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19.사진
한나은.
고요했던 나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 그녀는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분명 신고를 하든 나를 불러내서 화를 내든 했으리라 생각했지만 내 휴
대폰은 잠잠했다.
후우... 혹시 몰라서 서랍 안에 유서까지 준비해뒀는데...
이미 소설로 인해 창출한수입금을 사회에 환원할준비까지 해둔 나였다
•
올바르지 못한 짓으로 불명예스럽게 죽었으니, 죽어서라도 좋은 일 해야
지 지옥 가서 감형받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나은이는 전혀 아무일도 없었다
는 듯이 학교에 나왔다.
수업은 다 나왔는데 출석을 부를 때는 항상 있었지만 그녀는 수업을 마
치면 급한 일이라도 있는지 바로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야. 민호야. 밥이나 먹자."
"으
O •"
휘민이가 철근콘크리트 수업이 끝나자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오늘도 어김없이 강의가 끝나자마자튀어나가는 나은이의 뒷모습을 바
라보며 나는 휘민이와 함께 학식을 먹으러 신발을 질질 끌며 걸어갔다.
"뭐 먹을거냐?’,
돈까스와 제육볶음.
오늘은 남자의 날이로구나.
거를 타선이 없는 메뉴들을 보며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나는 제육."
휘민이가 카드를 리더기에 꽂아 넣으며 대답했다.
"나는 돈까스 먹지. 뭐.’,
같이 음식을 받아서 자리를 찾고 있었는데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
다.
"왜. 저기 가서 같이 먹게?"
휘민이도 나은이를 발견했는지 내게 물었다.
"아냐. 그냥 우리끼리.’,
"왜. 어차피 도시 계획 같은 조인데 같이 먹자."
아니. 진짜 괜찮은데.
휘민이는 내 대답도 끝까지 듣지 않고 덜컥 나은이의 맞은편에 앉아버렸
다.
나은이는 혼자서 휴대폰을 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웃긴 영상이라도 보고 있는 걸까.
"나은아. 우리 여기 앉아서 같이 먹어도 괜찮지?’,
나와 휘민이를 발견한 그녀는 엄마 몰래 게임하다 걸린 중학생 마냥 몸
을 흠칫 떨었다.
"아... 앉아요. 같이 먹어요.’,
내가 아직 앉지 않고 휘민이를 야리자휘민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임마. 너희 친하잖아.’,
응. 너무 친해진 나머지 엉덩이를 팡팡 해주고 야설 히로인으로도 고용해
줬다고.
한숨을 푹 내쉰 나는 휘민이의 옆자리에 앉았다.
나은이 가 나를 오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약간 웃음을 참고 있는듯한 표정.
...불안한데.
나은이가 일반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그날
부터 나는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었다.
아무 엑션이 없는 것이 몹시도 불안했다.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어야하는 느
낌?
"민호 오빠.’,
"왜.’,
"공모전 준비는 잘 되가고 있어요?’,
그녀가 질문을 하자 휘민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민호. 너 공모전해? 네가?’,
...아뇨. 안하는데 야설 쓰느라 바쁘다고 핑계댈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아냐아냐. 잠깐 수림에서 나온 것 할라고 했었는데 그냥 포기 했어. 주
제가 내 취향이 아니더라.’,
"그래요?"
나은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주제가 뭐였는데요?’,
사실 그때 급해서 그냥 생 각나는데로 말했는데 나는 공모전 요강도 읽
어보지 않았다.
"어... 뭐... 미래 도서관과 아카이브 공간 디자인? 그런 것이었던 것 같은
데.’,
"흐응〜 그렇구나〜’,
나은이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휴대폰을 집 어들었다.
급한 문자라도 왔는지 타다닥 휴대폰 자판을 두드리던 그녀는 다시 휴
대폰을 내려놓았는데 그 순간 내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한나은님의 메시지 (2)]
...뭔데.
나은이와의 톡방을 열어본 나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수림 학생 공모전. PDF]
이번 공모전의 요강으로 짐작되는 파일이 하나.
