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 * *
세 사람은 그날 후로 꼭 함께 붙어 자고는 했다. 세아를 가운데 두고 양옆에 준과 정이 그녀를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꼭 끌어안고 자곤 했다.
그랬기에 오늘도 세아는 그들 틈에서 이불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더욱 잠자리가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아까 준이 멋대로 제 사진을 찍은 순간, 불현듯 잊혀졌던 기억의 조각 일부가 제 머릿속을 스쳤다. 세아는 어두운 얼굴로 입술을 잘근 씹으며 생각했다.
‘분명 오빠라고 했어.’
내가 오빠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세아가 힐끔 제 곁에 누운 정과 준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들은 저녁에 셔터음 소리를 듣고 발작이나 다름없는 경기를 일으킨 그녀를 평소보다 더 걱정스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따라 유독 잠이 오지 않았다.
세아는 애꿎은 천장만 멀뚱히 바라보며 눈을 끔뻑였다. 그녀가 잠들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는 둘은 따뜻한 손으로 배 위를 살살 문질러주며 입을 열었다.
“세아, 왜 안 자.”
“……그냥.”
“그냥?”
“잠이 안 와.”
부드럽게 배를 만져주는 오빠들의 손. 분명 어릴 때부터 곧잘 해주던 행위인데…….
‘불편해.’
단순히 기분 탓일까. 이대로 잊고 살아도 되는 걸까.
이불을 손에 꼭 쥐며 생각했다. 그러다 결론을 내린 건지, 잠시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골랐다.
“저기…… 있잖아. 오빠.”
“응?”
그녀의 부름에 정과 준이 동시에 대답했다.
“나…… 궁금해.”
궁금하다는 말에 표정 또한 동시에 어두워진다. 세아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뻔한 것이었기에.
이따금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지워진 자신의 기억을 물어오는 건.
그랬기에 그들은 늘 그렇듯 대충 말을 둘러대려 했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나…… 아까 조금 기억났어.”
세아의 말에 두 사람의 안색이 단번에 굳어졌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막 울면서…… 오빠, 하지 마. 뭐 그런 말을 했어.”
“…….”
“그런데 내가 오빠라고 부르는 사람은 오빠들밖에 없잖아.”
“세아야.”
“……응.”
그들을 보는 세아의 시선에 옅은 경계가 담겼다.
“그런 거 아니야.”
준이 애써 뱉어지지 않는 말을 억지로 토하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있잖아, 우리는…….”
잠시 뜸을 들여가며 그가 천천히 말을 골랐다.
“세아가…… 만약에, 아주 만약에 기억을 되찾으면…… 또 저번과 같은 선택을 할까 봐 무서워.”
세아 또한 그 일을 겪고 난 후 자신이 스스로 숨을 끊으려 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세아는 이미 그 일이 괴로워서…… 떠나려고 한 거였잖아?”
“……응.”
“같은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우리는 그냥…… 세아가 기억하지 않을 수 있다면 평생 기억하지 않았으면 해.”
속상하다는 듯 제 머리를 쓰다듬는 준을 보며 세아가 머뭇거렸다.
“오빠.”
“응.”
“그럼 내가 그때 오빠라고 부른 사람은 누구야? 혹시…… 오빠들은 알아?”
평소라면 이쯤에서 넘어갔을 세아 또한 무언가 찝찝한 게 있는지 유독 집요하게 물었다. 준이 잠시 멈칫하고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다 한 박자 늦게 대답한다.
“……응.”
안다는 말에 세아가 살짝 몸을 움츠렸다.
“누군데……?”
이불을 쥔 손에 힘이 더욱 바짝 들어갔다. 그녀가 얇은 이불을 세게 움켜쥐고는 떨리는 눈으로 준을 응시했다.
짧은 침묵 끝에 준이 한숨을 토하며 입을 열었다.
“……네 전 남자친구.”
“남자친구? 나한테 남자친구가 있었어?”
“응, 있었어. 대학교 가서 사귀었던 놈.”
