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눈꽃은 검게 물든다.
치사한 수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나연이와의 관계를 가지던 중 카드 게임을 하자고 제안했다.
아니, 사실 제안이 아니라 강요에 가까운 태도이기는 했다.
그녀는 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표현을 했으나 내가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억지로 시킨 거였으니까.
작은 반항이었다.
나는 나연이를 좋아했지만 그렇다고 나연이에게 매번 강압적인 매도만을 퍼붓는 도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나도 자아가 있고, 하고 싶은 것이 명확하게 있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오늘은 완전 공기 취급에 가까운 모욕까지 당했는데 그녀의 의도대로 순순히 질내사정을 해준다면 나연이는 또다시 나를 비슷한 목적으로만 보자고 할 것 같았다.
...그게 겁이 나기도 했고 앞으로도 그렇게만 지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냥 섹스를 해준다는 빌미로 나는 오늘 챙겨왔던 카드게임을 하자고 고집을 피웠다.
나연이가 나에게 강압적인 섹스가 재밌고 짜릿한 행위라는 것을 가르쳐 주려고 한다면 나도 카드 게임이 충분히 재밌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상당히... 음...
이건 성공인걸까?
처음에는 뭐 되도 않는 걸 하냐며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지만 그녀가 점점 승부욕에 잠식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섹스를 했을 때 흥분감에 절여진 얼굴도 아니었으며 학교에서 나를 바라볼 때 특유의 졸린듯한 눈빛도 아니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생기가 돌고 있었으며 그녀의 꼭 깨문 입술에는 승리를 향한 갈망이 담겨져 있었다.
표정은 일류 도박사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녀에게는 게임에 영 재능이 없어 보였다.
물론 처음 해봐서 그런 것일 수도 있기는 했다.
자신에게 유리한 카드가 온 순간에는 몸을 움찔 떨면서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아서 찍어보았는데 이렇게 파멸적으로 이겨버럴 줄이야.
마지막에 반쯤 울 것 같은 얼굴로 내게 이건 말이 안 된다며 소리치는 그녀는 진짜 너무...
귀여웠다.
잠깐이지만 진짜로 연애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자친구의 자취방에서 집 데이트를 하는 커플.
남자친구는 여자친구의 응석을 받아주며 여자친구는 게임이 잘못됐다며 칭얼거리는 그런 느낌의...
"나연이 게임에서 지기는 했어도 선생님이랑 하고 싶은데...”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한나연 학생은 지치지도 않고 나와의 섹스를 희망했다.
"어떻게 안 될까요?"
난처한 웃음이 나온다.
아... 진짜...
조금 더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하려다가도 그녀의 땡그란 두 눈이 나를 바라보자 나는 또다시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거 하나만 약속해."
“뭔데요?”
"다음에는 밖에서 보자는 말했었잖아."
“네.”
"그거 꼭 지키는 걸로.”
나연이는 잠시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이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럼 나도 약속하나 해줘요. 쌤."
“...뭔데?”
아니, 이걸로 덜은 끝 아니야 싶었지만 그녀는 한가지 추가사항을 붙였다.
“앞으로 야한 짓 하다말고 딴짓하기 없기."
"그건.....!"
이거 약속해도 괜찮은 걸까?
솔직히 내가 우리의 관계에서 발언권을 갖고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것은 나연이와 야한 짓을 할 때 뿐이었다.
이걸 빌미로 뭔가를 요구하지 않으면 주도권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거 같은데...
"쫄기는."
그 말을 끝으로 나연이는 머뭇거리던 내 손을 낚아채 자신의 새끼손가락과 내 새끼손가락을 엮어주었다.
“그럼 이제 아까 하던 거 마저 해줘요.”
흩뿌려진 카드로 엉망이 되어버린 바닥을 바라본 나는 두 눈을 감았다.
후우...
"게임을 진 패배자 년 주제에 주둥이를 나불거리는구나."
... 우리의 비행청소년 학교놀이는 밤새 이어졌다.
말캉한데... 뭔가 딱딱해.
따듯함과 뜨거움 그 사이 어딘가의 온도감에 게슴츠레하게 눈이 떠진 나는 손가락을 꿈틀거려보았다.
...무거워.
팔을 낑낑대며 그의 허리춤에서 뽑아낸 나는 천천히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야."
검지를 들어 그의 볼을 쿡 찍어본다.
"야. 최재혁."
한 번 더 찌르자 최재혁은 미간을 한 번 찌푸리더니 나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야아... 너 뭐해....!”
난데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은 탓에 나는 반응도 하지 못하고 그의 체온을 온몸으로 느껴야만 했다.
얼굴이 목덜미에 가까워지자 어젯밤 내가 그의 목에 새긴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홧김에 하기는 했는데 아프지는 않은 걸까.
손가락을 꼼지락거려서 그의 상처부위를 건드러자 그가 눈을 뜬 듯 싶었다.
"... 일어났어?"
"응. 일어났으니까 이거 좀 놔줘."
"...싫어."
조금 전에는 그냥 잠투정이니 하고 넘어가려했지만 깬 상태에서도 이러다니.
