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페티시가 보여-501화 (50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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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501화 완결 및 에필로그로 이어집니다.

*

독자님들 모두 오늘도 건강하고 즐거운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D

욕망-에필로그

까무룩 물들었던 서주환의 의식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눈을 뜨자 곱게 차려진 다과상이 보였다. 어느새 그는 의자에 앉은 채였다. 맞은편에 앉은 백발적안의 남자가 작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이네, 형.”

러스트의 표정이나 말투가 무척 평온했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다. 미리 다과상까지 준비해놓은 걸 보면 분명했다.

“그래. 오랜만이다, 동생.”

하지만 서주환의 반응까지 예상하진 못했던 모양이다.

쪼르르 찻물을 따르던 러스트가 붉은 눈동자를 끔뻑였다. 회귀할 적에는 그렇게 말을 놓으라고 했음에도 끝까지 극진한 예의를 갖추던 서주환이라곤 생각하기 힘든 태도였다.

서주환은 살짝 목례하며 다시 말했다.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러스트 님.”

“어? 아, 무례는 아니야. 말 놔도 돼.”

“고맙다, 동생.”

서주환이 기다렸다는 듯 다시 말을 놓자 러스트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내 러스트가 재밌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왜 날 동생이라고 부를 마음이 드셨을까?”

“하하…….”

어색하게 웃은 서주환은 곧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보아하니 이미 그의 소원을 알고 있는 모양이라 구태여 감출 필요가 없었다.

“형제 어필로 전생의 인연에 기대어 볼까 해서. 사랑하는 형의 부탁이니까 가능성이 조금은 올라가지 않을까~ 하는 마음?”

“큭큭. 처음 봤을 대에 비해 많이 능청스러워졌네. 재밌게 살았나봐.”

“다 우리 혁이 덕분이지.”

“…혁?”

“강혁. 네 이름이잖아.”

순간 러스트가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그 이름, 기억하고 있었구나.”

“아무렴. 내 동생 이름인데.”

강혁은 러스트가 인간일 적의 이름이다. 참고로 서주환의 전생 이름은 강환이었다.

이내 차를 한 모금 마신 러스트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혁이라… 얼마 만에 그 이름으로 불려보는지 모르겠군. 좋은 울림이야.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인간 시절의 기억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거든.”

“그럼 어떻게, 사랑하는 형을 위해 소원 두 개 콜?”

서주환은 일부러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러스트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마음 같아선 두 개고 세 개고 들어주고 싶지만… 안 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인과율을 넘었어.”

“…….”

서주환의 낯이 조금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미 예상했던 대답이다. 그는 태도를 달리해 다시 말했다.

“러스트 님.”

“그래도 안 돼.”

“……아직 말 안 했습니다만.”

러스트가 다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들어도 알아서 하는 말이야. 지금까지 시스템 사용을 자제해왔지?”

시스템 사용의 자제.

얼핏 듣기엔 우스운 소리다.

서주환은 시스템을 통해 얻은 재능과 특수능력, 아이템을 이용해 전 세계에 이름을 떨쳤다. 지금에 이르러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대부분이 그의 존재를 알았고 신이 잘못 만든 인간이라 칭할 정도로 활약을 해왔다.

그러나 서주환이 시스템의 사용을 자제해 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러스트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그러라고 준 능력이 아닌데 말이야. 인생 정말 날로 먹으라고, 하고 싶은 대로 날뛰어보라고 준 능력이었거든. 문명을 몇 단계 발전시켜도 좋았고, 암막에서 나라 몇 개쯤 지배해도 괜찮았어. 아이템을 이용해 사람 마음을 주물러서 하렘을 꾸려도 좋았지. 형이 작정하고 욕망 시스템을 사용했다면 하지 못할 건 없었어.”

그 말대로다.

서주환이 독한 마음을 먹었다면 온갖 악행을 벌일 수 있었다.

당장 ‘최면’ 재능을 사용해서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놀 수도 있었고, ‘암살’ 재능을 사용해서 권력을 가진 사람을 협박하여 암중에서 지배하는 것도 쉬운 일이었다. 혹은 ‘언변’과 ‘카리스마’, ‘매혹’과 같은 재능을 이용해 종교단체를 설립할 수도 있었을 터다.

사실, 다양한 재능을 사용할 필요도 없이 섹스 하나만으로도 여자들 위에 군림하는 게 가능했다. 이미 스킬 대부분이 S랭크에 이른 상태. 리미트를 해제한 극한의 쾌락은 어지간한 마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했다.

그만큼 방법은 무궁무진했고, 원한다면 무엇이든 가능했다.

