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5화 〉 눈꽃은 검게 물든다.
* * *
“자. 여러분들. 지난 시간에 어디까지 했었죠?”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하는 교수님의 말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시선을 책상 위 노트에만 집중할 뿐.
전혀 설명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
이유야 간단했다.
나연이의 말에 휴학을 하려던 결심은 한 줌의 먼지가 되어버렸고, 내게 남겨진 과제는 오늘 9시에 치러야 하는 거사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으음...
마음 같아서는 심신의 안정을 위해 바이블인 [그녀를 감금했습니다]를 빨리 읽고 싶었지만 이곳은 강의실.
행여 누군가 보게 된다면 상당한 오해를 살 확률이 높았다.
아니. 사실 오해도 아니었다.
그냥 나는 야설을 보는 게 맞았으니까.
나연이의 이름을 노트에 적은 나는 그녀의 이름을 중심으로 펜을 빙글빙글 돌렸다.
정답.
그녀가 원하는 정답이 무엇이었는가를 나는 반나절 정도 안에 알아내야만 했다.
그나마 내가 생각했을 때 가장 유력한 후보라고 함은...
아니... 근데 이거는... 쓰으읍...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자그마한 글씨로 생각을 노트에 적어나간다.
[나연이는 콘돔 없는 질내사정 첫 경험을 원한다???]
이게 맞을까 싶은 의문이 들면서도 여태 그녀가 보여준 행보를 되짚어보면 가능성이 0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까지 가서 펠라를 성공시킨 것부터가 이미 판타지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무너진 환상과 현실의 경계선.
어쩌면 답은 조금 더 환상에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었다.
100프로라고 장담은 못하니까.
아니라고 할 경우 진짜 그건 돌이킬 수 없는 건데...
아. 그냥 안 가고 싶다.
솔직히 그냥 집에 틀어박혀서 이불 안에 숨어있고 싶은 기분이었다.
제발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으나 내 지갑...
내 지갑은 찾아와야지...
나는 나연이의 이름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할 뿐이었다.
* * *
[20:30]
“이 씹변태 같은 년이 분수를 모르고 기어올라?”
“좆집이면 좆집답게 굴라고!”
“빨리 말해. 죄송하다고 말하라고!”
거울 앞에 선 내가 쥐고 있는 것은 A4용지.
종이 안쪽에는 [그녀를 감금했습니다]에서 나온 문장들을 엇비슷하게 각색한 대사들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그래. 너도 알잖아. 그렇게 가랑이나 벌리고 있을 때 네가 가장 가치 있다는 걸.”
벌써 몇 시간째일까.
집에 돌아온 나는 거의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의 마인드로 지문을 분석하고 메모를 남겼다.
보다 더 완벽한 9시를 위함이었다.
[그녀를 감금했습니다]에 이진성이 어떻게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는지 따위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가 끝음을 내려 저 대사를 하는지 올려서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끊임없이 그것을 내 입으로 반복함에 따라 가장 적합한 느낌을 찾아내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지금.
거울에 비친 나는 충분히 성욕에 미친 사이코패스 같은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실제로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내 심경이 이상한 방향으로 승화한 것인지 텅 빈 눈빛에는 사랑이 담겨있지 않았으며, 입가에 걸린 웃음은 어딘가 망가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생각했다.
“슬슬 가볼까.”
또다시 최면을 건다.
나는 이진성이다.
나는 이진성이다.
나는 이진성이어야만 한다.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조금은 모양새가 빠지기는 하지만 소중한 지갑을 돌려받기 위하여.
나는 이진성이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어제와 정확하게 같은 시각에 집에서 나온 나는 골목을 따라 나연이네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밖은 아침만큼은 아니었으나 여전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에 빗방울이 흩날리는 것을 보자 뭔가 범죄를 저지르기 좋은 날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지 밑단이 살짝 젖어 애매한 불쾌감이 몰려올 때 즈음 나는 나연이네 빌라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선을 접은 나는 느릿하게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한 칸 한 칸 올라설 때마다 내 정신은 한층 더 강한 무장이 아로새겨지는 것 같았다.
어제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노라는 스스로와의 맹약.
나연이네 집 문 앞에 도달한 나는 그대로 툭 우산을 떨어트렸다.
역시나 어제와 마찬가지로 열려있는 현관문.
문고리를 붙잡은 나는 망설임 없이 한 번에 안쪽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내가 어제와 달라졌듯이 나연이 또한 어제와는 달랐다.
띠로리로리
잠금 장치가 외부인을 차단해주고 있다는 신호음이 들리자 나는 신발을 벗고는 무릎을 꿇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기본은 되어 있구나.”
