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34.패배
위이이잉. 위이이잉.
[한나은]
역시나 나의 예상대로 나은이는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이미 학교를 벗어나고 있던 나는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나은이가 내 자취방을 다녀간 이후.
나는 그녀에게 앞으로 어떤 식으로 벌을 줄지 빌드업에 대해 생각해보았
다.
솔직히 나은이의 행동들이 어디서부터 계획된 것이었는지 잘 느낌이 오
지 않았다.
일단 마감날 일러스트를 내게 걸린 것은 의도적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나를 열받게 해서 내가 그녀를 모텔로 끌고가도록 유도한 것?
그것도 계획의 일부였으려나.
거기까지는 살짝 애매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부터 그녀가 보여준 행동의 패턴들은 명확했다.
[나를 따먹어주세요.]
처녀였던 그녀는 나를 기만하며 우롱하며 자신의 취향대로 그녀를 범하
게끔 가스라이팅했다.
속으로는 행복의 비명을 질렀을 년이 나한테 강간마니 뭐니 내 멘탈
을 박살을 내버리려 했다.
...이대로 순순히 그녀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준다면 이건 야설 작가를 얕
봐도 너무 얕본 것이었다.
나. 이민호.
인장력과 휨 모멘트 계산은 좆도 못하지만 여자 희롱 및 세뇌의 이론만
큼은 국내 최정상이라고?
■이론,만큼은 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해본 적은 없으니 말이다.
아무튼 의도적으로 나는 아주 뒤늦게 나른한 목소리로 그녀의 전화
를 받았다.
[어〜 나은아〜 무슨 일이야? []
[...지금 그딴 말이 나와요?]
오호... 역시나 그녀는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듯한 묵직한 빡침의 울림이 느껴졌다.
[혹시 내가무슨 잘못이라도?]
나는 천연덕스럽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질문했다.
[오빠가... 저한테… 그런... 지시를 해놓고서...!]
차마 지시의 내용은 학교 안이라 그런지 큰 목소리로 뱉지는 못하
는 것 같았다.
[지시?]
나는 진짜 모르겠다는 말투로 연기를 시작했다.
[오빠가 휴대폰 메모장으로 저한테 보여줬잖아요!]
[아... 그거... 내 신작에 들어갈 멘트 써봤던 건데.]
물론 구라였다.
[뭐..라고요...?]
[새로운 야설에 넣을 멘트였다고요.]
[야... 이 씹새끼야! 그딴 억지가 어딨어!]
갑자기 확 올라간 볼륨 탓에 나는 잠시 휴대폰을 귀에서 뗄 수밖에 없었
다.
[내가... 내가 너 때문에... 0씨...]
[그런데 나은아.]
분노를 이기지 못해 말도 제대로 못하는 나은이.
그런 그녀에게 내가 휘둘러줄 회초리의 이름은 바로...
'상식,이었다.
[왜요.]
[너... 그러면 설마 진짜로 그 대사 그대로 거기를 적...신거야?]
나은이는 잠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너도 알고 있겠지. 지금 여기서 그렇다고 해버린다면 네 꼴이 몹시도 우
스워진다는 것을 말이야.
[내가 중간에 손도 쓰지 말라는 대사 넣었는데... 너 손도 안쓰고 그럼...]
여기서 손을 썼다고 하든 쓰지 않았다고 하든 이건 나은이의 패배.
약속된 패배나 다름 없었다.
[...아니에요.]
수치스러워하는 나은이의 표정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지금쯤 자살하고 싶겠지.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겠지.
하지만 아직 이쪽은 시작도 안했다.
[그렇지? 솔직히 현실에서 보지를 주무르면서 수업 시간에 애액을 찔끔
찔끔 흘리는 여자가 존재할 리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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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 자극으로 물이 나올 정도면 그 보지는 아주 헐렁헐렁한 허
〜접 중〜고 보지 밖에 없겠지.]
[그리고 얼마 전까지 처녀. 였던 우리 나은이가 그런 창년같은 짓을 했으
리라고는 생각 안하는데 ?]
[하'?''?'….]
나은이는 인간의 언어를 상실한 것인지 요상한 의성어만 내고 있었다.
그래... 네가 이걸 맞고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겠지.
고의적으로 넣은 발작 버튼이 몇 개인데.
[그... 그렇죠... 오빠. 제가 그런 짓을 했겠냐고요!]
했잖아요. 개변태년아.
보짓물 질질 흘리면서 강간당할 생각에 헤벌쭉한 년이 성질내기는.
[그래서 나은아. 용건이 뭐라고?]
이미 퇴마에 성공한 내가 씨익 웃으며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질문했다.
[...아니에요. 끊어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먼저 전화를 끊어버린 나은이.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 안에 넣은 나는 자꾸 웃음이 쿡쿡 새 어나오는 것
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옆에 있던 다른 학생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흘깃 쳐다봤지만 나는 너
무 기분이 짜릿했다.
그래. 집에 가서 이불 좀 차고 있어라. 한나은.
우리 귀여운 일러레님.
:k * *
"씨발! 씨발! 씨바아아알!"
집에 돌아온 나는 주먹으로 애꿎은 배게를 퍽퍽퍽 쳤다.
후우... 후우...
이민호. 이 개새끼.
민호 오빠와의 전화를 끊은 나는 집에 돌아오는 내내 수치스러움에 몸
을 부들부들 떨 었다.
오빠는 뭔가를 깨달은 모양인지 내게 엿을 선사했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빅 엿을.
