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29.해으응
"주민등록증 좀 줘봐. 나은아.’,
"...민증이요?’,
"어. 나도 줄게.’,
내가 내 주민등록증을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그리고 일러월드 계정 마이페이지도 띄워주고.’,
"..오빠. 그건 좀."
"야. 너는 이 계약에 얼마나 진심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진짜. 너.무.너.
무 절박하거든.’,
보험이 io개라도 부족한 것이 지금 내 상황이었다.
나은이를 철저하게 입막음할 수단이 필요했다.
야설 작가인 나. 이민호.
쉴틈없이 머릿속으로 치열하게 플롯을 구상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신고당하지 않고 무사히 졸업해서 바이바이할 수 있는 세
계선을 찾아야만 했다.
상대는 어떤 수를 둘지 예측이 불가능한 변수 덩어리 그 자체.
지금 나에게 있어 그녀는 크툴루 신화 속 ■기어다니는 혼돈,과 다를 바
가 없었다.
내가 이길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와 대적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준
비 또한 철저히 해야만 했다.
"알겠어요...’,
나은이는 순순히 그녀의 민증을 내놓고는 그녀의 일러 월드 계정이 띄워
진 화면을 내게 넘겼다.
그녀의 화면을 캡쳐해 내게 보낸 나는 메일과 클라우드에 몇번이고 다
른 이름으로 저장을 해 두었다.
나은이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다했어요?’,
"응. 너는 내 노벨 월드 계정 필요 없어?"
나은이가 피식 웃었다.
"오빠. 오빠가 계약을 어길 시 제가 필요한 것은 딱 이거 하나에요.’,
그녀의 검지가 자신의 목덜미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 자세 그대로 나은이는 꺄!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은 시늉을 했다
•
하지만 그녀의 소리 없는 비명은 놀랍게도 나에게 치명타를 입히는데 성
공했다.
나은이가 이 자리에서 비명을 지르며 '이 개새끼가 저를 강간했어요!,라
고 외치는 순간.
옆자리에 있는 체대 저지를 입고 있는 학생들이 그대로 내 척추를 반으
로 접어놓겠지.
나은이 정도 되는 미녀가 강간당했다고 함은 남자들은 무슨 수를 써서
라도 나를 응징하고 말 것이었다.
...허. 시발.
개같이 처맞고 수갑 채워져서 경찰서 갈 생각하니까 벌써 어지럽네.
"그럼 오빠. 잘 부탁해요. 남자답게 제대.로. 책임 지셔야해요?’,
나은이가 그녀의 손을 내게 내밀었다.
"어. 그래. 잘 부탁한다.’,
내가 싱긋 웃으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지금 그녀는 자기가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 알 리가 없었다.
이진성이 책임지는 방식을 알게 된다면 나은이는 아마 내 바짓가랑이
를 붙들고 제발취소해달라고 빌지 않을까.
소설 내용을 그대로 재현한다면 나은이는 결국...
머릿속에 내 자지밖에 떠오르지 않는 꼴통 창년이 되어버릴테니까 말이
다.
"그럼 일어나요. 날 저물기 전에 사이트 보러 가야죠.’,
그녀의 말이 맞기는 했다.
너무 늦어버리면 그 건물이 들어설 자리에 빛이 어떻게 들어올 것인지, 낮
의 유동인구는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다시 가야
만했다.
건축대 건물을 벗어난 우리는 또다시 버스를 타러 버스 정류장 앞에 나
란히 섰다.
요즘들어 뭔가 나은이와 자주 버스를 타는 것 같네...
늘 혼자 집에 가는 경우가 일상 다반사였는데, 과 최고의 미녀와 이렇게
나 빈번하게 자주 왔다리갔다리 하게될 줄이야.
"야. 나은아.’,
"네?’,
"너... 내 소설읽어본 적있냐?’,
갑자기 그녀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냥 없으면 없다고 하면되지.
벌레를 본 것 같은 그녀의 반응에 나는 괜시리 기분이 상했다.
"아뇨. 없다니까요? 지난번에도 말 해줬잖아요."
대놓고 경멸하는 눈초리에 나는 헛기침을 했다.
"흠...흠! 네가 맨날 내 소설 갖고 운운하길래, 뭐라도 보고 그런 소리
를 하나 싶었지.’,
생각해보면 나은이는 지나치게 내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꺼내
는것 같은느낌이 들었다.
놀릴 때도 네 소설 속 주인공이 그따구로 행동하느냐.
야설 쓰는 새끼들이 다 방구석 찐따지 뭐. 그런 식으로 매도를 한다거나.
하다못해 방금 전 계약서를 쓸 때도 처녀를 따먹은 네 소설 속 주인공
도 돈으로 책임지느냐는 식으로 그녀는 나를 몰아갔다.
흐음... 살짝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지만 나는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솔직히 나은이 같이 어여쁜 처자가 내 야설을 읽어보는 편이 더 비상식적
인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저도 질문 할래요.’,
"하세요.’,
나은이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것이 벌써부터 나를 놀릴 생각으로 가득
하다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빠... 제 그림보고... 한 적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내소설 표지를 보고 친 적이 있냐. 그런 질문이로구나.
전 같았으면 거짓말을 하거나 애써 화제를 돌리려고 했겠지만 이제는 아
니었다.
그녀를 책.임.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전성과 같은 담대함과 과감함.
그리고 지 나치 게 느슨한 정신줄이 었기 때문이 었다.
