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 #15.포즈
조 배정 이후 명단을 제출한 우리는 연락처를 교환했다.
나는 나은이와 휘민이. 두 사람의 번호는 알고 있었으니 사실 김시은
과 교환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럼 대충 다음 수업 언저리쯤 방 파서 이야기 하죠?’,
김시은은 25살.
이 런 장기 프로젝트들은 어차피 초반부터 힘 뺄 필요가 없었다.
내리 1 달 동안 같이 준비해서 피티를 준비해 발표하는 형식이었는
데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리라.
어차피 마지막 한 이틀 정도에 벼락치기 하고, 나머지는 그냥 어물쩡 대
충 넘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요. 그럼.’,
김시은이 우리를 향해 싱긋 웃었다.
"그럼 나중에 연락 드릴게요!’,
가방을 맨 그녀는 먼저 강의실을 떠났다.
남겨진 나와 휘 민이는 멀어져가는 그녀를 바라만 보았다.
"야. 얼굴 근데 개예쁘다. 나 말 처음해봄.’,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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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학교에서 온 것이 아니었더라면 진작에 다른 애들하고 팀플을 했
을 것 같은데.
그녀가 사람을 못 구한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가요. 오빠.’,
나은이가 내 손등을 쿡쿡 찔렀다.
"뭐. 어디 가는데.’,
"점심 먹으러요.’,
뭔가 토라진 듯한 표정의 한나은.
"내가 왜 너랑 점심을 먹는데?’,
사전에 이야기된 것은 전혀 없었다.
팔짱을 낀 나은이는 왼쪽만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아〜 그래서 나랑 안 먹겠다. 뭐 그런 소리신가요? 이건?’,
휘민이는 나와 나은이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대화에 끼어들었다.
"야. 이민호. 너 나은이랑 언제부터 그렇게 친한 사이였냐. 학교 다닐 때
는 맨날 나랑 같이 돌아다닌 주제에.’,
몰라요. 저도.
홧김에 입에 자지를 물렸더니 애가 이상해졌나봐요.
원래 이상한 애한테 자지를 물린 건지.
자지를 물렸더니 애가 이상해진 건지.
"그냥 최근에 좀 알아갈 기회가 있었어서... 허허…’,
"근데 너희 둘 조합. 좀 의외기는 해.’,
휘민이가피식 웃으며 필통을 정리했다.
"야. 나은아. 얘 조심해라. 이새끼 멀쩡해 보여도 약간 똘끼 있으니까.’,
얌마! 이휘민!
그렇게 따지면 한나은이 나보다 한 술 더 뜬다고!
너 모르잖아! 얘가 순진한 얼굴로 얼마나 천박한 일러스트를 그리는 앤
지!
맨날 흰색 블라우스. 핑크색 가디건.
무슨 대학생 잡지에나 나올 법한 그런 옷만 입고 다니는 주제에 가랑
이 벌리고 정액 받아먹는 여캐 존나 잘 그린다고!
뭔가 나만 검은 속내를 갖고 있는 사람처럼 말하는 휘민이의 말에 울화
통이터지는 나였다.
하지만 지은 죄가 있으니 여기서 그냥 시원하게 말할 수도 없고.
아오... 이씌...
"그런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더 재미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녀의 미소 속에 담긴 의미를 나는 헤아릴 수 없었다.
"가요. 민호 오빠. 오늘은 학식 법대 가서 먹어요. 좋죠?’,
"법대 먼데…’,
내가 칭얼거리며 거부하는 의사를 밝히자 나은이는 허리를 숙여 내 귓가
에 속삭였다.
"...그만 튕기세요. 이 개변태새끼야.’,
...와. 시발.
내 귓가에서 입을 뗀 그녀가 다시 내쪽을 보며 배시시 미소지었다.
반면 나는 표정 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입이 잘 다물어지지 않았다.
한나은. 너 무슨 연기자라도 되는 거냐고.
그녀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
를 바라보았다.
