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9화 〉 눈꽃은 검게 물든다.
* * *
눈이 풀린 상태로 내 밑에 깔려 신음소리를 내뱉는 나연이는 그야말로 남자의 정기를 빨아먹는 서큐버스와도 같았다.
“하아... 하아... 재혁아... 사랑해...”
사랑한다고 하면 멈추기로 합의를 본 것은 사실이었지만 오히려 저 말은 나로 하여금 한층 더 멈출 수 없는 이유를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아직 이렇다 하게 뭐라고 정의할 수 있는 사이가 되지는 못했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마치 그녀와 내가 실제로 사랑하는 연인 사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기에.
한여름 밤의 꿈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를 놓을 수가 없었다.
“하응... 보지 찢어져... 나. 나. 진짜 보지 찢어져... 흐이잇...!”
환상과 현실 그 중간 어딘가에서 우리는 계속 서로의 몸을 탐했다.
“하아... 이제 슬슬 싸줄게. 이 정액받이 년아.”
정말 더는 피스톤질을 못할 수준에 이르자 나는 그녀에게 신호를 주었다.
“안에... 안에 해주세요...!”
허리를 비틀며 몸부림치던 나연이의 허가 신고에 나는 바로 안에다 정액을 쭈욱 싸냈다.
뷰릇 뷰릇 뷰르르릇
뇌가 마비되는 것 같은 아찔한 쾌감이 척추를 타고 흐른다.
“하아... 하아...”
마치 달리기를 하다가 멈춘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섹스... 힘들구나...
당연히 기분이 좋은 것은 좋은 것이었지만 체력도 이만저만 소모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나연이 옆에 누워 잠을 청하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됐다.
“한나연.”
자지를 뽑아내자 꾸덕한 하얀 액체가 그녀의 안쪽에서 흘러나왔다.
뭔가 이런 컨셉을 계속 유지해야 하나 싶다가도 두 눈을 감고 쓰러져버린 나연이를 보니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랑한다고 하면 그만 한다며.”
조금은 원망이 섞인 듯한 그녀의 목소리.
나는 내가 실수했다라는 것을 직감하자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아... 그게...”
“더 하고 싶었어?”
슬며시 눈을 뜬 나연이는 내 뒷목을 잡아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무너지는 중심.
앞으로 쏠리는 상체.
내 얼굴은 나연이 바로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두근두근두근
심장이 허리를 흔들던 때만큼 빠르게 뛰었다.
“대답해봐. 최재혁. 내가 하는 말 무시하고 안에 싸버리고 싶어서 그렇게 한 거냐고.”
무척이나 단호한 목소리에는 어딘가 압도되는 느낌이 있었다.
“...응.”
애써 거짓을 말하는 것도 별로라고 생각했고, 이렇다 할 변명거리도 생각나지 않았던 나는 그녀에게 진실을 고했다.
아직도 열기가 가시지 않았는지 발그스름해진 볼은 그녀를 더 야하게 보이게 해주고 있었다.
“진짜?”
“...응.”
“그렇구나.”
그 말을 마친 나연이는 이번에는 나를 뒤로 밀치더니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씻을게.”
좋았는지 싫었는지 대답도 해주지 않은 그녀는 자기 물어보고 싶은 것만 물어보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혼자 알몸으로 남겨진 나는 이거 다음으로는 어떡하고 있어야하나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 이대로 집에 가야 하나?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맞는 것일까?
솔직히 이진성 역할을 하며 섹스를 하는 것이 끝났으니 이 다음으로는 어떤 모습을 보여줘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우물쭈물하며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었는데...
“뭐해. 안 들어오고.”
화장실 문 밖으로 고개만 빼꼼 내민 나연이의 부름에 나는 벌떡 일어나서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 * *
삐비비빅 삐비비빅
어김없이 울리는 알람소리.
당장 끄고 조금만 더 자야겠다 싶었던 나는 팔을 뻗었다.
눈을 감고 있었기에 아무런 자각 없이 손을 더듬었는데...
“음...?”
말캉한 감촉.
부드러운 물건들로 가득한 침대라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마치 푸딩과도 같은...
“...야.”
이어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눈이 번쩍 떠졌다.
“아?”
처음으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짙은 검정색 머리카락이 조금은 헝클어진 나연이의 모습이었다.
새하얀 얼굴 위에는 아지 가시지 않은 졸음기가 남아있었다.
“너 뭐햐냐.”
하품을 하는 탓에 조금은 새어버린 발음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의 말 속 내용은 그러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알람을 끄겠답시고 움켜쥔 것은 그녀의 말캉한 가슴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알람 끄려고 한 건데...”
“네 눈에는 그게 알람이니.”
“...아니오.”
어제의 기억이 떠오른다.
나연이와 함께 샤워를 마친 나는 그녀의 명령에 따라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우리는 알몸 그대로 함께 잠을 청했으며, 섹스 후 찾아오는 피로감은 정말 눈 깜박할 사이에 우리를 꿈나라로 데려갔었다.
