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일러레님!-81화 (81/276)

<81화 >#81.양귀비

12월. 1년의 마지막이자종강을 고하는 달이 찾아왔다.

어느덧 트렌치코트가 허락된 11월의 마지막 씁주는 지나갔고 진짜 겨울에

가까운 날씨 가 반복되고 있었다.

“에취!”

나은이의 고개가 균형을 잃고 앞뒤로 흔들린다.

“뭐야. 감기야?”

키스마크 사건 때 울며겨자먹기로 맞췄던 붉은색 커플 목도리를 다시 정

리해주었다.

“몰라요.재채기나와. 에취!”

결국 건축대 에 서 가장 유명한 CC로 거듭난 우리는 그냥 대놓고 학교에 서

손을 붙잡고 걸어 가고 있었다.

여 전히 학교 안을 돌아다니 다 보면 우리를 보고 수군거 리는 사람들이 있

는 것 같기는 했으나 영상이 처음 유포됐던 초반에 비하면 지금은 양반이었

다.

진짜로 휴학을 하게 된다면 이 소란스러움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사라

지지 않을까.

아닌가. 너무 긍정적 인 사고방식 이 려나. 이 건.

“오빠. 철근콘크리트 과제 했어요?”

“…과제 있었냐?”

나은이는 어이가 없다는듯이 피식 웃었다.

“네.연습문제 풀어서 제출하라 했는디.”

아. 시발.

“아니 무슨 기말 1주 남겨놓고 그러냐.”

“오빠는 기말이 1주남았는데 왜 수업을 안들어요. 열심히 들어야지.”

맞는 말 대잔치에 머쓱해진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12월은 객관적으로 기쁜 달이기는 했다.

내 생 일도 있고, 크리스마스도 있고, 그리고 종강도 하고.

얼마나 좋아.

하지만 달콤한 12월 말 전까지의 과정은 내게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아마 건축학도들은 모두 공감할 것이 었다.

최종 마감.

매 학기 마다 숨 막힐 듯 조여오는 마지 막 D-10.

항상 생 각하고는 한다.

그냥 시험만 보면 종강이 찾아오는 그런 세계선은 없을까.

모두가 시 험 이 끝나고 하하호호 스케 이트나 타러 갈 때 나도 같이 껴 서 갈

수는 없을까.

남들 다끝나서 놀고 있을 때 우리 건축학도들은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불

사를수밖에 없었다.

건축학도들이 설계 사무소를 지망하고 있다면 성적보다 몇 배는 신경써

야하는 것이 바로 포트폴리오였다.

대부분의 사무소들은 그 학생들의 툴 실력, 모형 제작능력, 디자인 센스

등을 보기 때문에 성적 자체에 그렇게까지 연연하지는 않는 편이었다.

굳이 봐도 설계 성적 정도?

물론 다른 공기 업 이 나 건설사 같은 케 이스는 좀 다르기는 하지 만 그럼 에

도 설계를 못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이 개같은과목은무려 嬖학점.

두 과목을 璘넃 받아도 이 거 하나 말아먹으면 아무런 의 미 가 없다는 소리 였

다.

“…보여주기 가능?”

나는 슬그머 니 나은이의 눈치를 살피 며 그녀 가 순순히 과제를 내 놓기를

바랐다.

“맨 입으로?”

쓰으읍. 아. 그냥 보여주지.

이 런 위 급 상황에도 대 가를 요구하는 여자친구가 야속하기 만 했다.

“밥 사줄게.”

“농담이에요. 보여줄 수는 있는데 오빠. 수업 10분 남았는데 할수 있겠어

요?”

“ • •• 가뿐하지.”

내가 한두 번 베껴본 것 같아?

고등학교수행평가때부터 단련된 답지 베끼기 컨트롤.

10분이면 차고 넘쳤다.

“A4두 장분량에 이거 철근 단면도도그려야 되는데 괜찮겠어요?”

“아아... 그림은 또 뭐야.”

전부터 수학문제 풀 때 기하 파트가 제일 싫었다.

아우. 꼴 보기 싫어.

허겁지겁 빠른 걸음으로 강의실에 들어간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나은이

의 과제물을 옮겨적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글씨 진짜 못쓰네요.”

“야. 말 걸지 말아봐.”

“소설가라면서 왜 이렇게 글씨를못 써요?”

“요즘 세상에 누가 연필이랑 펜으로 글을 써.”

구라 안 치고 너보다 타자는 두 배 이상 빠를지도.

안그래도 원고 마감시간에 최적화된 나의 신체는 경이로운 타자속도에

익숙해져 있었다.

지각이 1시간이 넘어가면 댓글창은폭주하기 마련이었다.

[속보. 한겨울 또지 각.]

기본형.

[작가님! 혹시 오후 10시가 아르헨티나시간인가요?]

비꼬기형.

[한겨울 왜 안 와? 한겨울 왜 안 와? 한겨울 왜 안 와? 한겨울 왜 안 와? 한

겨울왜 안와? 한겨울왜 안와?한겨울왜 안와? 한겨울왜 안와?]

도배 형.

날이 갈수록 갈구는 독자들의 유형이 점점 세분화되고 있었다.

참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고마우면서도 피말리는 일이

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뇌를 빼고 펜이 닳도록 움직인 나는 그래도 딙분의 3 정도는 옮겨

적기에 성공했다.

“아. 몰라. 마지 막은 그냥 모른다고 하자.”

“마지 막 문제 가 배 점 제 일 높은데 이 것부터 하지.”

...아.왜그거지금 말해주는데.

얄미워 죽겠지만 과제까지 보여준 일러레님께 더 징징거릴 수는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쉬 자 교수님은 출석을 부르기 시 작하셨다.

“자. 출석은 다 부른 것 같고... 지난 시간 연습문제 과제 내준 것 있었죠?

