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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독자님들 모두 건강하고 즐거운 주말 되시기를 바랍니다 :D
특별한 사연
“너희들은 어쩌다 이 새끼한테 따먹혔니?”
“…….”
최미화의 한 마디는 신나게 먹고 마시던 자리에 정적을 불러왔다.
‘아이고, 두야.’
서주환은 갑자기 골이 아파져서 이마를 붙잡고 탄식했다. 술에 취한 최미화가 무언가 말을 할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렇게 적나라할 줄은 몰랐다. 그래봐야 섹드립을 날리거나 19금 게임을 하자고 할 줄 알았거늘.
“아, 미안. 그게 아니라, 어쩌다가 주환이를 만나게 됐는지 물어보려는 거였어. 그리고 왜 좋아하게 된 건지.”
아직 수습할 정신이 남아 있던 걸까. 아니면 정말 말이 잘못 나왔던 걸까. 어쨌든 순화된 표현에 정적이 풀어졌다. 아니, 사실은 정적도 아니었던 것 같다. 이미 그를 제외한 모두는 적잖게 취한 상태였다.
최미화의 질문에 가장 먼저 답한 건 한수아였다. 알딸딸하게 취한 한수아가 발그레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으음. 저는 있죠. 오빠를 ‘만났다’고 표현하기가 애매해요. 왜냐면 살면서 환이 오빠가 없던 적이 없으니까.”
“소꿉친구라고 듣긴 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오래 된 사이였구나.”
최미화가 다시 양주를 홀짝이며 물었다. 하루 동안 꽤 가까워졌기 때문인지 한 결 편해진 호칭과 말투였다.
한수아는 그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오래 됐다…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저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오빠랑 만났거든요.”
알 수 없는 소리에 사정을 모르는 여자들의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엄마랑 아빠는 환이 오빠네 부모님이랑 아는 사이에요. 제가 아직 엄마 뱃속에 들어서기 전부터요.”
서주환과 한수아의 부모님은 그가 아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냈다. 지금이야 이웃과의 교류가 없는 시대지만 20년 전에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 그때는 이사를 하고 떡을 돌리던 문화가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오빠는 제가 아직 저이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셈이에요. 기억이 없을 때부터요.”
술을 마셔서 취했기 때문일까. 간단한 이야기가 뱅글뱅글 돌아갔다. 한수아는 자신이 한 말이 맞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기울이더니 그를 돌아봤다.
“그치, 오빠?”
그에 서주환은 애매한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도 세 살 때라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쨌든, 그런 거예요!”
그리 말한 한수아는 무언가 대단한 걸 말했다는 듯 에헴 하고 가슴을 내밀었다. 누구를 따라하는 건지 입꼬리도 한껏 올리고 주변을 쓸어보는 모양새가 무척 뻐기는 태도였다.
서주환은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요란이라는 생각에 헛웃음을 흘렸다.
“그게 뭐 대단한 자랑이라고.”
한데 다른 여자들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그녀들은 저마다 감탄하거나 부럽다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한수아가 다시 재잘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환이 오빠는 어렸을 때부터 저랑 주희를 돌봐줬어요. 아, 주희는 오빠 친동생인 거 알죠? 어쨌든 오빠는 제 옆에 있는 사람인 게 당연했고, 좋아하게 되는 것도 당연한 사람이었어요. 부끄러워서 고백은 좀 늦게 했지만.”
그 말에 반응한 건 유지경이었다. 그녀가 콧소리를 내며 삐죽하게 웃었다.
“작년 이맘 때 말이지?”
“응응. 그러고 보니 그때는 산이 아니라 바다였넹.”
“칫. 그때 허락하는 게 아니었어.”
유지경이 짐짓 후회된다는 듯 말했다. 당시의 서주환은 이미 정하연과 유지경을 동시에 만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관계가 완벽하게 정립된 시기가 아니었기에 다소 늦게 마음을 전한 한수아는 두 여자의 암묵적인 동의를 받아야 했었다.
한수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지경이 심술쟁이. 하나도 그렇게 생각 안 하면서.”
“네가 뭘 알아. 그렇게 생각하거든?”
“흥. 그래도 이미 늦었어.”
“이 꼬맹이가.”
