 알아서 그랬던 것일까.
10년이라는 긴 연애 기간을 거쳤음에도 두 사람은 완벽하게 피입을 해낸 대단 한 커플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나은은 두 사람을 정말 대단하다고 평가했다.
특히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더더욱 그러했다.
정말 파멸적인 술자리였었지...
나은은 그날을 회상하면 지금도 아찔해져 오는 것 같았다.
나연이 남자친구가 군대에 간다고 해서 오빠랑 함께 술 사준다고 넷이 모였었는데...
[언니]
[응?]
[재혁이 진~짜 대단한 애인 거 모르지?]
잔뜩 혀가 꼬인 발음.
그냥 술에 취해서 남자친구 자랑 하나보다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재혁이 아주 그냥 이진성 그자체야. 언니. 진짜 말도 안 된다니까?]
[아니. 나연아... 너 술 많이 먹어서 말이 헛나오는 거 같은데...]
나연이의 남자친구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허둥지둥 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아. 나 말리지 마. 최재혁. 나 언니한테 자랑 좀 해야겠어.]
[근데 이진성이 내가 아는 그 '이진성' 맞아?]
[응. 언니 집에 있는 그 책.]
....그
오빠는 집에 돌아오고 나서도 잡을 이루지 못했었다.
날
-띵동띵동
벨소리가 올린다.
"세호야. 이모 왔나보다. 문 좀 열어드려.”
"네!"
나은의 지시에 거실에 앉아서 티비를 보고 있던 아이들이 현관으로 달려갔다.
"이모!"
짧은 단발머리.
임신을 한지 제법 지나 솟아오른 배.
나연은 사랑스럽다는 눈초리로 세호와 세화를 안아주었다.
“어후~ 우리 조카들 많이 컸네~ 엄마는?"
"저기 안에요."
나연의 뒤로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성이 긴장한 듯 집에 들어온다.
"자기. 들어와. 왜 거기 서있어."
"아... 그냥... 좀.."
첫 명절인데 길을 잘못 들어 지각해버린 재혁은 오랜만에 떠오른 신입사원 때의 기억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첫 출근 지각 때 엘리베이터 탔을 때가 딱 이런 기분이었었는데...
"동서. 어서와.”
“네. 형님. 제가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대역죄인 마냥 고개를 푹 숙이는 재혁을 보며 민호는 손사래를 쳤다.
"아냐아냐.. 아직 뭐 시작도 안 했는데.”
하지만 시작을 하지 않은 건 민호와 장인어른 뿐.
부엌에서는 전장이 한참이었다.
“나은아전 금방 되니?”
“어... 한 10분은 더 부쳐야할 것 같은데?”
미리 다 준비를 해놔서 부치기만 하면 됐음에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언니. 나도 같이 할게.”
자연스럽게 나연이 도우려고 하자 나은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거부했다.
“됐어. 뭘 해. 가서 아빠랑 앉아있어.”
“아니. 어떻게 또 그래.”
“나도 나 임신했을 때는 아무것도 안했어. 그러니까 그냥 가서 쉬어."
“그래. 애도 있는데 조카들이랑 같이 기다리고 있어. 우리도 그렇게 많이 남은 건 아니라 잠깐이면 끝나."
엄마까지 만류하자 하는 수 없이 거실로 돌아간 나연.
하지만 거실에서 오가는 대화 또한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하아... 요즘 그 선수 폼이 좀 별로기는 해.”
"그쵸. 저만 아쉽다고 느낀 게 아니었군요!"
폭풍 사회생활 중인 재혁은 이미 독수리 야구팀의 경기를 모두 복기하고 온 상태였다.
장인어른이 워낙 야구를 좋아하시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조금이라도 더 원활한 소통을 위해 열심히 준비해 왔었다.
“형님은 어떻게 보셨나요?”
난데없는 토스에 민호는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했다.
아... 재혁아... 이러지 마라...
야구 얘기는 한 번 시작하면 끝이 없었기에 어떻게든 그 화제는 피해가려 했는데...
민호는 미리 처갓집 매뉴얼을 주지 않은 자신을 원망했다.
