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1.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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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건.
혹시 탈건이라는 말을 아는가.
아마 높은 확률로 모를 것이 다.
그야 이 단어는 건축학과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단어
니까.
하지만 건축학과에 잠시 발이라도 담근 사람이라면 딱 한 학기만 해
도 입에 달고 살 확률이 다분한 단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단어의 의미는 '탈 건축,.
건축을 그만둔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수많은 건축생도들은 설계 마감 시즌에 속으로 항
상 다짐하고는 한다.
[진짜 내 가 졸업하고 꼭 탈건하고야 만다.]
물론 졸업도 하기 전에 탈건하는 사람들도 흔치않게 볼 수 있다.
어쩌면 그들이 현자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금 나처럼 새벽에 눈이 빠질 것 같이 mm 단위로 본드칠을 하
지 않아도 될 것이니 말이다.
"아오! 진짜! 좀 붙어라!"
마감까지 16시간.
잠을 못 잔지는 약 24시간.
하지만 아직도 내 모형은 완성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왜 또 그러냐. 좀 쉬어가면서 해라.’,
"닥쳐. 이 기만자야."
이휘민.
내 가장 친한 동기이자 건축 설계 재능충.
모형에 조경용 나무까지 다 심어놓은 주제에 녀석은 집에도 안 가
고내 성질을 긁고 있었다.
"뭘 또 성내기는. 으휴. 그러게 내가 미리미리 좀 하라 했잖아.’,
하... 그의 말이 맞기는 했다.
솔직히 남들보다 작업을 조금 늦게 시작하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시간
에 쫓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야. 그러지 말고 너도 와서 이거 모형 벽체만 좀 올려주면 안되냐?’,
"나 포토샵으로 렌더샷 보정해야되서 힘들 듯.’,
입에는 빼빼로를 물고 마우스를 까딱 거리는 휘민이의 모습에 나는 한
숨이 푹 나왔다.
이대로 마감은 가능하려나…
벌써부터 교수님들의 얼굴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민호 씨는 아... 이게 마감 퀄리티가 아쉽네...]
[도대체 이 작품의 컨셉이 뭔지가 모형에서 드러나지가 않아요.]
[이거 가지고 嬖학년 때 졸업할수 있겠어?]
음. 벌써 내일 크리틱 다했네.
깐깐하기로 소문난 4학년 교수진들에게 내 결과물이 돌려질 생각을 하
니까 벌써부터 실소가 흘러나왔다.
어차피 두들겨 맞을 건데 이렇게까지 해야되는 걸까.
사실 내가 시간이 부족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또하나의 마감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소설.
[그녀를 감금했습니다.]
노벨 월드 탑 10 안에 드는 희대의 야설이 바로 나의 작품이었기 때문이
었다.
탈건을 노리던 내가 선택한 활로.
그것은 웹소설 작가였다.
텔레그램 최대 소설 공유방!..
드씨, 웹툰, 소설, 등등 10만개 이상의 파일이 존재!...
인터넷 주소창에 따라치세요.
물론 처음부터 진지하게 이것을 직업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지난 방학. 전 세계적으로 창궐한 치명적인 전염병 '코로노,로 인해 강제
로 방에서 유배 생활을 보내게 된 나는 웹소설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처음에는 기존에 몰랐던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떠 이거저거 잘 읽는 잡식
성 독자였지만 그것도 잠시. 대작들을 두루 읽어본 나는 다른 사람이 되
어 있었다.
쉽게 설명하자면 '미식가,가되어있었달까.
어줍잖은 필력. 뻔한 전개로는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나였다.
그리고 그런 나를 가장 분노하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소꿉친구. 고등학교 동창. 그리고 과 선배.]
제목부터 벌써 글러먹은 이 소설은 무려 노벨 월드에서 30위권을 달리
고 있었다.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내 안에서 깊은 빡침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
졌다.