내가 들어도 나 같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내가 각성에 성공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어제와 같은 잠옷을 입은 채 무릎을 꿇고 있었던 그녀가 나를 올려다본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어제처럼 어설픈 거부 따위 하지 않았다.
나연이의 눈동자에 담긴 감정을 나는 이제 똑바로 마주할 수 있었다.
두려움과 흥분감이 공존하고 있는 암컷.
그것이 우리과 애들 모두가 선망하고 있는 한나연의 실상이었다.
“비가 좀 많이 와서 말이야...”
나는 아무런 예고도 하지 않고 바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어깨가 조금은 젖은 티셔츠도. 밑단이 젖어 드라이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바지도. 남색의 트렁크 팬티까지도 모두.
나연이가 눈앞에 없는 것처럼 그대로 벗었다.
“샤워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나연이는 이런 내 말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조금은 혼란스러운 듯한 얼굴이었다.
“발닦개가 필요해서 말이지.”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한층 더 확대된다.
눈치가 빠른 그녀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안 벗고 뭐하냐?”
내가 언짢다는 얼굴로 핀잔을 주자마자 나연이는 허겁지겁 잠옷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한심한 눈초리로 바라본 나는 문을 열고는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나연이의 화장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연이가 옷을 벗고 있는 사이, 나는 눈을 굴려 화장실 안쪽을 살펴보았다.
어느 자취방이나 비슷하겠지만 한 사람을 위해 제작된 화장실은 두 사람이 이거저거 하기에 넉넉한 공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자 알몸이 된 나연이가 얼굴을 붉히고는 안쪽으로 따라 들어왔다.
“왜 가려.”
한쪽 팔로는 젖꼭지 부분을, 다른 한쪽 팔로는 자신의 은밀한 부위를 가리고 있던 나연이는 내 지시에 수줍은 듯 팔을 내려 차렷 자세를 취했다.
치이이익
손잡이를 올리자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진다.
내 등을 타고 따스운 물이 흘러내리자 나는 바디워시 통을 들고는 그녀의 가슴에 넉넉하게 짜냈다.
“뭐 해야 하는지 알지?”
나연이가 [그녀를 감금했습니다]의 마니아라면 이 장면을 모를 리 없었다.
“...네.”
질척한 액체가 나연이의 복숭아 같은 가슴을 타고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시각적인 자극은 충분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거짓말 안 하고 야동 그 자체 같은 장면들이 이어졌다.
나연이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향긋한 바디워시를 자신의 가슴에 골고루 펴바른다.
손끝으로 살살 거품을 내 생크림 같은 느낌을 낸 나연이는 자신의 가슴과 허리에 골고루 비누칠을 했고 나는 그 장면을 잠자코 바라만 보았다.
...달려들고 싶다.
지금 당장이라도 나연이를 눕혀서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기분이 샘솟았지만 그것도 하면 안 되는 행동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절제된 광기.
그것이 이진성이란 캐릭터를 대변하는 키워드였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된 것 같자 나는 나연이에게 다음 지시를 내렸다.
“네가 물고 빨아야 되니까 구석구석 잘 닦아라.”
“네.”
그 말을 끝으로 침을 꿀꺽 삼킨 나연이는 천천히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가슴으로 내 하반신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아. 아래를 못 보겠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지만 내 물건은 이미 70퍼 이상은 발기가 된 것 같았다.
너무 자극이 강렬했다.
짝사랑하고 있던 여자애가 알몸으로 창녀 같은 짓을 해주는데 이걸 참을 수 있는 남성이 얼마나 있겠는가.
젖꼭지가 허벅지를 쓸고 내려가며 비눗길을 만들자 그 아찔한 부드러움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이거 어디에 기대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면 모양 빠지는데...
[그녀를 감금했습니다]는 절대 경험이 될 수 없었다.
이런 것을 받으면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멀쩡하게 서있는다고?
이진성이 남들보다 감도가 10배는 낮은 것이 아니라면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윽스윽 가슴을 흔들어 왼쪽과 오른쪽 다리에 골고루 비누칠을 완료한 나연이.
점점 더 상체를 향해 움직이고자 한 그녀였지만 그녀 앞을 가로막고 있던 것은...
흥분에 절여져 우뚝 선 내 커다란 자지였다.
내 허벅지 위에 손에 올린 나연이가 탄성을 내뱉는다.
“아...!”
이렇게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때가 아니었다.
“갖고 싶으면 성의를 보여야지. 나연아.”
“...네. 주인님.”
나는 저 말을 듣는 것만으로 사정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