그리고 그걸 보낸 나은이의 놀리는 듯한 문자 하나.
[췑췑 열어봐요.]
침을 꿀꺽 삼킨 나는 파일을 클릭해서 열어보았다.
그리고 이번 수림 공모전의 주제는... 두성동 도시 재생 프로젝트.
도서관 어쩌구 같은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그날 그렇게 바쁘다면서 그렇게 가버리고는 포기한다고 하니까 좀 아쉽
네요. 오빠.’,
몇 마디 대화도 하지 않았는데 1티어 학식인 돈까스가 맛이 없게 느껴지
기 시작했다.
"이민호 너 탈건한다면서 설계에 미련 남음?’,
휘민이가 피식 웃으면서 나를 놀렸다.
"너. 맨날 하기 싫다고 노래하면서 사실은 설계가 좋은거구나〜’,
"아니야. 이 새끼야. 좀 끔찍한 소리 좀 하지마라."
어후. 진짜 저건 아니었다.
설계 사무소에 취직할 바에는 그냥 편의점 알바 할게.
설계 사무소...
4학년 정도 되면 우리는 모두 필연적으로 그곳의 진상에 대해서 알아버
릴 수밖에 없었다.
가끔씩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건축 설계 사무소에 다니는 건축가들
을 보며 꿈을 키우는 학생들이 있는 것 같은데.
딱한마디만 해주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도망쳐.
진심이었다.
씁학년 때는 1학년들을 보며 후배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
쳤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1학년들을 보면...
아아... 또 어리석은 중생들이 잘못된 길을 택했구나.
이런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탈건은 지능순, 이런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민호 오빠 탈건하면 뭐하려고요?’,
나은이가 젓가락으로 단무지를 깨작거리며 물었다.
"몰라. 그때 가서 봐야지.’,
야설이나 쓰고 있겠지 뭐.
솔직히 이미 설계 사무소 초봉보다 아득히 높은 수입을 벌어들이고 있었
다.
야근을 해가며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삶을 연명해갈 생각 따위 없었다.
"나은아. 내일 도시계획 수업. 주제 좀 생각해둔 주제 있어?’,
정적이 흐르자 휘민이는 우리 세 사람 사이의 교집합인 도시 계획 이야기
를 꺼냈다.
"저는... 음... 도시 조경 쪽으로 좀 풀어나가면 좋을 것 같다고는 생각
이 들었는데.’,
"구체적인 도시 봐둔 건 있고?’,
"뉴욕을 레퍼런스로 삼으면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아아... 이런 대화. 너무 싫다.
근데 한나은 당신.
야짤로 이미 성공한 삶을 살고 있잖아.
럭셔리한 오피스텔에서 인형 주르륵 진열해놓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
는 주제에 왜 건축에 진심인 것처럼 얘기하냐고.
"그럼 약간 센트럴 파크랑 공원들 분포. 이런거 스터디하고?’,
"대충은요.’,
"나쁘지는 않네.’,
"나는 시카고 쪽을 좀 생각해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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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건축에 진심 인 휘 민쿤.
벌써 피티의 기승전결까지 다 짜놓은 느낌이었다.
그가 다소 적극적으로 막 설명을하기 사작하자 나은이는 부담스럽다
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저게 정상이지.
위이이잉.
휘민이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리자 그는급하게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
"얘들아. 먹고 먼저 가라. 나 이거 교수님이라 통화 좀 걸릴 것 같아서.’,
"네〜’,
나은이가 휘민이에게 싱긋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남겨진 우리 둘.
나은이는 아직 음식이 좀 남았지만 다 먹은 것인지 나를 바라만 보았다.
"오빠."
"응?"
"제가요즘고민이 있는데요.’,
..나은아.
학생 식당에서 그런 얘기를 꺼낼 것은 아니지?
이새끼가 저를 강간하려했어요. 이딴 소리 하는 건 아니지?
