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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한 편 더 있습니다
특별한 사연
정하연이 이야기를 끝마쳤다.
그녀는 복잡한 가정사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했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얻은 트라우마는 밝혔다. 이후 서주환을 계기로 얼마 전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된 것까지 말이다.
이후 유지경은 마지막에 말하고 싶다며 차례를 건너뛰었고, 자연스럽게 은율이 차례를 이어받았다. 여자들 중 일부는 은율이 전직 아이돌이었다는 말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 그렇게 방에 틀어박혀 있었지만… 지금은 오빠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은율은 정신적으로 몰려서 고생하는 중 서주환을 통해 구원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포기했던 가수의 꿈을 다시 찾기 위해 불철주야로 노력하는 중이었다.
“벼, 병원은 지금도 다니고 있어요.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함묵증이나 대인기피증이, 완전히 고쳐진 건 아니거든요. 사, 사실은 이번 여행에 따라온 것도 용기를 낸 거였는데… 다들, 좋은 분들이라서 다행이에요. 앞으로도, 잘 지내고 싶어요.”
민가희가 은율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
“언니는 재능 있어. 그러니까 꼭 성공할 수 있을 거야. 천재 작곡가가 보증하는 거니까 틀림없어!”
“으응. 고마워, 가희야.”
“나도 응원할게, 율아.”
“고, 고마워요, 하연 언니.”
다른 여성들도 저마다 응원의 말을 건넸다. 한 명의 남성을 두고 얽힌 기묘한 관계였으나 그렇기에 일반적인 경우보다 감정의 교류가 짙었다. 좋건 싫건 어디 밝힐 수도 없는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잠시 후 모두의 시선이 유지경에게로 향했다. 아직 이야기를 하지 않은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시선을 받은 유지경은 어쩐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다들 특별한 사연이 있네. 부럽다.”
그렇게 서두를 뗀 유지경은 돌연 정하연을 빤히 바라봤다. 알 수 없는 시선에 정하연이 움찔하는 순간 유지경이 입을 열었다.
“언니, 미안.”
“어? 갑자기 뭐가?”
“아까 그냥 넘어갔는데, 사실 언니보다 내가 먼저 오빠랑 만났어. 아, 아니다. 만난 건 언니가 먼전데 섹스는 내가 먼저 했어.”
“으응?”
정하연의 얼굴이 어리둥절해졌다. 이내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나보다 먼저라니? 내가 엠티 가서 사귀었는데 그 전이라면…?”
정하연이 당황한 얼굴로 서주환을 돌아봤다. 그녀는 이제껏 자신과 서주환이 헤어진 후 유지경이 맺어진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유지경이 먼저라니?
그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주환아, 너 설마 나랑 사귀고 있을 때도 지경이랑…?”
서주환은 화들짝 놀라서 손사래를 쳤다. 당시에 그가 인간관계에 대한 트라우마에 잡아먹혀 몹쓸 짓을 하긴 했지만 몰래 양다리를 걸치진 않았다.
‘아니, 지금은 문어다리긴 하다만.’
다행히 해명은 유지경이 해주었다.
“그런 거 아니야, 언니. 저 오빠, 언니랑 사귀고 있을 때는 나 상대도 안 해줬어.”
“그, 그래?”
“응. 언니가 좋다면서 나 따먹고 버렸거든.”
“뭐?!”
정하연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녀만이 아니라 둘러앉은 모든 여자들의 시선이 서주환에게 집중되는 순간이었다.
서주환은 순간 그 눈빛들에 떠오르는 감정을 읽고 기겁한 얼굴로 해명했다.
“아, 아니야! 아니라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 그런 쓰레기… 아니, 맞긴 한데 그게 아니라…….”
생각해 보니까 해명을 해도 쓰레기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불에 타느냐, 안 타느냐 정도의 차이나 있을까?
그때 유지경이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농담이야, 농담. 다들 진정해.”
“…농담?”
“뭐, 완전히 거짓말은 아닌데, 그때 나랑 오빠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 그냥 서로 즐기는 관계였거든. 사실 먼저 덮친 쪽도 나고.”
“어? 지경이 네가 먼저?”
“응. 개강 첫날에 만취해서 전봇대에 머리 박고 토하는 중에 오빠가 주워줬어.”
“…집에 데리고 갔다는 거지? 그거 그냥 개수작…….”
“아니, 놀랍게도 저 오빠 나 얌전히 잠만 재우더라. 이불까지 따로 내어주고.”
자리에 있는 모두가 경악했다.
“서주환이?”
“오빠가?”
“얌전히 잠만 재웠다고?”
“안 덮치고?”
서주환은 대체 이 여자들이 자신을 뭐로 보고 있는 건가 싶어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아무리 색을 밝혀도 취한 여자를 억지로 덮치는 짓을 한 적은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변명할 처지가 아닌 것도 사실.
‘그냥 닥치고 있자.’
괜히 입 열어봐야 추가 공격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다. 워낙 업보가 많아야지.