“너구리.”
“땅꼬마.”
“노예 너구리.”
“절벽 꼬맹이.”
“우쒸!”
“뭐이쒸!”
두 꼬맹이가 의미 없는 투닥거림을 시작했다.
“둘 다 그만 안 하면 화낼 거야. 참고로 나 지금 술 마셔서 힘 조절 잘 안 돼.”
“…….”
물론 언제나처럼 정하연에게 제압당했다.
어깨에 살포시 얹어진 정하연의 손길에 한수아가 딸꾹질을 하며 최미화를 돌아봤다.
“그, 그러는 미화 언니는요? 어쩌다 환이 오빠를 좋아하게 됐는데요?”
“나? 나는…….”
본인이 했던 질문을 되돌려 받은 최미화.
그녀는 과거를 회상하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양주를 한 모금 홀짝이더니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주환이는 나한테 거의 백마 탄 왕자님이었어.”
“…넹?”
“백마… 뭐요?”
예상치 못한 말에 여자들이 눈을 끔뻑였다.
백마 탄 왕자님이라니.
최미화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최미화에게는 서주환이 정말로 그렇게 보였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너희 작년 초에 토막 살인범 사건 알아? 경찰이 아니라 휴가 나온 군인이 해결한 사건인데.”
뜬금없는 말에 대부분의 여자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반면 한수아는 아! 하고 탄성을 발했다.
“환이 오빠가 잡은 살인범 말하는 거예요?”
그제야 다른 여자들도 하나 둘씩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오빠한테 들은 적 있어요.”
“그러고 보니 그 사건 네가 해결했다고 그랬지?”
“맞다. 술 마실 때 이 얘기 들었었다. 같이 있던 슬기도 엄청 놀랐었어.”
한편 이야기를 처음 듣는 은율은 휘둥그레 눈을 떴다.
“오, 오빠, 살인범도 잡았었어요?”
“어, 그게 어쩌다 보니까.”
서주환은 쑥스럽게 웃었다. 생각해 보면 그런 일도 있었다. 그리고 당시 범인에게 잡혀있던 피해자는 다름 아닌…….
“그때 나는 살인범한테 죽기 직전까지 갔어. 그걸 주환이가 구해줬고.”
“?!”
충격적인 발언에 또 한 차례 소란이 일었다.
이내 진정한 여자들이 가지각색의 반응으로 서주환과 최미화를 번갈아봤다.
“백마 탄 왕자라는 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네.”
“으와아, 이건 인정. 안 반할 수가 없었겠다.”
“아하하. 사실 구해줬을 때는 너무 무서워서 반하고 뭐고 할 틈도 없었어.”
결정적인 건 오히려 이후의 만남이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계약하고자 하는 작가에게 컨택을 넣었고, 그렇게 연결 된 사람이 바로 서주환이었다.
“업무 반, 팬심 반으로 컨택을 넣었는데, 그 작가가 날 구해준 사람이었어. 이 정도면 운명이다 싶었지.”
“와. 그렇게 생각할 만하네요.”
“그럼 언니가 먼저 꼬신 거예요?”
“그건 아니야. 마음은 있었지만 내가 누굴 어떻게 꼬실 정도로 능숙한 사람은 아니었거든. 애초에 연애 같은 거 해본 적도 없었고… 주환이 얘가 먼저 꼬시길래 넘어갔지. 칵테일 바 가서 꼬셨었지 아마?”
최미화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그를 돌아봤다.
서주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당시 야한 이름의 칵테일을 들먹이며 작업을 걸었던 게 생각났다.
그때 정하연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저 그때 미화 언니 봤어요.”
“?”
“칵테일 바 안양에서 갔었죠? 주환이 얘가 술 취한 언니 부축해서 모텔 들어가는 거 봤어요.”
“그, 그걸 봤었어? 주환이 넌 알고 있었어?”
최미화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가 정하연과 두 번째로 만났을 때였다.
서주환의 긍정에 최미화는 설마 하는 기색으로 눈을 크게 떴다.
“그때부터 하연이랑 사귀고 있었던 거야? 그럼 애인 있던 상태에서 나를…….”