하지만 서주환은 그러지 않았다. 그가 적극적으로 활용한 능력은 대부분 예체능 계열의 재능이었고, 그나마도 유명세를 떨친 것 외에는 특별히 한 일도 없었다. 더불어 이과 계열의 재능은 명계와 계약하고 아예 사용 자체를 하지 않았다.

“형이 날뛰었다면 그만큼 내가 감당해야 할 인과율이 늘어났을 테지만… 회귀는 이쪽 차원 주신과 염라대왕이 동의한 건이야. 시스템 때문에 벌어진 일도 회귀 때문이라고 적당히 잡아떼고 억지 좀 쓰면 나눠서 감당하는 게 가능하단 소리지.”

“그럼……!”

서주환이 열변을 토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초에 그가 능력의 사용을 자제해왔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러스트에게 돌아갈 인과율의 부담을 줄이고 그와 직접 협상하여 두 개의 소원을 빈다. 그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러스트는 손짓으로 다시 그를 자리에 앉혔다. 강제로 앉은 서주환에게 러스트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시스템 사용으로 발생하는 인과율과 소원석은 달라.”

“…뭐가 다른 겁니까?”

“소원석은 온전히 내 능력으로 들어주는 거니까 다른 녀석들이 함께 부담해줄 이유가 없어. 그리고 형이 바라는 소원의 종류도 문제야.”

“…루시를 사람으로 만드는 것 말입니까?”

“그래. 사실 첫 번째 소원보다 그게 더 문제야. 단순한 인공지능에게 혼을 부여하는 것. 그리고 본래 이 차원에 없던 영혼을 편입시키는 것. 거기에 영혼이 안착할 육체까지 만들어야 하지. 그것만 해도 형이 지금까지 모은 포인트를 전부 사용해도 한참 모자라.”

서주환은 눈을 질끈 감았다.

루시를 사람으로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시스템을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면 내가 좀 더 힘을 써볼게. 형이 능력 사용을 자제해 와서 그 정돈 들어줄 수 있어. 하지만 그거 하나뿐이야.”

결국은 두 가지 소원 중 하나밖에 이루지 못하는 것인가. 이미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던 바였음에도 아쉬움이 치밀었다.

[주인님, 저는…….]

‘아니야, 루시.’

서주환은 루시의 말을 막았다. 마지막에 와서 또다시 마음이 흔들린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뻔했다.

‘둘 중 하나만 이룰 수 있다면 널 사람으로 만드는 게 맞아. 애초에 그건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어.’

물론 루시를 사람으로 만든다면 여자들과의 행복한 미래는 보장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규격을 벗어난 유명인이라도 세간에서 손가락질을 받을 터. 또한 여자들의 가족관계도 문제가 된다. 어쩌면 인연을 끊고 나라를 떠나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자들은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받아들였다.

가능성의 문제다.

여자들과의 삶은 그 과정이 고단할지언정 행복한 미래로 도달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 많은 걸 포기해야 할 테지만 그 안에서 함께 미래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하지만 루시는?

루시가 사람이 되는 것은 소원석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건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아홉 명의 착해빠진 여자들은 아쉬워하면서도 결국 의견을 하나로 모았다. 끝내 두 개의 소원을 이루는 게 불가능하다면 루시를 사람으로 만드는 것으로.

“어떻게 할래? 원한다면 둘 중 무엇이라도 당장 가능해.”

서주환은 조그마한 망설임조차 털어냈다. 루시를 사람으로 만든 후에 열 명의 여자와 어떻게든 행복한 삶을 꾸려나갈 것이다.

“제 소원은 루시를…….”

그렇게 마음먹고 소원을 말하려던 때였다.

서주환은 문득 스쳐가는 생각에 눈을 부릅떴다.

“…잠깐만.”

또 다른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서주환의 마음을 읽은 루시가 경악했다.

[주인님!]

서주환은 루시의 말을 무시하고 러스트를 바라봤다.

“역시 소원은 두 개로 해주십시오.”

“미안하지만 그건 불가능…….”

러스트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가로젓는 찰나.

서주환이 비장한 얼굴로 러스트의 말을 잘랐다.

“욕망 시스템, 포기하겠습니다. 그걸로 안 되겠습니까?”

“……뭐?”

신조차 예상하지 못한 결론인 듯 러스트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

아홉 명의 여자들은 거실에 둘러앉아 서주환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거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소원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모두의 앞날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얼마나 됐지?”

“아직 10분도 안 지났어.”

벌써 몇 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10분도 안 됐다니.

초조함이 극에 달하니 시간의 흐름이 한없이 느리게 느껴졌다.