일단 보기 시작해서 쭉 스크롤을 내리며 읽기는 했지만 매 회차가 누적
이 될수록 내 머릿속에 멤도는 생각은 딱 이것 한 줄이었다.
'이딴게... 30등?,
빈약한개연성.구멍난설정. 느린 전개.
무엇 하나 맘에 들지 않는데 사람들은 좋다고 그걸 재미있게 읽고 있었
다.
내 입맛이 이상한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무지몽매한 것일까.
깊은 내적 갈등에 시달리던 나는 컴퓨터에 앞에 앉았다.
그거야 시험해 보면 그만이지.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나의 첫 작품이자 노벨 월드 최고의 히트작 중 하나.
[그녀를 감금했습니다.]의 시작이었다.
여느 신출내기 작가 지망생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시작은 미약했다.
제대로 된 표지도 하나 없는 내 소설의 1화 조회수는 1주일이 지나도 10
0명을 넘기지 못했다.
하지 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왜 냐.
저 빌어먹을 [소꿉친구. 고등학교 동창. 그리고 과 선배.] 이딴 것보다
는 내 글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10화 20화 연재를 쭉 해 나가던 내 소설은 30화 언저리가 되서
야 분기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내 글을 극초반부터 따라와 주시고 매화 댓글까지 꼬박꼬박 달아주
신 아주 고마운 독자님.
[하얀눈꽃]님이 정성스럽게 작성해준 리뷰 덕이었다.
리뷰를 타고 유입된 독자층에 의해 내 소설은 점점 더 덩치를 불려나갔
고 50화 언저리에는 노벨 월드 실시간 조회수 20위를 달성하는 기염을 토
해냈다.
단 한 번이라도 저 거지같은 [소꿉친구. 고등학교 동창. 그리고 과 선배.]
의 순위를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그날은 거나하게 혼술 파티를 즐겼다.
급격하게 늘어난 수입에 나는 제대로 된 표지를 꼭 만들어야겠다는 욕
구에 사로잡혔다.
아무리 야설이 글로 사람을 흥분시킨다고는 하지만 시각적 매개체는 절
대무시할수 없었다.
히로인의 이목구비 조형. 체형. 복장. 분위기. 그 모든 것을 한 번
에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바로 표지 였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머리를 쥐어 뜯어가며 고심한 내 소설 [그녀를 감금
했습니다.]의 히로인.
강수연을 누구보다 잘 그려줄 일러스트 작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림 작가를 선정하는 데도 무려 1주일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마지막까지 가장 내게 고민을 안겨준 것은 두 사람이었다.
매끈한 선과 디테일이 압도적인 Cporia 작가.
완벽한 구도. 어디에 포인트를 줘야할지를 정확히 알고있는 HNE 작가.
두 작가 모두 업계에서는 내로라하는 작가들임은 확실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한 명을 선택해야 했던 나는 HNE작가를 선택했다.
당시에는 나중에 Cporia 작가에게도 의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H
NE 작가의 첫 스케치를 받아본 순간.
나는 다른 작가를 찾아보는 일은 앞으로 필요 없다고 확신했다.
일러 작가들은 연금술사라는 말이 있는데 이건 연금술 그 이상이었다.
조금 외설스러운 말이기는 하지만 작가는 '꼴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
는 사람이었다.
아슬아슬한 스커트의 기장이란 무엇인가에 철학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 묶은 머리의 목선이 얼만큼 드러나야 가장 이쁜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매번 의뢰를 할 때마다 나는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야설의 신인 나. 야짤의 신인 HNE 작가.
이 듀오. 어떻게 막을 건데 !
현재 노벨 월드 최상위 포식자를 달리고 있는 [그녀를 감금했습니다.]였
다.
물론 대놓고 작가님께 이렇게 이야기하지는 못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내적 친밀감.
이미 閌번 정도 작업을 의뢰했음에도 사적인 대화는 우리 사이에 거의 오
가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유명해졌는데 내 소설이 무엇인지 알고는 계시려나?
