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148.나가
“내 책이야.”
호흡을 고른 나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진실을 이야기 해주
고자 했다.
“이... 망측한 야설이 언니 책이라고?”
읽어나 보고 저렇게 이야기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오빠를
지 켜주기 위 해 일부만 진실을 공개할 생 각이 었다.
“응. 내 돈내고 내가샀고, 닉네임 싸인까지 받았어.”
나연이는 조금은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워... 원래 이런 것 보는 사람 아니 었잖아.”
“성인이 야한소설 좀 읽는 것이 뭐 어때서.”
뻔뻔해져야했다.
당연히 나연이가 놀라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여기서 삐끗하다가는 나연이
와 오빠 사이에 골만 깊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도 그건...”
“그것보다한나연. 너 누가허락도 없이 남의 물건 만지래.”
물론 공개 적 인 장소에 있는 책 인 것은 맞았지 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 가 막
꺼 내서 만져도 된다는 것은 아니 었다.
내 물건을 다른 사람이 만지는 것에 엄격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건 내가
아끼고 또 아끼는 한정판 소장본.
나연이 앞으로 다가간 나는 그녀 가 손에 붙들고 있던 책을 빼 앗아왔다.
촤라라락.
혹시나책에 흠집이 나거나구겨지지 않았을까싶어 체크를 하던 나는 인
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 왜 접혔어.”
“아... 내가보다가 떨어트려서...”
“허락도 없이 만진 것도 좀 그런데, 망가트리 기까지 해 ?”
이건 연기가 아니라 진짜 분노.
깊은 빡침이 척추를 타고 머리까지 도달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언니! 구긴 것은 미안하긴 한데, 그런 책 때문에 지금 나한테 이렇게
까지 화내는 거야?”
그런 책.
그런 책이라...
내 가 사랑해서 헌신적으로 그림을 그렸던 책 이.
오빠가 고뇌하며 어떻게 따먹을지 밤을 새가며 집필했던 책이.
“...나가.”
“뭐...?”
“나가라고. 한나연.”
오른팔을 뻗어 현관문을 검지로 가리켰다.
“언니. 진짜로 저 책 때문에 나한테 그러는 거야? 정신 차려. 저거 야설이잖
아. 그것도 어디 가서 누구 앞에 꺼 내놓을 수도 없는 변태 같은 야설!”
무엇 하나 틀린 것 없는 이 야기 였다.
하지만 진실이고 나발이고 나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 것도모르면서 그딴식으로 이야기하지 마.”
“언니...”
“ 나가.”
결국 나의 강요에 못이 긴 나연 이는 추리 닝 차림 으로 휴대폰 지 갑만을 챙
기고 밖으로 나섰다.
문이 쾅 닫히자 나는 컵을 집어 들어 냉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하아...
식탁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그녀를 감금했습니다] 단행본.
울적해진 나는 커버 위에 수놓인 쇠사슬을 쓰다듬었다.
“뭐야.왜 이렇게 안색이 안좋아.”
오빠는 이제야 일어났는지 방문을 열고 내 옆 의자에 앉았다.
“어제 새벽에 나연이랑얘기했어요?”
식 탁 위 를 슥 한 번 스캔한 오빠는 고개 를 끄덕 였다.
“자꾸만 내 책이라고 뭐라고 하길래 아니라고 한마디 해줬지.”
“잘했어요.”
“나연이랑 싸웠어?”
내 손을 붙잡는 오빠의 눈에는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싸운건 아니고 내쫓았어요.”
“더 심한데. 그건.”
“아니. 근데 자꾸 걔 가 그딴 책 이 라고 뭐 라 하잖아요.”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는 정말 소중한 무언가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
는 것을 모를 나이 는 아니 었다.
그래도 막상 처음으로 현생에서 [그녀 감금]이 매도당하는 것을 들으니까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야설이니까.”
오빠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내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래서. 내가 작가인 것도 이야기했어?”
“아뇨. 제가 일러레인 것도 말 안 했는데요?”
“말할 예정이야?”
“...아니요. 비밀로 할래요.”
오빠도 분명 나연이가 책을 욕했다고 하면 같이 화내줄 줄 알았는데, 오빠
는 자꾸 안쓰럽게 아무런 말도 않고 나를 끌어 안아만 주었다.
“…전에는 내가 소설 욕해서 따먹을라고 했잖아요.”
“그건 네가 도발했으니까.”
“나연이한테는 왜 뭐라 안해요.”
“처제가될 지도모르는 아이인데 어떻게 그러겠어.그리고딱히...”
잠시 말을 끊은 오빠는 단행본을 펼쳐들었다.
“그런 취급 받아도 별 수 없으니까.”
야설과 야짤.
온라인 공간에 서는 수요도 있고, 인지도도 있을지 몰랐지 만 이 게 우리
현실이었다.
여태까지 우리 두 사람 모두 잘 숨기고 살아서 별 문제를 못 느꼈던 것이지
이게 오프라인 공간으로 넘어왔을 때 어떤 문제와 맞닥트리는지 경험한 것
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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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누가 남자 아니랄까봐 오빠는 공감보다는 해결책을 먼저 찾고 있었다.
“설명해야죠.”
“어떻게.”