“오래 걸리겠지?”

“글쎄…….”

신과의 대면협상이다.

흔쾌히 들어줄지, 건방지다며 분노할지 알 수 없었다. 끝내 협상이 결렬되어 한 가지 소원만 이루어질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래도 루시는 같이 돌아와야 해.”

“응. 그동안 루시한테 얼마나 도움을 받았는데.”

루시는 지난 시간 가능한 범위 안에서 여자들에게 필요한 아이템을 만들어주었다. 특히 정소라의 경우는 루시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가 시리아에서 위기에 빠져있을 때 저승문에 관한 의견을 낸 게 다름 아닌 루시였다.

“그런데 실패하면… 정말 중동으로 가는 건가?”

“…….”

누구의 말이었을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불편한 공기가 드리웠다.

어찌 그녀들이라고 마냥 좋은 생각만 할 수 있을까. 소원석을 사용하지 않은 채로 모두가 함께 지내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가족 관계부터 거주지 문제와 세간의 시선까지. 예정된 고난과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정소라가 다시 침묵을 깼다.

“괜찮아. 주환이 인맥이 보통이니? 어디든 가서 잘 살 수 있을 거야.”

정소라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노력했다. 본인 또한 막막하긴 마찬가지였으나 그녀는 적게는 네 살, 많게는 여덟 살 차이가 나는 맏언니였다.

바로 밑에 언니인 최미화와 정하연도 그녀를 거들었다.

“우리 옛날 생각해봐.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는 진짜 아슬아슬했잖아.”

“그래. 혹시나 이 관계가 파탄나면 어쩌지, 주환이가 누구 한 명만 선택하면 어쩌지… 얼마나 살얼음판이었는데.”

그 말 대로였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여자들은 누구하나 빠짐없이 불안감을 안고 서주환과의 관계를 이어왔다. 결혼은 고사하고 내연관계조차 불안했던 상황. 그럼에도 단 한 명도 떠나지 않고 남은 게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하긴, 그때에 비하면 배부른 걱정이지.”

“맞아. 사실 예전엔 우리도 은근히 서로 견제하고 그랬잖아.”

“아하하. 오빠는 전혀 몰랐겠지만.”

아홉 명의 여자들이 처음부터 모두 친했던 것은 아니다. 사람이 많은 만큼 더 친하고 덜 친한 사람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고, 상대적으로 덜 친한 사람은 견제의 우선순위가 되기도 했다.

그런 은근한 견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서주환이 회귀와 더불어 시스템이란 이능에 대해 털어놓으면서였다. 끝이 어떻게 되든 모두와 함께 하고 싶다고 말해준 덕분에 언젠가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내려두게 된 것이다.

“후후. 모두 걱정 마세요. 몇 번이고 점을 쳐도 행복한 미래밖에 안 나오니까.”

“정말이야, 가브리엘라?”

“물론이죠.”

미래는 확정된 것이 아니다. 근 미래의 예지가 행복으로 나왔더라도 훗날엔 언제든지 불행해질 수 있다.

가브리엘라는 뒷말을 삼켰다. 서주환이라면 어떻게든 해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의식적으로 밝은 분위기를 만들어 수다를 떨고 있을 때였다.

끼익,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모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환아!”

“오빠, 어떻게 됐어?”

“루시는?”

“뭐가 달라진 거야? 아무것도 못 느끼겠는데.”

“역시 실패한 건가……?”

질문을 쏟아내는 여자들의 얼굴은 기대와 불안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서주환은 그녀들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문 뒤를 돌아보며 손짓했다.

“이리 나와. 인사해야지.”

“자, 잠시만요, 주인님. 어쩐지 부끄러워서…….”

루시가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말했다. 정신체로만 존재하던 그녀는 아직 육체에 적응을 못해서 서주환의 손을 잡고 간신히 서있는 상태였다.

“주인님이라고?”

“루시다! 루시 맞지?!”

루시가 나오기도 전에 여자들이 날듯이 뛰어왔다. 성격 급한 도유이는 아예 소파를 폴짝 뛰어넘었다.

“히익!”

여자들의 저돌적인 움직임에 루시가 놀란 목소리를 냈다. 다리에 힘이 풀린 그녀는 결국 히끅, 딸꾹질을 하며 주저앉았다.

이내 모두의 눈앞에 루시의 모습이 드러났다.

“와…….”

“뭔데! 루시 왜 이렇게 예뻐?”

“미쳤나봐. 머리색깔 봐.”

