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일러레님!-28화 (28/276)

<28화 >#28.계약

오늘도 역시나 설계는 지독하게 나를 괴롭혔다.

"나은씨. 이게... 하... 지난 리뷰때도 말했었는데 형태는 정말 더할 나위

가 없이 괜찮아요.’,

"네.’,

"근데 여기까지 도출해내기 위한근거가 너무 빈약해요.’,

...여태 설명 했잖아. 왜이런 모양으로 디자인 했는지.

내 설명은다한 귀로 듣고 한귀로흘려보내기라도한거야?

교수의 지적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그게요...’,

"아니. 나은씨. 들어봐요. 설계는 이런게 아니에요."

교수는 더이상 내게 설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지겨워. 지겨워.

내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없다면 나 또한 그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

이 없었다.

"디자인이라는 건원래…’,

어쩌구저쩌구.

역시 나는 그냥 일러스트나 그려서 밥 벌어먹고 살아야겠다.

...한나은 일러스트 그려줘야하는데.

함께 작업을 하자며 오빠의 자취방에 들어간 나는 원래의 취지는 내

다 던져버리고 결국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다.

성난 오빠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아...개꼴려...

내 얼굴을 뒤덮을 것만 같은 커다란 자지...

그게 내 안을...

교수의 말에 적당히 끄덕이면서 나는 민호 오빠를 머릿속으로 그렸다.

그가 보고 싶었다.

하루 빨리 그의 손에 붙잡혀 또다른 야한 짓이 하고 싶었다.

"...나은 씨. 내 말 듣고 있어요?’,

교수가 설명을 멈추고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네.’,

아무래도 표정 관리에 실패한모양이었다.

그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가자 나는 어물쩡 고개를 끄덕이

며 그냥 이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럼 다음 시간까지 사이트 분석 다시 한 번만 해와요. 알겠죠?’,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치고 나오니 갈증이 나기 시작했다.

과몰입해서 듣지 않아도 목이 타들어갈것만 같은 것을 보면 이건 내

가 건축 설계에 조교당했음이 분명한 것이겠지.

카페에 들어섰는데 낯익은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아... 오빠. 우린 역시 운명인가봐요.

주문을 하는 그에 뒤에선나는 자연스럽게 내 음료도 함께 주문했다.

오빠는 내가 시 키지도 않았음에도 내 몫까지 계산해 주었다.

오호〜 이게 자기 여자를 챙기는 남자란 말인가?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소설 속 이진성은 일단 한 번 자기가 조교를 시작한 여자에게는 지극

히 호의적이었다.

각종 플레이나 섹스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는 언제나 일상 속 스윗남

이었다.

비일상의 영역으로 넘어간 순간 한 마리의 짐승일 뿐이지 평상시에는 그

저 일코하는 나이스한 회사원일 뿐이었다.

오빠도 그런 사람이거니 하며 그에게 사근사근하게 말을 걸었는데 어째.

••

민호 오빠의 얼굴은 겁에 질려있었다.

귀신이라도 본 것 마냥 당장이라도 나에게서 도망치고 싶어하는 표정.

이것도 나를 자신의 여자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마지못해 사준 것이려

나…?

자꾸 나를 두고 가버리려는 그의 모습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비장의 카드

를 쓸 수밖에 없었다.

"가긴 어딜가. 이 강간마새끼야.’,

우으...

솔직히 오빠가 나를 따먹은 이후에는 이런 심한 말은 내쪽에서 먼저 하

고 싶지 않았다.

오빠가 나를 그의 취향대로 조교해줬으면 좋겠는거지.

내가 그를 매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내처녀를 가져간 남자.

내오랜 숙원을 이루어준 남자.

내가 그 무엇보다 좋아하는 소설을 써주시는 최고의 작가님.

"히끅!"

오빠가 놀랐는지 딸국질을 하기 시 작했다.

"일단 여기 앉아봐요.’,

다짜고짜 나를 피하려고 하는 그를 나는 카페 테이블에 앉혔다.

"나은아... 저... 그 이야기는 학생들 오가는 데서는 좀... 안 해주면…히끅!’,

"안 할게요. 대신 오빠도 나 피하지 말아줬으면 해요.’,

이건 내 진심이었다.

"응... 알겠어.’,

자신감 없는 목소리.

이런 것을 원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렇다면 일단 내 가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오빠. 오늘 진짜로 사이트 가야해요?’,

"어. 안 그래도 교수님한테 개박살나고 와서."

"저도요...’,

오빠는 나를 비일상의 존재로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의 일상을 위협하고 그의 생활을 부숴버릴 것만 같은 시한 폭탄.

하지만 그래서야 나는 내가 원하는 엔딩에 도달할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일상이자 비일상이 되어야만 했다.

"오빠. 들어봐요.’,

마치 우리 사이에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는 오늘 내가 어떤 식으

로 교수님한테 조리돌림 당했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그니까. 완전 개정신병자라니까요. 그사람.’,

"와. 근데 리얼 억까네. 그거.’,

교수님. 감사합니다.

당신의 피드백은 써먹을 수 없겠지만 민호 오빠와의 대화 소재로서는 아

주 훌륭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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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긴장했던 것 같은 민호 오빠의 표정은 내가 오늘 있었던 크리틱 이

야기를 하면 할수록 점점 풀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심지어 마지막 즈음에는 내 말에 깊은 공감을 해주는 것 같은 리액션까

지 얻어낼 수 있었다.

"하아... 그래서 저도 오늘 사이트 가긴 해야되거든요.’,

민호 오빠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한 말투로 내게 물었다.