거기까지 말을 들으니 기억이 날 것 같기도, 안 날 것 같기도 했다. 세아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자 뒤에 있던 정이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는 듯 그녀를 제 품에 꼭 그러안았다.
“더 생각하지 마.”
“하지만 궁금해.”
“싫어, 그러다 기억 되찾으면? 그럼 또 우리만 남겨두고 떠나려고?”
조목조목 내뱉는 정의 목소리에 옅은 물기가 배어 있었다. 볼품없이 떨리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세아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럼…… 나한테 나쁜 짓 한 사람이 내 전 남자친구야?”
동그란 고동빛 눈동자가 그들을 올곧게 마주했다. 그건 진실을 갈구하는 눈이었다.
그 눈을 마주한 두 사람은 동시에 대답했다.
“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단호한 대답이었다.
“그 새끼야.”
그제야 세아의 얼굴에서 경계심이 거두어졌다.
“……그랬구나.”
“응.”
여전히 묘하게 찝찝한 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후련한 기분이었다. 세아는 자세를 고쳐 정의 가슴팍에 살짝 얼굴을 묻고는 말했다.
“고마워. 정 오빠도, 준 오빠도.”
“갑자기?”
“그냥, 항상 나 지켜주잖아.”
준 오빠는 나 때문에 퇴사까지 하고……. 세아가 말을 흐리며 하품을 작게 했다. 졸린 모양이었다.
“당연히 지켜야지.”
“그래, 세아야. 우리는 하나뿐인 가족이잖아.”
하나뿐인 우리의 동생. 우리의 가족. 우리의 여자.
준과 정이 같은 생각을 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죄책감이라고는 느끼지도 않는 건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입을 놀리는 게 간사하기만 하다.
그들의 속을 모르는 세아는 애써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내려 하며 감기지 않는 눈을 억지로 감았다.
“예쁘다, 세아.”
맞은편에서 그녀를 보던 준이 자상하게 눈매를 휘며 말했다.
“평생 이렇게 우리랑 살자.”
“우리가 지켜줄게.”
“다른 남자들은 위험해. 우리는…… 세아를 두 번 다시 잃고 싶지 않아.”
늘 그렇듯 저를 두고 유난 떠는 둘을 보며 그제야 세아도 살짝 미소 지었다.
“응, 그럴게. 오빠들이랑 코코랑 비비랑 평생 이렇게 오손도손 살자.”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긍정의 대답에 두 사람 다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고 큰 소리로 되물었다.
“저, 정말? 세아 장난치는 거 아니고 정말로?”
“응, 정말로.”
멍한 얼굴로 꺄르륵 웃는 그녀를 보던 둘은 혹 꿈은 아닌지 의심스러워져서 자신들의 뺨을 꼬집었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생생한 거로 보아 이건 현실이 맞았다.
세아는 바보처럼 구는 둘을 보며 말을 덧붙였다.
“대신 오빠들도 나 두고 다른 여자랑 결혼하거나 그러면 안 돼.”
“절대. 절대 안 해!”
극구 부정하는 둘을 보며 세아가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다.
“하지만 오빠들은 나 없이 잘 살 수 있잖아.”
저 없이 잘 살 수 있다니.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만약 세아가 이 세상에 없다면 당장에라도 그녀를 따라 숨을 끊을 그들인데, 잘 살긴 대체 무얼 잘 산단 말인가.
하지만 정과 준은 세아 앞에서 자신들의 속을 털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어색한 미소로 대답을 피할 뿐이었다.
“나는…… 사실 그 일 있고 난 후로 혼자 남는 게 무서워.”
유난스럽게 저를 걱정하는 그들이 안쓰러워서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사실은 그랬다. 아무리 기억이 없다 한들 언뜻언뜻 찾아오는 형태 모를 공포는 일상처럼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곤 했으니까.
“그러니까 나만 두고 떠나면 안 돼…….”
쭈뼛거리며 말하는 세아를 보며 정과 준이 억지로 기쁨을 눌러 삼켰다.
“응, 걱정 마.”