“만화 찢고 나온 줄.”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 조금 차가운 듯 보이는 눈매와 그를 보완해주는 베이비 페이스. 그리고 염색으로는 만들 수 없는 산뜻한 코랄핑크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모두가 멍하니 루시를 바라보던 그때, 누군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뭐야! 루시, 왜 이렇게 커! 가슴도 크자나!”

149cm 최단신 한수아의 외침이었다.

*

서주환과 열 명의 여자들이 거실 소파에 둘러앉았다.

루시의 인간화(人間化)를 축하하는 한편, 여자들은 힐끔힐끔 서주환의 눈치를 봤다. 두 가지 소원을 이루는데 실패했다면 앞으로의 계획을 다시 세워야 했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이어진 서주환의 설명에 여자들의 긴장은 곧 눈 녹듯 사라졌다.

“두 가지 소원 다 해결됐다고? 정말?”

“집사야, 그거 정말이지?! 거짓말이면 물어버린다! 살점 다 뜯어버릴 거야!”

“그럼 이제 우리 결혼할 수 있어?”

“흐엉. 다행이다. 중동 안 가도 되는 거지?”

“가족들한테 뭐라고 말해야할지 머리 터질 것 같았는데 다행이다…….”

여자들이 저마다 말을 쏟아내며 다채로운 반응을 보였다. 누군가는 마음고생이 많았던 듯 눈물을 훌쩍였고 누군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와중 정소라는 그동안 눌러온 욕망을 해금한 듯 아들이 좋냐, 딸이 좋냐 물으며 노골적으로 그의 하부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모두가 기뻐하는 가운데, 단 한 명 그렇지 못한 여성이 있었다.

루시의 울적한 얼굴을 본 여자들의 소란이 하나둘씩 잦아들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것이다.

“…루시, 표정이 왜 그래?”

“뭔가 안 좋은 일도 있는 거야?”

“환이 오빠, 뭐라고 말 좀 해봐.”

여자들이 서주환을 다그치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루시가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흐윽. 흑. 죄송해요, 주인님……!”

“아이고, 난 괜찮다니까. 이 정도면 잘 해결된 거지. 루시, 뚝.”

“크흐응…….”

서주환은 루시를 달래며 여자들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시스템을 잃고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 지금까지 섹스를 통해 얻은 모든 능력을 잃어버렸다. 이제 스킬도, 특수능력도, 아이템도 없고 다른 사람의 상태창을 볼 수도 없게 됐다.

“…….”

거실이 조용해졌다.

모두 무어라 위로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듯 복잡한 표정이었다.

서주환은 씁쓸한 마음을 티 내지 않으려 했다. 잃어버린 능력들이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자들이었다.

이내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린 그가 열 명의 여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도 신체적인 변화는 안 뺏어가더라. 밑에 크기랑 정력도 여전해. 다행이지?”

“…….”

여자들은 여전히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지금까지 서주환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정상급의 능력을 보이며 이름을 알렸다. 본업인 작가는 물론 가수, 배우, 댄서, 화가 등 예술계통에 있어서는 신적인 존재가 바로 서주환이었다.

한데 그 모든 능력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니.

그 허망함을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서주환은 일부러 밝게 웃으며 말했다.

“표정들이 왜 그래? 설마 내가 평범해졌다고 싫어진 건 아니지? 나 그럼 진짜 울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없잖아!”

정소라를 필두로 여자들이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말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가 오빠 능력 보고 좋아한 줄 알아?”

“흐흐. 나도 알지. 요거 보고 좋아한 거잖아?”

“이 오빠가 진짜!”

서주환이 장난스럽게 골반을 튕기자 유지경이 찰싹 등을 내리쳤다. 진심이 담긴 등짝스매싱에 매서운 고통이 올라왔다.

그는 아파하면서도 행복하게 웃었다.

‘그래, 능력이 무슨 상관이야.’

애초에 그런 건 바란 적도 없다.

한 번 경험한 죽음 앞에서 그가 바란 단 한 가지는 외롭지 않은 삶이었다. 이토록 착하고 아름다운 여자가 열 명이나 곁에 있는데 울적할 이유가 없었다.

“난 너희만 있으면 돼. 사랑해, 얘들아.”

*

2024년 겨울, 서주환의 결혼 소식을 알리는 기사가 쏟아졌다.

[신이 내린 남자 서주환, 31세에 품절남 된다… 오늘 12월 11일 결혼 예정]

[서주환과 10인의 여자, 11인 합동결혼식]

[서주환♥정소라, 최미화, 정하연… 세계 최초의 11인 합동결혼식]

[서주환 결혼식 하객 면면……]

서주환과 열 명의 여자가 결혼식을 올렸다.