“나는 마조히 스트고, 그런 소설 읽는 것도 좋아한다는 것을요.”
“…그렇게 말하면 이해를 해주려나?”
나연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를 일이었다.
“혼란스러워 하겠지만 걔 가 별 수 있겠나요. 내가 그렇다는데
“미 안 ”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사과하지 마요. 오빠 사과할 것 하나 없으니까.”
우리는 그렇게 제법 오랜 시간 아무런 말없이 문제의 금서.
단행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
처음이었다.
언니가 내게 그토록 성난 얼굴을 보인 것은.
워낙 나이 차이가 있던 언니였던지라 언니는 언제나 내게 져준다는 사실
을 철이 들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평소에 자주 티격태 격하고 싸움도 잦은 사이 였더라면 차라리 이렇게 서
럽지는 않을 것 같았는데, 우리가 언성을 높인 첫 번째 사건이 이거라는 것이
참으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근처 공원에 벤치에 주저앉은 나는 턱을 괴고는 대답 없는 푸념을 하기
시작했다.
“…그깟야설이 뭐라고.”
몰래 책을 읽은것.
그리 고 책 을 읽 다가 떨 어트려 일부 페 이 지 가 살짝 접 힌 것.
모두 내 잘못이기는 했다.
아니 솔직히 책이 접힌 것은 어느 정도는 오빠 탓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새벽에 사람 깜짝 놀라게 등장만 안 했더라면 그런 사고는 없었으
리라.
괜히 오빠가 미워진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책이 언니 것이었다니...
영 락없는 오빠의 책 이 라고 믿 었던 나는 충격 에서 헤 어 나오지 를 못하고
있었다.
언니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걸까.
아니면 대학에 간 이후 떨어져 살며 그렇게 변한것일까.
언니의 말이 사실이 라고 한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아무런 문제 가 없는 것
이 라고 봐도 무방했다.
오빠는 내 상상처럼 무시무시한 사람이 아닐 것이며, 오히려 언니의 특이
취 향을 맞춰 주느라 고생하는 남자일 수도 있었다.
문득 오빠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보려고 본 것은 아니 었지만 달려 있었던 거대한 물건...
흡사 [그녀를 감금했습니다] 속 이진성의 자지 묘사와 비슷하게 느껴질 정
도로 커다란 사이즈.
언니가 그런 소설을 읽는 것을 그리 좋아한다면 어디서 오빠의 매력을 느
꼈는지 하나 정도는 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위이이이잉
울리는 휴대폰.
[여보세요.]
[...들어와.]
언니였다.
[...나가라고 한지 1시간도 안 지났는데.]
[내가 좀 말을 심하게 한 것 같아서.]
[아냐...그럴수 있지...]
[아무튼들어와서 마저 이야기 좀해.]
[알았어.]
전화를 끊은 나는 다시 터벅터벅 집을 향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솔직히 제대로 씻고 나왔다면 친구라도 만나러 갈지도 몰랐으나 다급하
게 내쫓긴 탓에 머리도 감지 못한상태였다.
화장도 당연히 했을 리 가 없었다.
그래도 책을 만진 것 자체는 한 번 더 사과해야겠다 싶었던 나는 문 앞에
서 짧은 심호흡을 하고는 벨을 눌렀다.
띵동.
언 니 가 나오리 라 생 각했는데 의 외 로 문을 열 어준 것은 오빠였다.
“금방 왔네?”
“요 앞공원에 앉아있었거든요.”
“들어와. 밥 먹자.”
부엌에 들어서자 매콤한 냄새가 훅 코를 찔렀다.
메뉴는 떡볶이.
어디서 사온 것처럼 생긴 비쥬얼이었지만 언니가해준 떡볶이를 이미 몇
차례 먹어본 나는 언니의 수제 작품임을 한눈에 알수 있었다.
걸쭉한 소스에 잘 버무려진 떡은 누가 보더라도 군침을 흘릴만한 퀄리티
를 자랑했다.
“손 씻고 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릇을 식탁위 에 셋팅하던 언니는 나를 한 번 슥
쳐다보았다.
셋 이서 밥을 먹 어본 역사상 가장 조용한 식사가 아니 었을까.
오빠는 애써 우리 두 사람에게 대화를 시도해보려고 했지만 반응이 시
큰둥하자 멋쩍은 얼굴로 젓가락만 움직 일 뿐이 었다.
괜히 우리 탓에 불편하게 만든것 같아서 미안한느낌이었지만,그렇다고
내가 먼저 막무슨 말을 꺼내기도 애매하다고 생각했다.
언니가미리 이야기를 한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미리 예정이 잡혀 있던 것
인지는 모르겠지 만 오빠는 운동을 다녀오겠다며 후다닥 집을 나섰다.
아까 전과 마찬가지 인 구도.
나란히 마주앉은 우리 자매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정적을 깬 것은 언니였다.
“나연아. 있잖아.”
“응.”
“이리들어와볼래?”
드르륵 소리를 내며 의자가 뒤로 밀리자 언니는 몸을 일으켜 내게는 허락
되 지 않은 공간으로 나를 이 끌었다.
나는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오빠의 방 앞에 선 우리 두 사람.
문고리에 손을 얹은 언니가 천천히 손잡이를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