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일러레님!-261화 (261/276)

<261화>눈꽃은 검게 물든다.

-I really enjoyed your Big Penis.

내 머리가 이상해져서 환청을 듣고 있는 걸까.

그러나 내 귓가에 맴돌고 있는 나연이의 목소리는 내 신체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Oh... I... uh..."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얼굴이 뜨거웠다.

아. 뭐라고 대답을 하지...?

"땡... 땡큐?"

내가 어쩔 줄 몰라하며 고맙다고 하자 나연이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유어 웰컴'이라며 내 말에 답해주었다.

잠시 정적이 우리 사이에 흐르자 교수님은 금방 수업을 마쳐주셨다.

짐을 정리하는 그녀에게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물었다.

"밥... 같이 먹을 거지?"

"응. 네가 사준다며."

"맞아맞아. 얼른 가자. 늦게 가면 또 사람 많아져서 줄 서야해."

사실 주머니 형편이 아직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지만 딱 며칠만 참으면 되니까.

나연이한테 없어 보이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첫 여자친구가 될 지도 모르는 아이인데...

잘해주고 싶은 생각밖에 없던 나였다.

경상대 건물을 벗어나자 눈부신 햇살이 우리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봄을 넘어 여름에 다가가는 날씨에 다음주가 된다면 반바지를 입고 학교에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잔디밭 옆을 나란히 걷고 있는 나와 나연이

우리... 다른 사람들이 보면 커플이라고 생각할까?

슬쩍 눈동자를 굴려 옆을 바라보았다.

검은 생머리가 바람에 흩날리자 나연이는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

.... 씨씨하고 싶다.

선배들도 동기들도 다 하지 말라고 아우성을 치는 캠퍼스 커플이었지만 나는 나연이라면 정말로 하고 싶은 생각이 가득이었다.

우리가 법학관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이미 제법 많은 학생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진짜 줄 섰네.”

나연이는 다소 의외라는 듯한 얼굴로 행열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야기했잖아. 이거 좀만 늦게 오면 이렇게 된대도.”

뭔가 나연이가 모르는 것을 내가 알려주는 것 같았던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았다.

"그러게.”

"뭐 먹을래?"

잠시 기다리자 키오스크 앞에 도달할 수 있었던 우리는 메뉴를 바라보았다.

"나는 김치 볶음밥.”

“그래? 그럼 나도 그거 먹어야겠다.”

지... 진짜 커플 같아!

나연이의 뒤에서 팔을 뻗어 버튼을 툭툭 누르고 카드를 꽂은 나는 이게 진짜 소위 말하는 '남친 행동' 인가에 관한 망상에 사로잡혔다.

드라마 같은 거 보면 이렇게 하면 여자들이 막 이성으로 자각하고 그러던데... 아닌가...?

선.

나는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 친밀도에 따라 지켜야할 선이 정해져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는데, 나연이에 한해서는 이 선을 어떡하면 좋을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이성과 할 수 있는 것이 섹스라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그것이 상식에서 벗어났다던지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허나 지금.

나는 그녀와 그렇게도 진하게 관계를 맺었음에도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얹는 것조차 눈치를 보고 있었다.

"자."

발급된 식권을 내 손에 쥐어주는 나연이

"아. 고마워."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까 또 나 혼자만 설렌 모양이었다.

역시 나연이는 나를 좋아하지는 않는 걸까...

“표정이 왜 그래? 무슨일 있어?"

"아냐...그냥..."

내가 쓴웃음을 짓자 나연이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이건 어떤 의미일까 싶었다.

"...나연아?"

그녀의 행동에 조금은 놀란 내가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자 나연이는 휙 고개를 돌렸다.

"...네가 오래 기다리면 줄선다며."

그 말을 끝으로 나연이는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함께 김치볶음밥을 배식해주는 곳으로 이동했다.

...나 쥰내 바보 같아.

솔직히 나도 내가 좀 얼빵한 구석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정도가 심한 것 같았다.

그냥 나연이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기분이 널뛰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바뀌는 것 같은 표정.

그리고 손목을 잡은 지금은....

“최재혁. 왜 그렇게 기분 나쁘게 웃는거야?"

"아? 내가 그랬어?"

아 근데 좋은 걸 어떡하냐고,

나연이가 다른 사람들 다 있는데서 내 손목 잡고 밥먹으러 가자고 해줬는데 어떻게 안 좋아하냐고,

아무도 내게 뭐라 하지 않았지만 나는 계속 머릿속으로 자기합리화를 이어갔다.

그래~ 이건 이진성이 왔더라도 웃을 일이었다.

저렇게 귀여운 애를 앞에 두고 있었더라면 분명히 그도 못 참았으리라.

아무튼 그랬을 것이었다.

"어. 그만 웃어. 나 이제 좀 무서워지려 해.”

"아. 미안미안.”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김치볶음밥을 입안에 넣었다.

비록 집에서 또 라면만 먹겠지만 그래도 좋았다.

"최재혁, 너 오늘 뭐 있어?"

...관심을 가져준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나연이가 궁금해 하고 있다.

혹시 오늘 나랑 뭐 하고 싶어서 그러는건가?

