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6.도발
후인역.
후인역이라고 했지?
어째서 나를 후인역으로 불러내는 거지?
후인역은 번화한 시내가 아니었다.
도심과 주거지역 그 어딘가 애매하게 걸쳐진 지역.
단 한 번 가본 그곳에 대해 남아 있는 기억은...
그곳은 어마무시하게 많은 모텔들이 즐비해 있었다는 점이었다.
야한 일러스트를 그리다 걸린 나를 모텔촌으로 불러낸다는 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 었다.
당장 내일이라고했지?
나는 허겁지겁 옷장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길고 긴 나의 숙원을 이루어줄 사람이 등장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드디어 처녀 딱지를 떼는 건가?
아이씨... 속옷 뭐 입고가지?
역시 처녀라는 티를 내기 위해서 수수한 녀석으로 입고 가야 하나?
[그녀를 감금했습니다.]의 히로인들은 언제나 처음에는 아무런 무늬
도 없는 면 팬티를 입고 있던데.
하지만 동시에 그런 수수한 속옷을 입고 가면 진짜로 범죄를 저지르
는 것이라는 느낌이 진하게 들어서 오히려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고도 생각
이 들었다.
그럼... 이걸 입어?
여기저기 군데군데 파여있는 검은 레이스가 달린 팬티.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지 않을까 싶어서 사둔 내 비장의 무기.
...근데 이거 입고 가면 나 걸레라고 생각하는 것 아냐?
처음 하는 남자가 나를 여기저기서 굴러먹다 온 걸레 취급하는 것은 싫었
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내게 주어진 기회에 혼란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콩닥콩닥.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제대로. 제대로 준비해야만 했다.
아그래 이럴때는!
나에게는 나만의 바이블이 있었다.
휴대폰을 연 나는 [그녀를 감금했습니다.]를 경건한 마음으로 다시 정주
행하기 시작했다.
최적의 상황을 위한 말씀은모두 이곳에 담겨 있었다.
그래... 이거지. 이거야!
소설 속 첫 번째 히로인.
강수연.
나는 그녀의 몸가짐 그대로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첫 번째 협박 씬의 정주행을 마친 나는 최대한 복장도 그녀와 흡사하
게 하고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쫙 달라붙는 스키니진.
그리고 내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골지 폴라 니트.
다행히도 두 개모두 집에 있었다.
얼른 옷을 입어본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연한 주황빛의 니트는 사둔지 제법 오래 됐는데 잘 맞아서 다행이었다.
그럼... 내친김에...
나는 한겨울 작가님을 위해 내가 그린 첫번째 일러스트인 강수연의 포즈
를 따라해보았다.
바지의 단추를 푼 나는 속옷 라인이 그대로 적나라하게 보이
는 허벅지 언저리까지 바지를 내렸으며 니트는 브라자가 모두 보일 정도
까지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나는 고양이처럼 두 손으로 땅을 짚었다.
음... 90점 ! 90점은 줄 수 있겠네.
당연히 일러스트처럼 나에게는 거대한 가슴은 없었기에 볼륨감은 부
족하다고 생각했지만 나머지는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됐다. 됐어... 나도 드디어…
설레는 마음으로 잠도 잘 못 이뤘으나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 * *
"...여길 들어가자고요?’,
"으"
O•
...내가 왜여기를들어가야하는 거지?
"왜. 피자 싫어해?’,
민호 오빠가 그 많은 모텔촌을 지나쳐 나를 데리고 온 곳은...
[스쿨피자 후인점]
"...아뇨.’,
"그럼 군말 말고 들어가.’,
...먹고 하는 건가? 그런 건가?
강압적인 태도를 보면 그냥 싱겁게 밥만 먹고 가자는 건 아니겠지?
아직 희망의 끈을 놓기는 이르다고 판단한 나는 잠자코 그의 지시에 따
랐다.
"뭐 먹을래.’,
"...지금 뭐 먹을 기분 아니에요.’,
마냥 순종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 었다.
소설 속 강수연은 처음에는 이진성에게 심하다 싶을 정도로 떽떽거렸으
니 말이다.
"그럼 나 먹고 싶은데로시킬게.’,
그래! 그거지!
더... 더... 마구마구 몰아붙이라고! 민호 오빠!
"여기 페 파로니 피자 하나요."
...사실 굳이 피자를 먹어야 한다면 불고기 피자가 먹고 싶기는 했는데.
괜히 너무 솔직하게 굴어서 일을 그르치지 말자. 나은아.
"한나은.’,
민호 오빠가 낮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손발이 저릿저릿해지는 이 느낌.
최고야. 진짜로.
"혹시 피자 말고 다른 것 먹고 싶었던 것 아니지?’,
...뭔가 나를 걱정하는 듯한 말투에 김이 팍 샜다.
왜그딴 걱정을 하는 거야.
어떻게 하면 나를 맛있게 따먹을지나 걱정하라고.
에이. 설마 이런 절호의 찬스가 왔는데 먹지도 못하는 병신이겠어?
그래그래 나은아. 의심하지 말자.
"아뇨. 입맛 없다고 이야기 했잖아요.’,
"그래?,.
갑자기 깊은 고민에 빠진 듯한 오빠였다.
저 재수없는 년을 어떻게 조질지 고민하는 건가?
그렇겠지? 제발 그렇다고 해줘.
