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페티시가 보여-472화 (472/501)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독자님들 모두 오늘도 건강하고 즐거운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D

소원을 말해봐

서주환은 노래방 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환영하는 여자 두 명을 볼 수 있었다.

“어서 와, 오빠!”

민가희가 먼저 달려들어서 포옹을 했고.

“여기 음료수 좀 드세요.”

은율이 수줍은 얼굴로 이온음료 하나를 내밀었다.

“고마워, 율아.”

“네, 네에. 천만에요…….”

은율은 그와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모르는 모습이다. 그는 여전히 실 한 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였다.

서주환은 부끄러워하는 은율의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에게 익숙해진 여자들은 아예 무시하거나 정하연처럼 핀잔을 주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었는데 아직 때가 덜 묻은 그녀는 비교적 평범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는 괜히 장난기가 도져서 손을 앞으로 내밀고 쥐락펴락하며 물었다.

“율아, 가슴 만져도 돼?”

“네. …네?!”

무심코 고개를 끄덕인 은율이 뒤늦게 놀라며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러면서도 거부를 하진 않는다. 다만 부끄러운 듯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민가희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그가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뜨리자 품에 안긴 민가희가 으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빠, 순진한 율 언니 좀 그만 놀려.”

“재밌잖아. 작년에는 가희 너도 비슷했는데.”

“율 언니도 몇 달 지나면 나처럼 될 걸?”

기행에 당황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반복되면 익숙해지는 법이다. 그리고 사람이란 보다 강렬한 쪽에 물들기 쉬웠다. 그와 함께 지내다보면 은율의 부끄럼 많고 소심한 모습도 점차 사라질 가능성이 높았다.

“율이의 순진한 모습이 사라진다니 그건 좀 아쉬운 걸.”

“저, 안 순진한데요…….”

은율이 발개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이미 할 거 다 한 마당에 순진한 사람 취급받는 것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주환은 두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래서 너희는 무슨 내기 할 거야?”

질문에 답한 것은 민가희였다. 그녀가 히~ 하고 맹한 웃음을 짓더니 손가락 두 개를 펴들어 브이를 만들었다.

“우리는 두 사람이니까 내기도 두 개야

“으음.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어.”

“첫 번째는 나! 마음 같아선 한 시간 제한 걸어두고 작곡이나 편곡으로 승부하고 싶은데…….”

“아니, 그건 사기지. 어떻게 이겨.”

아쉽게도 그에게 ‘작곡’ 재능은 없다. 승부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민가희가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빼꼼 내밀었다.

“그럼 랜덤으로 음악을 듣고 악보 그리기는 어때? 쉼표 하나까지 누가 더 정확하게 그렸는지 승부하는 거야! 설마 이것도 안 된다고 하진 않겠지? 오빠도 악보는 그릴 줄 알잖아.”

확실히 악보를 보고 그리는 법은 언젠가 민가희에게 직접 배운 바 있다. 뿐만 아니라 기초적인 피아노 연주와 기타 연주도 그녀에게 배웠다.

하지만 교수들에게 전액지원 유학권유까지 받을 정도의 천재인 민가희가 하기에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일방적이 내기 제안이었다.

“가희 너 진짜 어떻게든 이겨먹을 생각이구나?”

“이히히. 소원 내긴데 당연하지!”

양심이 있는 거냐는 눈초리로 쳐다봐도 웃어넘기는 민가희. 어떤 방법을 써서든 이기고 말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느껴졌다.

“…알았어.”

서주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기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내심으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중 제일 쉬운 내기군.’

잠시 후 은율이 스마트폰으로 음악 앱을 열었다. 그리고 랜덤 셔플 기능으로 노래를 틀었다. 무작위로 선택된 곡이 흘러나왔다.

민가희는 즉시 펜을 들고 악보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저명한 교수들 아래에서 제대로 작곡을 배운 그녀에게 음악을 듣고 악보로 옮겨 적는 채보(採譜)는 매우 익숙한 일이었다.

한편 서주환은 여유롭게 미소 띈 얼울로 ‘절대음감(A+/A+)’의 특수능력 ‘사운드카피’를 활성화시켰다.

【사운드 카피】

▶ 효과1: 한 번 들은 곡을 완벽하게 카피할 수 있습니다.

▶ 효과2: 악기의 종류에 상관없이 카피한 곡을 연주할 수 있습니다.

※ 원곡과 다른 악기일 경우 해당 악기의 숙련도에 따라 연주 완성도가 달라집니다.

민가희의 절친한 친구인 윤슬기로부터 얻은 ‘절대음감’재능. 비록 본의 아니게 얻은 재능이지만 그 특수능력을 요긴하게 써먹을 때가 왔다.

서주환의 손이 오선지 위에서 신들린 듯 움직였다.

“완성!”

“벌써?!”

서주환이 악보를 그리는 속도는 당연히 민가희보다 빠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곡을 듣고 음감을 해석해서 악보를 그리는 게 아니라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의 악보를 그대로 베꼈을 뿐이었으니까.

“율아, 원본 띄워줘. 누가 얼마나 정확하게 그렸는지 비교하게.”

“마, 맞아. 나도 이제 완성했어. 어차피 빨리 그리기가 아니라 누가 더 정확하게 그리는지 승부하는 거였으니까……!”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민가희가 막 완성한 악보를 들며 말했다.

하지만 곧 그녀의 얼굴은 충격으로 물들었다. 어떻게 된 건지 서주환의 악보가 쉼표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원본과 100%의 일치율을 보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한 번만 듣고 바로…….”

