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전화
"민호씨. 왜 자꾸 모형이나 도면이 아니라 말로 설명을 하려고 하는 거에
요.’,
"건축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이미지를 갖고 이야기를 하
는 사람들이지 소설가나 연설가가 아니에요.’,
"나중에 건축주들한테 이런 모형 들고가서 장황하게 설명하고 앉아있
을 거에요?’,
...아. 탈건 마렵다.
한나은의 평가가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진짜 가까스로 페 널을 인쇄하는데 성공한 나는 퀭한 눈으로 교수님
들 앞에서 발표를 시작했다.
하지만 반응은 역시나 혹평.
여기저기 덕지덕지 남아있는 본드 자국.
칼질이 반듯하게 되지 않아서 여기저기 갈린 것 같은 흔적이 남아있는 우
드락.
꼼꼼하고 깔끔한 것에 익숙해져있는 교수들에게 내 작업물을 좋게 봐달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개념 자체는... 나쁘지 않아요. 근데 이제 이걸 표현하는 방식이나 이 작
업물 자체의 완성도가 측면에서…’,
사실 다른 학과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건축학과는 최종 발표를 제정신으
로 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을 알고 있는가?
여자애들은 화장도 하고 남자애들도 나름 차려입고 교수들 앞에 서 있지
만 그들은 시체나 다름없는 몸들.
피티를 하는 그 누구도 낗시간 잠을 잔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아마 36시간을 내리 못잔 사람도 흔하게 볼 수 있을 터이니.
나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그저 그들의 회초리질이 끝나기를 기다릴 뿐.
그들의 지적 사항은 왼쪽 귀로 흘러들어가 오른쪽으로 그래도 빠져나가
고 있었다.
"아무튼. 뭐. 수고했어요. 꼭 오늘 크리틱 때 교수님들이 해준 조언들 기
억하고 다음 사람."
내 차례가 끝나자마자 나는 집으로 튀 어갔다.
뒷풀이? 그딴건 필요 없었다.
일단 잠이 먼저였다.
씻지도 않은 채로 침대에 몸을 던진 나는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자기 전에 언제나 나는 내 소설의 댓글을 확인하는 편이었다.
오오... 조회수도 준수하고 댓글창은... 보자...
그날그날 다르기는 했지만 언제나 보이는 닉네임들을 보면 반가운 기분
이 들었다.
[댜이 234]
[집에가고팡 22]
특히나 작품 초반부부터 지금까지 따라와준 독자들의 닉네임은 거
의 다 외워두고 있는 편이었다.
그 사람은 없는 건가?
내 소설을 떡상시켜준 장본인.
[하얀 눈꽃] 님.
스크롤을 내리던 나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아 진짜 작가님 어째서 여기서... 아... 제발... 연참...
[하얀 눈꽃]님. 요즘도 꾸준히 내 글 봐주시는구나.
작가 일을 하면서 가장 보람찬 순간이 이런 순간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수입이 들어오는 날도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지만 그거와는 또다
른 느낌이었다.
피곤에 절여진 내가 일어나서 다음 편을 쓸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바
로 저런 댓글들이 라 생 각했다.
하아... 아직 비축분은 두 편정도 있으니까 지금은 자도 상관 없겠지.
슬슬 남가연 에 피소드도 끝나가는데 다음은 히로인은 누구로 하냐...
개꼴리는 컨셉 없을까 고민을 하며 나는 스르르 잠에 들었다.
* * *
...몇 시냐. 지금.
시계는 저녁 뫫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뭐 야... 생 각보다 얼마 안 지났네 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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閌시쯤 집에 들어왔으니까 세 시간 밖에 안잤는데 왜 다시 일어난거람.
그대로 굼뱅이마냥 다시 이불을 뒤집어쓴 나는 휴대폰을 확인해 보았다.
읽지 않은 메시지 함에 휘민이가 보낸 메시지가 남아있었다.
[야. 이민호. 교수님이 너 존나 찾던데.]
...응? 교수가? 나를? 왜? 어째서?
성적이야 그냥 주는대로 달게 받자는 생각이 들었지만 교수가 나를 찾았
다는 말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다급하게 휘민이에게 전화를 때려보았다.
[야. 뭐. 교수가나 찾았다며.]
[야. 너 어디 갔었냐. 끝날 때까지 가지 말라고 공지 왔었잖아.]
뭐야. 그런게 있었다고?
아마 내 작업하느라 확인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뭐 특별한 것 있었어?]
설마 무자비하게 성적 반단계씩 깎고 그런 건 아니겠지.
[아니 딱히. 그냥 고생했다는 말 정도하고 뒷풀이 갈 사람들 가자고 했는
데.]
[아... 다행이다... 개놀랐네. 전화 와있어서.]
[근데 니만 안오긴 함.]
그건 좀 갑분싸긴 한데...
에이씌. 뭐 이미 일어난 일을 어쩌겠냐고.
[아〜 몰라몰라. 나 다시 걍 잔다.]
휘민의와의 통화를 뚝 끊어버린 나는 자연스럽게 화면에 띄워진 통화 내
역을 보게되었다.
[한나은]
맞다... 얘...
HNE 작가님...
분명 오늘 새벽의 일이었지만꿈만 같이 느껴졌다.