“아, 그건 아니에요. 그냥 담배 피우다 우연히 얼굴 한 번 본 게 다였어요.”
“맞아. 그때는 서로 이름도 몰랐어.”
그 말에 최미화는 어쩐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그럼 여기선 내가… 네.”
“네? 언니, 뭐라고 했어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그때 주환이 얘랑 모텔 들어가고… 다음은 말 안 해도 알겠지? 얘가 워낙 잘하잖아. 자존심 상하지만 푹 빠졌지 뭐.”
뭘 잘한다는 건지 알아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여자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거나 부끄럽게 웃으며 서주환을 쳐다봤다.
그러던 중 민가희가 이렇게 서두를 뗐다.
“그럼 순서상으로는 미화 언니 다음이 저네요? 제가 2월 말에 만났으니까.”
민가희와 만난 곳은 홍대 클럽이었다. 당시의 그녀는 주변의 관심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고 자신의 재능에 회의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중 소울메이트인 윤슬기의 손에 이끌려 생애 처음으로 클럽에 갔다가 서주환을 만났다.
“그때 오빠가 그러더라고요. 노래가 좋은 거냐고, 음악이 좋은 거냐고. 그리고 뜬금없이 작곡은 어떠냐고 했는데…….”
그 후 속는 셈 치고 손을 대기 시작한 작곡이 삶을 바꿨다. 그녀는 노래보다 음악을 만드는 데 재능이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재성을 드러냈다.
“오빠는 클럽에서 만난 것치곤 너무 좋은 사람이었어요. 진심으로 위로해준 건 물론, 인생 진로까지 바꿔줬을 정도니까요.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실망하는 시선들에 지쳤었는데… 지금은 너무 즐거워요. 작곡하는 거, 재미도 있고, 적성에도 맞고, 재능도 인정받았어요. 요즘은 교수님들이 어떻게든 유학 보내려고 난리일 정도로요.”
유학이라는 단어에 민가희의 옆자리에서 경청하고 있던 은율이 화들짝 놀랐다.
“가, 가희 유학 가…?”
서주환도 눈을 크게 뜨고 민가희를 바라봤다. 그녀의 유학 건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민가희는 심각해진 분위기를 보고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유학 안 가요! 오빠가 여기 있는데 제가 왜요? 음악은 한국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어요.”
“…….”
서주환은 눈을 내리 감으며 술잔을 들었다. 언젠가 정하연이 어학연수를 위해 유학을 고민 중이라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의 정하연도 지금의 민가희처럼 그와 같이 있고 싶다는 이유로 유학을 포기했었다.
‘내가 두 사람의 앞길을 방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정하연과 민가희 두 사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수 있었다. 그녀들의 재능을 일깨워준 건 그였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재능을 묶어두고 있는 것 또한 그일지 몰랐다. 만약 그녀들이 그에게 얽매여서 제 능력을 다 펼치지 못한다면…….
서주환이 고민에 잠긴 사이에도 여자들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최미화가 최초로 묻고 한수아가 답한 질문은 어느덧 한 명씩 과거를 회상하며 공유하는 자리가 되어 있었다.
“가희가 2월이면 다음은 나네. 내가 얘랑 사귀었던 게 3월이었으니까.”
정하연의 말에 서주환은 움찔하며 유지경을 쳐다봤다. 사실 먼저 관계를 가지게 된 건 정하연이 아니라 유지경이었다.
하지만 눈이 마주친 유지경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입모양으로 말했다.
‘난 이따 말할 거야.’
서주환은 뭔가 이유가 있겠지 싶어 티 나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하연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나는 한 번 사귀었다가 헤어졌었는데…….”
나직한 목소리 옆에서 모닥불이 타닥 불씨를 날리며 타들어갔다. 발갛게 물든 밤. 여자들은 한 명씩 자신의 만남을 이야기하며 경청하고 있었다.
만남의 당사자인 서주환은 복잡한 표정으로 술을 마셨다.
‘분위기가 왜 이렇게 됐지…?’
여행을 시작할 때만 해도 야하고 질펀하게 놀아날 생각이었는데 어느덧 ‘어쩌다 서주환을 좋아하게 됐는가’ 에 대한 회상의 장이 되었다.
민망해서 죽어버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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