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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한 편 더 있습니다!
소원을 말해봐
“난 소원 없는데?”
“…응?”
서주환은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눈을 끔뻑였다.
정하연이 다시 말했다.
“난 딱히 소원이랄 게 없다고.”
“…그래? 나한테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어?”
“아니 뭐, 바라는 게 없는 건 아니지만… 그냥 말해도 되는 걸 거창하게 소원이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그녀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너한테 데이트하자고 소원씩이나 빌어야 돼?”
“그, 그건 아니지.”
“그치?”
“…그래도 뭔가 있지 않을까? 잘 생각해봐. 평소에 말하기 껄끄러웠던 소원이라던가. 예를 들면, 음…….”
서주환은 말을 흐렸다. 그가 정하연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아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던 것이다.
정하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난 그냥 지금이 좋아. 특별히 뭐 바라는 것도 없고.”
“으음. 곤란한데.”
“뭐가 곤란해?”
“네가 소원을 말해야 나도 그거 들어주고 맘 편하게 괴롭힐 거 아니야. 다들 오후에… 아, 벌써 오후구나. 아무튼 다들 내 소원 들어주기로 했거든.”
그 말에 정하연이 알만하다는 표정으로 쯧쯧 혀를 찼다. 그녀는 애초에 서주환의 목적이 수영장에서 여자들과 난교를 하는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됐어, 그건. 어차피 네 소원은 여행 올 때부터 들어주려고 했던 거니까.”
“?”
“네가 지경이한테 속은 거야. 우리 원래 내기 같은 거 안 해도 네가 원하는 거 들어주기로 했었거든. 다들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그랬나본데, 난 딱히 소원이랄 게 없으니까 됐어.”
“…….”
서주환은 어처구니없는 기분에 눈을 끔뻑였다. 열심히 내기를 해서 이겨왔거늘 그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단 말인가? 지금까지의 분투가 모두 너구리의 말장난에 놀아난 것이었다니.
“이놈의 너구리가…….”
서주환의 인상이 일그러지자 정하연이 기겁한 얼굴로 그를 말렸다.
“어어? 너 지경이 괴롭힐 생각이지? 하지 마. 너 표정이 이상해!”
“너구리가 날 속였어. 교육이 필요해.”
“교육은 무슨! 너도 지든 이기든 애들 소원 다 들어줄 생각이었다면서? 그리고 즐길 거 다 즐긴 모양이구만 왜 화를 내고 난리야?”
“으음. 그래도 기분이 나쁜데.”
“하지 마라……. 여기서 네가 화내면 내가 이른 게 되잖아.”
“흠.”
서주환은 세상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유지경의 처분을 어떻게 할지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그에 정하연은 질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여간 이 남자, 이런 부분에 관해서는 속이 좁아도 너무 좁다. 아니, 그냥 괴롭힐 구실이 생겨서 즐길 뿐일지도 모르겠다.
이내 그녀는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어서 말했다.
“소원이야.”
“엉?”
“내 소원이라고. 지경이랑 애들한테 복수하지 마. 알았지?”
“…연이 네가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지. 아쉽네.”
좋은 구실이었는데, 하고 중얼거리는 서주환.
정하연은 으, 하고 침음하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합법적으로 괴롭힐 이유가 생겨서 신난 것뿐이었다.
서주환은 낄낄거리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키며 말했다.
“방금 건 노카운트로 하고, 혹시 원하는 거 생기면 말해줘. 내가 할 수 있는 거면 뭐든 괜찮으니까.”
그 말에 정하연은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됐어. 난 그냥… 네가 약속만 지키면 충분해.”
“약속? 애들한테 복수 안 하기로 한 건…….”
“그거 말고.”
“응? 다른 약속이라면… 아.”
서주환은 문득 생각나는 바가 있어서 빤히 그녀를 쳐다봤다. 그에 정하연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뭘 봐, 하고 샐쭉하게 쏘아붙였다. 그가 단번에 알아들은 듯하자 부끄러움 몰려온 까닭이었다.
그런데 의외인 것은 서주환의 얼굴도 정하연의 얼굴만큼이나 새빨갛게 달아올랐다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약속드리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연이 옆에 계속 있어주겠다고.]
[라고 했었지요~?]
루시가 그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멘트를 쳐댔다. 언젠가 정선애의 묘비 앞에서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가져와서 말이다.
