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143.어나금
“오빠. 진짜 미안해요.”
한숨을 내쉬며 커피를 건네는 나은이에게 나는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니야. 나연이도 그래도 외출 자주 하겠지.”
내가 허락을 했지만 나은이는 여전히 마음이 쓰였는지 나를 보며 안절부
절 못했다.
“그래도요.오빠그러다가소설 제때 마감못하면...”
역시나 나의 애독자 하얀 눈꽃님.
손을 뻗어 나은이의 머리 위에 얹은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그녀를 안
심시켰다.
“내 가 휴재하는 동안 아무것도 안 했을까. 이 사람아.”
“오...쓰는 것 본 적이 없었는데 몰래 비축이라도 만들어 둔 거예요?”
그런 것이 있을 리가.
“머릿속으로 다 구상은 해 놨지.”
“그럼 없다는거네요.”
“굳이 그렇게 말로 얘기를해야해?”
긍정적으로 살자고. 긍정적으로.
“하아... 그래도 나연이 보는데서 작업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잖아요.”
그건 그렇기는 했다.
하루 종일 알트탭 을 누르며 사장님 몰래 딴 짓하는 사원 마냥 소설을 쓴다
면 이게 제대로 진행이 될 리가.
안 그래도 소설을 쓸 때는 몰입해서 쭈우욱 내 지르는 편이 었기 에 흐름이
끊기는 것은 무척이나 짜증나는 일이 었다.
“너처럼 스터디카페나 다녀올까봐.”
“음... 그것도 나쁘지 않기는 한데 ... 그럼 그거 비용은 내가 오빠 줄게요.”
“에이. 뭐. 그거 얼마나 한다고. 됐어.”
그렇게 연인 사이에 돈을 주고받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에요. 굳이 오빠 안 써도 될 돈 나 때문에 쓰는 거니까 이건 내 가 내 게
해줘요.”
테 이블 위 에 휴대 폰을 집 어든 그녀는 바로 내 게 10만원 을 계 좌이 체 시 켰
다.
“야. 너무 많아.”
“...커피라도 사먹으면서 하라고그런 거예요.”
진짜 나사가 풀린 것 같으면서도 이럴 때 보면 일처리가 깔끔한 나은이였
다.
집 근처 카페로 잠시 피난을 나온 상태였기에 그녀의 엉덩이를 주
물럭 거 리 며 칭 찬해 싶은 욕구를 참느라 무척 이 나 고생 이 었다.
실제로 만져도 뭐라 하지 않았을 것 같으나 오히려 괴로운 것은 나였다.
집 에 가봐야 섹스도 못 하는데 .
아닌가. 오히려 자위 프리 기간이라 기뻐하려나.
잠시 무엇이 더 좋은 것일까 생각해본 나는 그래도 섹스를 못 하는 쪽이
조금 더 아쉬운 것 같았다.
그냥 정자들은 아껴놨다가 나은이 뒷구멍에 싸버려야지 .
다시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가면서 내 처지를 속으로 한탄하고 있었는데
어째 나은이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녀의 입에서도 탄식이
새어나왔다.
“아... 섹스하고 싶다...”
장소가 없는 것도 아니고 여자친구가 없는 것도 아닌데 못 하다니.
애석한 일이 아닐 수가.
“ 나도.,,
나은이의 손을 꼬옥 붙잡은 내 가 그녀의 의견에 동조했다.
“...조만간 모텔이 라도 한 번 갈까요?”
“그것도 나쁘지 않네.”
대실이 라... 그리운 울림 이구만.
사실 대실은 나은이와의 첫 사적 만남 이후로 해본 적도 없었다.
서로의 자취방이라는 훌륭한 공간들이 존재했고 그 이후에는 아예 집을
하나로 합쳐버렸으니 말이다.
“내가 숙박어플 찾아볼게요.”
어쩜 이렇게 해맑게 웃을수 있는 걸까.
솜사탕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웃는 그녀의 얼굴에서 나는 영문 모를 동
심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집 에 들어 가기 전 식료품을 좀 사자며 나를 마트로 이끈 나은이는 나를
카트 셔틀로 이용하기 시 작했다.
“이거랑... 이거랑... 오빠두부찌개 좋아해요?”
“우리 엄마 버전은 별로기는 한데... 네 가 해주는 것은 먹 어볼게.”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나은이 가 두부를 카트에 담으며 나를 흘겨보았다.
“오빠 친구들이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그런 식으로 내 얘기 하고 다니
는것아니죠?”
“미안한데 네가 우리 엄마보다 훨씬 요리 잘해.”
어머니. 죄송합니다.
그치 만 사실인 걸요.
나은이의 요리 실력은 거짓말 안 하고 팔아도 잘 팔릴 것 같다는 생 각도
자주들었다.
“…칭찬은 고맙지 만 엄마 흉을 보는 건 별로라고 생 각해요.”
“나도 앞에서는 맛있다고해 드려. 너무그러지 마라.”
고기 코너 앞에 선 나은이는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가격을 비교해 보
았다.
“쓰으읍... 아...할인은 이쪽이 더 많이 들어가기는했는데,그래도 나연이
좋아하는 부위를 사는 것이 낫겠죠?”
“나연이 좋아하는 것 해줘. 어차피 나야매일 같이 네가해주는 밥 얻어먹
으니까.”
“사람들은 그걸 복에 겨운 인생이 라고들 하죠.”
...재수없어라.
