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화 〉 눈꽃은 검게 물든다.
* * *
“...응?”
갈 곳 잃은 동공이 요동친다.
“그... 그게 뭔데?”
10년 전에나 느껴봤던 기분이었다.
엄마 몰래 정답지를 베껴서 문제집을 다 풀었다고 한 날.
나는 무척이나 혼난 후 엉덩이를 얻어맞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모를 리가 없을 거 같은데?”
물잔을 내려놓은 나연이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야 어제 네가 나한테 해준 말들... 나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멘트들이거든.”
머리를 열심히 굴리던 나는 역시 너무 원본을 그대로 인용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 나름 각색해서 가져온다고 가져온 건데...
역시 표절과 인용은 조심해야한다고 글쓰기 교수님이 괜히 이야기하신 것이 아니었다.
“...알기는 알지.”
“좋아해?”
마치 ‘무슨 책 좋아하세요?’ 같은 일상적인 질문이었지만 나는 이런 질문 하나하나가 뒤로가기 버튼 없는 OX퀴즈 같이 느껴졌다.
신중. 또 신중해야했다.
“...응.”
“그래?”
나연이는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 소설 참 좋아하는데 말이야.”
“아하하. 재밌기는 하지.”
“이진성 너무 멋있지 않니?”
아예 내가 그 소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자 나연이는 더 이상 내게 비밀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런가?”
가치관에 혼란이 온다.
이진성은 결국 히로인들을 조교하는데 성공해 그 어떤 법적 처벌도 받지 않게 되었지만 일단은 범죄자이기는 했다.
다른 사람을 동의 없이 감금하는 것은 명백한 납치범.
성교를 거부하는 여성에게 성기를 욱여넣는 희대의 강간범.
나연이는 지금 그런 그가 멋지다며 내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제 나는 네가 멈춰주지 않아서 좋았어.”
내가 실수라고 생각한 행동들이 나연이에게는 기쁨을 선사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기묘하게 느껴졌다.
스윽
무릎으로 내 바로 옆에 다가온 나연이가 내 허벅지 위에 손을 얹는다.
“네가 이거까지도 나랑 잘 맞는다면 나 진짜로 네 고백 받아줄 생각 있는데.”
고백이라는 말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백.
내가 이 곤란한 역경을 몇 번이고 넘어서서 얻고자 한 궁극의 목표 아니던가.
“뭐... 뭔데!”
진짜 최선의 대답을 할 자신 있었다.
아니? 나연이가 가장 좋아할만한 대답을 해야만 했다.
“그녀를 감금했습니다에서 여자 캐릭터들 총 몇 명 나오는지 아니? 재혁아?”
“10명.”
꿀꺽
긴장한 탓에 목구멍에 침이 넘어갔다.
“그럼 그 열 명 중에 누가 제일 좋아?”
솔직한 대답보다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줘야했다.
암만 생각해도 에이미는 아닐 것 같으니까 걔는 거르자.
그렇다면 후보는 총 9명.
정답을 맞히게 될 확률은 약 11퍼 정도였다.
최대한 나연이가 좋아할 만한 대답이라...
뭔가 가장 가학적인 플레이를 당한 히로인이 좋을 것 같은데...
우열을 가리기에 히로인들이 당한 조교들은 다 상식의 선을 까마득히 넘어버렸다.
“하... 한나은?”
결국 합리적인 선택을 내리는 것을 포기한 나는 이름이라도 비슷한 히로인을 말해주자고 생각했는데...
“넌 나가라.”
나는 그대로 나연이네 집에서 쫓겨났다.
* * *
아. 진짜 짜증나.
최재혁의 답변을 들은 나는 불편한 내색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자그마치 히로인이 10명인데...
아니지. 에이미는 제외한다고 치고.
꼴리는 히로인은 토탈 9명인데, 왜 그 많고 많은 애들 중에 우리 언니 이름인 히로인이란 말인가.
물론 이름만 같고 유사한 점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지만 그냥 내 기분이 언짢았다.
남가연이라고 대답해줬으면 그냥 바로 오늘부터 1일이라고 해주려고 했는데...
“에휴...”
아무래도 그에게는 남가연이 왜 훌륭한 히로인인지에 관한 지도가 필요할 것 같았다.
하다못해 가장 인기가 많은 유소연이라고 하던가.
괜히 언니의 얼굴이 떠오른 나는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최재혁한테 개인적으로 연락이라도 보낼까 싶었지만 오늘은 필수 영어 수업이 있는 날.
나는 좋으나 싫으나 그와 마주쳐야만 했다.
수고를 덜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조금 웃기기는 했다.
불과 한 1주일 전만해도 걔랑 같이 듣는 영어 수업만 되면 사약이 내려진 충신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를 만나는 것이 조금 기대되고 있었다.
거울 앞에 앉은 채 립클로즈를 바른 나는 오늘의 화장 상태를 점검했다.
비록 이제는 처녀가 아니게 되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이진성이 좋아할 법한 청초한 느낌이 들기는 했다.
“...좋다.”