아마 알고 계시지 않을까?
하지만 새삼 물어보지 않은 것을 내 입으로 자랑하기도 그랬던지라 나
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오늘이 새로운 일러스트 완성본이 나오는 날로 알
고 있는데...
내 설계 마감에 치여서 그런지 평소 같았으면 이미 확인했을 메일도 확인
하지 않고 있었다.
잠깐 쉴 겸 일러스트 확인이나 해볼까?
몸을 뒤로 젖히고 기지개를 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들어갔다.
아무리 다들 자기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야짤을 사람들 오가
는 설계실에서 대놓고 볼 수는 없는 법.
문을 걸어 잠근 나는 내 메일함을 확인해 보았다.
[HNE 입니다. 죄송합니다. 작가님. 제가 급한 사정이 생겨서 마감이 조
금 미뤄질 것 같습니다.鑩鑩 꼭 내일 아침까지는 마무리해서 보내드릴게요!
]
기한에 맞추지 못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이해는 했지만 기운이 빠지
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아... 그거라도 보고 힐링하고 모형 다시 만들까 했는데.
[괜찮습니다! 퀄리티에만 집중해서 작업 잘 마무리해주세요!]
아쉽기는 했지만 별 수 있나. 기다리는 수밖에.
다시 내 책상으로 돌아온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혀큹 인생一"
"야야. 푸념할 시간에 계단이나 하나 더 만들어라.’,
"늬에큹 늬에큹"
휘민이의 말에 나는 다시 칼질을 시작했다.
얼추 건물 모형이 완성되어 가자 나는 화방에서 사온 사람 모형을 붙이
려고 했다.
"아이씨. 라카 안 사왔다.’,
아... 나는 바본가...
빨간색으로 칠하자고 색깔까지 정해 놨는데…
낮에 기껏 화방까지 다녀와놓고 왜 라카는 안 사온거람.
"휘 민아. 라카 좀.’,
"없어.’,
"아 그러지 말고. 그냥 좀 빌려주라.’,
"진짜 없는데?’,
...이건 변수네.
휘민이라면 당연히 있을 줄 알았는데 누구한테 구하지?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설계실을 한 번 스윽 스캔했다.
나랑 친한 애들은 어째... 다 집에서 작업하는가 보구만.
딱히 마음 편하게 물어볼 만한 애가 없네.
이럴때는어쩔 수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설계실의 하이에나가 되어야만 했다.
혹시 다른 사람의 책상에 라카가 없는지 나는 설계실을 어슬렁거리기 시
작했다.
제발... 아무나 있어라...
누군가 한명 쯤은 있을만한데...
오저깄다!
사람이 드문 설계실 가장 구석 창가 쪽 테이블에서 라카를 발견한 나
는 자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음... 쉽지 않네.
왜냐하면 자리의 주인은 나랑 거의 말도 한번 섞어보지 않은 후배인 한
나은이었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대화도 해보지 않았는데 내가 그녀를 알고 있는 이유는 그녀
가 현 딙학년 최 고의 미모를 자랑했기 때문이 었다.
과 생활도 잘 참여하지 않고 마감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학교에서 얼굴
을 보기 힘든 그녀였기에 과 애들 중에서 그녀와 친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
다.
좀 머쓱하기는 한데...흠...
시계를 바라본 나는 망설이는 것을 멈췄다.
지금 내가 물 불가릴 때냐.
그녀의 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간 나는 그녀의 책상 위 라카를 덮썩 집었
다.
"저기 나은아! 나 이것 좀..."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노트북 화면을 본 나는 말을 끝까지 이어나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화면 속에는...
내가 오늘 받지 못한 살색으로 가득찬 일러스트의 완성본이 띄워져 있었
기 때문이었다.
"어?,.
안 그래도 하얀 한나은의 피부가 한층 더 창백하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