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눈꽃은 검게 물든다.
나연이는 식당에 도착한 이후로도 영 기분이 안 좋아보였다.
"화났어?"
"...아니."
“근데 왜 안 먹고 있어.”
나연이는 왼손으로는 턱을 괴고 오른손으로는 젓가락으로 툭툭 그릇을 치고 있었다.
밥을 먹기보다는 나한테 할 말이 있어 보이는 것 같은 눈치인데.....
나는 좀처럼 그녀가 내게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재혁아."
"너 나 좋아하지?"
"응. 당연하지."
남이 들올까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녀가 내 마음이 거짓되었다고 생각하는 건 더 싫었다.
“근데 왜 가은이랑 그렇게 즐겁게 이야기하는데."
"...별로 안 즐거웠어."
“안 즐거운데 그렇게 웃을 수가 있나.”
...질투?
지금 나연이가 가은이 때문에 질투하는 건가?
순정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상황이 내게도 현실로 찾아오자 나는 표정 관리를 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워졌다.
입꼬리가 자꾸 꿈틀거린다.
잠깐만 재혁아. 그만 웃어봐.
나연이 지금 화났잖아. 너 웃으면 나연이가 더 화낸다니까?
마음속으로 페이스 관리를 하고자 했음에도 나연이가 너무 귀여워 보인다는 생각은 악성 바이러스 마냥 빠르게 내 뇌를 잠식해갔다.
"...웃어?"
심각하게 이야기하는데 지금 웃음이 나오냐는 의미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결국 나는 입을 틀어막아버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아냐. 안 웃어."
“그럼 둘 중 하나겠네. 내 눈이 삐꾸던지, 네가 나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던지."
"아. 진짜 미안 잠깐만 시간 좀 줄래?”
아예 고개를 식탁 정도까지 푹 숙인 나는 크게 함박웃음을 한 번 짓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했다.
“응. 나 이제 괜찮아."
"...뭐가 그렇게 웃긴데.”
앵두 같은 입술이 삐쭉 튀어나온 나연이.
“안 웃겨"
"가은이 생각하니까 또 웃음이 나든?”
"그런 거 아니야."
뭔가 계속 이렇게 시치미를 떼면 끝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결단의 칼날을 뽑아들었다.
“오늘 너랑 밤 같이 보낼 생각에 웃은 거야.”
노여움이 어려 있던 눈에서 서서히 힘이 풀려간다.
"...밤 왜."
“손님이 오는 건 네가 처음이니까.”
사실이기는 했다.
나는 내 개인적인 공간에 누가 들어오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친구들을 데려오기에 상당히 비좁은 공간이기도 했고, 누가 온다고 하면 청소를 해야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술을 늦은 시간까지 먹게 되더라도 밖에서 먹는 것을 훨씬 선호했다.
"...정말이야?"
의심스럽다는 듯이 되묻는 나연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만 허락해주는 거야."
그렇게 말해주자 나연이는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식사를 재개했다.
“...근데 나 너희집 주소 몰라.”
“적어줄게."
“그냥 같이 가서 있는 건 싫어?"
망설여진다.
나연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욕구와 그녀에게 청소가 덜 된 방을 보여주기 싫다는 거부감이 맞부딪혔다.
“오늘은 그래도 처음 초대하는 거니까 청소하고 다 되면 불러줄게.”
내가 고민을 거듭한 후 대답하자 나연이도 알겠다는 순순히 물러섰다.
"...알았어."
“에헤헤. 고마워. 저녁 혹시 같이 먹올래?”
그녀가 괜찮다고 한다면 간단한 요리라도 준비해볼까 싶은 생각이었다.
"집들이 겸 치킨 사갈게. 그거 같이 먹자."
“아냐아냐. 무슨 집들이야. 나 이사 온지 얼마나 됐는데.”
“...근데 내가 첫 손님이라며. 아무것도 못 받았을 것 아냐.”
...그런가?
생각해보니까 그랬다.
내가 친구가 자취방에 처음 놀러갔을 때는 휴지를 사들고 간 기억이 있었는데 내가 뭘 받은 기억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너희 집 처음 갔을 때 아무것도 안 줬던 것 같은데...”
그런 논리라고 함은 나도 나연이네를 처음 방문했을 때 뭐라도 사갔어야 하는 것이 맞지 않나 싶었다.
"아니지. 재혁아."
나연이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넌 나한테 다시없을 선물을 주고 갔잖아."
코 밑으로 향한 그녀의 검지는 우리 둘만의 비밀을 회상시켜주고 있었다.
일단 창문부터 열자.
나연이가 우리 집에 놀러오는 것이 확정된 지금.
나는 그녀가 여기서 하룻밤 묵고 가는 것을 전제로 완벽하게 준비를 마쳐야했다.
아무리 내가 바보라고 해도 알 수 있었다.
나연이가 자취방에서 보자고 한다는 것은 그녀가 야한 짓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물론 [그녀를 감금했습니다]를 보면 위생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는 듯이 아무데서나 박아버리는 장면도 있기는 했지만 우리는 야설 속 주인공들이 아니었다.
여기서 밥도 먹고, 대화도 하고 할 것 아니겠는가. 화장실도 이용할 거고.
당연히 손님맞이를 위한 대청소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빨래를 말끔히 정리해서 서랍장 안에 넣어둔 나는 미니 청소기로 바닥을 밀고 걸레로 뽀득뽀득 소리가 날정 정도로 닦는 것까지 완료했다.