후.... 년 이따 나가서 나 좀 따로 보자.
"나는 뭐...그냥....
얼버무려 넘어갈 수 있을까 싶던 그 순간이었다.
“아빠.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처제 나이스!
아주나이스!
예정된 종말.
나연은 민호에게 한 줄기의 빛과도 같았다.
“괜찮아. 혈압도 요즘에는 말썽 없는 편이고."
“그래도 식단 조심해야 되는 거 알죠?"
"네 엄마가 알아서 다 챙겨준다. 걱정하지 마라. 너는 너랑 네 아이만 신경 잘 써.”
“언니가 꿀팁 같은 거 많이 줘서 잘 준비하고 있어요.”
나연이 자신의 배 위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얼른 만나고 싶네요.”
“이모, 애기는 언제 나와요?"
가만히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화가 나지막이 물었다.
“애기는 아마 이번 겨울에는 볼 수 있을 거야."
세화는 사촌 동생이 갖고 싶었다.
조금 더 어렸을 적에는 진짜 동생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세호 같은 애가 집에 한 명 더 있다고 상상한다면 그건 싫었다.
안이 아수라장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애기 이름은 뭐에요? 이모부?"
세호도 쪼르르 옆에 와서 재혁 옆에 앉았다.
"글쎄... 아직 안정했는데 우리 세호는 뭐 좋은 이름 생각나는거 있어?"
"흐으음... 으으음..."
이모부의 질문에 턱을 괴고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세호.
“근데 남자애에요, 여자애에요?"
"여자아이일 거야."
"그럼 수연이는 어때요?"
"최수연?"
"네! 수연이 뭔가 이쁠 것 같아요!”
세호의 이름 추천에 민호와 재혁은 동시에 피식 웃음을 지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살면서 수연이라는 이름의 여성들이 스쳐지나가기는 했겠지만 두 사람이 공통으로 알고 있었던 수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수연]
[그녀를 감금했습니다]의 첫 번째 히로인이 아들놈 입에서 튀어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래. 나중에 이모랑 이모부가 꼭 그 이름도 생각해볼게.”
“네!”
"여보!"
부엌에서 나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민호가 몸을 일으켰다.
"가서 국간장 좀 사올 수 있어요?"
“어. 알았어. 또 뭐 필요한 거 없어?”
“애들 간식거리나 같이 가서 사와도 좋고요.”
나은의 부탁에 아이들을 데리고 슈퍼에 갔다 오려 했던 민호는 한숨을 내뱉었다.
"아... 맞다... 지갑 차에 두고 왔네...”
“형님!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싹싹한 신입.
재혁이 말 끝나기 무섭게 벌떡 일어났다.
"아이. 괜찮아. 요 앞인데 뭐.”
“아닙니다! 세화 세호 간식 사러 이모부랑 같이 갈까?”
이미 나갈 채비를 마친 재혁이 아이들에게 활짝 웃으며 권유했다.
세화랑 세호는 재혁올 무척이나 잘 따르는 편.
저들 아빠와는 달리 이모부는 뭔가 언제나 열심히 하는 듯한 느낌이 나는 사람이었다.
“네!”
아이들이 쪼르르 현관 앞으로 달려 나가자 재혁은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아이들의 손을 한 쪽씩 붙잡았다.
마트까지의 거리는 여기서 걸어서 5분 정도.
재혁은 아이들에게 해맑은 목소리로 근황을 물었다.
“세호. 요즘에는 뭐가 좀 재밌니? 학교에서?"
“저는 음... 축구하는 거도 좋아하고. 음....
"뭐래. 만날 수진이랑 둘이 어딘가에 숨어서 노는 주제에.”
세화는 무슨 입에 발린 소리를 하나는 듯 세호를 비꼬았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세호는 근 한 달간 주말에 축구 클럽올 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학교에서 축구를 하지 않았으니까.
"수진이가 누구니?"
맥락을 전혀 몰랐던 재혁이 눈을 깜빡였다.
"있어요. 이세호 강아지 같은 여자애."
"..강아지?"
요즘 아이들은 강아지라는 말에 다른 의미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드는 재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