빅 자지에 박힐 것만 생각했던 나는 너무 강하게 얻어맞은 나머지 전화
로 어버버하다가 팍 끊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호기롭게 오늘은 따먹히리라고 복장까지 준비해갔던 나는 참담한 패배
에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모쏠 아다 주제 에... 모쏠 아다 주제 에!!!!"
이렇게 예쁜 내가 친히 보지까지 데워서 따먹혀주겠다는데, 그걸 마다
하고집으로튀어가?
이건 고자라는 칭호도 아까웠다.
그리고 솔직히 그의 변명은 너무나도 하찮았다.
신작? 시인작?
신작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
한겨울 작가의 Q&A 공지글 질의응답을 모조리 읽어본 나는 그가 신
작 계획이 없었음을 알고 있었다.
한 독자가 오빠한테 차기작이나 다작에 대한 생각이 있냐고 물었
을 때 오빠는 [그녀를 감금했습니다.]의 완결 이전까지는 온전히 이번 작품
에 집중하겠다고 댓글을 남겼었다.
정말로 백 보 양보해서 신작을 준비한다고 쳐도 그게 말이나 되냐고.
아침 10시에.
남들 다오가는 강의실에서.
아키즘과 아키그램 설명하는 현대 건축 시간에.
수업 끝나기 전까지 보지를 축축히 적시라는 메모를 나한테 왜 보여주는
데.
오빠야말로 그게 상식적이 라고 생 각하는 거냐고.
오빠는 그냥 나를 골려주려고 이런 계략을 꾸민 것임 이 분명했다.
그는 내가 그의 명령을 이수할 것이라는 모종의 확신이 있었던 모양이었
다.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해봤을 때 그의 이런 태도는 무척이나 걸림돌
이 될 확률이 높았다.
이런 맥빠지는 장난이 몇번이고 반복된다면 나는 아마 참지 못할 것이리
라.
오빠에게 나를 대하는 올바른 몸가짐이란 무엇인지 새겨줄 필요가 있었
다.
의자에 앉아서 테블릿 펜슬을 빙글빙글 돌리던 나는 아주 기가 막힌 방
법이 떠올랐다.
집에 돌아와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던 나는 옷장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흐음〜’,
오빠가 좋아하는 복장이 무엇인지 따위는 굳이 당사자에게 물어보지 않
아도 됐다.
왜냐하면 그의 소설. [그녀를 감금했습니다.]가 바로 이 문제의 해설지 같
은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우리 모쏠 아다 한겨울 작가님의 여자에 대한 판타지는 모두 소설 속 히
로인들에게 담겨 있었다.
후음〜 누가 좋을까...
휴대폰 스크롤을 내리며 히로인들의 이름을 훑어본 나는 입가에 미소
를지었다.
그래...너로 정했다!
마치 게임 게릭터를 고르는 느낌으로 나는 유소연 (4) 회차를 클릭했다.
맞아... 이 회차...
유소연은 그 누구보다 애교가 많았던 히로인.
사이코패스 사디스트 같은 구석이 있는 이진성조차도 표정 관리를 어렵
게 만들었던 히로인.
나는 소설 속 그녀와 똑같은 옷차림으로 코디를 짜기 시작했다.
埌埌埌
한나은 에피소드도 어느덧 중반부에 접어들었다.
사실 타락 조교물을 쓸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이 중반부였다.
왜냐하면 야설을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와 결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야설의 기는 평범했던 여성인 히로인이 어찌저찌 일편흑심 주인공과 엮이
게되는 내용.
야설의 결은 그랬던 히로인이 암컷타락해 주인공의 자지에 목메다는 내
용.
대부분 야설들의 전개는 이렇거나 이것을 살짝 비튼 정도였다.
그렇다면 어디서 승부가 나는가.
그것은 바로 얼마나 촘촘하고 탄탄하게 히로인의 심리를 묘사하며 그들
을 매력적으로 꾸며내는가였다.
한 화 한 화 히로인들은 천천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인공에게 애정
을가져야만 했다.
시작은 증오. 중반부는 애증. 마지막은 완벽한 사랑으로.
[나은아. 너에게 선택권을 줄게.]
[나은이 인상을 찌푸리며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를 보냈다.]
[...선택이요? 웃기는 소리하지 마요. 선택 운운하는 사람이 여
태까지 그렇게 억지로. 그 따위 짓을 해요?]
[이번에는 진심이다. 나는 이번에 네 몸에 손 하나 대지 않을거야. 대신...]
[진성의 손톱이 그녀의 유두 끝을 쓸어내렸다.]
[이대로 여기서 그대로 나간다면. 너와 나의 관계도 여기서 끝이다.]
[상식적으로 당연히 뛰쳐나갔어야만 하는 나은은 어째서인지 가만히 서
서입술을 꽉 깨물뿐이었다.]
[이진성...]
으음... 나쁘지 않네.
내용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자꾸 나은이라는 이름을 반복해서 쓰다보니
까 우리 일러레님 나은 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일러스트 작업을 핑계 삼아서 자꾸 집을 드나드는 것은 그만둬야겠다 생
각이 들었던 그 순간.
띵동.
오후 뫫시.
조금은 늦은 시각인데 누군가 나를 찾아온 모양이었다.
배달 음식이나 택배는 아닐거고... 대체 누구...
"누구세요?’,
"문 열어줘요.’,
...아무래도 소설 속 히로인인 그녀는 나를 그대로 둘 생각이 없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