어차피 새로 머리카락이나 털들이 수북하게 남을 것 같기는 했지만 그건 그때 치우면 되는 거고.
그 다음은 이제... 으음...
기본적인 정리는 다 됐으나 뭔가 매력적인 남자로 보일만한 구석 또한 없었다.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방이었고, 센스 있는 인테리어 아이템 같은 건 눈을 씻고 찾아도 발견할 수 없었다.
방학 때 야심차게 공부하겠다고 사둔 경제학 책들을 진열하듯 놓아볼까 싶다가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질문 하나 하면 어버버하고 대답도 못 할 텐데.
“...떨린다."
무심코 속마음이 튀어나와버렸다.
이렇게 열심히 다 준비했다고 생각했음에도 나는 아직까지도 나연이가 어려웠다.
살면서 단 한 번 밖에 없는 서로의 처음을 교환했음에도 우리는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가까워진 것은 맞았지만 아직 제대로 진지하게 만나는 커플이 된 것도 아니고....
지금 우리 사이는 어디쯤 와있는 걸까.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는 썸?
섹스를 해봤으니 이미 알 것 다 아는 농밀한 관계?
그냥 몸만 섞었지 지나가는 대학 동기 1과 다를 것 없는 건가...?
침대 위에 털썩 걸터앉은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물어볼까.
근데 물어봤다가 기대하는 답변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떡할까.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냥 신경 쓰지 않는 척 이렇게 지내는 것이 어쩌면 더 나연이를 오래 볼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선부른 질문으로 관계를 망가트리고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 근데 확신을 원하기는 하는데....
"흐어어어..."
두 볼을 축 늘어트린 그 순간이었다.
-똑똑똑똑
...아직 오라고 한 시간까지는 좀 남았는데?
20분은 이른 시간이었다.
혹시 옆집인가 싶어 가만히 있어봤는데 또다시 울리는 노크소리는 손님이 우리 집에 찾아왔음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끼이익
내가 현관문을 잡아당기자 그곳에는 나연이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봉투를 들고 있었다.
“...왜 불러놓고 문을 안 열어줘."
“이렇게 일찍 올 줄 몰라서.”
"자. 이거나 받아.”
나연이는 치킨봉투를 내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아.웅."
마치 제 집에 온 것처럼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로 들어온 나연이.
나연이는 감정평가사라도 된 것 마냥 내 집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집 좋네.”
“진짜?"
아. 근데 나 진짜 바본가.
방금 전까지의 불안감은 어디 갔는지 나는 그녀의 칭찬 한 마더에 또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나연이는 내게 있어 내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주술사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응. 내 방보다 깨끗한 거 같은데?"
"에이. 너 온다고 청소해서 그런 거지. 원래는 안 그래.”
“그래? 아. 맞다. 맥주도 사왔으니까 그거는 따로 빼서 냉장고에 넣어줘."
"웅웅. 알겠어."
술을 마시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연이의 지시대로 냉장고 안에 맥주를 넣어놓은 나는 머쓱하게 서있다 슬그머니 그녀 옆에 가서 앉았다.
“나연이 너는 원래 이렇게 약속시간보다 일찍 다니는 거 좋아해?"
생각해보면 그랬다.
내가 늦게 나가는 건 아닌데 항상 나연이는 나보다 먼저 도착해있고는 했다.
“...늦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아. 근데 오늘 여기 오는 건 사장님이 치킨 예정 시간보다 너무 금방 포장해주셔서 식으면 그러니까 온 거긴 한데.”
“아. 그래? 그럼 그냥 지금 먹자. 미리 말을 하지.”
나는 벌떡 일어나서 상을 펼치기 시작했다.
맥주랑 그릇이랑... 포크랑...
한 번에 필요한 물건들을 우르르 꺼내놓은 나는 화장실 앞에 서서 나연이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손 씻자."
나연이를 화장실 안쪽으로 들여보낸 나는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너는 안 씻어?"
안쪽에서 들려오는 말소리.
“너 나오면 씻올게.”
그녀가 나오자 나도 손을 깔끔하게 씻었고, 우리는 캔 맥주를 따며 건배를 했다.
“짠."
목이 말랐는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나연이.
"아. 시원하다."
"그러게."
나도 그녀의 템포에 맞춰 잔을 기울였다.
나연이가 사온 치킨은 브랜드가 따로 없는 동네 치킨이었는데 맛이 상당히 훌륭했다.
"아주 맥주가 술술 넘어가는 맛인데?”
“여기 너희 집에서도 그렇게 안 멀어. 그 공원 앞에 있는 거기야."
“아. 그 노란 간판 거기?"
“응. 나도 어쩌다가 한 번 사먹어 봤는데 진짜 괜찮더라고.”
뜯던 닭다리를 내려놓고 맥주를 다시 한 모금하려는 그 순간이었다.
"야! 최재혁! 잠깐만!"
"응? 왜?"
나 뭐 또 잘못한거야?
내가 일시정지 상태로 그녀를 지켜보자 나연이는 내 손에서 그대로 맥주캔을 압수해갔다.
“...너 박 술 마시면 막 거기 안 서는 거 아니지?"
거기...? 아 거기 얘기구나.
“아... 어.... 음... 몰라?"
민망해서가 아니라 진짜 몰라서였다.
아니 내가 살면서 술 먹고 고추를 세울 일이 뭐가 있었단 말인가.
"야이씨... 너 먹지마. 너 이거 압수야.”
술이 좀 들어가서일까.
맥주캔올 꼬옥 쥔 채로 나를 노려보는 나연이도 귀여워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