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일러레님!-262화 (262/276)

〈262화>눈꽃은 검게 물든다.

...오늘도 하게 되는 걸까.

샤워를 마친 후 세면대 앞에 선 나는 또다시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해야만 했다.

자신은 집에서 놀고 싶다는 나연이의 말.

일단 나랑 놀고 싶다는 의사 표현을 했다는 점에서 눈부신 발전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거의 길가에 굴러다니던 돌멩이 취급을 받던 내가 이제는 함께하고 싶은 사람의 일부가 되었다는 거니까.

근데 그 방향성 이제... 음....

역시 하려나?

또 내가 이진성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는 걸까?

아. 차라리 직접적으로 말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뭔가 두루뭉술하게 집에서 놀고 싶다고 까지만 말하니까 이게 보드게임이라도 들고 가야되는 건지, 아니면 그때 남은 콘돔을 챙겨가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은 점점 흘러만 갔고 그에 따라 내 마음 속 불안감은 증폭되고 있었다.

아... 우....

그래...! 유비무환이라는 옛말이 있듯 그냥 전부 다 준비하면 아무런 걱정이 없어지는 거 아니겠냐고!

혼자 고민해봐야 뭣도 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 나는 일단 먼저 나연이네 집에 가서 함께 놀만할 거리를 생각해보았다.

집에 전에 엠티 때 가져가려고 했던 트럼프 카드도 좋을 거 같고... 음악 좋아하나?

나는 주섬주섬 책장 위에 있던 블루투스 스피커도 배낭에 챙겼다.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고 바닥에서 같이 오순도순 카드게임을 하는 거지!

뭔가 상상을 해보니까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장면 같았다.

내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집데이트 그 자체였다.

야식으로 먹을 것도 내가 해주면 좋을 텐데.

식재료도 이거저거 사가서 해준다고 할까 하다가도 통장 잔고가 떠오른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래. 재혁아. 꼭 한 번에 모든 걸 다 보여줄 필요는 없잖아.

어느 연애 코칭 영상 같은데에서 본 것 같은 내용이었다.

[너무 많은 것을 한 번에 보여주려고 하지 마라.]

서서히 알아가는 것이 더 오래 즐겁게 만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뭐 대충 그런 소리였던 것 같은데...

여차하면 나연이네 집에 있는 공책을 빌려 오목까지도 할 계획을 짜둔 나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며 스스로를 칭찬해 주었다.

후... 플랜 ABCD까지 완벽했다.

이제 만약에 나연이가 놀자는 것이 전에 걔네 집에서 했었던 어른들의 놀이라고 한다면....

아직 감이 다 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바이블의 복습은 필수였다.

[그녀를 감금했습니다]의 독자라는 것을 심지어 걸려버렸으니까 나는 조금 더 치밀하게 각색을 해야만 했다.

그대로 가져다 쓰면 바로 눈치를 채버리는 것이 여간내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에 노벨 월드 어플을 틀어놓은 나는 A4한장을 꺼내 바로 메모 작업에 들어갔다.

흐으음... 뭔가 인기 캐릭터들의 유명한 장면일수록 들킬 위험성이 크겠지?

일부러 최고 인기 히로인인 유소연과 강수연 파트를 거른 나는 간호사인 주민지와 일러레인 송한별 파트에서 대사들을 따오기로 했다.

주민지 파트는 굉장히 평이 좋은 파트들 중 하나였는데 나는 솔직히 이게 객관적으로 한겨울 작가가 글을 잘 써서 이런 반응이 나왔는지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도 그렇게 주민지 파트는 [그녀 감금] 독자들이 다들 혀를 내두르는 에이미 에피소드 바로 그 다음에 나온 히로인이었으니까.

‘Holy Shit, Fuck me.'와 같은 대사에 지친 독자들에게 있어 주민지는 미궁 속에서 발견한 활로와도 다름없는 존재였다.

아무튼직업이 간호사이니 만큼 이런저런 플레이들이 병원 안쪽에서 행해졌는데 나는 이런 조교 씬들에서 대사들을 하나씩 긁어내 보았다.

[너 같은 간호사년들한테 필요한 건 보지 주사잖아. 아니야?]

[이건 내가 너한테 주는 처방전이야. 1일 3회 매번 식사하기 전에는 꼭 정액 섭취해 주셔야 해요. 알겠죠?]

[진짜 너 같은 암컷한테 치료를 받아야하다니. 환자들이 불쌍하지도 않니?]

...이런 걸 어떻게 쓰는 걸까.

도무지 나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대사들이 매화마다 그득히 적혀있었다.

주민지 파트는 이 정도로 하고 그 다음 송한별 파트에서는....

20살 꿈과 희망에 가득찬 일러스트레이터 송한별.

이진성이 그녀를 타락시키는 과정은 정말이지 입을 틀어막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 사람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그림들을 그렸던 송한별은 변태 같은 야짤만을 그리는 그만의 암컷으로 변해갔다.