“그럴 일 없어. 절대로. 세아야말로 우리 두고 다른 놈 만나면 안 돼. 알았지?”
그들이 곁에 있는 한, 세아는 숨이 끊기는 그날까지 이따금 형태 모를 공포에 벌벌 떨어야 할 것이었다.
허나, 그 공포의 대상이 자신의 유일한 피붙이들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그녀는 종종 찾아오는 공포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공포의 근원이나 다름없는 피붙이들을 찾아갈 것이다.
어느새 고롱고롱 잠든 세아를 보며 준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늘 이런 식이었다.
그들은 혹시라도 자신들이 잠든 사이 세아가 또다시 그때와 같은 선택을 할까 봐, 밤에도 둘 중 한 명은 꼭 깨어 있곤 했다.
완전해 보이지만 불완전한 소유였다.
출근을 위해 잠든 정과 세상모르고 그에게 안긴 세아를 보며 준은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겨 제 핸드폰에 남아 있는 그날의 영상을 틀었다.
‘찌, 흑, 찍지 마아……. 흑, 흐끅…….’
엉망이 된 얼굴로 정의 위에서 헐떡이는 세아는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시, 싫어…… 흑, 흐윽…….’
‘쉬이, 큰소리 내면 네 남자친구가 깰지도 모른다니까.’
‘흡, 흐으…….’
‘착하지, 세아.’
신음을 내지르며 잔뜩 벌어진 보지로 오물오물 좆을 삼키는 모습은 언제 봐도 아래를 뻐근해지게 만들었다.
세아에겐 죽고 싶을 만큼 끔찍한 그날의 기억이, 정과 준에게는 다시 없을 달콤한 기억이었다.
만약 세아가 원한다면, 지금처럼 다정한 오빠 행세쯤이야 평생이라도 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곁에 자신들밖에 없을 때의 이야기일 뿐.
혹 세아에게 다른 사내가 생긴다면, 언제든지 다시금 그때처럼 돌아갈 수 있는 둘이었다.
‘나는…… 사실 그 일 있고 난 후로 혼자 남는 게 무서워.’
‘그러니까 나만 두고 떠나면 안 돼…….’
잠들기 전, 세아가 중얼거렸던 말을 떠올린 준은 세상을 다 가진 아이처럼 천진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준도 정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세아와 평생을 함께할 수는 있어도, 세 사람이 함께 깊은 잠에 빠지는 밤은 영영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이건 잔혹했던 그날에 대한 대가였다. 그리고 그들은 세아를 곁에 둠으로써 기꺼이 그 대가를 받아들였다.
세아와 평생 함께할 수 있다면 이 정도쯤이야,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아도 한참 안 맞는 거래라고 생각하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세상은 끝까지 그들 편이었다.
권선징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삶은 원래 불공평하니까.
이 글은 붉어진 제주 하늘을 보고 있을 세아에게, 내가 유일하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다.
네가 궁금해하는 모든 진실이 담겨 있는 글.
부디 이 글이 네가 있는 제주까지 닿길 바라며.
세아에게 完
범이 채어 간 아씨
리베냐
아씨와 종놈
“범아, 여태 자니?”
난영은 행랑방 문고리를 흔들었다. 얇은 문짝 너머로 요가 부스럭댔다.
“아닙니다, 아씨. 진즉 일어나 있었습니다.”
실은 여태 자느냐고 묻기에는 이른 시각이었다. 머리 위로는 놋그릇처럼 반질반질한 보름달이 휘영청하고, 뜰 어딘가에서는 귀뚜라미가 짜르르 울었으니.
한 번쯤 구시렁댈 법도 하건만, 범은 이른 새벽 정화수를 뜨러 가자는 난영의 채근에 계절이 여덟 번은 바뀌도록 ‘진즉 일어나 있었다.’고 거짓부렁을 했다. 농사일에 지쳐 코 고는 소리가 좀 전까지 이 작은 초가를 우렁차게 울린 걸, 귀먹은 덕이 할멈도 아니고 난영이 모를 리 없는데 말이다.