이내 여자들이 진정하고 유지경의 말이 이어졌다.
“좀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수아랑 언니들이 부러워. 다들 오빠랑 얽힌 특별한 사연이 있으니까.”
유지경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말했다.
“누구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소꿉친구. 누구는 살인범에게서 오빠가 구해줬고, 또 누구는 좌절하고 있는 와중 재능을 찾아줬어. 특히 하연 언니는 첫 연인이라는 특별한 포지션이고, 율 언니한테 오빠는 거의 구세주 쯤 되나?”
“…….”
“그에 비해서 난 그냥 어쩌다 보니까… 섹스란 걸 해보고 싶던 와중에 기회가 와서 오빠랑 했어. 잘생긴 데다 몸도 좋았거든. 착해 보여서 뒤탈도 없을 것 같았고. 특별한 사연 같은 건 없어.”
그 말대로 유지경은 그럴 듯한 사연이 없었다. 어찌 보면 그녀와의 첫 관계는 클럽에서 만난 민가희보다도 가벼웠다.
유지경은 그처럼 가볍게 시작한 관계를 종종 후회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진지하게 고백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정하연 대신 자신이 그의 첫 연인이었을지도 모르는데, 하는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이제 와서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
유지경은 쓴 웃음을 지우고 덤덤하게 말했다.
“그래도 내가 수아랑 언니들보다 오빠를 덜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 꼭 특별한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니까. 그리고 특별하게 시작하진 않았어도 오빠는 나한테 이미 특별한 사람이니까.”
그리 말한 유지경은 술기운으로 발그레한 얼굴을 들어 서주환을 바라봤다. 그리고 홍조 깃든 얼굴과 달리 말간 눈으로 그를 보며 장난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치, 집사?”
서주환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을 툭툭 두드렸다.
“당연하지. 이리 와, 너구리.”
“너굴.”
한수아와 정하연 사이에 있던 유지경은 날 듯이 달려와서 서주환의 무릎 위에 앉았다. 그녀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앉은 채로 그를 올려다봤다.
“너굴?”
서주환은 픽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둘러앉은 여자들과 천천히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여기 나한테 특별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어. 그랬으면 같이 여행 오지도 않았겠지.”
“…….”
“지경이 너도 쓸 데 없는 거 신경 쓰지 마. 사연이라고 한다면… 뭐, 그건 넘어가자.”
“? 왜 말을 하다 말아. 궁금하게.”
“시꺼. 무릎 위에서 내려오고 싶어?”
“헐. 치사하게.”
불만스럽게 볼을 부풀리는 유지경.
서주환은 다시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회귀 전 일을 말해줄 수도 없고 참.’
그녀는 평생 모를 것이다. 어쩌면 이 중 가장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라는 것을. 누가 뭐래도 그녀는 회귀 전 그의 유일한 친구였으니 말이다.
서주환은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박수를 짝짝 쳤다.
“한 명씩 말했으니까 이 얘기는 여기서 끝내자. 듣고 있느라 민망해 죽을 뻔했어. 어떻게 그런 얘기들을 내 면전에서 하는 거야?”
그 말에 최미화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우리가 좋아하는 이유를 말했으니까 너도 한 명씩 말해줄 차례 아니야?”
“으엑. 나 부끄러워서 죽어. 조금 전에 말한 게 최선이었어.”
“뭘 말했다고?”
“말했잖아, 너희는 나한테 특별한 사람이라고.”
거기까지 말한 서주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이제 정리하자!”
너무 민망해서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차라리 욕을 해줬음 싶을 정도. 오랜만에 화끈 달아오른 얼굴 때문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
서주환을 비롯한 일행들은 자리를 파하고 각자 객실로 돌아갔다. 아직 자정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첫 날부터 너무 달릴 필요는 없었다.
그는 대충 샤워를 끝낸 후 침대에 몸을 뉘였다. 그렇게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좀 전에 들었던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릴레이로 고백을 받은 기분이야.”
뭐랄까. 기분이 좋긴 한데 민망하고 부담스러워서 가만히 듣고 있는 게 상당히 고역이었다. 항상 상대방을 곤란하게 만드는 건 그의 역할이었거늘, 술에 취한 여섯 명의 여자들은 그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으아아아!’
그는 내적 비명을 지르며 침대를 데굴데굴 굴렀다. 차라리 내가 쓴 소설 낭독회를 해라! 차라리 그게 덜 부끄럽…아, 그건 아닌가?
그렇게 좌우로 세 번쯤 굴러다녔을 때였다.
띠링!
[성(性)에 관한 강력한 행운이 개입합니다.]
익숙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선반에 올려둔 폰이 진동했다.
“…가브리엘라?”
전화를 받자 액정 안의 가브리엘라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챠오. 주환, 잘 지냈어요?
“안녕, 가브리엘라. 나야 언제나 잘 지내고 있지.”
- 그거 다행… 어? 집이 아니네요? 어디 놀러갔어요?
