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일러레님!-267화 (267/276)

〈267화〉눈꽃은 검게 물든다.

“사람 짱 많다."

"그러게."

슬슬 더워질 무렵이었음에도 한강공원 주위에는 사람들이 한가득이었다.

가족끼리 나들이를 온 사람들.

우리 또래로 추정되는 커플들.

단체로 와서 자전거를 타려는 듯한 동호회 등 등.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빡빡한 사람 탓에 우리는 좀처럼 착석할 자리를 찾지 못했다.

"이렇게 계속 걸어만 다닐 거야?"

그렇게 오래 걷지 않은 것 같았지만 나연이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아... 근데 마땅한 자리가 안보여서.”

"그리고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지금 바람 너무 불어갖고 돗자리 다 날아갈 것 같은데?”

나연이의 검지 끝이 가리킨 곳에는 실제로 사람이 앉아있음에도 끝자락이 펄럭거리고 있는 돗자리들이 대거 눈에 들어왔다.

어쩌지...

아씨... 이런 건 계획에 없었는데...

사실 나도 초행길인지라 장소만 알아보고 계획만 세운거지 구체적으로 어느 자리가 명당인지는 알아보고 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면.... 음... 조금만 더 걸어보고 정 마땅치 않다 싶으면 그냥 거기 앉자.”

"그래. 그럼.”

그렇게 점점 더 지하철역에서 떨어진 변두리 쪽으로 걸어 나가는데...

"야. 최재혁."

"응?"

"저기 봐봐."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앉을 자리를 수색하고 있었던 내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저거?"

나연이가 지목한 방향을 지켜보자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텐트 렌탈]

...텐트?

"텐트 빌리자고?"

"별로야?"

"아니, 별로인 건 아니기는 한데."

"그럼 저거 빌리러 가자."

"근데 저거 있어봐야설치할 자리도...”

"그거야 직원한테 물어보면 알려주겠지."

나연이는 내 손목을 붙잡고는 그대로 렌탈샵 안으로 들어갔다.

아아... 뭔가 비쌀 것 같은데...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저희 텐트 하나 빌리려고 하는데요.”

나연이는 나를 옆에다 가만히 세워두고는 그대로 결제부터 질문까지 다 해버렸다.

"아. 그러면 여기서 나가서 오른쪽으로 쭉 가면 있다는 말씀이시죠?"

"네네.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그대로 가게를 나선 우리는 직원일 알려준 텐트 전용 터전 비슷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래서야 배보다배꼽이 큰 것 같은데?"

"뭔소리야?"

“텐트 빌리는 거 좀 비싼 거 같아서.”

"에이, 괜찮아. 이거 어차피 우리 돈 주고 밥 사먹었으면 그게 그 돈이었잖아."

나연이는 전혀 개의치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고 짐을 푼 우리는 천천히 텐트 조립을 시작했다.

“나연이 너는 캠핑 좋아해?"

바닥에 지지대를 고정하던 내가 반대편에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몰라. 안해봐서."

“그럼 해보고는 싶어?"

“글쎄다... 음... 한번쯤은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럼 나중에 같이 갈래?'라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너무 속이 보이는 것 같았던 나는 그 말은 꼭 삼키고는 다시 열심히 조립에 몰두했다.

만약 오늘 나연이 반응이 나쁘지 않고 재밌었다고 한다면 다음에는 진짜로 제대로 준비해서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어후, 힘들다.”

"고생했어."

내가 이마에 흐르는 담을 닦아내자 격려의 말을 건네주었다.

"어서 들어가봐!"

“응.”

잘 만들고 못 만들고 할 것도 없었다.

그냥 설명서에 적혀 있는 그대로 조립했을 뿐이었고, 제법 널찍한 텐트는 돗자리보다는 확실히 바람의 영향을 훨씬 덜 받기는 했다.

입구 쪽만 지퍼로 된 문을 열어둔 우리는 잠시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멍하니 나란히 앉아있었다.

“...벌써 피곤해.”

“인정, 아. 다음부터는 내가 좀 미리 알아보고 올게.”

그래도 강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소위 말하는 힐링에 가까운 느낌을 자아내기는 했다.

"그래도 좋기는 하네.”

푸른 잔디밭.

잔잔히 흐르는강물.

즐거운 듯 웃음을 지으며 오가는 사람들까지.

자그마한 자취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우리에게는 가끔은 이런 시간도 필요하지 않나 싶었다.

"배고프지는 않아?"

"사실 나 오늘 아무것도 안 먹고 와서."

나연이가 멋쩍은 듯이 웃자 나는 뜨악하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 말을 하지! 얼른 지금 먹자. 그러면.”

“안 그래도 조금 있다 먹자고 하려 했어."

종이봉투 안에서 준비한 음식들을 꺼내놓자 나연이는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거 찍어도 되는 거지?"

"아. 그럼! 마음껏 찍어!"

너의 휴대폰 안쪽에 나에 대한 기록이 남는다는 거니까.

나연이는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그 순간이 무척이나 벅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럼 이제 먹어볼게?"

"응응! 김밥 많으니까 다 먹어도 괜찮아!"

김밥을 하나 입에 쏙 집어넣은 나연이는 입을 오물거리더니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아주 근본 있는맛이네."

"맛있어? 맛있어?"

"응. 배고파서 그런지 두 배는 더 맛있는 거 같아.”

