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156. 엔딩
나른해질 정도로 따스한 볕이 창가에서 쏟아지고 있었으나, 나와 나은이
사이 에 서 오가는 대화는 그러지 못했다.
“아니.오빠. 이거 맞아요? 전개?”
입술을 앞으로한껏 내민 나은이의 얼굴에는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그녀를 감금했습니다] 최신화를 읽은 나은이는 아침부터 내내 저런 상
태였다.
“응. 맞아.”
“아니.조교를 다해놓고 애들을 버리면 어떡해요!”
진짜 화난 것처럼 나를 몰아붙이는 하얀 눈꽃님.
...가스라이팅 하지 마. 너:
“아니. 나나 다른 독자들 기분은 생각 안 해요? 자기가 응원하고 좋아했
던 캐릭터가 버려지는 것을 지켜만 보라고요?”
그래... 이것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
암만노예라고 매번 명시했지만 애정이 생길 것이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
고 있었다.
나도 그랬다.
얼마나 한 명 한 명 열심히 조형했는데.
사실 나은이보다도 캐릭터들에게 더 애정을 많이 품고 있는 것은 나였으
리라.
“…그런 설정이니까.”
“아.오빠.독자들도 진짜 이런 전개 안좋아할 거라니까요? 유도리 있게
엔딩 방향만 좀 틀면 괜찮잖아요.”
“그만. 한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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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인 것도 알고 있고, 누구보다 소중한 여 자친구였지 만 이 이상 선을
넘는 것은 원치 않았다.
“내 가 이 상한 방향으로 끝내 라는 것도 아니 잖아요! 그냥 그대로 모두가
행복하게 변태 같은 섹스를 하며 끝낸다고 하면 누가 뭐 라고 하겠냐고요!”
더는 듣기 가 버 겁 다고 생 각한 나는 지 갑과 휴대 폰을 챙 기 고는 현관으로
향했다.
“바람 쐬고 온다.”
“오빠!”
애처로운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나은이를 뒤로 하고는 빌라 건물을 빠져
나온 나는 늘 산책을 나가던 공원으로 향했다.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 가 담배 를 폈다면 지금이 딱 그 타이밍 이 었을 것 같은데 …
애석하게도 비흡연자인 나는 한숨만 내뱉을 뿐이 었다.
[그녀를 감금했습니다]
지금의 작가 한겨울이 있게 해준 소설.
성욕의 화신인 이진성과그의 열 명의 암컷 노예들.
오랜 기간 연재했음에도 이 소설이 꾸준하게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이유는
이진성 이 라는 주인공 때문이 라고 생 각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메마른 그였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성들과 몸을 섞고 또 섞 었지 만 그는 단 한 번도 노예들
에게 마음을 내준 적이 없었다.
만약 그에 게 조금이 라도 로맨스의 향이 남아있었더 라면 이 소설은 첫 번
째 히로인인 강수연에서 끝났었어야했다.
충분히 매력이 넘치는 히로인이었다.
심지어 진성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 히로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다음 타깃을 찾아 작업에 착수했
다.
‘이진성’이라는 캐릭터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괴물 ‘탐’과 같은 존재.
아무리 많은 여 성들을 조교하고 굴복시 키 고 따먹 더 라도 그는 항상 굶주
려 있었다.
성욕은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었으며, 세상에 젊고 아름다운 처녀
들이 계속 태어나는 한그는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 소설이 완성되는 방법은, 이진성이 자신이 어떤 인간임을 그
녀들에 게 알려줘 야만 한다고 생 각했다.
완벽히 일방적인 맹목적인 사랑으로만 이루어진 관계.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이 빛이 바래 버려질지라도 마음을 다하는 봉사.
그것이 내가생각하는 [그녀를 감금했습니다]의 이상적인 엔딩이었다.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휴대폰을 꺼 내들었다.
[여보세요.]
[어디에요.]
[여기 편의점 앞공원.]
[...내가 소설 얘기해서 도망간 거예요?]
[응.]
잠시 아무런 말이 없는 나은이.
[밥은 집에와서 먹을거예요?]
[...차려줄 거야?]
[그건 그거고 이건이거니까.]
나은이의 마음 속 응어리는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았지만 내게 밥은 해주
겠다는 나은이.
그녀 때문에 심란했던 것이 사르르녹는 것 같은느낌에 피식 웃음이 나왔
다.
[...뭐 해줄건데?]
[지금 그렇게 나가놓고 반찬투정이라도 하겠다는 소리에요?]
[간장게장 먹고 싶네. 오랜만에.]
괜히 장난을 치고 싶어 연애하기 전에 해줬던 양념게장이 먹고 싶다고 말
해 보았다.
[...해주면 엔딩 수정해주나요?]
[그건 그거고 이건이거니까.]
불과 꿓초 전에 그녀가 해줬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일단 들어와요. 소설 얘기 오늘은 더 안 할 테니까.]
[알았어.]
전화를끊은 나는 엔딩에 대해 다시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읽은 [그녀를 감금했습니다]의 최신화.
나는 보자마자 욕지 거리 가 튀 어나오려고 하는 것을 간신히 참아야만 했
다.
[너희 는 모두 쓰다 버 리 는 물건들이 다.]
시발... 시발...
히로인들을 버려...? 버린다고...?