곧 행랑방 문짝이 벌컥 열리더니 범이 홑저고리 고름을 매며 냉큼 짚신에 발을 욱여넣었다. 급히 나오느라 채 여미지 못한 앞섶 사이로 떡 벌어진 가슴팍이 훤히 드러났다.
반가의 여인이라면 외간 사내의 헐벗은 꼴에 고개를 돌려야 하건만. 웃통을 훌훌 벗고 얇은 잠방이만 걸친 범이와 만날 밭일을 같이했더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난영은 도리어 범이의 가슴을 뚱하니 쳐다보았다.
“왜 그리 보십니까?”
난영이 머리에 이고 있던 물독을 빼앗아 든 범이 주인 아씨의 그늘진 낯빛을 살폈다.
“애를 배고 젖을 먹일 것도 아니면서 저리 커서 뭣에 쓰는고.”
아씨가 토라진 양 뒤로 홱 돌았다. 사립문으로 옮기는 걸음새에 힘이 없다.
범은 어처구니가 없어 픽, 웃을 따름이었다. 고된 일로 단련돼 여느 아낙보다도 크게 불거진 제 가슴팍을 보고 하는 말이다.
‘애를 못 배더니 별걸 다 샘내시네.’
산기슭에 자리한 작은 마을은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마을 우물로 향하는 길은 보름달 덕에 밝았으나 범은 아씨가 밤길에 넘어져 무릎을 깰까 저어되어 따라오는 것이 아니었다.
초여름 달빛 아래의 치자꽃처럼 한창 물이 오른 아씨를 어찌 야심한 시각에 홀로 보내리. 사내가 채어 갈라. 아니, 범이 채어 갈지도.
오늘따라 부엉이 우는 소리가 유독 처량하다. 원래는 보름달같이 밝기만 한 아씨의 낯도 오늘은 유독 청승맞아 보인다.
“아씨.”
“응?”
슬쩍 말해 드릴까. 범은 망설였다.
아씨는 순진하다 못해 답답하시다. 스물도 넘어놓고 애는 삼신할미에게 정성껏 치성을 드려 배는 줄 알다니.
이건 다 어미가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시집오기 전 운우지락(雲雨之樂: 남녀가 육체적으로 관계하는 즐거움)을 가르쳐 줄 이가 없었던 탓이다.
그렇다고 그걸 사내종인 그가 가르쳐 줄 수도 없고. 귀띔을 해 준다 쳐도 저 가냘픈 손으로 나리의 더러운 좆을 잡고 대뜸 올라탈 거라 생각하면 심사가 묘하게 뒤틀리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새벽부터 왜 그리 싱겁게 구니?”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는 난영의 낯에 드디어 보름달이 떴다.
이런 연유로 범은 여태 계절이 여덟 번 바뀌도록 아씨의 청승맞은 걸음새를 따라 정화수를 뜨러 다녔다.
***
“아씨, 쉬엄쉬엄하시지요. 그러다 뙤약볕에 쓰러지실라.”
범이 말려도 아씨는 호미질을 쉬지 않았다.
‘하여간에 저 똥고집하고는.’
장마가 닥쳐 감자가 썩어버리기 전에 얼른 캐야 한다며 밭에 쪼그려 앉아 뒤뚱뒤뚱 걸음을 옮기는 모양새가 위태롭다.
아니나 다를까, 난영은 몇 걸음 못 가 갓 캔 감자 사이에 털썩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휴, 아파라….”
난영이 엉덩이를 주무르며 죽는소릴 했다.
“저 실한 게 다 짓물렀겠네.”
햇감자를 말하는지 초가지붕에 달린 박처럼 동그란 아씨의 엉덩이를 말하는지. 범은 호미를 툭 내던지고 일어서 손에 묻은 흙을 툭툭 털었다.
“범아, 나 좀 잡아주련.”
아씨가 일어나려다 다시 주저앉더니 범에게 손을 내밀었다. 뽀얀 손바닥을 멀거니 바라보던 그는 잠방이에 손을 쓱쓱 닦고 잡아주었다.