자타공인 작곡천재 민가희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악보 또한 95%이상의 높은 일치율을 보였지만 서주환과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은율도 놀란 얼굴로 서주환을 바라봤다.

“오, 오빠도 작곡 배운 거예요?”

“아니. 가희한테 배운 게 전부야.”

그 말에 서주환을 가르친 당사자인 민가희가 발작하듯 소리쳤다.

“그런데 어떻게? 나는 천재가 아니었던 거야?! 사실은 오빠가 천재?!”

그리 말하는 민가희의 얼굴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무조건 이기리라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결과에 자존심이 많이 상한 모양이었다.

서주환은 어쩐지 미안해져서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했다.

“난 작곡은 못해. 그냥 베끼는 것만 잘하는 거지. 가희 너 천재 맞아.”

“정말……? 아닌 것 같은데…….”

멘탈이 나간 민가희가 멍하니 중얼댔다.

서주환은 거듭 그녀의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당연히 천재지. 베끼는 거랑 새로 만드는 건 전혀 다르잖아. 필사랑 작문이 다른 것처럼. 오케이?”

“그, 그래. 청음 능력은 중요하지만 작곡의 전부는 아니니까!”

“그럼그럼. 전혀 기죽을 필요 없어.”

“마, 맞아. 가희는 벌써 리액트랑 곡 계약도 했잖아. 그쪽에서 제발 전속으로 와달라고 매달리고 있는 걸?”

서주환과 은율은 한동안 푸른 머리빛깔처럼 짜져버린 민가희를 위로해야했다.

*

서주환은 민가희가 조금 기운을 차린 후 물어봤다.

“그래서 결국 가희가 나한테 말하려던 소원은 뭐였어?”

“제가 만든 곡으로 오빠가 노래를 내줬으면 했어요오…….”

어쩐지 얌전해진 민가희가 존댓말로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이내 그녀는 자조어린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천재인 오빠가 저 같은 범인이 만든 곡을 부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시에오. 지금까지 오빠가 귀찮다고 거부했던 이유가 있는 거죠. 드디어 제 주제를 깨달았어요오…….”

“가, 가희야. 너는 천재 맞다니까? 가희야아……!”

은율이 어쩔 줄 몰라하며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은 민가희를 위로했다. 하지만 의기소침해진 민가희는 쉽게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민가희는 특별한 부모님을 둔 이유로 주변의 기대를 받다가 한 번 좌절한 바 있다. 그러나 이후 보컬에서 작곡으로 전공을 바꾸고 찬란한 재능을 펼치며 날아올랐다. 한데 그 재능이 사실은 별 것 아닐 수도 있다는 충격이 그녀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천재가 아니면 어때서?”

“…네?”

서주환은 피식 웃으며 민가희의 파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음악 그만 둘 거야?”

“그, 그건 아니지만…….”

서주환은 시무룩 풀이 죽은 민가희에게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희야, 네가 천재이냐 아니냐는 중요한 게 아니야. 네가 얼마나 음악을 좋아하느냐가 중요한 거지.”

“…….”

“난 재능이 없었어도 글을 계속 썼을 거야.”

“…치. 그걸 어떻게 알아요? 오빠는 뭐든 잘하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예요. 막말로 한 달에 백만 원도 벌기 힘든데 계속 글을 썼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

민가희는 보기 드물게 반항적인 태도로 말했다. 고리타분한 서주환의 말이 쉽게 내뱉는 말로 들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서주환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담할 수 있어.”

“말도 안 돼.”

“뭐, 밥벌이도 못할 정도면 직업으로는 못 삼겠지. 하지만 취미로라도 계속 썼을 거야. 아니, 쓸 거야. 내가 좋아하는 거니까.”

그의 말은 전에 없이 단호했다. 자신의 말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확고한 어조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서주환은 회귀 전 관리비 내는 것조차 힘들어서 금연했던 때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반대로, 나한테 너보다 대단한 재능이 있어도 나는 작곡에 목숨 걸고 할 마음 없어. 별로 흥미 없거든.”

“…오빠, 엄청 재수 없어요.”

“알아. 그런데 재수 없다는 말, 가희 너도 자주 듣는 말 아니야?”

“윽.”

민가희는 뜨끔했다. 딱히 주변에 자랑을 하고 젠체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재수 없다고 욕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다.

서주환은 픽 웃으며 그녀의 볼을 잡고 짜부라트렸다.

“네가 천재라서 그래.”

“우으으. 좀 전까진 천재인 건 중요하지 않다면서!”

“그랬나? 어쨌든 좋아하는 일이랑 재능이 일치하면 금상첨화잖아. 좋은 게 좋은 거지.”

“치. 놔줘요. 저 이제 괜찮아요.”

테이블에 엎어졌던 민가희가 몸을 일으켰다.

서주환은 짐짓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귀찮아라. 하여간 가슴만 큰 것들은…….”

“뭐예요? 너무해! 언제는 내 가슴이 최고라면서!”

“자, 이제 율이랑 놀아볼까? 율아, 너는 노래로 한댔지?”

“네, 네에!”

“이씨. 나 무시하지 마요!”

민가희가 입을 삐죽거리면서 팔짱을 껴왔다. 커다란 가슴이 팔뚝을 감쌌다.

서주환이 작게 감탄했다.

“오, 가슴 천재…….”

“그게 뭔데요!”

금세 기분이 풀린 민가희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