아무리 뻔뻔한 서주환이라도 본인이 했던 말을 그대로 가져오니 얼굴이 홧홧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루시를 말렸다.
‘하지 마!’
[왜요? 로맨틱해서 좋았는데. 그건 루시가 뽑은 주인님의 명대사 탑 파이브 안에 들어갈 정도로…….]
‘하지 말라니까, 루시!’
로맨틱과 오글거림의 경계는 종이 한 장보다 얇다. 그때는 분위기를 타서 잘도 그런 멘트를 내뱉었지만 지금다시 들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주인의 흑역사를 들추는 건방진 도우미에게 그만하라고 윽박지르는 서주환.
한데 그 모습이 정하연에게는 조금 다르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녀는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서주환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뻔뻔하기로는 제일가는 서주환이 이토록 부끄러워하다니?
정하연은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본디 공포영화를 볼 때 자신보다 더 겁에 질린 사람이 옆에 있으면 덜 무서워지는 법. 그런 면은 부끄러운 마음에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서주환이 새빨개진 얼굴로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녀는 이상하게도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환아.”
문득 불러보는 애칭.
“어, 어?”
발개진 얼굴로 당황하는 서주환.
정하연은 그가 왜 자신을 귀엽다며 놀려먹는 건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녀는 한걸음 내딛으며 손깍지를 끼우고 그를 올려다봤다.
“약속, 지켜줄 거지?”
“…….”
서주환은 훅 하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기껏 루시를 조용히 시켰더니 얘는 또 왜 이런단 말인가. 다시금 상기되는 기억이 그답지 않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 어, 무, 물론이지.”
은율처럼 함묵증에 걸린 것도 아니건만 말은 왜 떨려나오는 건지.
정하연이 예쁘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
“어, 어어…….”
서주환은 오랜만에 연애 초기로 돌아간 기분을 느끼며 어설피 고개를 끄덕였다.
*
이미 서로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 바.
두 사람의 소원내기는 사실상 무의미한 일이 되었다.
다만 정하연은 순수하게 그와 놀고 싶다는 마음으로 당구를 치자고 말했고, 답지 않게 순한 양이 된 서주환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큐대를 잡았다.
그렇게 포켓볼과 3구를 한 게임씩 쳤다. 그리고 놀랍게도 두 게임은 모두 정하연의 승리로 끝났다. 서주환을 만능인간으로 알고 있는 다른 여자들이 봤으면 놀랄 만큼 일방적인 승부였다.
서주환은 순식간에 공을 뺀 정하연을 보고 혀를 찼다.
“진짜 더럽게 잘 치네…….”
“아하하. 다른 건 몰라도 당구는 나한테 안 돼.”
정하연이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검지를 까딱거렸다.
그 모습이 사뭇 얄밉게 느껴졌으나 어떻게 반박할 말이 없는 게 사실이었다. 그가 ‘손재주’ 재능을 갖고 있다지만 애초에 당구는 몸보다 머리를 더 많이 쓰는 게임이다. 미세한 컨트롤을 할 수 있으면 뭐하나. 쓰리쿠션에 걸쳐서 목표점으로 도달하는 길을 보기가 힘든데.
‘머리 쓰는 게임은 영 맞지 않는단 말이야.’
특히나 3구처럼 수학적인 계산이 필요한 게임은 더욱 그랬다. 차라리 볼링이라면 ‘손재주’를 사용해서 화려한 스핀을 보여줄 수 있으련만.
한편 정하연은 안양에서 당구장 알바를 하며 당구여신이라 불린 일화가 있다. 그 오그라드는 별명의 시작은 분명 눈에 띄게 예쁜 외모 때문이었지만, 알바가 끝나갈 때쯤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외모보다 실력이 더욱 유명해졌다. 그녀에게 어떻게 수작 좀 걸어보려고 내기당구를 치자고 했던 사람들이 번번이 참패했기 때문이었다.
“연아, 초보자 괴롭히면 재밌어? 나랑 이러지 말고 걍 프로대회를 나가…….”
“에이, 그 정돈 아니야. 그리고 네가 무슨 초보자야? 너도 잘 치잖아.”
“잘 치긴 무슨.”
한때는 스스로 잘 친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친구들끼리 칠 때는 3구가 아닌 4구를 주로 쳤고, 3구에 비해 비교적 단순한 4구는 미세한 손재주 컨트롤이 빛을 발했다.