살결이 목련 꽃잎처럼 보드랍다. 험한 농사일 따위 하지 않고 삯바느질만 하던 시절에는 갓난아기의 볼때기만큼이나 보들보들하였겠지.
‘참 내, 반가의 여식이라는 분이 말이지. 장성한 사내의 손을 이리 막 잡아도 되는가.’
범은 아씨가 두 발로 서자마자 손을 홱 놓았다. 삿갓을 쓰고 있어 볕에 덴 것도 아닌데, 그의 목덜미가 시뻘겋게 되어버렸다.
“아유, 이 감자를 어쩐대….”
난영이 동강 난 감자 하나를 집어 올리며 울상을 지었다. 오늘 저녁 찬으로 올려야겠다며 흙을 털고 후후 부는 꼴을 힐끔대던 범이 혀를 찼다.
‘반가의 아씨가 어쩌다가 이 꼴이 되었나.’
본디 빈궁한 집의 장녀라 들었다만, 그래도 손이 야물어 삯바느질만으로도 홀아버지와 아우들 입에 풀칠은 할 정도는 되었다 하더니. 이제는 스스로 호미를 잡고 감자 한 알을 아까워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이다.
난영도 장씨 집안에서 혼담을 넣었을 때에는 이리될 줄 까맣게 몰랐다. 되레 위세 대단한 집안에서 몰락한 반가의 딸인 제게 땅과 노비까지 쥐여준 것이 아리송했지.
대감 댁, 그러다 영감 댁, 종국에는 현감 댁이라 불리며 세도가 기울기는 하였으나, 장씨 집안은 알아주는 무반(武班: 무관의 반열)이었다.
그런 집안이 분에 넘치는 대가를 쥐여줄 때는 다 그럴 이유가 있는 법.
‘그 댁 원규 도련님이 썩은 감자라 그래.’
혼담이 들어왔던 날 밤, 두 살 어린 아우가 속닥거렸다.
원규 도련님은 낙지라도 자셨는지 무과에 응시하는 족족 낙방했다. 그에 낙담해 술병과 기생을 옆구리에 하나씩 끼고 허송세월한다는 건 고을 밖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던 차에 밤길에 고주망태가 되어 말을 타고 다리를 넘다 낙마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가물어 돌바닥을 허옇게 드러낸 개천으로 곤두박질치는 바람에 평생 자리보전해야 하는 신세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실한 감자인 줄 알았던 게 단숨에 썩어버렸으니, 그 집 문턱을 닳도록 드나들던 매파(媒婆: 혼인을 중매하는 늙은 여자)들의 출입이 뚝 끊겼음은 물론이다. 대가 이대로 끊길까 전전긍긍한 그 댁 마님이 대쪽 같던 자존심을 꺾고, 전신불수에게라도 시집올 수밖에 없는 반가 규수를 물색한 것도 당연지사고.
그러다 낙찰된 것이 결국은 난영이었다.
타고나길 순진한 그녀는 ‘어머나, 좋아라!’ 하며 장씨 집안 마님이 내어놓은 전답과 노비를 덥석 받았다. 서방님이야 썩은 감자건 뭐건, 장씨 집안은 대궐 같은 기와집에, 너르고 비옥한 전답에, 노비도 여럿 부리는 부잣집 아닌가.
허나 그 감자가 썩다 못해 곤죽이 된 걸 시모가 감쪽같이 숨겼을 줄이야.
하루가 멀다고 빚쟁이들이 찾아왔다. 종국엔 서방이 쌓아둔 빚에, 약값에 그 대궐 같은 기와집도, 너르고 비옥한 전답도, 발가락까지 동원해 세어야 할 노비도 하나둘 팔아야 했다.
부잣집 마나님에서 곰팡내 나는 산골 초가집 노인네 신세로 전락한 시모가 화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뜬 게 재작년이다.
결국, 난영에게 남은 건 온종일 누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서방님과 허리가 낫처럼 굽고 귀가 먹어 팔지도 못하는 찬모(饌母: 반찬을 만드는 노비) 덕이 할멈, 그리고 서방님이 어릴 적부터 부린 종인 범이뿐인 것이다.
