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 #12.한나은 (I)
[한나은 (1)]
화면에 띄워져 있는 내 이름을 확인한 순간 나는 눈을 비빌 수밖에 없었
다.
...버근가?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뜬 나는 다시 한 번 모니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나은.
내 이름 석 자.
[그녀를 감금했습니다.]의 다음 히로인 이름이 내 이름과 같다고?
사실 나은이라는 이름은 그렇게까지 흔한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소
설 속에 등장할 수 있는 이름이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성까지 똑같기는 쉽지 않은데...
같이 화면을 확인한 민호 오빠도 사뭇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다.
오빠도 황당했겠지 .
나한테 새로운 히로인에 대해서 설명은 해줘야하는데 내 이름이 불쑥 나
와버렸으니까.
뭐.히로인 이름이 내 이름과 같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나는 그를 여기까지 데려오기 위해 아주 치밀하게 촘촘한 거미줄을 짜두
었고 그는 한 마리의 나비처럼 내 말에 걸려들어 여기까지 왔으니 말이다.
"..설마 이거. 새 히로인 이름이 한나은이라는 거에요?’,
내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그에게 물었다.
"...그런 것 같은데?’,
하지만 정말 솔직한 내 본심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행복사하기 일보직전
이었다.
우연히 얻어걸린 이름이라고 할 지라도 여태까지의 소설의 전개가 그대
로 이어지게 된다면 내가 누구보다 멋지다고 생각했던 주인공. 이진성에
게 범해지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히로인 한나은'일 것이니 말이다.
다른 히로인들이 당하는 씬만 봐도 몸이 달아올랐는데 소설 속 이진성
이 내 이름을 부른다고 생각하니까 벌써부터 입가에 지어지는 흐뭇한 웃음
을 참기 힘들었다.
그냥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라고 이야기하고 냅다 민호 오빠를 내쫓아버
리고 자위나 해버릴까...?
내 눈에 비친 [한나은 (1)] 에피소드는 아직 열리지 않은 판도라의 상자였
다.
내용이 궁금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한겨울 작가님이 만든 '한나은,이라는 캐릭터는 어떤 캐릭터일까?
내친 김에 그녀의 외형 묘사에 따라서 스타일을 좀 바꿔볼까?
얼추 비슷하게 가능만 하다면 한번쯤 해볼 의향도 있었다.
한나은의 ■한나은, 코스프레라…
뭔가 생각해보니 웃겨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민호 오빠는 내 반응에 좀 많이 당황한 것인지 좀처럼 소설 페이지를 클
릭해서 내용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아. 정말 기분 개더럽긴 한데. 그래도 이것도 어디까지나 일이니까
. 얼른 틀어봐요. 뭐라고 적혀있나 구경이라도 해보게.’,
민호 오빠는 싫어하는 음식을 억지로 먹는 표정으로 나의 지시에 따
라 창을 클릭했다.
그리고 민호 오빠는 천천히 글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낭독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는 그냥 눈으로 보고 설명을 해주려고 하
는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니 지금 나에게는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이,한나은,인 편이 오히
려 호재일지도 몰랐다.
만약 소설 속 ■한나은,이라는 캐릭터가 무리하게 범해지는 장면이라도 나
온다면 그는 내게 한나은이 어떻게 범해지는지 설명을 해줘야만 하는 구조
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남자였다면 무조건 개꼴렸을 것 같은데. 아닌가?
지금부터 유심히 민호 오빠의 하반신을 관찰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나
였다.
"...너한테 도움이 될 자료라면 아무래도 캐릭터 외형이 가장 중요
하겠지?’,
솔직히 어떻게 캐릭터가 따먹히느냐가 제일 궁금하기는 했지만 일적으
로는 외형이 가장 중요하기는 했다.
"네. 거기에 뭐라고 적혀있는데요.’,
"한나은의 머리색은 밝은 백금발. 체형은 좀 육덕진 것 같네. 나이는 20
살이고.’,
우음... 아무래도 한겨울 작가님이 생각하는 ■한나은,이라는 이름은 그
런 이미지인 건가.
나이야 이미 먹어버려서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육덕진 백금발이라니.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슬랜더 같은 느낌이었고 머리 색도 밝은 갈색이었으
니 말이다.
"헤어스타일도 묘사 되 어있어요?"
내가 질문하자 민호 오빠는 스크린을 보지도 않고 바로 대답했다.
"숏컷에 가까운 단발이라는데?’,
...그것 참 이상하네.
한겨울 작가님과 메일을 주고 받았던 내용 중에는 그가 선호하는 여
자 캐릭터들의 헤어 스타일에 관한 내용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내용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저는 숏컷은 싫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이야기했던 작가님이셨다.
그새 취향이 바뀌 기라도 한 것일까?
하긴 이미 나와 함께 작업한 일러스트만 해도 酖장이었다.
어지간한 일반적인 여자 헤어들은 종류별로 다 찍어먹어 봤으니까 그
냥 새롭게 도전한다는 마인드로 쓰신 것일수도.
"그래서 그 한나은이라는 캐릭터는 어떤 성격인 것 같은데요."
물론 겨우 1화였다.
그것만 가지고 캐릭터를 속단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잘 알고 있
었다.
하지만 내게 중요한 것은 민호 오빠를 자극하는 일이었다.
계속 그로 하여금 야한 글을 읽게 하고 자극적인 말을 직접 내뱉게 하
는 것이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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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모르겠어. 일단은 사근사근한데 ? 첫 화라 그런지 야한 장면도 없고.
’’
그의 대답을 들은 나는 점점 오빠의 말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한겨울 작가님의 히로인들은 언제나 떽떽거리기 일수였다.