"그래서... 같이 가자고...?’,

"네. 저 기분도 우울한데 같이 가줘요. 혼자 가면 괜히 혼난 것만 기억나

고 꿀꿀하잖아요.’,

오빠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같이 가자.’,

"아. 맞다. 오빠. 다음부터는 같이 있을 때 오빠가 돈 다 내지마요."

민호 오빠가 사준 딸기 프라프치노를 흔들며 내가 그에게 말했다.

"왜?,.

그가 다소 놀란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야... 이미 많이 얻어먹었으니깐요...?’,

솔직히 근 씁주간 그에게 얻어먹은 액수만 약 20만원 정도는 되는 것같

았다.

나는 절대로 그의 등골을 빼먹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소득이 없는 것도 아니 었다.

오빠가 나보다 잘 버는 것은 확실했지만, 그래도 딸기라떼 정도는 얼마

든지 사먹을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춘 나였다.

"책임지라며."

오빠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설마 이 오빠.

그 책임지라는 말을...

"오빠."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불렀다.

"왜.’,

"오빠는 설마 그 일을 돈으로 떼우려고 생각한 것은 아니죠?’,

에이 설마.

내 처녀를 돈으로 물어주겠다고 생각한거야...?

이진성은 한 번 처녀를 앗아간 여자는 끝까지 개조시켜주었다.

그를 아침에 깨우는 법부터 씻겨주는 법. 말하는 예의범절. 밤시중을 드

는 법까지.

이진성은 한 번 조교를 시작한 여성에게는 정말로 깊은 애정을 보여주었

다.

그것이 여자를 책임지는 방식이며.

그것이 바로 '상식,이었다.

"...아니었어?’,

와... 진짜 확 깨네.

당신이 만든 상식을 당신한테 주입하려면 도대체 나는 무엇을 어떻

게 해야하는걸까.

내 뇌를 엉망으로 만들어놓고서 자기만 정상인인 척하다니...

이런게 어딨어요... 오빠...

"오빠. 소설 속에서는 어떻게 하는데요?’,

테이블에 턱을 괸 내가 살짝 나른한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내 소설에서는..."

그는 말하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 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차마 주인님 전용 좆물받이로 개조시킨다는 말은 하지 못하겠지.

"그거 그대로 해요.’,

"너. 소설 내용이 뭔지 알면 그런 소리 절대 못할걸.’,

오빠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내게 말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나는 오빠의 첫 여자고. 오빠는 나의 첫 남자에요.’,

진지하지도 장난스럽지도 않은 그런 담담한 말투로 나는 그에게 내 진심

을 엿보여 주었다.

"그러니까 나는 오빠가... 제대로... 책임져 줬으면... 좋겠어요…’,

아씨... 말하고 나니까 개쪽팔리네...

연기가 아닌 진심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

다.

"...진짜 신고 안할거야?’,

오빠가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끄덕끄덕

조금은 올라간 것 같은 얼굴 온도에 난 얼굴을 들기 싫어서 고개

를 푹 숙였다.

"그러면.....

갑자기 오빠는 가방을 열더니 태블릿을 꺼내기 시작했다.

"각서 써.’,

...각서?

"아니. 오빠. 내 말을 그렇게 못."

"어. 못 믿어. 그러니까 각서 쓰자. 내용은 최대한 네가 원하는 대로 맞추

면 그만일 것 아니야. 너는 단지 나를 신고하지 않는다. 이거한 줄만적어주

면 된다고.’,

오빠. 도대체 이렇게 쫄보면서 이진성 같이 대담한 캐릭터는 어떻게 만들

어내신 거에요.

타다다다닥.

민호 오빠가 빠른 속도로 워드를 후려갈기기 시작했다.

"동의해?’,

오빠가 테블릿 화면을 돌려서 내쪽을 향하게 해주었다.

문서 속 내용은 모두 방금 전 우리가 한 대화를 기반으로 작성되어 있었

다.

조항들의 내용은 이러했다.

1. 한나은은 이민호를 어떤 사유에서든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다.

2. 이민호는 본인의 소설 속 내용 그대로 관계를 맺은 한나은

을 책임지도록 한다.

3. 계약을 어길 시 두 사람은 각자의 신상과 직업을 주변은 물론 인터넷

에 게재할 것을 허락하기로 한다.

꿓번은 조금 전 대화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우리 두 사람에게 있어

서 정말이지 파멸적인 조항이었다.

내가 오빠의 신상과 직업을 인터넷에 까든 오빠가 반대로 내 정보를 인

터넷에 까게 된다면 우리는...

제대로된 인생을 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가족들. 친구들에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없을 것이었으며 진지하게 더

는 대한민국에 서 마스크를 끼지 않고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몰랐다.

덜덜덜.

만약 내가 이 계약을 파기할 경우 일어날 여파에 대해 상상한 나는 온몸

이 떨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뇌가 저릿해질것만 같은 엔돌핀이 뇌에서 분출되는 것

이 느껴졌다.

아아... 이건 서로의 인생을 걸고 맺는 맹약.

결혼 반지 따위보다도 더 짙은 사랑의 증거.

그리고 계 약서대로라면 나는...

[그녀를 감금했습니다.]의 히로인들이 한 명 한 명 떠올랐다.

오빠가 내게 내민 테블릿 펜슬을 받아든 나는 천천히 서명란 쪽을 향

해손을 움직였다.

한. 나. 은.

또박또박 정자로 쓴 이름이 올바르지 못한 내용들에 동의하기 시작했다.

하아... 민호 오빠...

서명을 마치자 오빠는 그대로 태블릿을 회수해갔다.

"그럼 이걸로 계약은 성립이네.’,

조금은 변한 목소리 톤.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것은...

더이상 한심하게 내 눈치를 보던 남자가 아니었다.

"책임 확실하게 져줄게."

섬뜩한 그의 표정이 미친듯이 섹시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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