‘그래도 손바닥만 한 밭떼기에 부릴 노비라도 있는 게 어디야.’
타고나기를 낙천적이기까지 한 난영이었다. 빈궁한 건 제 팔자려니. 네 식구 굶지 않고, 아비와 아우들이 편히 먹고 지내면 되었다.
마음이 좀 적적하기는 하다만.
“왜 그러십니까?”
덕이 할멈이 가져온 새참을 먹다 저도 모르게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더니 범이 복숭아를 베어 물다 말고 묻는다.
“딱 하나만 점지해 주시면 더 바랄 게 없건만….”
납작한 배를 쓸어내리는 손을 따라가던 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땀에 젖어 눅눅한 치맛자락이 뭉개지면서 아씨의 은밀한 둔덕이 모양새를 드러낸 탓이었다.
어찌나 봉긋한지. 산이 높을수록 계곡은 깊은 법인데.
“크흠….”
시선을 돌린다고 돌린 게 어째 하필이면 저곳이란 말인가.
땀이 아씨의 속적삼을 적시다 못해 베저고리까지 아주 푹 젖었다. 그 아래로 분홍빛 살갗이 언뜻언뜻 비쳤다.
범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치마끈에 눌려 볼록 솟은 젖무덤이 참말로 실하다. 저리 탐스러운 젖을 가지고 왜 새벽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딱딱하기만 한 제 가슴팍을 시샘한 건지. 참 내, 여인네들의 속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쩍 벌리고 앉았던 다리를 계집처럼 다소곳이 모아 앉는데 난영이 혼자 손가락을 접으며 무언가를 셈해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범아.”
“네, 아씨.”
“두세 해 더 돈을 모으면 내가 너 장가보내줄 것이다.”
“장가요?”
범은 입 안 가득 베어 문 복숭아를 채 씹어 넘기지 못해 한쪽 볼을 불퉁하게 부풀린 채로 대꾸했다.
대답이 영 마뜩잖게 들리는 건 그 까닭이겠지? 난영은 벌써 스물넷이나 먹어 때를 놓쳐버린 사내종을 장가보낼 생각에 신이 나 종알댔다. 이것도 심어 팔고 저것도 키워 팔고 그렇게 돈을 모아….
“참하고 어여쁜 아이를 데려올 터이니….”
“됐습니다.”
복숭아를 꿀꺽 삼킨 범이 버릇도 없이 주인 아씨의 말을 뚝 잘라먹었다.
“어찌 그러니? 너도 긴긴밤 정을 나눌 처가 있으면 좋을 터인데.”
남녀가 긴긴밤 정을 어찌 나누는지도 모르시는 분이.
“팔아 버리지나 마시지요.”
나리의 약값 탓에 쭉정이 같은 기둥뿌리마저 뽑혀 나갈 판인데 돈이 모일 리 있을까.
“그래도 돈이 모이거들랑 차라리 나무 해 올 사내아이나 하나 사십시오.”
“범이 너는 어찌 이리 심성이 고운지.”
순진하기 짝이 없는 난영은 범이 실은 이런저런 사사로운 셈 끝에 한 말이란 걸 모르고 흐뭇하게 웃었다.
“네 덕에 나는 오늘도 배부르게 두 다리 쭉 뻗고 자는구나.”
그러니 도망가지 말렴. 난영은 하루건너 하는 당부를 덧붙이며 이 집에서 유일하게 힘쓸 줄 아는 사내에게 큼지막한 복숭아를 하나 쥐여주었다.
‘어찌 이리 듬직할꼬….’
복숭아를 여섯 개째 먹는 사내종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난영이 감탄했다.
이름값을 하는 녀석이다.
덕이 할멈에게 듣기로는 날 때는 개똥이라 불렸다고 하더니, 세 살이 넘고부터는 여섯 살 아이와 진배없이 장대한 기골을 뽐내는 게 꼭 뒷산의 범 같다며 범이라 부르기 시작했단다.