특히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겼던 연습용 손그림들이 가득한 노트를 스스로 울면서 찢어버리는 장면은 극찬이 가득했다.

[...이제 이런 거 안그럴게요. 나 이제 다시는 이런 거 안 그럴 테니까 제발...]

[한페이지도 남김없이 네 손으로 모두 찢어. 그것도 못 하겠으면서 자 를 빨겠다는

한별의 추억이 가장 따스했던 기억이 담겨져 있던 기록들이 무참하게 찢겨져나갔다.

산산조각이 나버린 꿈의 편린들.

이제 한별에게 남은 것은 정말로 진성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복습 차원에서 다시 읽고 있기는 한데 정말 이 세상 야설이 아님을 다시 절감하고 있었다.

나는 저렇게 절대 못해.

관계 자체를 강압적으로 가지는 거야 잠깐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저런 마음을 품고 사람을 저렇게 망가트리는 것은 절대 불가능이었다.

사이코패스라는 설정이기는 했지만 진짜 해도해도 너무한 사람이었다.

진짜 나연이도 대단하지... 어떻게 저런 캐릭터를 여자가 좋아할 수 있는 거지...?

그럼에도 할 일은 할 일이니까 꾸득꾸득 메모를 정리한 나는 거울 앞에 서서 연기 연습을 반복하고는 이제 나갈 준비를 했다.

아. 제발섹스 말고 그냥 놀자는 의미여라.

야한것이 싫은건 아니었지만 그거보다 나연이랑 대화를 더 많이 하고픈 나였다.

음악회 같은 것도 같이 가보고 싶은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방을 들쳐 메고 신발끈을 묶은 나는 현관문을 나섰다.

"흐응~흥~흥~"

나연이는 어쩜 그렇게 예쁘게 생긴 걸까.

혼자 주접을 떨면서 비탈길을 내려가자 어느덧 나는 나연이네 빌라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똑똑똑

멀찍이 문 뒤로 물러난 나는 반듯한 자세로 나연이를 기다렸다.

잠시 뒤 들려오는 발소리.

-끼이익

문이 열린다.

"어서오세요. 선생님."

...선생님?

혹시 내가 집을 착각해서 다른 방을 찾아온 건가 싶었으나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은 나연이가 분명했다.

현관 안쪽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나는 그녀가 어째서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는지 알 수 있었다.

"나연아. 너 왜...”

"에이. 선생님도 참...”

짝 달라붙는 교복.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교복 입고 고등학교를 다녔다고 생각하면 그닥 이상할 건 없었지만 중요한 그게 아니었다.

3개쯤 풀린 단추,

조금은 헐렁하게 늘어진 넥타이.

그리고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치마가...

치마가 너무 짧아!

진짜 까딱하다가는 속옷이 다 보일 것 같을 정도의 위화감이 드는 복장이었다.

"자. 여기 앉아요.”

나연이가 침대 위에 앉으라며 손짓하자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거기 가서 앉았다.

사실 저러고 있는 것을 보자마자 나연이는 저 상태 그대로 섹스를 원한다는 것을 눈치 채야 했어야 했지만 좀 많이 당황해버린 나는 얼을 타버린 나머지 그대로 최재혁인 상태로 안쪽까지 진입을 허가해버렸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내가 엄격한 선생님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기는 한데...

일단 조금만 더 상황을 지켜보고 판단하자 싶었던 나는 나연이의 말과 몸짓에 집중해 보았다.

"선생님, 저 오늘 나쁜 짓을 했거든요.”

"나쁜 짓?"

“네. 진짜 들으면 선생님이 화내실 지도 모르는 나쁜 짓이요."

조금은 비웃는 것 같이 히죽인 나연이가 살짝 허리를 숙였다.

와이셔츠 안쪽으로 보이는 아찔한 가슴골.

민망하기는 했지만 눈을 돌리지는 않았다.

자신감 있는 남자의 모습이 그녀가 좋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뭔데?"

"오늘 속옷을 안 입고 학교에 다녀와 버렸지 뭐에요?"

“뭐...?”

사고가 정지한다.

저 말이 진짜일까?

뭔가 컨셉인 것 같으면서도 진짜로 속옷을 안입고 다닌 게 아닌지 불안감이 마음속에서 샘솟았다.

자그마한 불안감의 씨앗이 급격한 속도로 뿌리를 내리고 나를 잠식해간다.

"다른 남자애들이 볼 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점점 더 치마를 위로 들어 올리는 나연이

이제 슬슬 속옷이 보여도 이상하지 않은 구간이었지만 내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흰색 살결이 전부였다.

“야하게 하고 다녀왔달까."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나는 너랑 즐겁게 보내고 싶어서 온종일 기대했는데.

너는 그런 꼴로 학교를 다녀왔다고?

백보 양보해서 그랬다고 한들 너를 좋아한다고 말한 남자애한테 꼭 그렇게 말해야겠어?

배낭을 벗어 침대 아래로 집어 던진 나는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엎드려. 이 변태 같은 년아."

진실이 무엇이 되었든 나는 지금 나연이가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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