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일러레님!-21화 (21/276)

<21화 >#21.한겨울

아직 잘 모르는 시은이도 있으니 나는 차마 면전에 대고 욕을 박을 수

는 없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앉아라. 수업 시작한다.’,

진짜 단 둘이 있었으면 나는 다시 한 번 궁등짝을 찰지게 때려줬을 텐데.

"나... 나은아. 진짜로 자리 옮겨줘 ?"

"네. 모쏠 옮아요. 언니.’,

시은이는 나은이의 말에 자리를 비켜주면서도 피식 웃었다.

"야... 그렇게 말하지 마〜 나도 모쏠이란 말이야.’,

나은이가 순간 경계하는 눈초리로 시은이를 노려보았다.

"언니. 농담이 좀 지나친 것 아니에요?’,

"응? 나이거농담 아닌데?’,

"자꾸 저 어리다고 놀리시는거죠. 그죠?"

하지만 시은이가 모쏠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나는 나은이

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였다.

나은이도 그렇고 시은이도 그렇고 모쏠이 우습나?

너희는 모쏠이 장난으로 보여?

모쏠은 당신네들이 같이 수려한 얼굴을 가진 처자들이 가벼운 마음으

로 논할수 있는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슬픔. 통탄. 비애.

나이가 차면 찰수록 숨막힐듯 조여오는 압박감.

명절 때마다치명타스택이 누적되어 가는 그 타격감.

더 설명하자면 속이 쓰라리니 그쯤 생각하기로 한 나는 한숨을 푹 내

쉬었다.

"그런 말 자주 듣기는 하는데... 정말 연애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말이

지…’,

시은이가 씁쓸한 표정으로 나은이의 질문에 답했다.

"고백 많이 받지 않았어요?"

"그렇기는 한데 ... 그냥 나랑 잘 취 향들이 안 맞더 라고.’,

"그래요? 무슨 취향이길래."

하지만 그들의 사담은 거기까지였다.

교수님이 마이크를 툭툭 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아. 아. 거기 뒤에 자고 있는 애들 깨워라.’,

교수님은 남은 시간 동안 우리가 앞으로 어떤 식으로 피티를 준비하

면 좋겠는지 설명해 주셨다.

수업은 거지같이 재미없으면서 뭐 이렇게 바라는 것은 많은 건데...

"자. 여기까지가 설명이고 지금부터 남은 시간 동안은 조원들하고 상의

해서 계획서들고오세요.’,

교수님의 말이 끝났음에도 우리 조원들은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흠... 흠!’,

휘민이가 헛기침을 하며 결국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일단 역할 분담부터 좀 해볼까?’,

팀플에 있어서 모든 일을 다같이 하는 것만큼 시간 낭비인 것이 없었다.

"발표1명. 자료 정리 씁명. 피티 만들기 1명. 이렇게 할까 하는데.’,

딱 스탠다드구만. 아주 좋아.

"좋아요.’,

"저도요."

나은이와 시은이는 쌍둥이라도 되는지 한 번에 대답했다.

"그럼 각자 원하는 파트 있으면 말 좀 해줄래 ?"

야. 이휘민. 너 왜 내의견은 안 물어봐.

딱히 이견은 없었지만 나를 투명 인간 취급하는 것 같아서 뭔가 열받았다

"저는 피티할게요."

나은이가 먼저 선수를 쳤다.

하긴... 일러스트레이터니까...

누구보다 이미지 제작이나 편집에 능할 것 같은 사람은 그녀이기는 했다.

"저는 자료 조사가 좋아요.’,

"오케이. 그럼 시은이가 자료 조사. 나은이가 피티. 내가 발표하고. 야

. 민호 네가 자료 조사 시은이랑 같이 해라.’,

...어째 내 의사는 전혀 반영이 안되는 것 같은데.

그래도 뭐. 자료 조사야 늘 먹던 그 맛이니 그닥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대학 생활 딙년차.