"나 더워 놔줘."
"싫어어어...."
이제 보니까 얘는 아직도 잠이 덜깬 모양이었다.
"에잇."
그의 속박에서 탈출하기 위해 몸을 비틀어댄 나는 침대를 빠져나와 어제의 사건 현장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 뭐랄까....”
엉망으로 구겨진 교복 밑으로는 최재혁이 들고 왔던 카드들이 어지러이 흩뿌려져있었다.
교복을 빨래통에 집어넣은 나는 카드를 한 장씩 주워서 정리했다.
"...진짜 너도 제정신은 아니구나."
섹스를하다가 이걸 하자고 하는 놈이나.
그 와중에 섹스하고 싶어서 안달이나 같이 어울려준 나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한심함이었다.
"...나연아?"
정리를 하던 중 뒤쪽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나는 상체를 일으키고는 고개를 틀었다.
“...왜.”
남자애 주제에 왜 저러고 있는 거야.
그는 무슨 겁탈당한 공주님이라도 된 듯이 이불을 위로 당긴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픈 데는 없어?"
"...딱히?"
"어제 내가 좀 세게 한것 같아서...”
걱정이 가득 실려 있는 문장이었다.
"아... 맞긴 하지."
최재혁과의 2차전은 끝내주기는 했다.
그는 진짜 이진성이 강림이라도 한 듯이 내 엉덩이를 마구 때렸고, 나는 그의 밑에 깔려서 암컷처럼 울부짖으며 시간을 보냈다.
진짜 소설 속 묘사처럼 황홀하기는 했다.
어쩜 그렇게 섹스만 하면 사람이...
"그리고 그... 엉덩이에..."
어제의 기억에 취해있던 나는 그의 말에 정신이 돌아왔다.
엉덩이?
그가 내 엉덩이 이야기 하길래 고개를 꺾어 즉 아래를 내려다봤는데...
헐."
"아. 진짜 미안."
목에 남긴 키스마크 따위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내 왼쪽 엉덩이에는 시퍼런 멍이 커다랗게 들어있었다.
진짜 세게 맞기는 했나보구나.
그때 당시에는 쾌락에 취해서 마냥 좋기만 했는데.
"어... 아니야. 뭐. 비겼다고 치자. 나도 네 목에 남겼는데 뭐.”
"약 발라줄까?"
허둥지둥하며 침대에서 나온 최재혁이 내 앞에 섰다.
마음씨가 따듯한 애구나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내 시선을 강탈한 곳은 따로 있었다.
"...왜섰어?"
"이거는 그니까 음... 아침이라... 생리 현상?"
재빨리 두 손으로 자신의 막대를 가리고자 하는 그였지만 오히려 그 행위가 더 야해 보인다는 것을 저는 알까.
저렇게 손이 큰데도 다 안 가려지다니...
진짜 크기 하나는 엄청 크기는 했다.
“내 엉덩이 때린 거 생각하니까 또 흥분한 거지."
"아냐아냐! 나 진짜로 약 발라주고 싶어서... 혹시 연고 같은거 있어?"
등을 돌리고는 내 방 안쪽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은 뭔가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안 바를래."
"응?"
내가 거부하겠다는 표현을 하자 그가 무슨 소리나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또 맞을 건데 뭐 하러 발라.”
솔직히 지금 당장이라도 그와 한번 더 하고싶었는데 약은 혼자 있을 때 바르고 싶었다.
그 순간이었다.
몸을 다시 내 쪽으로 획 돌린 최재혁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누가 너 때려?"
엄청나게 진지한 표정.
조금 놀란 내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게 아니라면 혹시... 나 말고 다른 남자애..."
뭔가 상상의 나래를 미러 잘라두는 편이 좋겠다 싶었던 나는 바로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럼?"
"그냥 다음에도 네가 내 엉덩이 때려줬으면 한다는 말이었어."
...왜 이렇게 부끄럽냐.
무슨 고백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몸이 배배 꼬이는 것이 느껴졌다.
섹스 중이 아니라 그런 걸까, 그냥 현타가 섞인 아침이 찾아와서인 걸까.
오해를 풀고자 해명을 하기는 했는데 괜한 말을 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 안 때려."
"응?"
"나는 너 이제 안때릴 거야."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그가 내게 말했다.
"네가 암만 이런 거 좋아한다고 해도 나는 역시 너를 상처 입히는 건 못하겠어."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한다.
...뭘까. 이 느낌은.
갖고 싶은 것을 압수해간다는 말임이 분명했지만 내 가슴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생각을 역주행하는 감정.
"... 상처만 안나면 되는거야?"
이런 내 속내를 들키기 싫었던 나는 한발자국 더 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래야 얼굴이 보이지 않을 테니까.
이 이상은 완벽한 정면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물건이 나의 접근을 허하지 않겠다는 듯이 우뚝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살짝 비스듬히 몸을 틀고는 한 손으로는 그의 물건을 붙잡았다.
"멍들 정도로 때리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그래... 다시 해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겠지.
"한번 더 할래?"
...난 아직 인정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