사람들이 많은 것이 피크를 찍는 점심 시간.
이곳에서 그녀가 시원하게 소리 한 번 지르면 나는 몇 명에게 구타를 당
하게 되는 걸까.
"...얘기해봐.’,
"한겨울 작가님 있잖아요.’,
"으"
O•
내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저것도 또다
른 내이름.
아직은 방심할 수 없었다.
"왜 일러스트 신청을 넣어주시지 않는 걸까요?’,
...사실 이미 신청할 시기가조금 넘어가고 있기는 했다.
나는 히로인 1명당 평균 20 〜 30회차를 잡고 쓰고 있기 때문에 1화가 나
왔을 때 보내면 딱 중후반 즈음에는 일러스트가 완성이 되고는 했다.
근데 이번에는 조금 늦어진게 아무래도...
HNE 작가가 나은이라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도 있었고, 소설 속 한나은
의 캐릭터의 방향성을 수정해야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대로 컨셉을 가져갔더라면 나는 나은이한테 자기를 일러
스트로 그리 라고 하는 것과 다름없는 짓을 시 킬 뻔했구나?
자신의 침실 안에서 자기 자신을 모델 삼아 야짤을 그리고 있는 나은이
를 떠올려보니 뭔가 꼴리는 것 같기도 한데...
와.
간신히 내 뺨을 때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했다.
자꾸 환상이 현실의 경계를 넘어오려고 하고 있었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 그리고 내가 쓰고 있는 것은 무려 야설.
자꾸 이것을 현실에 투영하려고 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조만간 신청해주시겠지. 너랑 같이 한다고 했다며.’,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는 오빠가 찍어준 사진으로 제쪽에서 먼저 연
락 보내보려고요.’,
"너. 캐릭터도 모르잖아.’,
"어차피 내용은 몰라도 상관 없어요. 백금발 단발머리에 육덕. 필요
한 정보는 눈 색깔 정도? 그거야 마지막 채색할때 하면 되는 거니까요.’,
...근데 진짜 작가한테 자기 사진을 찍어서 보낸다고?
"나은아. 그 사진 진짜로 보내게?’,
진짜굉장히 위험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음부나 다른 주요 부위들이 대놓고 보이는 사진들은 아니었지만 행
여 작가놈이 유출한다면 어떡한단 말인가.
"네.’,
"야. 그거 막 인터넷에 퍼지기라도 하면...’,
"어차피 작가님은 이거 제 사진인 줄도 모를텐데 뭐 어때요.’,
그건 맞기는 했다.
"안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저 걱정해주는 사람이 그런 짓을 했어요?’,
...말문이 턱 막히네.
"아무튼 보내보려고요.’,
야. 그렇게 네 맘대로 할꺼면 왜고민 있다고 말은 꺼내는 건데.
"먼저 갈게요. 내일 봐요. 오빠.’,
그렇게 나은이는 먼저 자리를 떴고 나는 식은 돈까스를 입에 집어넣었다.
埌埌埌
집에 돌아와서 메일함을 확인한 나는 분노에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나은이는 내게 거짓말을 했다.
왜냐하면 HNE작가가 첨부한 사진은 내가 찍어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
었다.
사진 속 나은이는...
가슴이 모두 보이도록 상의를 위로 뒤집어 깐 상태였다.
그녀의 분홍빛 유두도 유륜도 전혀 모자이크 처리되어있지 않았다.
사진 속에서 모자이크 되어있는 것은 오로지 그녀의 두 눈뿐.
[한심한 저를 따먹어주세요횞]
그녀의 목에 걸려있는 플랜 카드의 글씨가 선명하게 보였다.
심지어 손으로는 더블 피스.
[이번 신캐 구도 이렇게 잡아보시는 것은 어떠실련지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능청스러운 말투의 메일.
...이딴게 처녀일리 없었다.
한나은.
감히 처녀가 아닌데 처녀인 척을 해?
그녀는 야설 작가인 나의 역린을 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