아. 근데 오늘 알바인데...

어떡하지... 사장님한테 말씀이라도 드려야 하는 걸까?

그냥 뭐 있냐고 물어보냐는 심플한 질문이었지만 내 눈은 핑핑 도는 것 같았다.

"아... 나 오늘 저녁에 알바 있기는 한데... 딱히 네가 필요하다면 오늘 안 가도 괜찮고, 내가 사장님한테 전화를 지금이라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가...”

"그럼 됐어.”

"아냐아냐아냐! 나 진짜 괜찮아! 안가도 된다니까!"

"아니, 일 있는 거잖아. 그냥 내일 보면 되는 걸․ 뭘.”

숟가락을 입에 문나연이가 조금은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아... 맞지... 난 또 오늘 아니면 안되는 줄 알고.”

"뭘 할지 알고는 그러는거야?"

나연이가 어이가 없다는듯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몰라.”

그냥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런 거지. 뭘

진짜 연인 사이었더라면 뒷말을 삼키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그건 내일 이야기해줄게. 오늘은 편하게 아르바이트 다녀와.”

하지만 결론적으로 나연이가 나를 먼저 사석에서 보고싶다고 한 것이었으니까 이건 긍정적인 결과였다.

"내일 몇시? 그냥 수업 끝나고?"

“음... 그래도 좋고, 아니면 저녁 먹고 느지막하게 찾아와도 좋고."

"찾아온다는 건..."

어디를 가는 게 아니라 찾아오라고...?

보통 오라고 할만한 장소를 떠올린다면...

“아. 그래. 저녁 8시쯤에 우리집으로 와라. 어때?”

또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나연이랑 단둘이 있어야 한다고...?

이미 한 번 경험을 해본 나는 그것이 상당히 기가 빨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 밖에서 보는 건 별로야?"

공동

그런 선택지는 없는 걸까...?

산책한다던지...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간다던지.

“나. 집에서 노는 걸 좋아해서 말이야."

나연이의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휜다.

...아찔한 눈웃음이었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별을 따다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웃음.

"이번에는 집에서 재밌게 놀고 다음에는 밖에서도 보면 되는 거잖아. 어때?”

...선택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알겠어. 그럼. 내일 너희 집으로 찾아갈게.”

사랑이란 잔혹한 감정은 나를 또다시 호랑이소굴로 이끌었다.

최재혁은 진짜 알기 쉬운 아이였다.

뭐랄까 뒤에서 꼼수를 부리거나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그에게는 조금은 그런 부분도 필요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냥 내가 무슨 말만 하면 헤벌쭉 했다가 시무룩해지는 것이 20살이 아니라 5살짜리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진짜 이진성과는 아득히 반대편에 있는 타입이기는 한데 중요한 점은...

별로 싫지 않다는 점?

그가 나를 덮치러 온 그날 이후로 그에 대한 내 기준이 무너졌음을 실감하고 있는 요즘이었다.

전 같으면 그냥 저런 남자는 당연히 아웃이지 하고 눈길도 주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눈길 수준이 아니었다.

이건 거의 상전모시는 수준인데,

"흐음...”

뭐 입지.

방청소를 또다시 싹한 내가 옷장 앞에 섰다.

집에서 뭘 입고 있나 고민하고 있는 것도 웃기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아예 아무런 준비를 안 하는 건 실례였다.

[그녀를 감금했습니다]에서도 복장은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하니까.

이진성은 언제나 여성들이 깔끔하게 준비해두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자였다.

본인이 지시한 의상을 초반에 억지로 입힌다면 그 이후부터는 히로인들이 직접 의상을 준비해야만 했다.

비참하게 따먹히면서 저질스러운 쾌감을 느끼기 위함이었다.

일러스트를 보면 컨셉별로 이상하게 개조된 옷 같지도 않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는데 아쉽게도 우리 집에는 그런 옷은 아직 없었다.

...언니네 집에 많던데.

순간 언니한테 좀 빌려달라고 말을 할까 싶다가도 이건 아닌 것 같아서 고개를 붕붕 흔들었다.

언니랑 오빠가 입으면서 온갖 체액이 다 묻었을 텐데 그걸 다시 입고 최재혁이랑 그러는 건 좀 그랬다.

결국 오늘 내가 입기로 마음을 굳힌 것은 이것.

사실 코스프레는 아니었다.

이건 실존하는 옷이었으니까.

다만 내가 작년까지만 입을 수 있었던 옷이었다는 점?

이거 지금 입어도 맞겠지?

속옷 차림으로 복장을 착용한 나는 승리를 확신하는 미소를 지었다.

“...끝났네.”

이거라면 최재혁을 각성시키기에 차고 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마를 살짝 더 올려 배꼽 선까지 당긴다.

딱 좋아. 딱 좋아.

아슬하게 팬티가 보일 것 같은 것이 무척 야해보였다.

그럼 이제 슬슬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똑똑똑

이윽고 정각이 되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퍼졌고 나는 비음 가득 섞인 목소리로 그를 환영해 주었다.

"어서오세요. 선생님."

만우절날 애들하고 사진 찍으려고 가져왔던 교복이 이렇게 재사용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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