별달리 틀린 말은 없기에 옆에서 아무런 말도 하고 않고우두커니 서 있었
다.
각종 채소와 육류의 구매를 마친 우리는 비닐봉투 가득 음식을 담고는 집
으로 향했다.
“오빠. 일러스트는 언제쯤 필요해요?”
“나연이 가고 나서 시작해도 너끈해. 아마 에필로그까지 한 40화 정도 생
각하고 있으니까.”
에필로그라는 말에 나은이의 발걸음이 멈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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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씨, 웹툰, 소설, 등등 10만개 이상의 파일이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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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필... 로그...?”
“아니. 전부터 내가말했잖아. 나유진이 마지막히로인이라고.”
나유진 에피소드 자체는 아마 30화 안쪽으로 끝내고 마지막 10화 정도는
히 로인들 모두가 나오는 씬을 써 볼까 구상중이 었다.
“..외전 100편.”
“예...?”
뭔 가 살벌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외 전으로 100편 써오라고요. 오빠.”
그녀의 얼토당토 않는 발언에 헛웃음이 나온 나는 봉투 들고 있지 않은 반
대쪽 손을 뻗어 꿀밤을 때렸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요녀석아.”
하지 만 나의 폭력 에도 굴하지 않고 나은이는 꿋꿋하게 자기 의 견을 피 력
하기 시작했다.
“아니...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있어요…? 내가그소설 얼마나사랑하는지
알잖아요... 어...? 매일매일 보고 싶다고. 진짜 개꼴린다고 댓글도 하루도 안
빠지고 달아줬는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한겨울. 이거는 매너가 아니죠
. 외전은 최소 100편 이상. 아니지... 본편도 140편 정도만 더 쓰고 외전 100
편 쓰자... 내가 일러스트 몇 장이고 더 그려줄 테니까.”
얘한테 이런 구석도 있었나...
이렇게 말을 빨리 하는 것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는 나은이의 등에서는 흡사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알았어. 알겠으니까. 일단집에 가자.”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오히려 감금되는 것은 나일지도 모른
다는 생 각에 나는 화제 를 돌리 며 비 탈길을 올라갔다.
:k * *
집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언니의 컴퓨터 의자위에 앉아서 멍하니
창밖을 내 다보았다.
남향이 라 그런지 오후의 햇살은 무척 이 나 따사롭게 느껴 졌다.
겨울이 끝나감에도 여전히 추운 날씨가 반복되 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
은 봄이 찾아온 것 같은 감성이 랄까.
언 니 가 새 로이 자리 잡은 보금자리 는 무척 이 나 좋은 집 인 것 같았다.
집은좋은데 말이지...
언니 집에 대해 어쩌고할때가 아니었다.
정작 나는 계약해놓은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정말로 내 탓이 아니었기에 언니의 꾸지람에 대해서는 여전
히 납득할수 없었다.
이사를 하려고 했는데 당일 아침에 嬖일씩이나 미뤄달라는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정말 미안하다는 집주인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정말이지 골이 띵해져 오
는것이 느껴졌다.
화를 내거나 억지를 부려서 어찌할수 없는 상황임을 인지하고나자 허탈
하다고 해야하나.
바로 언니에게 사실을 알리고 엄마한테 오늘 택배를 보내지 말라고 말한
나는 기운이 쭉 빠졌다.
...성 인이 된다고 다 잘 풀리는 것은 아니 구나.
의 자를 빙그르 돌려 뒤편에 있던 자그마한 책장을 바라본 나는 건축학과
커플의 책들을 쭈욱 스캔해 보았다.
여기저기 보이는 건축 잡지와 서적들.
잘 모르겠지만 벌써 주제부터 어려워 보이는 책들도 사뭇 보였다.
[현대 건축의 철학적 도전]
[건축구조역학의 이해]
언니랑 오빠는 매 일 같이 이런 것을 읽는 걸까.
참으로 고역 이 라는 생 각이 들면서 혹시 만화책 이 나 다른 재 미 있는 책들
은 없을까싶어 시선을 아래로 내렸는데 유독한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세로로 꽂혀져 있는 검정색 하드커버.
은색의 띠가 나선의 모양으로 엮여 쇠사슬을 연상시키는 패턴을 반복하
고 있었다.
어째 무슨 책인지 알 수 없게 설계를 해놓은 것 같은 느낌.
이건 무슨 책일까.
딱히 숨겨져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거실에 진열해둔 것을 보면 일기장이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
검지를 뻗어 책을 당기자 스르륵 밀려나오는 한권의 도서.
[그녀를 감금했습니다]
그녀를 감금했습니 다...?
소설인가...?
커버를 넘기자보이는 주황색 색지 위에 적혀져 있는한문장.
[하얀눈꽃님! 언제나 감사합니다! -한겨울-]
하얀 눈꽃은 누구를 지칭하는 말일까?
한겨울...이라면 이 글을 쓴 작가란 말인가?
대형 서점에서 하는 북콘서트 비슷한 건가 싶었던 나는 근데 왜 이름을 하
얀 눈꽃으로 받았을까 싶은 생 각이 들었다.
언니면 언니 오빠면 오빠. 그냥 이름으로 받아도 됐을 것 같은데.
그 다음 페 이 지를 넘 기 자 고급스러운 질감의 흰색 종이 가 소설이 시 작되
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볕이 들지 않는 방에는 깊이를 알수 없는 어둠이 자리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