누적 학기 낗학기째인데 자료 조사가 무엇이 두렵겠는가.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그리고이건말인데...’,

가방에서 璘딙철 하나를 꺼낸 휘민이가 씨익 웃음을 지었다.

"내가 태호 형한테 전수 받은 제작년 피티 자료거든? 이거 에이쁠 맞았

다고 하더라고.’,

아직 결성된지 얼마 되지 않은 집단이었지만 이 순간 만큼은 우리 모

두 한 마음이었으리라.

"아〜 그럼 끝났네요. 오늘 점심 메뉴나 고민하죠."

나은이 가 후련하다는 목소리로 이 야기했다.

"야야. 그래도 하긴 해야돼. 어떻게 그대로 내냐. 이걸."

"그래도 아직 씁주 남았으니까 막주에 한 번에 딱 하고 치우죠."

"나도 찬성.’,

저런 치트키가 있다면 굳이 애쓸 이유가 없기는 하]•지.

족보의 사기성이야 대학생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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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 무협지 속 영 약이 었으며 야설 속 미 약이 나 다름없었다.

"아예 똑같이 할 수는 없으니까 주제는 비슷하게 가져가고, 어디어디 추

가할지나 지금 보자고."

그렇게 우리는 휘민이가 가져온 피티를 기반으로 어떻게 포장을 해나

갈지 회의를 했다.

"자〜 오늘은 수업 여기까지들 합시다. 고생들 했어요.’,

예정된 시간보다 10분이나 일찍 끝나서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이것이 일상의 소확행.

그냥 이대로 집에 가서 누워있을 생각이었는데.

"민호 오빠.’,

아무래도 나은이는 오늘도 나의 해피 타임을 방해하려는 모양이었다.

"왜.’,

"저한테 할 말 없어요?’,

이 씨발련아?

이걸 듣고 싶어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없어.’,

"진짜 없어요?"

오늘은 이상하게 붙잡히지 말고 빠르게 튈 생각이었다.

또다시 그 마굴에 붙잡혀 들어가서 ■나은이는 처녀다!, 같은 잘못된 사상

을 주입당할 생각은 없었다.

"어. 먼저 간다."

가방을 싸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그대로 그녀를 스쳐지나가려 했는

데...

"이보세요. 한겨울 씨.’,

머릿속에 찍히는 무수한 물음표 핑.

"너 방금 뭐라고.’,

"다시 말해줘요?’,

"노벨.월드.

알려져서는 안되는 나의 직장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선물은 잘 받았어요?’,

선물...?

설마...

한나은은 그 사진을 내가 한겨울 작가인 것을 알고...?

"표정을 보니까 잘 받았나 보네요.’,

입을 가리며 나은이가 키득였다.

"노벨월드?"

아직 강의실에 남아있었던 시은이가 나은이의 말에 그게 뭐냐는 투로 물

어봤다.

"아아〜 그냥 그런게 있어요.’,

시은이의 말을 대충 흘러넘긴 나은이가 씨익 웃으며 내게 손짓했다.

"제가요오〜 오늘은 초.밥.이. 먹고 싶은데요〜 옵.빵〜"

비음이 잔뜩 섞인 그녀의 목소리.

속사정을 모르는 다른 남자애들이라면 나은이의 애교를 보고 보통 초밥

이 아니라 오마카세라도 대령했겠지만 나는 치를 떨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알아낸 거지?

내 소설을 읽은 건가?

소설을 읽었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내가 한겨울 작가임을 특정할 수 있

는 부분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가장의심스러울 부분인 한나은 파트도 전부 갈아엎고 다시 쓴 버전이었

다.

도대체 어디서 걸린거냐고...

그리고 왜 하필 걸려도 한나은인데!

이미 약점을 한가득 잡힌 나였다.

그녀의 말 한마디면 사회적 매장이 충분히 가능한 상태였는데 이제 저것

마저 걸렸으니 나는 묫자리를 알아보면 되는 것이로구나...

허허...26세. 생을 마감하기에는 짧은 나이.

아아... 진짜...