아니. 그럼 내가 여태 그려준 일러들은 사실 모두 폐품들이란 소리라는 건
가?
갑자기 히로인들의 입장에 과몰입하게 된 나는 오빠를 마구마구 갈궜다.
[그렇게 엔딩 나면 오빠 차기작을 누가 봐요.]
[이거 통수를손으로 친 것도 아니에요. 빠따로 친 거지.]
[수정해! 한겨울! 수정하라고!]
아침부터 오후 내내 잔소리를 퍼붓자 오빠는 도망치듯이 밖으로 나가버
렸다.
내가 심했나 싶다가도 아니 근데 못 참겠는 걸 어떡해...
물론 우리 한겨울 작가님 이 어련히 다 생각이 있다고는 믿고 있었지 만 적
어도 오늘 본 최 신화는 진짜 좀 그랬다.
나를 부정 당하는 느낌 이 라고 해 야 하나.
잠시라도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면 속이 메스꺼워질 정도의 거북함이 올
라왔다.
하아...
이 걸 어쩌 면 좋아 싶었지 만 내게 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
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차피 오빠의 이름으로 쓴 오빠의 소설이 었다.
내 가 찐팬 이 라고는 하지 만 내 용을 터 치 하게 된 다면 그건 더 이 상 오빠의
소설이 아니게 되는 것.
다시 한 번만 생각해달라고 어필을 멈출 생각은 없었지만 어차피 칼자루
는 오빠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럼 내가 할일은...
대충 후드티를 뒤 집어쓴 나는 바로 장바구니를 들고 마트로 향했다.
…
집을 들어가자마자 코를 자극하는 진한 간장향.
“뭐해.”
“보면 몰라요. 간장게 장 하는 중이 잖아요.”
“아니, 진짜로해주는 거야? 장은 언제 봤어?”
부엌에는 냉장고에서 볼 수 없었던 재료들이 쭉 정돈되어 있었다.
“오빠가 먹고 싶다고 해서 바로 가서 사왔죠.”
아니. 당신 화난 것아니었어?
뭐 이렇게 열심히 준비를하는 거야.
고맙기는 했지만 그녀의 호의에 숨겨진 진의가 무엇인지 나는 파악해야
만했다.
“고맙기는 한데 너 이거 가지고 엔딩 타령 하려고...!”
나은이가 검지가 내 입안으로 들어왔다.
입 안에 퍼지는 달달한 간장향.
오우... 좀지리는데...
“오늘은소설 얘기 안할 거라고했잖아요.”
빙그레 웃는 나은이.
“어때요. 간은 잘 맞아요?”
“섹스.”
“훌륭하다는 소리군요.”
역시 척 하면 척인 내 여자친구였다.
“가서 좀 놀고 있어요. 이거 시간 좀 걸릴 것 같으니까요.”
“내가뭐 도와줄건 없어?”
“오빠 하는 것 보면 내가 속 터져서 잔소리할 것 같으니까, 그냥 가서 놀아
요.”
...이게 여자친구야. 엄마야.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지만 가서 놀라는데 버티고 있을 이유도 없었던 나
는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침대와 스마트폰.
참으로도 근본 있는 조합이 라고 나는 그리 생 각했다.
오늘은 그래도 역시 좀 긴장되는 느낌.
평소에는 주로 재밌네, 꼴리네 이런 댓글들이 다수를 차지했더라면 오늘
은 그렇지 만은 않을 것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노벨 월드 어플에 접속한 나는 댓글의 수부터 확인해 보고자 했다.
평소에는 약 200개 정도 달렸던 것 같은데…
오늘은 자그마치 500개 가 넘 어 가는 댓글.
이 것이 말해주고 있는 사실은 극명했다.
현재 [그녀를 감금했습니 다]는 불타고 있다.
댓글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은 500명이나 되는 독자분들이 모두 글을 남
겨주신 것이 아닐 것이었다.
안에서 소설 내용을 옹호하는 사람과 비 판하는 사람들이 투닥투닥하고
있을 확률이 거의 100프로라는소리.
여태까지 [그녀를 감금했습니다]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 었다.
그야 이 소설은 인물만 계속 바뀔 뿐 패턴은 비슷했기 때문에 전개 자체에
불만을 품는 독자들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순진한 여자애를 꼬셔서 감금해 조교한 이후 180도 달라진 암노예로 개
조한다는데 어느 야설 독자가 이거에 대해 태클을 걸겠단 말인가.
하지만 엔딩은 확실히 다를 수 있었다.
이게 뭐라고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눈을 딱 감고 댓글
창을 눌러보았다.
그리고 나를 기 다리고 있던 것은...
“...나은아.”
“아직 밥다안됐는데요?”
“그게 아니라.”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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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좀 안아주라.”
“엥.갑자기요?”
당황한 듯이 보이는 나은이.
아직 비 닐장갑도 다 벗지 못한 그녀를 나는 와락 껴 안았다.
“왜 그래요. 무슨일 있어요?”
“보지말걸 그랬어.”
잠시 아무런 대답이 없던 그녀는 내가 이내 무엇을 확인했는지 눈치 챈 모
양이었다.
“댓글창 봤구나. 오빠.”
“응.보지말걸 그랬네.”
나은이는 내 옷이 더러워지지 않는 선에서 나를 끌어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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