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일러레님!-115화 (115/276)

<115화 >#115.하얀 눈꽃

오빠는 보면 볼수록 갈피를 잡기 어려운 인간이었다.

진짜 평소에 보면 이거보다 상식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없을까 싶은 구석

이 있었지만 껍데기를 한 장만 벗기면 이거보다 비정상인 사람이 없다고

해야하나.

굳건한 성벽 마냥 절대로 안 된다는 식으로 말을 하던 오빠는 결국 밀실이

하나 딸려 있는 엉터리 같은 집 에 계 약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역시 열심히 조른 보람이 있었다.

몸으로도 열심히 봉사하고, 인테리어 자료랑도면 작업도 준비하고, 상당

히 손이 많이 갔으나 결국 원했던 것을 얻었으니 괜찮은 것 아닐까.

사실 침실과 거실, 주방까지 밀실이 아닌 모든 곳들은 대략적인 인테리어

개요를 준비했지만 오로지 밀실만은 아직 아무런 계획을 준비해두지 않았

다.

그야 내 가 조교 받을 공간인데, 내 가 함부로 꾸밀 수 있을 리 가.

내가 내 입맛대로 이렇게 저렇게 할 거라면 그 집을 고르자고하지도 않았

을 거였다.

그 방은 오롯이 오빠가 나를 조교하기 위 해 존재 하는 방.

가구부터 자그마한 조명 하나까지 모두 오빠한테 일임할 생각이 었다.

그야 오빠는 [그녀를 감금했습니다]의 작가 한겨울 작가님이셨으니까.

오빠의 소설의 완성도는 물론 매력 넘치는 캐릭터들이 타락하는 과정이

나 인물들의 대화에도 있었지만 현실감 넘치는 장소의 묘사들 또한 꼴림을

한층 더 극대화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그모든조교의 시작인 ‘밀실’의 묘사는 정말이지 사람들이 손에

땀을 쥐고 쓰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강수연의 밀실 에피소드 첫 번째 문장.

[볕이 들지 않는 방에는 깊이를 알수 없는 어둠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를 감금했습니다]의 정체성을 한번에 각인시켜주는문장이자그모

든 기나긴 조교의 서사시가 하나의 문장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밀실이라는 공간이 주는 숨 막히는 압박감.

점점 드리워지는 절망의 그림자.

히로인들이 하나둘씩 희망을 잃어가는 밀실이라는 배경의 묘사는 글만

읽어도 너무나도 서늘하고 마음이 차가워지는 느낌이 있었다.

머릿속에 완벽하게 그리고 있는 그림이 있기에 비로소그렇게 쓰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 각했다.

그리고 이번 기회를 기점으로 오빠는 한 명의 화가가되어 정말로 현실 속

에서 밀실이라는 도화지에 마음껏 꿈을 펼치면 되는 거였다.

“헤흐...”

어떤 일들이 그 안에서 벌어질까.

남들에게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는 헤픈 웃음이 입에서 흘러나온다.

하... 진짜 내가 이 런 사람이 아니 었는데.

분명히 어제 만나서 데이트도했으면서 괜히 또소설을 생각하니 남자친

구가 보고 싶어진다.

휴대폰을 꺼내서 통화기록창을 누르자 한 사람의 이름 밖에 보이지 않았

다.

[이민히

[이민히

[이민히

[이민히

[이민히

나도 참 어 지 간히 다른 사람들하고 통화를 안 하는구나.

뭔가 반성을 하고 조금 더 사회 적인 인간이 되 어야겠다 생각이 들다가도

나는 고개 를 도리 도리 저 었다.

아니.근데 내가왜.

오빠랑 할 시간도 없는데 .

통화 버튼을 누르지 얼마 지나지 않자 오빠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뭐해요?]

[나짐 싸지. 아왜 이렇게 짐 많은건지 모르겠네. 아... 이 파이널 모형 다버

릴까...]

사실 오빠가 하고 있는 고민은 건축학도라면 피해갈 수 없는 고민이 기는

했다.

물론 나도 포함해서.

건축 모형.

한학기 열심히 달린 최종 결과물이자 사실상쓰레기인돈덩어리.

그야말로 애증의 산물이 라고 할 수 있었다.

내 가 그리는 일러스트나, 오빠가 쓰는 소설은 그에 합당한 수익 이 보장되

지만 건축 모형은 그 반대.

돈을 내고 재료를 사와서 혼신의 힘을 다해 쓰레 기를 만들고 교수들한테

사정없이 뚜까뚜까 맞는다.

...지금 이렇게 말로 정리해보니까 진짜뭐 이런 학문이 다 있나 싶네.

그야말로 비효율의 끝이 라고 볼 수 있었다.

일러는 그리면 돈이라도 주지.

[사진은요? 사진은 다제대로 찍어놨으면 버려도괜찮을 것 같은데.]

정 공간이 없다면 데이터 상의 기록으로남기면 그만이기는했다.

어차피 취 업할 때 포트폴리오에 삽입할 사진만 준비해놨다면 실물 모형

은 특별한 애정이 없는 한보내줘도 무방했다.

[애매한데... 찍기는 했는데 좀 구린 것 같아.]

[사진 보여줘 봐요.]

이윽고 한 묶음의 사진이 내 게 도착했고 나는 기 가 차서 어 이 가 없는 목소

리로 오빠한테 한소리 했다.

[오빠.]

[...응?]

[진짜 이거 갖고 포트폴리오 만들 거예요?]

[...그렇게 별로야?]

하아... 진짜 이 남자.

[오빠. 절대 버리지 말고그냥학교 가서 사진실 빌려서 나랑 같이 찍고와

요.]

도대체 무슨 생각인건지 오빠의 사진은 도무지 포폴에 써먹을 수가 없을

정도로 구도가 구렸다.

