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128.판도라
타닥. 타다다닥.
나와 나은이의 즐거운 대화소리로 가득했던 거실은 이제 오롯이 내 키보
드 소리만이 정적으로부터 저항하고 있었다.
“후우. • • ”
기지개를 쭉 켠 나는 일찌감치 자리를 뜬 나은이의 책상 쪽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큰 모니터를 두고 왜 밖에서 굳이 강의를 듣겠다는 건지.
스터디카페 가서 앉아있는것도 다돈일 텐데 말이지.
스트레칭을 위해 의자에서 일어난 나는 쭈욱 허리를 폈다.
트레 이 너 에 게 혹사당한 허 벅 지 가 비 명을 토해 내 고 있었지 만 인간은 적응
의 동물이라는 말이 있듯, 이런 근육통에도 제법 익숙해져가는 나였다.
[그녀를 감금했습니다.]를 장식할 마지막 히로인의 이름은 나유진.
직업은어린이집 강사.
가장 때 묻지 않은 깨끗한 여성들을 육변기로 삼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설
정한 이진성은 마음 속 깊이 따듯하게 모성애가 자리 잡은 그녀를 파멸로
밀어 넣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는 설정 이 었다.
그 따듯한 마음으로 품어야 할 것은 어린 아이들의 미소가 아니라, 자신의
두꺼운 자지임을 알게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
이미 업데이트된 [나유진(1)] 에피소드는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다들 송한별을 이길 수 있을까 흥미롭게 지켜봐주시는 것 같았지만 글쎄...
그건 작가인 나조차도 뭐 라고 확답을 내 기에는 어려운 것 같았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 히로인을 구상해보고자 해온 나였다.
물론 에이미는 좀 말아먹기는 했지만, 사람이 어떻게 매번 홈런만 치겠냐
고.
파울도 좀 있고 그런 거지.
모니터 앞에 다시 착석한 나는 다시 소설 집필을위해 유치원 선생님들의
일상을 담은 클립들을 보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하루 일과 시 간표, 그녀들이 입고 있는 복장, 아이들을 대하는
말투와 타인을 대할 때의 말투 차이 .
이 런 것들이 다 하나하나 피 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이 었다.
계속 아이들이 뛰노는 영상을 시 청하다보니 , 분명 야설을 위 한 밑작업 이
었음에도 내 마음 속 어딘가에서 아이를 갖고 싶다는 열망이 피 어올랐다.
나와 나은이를 닮은 아이 라...
이왕이 면 나은이를 닮았으면 좋겠는데 말이 지 .
자그마한 미니 나은이가 집에서 기어 다닌다고 생각하니까 정말이지 너무
나도 귀여울 것 같았다.
혼자 멍하니 웃음을 짓던 나는 다시 한 번 나은이의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이런 이 야기 할 때 같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
[젖꼭지 더 빨딱세워주세요. 유두도 더 크게 그려주시고요.]
[지금보다 더 커지면 좀 비율이 이상하게 보이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일단
은 이렇게 준비 해왔는데...]
[그건 제 가 직접 보고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수정해볼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너무힘들어.
책상 위에 가져온 커다란 테 이크아웃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 마신 나는 땅
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스터디카페.
그곳에서도 가장 비싼 1인실을 따로 끊은 나는 부지런하게 외주 작품들
을 그려내고 있었다.
씁주 만에 무려 꿓장을 그려 야하는 거 였다.
시 간이 빠듯한 것은 당연한 노릇.
게다가 오빠 선물을 미리 구매해서 배송을 받을 것까지 고려한다면 최소
한 두 장은 뫫일 안쪽에는 끝내 놔야했다.
원래 그림을 그리는 것을 그렇게 까지 싫어하는 것은 아니 었지만, 진짜 근
며칠간은 정말 너무 그리고 싶지가 않았다.
심 적 부담감도 부담감이고,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 자체 가 너무 하드 했기
때문이었다.
이건 더 이상 정상적인 인체가 아니었다.
오빠는 아무리 캐릭터를 벗기든 성기를 노출하든 기본적인 비율은 무조건
챙 겼는데,이번 의뢰 자는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게 더 자극적 인 성기
만을 그리 기를 강요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환불해 주고 다른 작가를 알아보라고 하고 싶 었지 만
시 간이 시 간이 었는지 라 나는 울며 겨 자 먹 기 로 다시 마우스를 움직 이 기 시 작
했다.
진짜 카페에 한 번 올 때마다 최대한 많이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던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그리고 또 그렸다.
더 이상 손이 아파서 버티지 못하겠다 싶어서 잠깐 내려놓고 시간을 봤는
데...
[17:56]
[부재중 전화: 오빠 (4)]
아아... 늦었구나...
그래도 오빠랑 너무 거리를 두는 것은 좀 아닌 것 같아서 언제나 오빠 피티
수업 전에는 꼭 집 에 들어갔는데, 오늘은 내 가 시 간 확인을 못 한 모양이 었
다.
지 금이 라도 전화 해 봐야겠다 싶 었던 나는 뒤 늦게 전화를 걸 어 봤지 만 오
빠는 연락을 받지 않았다.
하긴... 지금 한참 운동할 시간이 겠구나.
