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눈꽃은 검게 물든다.
한강에 다녀온 것도 이틀 전.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나는 근 며칠간 좀처럼 최재혁 생각에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그냥 눈만 감으면 개가 생각이 나는데 진지하게 무슨 매혹 마법에라도 걸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게 다 그가 내게 해준 마지막 말 때문이었다.
[나 꿈에서 너 존나 따먹었어.]
처음 들었을 때는 뭐 어쩌라는 거지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곱씹올수록 부끄러운 이야기였다.
그냥 좋아한다는 백 마디 말보다 그가 진심으로 나에게 욕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떠보는 듯한 가벼운 감정 따위가 아니었다.
꿈이라는 것은 그의 몸이 그의 무의식의 저편이 나를 원하고 있다는 선명한 증거.
그리고 그 사실은 나를 무척이나 찌릿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어우. 더워.
지금 더운 것은 분명 방금 샤워를 하고 나와서입이 분명하리라.
두 손으로 뺨을 만져보자 후끈해진 열기가 확 느껴졌다.
“...몰라.”
거울 앞에 선 나는 본격적으로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최재혁과의 의도치 않은 정기 모임인 영어 교양 수업이 있는 날.
처음에는 진짜 아침마다 욕본다고 생각을 했다면 지금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렇게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는 것은 무척이나 편리한 일이었다.
내가 굳이 애써가면서 연락 안 해도 그냥 가면 옆자리에 밥상이 다 차려져 있는 건데...
좋아. 오늘은 이거 입고 가자.
시원한 느낌을 주는 베이지 톤 와이드핏 면바지에 검정색 크롭티를 입은 나는 거울 앞에서 한 바퀴 빙그르 돌았다.
살짝 보이는 배꼽 라인.
좋아좋아. 마음에 들어.
화장을 하고 향수를 뿌린 나는 얼른 학교에 가서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
수업 시작 5분 전.
미리 강의실에 도착해 있었던 나는 괜히 정각에 딱 맞춰 오려는 최재혁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지난번 한강 갈 때도 내가 먼저 왔는데...
나는 왜 항상 걔를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좋아한다고 한 건 걘데. 이거 좋아하는 거 맞기는 하냐고.
"나연아!"
멍하니 책상을 두드리며 내적 불만을 토로하고 있던 내가 고개를 돌렸다.
"...늦어.”
"응? 아직 11시 안 됐는데?”
"아니? 너 늦었어."
괜히 심술이 난 내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아니야. 지금 10시 57분인데?"
“몰라.”
-드르륵
최재혁이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자마자 교수님이 강의실에 들어오셨다.
아. 이렇게 늦게 오니까 이야기할 시간이 없잖아. 최재혁.
"좋은아침입니다. 여러분.”
“네~ 안녕하세요~"
앞자리에 앉아있는 애들이 대답을 하자 교수님은 강의실을 전체를 한 번 스윽 스캔하셨다.
“이번 시간도 파트너랑 주제에 대해 영어로 토론하는 시간을 갖기는 할 건데 여러분들 만날 같은 친구랑 이야기하니까 좀 지겹지 않나요?”
강의실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
그야 이제야 익숙해진 짝을 떠나 새로운 어색한 기류에 편승해야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괴로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교수님은 이런 정적 또한 익숙하다는 듯이 꿋꿋하게 미소를 지으시며 상황을 넘기셨다.
“기존에 하던 파트너 말고 다른 친구들과 한 번 짝을 맺어서 이야기를 하는 게 어떨까 하는데...”
싫어요! 왜요!
난데없는 교수님의 파트너 채인지 발언에 나는 인상을 팍 썼다.
“자리를 또 막 섞는 건 불편하니까 본인 자리 기준 오른쪽에 있는 사람과 오늘 하루만 새롭게 매칭하는 걸로 할게요.”
내 오른쪽은 최재혁이었지만 그에게는 내가 오른쪽이 아니었다.
의자를 살짝 뒤로 젖혀 그의 옆자리를 확인하자 나는 언짢음이 마구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김가은.
별로 친하지는 않은 애였지만 귀엽고 애교가 많은 스타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재혁아! 그럼 오늘은 나랑 하는 건가?"
콧소리 섞인 미성이 들려온다.
“어... 그런 거 같은데?"
내 쪽은 보지도 않고 김가은 말에 대답하는 최재혁.
아니. 너는 짜증나지 않아?
나는 지금 우리가 대화할 기회를 빼앗긴 것 같아서 개열받는데 너는 왜 반대편에서 헤실헤실 거리고 있는데.
나연아."
빈자리였던 내 왼쪽에 앉은 사람은 내 절친 동기인 수아였다.
"수아. 하이."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래?"
“왜?”
“뭐 기분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수아에게 진실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내 처녀를 따간 최재혁, 실시간으로 옆자리에서 딴년이랑 시시덕거리는 중.
“아. 그냥 속이 좀 안 좋네.”
“그래? 너무 아프면 교수님한테 말씀드려봐.”
“아냐아냐. 그 정도는 아니고.”
오늘의 대화 주제는 우리 몸과 영양분에 대한 이야기였다.