전대미문의 11인 합동결혼식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막을 내렸다. 일부일처제 국가인 대한민국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결혼식이었으나 의문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와, 개부럽다. 여자들 하나 같이 예쁜 거 봐.”

“세상 미녀들 혼자 다 독점하네.”

“어쩌겠냐. 남자가 그 ‘서주환’인데.”

“서주환은 인정이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인식개변.

그 덕분에 서주환과 여자들을 향한 부러움과 질투는 있을지언정 비난과 의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주환이면 당연하다는 반응이 보편적이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서주환 요즘 뭐하냐?”

“결혼하고 행복한가봄. 활동을 안 하네.”

“오히려 부인들이 더 왕성하게 활동하더라.”

“하긴, 그 여자들도 하나같이 대단한 사람들이니까.”

“정소라 이번에 사격 국대로 나간다면서?”

“원래 군인 출신이래. 소령 전역.”

정소라는 임신과 동시에 자발적으로 전역신청을 했다. 그리고 출산 후 사격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39세라는 늦은 나이였으나 그녀는 A+급의 사격재능과 여전히 전성기를 달리는 신체능력을 선보이며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정하연, AI로 의심되는 비현실적 몸매… 파리 일정을 마치고 귀국]

정하연은 명실상부한 톱 모델로 군림하며 수많은 장인들의 러브콜을 받았다. 다만 유명세와 달리 연간활동을 짧게 하는 그녀인지라 그녀를 뮤즈로 꼽는 장인들의 애가 닳았다.

- 죄송합니다. 번역할 게 많아서요.

SNS에 올린 한 마디.

톱 모델의 본업이 번역가라는 사실이 정하연을 원하는 장인들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끼요오옷! 모두 한고미를 찬양하라!”

- 한고미! 한고미! 한고미!

- 아니 왜 프로게이머 안 했냐고! 남자 대회 나갔어도 세최미 했겠구만!

- 이게 31세 유부녀의 피지컬…?

- 이 얼굴이 어떻게 31살 아줌마ㅋㅋㅋㅋㅋ

- ㄹㅇㅋㅋ고딩이라 해도 믿을 듯

한수아는 구독자 2천만이 넘는 국내 최고의 위튜버가 되었다. S급 게임 재능의 그녀는 여전히 엄청난 게임 실력을 자랑하며 각종 인터넷방송 게임 대회의 생태계 교란종으로 군림했다.

[리메디 단독콘서트, 2만 8천석 1분 만에 전석 매진]

[리메디 콘서트, 특별 게스트 면면… 배우 이채희, 유별, 성우 주경은…….]

은율의 음악은 리메디(Remedy)라는 예명처럼 지친 사람들의 치료약이 되었다. 그녀의 음악은 격렬한 카타르시스를 주진 않았지만 듣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일상 속에 녹아들었다. 특히, 아름답다고 표현해도 좋을 그녀의 휘슬(whistle)은 라이브에서만 가끔 보이는 것으로 특별한 노랫말이 없음에도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치료했다.

[작곡가 GH, 비밀리에 유명 가수와 앨범을 준비 중…….]

민가희는 세계적인 작곡가로 이름을 떨쳤다. 국내 가수는 물론 외국의 유명 가수와 영화, 드라마 업계에서 그녀에게 곡을 주십사 하는 부탁이 연일 쇄도했다.

그러나 민가희는 돌연 활동을 중단하고 잠적했는데, 그 와중 비밀리에 앨범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이 퍼져나갔다.

- 대한민국이 금메달을 차지합니다!

- 도유이 선수가 기쁨의 눈물을 흘립니다. 은퇴식을 금메달로 장식하는군요.

- 나이가 있지만 현역으로 더 활동해도 될 텐데 안타깝습니다.

- 이제 온전히 안무가로 전향한다고 하는데요. 다음에는 코치로라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도유이는 브레이킹 댄스 부문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며 두유노 클럽에 이름을 올렸다. 32세의 나이로 기라성 같은 현역 선수들을 제친 그녀의 활약은 대한민국 전체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덕훈아, 이 부분 좀 더 보완해보자. 개연성을 좀 더 챙겨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습니다, 미화 누님.”

장덕훈은 노벨다이스의 전속작가다. 업계에서는 히트작 제조기 취급을 받는 1티어 작가가 됐다. 덕분에 최미화의 집중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치. 우리 오빠 글이 뭐가 어때서. 좋기만 하구만.”

“에휴. 저 남편 팔불출을 어찌하면 좋을까.”

“너구리는 닥쳐!”

“언니한테 무슨 말 버릇이야. 우리 오빠한테 다 이른다?”