먹다 남은 커피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노트북과 충전기를 가방에 쑤셔 넣
은 나는 울적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분명 오빠를 기쁘게 만들어주고 싶어서 시작한 건데, 어째 점점 더 오빠에
게 소홀해지는 것 같은느낌.
낮에 이곳에 도착했을 때 분명히 엄청 환했던 것 같은데 어느덧 해는 산등
성이에 걸쳐 귀 가할 각만 보고 있었다.
삐. 삐. 삐. 삐.
집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집 안쪽에는 아무런 불도 켜져 있지 않았다.
가방을 내 책상의자위에 휙 던진 나는오빠의 책상에 가서 앉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오빠가 [그녀를 감금했습니 다]를 쓰고 있던 책상.
오빠가 보고 싶었다.
그림도 오빠 그림 만 그리고 싶었다.
가만히 앉아서 발을 붕붕 흔들고 있던 나는 현관에서 울리는 비밀번호 소
리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빠!”
a
야.”
반갑게 그를 맞아주려 했지 만 오빠의 반응은 싸늘하기 만 했다.
“너 어디서 뭐하다왔냐.”
“어디라뇨. 아침에 스터디카페 다녀온다고 말 했잖아요.”
“스터디카페. 간 것 맞아?”
오빠의 차가운 반응에 괜히 섭섭해진다.
“저 의심하는 거예요?”
“그럴만하지 않냐.스터디카페 간다던 애가 집도 안오고 전화도 안 받는
데.”
“그건...”
구구절절 맞는 말.
하지만 나라고 절대 좋아서 그러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강의 듣느라그런 거예요. 전화못 받아서 미안해요.”
a
...알았어.
99
나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이내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를 시작하는 오빠.
아무래도 오빠는 내 가 전화를 안 받아서 화가 난 모양이 었다.
밥이라도 맛있는 것 해줘 야겠다 싶어서 냉장고를 열어봤지 만 마땅한 재
료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장도 제대로 봐놨어야 했는데, 너무 바빠서 신경을 못 썼네...
오빠한테 물어보고 시켜 먹자고 할까.
“오빠. 그... 반찬이 별 것 없는데...”
잘못한 강아지 마냥 머리를 말리고 있는 오빠 옆에 슬그머니 앉은 나는 살
살눈치를 봤다.
"그냥시켜 먹자."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오빠.
"뭐 먹고 싶은 것 있어요? 내가 살게요.’,
"너 먹고 싶은 것 아무거나시켜.’,
성의 없는 대답이 이어지더니 오빠는그대로 침대에 털썩 누워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고의 적으로 나한테 쌀쌀맞게 구는 것 같아서 나는 누워 있는 오빠 옆에 함
께 누웠다.
"오빠."
"으"
O.
"화났어요?’,
"그런것아니야.’,
"화난 것같은데요.’,
뾰루퉁한 얼굴을 보면 누가 보더 라도 삐친 것 같은데 오빠는 계속 진심을
토로하는 것을 거부했다.
내가 나를 애써 무시하는 오빠의 품안으로 기어이 기어들어가자 오빠는
그제 야 내 눈을 바라봐주었다.
"나은아.’,
"네.’,
"공부하다 온 것진짜 맞지?’,
..아니요.
그건 아니기는 한데.
다 오빠를 좋아해서 그런 거니까.
"이 어폰 꽂고 휴대폰 무음으로 돌려놓고 있어서 시간 확인을 못했어요. 진
짜 미안해요.’,
"그렇게 배울 내용이 많은 거야?’,
"저랑 완전히 다른 스타일로 그리더라고요. 직접 실습도 해보고 그러느라
오래 걸리네요.’,
가만히 손을 뻗어 내 뺨을 쪼물딱 거리는오빠.
"요즘 작업할 때 항상 나 혼자라 좀 외로운 것 같아.’,
"에이, 동거하기 전까지는 매일 혼자 잘만했으면서.’,
"그냥 내가 너한테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가봐.’,
어 딘가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다정한 말들.
예전 같았다면 오글거린다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겠지만 지금은...
"...금방. 금방 끝내고 올게요.’,
"으
O •”
오빠의 볼에 입술을 쪽 맞춘 나였다.
…
"네 〜 고객님 주문해주신 상품 한 번 확인 부탁드리겠습니 다."
반지함을 내게 내미는 종업원.
100일까지 단 하루 남았는데 좀처럼 연락이 오지 않아 개쫄리고 있던 나
는 문자가 오자마자 허겁지겁 백화점으로 튀어갔다.
"네.’,
함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한 쌍의 반지.
벌써부터 내일 이걸 끼워줄 생각에 함박웃음이 지은 나는 직원에게 감사
하다는 말을 남기고는 바로 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삐. 삐. 삐. 삐.
"나은아! 나왔다!’,
선물 꼭 기대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서 호들갑을 떨며 들어왔는데 나은
이는 집에 없는듯싶었다.
근데 불도 다 켜져있고, 모니터도 안 끄고 나간 것을 보면 잠깐 볼 일 보러
나간 것 같은데 금방 오지 않을까.
반지를 침실 서럽장 안쪽 깊숙한 곳에 숨겨놓고 다시 거실로 나간 나는 나
은이 컴퓨터나대신 꺼줘야겠다싶어서 그녀의 의자위에 앉았다.
나는 분명 전원만 끄려고 했는데...
판도라의 상자는 그리 먼 곳에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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