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눈꽃은 검게 물든다.
"하아... 하아... 재혁아. 사랑해."
나연이의 턱 끝에서 땀방울이 떨어져 내린다.
잘록한 허리는 내 하반신 위에서 유려하게 흔들려으며 나는 그런 그녀의 엉덩이를 한 손으로 꽉 붙들고 있었다.
"흐아... 진짜 너무 좋아... 재혁아."
그녀의 상반신이 중심을 잃고 내 위로 엎어진다.
말캉한 가슴이 내 가슴에 맞닿자 빨딱 솟은 유두의 감촉이 흥분감을 고조시켜주고 있었다.
아찔함 감촉이었다.
"좋아해. 최재혁. 앞으로도 하아... 이렇게만 같이... 하아..."
몸에서 느껴지는 1차원적인 쾌락이 물밀 듯 밀려온다.
그녀의 말이 전해주는 한 차원 더 높은 정신적인 쾌락에 나는 더욱더 세차게 허리를 흔들었다.
-철퍽철퍽철퍽
질펀한 물소리가 이어졌고 나연이는 내 목에 두 팔을 휘감았다.
가쁜 숨소리 사이로 그녀의 속삭임이 뇌를 마비시킨다.
"하으... 더... 더 나를 위해 변태가 되어줘. 재혁아."
"나를 엉망으로 만들어도 좋으니까... 하아...”
"사랑해... 최재혁...”
아. 못 참을 거 같아.
사랑한다는 말은 그 어떤 야한 말보다도 강렬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아이제 진짜 못참고 쌀 것 같은데...
-삐비비빅 삐비비빅
...어라?
울리는 알람소리에 나는 눈이 떠졌다.
뭐야. 그럼 조금 전까지는...
뜨겁던 섹스의 열기는 어디로 갔는지 어둑한 내 방에는 한산한 기운만이 감돌고 있었다.
휴대폰을 찾아 알람을 끈 나는 이마를 탁 쳤다.
“아우..."
갑자기 민망해졌다.
설마 이 나이 먹고 몽정을 한거야?
이불을 치워서 아랫도리를 확인해봤는데 다행이 액체를 분비하지는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치울게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리얼했던 꿈의 일부가 떠올랐다.
내게 연인처럼 사랑을 속삭이던 나연이의 모습.
중간중간 내가 실제로 봤던 변태스러운 모습도 섞여있어서 나는 진짜 내가 꾸고 있는 것이 꿈인 줄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괜히 찜찜했던 나는 샤워를 하고 나와 머리를 말리고는 휴대폰을 확인해 보았다.
[오늘 몇 시까지 가면 되는 거야?]
나연이의 문자에 나는 현재 시각을 고려해 답장을 주었다.
[3시까지 지하철역으로 오면 될 것 같아.]
[뭐 따로 챙겨갈 건 없고?]
바로 칼같이 오는 답장.
[어. 응. 그냥 와도 돼.]
[알겠어.]
... 건조하다.
***
남자애들끼리나 할 법한 무척이나 건조한 채팅이었다.
애정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사무적인 느낌.
잠시 시무룩해지기는 했지만 금방 기운을 차린 나는 내게 주어진 기회를 제대로 살려볼 생각이었다.
"그래...! 몸까지 팔아서 얻은 데이트 기회인데...."
이렇게 말하니까 웃기기는 한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실제로 하드코어한 섹스를 하는 대가로 그녀와 밖에서 놀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까.
그리하여 내가 기획한 것은 한강 데이트.
여자친구가 생기면 꼭 한강 가서 피크닉을 해보고 싶었던 나는 얼른 슬리퍼를 신고 현관문을 나섰다.
음식을 해가야 했다.
당연히 담소도 중요하지만 피크닉의 정수는 역시 도시락.
나연이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완벽하게 준비할 생각이었다.
돗자리도 챙기고, 음식도 해가고, 놀거리.... 음...
트럼프 카드라도 들고 갈까 했지만 요전번 나연이네 홈데이트를 회상해보면 그닥 좋은 선택지는 아닌 것 같았다.
슈퍼에 도착한 나는 어제 메모장에 저장해둔 파일을 열었다.
“김밥이랑 유부초밥이랑 돈까스."
사실 쫄면도 해가고 싶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면류라 좀 힘들 것 같았다.
재료를 하나하나 바구니에 담은 나는 빠진게 없는지 확인하고는 계산대로 향했다.
“네. 봉투 드릴까요?"
“네네. 주세요.”
아. 진짜 이제야 살 것 같네.
용돈이랑 알바비가 들어오니까 숨이 막힐 것 같던 경제적 부담감이 사라졌다.
이제 더 이상 라면만 먹고 안 지내도 된다고!
괜히 기분이 좋아진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손을 말끔하게 씻고 김밥 재료들을 손질한다.
오이도 썰고 당근도 썰고,
사실 두 사람이 먹을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근데 나연이는 입이 짧은 걸까...?
언제나 나랑 학교에서 밥 먹을 때 보면 좀 남기는 것 같던데...
사실 이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랑 먹는 거 불편해서 빨리 가버리는 걸까 싶은 느낌도 들기는 했다.
"아. 몰라.”
그냥 넉넉하게 준비하고 남으면 내가 집 와서 먹지 뭐.