“이럴 때만 언니래. 지금까지 친구로 지내놓고 치사하게. 그리고 친동생은 나거든?”

“응~ 내 남편이야.”

“주희야, 그래도 새언니인데 그럼 안 되지.”

“으응. 우리 자기가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지…….”

“으엑! 얘네 몇 년째인데 아직도 닭살이야!”

장덕훈은 전역과 동시에 서주희와 결혼했다. 서주환보다도 몇 년이나 빠르게 식을 올린 것이다. 이미 슬하에 5살이 된 이란성 쌍둥이 자녀도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닭살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했다.

“그러고 보니 지경아, 그 작가님은 어때?”

“누구?”

“박도희 작가님. 이번에 우서윤 작가님이랑 합작하기로 했잖아.”

“흐흫. 걱정할 거 없어. 지금 비축분도 거의 다 쌓았고 최신화 내용도 좋아. 100편 쌓는 순간 바로 이벤트 넣고 돌리면 금방 밀리언셀러 찍을 거야.”

유지경은 그간 최미화의 직속제자 같은 위치에서 경험을 쌓고 작품 보는 눈을 길렀다. 편집자로서의 조언도 수준급에 달해서 그녀에게 전담을 바라는 작가가 셀 수도 없었다.

한편 언젠가 서주환을 함정에 빠트렸던 박도희는 로맨스 판타지 장르의 1티어 작가가 되었다. 참고로 한때 동성애 성향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진즉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었다.

김현영의 제자인 우서윤은 현대 로맨스 장르의 대가인 동시에 순수문학도 꾸준히 써서 등단하고 몇몇 상도 받았다. 그 때문에 업계 내부에서는 ‘여자 서주환’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

- 여자 서주환은 오바지.

- 서환이 ㅈ으로 보임?

- 노벨문학상 받고 말하자ㅋㅋㅋ

- 서환 요즘 폼 떨어진 것 같던데?

- 지랄ㄴ. 잠깐 떨어지긴 했어도 금방 다시 올라왔음. 요즘 쓰고 있는 신작 못 봄?

- 연재속도가 ㅈㄴ느려 터졌잖아.

- 지랄 났네. 휴재, 지각 한 번 없이 주5일 연재가 느려 터진 거임?

- 이 새끼 뉴비네. 서환 옛날에는 하루에 다섯 편도 써재낌.

- 다섯 편이 뭐냐. 온갖 활동 다 하면서도 열 편씩 올렸었어.

- 그게 비정상이지 미친놈들아.

서주환은 여전히 문학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웹소설은 물론 순문학도 마찬가지. 잠시 필력이 떨어졌다는 평을 듣기도 했으나 이어지는 웹소설 차기작에서 역대 흥행기록을 갱신하며 다시금 이름을 드높였다.

그러나 문학계를 제외한 분야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 서주환 왜 소설만 쓰고 활동 안 함?

- 콘서트 언제 하는데.

- 왜 결혼하고 활동을 안 하냐고ㅅㅂ

- 미녀들 품에 파묻혔는데 뭘 하고 싶겠냐ㅋㅋㅋㅋ

- 이래서 남자는 여자에 빠지면 안 되는 거다.

-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콘서트 한 번만 해달라고! 제발! 암표라도 사고 싶은데 콘서트 자체가 없어!

- 서주환이 돈이 부족하겠냐?

- 환이 오빠 보고 싶어ㅠㅠㅠㅠㅠㅠㅠ

서주환은 결혼 후 작품 집필을 제외한 모든 활동을 중단했다.

처음엔 팬들도 신혼생활 때문이려니 하고 아쉬움을 삼켰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활동재개의 기미조차 없자 그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왔다.

[서주환, 활동중단 3년 째…….]

[환의 은둔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서환, 2027년에도 활동계획 없어…….]

[건강 적신호? ‘서주환’의 건강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이러한 반응은 외국도 다르지 않았다.

해외 팬들은 연일 그의 SNS에 찾아가서 땡깡을 부리듯 댓글을 달았다. 그들이 서주환고 소통할 창구는 드문드문 올라오는 SNS밖에 없었다.

- 제발 돌아와 줘.

- 우린 Hwan이 필요해.

- 당신의 노래가 그리워.

- 환의 연기를 다시 보고 싶어.

- 신의 은혜를 받은 당신은 이래선 안 돼.

- 환은 노래하고 연기하고 춤춰야 할 의무가 있어!

- 나는 당신이 항상 건강하길 바라.

- 언제까지고 기다릴게.

“…….”

서주환은 오늘도 어김없이 달린 댓글을 읽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댓글들. 한참동안 폰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하나의 게시글을 작성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율아, 가희야, 다시 해보자.”