긴장감 반. 기대감 반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린 나는 이어지는 그의 말
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럼 그냥 먹어라. 이미 시켰으니까.’,
그의 강압적인 태도에 마음이 따듯해지는 나였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이윽고 주문한 피자가 나왔고 오빠가 자연스럽게 내 접시 위에 피자
를 얹어주었다.
...민호 오빠는 연애 경험이 많은 건가?
솔직히 없는게 이상하겠지? 오빠는 25인가 26인 걸로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피자를 한 입 베어물고는 그에게 용건
을 물었다.
"그래서 오늘 왜 불렀는데요.’,
짜증이 가득 섞인 말투로 내가 그에게 물었다.
"밥 먹을라고.’,
"네?’,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나를 후인동까지 불러놓고서 밥만 먹고 간다고?
"너랑 밥이나 먹어볼까 해서.’,
그가 덤덤한 표정으로 콜라를 들이키며 대답했다.
"그게 다에요?’,
그니까 나를 먹는게 아니라 밥을 먹는다고?
너무 허탈해서 그에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너만 내킨다면 커피도 한 잔?"
갑자기 현기증이 나려고 했다.
밥 먹고 커피 한 잔?
당신 나랑 무슨 소개팅하러 나왔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안 내켜요. 나랑 밥이 먹고 싶었으면 뭐하러 여기까지 부른 거에요?"
진짜 식사가 목적이었으면 왜 나를 이딴 모텔촌에 부른단 말인가.
널리고 널린게 맛집인데 굳이 이런 동네로 부를 이유가뭔데?
"집이랑 가까워서.’,
"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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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랑 가까워서. 왜. 너네 집 여기서 머냐?’,
"아뇨... 20분 정도 걸리기는 하는데.’,
"피자는 내가 사줄게. 그럼 됐지?’,
도대체 뭐가 됐다는 거야아!
하. 진짜로 이딴 구더기 같은 동네에 나를 굳이 부른 이유가 지네 집이
랑 가까워서라고?
갑자기 집에서 혼자 패션쇼를 하고 있던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니지. 그냥 기대한 내가 병신인거지.
한나은 이 병신 같은 년.
그래... 암만 약점을 잡았다고 해도 그자리에서 모텔로 질질 끌고 들어가
는 남자가 어딨겠어.
그게 섹스에 미쳐있는 금수새끼인거지.
...그리고 그런 남자를 찾고 있는 나는 그거보다 더심한 중증인거고.
그렇게 사고를 전환하자 마음은 편해졌지 만 실망감은 감출 수 없었다.
그래... 그냥 밥이나 얻어먹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피자를 깨작거린 나는 할 말도 없겠다 마음에 걸렸던 점들이나 물어보
고 가자고 생각했다.
"내가 HNE작가인 것은 어떻게 알았어요?"
그가 본 것은 아직 미공개인 일러스트였다.
그렇다면 순수 내 그림체만으로 내 정체를 알아냈다는 소리인데...
나한테 작업물에 그렇게까지 관심 이 있는 사람이 있나 싶었다.
내 질문에 잠시 움찔한 민호 오빠는 작은 목소리로 내 말에 답해주었다.
"...네 그림들이 표지로 들어가있는 소설. 나도 애독자거든.’,
소설?
[그녀를 감금했습니다.]의 애독자라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걸 좋아하다니 민호 오빠 당신도 구제불능의 변태구나.
근데 그 소설의 애독자면 당연히 지금 상황과 소설 속 내용이 오버랩 될
텐데 겨우 데려오는게 피자집이란 말이야?
진짜 어지간한 새가슴이구나 싶었다.
잠깐만. 그 소설의 애독자라면...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아도 되는 건가 싶었다.
그래. 그런 개변태 소설의 애독자가 정상인일 리가 없잖아.
오히려 좋은게 아닐까?
내쪽에서 조금만 자극해볼까?
"제가 일러스트는 작업은 하고 있지만 내용은 몰라서 그런데, 그 소설 무
슨 내용이에요?"
내가 소설 내용을 모른다는 말을 뱉자마자 민호 오빠의 표정은 급속도
로 어두워졌다.
"그냥 뭐... 네가 그리는 그림처럼 여기서 말하기는 그런 내용이지.’,
"그래요? 보나마나 오빠처럼 여자애들 약점이나 잡고서 협박하는 내용
이겠죠.’,
그는 별달리 할말이 없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 속주인공도 오빠처럼 피자 먹고 커피 마시자고 그래요? 개 어이없
는야설이네. 진짜.’,
무릇 애독자라면 나의 이 발언에 발끈할 법한데?
[그녀를 감금했습니다.]에 여자를 불러놓고 피자나 먹고 집에 가
는 장면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텔 침대 위에서 굴리면 다행.
심할 때는 한낮의 공원에서도 노출플레이를 시키는 장면도 흔
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새침하게 말한 나는 콜라를 빨대로 쪼옥 빨아먹었다.
자. 민호 오빠. 당신이 소설에 진심인 사람인지 한 번 보자고.
쿵!
민호 오빠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너. 무슨 내용인지 내가 직접 알려줄까?’,
캬. 한나은. 드디어 너에게도 봄이 오는구나.
하아... 한겨울 작가님. 덕분에 저. 운명의 상대와 성불할 수 있을 것 같아
요!
개빡쳐보이는 민호 오빠의 얼굴을 보며 나는 속으로 쾌재를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