“친구들이랑 여행 왔어.”
적당히 에둘러 답을 했다.
한데 가브리엘라는 무언가 알아챈 듯 샐쭉한 표정으로 콧소리를 냈다.
- 흐응. 친구라면, 주환의 애인들 말이죠?
눈치가 귀신이다. 애인이면 애인이지 ‘들’인 건 어찌 알았단 말인가?
그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알았어? 또 타로카드야?”
- 아뇨. 그냥 감이에요.
“무섭네. 점술가의 감은.”
- 무서운 김에 몇 개 더 맞춰볼까요? 대충 누구랑 갔을지 짐작이 가는데.
“아니, 하지 마. 진짜 무서워지려고 하니까.”
- 후후. 아무튼 부럽네요. 제가 한국에 있었으면 끼워달라고 땡깡이라도 부렸을 텐데.
“땡깡? 네가?”
가브리엘라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 선정이었다.
화면 속 그녀가 후후 웃으며 말했다.
-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잖아요.
“속담까지 인용하고, 한국어 실력이 더 늘었네.”
- 좋아하는 남자가 한국인이라서요.
“…….”
- 어머? 그 표정 뭐예요?
가브리엘라가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서주환은 손을 들어서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내 표정이 어땠는데?”
- 사춘기 소녀처럼 부끄러워하는 표정이었어요. 음흉한 주환답지 않게.
“음흉하다니… 부정하지는 않겠다만.”
- 어쨌든 진귀한 걸 봤네요. 기분이 좋아졌어요.
“그거 참 축하할 일이구만.”
지금 표정이 어떨지는 보지 않아도 알겠다. 무척 떨떠름한 얼굴일 것이다.
“그보다 요즘은 어때? 아직도 가문에서 간섭이 심해?”
- 아, 그거요. 훗.
가브리엘라가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누군가의 미소와 굉장히 비슷했다.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요즘 여자들이 부쩍 저런 미소를 많이 짓는 것 같았다.
- 한 번 다 뒤집어엎었더니 잠잠해졌어요. 결국 주도권은 제가 쥐고 있는 거거든요.
“하하…….”
- 뭐, 저도 가문의 위광을 많이 덕본 편이라 완전히 멋대로 굴 수는 없지만요.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정략혼으로 팔려갈지도 모르죠.
“예언이 건재한 이상 그럴 걱정은 없는 거 아니야?”
- 그야 뭐. 그런 의미에서 조만간 한국에 방문할게요. 요즘 점술능력이 조금 떨어진 것 같거든요.
그와 교접을 통해 능력을 회복하겠다는 뜻이다.
서주환은 픽 웃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그냥 솔직하게 내가 보고 싶다고 말하시지.”
- 어머, 뻔뻔도 하셔라. 좀 전엔 그렇게 부끄러워하더니.
“시끄러. 부끄러워한 적 없어.”
- 후후. 그렇다고 치죠. 뭐, 보고 싶은 거야 당연한 거고요. 한국에 가면 놀아줄 거죠? 늦어도 겨울쯤에는 갈 생각인데.
“친구가 멀리서 오는데 놀아주는 것 정도야.”
- 친구라… 우리 슬슬 다음 단계를 밟아도 되지 않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친구 사이는 이미 넘은 것 같은데.
“네가 친구 해달라면서?”
- 정확히는 친구부터 시작하자고 했죠. 친구로 만족할 생각은 없어요. 주환도 알고 있잖아요?
언제부터였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가브리엘라는 대담해졌다. 감정을 숨기는 법 없이 직구로 부딪혀 오는 통에 마냥 장난스럽게 대처하기가 힘들었다.
“…알았으니까 오기나 해.”
- 놀아주기로 약속한 거예요?
“그래. 데이트 하는 게 뭐 어렵다고.”
순간 가브리엘라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이내 그녀가 기쁜 듯 웃더니 말했다.
- 데이트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럼 또 연락할게요, 주환.
“그래.”
- 가끔은 먼저 연락해줘요.
“알았어.”
그렇게 통화가 끝나고 몇 분 뒤.
가브리엘라에게 메시지가 왔다.
- 대화하는 게 즐거워서 깜빡하고 말을 못했네요.
- 선택의 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어요. 변화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해요.
“변화를 맞이할 준비라.”
서주환은 담담히 그 문구를 되뇌었다. 짐작하고 있던 바라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남은 S급 결정석이 하나였지.’
열 개가 모이는 순간 선택의 순간이 온다. 그리고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선택과 변화가 정확히 무얼 뜻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이미 되어 있었다.
그보단 이어진 문자가 더 신경 쓰였다.
- 내일은 별이 보이는 천장 아래에서 주무세요. 귀인이 찾아올 거예요.
“별이 보이는 천장 아래?”
무얼 뜻하는 걸까. 그리고 이곳엔 그와 여자들밖에 없거늘 무슨 귀인이 찾아온다는 걸까.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순간이었다.
똑똑.
누군가 노크를 했다.
“…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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