교수님은 짧은 영상을 화면을 통해 보여주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이게 우리가 연간 1인당 소비하는 설탕의 량이라며 각설탕을 우수수 바닥에 쏟아놓는 장면이었다.
"그럼 이제 각자 본인의 건강 관리법이 있다던지, 이거에 관해 공유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옆자리 파트너와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모르는 사람이나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과 함께라면 어떻게든 몇 마더라도 하겠으나 친한 친구와 함께였다면 농땡이를 피우기 마련이었다.
잠깐 주제에 대해 두 문장 정도 영어로 떠들고 난 이후 나와 수아는 바로 잡답 타입에 돌입했다.
“나연아. 이거 끝나고 밥 먹으러 가자.”
"아... 음... 어...
본래대로라면 최재혁과 수업이 끝나고 둘이 먹자고 하려 했었다.
지금이라도 물어볼까 싶어 곁눈질로 옆을 쳐다봤는데...
“Yes! Of course, I do have certain solutions for my..."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너.
이마에 빠직 마크가 생길 것 같았다.
뭔지 모르겠지만 신나서 가은이한테 떠들어대고 있는 최재혁.
목소리에는 생기가 넘쳤으며, 유창해 보이는 영어가 재수 없게 느껴졌다.
나랑 대화할 때는 그냥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었나보구나 하고 말았는데, 다른 애랑 저러고 있는 것을 보니 왕재수가 따로 없었다.
“나연아. 그래서 밥 어떡할 건데?”
수아가 다시 한 번 나를 재촉했다.
“아. 나 오늘 점심 약속이 있었던 거 까먹었었다. 미안미안."
생각을 고쳐먹었다.
년 이따 나 좀 봐. 최재혁.
“그래? 아깝다. 어쩔 수 없지. 뭐."
수아와의 점심을 거절한 후, 우리는 작은 목소리로 전공 과제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교수님이 너무 많이 내주셨다. 채점이 깐깐하다는 걸 선배한테 들은 적 있다고 둥둥 떠들어댔지만 내 정신은 내 오른편에 있는 남학생의 말소리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꺄르르
여학생이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Really?"
“I can send you links if you want them!"
...링크를 보내?
그럼 지금 쟤랑 둘이 개인톡을 하겠다는 소리야?
진짜 너. 야. 내가 옆에 있는데 그러고 싶어?
머리끄댕이를 붙잡아서 뒤로 재껴버리고 싶은 충동이 올라온다.
“자. 여러분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하던 이야기들 마무리하고, 우리는 목요일날 다시 새로운 주제로 토론해보도록 해요. 수고했어요.”
교수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학생들이 가방을 싸기 시작한다.
최재혁도 이제 끝났으니 나한테 관심을 갖겠거니 싶었는데 그는 여전히 김가은과의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
“가은아. 진짜 링크 보내줘?”
"너 그거 먹어보니까 효과 좋았다면서. 있으면 보내주라.”
“웅웅. 내가 집 가서 그거 보내줄게.”
“땡큐땡큐."
김가은이 의자에서 일어나고 나서야 최재혁은 내 쪽을 바라봐주었다.
"아... 직 안 가고 있었네....?"
내가 기분이 안 좋다는 사실을 눈치 챘는지 최재혁은 말꼬리를 흐렸다.
“너 기다리고 있었잖아."
“나? 왜?”
왜? 왜냐는 말이 나와?
기가 찬 나는 코웃음을 치고는 그의 허벅지를 꾸욱 꼬집었다.
“아주 좋아 보이드라?
"응? 아닌데? 나 좋은 일...별로 없는데...?”
진짜 모르겠다는 듯이 횡설수설하는 최재혁.
그냥 더 짜증나.
아.
“나 오늘 너희 집 갈래.”
그의 동공에서 지진이 나기 시작한다.
"갑자기?"
“응. 안 들여보내주면 네가 나 목 조르면서 내 처녀 따먹었다고 소리 지를 거야."
“아니. 나연아. 이러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최재혁은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제발 그것만은 참아달라는 얼굴로 호소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그래서 집 가게 해줄 거야 말 거야."
“우리 집 아직 청소 안 되어있어."
"내가 해줄게."
말은 저렇게 하지만 최재혁은 성격상 깔끔하게 해놓고 살 것이 뻔했다.
“빨래도 지금 건조중이라서....
“집에 가면 다 말라있겠네. 그럼.”
"하아... 일단 알겠어... 대신 저녁에 와. 알겠지."
그의 약속을 받아내고 나서야 나는 마음이 조금 풀리는 듯 싶었다.
최재혁."
“... 점심 같이 먹고 싶어."
뭔가 자꾸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게 된다.
하나도 냉정하지 못하고, 침착하지도 못했다.
"...법학관 갈래?"
“너는 뭐 밥 먹자고 하면 거기밖에 생각이 안 나는 거야?"
“아니. 근데... 싸고 맛있긴 하잖아...”
아. 나는 왜 하필 걸려도 이런 애한테 걸려갖고... 이씨....
"가자. 그래."
내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최재혁의 눈동자가 땡그랗게 확대되었다.
"야. 그리고 김가은한테 갠톡은 하지 마라.”
너 진짜 밤에 열심히 안 하기만 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