"아니. 뭐야. 나 빼고 뭔 얘기하는데.’,
휘민이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지만 미안하다. 휘민아.
아무리 너라고 하지만도저히 들려줄 수가 없는 내용이다. 이건.
"야. 간다. 이따 연락할게.’,
"진짜 법대까지 밥먹으러 간다고? 허... 그래... 잘 다녀와라.’,
나도 가기 싫어 !
가기 싫다고!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나은이 같은 여자랑 밥이나 한 번 먹어보면 얼
마나 기분이 좋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의 나는 나은이와 단 둘이 있는 상황을 어떻
게든 벗어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살얼음 판을 위에서 먹는 밥이 제대로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럼 휘민오빠 다음에 봐요〜’,
휘민이에게 눈웃음을 지은 나은이는 나와 함께 복도로 나섰다.
* * *
법대 식당은 그렇게 넓지는 않았다.
워낙 구석에 자리해 있는 건물이기도 했고, 법대생들 이외에는 잘 이용
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학식을 각자 주문하고 마주앉은 나은이는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열심
히 볶음밥을 먹었다.
"...뭐하러 여기까지 와서 밥 먹자고 한건데."
"왜요. 나랑 밥 먹기 싫어요?’,
"어. 싫어.’,
어물쩡거리며 애매한 태도를 보이면 그녀는 더 나를 이리저리 휘두
를 것 같다는 생각에 한 번 단호하게 말해 보았다.
"왜 싫은데요.’,
"너는 네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이랑 식사를 하고 싶니?’,
"총을 쥐어준 건 오빠잖아요.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능청스러운 그녀의 대꾸에 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라도 있는거야?"
"네. 그러니까 오빠 같은.,개.변태.,랑 이렇게 따로 밥을 먹고 있는 거잖아
다른 사람들 시선 의식해서 개변태란 단어만 작은 목소리로 하나하나 끊
어서 말하는것 개열받네. 진짜.
만약 이것이 만화였더라면 내 이마에는 분명 빠직 표시가 그려져 있을 것
이었다.
"그 소설 말이에요. 한겨울 작가님 소설."
갑자기 그녀가 그 이야기를 꺼낸 탓에 어제 삭제해버린 나의 피같은 회
차들이 떠올랐다.
이제는 화장까지 모두 마쳐 뼈가루 조차 남아있지 않은 한나은 에피소드
•
"어. 그래. 그거.’,
오열하고 싶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녀와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한겨울 작가님한테 제가 직접 다음 일러스트 포즈를 추천드릴까 해서요
• ’’
응? HNE작가님? 그러니까 네가 나한테 포즈에 대한 제안을 직접 한다
고?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내가 요구하는 사항을 최대한 잘 반영해주려고 노력했지
, 먼저 막뭔가를 제시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원래 그런 식으로 작가님하고 작업한 거야?’,
나은이 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 었다.
"아뇨. 여태까지는 그냥 해달라는 대로 해줬는데, 이번 캐릭터 이름
이 제 이름이잖아요.’,
"그렇기는 하지.’,
"그러다 보니까 애정도 생기고 좀 제대로 그리고 싶고 그러더러라고요.’,
으음... 뭐랄까. 괜히 나랑 이름이 같은 후배를 만나면 잘해주고 싶은 그
런 거려나?
"그래서 오빠 도움이 좀 필요할 것 같아서요.’,
저기요. 작가님.
그림을 위한 포즈를 제안해주시는 것은 무척이나 감사하지만 그 과정
에 왜 제 도움이 필요한 거죠?
"...뭔데. 또.’,
"사진 찍어줘요.’,
"사진?"
"이따우리집 가서 내가포즈를 취해볼테니까 사진을 찍어줘요.’,
불과 하루 전에 들어갔다가 나온 마굴이었다.
나더러 거길 또 들어가라고?
"그냥 셀카 모드로 혼자 찍으면 되잖아."