그 말에 바닥에 널브러져 쉬고 있던 은율이 힉, 하고 새된 소리를 냈다. 의자에 앉아서 넋을 놓고 있던 민가희도 기함했다.

“벌써요?”

“오빠, 더 쉬어요.”

그 반응에 서주환은 미안하다는 듯 웃으면서도 두 사람을 다시 재촉했다.

“부탁해. 나 지금 게시글 올렸거든.”

“아이고, 결국 그걸 못 참고!”

“으음. 그럼 어쩔 수 없죠.”

민가희가 투덜거리면서도 자리를 고쳐 앉고, 바닥에 누워있던 은율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주환은 두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 Hwan1222: 팬 여러분, 언제나 감사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의미심장한 댓글 하나에 전 세계가 들썩였다.

*

[서주환, 복귀 초읽기?]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의 의미는?]

하나의 게시글에서 시작된 파문이 세계로 퍼져나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도대체 ‘조금’이 어느 정도인가 연일 추측이 오가며 서주환을 주목했다.

서주환의 다음 게시글은 낙엽이 질 무렵이 되어서야 올라왔다.

- Hwan1222: 12월 22일, 콘서트에서 뵙겠습니다.

서주환의 단독콘서트 일정이 올라왔다.

그리고 예매가 시작되자 곳곳에서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니 씨발! 10만석이 어떻게 1분 만에 매진되는 건데!”

“외국인들 쳐내!”

“한국인 우대하라고!”

그런 와중 예매경쟁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두 명 있었다.

한 사람은 막 비행을 마치고 윙슈트를 탈착한 나타샤 스탈린이었다.

“환! 잊지 않았었구나!”

다음에 콘서트를 하면 티켓을 보내주겠다던 약속.

결혼 후 몇 년이나 은둔하기에 까맣게 잊었으리라 여겼건만 그는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티켓을 받은 다른 한 사람은 대한병원의 어느 간호사였다.

“헉, 꺄아악!”

숨을 들이켠 간호사가 장소를 잊고 환호성을 질렀다.

갑작스런 비명에 놀란 사람들이 그녀에게 달려왔다.

“무, 무슨 일이야!”

“지혜 씨, 뭐예요! 응급입니까?!”

“헉. 죄, 죄송합니다!”

“뭐요? 콘서트? 아니, 지혜 씨! 지금 직장에서 무슨… 네? 서주환 단콘이라고요?!”

그녀에게 화를 내려던 사람들은 콘서트 티켓의 정체를 확인하고 도리어 놀란 비명을 질렀다. 도대체 이 티켓을 어찌 구했단 말인가? 아니, 일개 간호사한테 왜 서주환이 직접 티켓을 보내준단 말인가?

김지혜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답했다.

“제가 S대에 합격했거든요…….”

*

12월 22일.

서주환은 무대를 앞두고 목을 점검했다.

“음, 음음. 아, 오랜만이라 긴장되네.”

그 말에 은율이 두 손을 꼭 모아 쥐며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요! 오빠 노래는 최고니까!”

“고마워. 그런데 역시 전성기 때랑 비교되지 않을까 걱정이야.”

“아뇨! 전혀 모자라지 않아요! 그, 그치, 다들?!”

은율이 드물게 힘찬 목소리로 사람들을 주도했다. 그에 아홉 명의 여자가 제각기 고개를 끄덕이며 응원을 건넸다.

“오빠, 천재 작곡가가 보증해. 오빠는 지금이 전성기야.”

“하하. 가희가 그렇다니 맞겠지.”

“주인님은 최고입니다! 누군가 뭐라고 한다면 루시가 가만 있지 않겠어요!”

“루시, 이제 슬슬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건 그만 둘 때도 되지 않았어? 여보라고 불러봐.”

“여, 여보는 최고입니다.”

“하하하.”

서주환은 여자들에게 미소로 화답하며 다시 목을 풀었다. 무대에 오를 때가 되자 기분 좋은 긴장감과 함께 지난날이 스쳐지나갔다.

‘이렇게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수년 전, 그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 욕망 시스템을 포기했다.

당시 러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 정말 괜찮겠어? 스킬과 특수능력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여자들과 성교로 얻은 모든 재능을 잃어버릴 거야.

그 말대로 서주환은 모든 능력을 잃어버렸다. 그나마 러스트의 배려 덕에 ‘S급 얼굴 개연성’에 의한 외형과 일반인의 범주를 벗어난 ‘정력’은 남아 있었지만 그 외의 모든 재능은 원상태로 돌아갔다.