마무리로 눈썹까지 그린 나는 그대로 가방을 챙기고는 밖을 나섰다.
화창한 날씨.
괜스레 입가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약 15분 정도를 걸어서 도착한 학교.
강의실에 도착한 나는 눈을 한 바퀴 굴려 최재혁을 찾았다.
어차피 교수님의 지시 때문에 우리는 수업 시작 전부터 같이 앉아야하는 운명.
수업에 나오지 않는 이상 그가 나를 피할 방도는 없었다.
아. 저기에 있네.
잘 보이지도 않는 구석에 앉은 최재혁을 발견한 나는 씨익 웃음을 지었다.
“안녕?”
최대한 상냥한 말투로 말을 한다고 한 건데 최재혁은 무슨 마녀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야. 실례야.
오늘 너 만난다고 화장까지 열심히 했는데... 이씨...
뭔가 그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 안녕? 하하...”
“어제는 잘 들어갔어?”
옆으로 머리를 쓸어넘긴다.
남자들이 이거 하면 좋아한다던데.
슬쩍 최재혁의 반응을 살피고자 곁눈질을 했는데 그는 이쪽은 보지도 않고 책상 위에 프린트물에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럼. 잘 들어갔지...”
아. 진짜. 완전 찐따 같아.
밥그릇을 앞으로 들이밀어 주는데도 안 먹는 최재혁을 보며 나는 답답한 게이지가 쭈욱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어필을! 하고! 있잖아!
좀 보라고!
내가 좋다고 한 주제에 나랑은 눈도 안 맞추려고 하다니.
갑자기 현타가 오는 것 같았다.
나 얘랑 이러고 있는게 맞는 건가.
하지만 최재혁이 보여준 고점은 확실히 내가 그리던 이상형의 모습이기는 했다.
그가 바지 안쪽에 숨기고 있는 물건도, 나를 내려다보던 그 싸늘한 눈빛도.
나를 미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남자이기는 했다.
“재혁아.”
호칭을 바꿔보자.
아무래도 최재혁이라는 호칭은 조금은 거리가 있는 것 같이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
“응?”
“나 좀 봐봐.”
강제로 그의 눈을 이쪽으로 돌리게 만든다.
요전번 우리집에서도 느꼈던 것이기는 한데...
최재혁은 진짜 커다란 강아지라는 생각이 물씬 드는 남자애였다.
덩치는 저렇게 크면서 내 말에 움츠리고 있다니.
고개를 젓고 싶은 기분을 참고 그의 허벅지 위에 손을 얹었다.
“오늘 점심 같이 먹고 싶은데.”
그래... 이런 애들은 떠먹여줘야지 눈치도 채고 말도 들으니까.
“시간 어때?”
“나... 나는 좋지. 아. 그래. 우리 또 법학관 가서 먹을까? 그날 맛있지 않았어?”
거 참 법학관 엄청 좋아하네.
솔직히 그날 내가 뭐 시켰는지 기억도 제대로 안 났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주었다.
“아. 그럴까?”
“나야 좋지. 가면. 오늘은 내가 살게! 지난번에 네가 사줬잖아.”
“근데 그건 택시비였잖아.”
굳이 안 사줘도 되는데.
그에게 어필을 하고 있기는 했으나 그에게 금전을 갈취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냐아냐. 오늘은 내가 사줄게.”
한 번 더 거절할까 싶다가도 어딘가 들떠 보이는 그의 표정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이따 같이 가자.”
“응!”
이윽고 시작된 수업.
사실 영어 회화 수업이 대학생한테 뭐 그렇게 필요한가 싶기는 했지만 나는 그래도 시키면 열심히 하는 편이기는 했다.
“자. 여러분 이제 이야기해본 주제가 아니더라도 자유롭게 이야기 나눠보는 시간 딱 10분 갖도록 할게요.”
“대신 꼭 영어로 하셔야해요. 영어로.”
교수님의 설명이 끝나자 나는 살짝 몸을 비틀어 다리를 꼬고는 옆자리 댕댕이를 바라보았다.
“Mr. Choi."
어차피 잡담을 하라고 준 시간.
나는 그에게 슬그머니 어제 하루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았다.
“How was your yesterday?"
참 있을 법하면서도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어제 어땠냐는 질문에 최재혁은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Nice?"
푸흡.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삐져나왔다.
아니. 그렇게 성대한 첫경험을 했는데 조금 더 멋진 말이라든지 설명을 길게 한다든지 그런 선택지는 없는 거야?
나이스가 뭐야. 나이스가.
내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한 마디 덧붙였다.
“Very?"
말을 말자...
내가 아무런 대답을 않자 이번에는 최재혁 쪽에서 내게 먼저 질문을 해왔다.
“Ho.. How about you?"
너도 한 번 당해봐. 최재혁.
이 무안함을 혼자 맛볼 수는 없는 법.
이것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손을 뻗어 그의 귀를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남에게는 절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속삭임.
“I really enjoyed your Big Penis."
최재혁의 얼굴이 토마토 마냥 새빨갛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