여기를 조금만 더 아래로 카메라를 낮춰서 동선을 보여주고, 여기는

이렇게 공들여서 만들었으면 강조를해서 찍어야지.

물론 그렇게 퀄리티가 좋은 모형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진까지

이렇게 구릴 필요는 없다고 생 각했다.

[...귀찮은데.]

[나는 뭐 안 귀찮아서 같이 가준다고 그래요? 그냥 군말 말고 내일 나랑

가요.]

[•••응.]

다소 시무룩해 보이는 대답.

설마 삐진건가.

[목소리가왜그래요.]

[똑같은데 뭐가.]

삐졌어요?]

[전혀.]

누가 보더라도 꿍해있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이 남자.

[오빠.]

[안 삐졌다니까.]

[졸업 전시 내년에 무사히 하고 나면 내가 사진 찍는 거 옆에서 봐줘 야겠다

.]

[야야. 휴학했는데 자꾸 건축 언급하면 끊는다.]

그래도 아까 전보다는 목소리 가 낫네.

오빠는 내가 계속 설계와 모형 이야기를 하자 진절머리 가 난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럼 내일 같이 사진 찍고 우리 집 와서 나 짐 싸는 거 도와줄래요?]

[...몇 시에 볼건데.]

[1 시까지 학교에 모형 들고와요!]

[알았어.]

[그럼 그때 봐요!]

[응.]

:k * *

택시에 모형을 들고 타는 것은 언제나 좆같으면서도 짜증나는 경험이었

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일반적으로 사이즈도 커지기 때문에 뒷자석은 사람

한 명 타지 않았으나 자리가 꽈악 찼다.

하... 얼른 버려버리든가해야지.

학교까지 어찌저찌 도착한 나는 내리자마자 뒷자리에 모형에 어디 망가

진 부분들이 없는지 점검했다.

일반적이 프라모델보다도 몸이 약한 녀석이기에 조금만 방심하면 사람

모형이 저격수한테 총을 맞은 것처럼 엎어져 있다든지, 나무가도로를 침범

하고 있다든지 그런 일들이 빈번했다.

다행히 떨어진 건 창문 하나.

양반이구만.

분리된 아크릴 조각을 잘 주머니에 넣은 나는 모형을 안고 사진실 앞으로

이동했다.

“왔어요?”

“열쇠는?”

“미리 빌려놨죠.”

나은이가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어주었다.

오로지 모형만을 부각시키기 위해 벽과 책상 모든 색상이 검은색인

사진실 안에는 수술대를 연상시 키는 커다란 조명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책상위에 살포시 모형을 얹자 나은이는 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오빠. 망가진 곳 없죠?”

“아.이거아크릴 하나.”

“그거 다시 붙이 면 본드 자국 남을 것 같으니 까, 그냥 그거 안 나오는 구도

로만 찍어볼게요.”

알아서 하시 라고 대 답한 나는 뒤 에 서 팔짱을 끼고 찰칵찰칵 휴대 폰으로

사진을 찍는 나은이를 바라만 보았다.

한 嬖분정도 찍었을까.

나은이 가 이 마에서 흐르는 담을 닦아냈다.

겨울이지만 역시 조명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는 상당했던 모양이 었다.

“후우... 와서 봐요.”

내게 휴대폰을 건네는 나은이.

“와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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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같은 모형을 두고 사진을 찍었는데 나은이 가 찍어준 사진이 몇 배는

더 멋져 보였다.

내 가 탄성을 내 뱉 자 나은이 는 자랑스럽 게 허 리를 쭈욱 폈다.

“어때요. 내 말 듣고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죠?”

“쫌 지리긴 한다.”

“자. 이제 얼른 저거 폐기하러 가요.”

나는 아무런 미련 없이 모형을 반을 갈라 박살냈다.

“짐 정리할 것 많아?”

버스를 타고 나은이네 집으로 향하는 길.

나은이는 열심히 휴대폰으로 가구들을 보고 있었다.

“아. 오빠보다는 훨씬 많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우리집이 조금 더 넓으니

까요.”

하기 야. 나는 단칸방 원룸이 고 나은이 는 제 법 큰 투룸이 었으니 그건 당연

한 처사였다.

“어후... 진짜 책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인 것 같아요.”

확실히 나은이의 책장에는 각종 망가와 일러스트 제작을 위한 참고용 서

적들이 제법 많았다.

“너도버리지그래.”

“나중에 또 두면 쓰기도 하고, 그리고 차라리 버리지 말고 중고시장 같은

데다가팔아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요.”

“그럼 이사가서좀 팔아.”

나은이 네 오피스텔 에 들어 가자 나은이는 자기는 거실 짐을 정 리 할 테 니

까 나는 침실 책장 저 위쪽에 꽂아둔 책들을 상자 안에 담아달라고 부탁했

다.

상자를 받아든 내가 팔을 위로 뻗어 하나씩 책들을 뽑아내 기 시 작했다.

대부분 만화책이네 .

오오... 봤던 것도 있네. 이 거 개띵작이 었는데.

위 에서부터 모조리 뽑아내자 텅 비 어가는 책장을 바라보니 뭔가 흐뭇한

느낌이 들었다.

일상 속 소소한 만족감.

이 제 어느덧 마지 막 바닥에 있는 책들만 정 리하면 끝이 구만.

빠르게 마무리하려던 나는 허리를 숙여 책들을 또다시 뽑아냈다.

그런데...

수상할 정도로 익숙한 검정색 북커버.

쇠사슬이 사선으로 이어져 있는 일러스트.

이게 왜 얘네 집에...

첫 페이지를 넘겼다.

[하얀눈꽃님! 언제나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빠. 잘하고 있어...”

나은이와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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