하지만 복잡한 3구로 넘어오자 신들린 컨트롤도 빛이 바랬다. 일반인 수준을 넘어가면 큐대의 컨트롤보다 지능적인 부분이 훨씬 중요해지는 게 당구란 게임이었다.
물론 서주환이 작정하고 ‘집중의 축복’을 써서 연습을 한다면 또 모를 일이었지만, 아쉽게도 그는 당구에 그만큼 흥미가 있진 않았다.
반면 본래도 당구를 좋아하던 정하연은 알바를 시작한 이후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프로들과도 종종 게임을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서주환의 시큰둥한 대답에 정하연이 입술을 삐죽이며 눈을 흘겼다. 모처럼 둘이서 노는데 이런 시큰둥한 태도라니.
“너 혹시 졌다고 삐진 건 아니지?”
“삐지긴 누가? 나 그렇게 속 좁은 남자 아니야.”
“…흐응.”
정하연은 코웃음이 나오려는 걸 콧소리로 대체했다. 그녀가 아는 서주환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밴댕이 소갈머리였다.
“알았어. 이제 4구 하자.”
“오케이.”
서주환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을 옮겼다. 사실 정하연의 생각과 달리 그는 정말로 삐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름대로 지금 이 시간을 즐기는 중이었다.
‘캬.’
그는 선공을 잡은 정하연의 뒤태를 보며 속으로 감탄을 흘렸다. 그녀는 지금 검정색 섹시한 비키니 차림이다. 이런 광경을 보고 삐지긴 누가 삐진단 말인가? 그저 대놓고 흐뭇한 표정을 보이면 괜히 경계를 살까봐서 표정관리를 했을 뿐이었다.
안 그래도 당구란 종목은 큐를 잡는 자세가 남녀를 불문하고 섹시하게 보이는 스포츠다. 한데 정하연 정도 되는 여자가 비키니를 입은 채 자세를 잡으니 어떻겠는가.
‘와, 진짜 죽인다. 누구 여자인지 뒤태 한 번 끝내주게 섹시하다.’
뒤에서 보면 엉덩이가 끝내주고 앞에서 보면 몸을 수그린 그녀의 가슴골이 훤히 보였다. 한 마디로 지루할 틈이 없었다.
서주환은 지금 당장 그녀를 덮치고 싶은 마음을 필사의 인내심으로 자제하는 중이었다.
“아, 못 쳤다. 네 차례야.”
“어, 어어.”
서주환은 큐대를 잡고 자세를 취했다. 매번 쓰리쿠션으로 쳐야하는 3구는 몰라도 빨간 공 두 개만 맞추면 되는 4구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따닥. 따닥. 딱, 쿵, 딱. 따~닥.
그는 특기인 미세 컨트롤로 연속해서 점수를 빼기 시작했다. 4구에서는 한 번 기회를 잡으면 끊임없이 점수를 뺄 수 있다. 이 때문에 정하연조차도 가끔은 서주환에게 패배를 하곤 했다.
“아, 실수했다.”
하지만 서주환은 적당히 점수를 빼다가 도중에 실수를 가장하여 멈췄다.
“뭐야, 웬일로 그걸 못 쳤어? 어려운 공 아닌데.”
“삑 났어. 초크 좀 묻힐 걸 그랬다.”
“으그. 나 칠 때 안 칠하고 뭐했어? 어쨌든 내 차례야. 비켜봐.”
“엉.”
서주환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가 구태여 실수한 척 물러선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정하연을 구경하기 위함이었다.
빨간 공 두 개가 멀찍이 떨어져 있고 정하연이 쳐야 할 노란색 수구가 당구대 중앙에 있는 형국. 거기에 하얀색 수구가 딱 붙어 있기까지.
분명 잘 치는 사람에게 그리 어려운 공은 아니지만 치는 사람의 자세가 불편하게 나올 수밖에 없는 그림이었다.
예상대로 정하연은 자세가 불편한 듯 이리저리 몸을 틀다가 결국 한 쪽 다리를 들고 큐질을 시작했다.
“오…….”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정하연의 수영복 하의가 들어 올린 다리를 따라 말려 올라가서 아슬아슬 했던 것이다.
서주환은 문득 뽀잉, 하는 환청이 들린 것 같았다. 기어코 말려 올라간 수영복 틈으로 매끈한 두덩이가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아, 이제 못 참겠다!’
구경은 이쯤 했으면 충분하다.
서주환은 이미 한껏 부풀어 오른 물건을 앞세우고 정하연의 뒤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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