조교당하지 않은 히로인들은 눈가에 총기가 넘치는 지성적인 사람들이
었으며, 주인공 이진성에게 절대 호의적이지 않았다.
애시당초 ■나한테 대줄 것 같은 애를 먹었다.' 이딴 전개를 보기 위해
서 야설을 보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것은 기만이었다.
돈을 내고 보는 사람들에 대한 기만.
그리고 작가님은 정확히 공급과 수요를 아시는 분이셨다.
작가님은 한 화도 빠짐없이 떡신을 꾸역꾸역 집어넣으셨고 그 와중에 치
밀한 빌드업을 탁탁탁 끼워맞춰 넣는 그런 능력자였단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민호 오빠한테 꺼지라고 하고 내가 읽어보겠다
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더러운 것을 어떻게 읽냐고 말해버린 지금.
내가 모니터 앞에 얼굴을 박고 있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네.오빠가돌아간 이후에 내가 직접 읽어보는수밖에.
"정말 그거 맞아요?"
내가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럼! 방금 읽은 내용 그대로를 전달해줬는데 내가 너한테 거짓말 할 이
유가 뭐 가 있는데 .’,
그것도 맞는 소리기는 했다.
어차피 그림 작가인 나는 굳이 소설을 읽지 않더라도 작가님 이 내게 캐 릭
터의 정보와 컨셉을 보내주시 기는 했다.
바로 들킬 거짓말을 민호 오빠가 내게 할 리 없었다.
이 미 나를 한 번 따먹으려다 실패한 그는 절대 적인 을,.
간이 배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는 이상 그는 내 말에 순종하는 것 이외
의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일단 소설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이렇게 된 이상 내 계획은 오늘은 정상
적으로 진행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기존의 계획대로라면 오빠는 내 앞에서 개꼴리는 떡씬을 읽고 흥분 상태
가 되 어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에게 소설을 매도하며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못하
는 쫄보들이나 집에서 자위하면서 그거 읽겠지 하고 그를 자극할 생각이었
는데...
어쩐지 오늘자 [그녀를 감금했습니다.]는 좀 많이 이상한 것 같았다.
"또 혹시 궁금한것 있어?’,
아무런 흥분도 하지 않은 것 같은 오빠의 얼굴을 바라본 나는 차라리 그
에 대한 다른 정보나 얻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응?"
"오빠 여자친구 있어요?"
민호 오빠는 눈을 한 바퀴 굴리더니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없지.’,
"그럼 마지막 연애는 언젠대요?"
석화 마법이라도 걸린 것일까.
오빠는 일시정지된 화면처럼 잠시 아무 말도 않고 멈춰있었다.
"..없어.’,
"네?’,
"...없다고. 연애 경험.’,
그의 대답에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여자친구도 이런 개변태 소설 보는 것 알았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내가 아픈 사람의 상처를 쑤셔버린 건가?
아니. 근데 나도 모쏠이라 딱히 음...
"이상한 질문해서 미안해요."
평소에 나도 친구들이 놀려댈 때마다 짜증나 죽겠던 것을 생각하면 이
건 내가 사과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근데 생 각해보니까 이건 나한테는 개럭키 아닌가?
저 말은 민호 오빠의 자지가...
여자애들 따위는 꼼짝도 못하게 만들수 있는 그 거대한 몽둥이가...
무려 미개봉 상태였다는 거잖아!
중고나라에서 태그를 떼지 않은 신품이 헐값으로 나온 것이나 다름 없었
다!
그것도 개헐값으로!
만약 내가 오빠한테 따먹히는데 성공한다면 내가 오빠의 아다를... 오빠
가나의 처녀를...?
몸 안에서 폭주하는 엔돌핀에 표정관리가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며 침대에서 앞구르기라도 하고 싶었다.
참아. 한나은. 참아.
간신히 입꼬리 억제에 성공한 나는 오늘은 충분한수확을 얻었다는 생각
이 들었다.
"하... 좀 도움이 되려나 싶었는데, 진짜 아무런 도움이 안되네요.’,
민호 오빠의 표정이 썪어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
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은 그만 가도 좋아요. 뭐. 첫 화니까 별 것 없을수도 있죠. 대신 조만
간 다시 부를게요.’,
미안해. 오빠.
이게 다 오빠를 위한 일인 것 알지?
나 이외의 여자로는 절대 서지 않는 남자로 만들어줄테니까.
"또... 여기로 부른다고?"
"어차피 방구석에서 야설이나 읽고 있을거잖아요. 하다못해 남에게 도움
이되는 일이라도 하라고요.’,
민호 오빠는 기가 차다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그를 현관으로 떠밀었다.
"가요. 이제.’,
제대로된 배웅도 하지 않고 침실로 들어와 문을 쾅 닫은 나는 참았던 웃
음을 쏟아냈다.
"하아... 한겨울 작가님! 당신은 신이야! 당신이 저를 구원하셨어요!’,
작가님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민호 오빠에게 걸릴 일도, 그가 [그녀를 감
금했습니다.]의 애독자라는 사실을 알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나중에 명절되면 선물세트라도 보내드려야지.
비싼거. 비싼걸로다가.
흐헤헤헿
혼자 행복해하고 있던 나는 휴대폰을 집 어들었다.
근데 오늘자 회차 내용이 정말로 그거였다고?
노벨 월드에 접속한 나는 최신 회차를 클릭했다.
그리고 화면에 띄워진 글의 첫 문장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밝은 갈색 머리. 새하얀 피부. 그녀의 목덜미에서
는 은은한 오렌지 향이 흘러나왔다.]
...뭐야.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