참기름을 밥에 슥슥 바르고 꾹꾹 눌러준 나는 하나씩 재료를 얹고는 김밥을 말았다.
자취방에는 김밥말이가 없었기에 이것도 아까 따로 사온 상태였다.
그래도 집에 있으면 나 혼자 아까워서라도 한 번쯤은 김밥해 먹지 않을까.
유부초밥도 만들고, 돈까스도 기름 튀겨가며 튀긴 나는 하나씩 음식을 플라스틱 용기에 담기 시작했다.
자고로 여자애들은 예쁜 플레이팅을 중요시 하는 법.
아무래도 메뉴가 메뉴인지라 그렇게 화려하게 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최대한 정갈하게 안쪽을 꽉꽉 채워 넣었다.
종이봉투에 음식들을 챙기고 돗자리까지 집어넣은 나는 내 복장을 점검했다.
만날 물어본다고 해놓고 기회가 없어서 물어보지를 못했네...
나연이가 좋아하는 옷 스타일이 있다면 그거에 맞춰주고 싶었지만 아직까지 정보가 없는 나였다.
아니. 뭐, 오늘 오래 이야기할 것 같은데,
가서 물어보지 뭐.
청바지에 반팔셔츠를 입은 나는 운동화를 신고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나연아!"
나도 늦지 않게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연이는 나보다도 먼저 나와있었다.
"안녕"
남색 체크치마와 흰색 블라우스.
나연이는 무슨 인터넷 쇼핑몰 모델 같은 포스를 자아내고 있었다.
“일찍 왔네?"
"아. 응. 어쩌다보니까. 근데 너 그게 다 뭐야?"
내가 이거저거 메고 있자나연이는 내용물이 궁금했는지 봉투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거 우리 오늘 먹을 거랑 가서 놀거.”
"사온 거야?"
"아니? 내가 만들었는데?”
내가 직접 요리를 했다고 하니 나연이의 표정은 어리둥절한 햄스터 이모티콘처럼 변했다.
"...나는?"
"응?"
"나는 뭐 안 해가지고 왔는데?"
“에이, 네가 하긴 뭘 해․ 됐어. 내가 오늘은 부른 거니까 내가 다 준비한 거지. 뭐."
"아니. 미리 말을 하지. 뭔가 빈 손으로 온거 미안하잖아."
나연이는 진심으로 나 혼자만 준비해온 것에 대해 불만이었는지 나를 째려보았다.
기껏 열심히 준비해놓고 혼나는 건 싫은데...
"나... 나연이 너도 준비해줬었잖아.”
물론 나는 몰랐던 그녀만의 계획이기는 했지만,
"내가?”
“너 그 교복...”
차마 섹스를 위한 코스튬이라고 길거리에서 버젓이 이야기할 수 없었던 내가 말꼬리를 흐렸다.
“아아...”
나연이는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건 쌤쌤이다? 그런 거지?"
"응! 그니까 네가 한번 준비하고 내가 한번 준비했다? 이런 느낌으로?"
이것이 옳게 된 판결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연이는 내 발언에 수긍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뭐. 대신 오늘 나머지 돈 쓸 일 있으면 그건 내가 낼게.”
"응!"
나연이가 이제 가자는 듯이 앞으로 몸을 틀자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지하철 안쪽.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나연이가 내게 물었다.
"근데 오늘 밥 뭐야?"
"가서 보여줄게."
“막 엄청 요란한 거 해온 건 아니지?"
"아니? 그 정도는 아닌데?"
김밥이랑 유부초밥은 든든한 국밥 같은 도시락 메뉴였으니까.
"나는 요리 잘 못하는데 우리 언니는 엄청 잘한다?"
"아. 언니 있었어?"
“응. 근데 나랑 나이차이 좀 나기는 해.”
"직장인이셔?"
"그건 아니고 휴학 중이기는한데..."
나연이는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냥 휴학중이야. 졸업 얼마 안남았어."
“그렇구나.”
“재혁이 너는 형제자매 있어?"
"아니? 나는 나 혼자야."
나연이가 내 개인정보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다니...!
기분이 좋아진 내가 웃으며 답해주었다.
"그럴 거 같았어.”
...응?
좋은 건가?
뭔가 외동이라고 밝혔을 때 그럴 줄 알았다고 하면 보통 안 좋은 의미라고들 하던데.
"나 외동 같아보여?"
"엄청."
"진짜로? 왜?"
나 그렇게 못살게 굴거나 이기적으로 행동한 건가?
행여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연이한테는 언제나 최대한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노력했었는데...
"그냥 딱 봐도 그래 보여서."
"진짜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경으로 다시 되물었지만 그녀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금 하는 것도 딱 그래.”
주륵.
속으로 내적 눈물을 흘린 나는 머리를 아래로 숙였다.
"그렇구나.”
또 내가 뭔가 잘못했구나 싶어서 자신감이 수그러들어가는 그 순간이었다.
"근데.”
역전의 단어가 귓가에 올린다.
"나는 외동이라고 막 무조건 싫어하거나 그러지는 않아."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조금은 불그스름해진 볼.
찌푸러진 미간.
휴대폰을 꽉 쥔 나연이는 정말 짜증난다는 듯이 해명하는 것처럼 말했다.
"나름... 귀여운 구석도... 있다고 생각하기는 하는데..."
거짓말 안하고 이렇게 뽀뽀에 대한 욕구가 차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