“그리고 너 알람은 뭐 이렇게 일찍 해놓은 거야?”
언제나 어지간하면 아침 8시에는 일어나려고 하는 나였다.
“미안.”
손을 후다닥 치운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 휴대폰 알람을 껐다.
이미 자고 간 것부터가 뇌절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이라도 철수해야겠다 생각이 들었는데...
“나연아. 나 이제...”
“가지 마.”
나연이의 팔이 힘없이 자기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여기 있어.”
“...네.”
좋기는 좋은데 가시방석 위에 누워있는 것 같다고 할까.
나는 나연이가 내게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를 좋아하게 됐나 싶어 설레발을 치려고 하다가도 뭔가 나연이의 태도는 좋아하는 사람한테 할 법한 그런 느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먹고 싶어.”
“아침?”
“응... 빵 같은 거...”
...나연이는 빵을 좋아하는구나.
사실 그냥 평범한 대화는 거의 해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그녀의 기호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어떤 음식을 싫어하는지. 어떤 가수를 좋아하는지. 좋아하는 동물은 있는지.
“집에 빵 있어?”
“식빵만.”
눈을 감고 이야기 하는 모습이 왜 이렇게 귀여워 보이는 걸까.
나연이가 내 표정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나는 입가에 지어지는 미소를 참지 않았다.
“그럼... 내가 빵이랑 뭐 해줄까?”
“웅...”
어제의 해프닝이 과연 내가 점수를 따는데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아침을 준비하는 건 확실히 도움이 될 것이었다.
“알았어...! 좀만 기다려...!”
자는 나연이를 방해하지 않기 위에 살살 다시 일어난 나는 입고왔던 옷을 다시 입고는 나연이의 부엌을 살펴보았다.
나연이는 그렇게까지 요리를 좋아하지는 않았는지 식기도 그렇고 식재료도 그렇고 종류는 다양하지 않았다.
냉장고 안쪽에는 그래도 반찬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안에는 짧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이거 1주일 안에 먹어. 안 그러면 상해.]
상당히 아기자기한 글씨체.
누군가 해주신 거 같은데 어머님이시려나?
반찬들은 상당히 맛있어 보이기는 했지만 나연이는 빵이 먹고 싶다고 했으니까.
펜에 식용유를 두르고 냉장고에서 꺼낸 계란을 까서 넣자 치이익 소리와 함께 후라이가 익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요리라고 할 것도 없는 단촐한 메뉴였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아이한테 밥을 차려줄 수 있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나중에도 또 시켜줬으면 좋겠는데...
자취를 하면서 내 밥상을 화려하게 차려 먹는 것은 치울 것이 많아 좋아하지 않았지만 요리 자체는 제법 열심히 했던 나였다.
본가에 있을 때 이태리 요리 레시피 같은 것도 구매해서 해봤던 나는 다음에는 나연이한테 내 진짜 실력을 보여줄 기회가 왔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노릇하게 익은 토스트.
약간의 소금과 후추를 뿌려놓은 계란후라이.
잼 병을 들고 온 나는 구석에 놓인 상을 펼쳐 음식들을 가져다놓은 뒤에 나연이 옆으로 다가갔다.
“...나연아.”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나연이는 몸을 반대편으로 돌렸는데 그 바람에 이불이 가려주고 있었던 그녀의 엉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엉덩이를 내가 어제.
막 흥분해서 좀 때리기도 한 것 같았는데 갑자기 귀가 치이이익 익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흠... 흠! 나연아!”
내가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자 나연이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안 갔네...?”
아니. 네가 가지 말라며.
억울한 마음에 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나는 고개를 젔고는 그녀를 일으켜주었다.
“내가 밥 했어!”
어서 보고 칭찬해달라는 투로 그녀의 반응을 살폈는데...
“뭐야. 너 왜 이런 거 해놨어.”
“네가 빵 먹고 싶다고 했잖아.”
“...내가?”
아무래도 나연이는 진짜로 잠꼬대를 한 모양이었다.
“...아니었어?”
“몰라 기억 안 나.”
이불로 자신의 몸을 가린 나연이는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내게 옷장 안 잠옷을 꺼내달라는 부탁을 했다.
연보라색 잠옷을 입은 나연이는 일어나더니 상 앞에 바로 앉았다.
“흐으음~”
잠에서 깨고 싶었는지 기지개를 쭉 켜는 그녀.
“잘 먹을게. 최재혁.”
“응! 많이 먹어!”
그렇게 우리는 아무런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토스트 위에 계란을 얹어 한 입 베어무는 나연이.
오물오물 먹는 모습에 내 마음이 사르르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최재혁.”
“응?”
또 너무 쳐다봤나 싶어서 시선을 그릇으로 옮기는데...
“너 [그녀를 감금했습니다]라는 소설 알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