"어〜 그래〜 우리 나은이가〜 초밥을〜’,

"네〜 참.치.뱃살이 먹고 싶네요오〜’,

"그래〜 그 참치 중에서도 비싸기로 악명이 자자〜한 참치 뱃살을〜’,

입은 웃으며 대화를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오열중이었다.

"얼른 가요. 오빠. 언니 ! 먼저 가볼게요!’,

"어. 응. 다음에 봐. 나은아. 오빠도 들어가세요."

시은이를 뒤로한 우리는 강의실을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날씨가 참 좋아요〜 그죠〜’,

"그러게〜 죽기에 딱 좋은 날이네〜"

가을과 겨울 사이.

춥지도 따듯하지도 않은 서늘한 바람이 내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근데... 진짜 초밥 먹냐?’,

"오빠가 정 사주기 싫다면 어쩔 수 없는 거죠. 아〜 집에 들어가서 한겨.’,

한겨울. 한겨울.

그놈의 한겨울 좀 현생에서 입에 담지 말란 말이다아아!

역함을 참지 못한 내가 그녀의 입을 오른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녀는 내 행동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껌뻑였다.

"사줄게. 사주면 되는 것 아냐〜’,

"처음부터 고분고분하게 말 들었으면 좀 좋아요."

아. 진짜 내가 모텔가서 입에다가 자지만 안 쑤셨어도 여기서 너 죽

고 나 죽자는 식으로 이년 야짤 장인임이라고 소리지르면서 뛰어다녔을텐

데.

"우리 집 근처로 예약해 뒀어요. 어때요. 오빠. 기대되죠?’,

...아예 뜯어먹으려고 작정을 하고 왔구나.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대로 가다가는 영락없이 나은이의 ATM이 되어버릴지도?

야설을 써서 열심히 번 돈을 야짤 작가한테 매도당하면서 바치는 소

설 작가라...

...이걸로 야설 쓰면 좀 수요가 있을지도?

소재 괜찮은데?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내가 고장난 인간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뇌가 야설에 절여져 버렸구나. 민호야.

년 이미 컨셉에 잡아먹혀버렸어.

나은이네 집 방향으로 가는 버스에 탑승한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

았다.

그럼 나은이는... 내가 자기 이름으로 소설 쓰는 것도 알게 되었다는 말이

구나.

자괴 감.

말도 안되는 자괴감의 파도가 나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은이 가 어떤 심한 말로 나를 채찍질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가요.’,

나은이의 말에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그녀를 따라 일식집에 들어

갔다.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분위 기 .

"예약하셨나요?’,

"네.’,

"성함이?"

"한겨울이요!’,

쿨럭쿨럭.

진짜 미친년이네. 이거.

여직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괜찮으세요? 손님?’,

"아. 네. 괜찮습니다.’,

"그럼 한겨울 고객님 1번 룸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도대체 얼마짜리를 시켜먹으려고 룸을 잡은 거냐고.

드르륵.

직원은 우리에게 메뉴를 소개해주고는 벨을 눌러서 부르라고 했다.

"오빠. 이걸로 할게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짚은 메뉴는 런치 참치 스페셜 세트.

인당 15만원.

무려 학식이 30번.

"으응. 우리 나은이가 먹고 시프믄 므그야지.’,

이를 꽉물고 말하느라 발음이 잘되지 않았다.

"에이〜 오빠도 먹으면 분명 같이 기분 좋아질 걸요?’,

띵동.

벨을 누르자 다시 직원이 들어오더니 주문을 받고는 나갔다.

시원한 녹차를 한모금 들이킨 한나은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나

를 바라보았다.

"오빠."

"왜.’,

"제 사진으로 그래서 한 발 뺐어요?"

하. 그렇게 나를 놀리고 싶단 말이지.

"어. 존나게 쌌어. 좆이 팅팅 부을 때까지 네 젖통 사진 보면서 딸쳤다. 왜.

’’

그만 놀리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는데 어째 한나은의 얼굴이 이상했다.

"오빠...’,

..너 왜 감격스러운 표정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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