"음〜 한 장당 두발 이상 씩은 뺀 것 같은데?’,
나는 마치 오늘 점심 뭐 먹었냐는 질문에 대답하듯이 담담한 목소리
로그녀의 말에대답해 주었다.
자. 다시 한번 조금 전과 같은 경멸의 시선을 날려보라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덤벼라. 한나은.
"..헤으응.’,
..헤으응?
전혀 생각치도 못한 그녀의 반응에 나는 잠시 눈을 껌뻑이며 그녀를 바
라보았다.
뭔가 눈에 하트라도 그려줘야될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가 요상한 소리
를 내뱉었다.
하지만 그 말을 내뱉은지 1초는 지났을까 나은이가 내게 버럭 소리를 질
렀다.
"왜 그런 말을 그렇게 큰 목소리로 말해요!’,
나은이 가 내 등짝을 앙증맞은 손바닥으로 팡팡 내 려쳤다.
아프지는 않은데 얼떨떨한 것은 내 정신이었다.
내 가... 요즘... 심신미약이라 그런가.
자꾸 뭔가 뇌가 훼까닥해서 이상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아. 미 안.’,
당당한 컨셉을 유지해보자고 한지 1분도 지나지 않아서 나는 오토메
틱 사과를 해버렸다.
"진짜루...’,
나은이가 고개를 휙 돌리더니 때마침 온 버스에 탑승했다.
조금은 사람이 많은 시간대라 그런지 우리 두사람이 함께 앉을 자리
는 없었다.
남은 것은 1인석 뿐.
나는 나은이에게 고개를 튕기며 가서 앉으라고 했다.
"오빠 앉아요.’,
"됐네요. 이 사람아.’,
"오오〜 모쏠 주제에 매너 있는 척〜"
나의 인생이 만화였다면 방금 내 머리 위에는 빠직 표시가 크게 하나 붙
었으리라.
지금 우리 학교에서 집가는 애들로 가득한버스에서 꼭 그래야겠냐. 넌.
"고마워요."
그래도 제대로 짧게라도 인사했으니까 내가 참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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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을 푹 내쉰 나는 앉아있는 나은이 앞에 서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내가 작가가 되기 이전에는 버스에서 언제나 웹소설을 재밌게 읽었
던 것 같은데 작가가 된 이후로는 좀처럼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서큐버스는 동정만 따먹어!] 이런 소설을 볼 때면 행여 옆사람이 내 화면
을 볼까봐 쫀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는데...
근데 당시에는 진짜로 소설들이 너무 재밌어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
고 열심히 읽었었다.
아직 남아있는 회차가 50개나 남아있는데 그걸 굳이 참을 이유가 뭐
가 있나 싶었다.
대신 요즘에는 웹툰을 마음 편하게 자주 보는 편이었다.
일코하기도 충분히 괜찮았고 별 생각없이 보기에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
이었다.
금요일 웹툰을 모두 정주행한 나는 고개를 숙여 나은이는 무엇을 그렇
게 열심히 보나 싶었다.
그냥 SNS구나...
하긴 여자애들이야 늘상 저거 달고 사니까.
나는 SNS 계정을 휘민이의 권유에 못이겨 만들어만 뒀을 뿐 실제로 포
스팅한글은 하나도 없었다.
그냥 별 생각 없이 나은이의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가 창
을 닫자 그녀의 바탕화면에 익숙한 어플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노벨월드잖아? 저거.
암만 내가 심신미약 상태라고는 해도 노벨 월드 어플은 정확히 알아
볼 수밖에 없었다.
내 직장이었다.
하루에 수십번씩 클릭을 하는데 내가모를리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내가그녀의 어깨룰 톡톡 두 번 건드렸다.
"왜요?"
이어폰을 뺀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너. 웹소설 보냐?"
"아뇨? 제가 그런걸 왜.’,
"근데 너 왜노벨월드 깔려있냐.’,
안 쓰는 어플을 바탕화면 대문에다 두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그건...’,
그녀가 갑자기 우물쭈물하며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호라. 이녀석. 사실은 내 소설 독자인 것 아냐?
"순순히 지금이라도 고백하면 내가 이해해줄게. 너 내 소설 독자지. 맞지.
’’
"아! 쫌! 정신나간 소리좀 하지 마요! 오빠 것 안 읽는다고요!’,
...그럼 내 소설 말고 다른 소설들은 읽는다는 소리려나?
그럴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내 작품이 랭킹 최상위권에 포진되어 있기는하지만 모든 노벨월
드 독자들이 내 작품을 읽는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럼 뭐 읽는데?’,
이건 좀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했다.
한나은은 노벨월드에서 무슨 작품을 읽을까?
그냥 판타지? 아니면 여성향 소설?
근데 노벨월드는 주타겟층이 남자라 여성향 볼만한 것이 별로 없을텐데.
••
최근 랭킹권에 포진되어있는 이런저런 히트작들을 떠올린 나는 그녀
의 대답을 기다렸다.
"[소꿉친구. 고등학교 동창. 그리고 과선배.]요.’,
"뭐...?’,
"[소꿉친구. 고등학교 동창. 그리고 과선배.] 본다고요."
"씨발 이건 아니지! 나은아!’,
버스 안이었음에도 내가 그녀에게 조금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왜 하필 그새끼 작품인거야.
왜 그 개병신작품인거냐고!!!!!
아무래도 나은이는 나를 작가로 타락시켜버린 작품의 추종자인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