나연이는 진짜로 많이 배고팠는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다음 김밥을 입에 넣었다.

아. 너무 뿌듯해. 진짜 너무 뿌듯해.

좋아하는 여자애랑 한강에서 김밥을 먹는 것도 좋은데, 음식 칭찬까지 받는다?

하. 성불했다. 최재혁.

기쁜 마음으로 젓가락을 든 나는 내가 만든 음식들을 야무지게 먹어보았다.

뭔가 특별할 것 없는 맛이었지만 그냥 기분 버프인 걸까.

진짜 맛있었다.

“돈까스도 집에서 튀긴거야?"

“응. 시제품이기는 한데 튀기기는 집에서 튀겼지.”

"맛있어."

그렇게 우리는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고 음식을 말끔하게 비워냈다.

"아. 잘 먹었다.

"그러게.”

“근데 나 배부르니까 좀 눕고 싶은데...”

나연이가 그래도 괜찮겠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자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 그럼! 모처럼 이렇게 큰 거 빌렸는데 당연히 괜찮지!"

후다닥 음식 통들을 정리해 다시 봉투에 담아둔 나는 가져온 돗자리까지 베개로 이용할 수 있게끔 셋팅을 해놨다.

"자. 여기 누워!"

"...나는 베개 없어도 괜찮아."

"아냐! 너 써도 되는데?”

"... 네 팔이 있는데 굳이?"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아... 그... 그런가?"

"먼저 눕기나 하시죠.”

나연이가 피식 웃음을 짓자 나는 재빨리 바르게 누워서 왼쪽 팔을 쭉 뻗었다.

아아... 나오면서 이거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간혹 인터넷 영상에서 보이는 형이 이렇게까지 행복한 걸 원하지 않았어.'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그럼 잠깐 실례 좀 할게.”

내 옆에 앉은 나연이가 천천히 상체를 바닥으로 기울였다.

그녀의 머리의 종착지는 내 팔뚝 위.

나는 최대한 너무 기쁜 내색을 하지 않기 위해 얼굴을 반대로 돌렸다.

"...불편해서 그러는 거야?"

고개를 반대로 획 돌려버린 탓일까.

나연이가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아냐! 아냐! 편해! 너무 편해! 오히려 이 무게감이 아주 적당하다고 해야 할까.”

바로 그녀에게 해명하고자 얼굴을 그녀 쪽으로 향했는데...

“푸흡.”

나연이가 웃기 시작했다.

"아. 알겠어. 그럼 나 계속 이러고 있어도 괜찮다는 거지?"

아...

민망해.

그냥 어디로 숨어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일부러 그녀를 피하지도 않고 다가가지도 않기 위해 텐트 천장만을 바라보던 나는 두 눈을 감았다.

그래... 그냥 이렇게만 있다가가자.

낮잠을 자는 것도 괜찮고, 이 자세대로라면,

섹스도, 야한짓도 없는 그런 평화로운...

"나연아 뭐해?"

"문 잠그는 증.”

힐끗 아래쪽을 확인해보니 나연이는 텐트의 모든 지퍼들을 잠그고 있었다.

"추워서 그래?"

"응. 바람들어오는 것도 싫고, 이제 우리가 굳이 밖에 보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마지막 지퍼가 위로 올라가자 텐트는 불을 끈방 같은 느낌이 되어버렸다.

햇살이 반사되어 아예 안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환했던 조금 전과는 완벽한 다른 분위기.

"재혁아."

성을 붙이지 않고 그녀가 내 이름을 불러준다.

그 묘한 기류에 나는 본능적으로 무언가가 일어나려고 함을 알 수 있었다.

"밖에 바람이 많이 불더라고.”

"그러게.”

뭔가 더 심오한 대화가 오갈 것 같았는데 기분 탓이었을까.

날씨 이야기에 나는 조금은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텐트도 고정되어 있지만 아마 밖에서 보면 무척 흔들릴 거란 말이지."

"아마 그렇겠지?"

실제로 텐트의 외피인천은 지금도 파르르 떨리고 있었으니까.

"그럼 우리가 안쪽에서 움직여서 텐트가 흔들리는 것도 밖에서 보면 아무런 의심도 안 받지 않을까?"

우리가 안에서 움직인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나는 누워서 생각해보려고 했는데...

"나연아. 그게 무슨 말.”

말을 끝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나연이의 행동이 내 의문을 해소시켜주었기 때문이었다.

바지 위로 느껴지는 허벅지와 엉덩이.

가만히 누워있는 내 위로 올라탄 자세가 된 나연이는 손을 뻗어 내 뺨을 쓰다듬어주었다.

"나연아. 근데 여기 밖이고 암만 텐트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실제로 여기서 그렇게 격렬하게...”

나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사고가 정지한 나는 횡설수설하며 눈을 맞추지 못했다.

"재혁아."

"...?"

“너 오늘 후식을 준비 안 해왔더라고.”

후식...?

워낙 밥량이 많아서 일부러 준비 안 한 건데...

"혹시 배고파서 그래? 그러면 내가 지금 편의점 가서...”

“과일 먹고 싶지 않아?"

"갑자기?"

“수박 같이 큼지막한 건 없지만...”

나연이의 오른손에 제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풀어내려간다.

"복숭아 정도는 줄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냥 마트 가서 사먹으면 안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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