과대 어딨나?”

유서 깊은 노예 과대는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과제물을 수합하기

시작했다.

오늘의 수업은 그래도 기말 전 마지막 시간이라그런지 진도는 거의 나가

지 않았다.

그래도 친절하게도 교수님은 대충 어느 파트에서 시험문제들이 나올지

떡밥을 흘려주셨고, 학생들은 전례없는 집중력으로 페이지들에 메모를 작

성해댔다.

“마지막으로 질문 있는 사람들 지금 하세요. 나중에 메일로 물어봐도 괜

찮지만 시험 직전에 내 가 늦게 확인하면 또 곤란할 수도 있으니 까.”

다행이도 질의응답 들을 필요 없는 사람들은 먼저 나가도 좋다고 해주셔

서 나와 나은이는 강의실을 벗어났다.

“오빠. 이번 학기 예상 학점 몇이에요?”

“나? 글쎄...”

나. 이민호.

평점 3.5의 남자.

사실 전역하기 전까지는 3.5도 되지 않았었다.

그야말로 망나니 엠생의 표본이었던 나의 1, 씁학년.

남자애들이랑 술 퍼먹고 수업을 못 나가서 개같이 F를 맞는 과목도 여러

개.

진짜 전역한 다음에 전체 성적표를 조회해보고는 머리 가 아찔했었다.

후회물은 굳이 내 가 따로 시간을 내서 읽을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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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 성 젹표 종이 한 장이 후회 물 그 자체 인데 내 가 왜.

그래도 꾸득꾸득 나름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살아서 평균을 B+에 가깝게 만

들어놔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3.8? 나오면 좋겠네.”

“준수하네요.”

계 단을 타고 내 려 간 우리 는 학생 식 당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너는?,,

“그냥 3.5 넘기면 그러려니 하려고요.”

현실적이구만.

사실 나은이는 그렇게까지 열심히 할 필요가 없어 보이 기는 했다.

그냥 일러스트레이터 일을 계속 하면 그만이니까.

개인적으로 야설 작가보다는 야짤 작가가 안정적인 직군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 정도의 실력이라면 아마 게임 원화가 이런 쪽으로도 진출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은 언제 내용이 망가지고 하차자가 발생할지 모르는 줄타기에 가

깝다고 생 각했지 만 그림 은 그냥 쭉 한결 같이 예 쁘게 만 그릴 수 있다면 리 스

크는 훨씬 더 적다는 것이 내 의 견이었다.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시킨 나.

새 우볶음밥을 시킨 나은이 .

과분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식사를 하는 취미는 우리 커플에게 없

었기에 우리는 저 구석에서 자리를 잡고 숟가락을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름은 생각해 봤어요?”

“아직.스토리는 얼추구상했는데 말이지.”

[그녀를 감금했습니다.]의 새로운캐릭터 에피소드의 방향성을 명확히 잡

지 못한 나는 꿓일간의 휴재 공지를 올린 상태였다.

“직업은일러레로 할거죠?”

주말 동안 나은이의 끊임 없는 육탄공세 로 인해 나는 결국 차기 히로인을

직업을 프리랜서 일러스트레 이터라고 가정하고 글을 쓰기로 했다.

“너 이거 쥐흔이야. 알지?”

“그게 뭔데요?”

“쥐고흔든다.”

윤기 가 촉촉한 흰 쌀밥 위 에 돼지고기 와 김 치를 한 점씩 얹은 나는 숟가락

을 입안에 쏙 집어넣었다.

“...대딸?”

그녀의 난데없는 기습에 나는 하마터면 그녀 얼굴에 돼지고기 파편을 분

사할 뻔했다.

“아.야. 내가그런말밖에서하지 말랬지.”

“이미지야 이미 망한지 오래잖아요. 그리고 오빠한테 해줬다는 것도 아닌

데 뭘 그래요.”

“아. 맞기는 한데 깜빡이 좀 키고 들어와라.”

어우. 진짜. 저럴 때마다 오싹오싹하네.

‘쥐고 흔든다’라는 말에 대딸이 자동 반사로 나오는 제 여자친구.

이거정상인가요?

“아무튼. 쥐흔이라는 말은 보통 소설에서는 독자가 작가를 가스라이 팅해

서 이래라저래라 시키는걸 쥐흔이라고하지.”

나는 사실 [그녀를 감금했습니다.]를 집필하면서 쥐흔이라고 할 것도 없었

다.

그냥 나오는 히로인 차례차례 따먹는데 쥐흔 당할게 뭐 가 있겠어.

오히려 전체 연령가소설들이 그런 방면으로는 더 골머리를 앓는다는 글

을자주 읽었다.

“오빠. 그럼 저는 사실 비선실세 가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내가뭐 대통령이라도 되냐고.권력도 없는데 무슨 비선실세야.”

나은이의 엉뚱한 발언에 나는 눈을 껌뻑였다.

“야설킹을쥐고흔드는 양귀비인 거죠.제가.”

두 손으로 뺨을 감싸며 황홀하다는 표정을 짓는 나은이.

“어때요. 나잘어울리지 않아요? 양귀비 컨셉이랑?”

그녀의 눈썹 이 휘 어지며 교태어린 눈웃음을 선보였다.

“전하.소녀는 한나은이 정실이 되기를 원하옵니다.”

사람을 백 명은 잡아먹은 듯한 구미호 같은 가냘픈 목소리가 그녀의 목에

서 흘러나왔다.

하지 만 나 작가 한겨울.

그렇게 쉽사리 쥐흔을 허락할 리 가 없었다.

“네가쥐고 흔들 수 있는 것은 내 좆 밖에 없거늘.”

근엄한 사극톤으로 나는 그녀의 말에 작은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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