사람이 위로 쭉쭉 뻗으면 서방님처럼 속이 빈 갈대 같아지는 줄 알았더니만. 범이는 키도 시원스레 크고 몸집도 시원스레 크다.
“아씨는 들어가시지요. 저 혼자 캐는 게 더 빠르니까.”
배도 커서, 난영의 주먹만 한 복숭아 여덟 개를 단숨에 먹어 치운 범이 손을 툭툭 털며 일어섰다.
호미를 쥐고 뙤약볕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내의 등이 햇살에 잘 익은 개암처럼 짙다. 해를 보지 못해 희멀건 제 서방과는 아주 딴판이다.
그나저나 서방님은 대대손손 기골 장대하기로 이름난 장씨 집안 손이면서 어찌 호리호리한 샌님 같은 걸까.
***
“서방님이 호리호리하신 것도 복이야.”
난영이 원규에게 죽을 떠먹이다 보조개를 움푹 패며 웃었다.
“범이, 너처럼 바윗덩이 같았더라면 홀로 어찌 수발을 들었을꼬.”
그래서 이런 수발은 저 홀로 들 수 있다는 데도 범이는 서방님을 붙들어 앉힌 채 나가질 않았다.
‘천치인가. 어찌 꽃잠(결혼한 신랑 신부가 처음으로 함께 자는 잠) 한 번 못 잔 놈도 서방이라고 비리비리한 게 복이네, 속없이 웃고 있을까.’
범은 돌쟁이에게 미음이라도 먹이듯 흐뭇하게 웃으며 서방의 입가를 행주 치맛자락으로 닦는 아씨를 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꾸 그러면 복 달아난단다.”
차라리 아씨가 달아나시지.
어째 이런 쭉정이 서방 말고, 튼실한 사내 하나를 꼬드겨 달아날 만큼의 꾀도 없으시단 말인가.
허나 마을 사내들의 낯짝을 떠올려 본 범은 인상을 아씨의 주름진 치맛자락처럼 팍 구겼다.
이미 생과부나 다름없는 아씨를 훔쳐보며 군침 흘리는 놈들이 있는 줄로 안다. 저 아랫집 종놈인 먹쇠는 아씨가 손끝 하나 까딱 못하는 나리와 어찌 운우지정을 나누는지를 두고 추잡스러운 소릴 지껄이다 그의 주먹에 피떡이 되도록 얻어맞은 일도 있었다.
착한 아씨가 그런 잡놈 중 한 녀석이랑 야반도주하신다고 생각하면 그때만큼이나 피가 끓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저리 젊고 탐스러운 아씨가 부부간의 정을 모르고 시들어 가시는 건 참으로 아까운 일이다.
‘또 경을 칠 짓을.’
아씨의 저고리 깃 사이를 저도 모르게 훔쳐보던 범이 급히 눈을 돌렸다. 그러다 하필이면 나리와 눈을 마주쳤다.
원규는 사지가 마비되어 눈만 껌뻑하고 입으로 ‘으으으’ 신음만 낼 수 있을 뿐이었으나 정신은 멀쩡했다. 그런데 저 시커먼 음심도 멀쩡한 모양이다.
한 번 맛도 못 본 색시의 속살을 훔쳐보며 군침을 흘리고 있었는지 고간이 불룩하다.
‘먹으라는 죽은 안 먹고.’
아씨는 나리의 것이니 먹쇠처럼 주먹을 내다 꽂을 일은 아니었으나, 범의 피가 그때보다 더 철철 끓기 시작했다.
나리의 흉흉한 눈빛 탓이었다.
‘감히 천한 종놈 주제에 어디 남의 떡을 넘보는 게냐?’
‘그러는 나리는 제 떡을 여럿 뺏어 잡수시지 않았습니까.’
지난 일을 하나둘 떠올린 범은 지지 않고 험악한 눈빛을 번뜩이며 낯으로 대거리를 했다.
내가 고자도 아니고. 왜 여태 장가도 못 들고 하물며 계집한테 정도 못 붙이는데.