설마 한나은이 내 일러스트 작가님이셨을 줄이야...
문득 내가 그녀에게 건넨 말들이 떠올랐다.
인생이 끝나고 싶냐느니. 연락하면 받으라느니.
"아아악!"
현타가 온 나는 내 자취방에서 육성으로 소리를 질렀다.
미 친놈. 미 친새끼.
야설에 뇌가 절여져서 뭔 소리를 하고 다니는 거야.
한심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으으... 진짜 존나 한심한 새끼라고 생 각하고 있겠지 ?
심지어 내가 그녀의 작가명을 알고 있었으니 그녀는 내가 야짤 작가
를 그림체만으로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야짤에 진심인 사람이라는 것도 유
추해낼수 있었을것이었다.
근데... 나를 일방적으로 개변태새끼라고 부르기에는 그리는 걔도...
컴퓨터 앞에 앉은 나는 여태까지 내가 HNE 작가님과 나눈 메일들을 다
시 한 번 읽어보았다.
진짜 방밖에서는 도저히 읽을 수가 없는 외설스러운 말들로 가득찬 메일
함.
한나은은... 변태 인 건가?
남자였다면 자연스럽게 나랑 취향이 비슷한 동류라고 생각하면 그만이
었지만 작가님이 여자라고 한다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
지 잘 감이 오지 않았다.
사적인 대화도 거의 없어서 그녀라는 사람 자체에 대해서는 거
의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게 투철한 직업 정신인건지, 진짜 그런 것들이 좋아서 나랑 저런 대화들
을 주고 받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작가님께 메일로 [혹시 여자세요?]라고 물어보기도 웃기고 말
이지.
그럼... 그냥... 한나은의 말대로 전화 번호만 받고 끝내 ...?
이건 이 거대로 존나 허무하단 말이지.
정상적인 루트는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여자의 번호를 따는데 성공
한 나였다.
26살. 내 인생에 기록될 만한 업적을 이룩했는데 여기서 끝낸다고?
잠시 팔짱을 낀 상태로 모니터를 바라보던 나는 마음을 굳혔다.
일단. 내 소설 [그녀를 감금했습니다.]의 주인공 ■이진성,처럼만 하지 말자
•
내 소설의 주인공은실존할 수 없는제정신이 아닌 인물이었다.
약점을 발견한 이진성은 약점을 발견한 순간 절대 먹잇감을 놓치지 않았
다.
이진성은 촘촘히 짜여진 거미줄처럼 히로인들을 맛있게 요리했다.
약점을 통해 또다른 약점을 캐내서 더욱더 목덜미를 조일 때도 있었으
며 때로는 무식한힘으로히로인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기도 했다.
절대로. 현실에서. 따라하지. 말아야하는 사람의 표본이었다.
그래. 많은 걸 바라지 말고 밥이나 한 끼 먹자고 해보자.
솔직히 아무것도 아닌 요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무
척이나 떨리는 이벤트였다.
내가... 한나은 같은 애한테 밥을 먹으러 가자고 꼬시다니...
거절은... 아마 못 하겠지?
이건 반협박이었으니까.
반응이 나쁘지 않으면 한 번 그 다음에도 불러내볼까?
혹시 알아? 나랑 의외로 대화가 잘 통할수도?
그리고... 만약에 그렇게 관계가 진전이 잘 된다면...
나은이가 내...
여자친구.
여자친구가 되는 것인가!
하아... 나에게도 드디어 가슴 떨리는 봄이 찾아오는 건가.
26살 먹고 이런 상상하는 것이 부끄럽기는 했지만 뭐... 그냥 내 뇌내망상
이니까 상관 없지 않을까 싶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휴대폰을 뚫어져 라 바라보았다.
젠... 젠틀한 컨셉으로 권유하는게 나을까?
아니지. 아니지.
지금 내상황을 착각하면 안되지.
무심코 그녀가 내 썸녀라고 가정하고 혼자 로멘스를 찍을 뻔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나는 어떤 사람일까...
그녀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나는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치사하고 저열
한학교 선배.
그렇다면 나도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
했다.
신호음이 몇 번 지나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야.]
[...왜요.]
[후인역 낗번 출구로 내일 嬖시까지 나와라.]
협상은 없다는 듯한 말투가 포인트였다.
[...후인역이요?]
사실 그냥 내 자취방 앞이라서 부른 것이기는 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어. 안나오면 알지?]
싫다고 말할 틈을 주지 않는 것도 중요 포인트!
[아... 알겠어요.]
겁에 질렸다고 하기에는 뭔가 밝은 목소리인 것 같은데?
아닌가? 내 착각인가?
[끊는다.]
시크한 척 전화를 뚝 끊은 나는 진심으로 나의 연기 실력에 감탄했다.
캬! 이민호! 괜찮았던 것 같아!
흠흠... 우리 집 앞에 식당 어디가 좋을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한나은과 어디서 식사를 할지 고민해 보았다.
순댓국 집이 기가 막히기는 한데... 역시 순대국은 좀 아닌가...
햄버거도 먹고 싶은데… 여기까지 불렀는데 왁도날드 가자고 하
면좀 그렇겠지?
그리고 나는 우리가 생각보다 더대단한 곳에 가게될 줄 상상도 하지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