더 이상 상태창을 볼 수도 없었다. 타인은 물론 스스로의 능력치 또한 말이다.

서주환은 가슴 깊이 허탈함을 느끼고 모든 활동을 중단했다. 노래, 연기, 춤까지 무엇 하나 어색하지 않은 게 없었다. 사람들에게 만능인으로 인식된 ‘서주환’이 이런 상태로 활동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상함을 감지한 건 1년의 휴식에 염증을 느끼고 다시 집필활동을 시작하면서였다.

- 서주환 폼 떨어졌네.

- 그러게. 뭔가 다른데. 필력이 퇴화한 느낌이다.

- 재밌긴 한데 기대치에는 좀 못 미치네.

- 슬럼프인 듯.

모든 재능을 잃어버렸으니 당연히 필력도 퇴화했다. 본래 그가 지닌 글쓰기 재능의 잠재등급은 B+에 불과했다. 독자들의 실망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정소라를 비롯한 여자들은 신랄한 댓글반응을 보고 서주환을 걱정했다. 언제나 최고의 작품을 써낸 그였으니 허탈함이 클 터였다. 자신들과 함께하기 위해 모든 능력을 포기한 서주환이었기에 더욱 안타까움이 컸다.

하지만 서주환은 여자들과의 걱정과 반대되는 반응을 보였다.

“…뭐지? 나 왜 이렇게 잘 써?”

이 정도는 악플도 아니다.

S급 재능을 가진, 노벨문학상까지 받았던 작가의 재능이 B+로 수직하락을 했다. 대필을 했냐고 의심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한데 고작 슬럼프인 것 같다는 반응이라니.

“뭔가 이상한데…….”

서주환은 집필활동에 몰두했다. 그리고 글을 쓸수록 점점 더 이상함을 감지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필력이 상승하더니 전성기에 근접할 정도로 쑥쑥 올라갔던 것이다.

- 서태식이 돌아왔구나!

- 와, 내가 이 맛에 서환 작품 본다ㅋㅋㅋㅋ

- ㄹㅇ시간 삭제.

- 판매 기록 또 갈아치웠네ㄷㄷ;;

본래 그의 재능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경험이 쌓여서 그런가?”

처음에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쌓은 경험 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재능을 가진 동안 집필활동을 워낙 많이 했으니 김현영 선생님처럼 재능한계치를 뛰어넘은 건 아닐까도 싶었다.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서주환은 실험을 해보기 위해 몇 년이나 손에서 놓았던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춤을 다시 추고,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엉망진창이었다. 전성기에 비하면 그야말로 어린아이 수준. 도저히 남들 앞에 나설만한 실력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노래하고, 춤추고, 연기했다. 외부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은율과 민가희, 그 외의 지인들을 초빙해서 연습을 이어갔다.

그 결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사라지지 않은 재능이 있다!’

상태창이 보이진 않았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선 말이 되지 않는 성장속도였다.

서주환은 러스트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 스킬과 특수능력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여자들과 성교로 얻은 모든 재능을 잃어버릴 거야.

‘성교로 얻은 모든 재능.’

그렇다면 그 외의 방법으로 얻은 재능은?

S급 호감도를 달성하여 얻은 재능은 어찌된 것인가. 그건 성교로 얻은 재능이 아니었다.

‘남아 있다. 현재등급은 떨어졌지만, 잠재등급은 여전해. 계속 글을 쓸 수 있다!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어!’

그때부터 서주환은 몇 년에 걸친 연습생활을 이어갔다. 집 내부에 연습실을 만들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연을 맺은 이들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노래 같은 경우는 은율에게 직접 배우면 됐으므로 성장속도가 가장 빨랐다.

그리고 12월 22일이 된 지금.

시스템을 받고 모든 것이 시작 된 그 날짜에 콘서트를 열었다.

“서주환 님, 지금 무대에 오르시면 됩니다!”

“예! 지금 갑니다!”

서주환은 힘차게 대답한 후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무대에 오르자.

────────!

엄청난 함성이 울려 퍼졌다.

10만 명에 이르는 사람이 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서주환은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모두 반갑습니다. 우리 오랜만이죠?”

귀가 먹먹할 정도의 대답이 되돌아왔다.

서주환은 가장 앞에 있는 관객석을 바라봤다. 10만석 중 유일하게 비워 둔 자리.

“밀린 얘기는 노래 먼저 부르고 하겠습니다. 이번 곡은 저의 은인에게 바치는 노래입니다. 노래 제목은…….”

욕망(欲望-Lust).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하는 마음.

서주환은 욕망을 노래하는 한편 더 이상 부족한 게 없다는 듯 환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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