"오빠. 오빠는 오빠의 가치를 너무 모르고 있어요."
나은이가 히죽 웃으며 숟가락으로 내 쟁반을 톡톡 쳤다.
"제가 백날 혼자 방에서 찍어봐야 뭐가 꼴리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오빠
같이 달려 있어야 알지.’,
무엇이 달려 있는지 유추하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낮의 식당에서 하기에는 남사스러운 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오늘 바쁜 일 없죠?’,
사실 나는 할일이 있기는 했다.
전면 폐기한 원고를 다시 써야만 했다.
"근데나 오늘은 좀 할일이 있어서.’,
"뭔데요. 학교 일이에요? 시험 끝나서 과제 없는 것 뻔히 아는데 거짓
말 하지 말고요.’,
"아니아니. 학교 일은 아니고… 내가 개인적으로 하는 일이 있어서..."
그 순간 나은이의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
"그럼 뭔데요.’,
"아... 음... 그 이번에 수림 건축사 사무소에서 하는 학생 공모전 있잖아.’,
내가 건축사 사무소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나은이는 대놓고 실망한 표정
을지었다.
뭘 기대한건데. 너는.
"네. 알아요. 워낙 큰 규모니까. 그거."
"그거를 좀... 준비해 보려고.’,
"오빠 설계 사무소 취직하려고요?’,
아뇨? 탈건하려고 좆빠지게 노력하는 중인데요.
"해둬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아무튼 그래서 나 오래는 못 도와줄 것 같
은데.’,
"흐으음...’,
검지로 테이블을 탁탁 치던 나은이는 잠시 고민을 하는 듯 하더니 이
내 좋은 생각이 난 건지 손벽을 짝 쳤다.
"내 노트북 빌려줄테니까 집에서 작업해요."
"어?,.
"어차피 포토 일러 캐드 이정도 필요할 것 아니에요.’,
"그렇기는 하지…’,
시발? 이게 아닌데?
나는 사실 공모전 요강도 읽 어보지 않았다.
소설 쓰기 바빠 죽겠는데 무슨 쓰잘데기 없는 건축 공모전이란 말인가.
"그럼 옆에서 작업하면서 간간히 사진만 찍어줘요. 그러면 괜찮죠?’,
"집에작업해둔 파일들이 다 있어서…’,
"그럼 집 들렀다가 USB라도 챙 겨 와요. 클라우드에 저장을 시켜서 오든
지.’,
나은이는 집요했으며 나에게는 그녀의 제안을 떨쳐낼 마땅한 수단이 없
었다.
"왜 대답을 안해요? 학교 커뮤니티에 박제라도 되고 싶은 거에요?’,
아〜 이민호 선수〜 K.O.에요〜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갈게. 도와주면 되 잖아.’,
"대답 좀 빨리빨리 하죠."
그렇게 나는 나은이네 집으로 또다시 붙잡혀 들어가게 되었다.
埌埌埌
띵동띵동.
나은이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한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대체 이번에는 어떤 역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지만 역경이고 나발이고 나는 빨리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미 어제 하루를 휴재했다.
빨리 업로드를 하지 않으면 독자들의 곡소리가 날텐데...
드르륵.
이윽고 문이 열렸고 나는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뭐해요. 안 들어오고.’,
"야... 너... 그…’,
"아. 이거요? 촬영한다고 준비한 소품인데. 어때요? 좀 꼴려요?"
어깨와 가슴골이 살짝 드러나는 살색 오프 숄더 니트.
심지어 밑단 기장까지 짧아서 그녀의 배꼽은 아슬아슬하게 바깥 공기
를 마시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속옷이 보일 것만 같은 검정 미니스커트.
여기까지만 해도 남심을 자극하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경악
시킨 것은 이것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목에 목걸이처럼 걸고 있는 플랜카드.
귀 여운 손글씨로 쓰여져 있는 문구.
[한심한 저를 따먹어주세요횞]
HNE 작가. 당신은 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