이가 으드득 갈리고 나리의 목덜미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허나 원규도 질기기는 쇠심줄 같은 인간이라. 제 것을 남이, 그것도 저 빌어먹을 종놈이 탐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혀는 쓸 수 있는 그가 턱을 받친 범의 손에 죽을 퉤 내뱉었다. 그 순간 스물몇 해를 등신처럼 참아 온 범도 꼭지가 완전히 돌아버렸다.
철딱서니 없던 여섯 살 때, 저와 목검을 겨뤄 이기면 장씨 성을 준다는 말에 속았던 적이 있다. 순진하기 짝이 없게 정말로 도련님을 이겨버린 어린 종놈은 광에 갇혀 몰매를 맞았다. 고작 여섯 살짜리가 피떡이 된 걸 도련님은 흡족하게 내려다보다 퉤, 침을 뱉고 나가버렸다.
십수 해가 지난 지금, 나리는 고작 침 뱉는 것밖에 못 하는 산송장이 되어버렸고 범은 누구도 몰매를 칠 수 없는 호랑이 같은 사내로 자랐다.
탁.
실수인 척 휘두른 범의 손에 챈 죽그릇이 엎어졌다.
“에구구…. 조심 좀 하지.”
“죄송합니다.”
하필이면 뜨거운 죽이 죄다 나리의 고간으로 쏟아질 게 뭐람.
“으으으….”
원규가 고통에 찬 신음을 내질렀다. 여름이라 바지가 얇았던 터라 생좆을 가마솥에 쑤셔 넣는 것과 다름없었으리라.
“아휴, 이를 어째…. 아프셔요, 서방님?”
아씨가 나리의 허리띠를 급히 풀기 시작했다. 저 고운 손이 나리의 썩어빠진 좆을 잡고 씻기고 달래는 걸 상상해버린 범이 난영의 손목을 턱 하니 잡았다.
아씨가 고개를 들더니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새빨간 대낮에 외간 사내에게 손잡아 달라실 땐 언제고.
“제가 저지른 일이니 제가 갈무리하겠습니다.”
“아…, 그리해도 되겠니?”
“여기는 제게 맡기시고 아씨는 얼른 나가 저녁 자시지요.”
손목을 놓아주었더니 아씨가 제 손이 떠난 자리를 문지르며 사랑방 밖으로 나갔다. 그리 세게 잡지는 않았는데.
난영의 기척이 멀어지자마자 범은 돌변했다.
원규의 바지와 속곳을 벗겨 방구석으로 던졌다. 세 치(한 치는 약 3cm)는 될까 말까 한 양물을 사내 종놈 앞에서 꺼떡대는 꼴이 우습다.
아씨가 허리띠를 풀 때는 암말 안 하더니. 저도 사내 앞에서 물건을 속수무책으로 드러낸 신세가 처량한지 으으으, 신음을 흘린다.
“왜 그리 남부끄러워하십니까? 소싯적에는 제 앞에서 하초를 잘도 놀리지 않으셨습니까.”
뜨거운 죽에 데어 벌겋게 된 살덩어리를 더러운 버선발로 꽉꽉 짓이겼다. 어린 닭이 처음 낳은 알처럼 작은 불알은 발끝으로 툭툭 차기까지 했다.
“으으으으….”
“나리, 남의 떡이 맛있는 법이라고 하셨지요? 우매한 제가 감히 나리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남의 떡, 얼마나 맛 좋은지 오늘 한번 먹어 보지요.”
더는 못 참는다. 등신처럼 제 것을 다 빼앗기고도 주인이랍시고 섬기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범은 대청마루로 나섰다. 자시라는 저녁은 자시지 않고, 아씨는 뜰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같잖은 서방에게 줄 약을 달이고 있었다.
‘아씨, 이제 꼭두새벽마다 정화수 떠서 빌 것 없소.’
보름달처럼 한창 무르익은 난영의 몸을 훑는 범의 눈빛에서 여태 억눌러왔던 정염과 광기가 번뜩였다. 그의 아랫도리가 들썩였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